기도! 기도! 그리고 또 기도!!!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 아침 큐티는

골로새서 4 1-9절이었습니다.

문맥을 생각하면서

자세히 읽어보면

4 1절은 3장으로 가는 것이 맞습니다.

그리고 나면

4 2절이 오늘 본문의 첫 번째 구절이 됩니다.

아침에 성경을 펼쳐서 큐티하면서

저는 4 2절만 갖고 묵상했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씀 드리면

뒤로 더 이상 나갈 수 없을 만큼

4 2절 한 구절이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Devote yourselves to prayer,

keeping alert in it with an attitude of thankdgiving.

이 말씀은 교회에 주셨습니다.

너희들(yourselves)”에 해당하는

복수형 동사가 쓰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기도가 부족합니다.

장소 때문에 새벽기도,

금요 심야기도를 갖지 못한 지 꽤 되었습니다.

이제 미국교회 목사님께서

이번 주에 부임하시는데

교회를 자유롭게 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에

마음대로 기도할 수 있는

기도처가 생기기를 간절히 간구합시다.

오늘 말씀에서

기도에 온 힘을 기울이라고 했습니다.

기도에 온 교회가 헌신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기도가 교회의 힘이고,

복음 안에서 바르게 세워지는 비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

우리 각자에게도 마찬가지로

기도는 생명줄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이

말씀에 뿌리를 내리면 건강해 지고

흔들리지 않습니다.

말씀 위에

기도가 합쳐지면

신앙이 하늘로 이어집니다.

신앙이든, 세상에서의 삶이든

갈팡질팡한다면

우리의 길을 비춰주는

말씀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힘이 들고 축쳐져 있다면

하늘로 연결되는

기도가 끊기거나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기도에 항상 힘쓰라고 가르쳐줍니다.

기도에 우리의 목숨을 걸라(devote yourselves)는 말씀입니다.

기도에 깨어있으랍니다.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하는데

호흡을 멈추면 생명을 잃어버리듯이

기도를 멈추면 영적 생명이 다하기 때문입니다.

감사함으로 기도하랍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을 때,

세상의 눈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눈을 가졌을 때

비로소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마음으로 기도하라는 깨우침입니다.

기도합시다.

영혼의 호흡을 멈추지 말고 기도합시다.

무릎 꿇고 골방에서 기도하고,

잠시 일손을 멈추고 기도하고,

자녀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고,

운전하면서 앞을 바라보면서 기도하고

쉬지 말고 기도합시다!!!

기도 기도 그리고 또 기도합시다.

우리의 호흡을 따라서 기도하고

우리의 삶이 기도가 되도록 만듭시다.

할렐루야!

하나님!

서머나 식구들의 삶의 모습이 힘겹습니다.

때로는 신앙을 지탱하기도 힘들만큼 어렵습니다.

그때도 기도할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우리 교회에, 모든 성도님들의 삶에

기도가 살아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샬롬

하목사 올림

(2010.9.23 메일 목회서신)

사도 바울의 기도

지난 설교에서 말씀드린 대로, 앞으로 두 달여 매주 주보에 나오는 큐티 본문(첫 아침을 주님과 함께)가운데 하나를 갖고 주일설교를 하게 될 것입니다. 주중에 큐티를 꼬박꼬박하시면, 주일 설교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은혜를 받고 말씀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기회를 누리시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주보에 실린 본문을 갖고 각자 마음에 정하신대로 경건의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린 신앙은 심지가 견고해서 흔들리지 않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평강에서 평강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시간이 참 빠르게 흘러갑니다. 어느덧 또 다시 팔월한가위가 되었습니다. 저는 미국에 와서 보름달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공부할 때 밤늦게 도서관에서 집에 올 때면 쟁반같이 둥근 보름달을 보면서 고향생각, 부모님생각, 그리고 달의 모양이 변해갈 때마다 시간이 흘러가고 있음을 감지했습니다. 보름달이 왜 그리 빨리 뜨는지 그때도 달을 보면서 시간의 흐름을 절감했습니다. 혹자는 인생을 강물에 비유합니다. 흘러가는 강물을 막을 수 없듯이 흘러가는 인생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흘러가는 강물위에 자신의 모습이나 업적을 각인시켜 놓고 싶어 합니다. 물론 그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지 나중에는 깨닫게 되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강물을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께 몸을 맡기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전도서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분복(分福)을 누려야 합니다. 그것이 행복이요 축복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기도 가운데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할 때 깨닫게 되는 하늘의 진리이기에 큐티가 그토록 중요합니다. 올 하반기 우리 모두 말씀과 기도에 진력합시다.

오늘 본문은 골로새 교회를 향한 바울의 기도입니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의 제자인 에바브라가 세운 것으로 추정합니다(골1:7).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방문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골로새 교회와 그곳의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교회는 기도로 세워집니다. 비록 우리 교회를 와보지 않았어도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는 분들이 많이 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또한 우리들 역시 주님의 교회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골로새 교회를 향한 바울의 기도는 요즘 우리 세대의 기도와 차이가 있습니다. 바울의 기도 속에서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간구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대신에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의 신앙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믿는 신앙이 모든 삶의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들은 우리들의 인생길과 하나님의 사역에 필요한 경우 부가적으로 채워지게 마련입니다. 여기서 기도의 우선순위가“신앙”에 있음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골로새 교회를 향한 바울의 기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것에 온 힘을 쏟게 하시고, 2) 범사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게 하시고, 3) 빛 가운데서 거룩한 성도로 부르심을 받고 기업을 얻은 것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사도바울의 기도는 우리들이 따라야 할 중보기도의 모범입니다. 우리들 역시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바울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집중된 기도를 통해서 신앙과 삶이 하나님께 드려지고, 그 안에서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성도의 삶을 누릴 수 있음을 꼭 기억합시다.-河-

어떤 힘으로 사십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설교에서

주보에 있는 성경구절을 갖고

꼭- 큐티하시기를 부탁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말씀과 기도 가운데

하나님과 교제하는 힘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샘물(根源)이고,

다른 것은 대부분 지류(支流)일 뿐입니다.

말씀과 기도라는

기본을 망각하거나

소홀히 하면

믿음의 빛이 희미해 지고

신앙과 삶이 시들해 지기 마련입니다.

2010년의 남은 날들을

하나님과 교제하는 큐티로

멋지게 장식해 봅시다.

2.

오늘 큐티를 하다가

맨 마지막 절에 시선이 멈췄습니다.

골로새서 1장 29절입니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29절은 앞 구절과 더불어

바울 사도의 이어지는 고백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도로

많은 어려움을 견디면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훌륭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고

초대교회와 이방인 선교를 시작한

말 그대로 예수님께서 직접 택해서 쓰신 사도입니다.

29절은

바울이

끝까지 절망하지 않고,

의기소침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이유/근거/힘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줍니다.

29절을 다시 한번 천천히 읽어 보십시오.

영어와 비교해서 읽으셔도 좋습니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For this purpose also I labor, striving according to His power,

which mightily works within me.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위해서

수고했습니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가 “코피아오”인데

이 단어를 외울 때, “코피 터지도록 수고하다”라고 외웠었답니다)

그런데 그를 움직이는 힘의 원천은

바울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능력으로” “역사하시는”에 해당하는 헬라어에서

영어의 “에너지”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바울 안에서 역사하시는 에너지가 있었고

바울은 그 에너지를 갖고

지치지 않고 끝까지 수고했습니다.

우리 성경 “힘을 다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애고니조마이”인데

여기서 영어의 “애고니/agony”가 나왔습니다.

바울에게 힘을 주는 원천이 여러 가지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제자들, 동역자들,

또한 바울이 개척해 놓은 각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성자 등등…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눈에 보이는 도움들입니다.

바울은 이 모든 것보다

자신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살았습니다.

3.

오늘 큐티를 하면서

목사인 저의 마음가짐을 되돌아보았습니다.

정말로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 능력을 따르기 위해서

애쓰고 그 힘으로 목회하고 있었는지…

말씀을 곱씹어 볼수록

커다란 위로가 되었습니다.

제 힘으로 목회하는 것이 아님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제 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서 목회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모두 내려놓기로 기도했습니다.

평안했습니다.

자유했습니다.

힘이 생겼습니다.

우리 서머나 식구들은

무슨 힘으로 사십니까?

혹시 여러분들 안에서 역사하는

그 능력을 감지하지 못한 채

금방 방전되고 말 것들을

의지해서 살고 있지 않으십니까?

우리들 각자 안에서

그리고 우리 서머나 교회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힘으로 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서머나 식구들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살게 하옵소서.

그 능력을 감지하고

그 능력으로 오늘 하루 멋지게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샬롬

하목사 올림

(2010.9.16 이-메일 목회서신)

황금률

1.

어제 저녁에

재흥이가 고민이 있다고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다름 아니라

자기가 주중에 참석하는 캠퍼스 모임이 있는데

그곳에서 약간의 갈등이 생겼답니다.

남학생들은 여학생들을

아주 잘 도와주었답니다.

그런데 여학생들이 고마움이 없고

도움을 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점점 더 대접만 받으려 한답니다.

그것이 남학생들 사이에 말이 되었는데

그 중에 한 명이 말하기를

여학생들이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의 마음으로 끝까지 도와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고

그것을 두고 의견이 갈렸답니다.

대학생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지만

실제로 우리들 주변에서도 자주 경험하는 사례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조건 용서하고, 무조건 사랑하고

끝까지 희생해야 한다고 말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거기에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다고 말하면

뭐라고 대꾸도 못하고

자신의 믿음 없음을 자책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재흥이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재흥이에게 이렇게 얘기해 주었습니다.

상대방이 고마워하든지 안 하든지

예수님처럼 끝까지 도와주는 것은 옳단다.

우리는 그렇게 하기를 늘 힘쓰고

그 정도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한단다.

그런데

우리들의 믿음이 예수님 수준에

올라가지 못한 것도 사실이지.

아직은 믿음이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해서

예수님처럼 도와주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고 때때로 지칠 수 있단다.

신앙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너도 앞으로 많이 경험하게 될 거야.

기회가 되면

여학생들과 남학생들이 함께 대화를 하기를 바란다.

여학생들도 도움을 받았으면 감사해야지.

(예수님의 비유에서 열 사람이 병고침을 받았는데

한 명만 찾아 와서 감사한 것을 보면

도움을 요청할 때와 후에는 사람들의 마음이 바뀌는 경우가 많지)

도움을 주는 사람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도와주고

도움을 받은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로

서로 얘기를 해 보는 것이 좋겠다.

너도 힘닿는 대로 이웃을 도와주고

도움을 받았으면 꼭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도록 하렴.”

2.

아침에 컴퓨터에서 성경프로그램을 열면

그 날의 성경 구절이 화면에 뜹니다.

그것을 갖고 기도하고,

큐티 말씀과 더불어 하루 종일 마음에 품고 살아갑니다.

오늘 말씀이

황금률로 잘 알려진

마태복음 7 12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말씀만 잘 지켜도

온전한 신앙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엉뚱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먼저 자신을 대접해 주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자신도 남을 대접해 주겠답니다.

공평해 보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맞지 않습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무조건 자신만 대접해 달랍니다.

소위 왕자병, 공주병이 이에 해당할 것입니다.

  재흥이의 경우처럼, 주변 사람들이 지칩니다.

요즘같이 각박한 세대에는

대접도 받지 않고, 대접도 하지 않겠답니다.

그런데 세상을 과연 혼자 힘으로 살 수 있을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위의 세 가지 경우를 모두 거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황금률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자신이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남을 먼저 배려하고

남에게 먼저 다가가서 사랑을 베풀기를

서로 솔선하는 것이지요.

어제 저녁 재흥이가 겪고 있는

공동체 안에서의 갈등도

황금률만 서로 실천한다면 금방 해결될 듯싶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들이 사는 세상이 한결 밝아질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들 자신이 행복할 것입니다.

말 그대로 더불어 사는 세상,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참 쉬워 보이지만, 아니

한 두 번은 할 수 있지만

황금률이 우리들의 신앙인격에 자리잡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여기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고

우리들의 끈질긴 노력이 요청됩니다.

하나님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황금률대로 살기 원합니다.

말씀을 실천할

힘과 의지를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샬롬

하목사 올림

(2010.9.9 메일 목회서신)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 (3)

오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표적에 대한 마지막 시간이자, 요한복음의 일곱 가지 표적을 살펴본 연속 설교의 마지막입니다. 요한복음의 일곱 가지 표적들은 단순히 기적(miracle)에 그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교훈이 들어있는 표적들(signs)이라고 했습니다.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된 표적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새로운 시대를 여실 것을 잔치자리에서 보여주셨습니다. 멀리 있는 신하의 아들을 말씀으로 고치신 기적은 예수님은 거리나 시간에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전능하신 분임을 보여주었습니다.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고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속에 깃든 네 개의 손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우리의 삶이 비록 작고 보잘 것 없는 오병이어에 불과해도 예수님의 손에 올려질 때 많은 사람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시작점이 된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물위를 걸어오시고, 폭풍을 잠잠케하신 예수님은 자연만물을 다스리는 통치자가 되십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이 눈을 떴습니다. 영적인 눈이 떠야 예수님의 말씀과 표적 속에 깃든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마지막 일곱 번째 표적은 예수님께서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분임을 가르쳐 줍니다. 또한 나사로가 살아난 것을 통해서 장차 죽음에서 부활하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들도 부활할 것임을 보여줍니다. 역시 이 모든 것에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후에 누이들과 동네 사람들은 슬픔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마을에 오셨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무척 아쉬워하면서 예수님의 발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도 이들과 함께 우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것이 슬픈 것은 아닙니다. 그는 부활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라비를 잃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슬픈 마음을 예수님께서 보시고 함께 우신 겁니다. 이것이 또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십니다. 무덤은 돌로 막혀 있었고 이미 장사한 지 나흘이 지나서 냄새가 날 지경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말씀하십니다.:“돌을 옮겨 놓으라.”믿음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첫 번째 표적에서도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표적에서는 아들이 살았으니 가라고 하셨습니다. 38년 된 병자를 향해서도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표적을 행할 때 제자들에게 떡을 나눠주라고 했습니다. 태어나면서 소경이었던 사람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모든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하기 위해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의 말씀‘아멘’으로 받아 들일 수도 없고 그것을 실천에 옮길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이나 세상의 상식을 뛰어넘는 말씀이기에 그렇습니다. 요한복음의 표적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예수님의 명령에 믿음으로 순종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합니다.

본문의 마르다와 마리아도 처음에는 주춤거렸지만 결국 돌을 옮겨 놓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서머나 식구들 마음속에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할 수 있는 믿음이 굳건히 자리 잡기를 기도합니다. -河-

빈 보금자리

엠티 네스트 신드롬(empty nest syndrome)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90년 중반까지 10년 가까이 방송된 “엠티 네스트”라는시트콤의 제목에서 온 말입니다. 우리 말로는 ‘빈 둥지 증후군’이라고 옮길 수 있겠지요. 자녀들이 대학에 가고 결혼을하면서 하나 둘 집을 떠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부부만 덩그러니 남게 됩니다. 엠티 네스트 신드롬은 자식들이 떠난 가정, 즉 빈 보금자리에서 부모들이 느끼는 외로움을 일컫는 말입니다.

가족이나 상담에 대한 책을 읽으면 종종 등장하는 이 말이 남의 일로 알았는데 어느덧 저희 부부에게 닥쳤습니다. 이제내일이면 첫째 아이에 이어서 둘째 마저 대학 기숙사에 들어갑니다. 멀리 있는 학교에 가지 않아서 주말마다 집에 오겠지만, 그래도 마음이 섭섭합니다. 아이가 신이 나서 자기 방을 정리하고, 옷가지를 가방에 쌉니다. 아내도 크고 작은 물건을 챙겨주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이 참에 집을 떠나면 다시 오지 않을 작정인지 짐이 꽤 많습니다. 제 아무리 열심히짐을 싸도 아빠의 손길이 여전히 필요합니다. 컴퓨터를 연결할 전선줄이 없습니다. 밤이 늦었지만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월그린에 가서 전선줄을 사다가 가방에 슬쩍 넣어 줍니다. 모두 잠이 든 늦은 밤, 거실에 나가서 아이의 짐을 하나하나 다시 확인해 봅니다. 늘 어린아이 같고 언제나 덜렁대던 둘째인데 자기 짐을 꽤 잘 챙겨놓았습니다.

둘째 마저 떠나는 것이 허전한 지 아내는 며칠 전부터 아이가 집에 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수시로 되뇌곤 했습니다. 하긴 둘째 마저 없으면 아내의 일이 훨씬 줄 것 같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라고 아이와 씨름하지 않아도 됩니다. 심방하면서 아이 점심이나 저녁을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들만 둘인 우리 집에서 둘째는 종종 딸처럼 애교를 부리고어리광도 부렸기에 아내는 더 허전함을 느낄 것 같습니다. 아내는 앞으로 며칠 동안 아이들이 집에 없어서 허전하다고귀가 아프도록 얘기할 것입니다. 잘 생긴 남편이 곁에 있는데도 말입니다.

솔직히 아내만 허전한 것은 아닙니다. 아빠인 저도 아이들이 없으면 꽤나 허전할 것 같습니다. 지난 20여년을 밤마다 아이들이 제게 와서 “아빠 잘게요”라고 말하면 저는 그들에게 손을 얹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꼬마일 때는 제 품에 꼭 안고기도해 주었습니다. 초등학생이 되면서는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했는데, 저 보다 등치가 커지면서 아이들의 등에 제 손을 대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큰 아이는 그것이 습관이 되어서 지금도 밤 10시가 되면 학교에서 전화를 합니다. 그러면전화로 기도해 줍니다. 둘째는 어떻게 할 지 모르겠습니다. 대학생이 된 아이들에게 아빠의 생각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제부터 스스로 자신들의 인생을 설계하고 개척해 나가는 방법을 터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밤 10시가되면 둘째의 전화도 기다릴 것 같습니다.

우리 이민1세들에게 자식에 대한 기대와 애정은 각별합니다. 때로는 자식을 부모의 분신처럼 생각해서 자녀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장성한 자녀들이 부모 곁을 떠나고 가정을 갖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그 동안 부모가 자녀들의 지킴이(가디언) 역할을 했다면, 이제는 한발 뒤로 물러서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부모의조언이 필요할 때 삶의 지혜를 나눠주는 멘토가 되어야 합니다.

저 역시 이렇게 이론적으로 잘 무장되어있지만, 자식들이 떠난 빈 보금자리는 꽤 허전할 것 같습니다. 순간순간 아이들이 보고 싶어 질것 같습니다. 이것이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이겠지요!

(2010.8.27SF 한국일보 종교칼럼)

하루에 5분씩만

한 소년이 역사에 남을 기록을 세우고 싶어서 목사님을 찾아가서 그 비결을 물었습니다.“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어떤 일부터 해야 합니까?” 목사님은 소년에게 친절하게 말해 주었습니다.“하루 24시간 중 한 시간만 내가 가르쳐 준대로 행동할 수 있겠니?”“그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겨우 한 시간인데요.” 목사님은 소년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었습니다.“하루에 15분씩 기도하고, 15분씩 성경을 묵상하게, 그리고 15분씩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15분씩 사랑을 실천하게. 그러면 자네의 인생에 밝은 빛이 보일 걸세.” 이 소년은 목사님께 들은 말씀을 잘 실천했습니다. 그 후 그는 전 세계를 누비며 세상을 움직이는 인물이 되었으니 바로 유명한 부흥사 빌리 선데이였습니다.

                                                                               -2009년 속회공과에서-

빌리 선데이는 시카고 화이트 삭스의 야구선수로 활동하다가 복음을 전하는 부흥사가 되었던 윌리엄 에슐리 선데이(1862-1935)를 가리킵니다. 그는 목사님 말씀대로 하루 15분씩 네 가지 일을 실천하면서 평생을 살았답니다.“티끌모아 태산”이라는 속담이 있듯이 작은 것들이 모이면 나중에 큰 일이 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작은 것들을 모으고, 지키고, 그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작은 것이라서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작은 일을 매일같이 빼놓지 않고 실천하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실제로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목사님께서 빌리 선데이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하루에 한 시간을 넷으로 쪼개서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사는 것도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을 마음에 품고 지속적으로 실천하려고 애쓰는 것과, 미리부터 포기하거나 “그 까짓 것”이라고 소홀히 생각하는 것과는 훗날 커다란 차이가 날 것입니다. 온전한 신앙은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신앙은 하찮게 생각되는 일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믿고 그곳에 열정과 에너지를 쏟는 것입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 주인이 일꾼들에게 한 말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 작은 일도 소홀히 하지 않게 됩니다.:“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이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마25:21).

솔직히 바쁜 이민생활 가운데 하루에 한 시간을 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빌리 선데이의 15분을 5분으로 디스카운트해서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5분 기도하고, 5분 말씀 읽고, 5분 누군가와 하나님 얘기하고, 나머지 5분을 사랑을 실천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니 적어도 이 정도는 실천해야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느덧 8월도 다 지나갑니다. 하지만 지나간 세월을 아쉬워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대신에, 아직도 네 달이나 남은 2010년 동안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실지 기대하면서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발상의 전환’을 이룬 그리스도인들, 서머나 식구들의 모습입니다. 힘내십시요! -河-

힘내십시요!

좋은 아침입니다.

1.

미국 경제가

더블 딥 (double dip)에 빠질 지 모른다는 우려와 함께

쉽게 살아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블 딥은 칩 같은 것을 캐찹이나 소스에 찍어 먹을 때,

한번에 찍어서 모두 먹지 않고,

중간쯤 먹은 다음에 다시 소스를 묻히는 경우를 가리킨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병균이나 불쾌감을 줄 수 있기에

미국 사회에서는 커다란 금기라고 하네요.

우리들이 무심코 이런 실수를 범하기 쉬운 것 같습니다.

엊그제 캘 스테잇의 경영학 교수님과 통화하면서 배웠습니다. ^^]

불경기의 한파가 우리 서머나 식구들에게도

밀려오는 것을 느낍니다.

지난 2년여 경기가 좋지 않을 때도

성도님들의 사업장들이 잘 견뎠는데

요즘은 매출이 줄고 있다는 얘기를 종종 듣습니다.

직장이든 사업장이든

다른 대안이 없이 한 곳만을 의지하면서

생활하시는 성도님들은 더 힘이 드시지요?

실제로 물질로 쪼달리면

마음까지 힘드실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의 하나님께서

서머나 식구들께

불경기를 견디고 이길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2.

사실 힘들 때 힘들다고 불평하고 체념하면

마음이 더 힘겨워집니다.

마음까지 힘겹고 무너질 만큼 스트레스를 받으면

세상의 어려움이 바이러스처럼

신앙에도 침투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백성들은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 있어도

작은 빛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손을 내려뜨려서는 안됩니다.

정말 힘들 때도

(목사인 저도 곁에서 지켜 보면 마음이 정말 아퍼요)

그래도 신앙의 줄을 놓아서는 안됩니다.

아침에 일어나셔서
하나님부르시고

지난 주에 드린 서신대로

하나님 나와 함께 하옵소서.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기도하고 꿋꿋하게 견디면서

앞으로 나가시길 바랍니다.

힘내십시오!

제가 아주 힘들 때

암송하고 묵상하는 시편 구절이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편 27:1)

하나님

서머나 성도님들 의 빛이 되시고 구원이 되어 주옵소서.

생명의 능력이 되셔서

세상의 어떤 어려움도 견디고 이길 수 있게 하옵소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삼아 주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샬롬

하목사 올림

(2010.8.26 메일 목회서신)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 (2)

사랑하는 나사로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은 이틀을 더 지체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모두 읽고 나면, 이틀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틀을 지체하는 동안 나사로가 죽게 되었지만, 그를 다시 살리심으로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관하는 분임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사로의 누이들 입장에서 보면, 이틀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게다가 예수님을 기다리는 동안 나사로가 죽게 됩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십니다. 그런데 이미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났습니다. 장례식이 모두 끝났고, 동네 사람들은 하나뿐인 오라비를 잃은 두 자매를 위로하고 있었습니다. 큰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을 맞으러 나갑니다. 동생 마리아는 마음이 많이 상했는지 그냥 집에 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아서 나사로가 죽었다고 한탄합니다. 그런데 마르다에게는 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2절) 그때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살아날 것이라는 엄청난 말씀을 하십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모두 이해할 수 없었지만, 부활에 대한 소망은 분명히 갖고 있었습니다.

본문의 21-27절까지 나오는 예수님과 마르다의 대화는 우리들의 신앙에도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 마르다에게 하신 질문은 곧 우리에게 하시는 질문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주여 그러 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마르다는 아주 완벽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집안으로 들어가서 동생 마리아에게 예수님께서 찾으신다고 넌지시 말해줍니다. 마르다는 신앙이 좋을 뿐만 아니라 매우 현명한 성품을 가졌습니다.

마리아 역시 주님이 계시지 않아서 동생이 죽었다고 예수님 앞에서 서럽게 웁니다. 그것을 본 온 동네 사람들도 함께 울고 순식간에 그곳이 눈물바다로 변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와서 함께 우는 것을 보니 삼남매는 동네에서도 평판이 좋았나봅니다. 세 남매가 부모 없이 살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집안의 남자인 나사로가 갑자기 죽었으니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때 예수님도 함께 우십니다.:”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33절)“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35절) 예수님께서 아주 비통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조금 있다가 나사로를 살리실 예수님이시지만 마리아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함께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리고 나사로를 살리러 가십니다.

우리들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응답이 지체될 때가 있습니다. 기도하고 금방 이루어지면 좋을 텐데 현실이 그렇지 않습니다. 이틀이 지체하는 동안 나사로가 죽었듯이,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상황이 더욱 악화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기억할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때가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가 괴롭고 힘들 때 예수님께서 함께 우신다는 사실이고, 셋째는 세상이 일이 아무리 힘들고 절망적이어도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끝까지 의지해야 한다는 굳은 믿음입니다. -河-

두 마디 기도

좋은 아침입니다.

1.

다음(daum) 뉴스에 가보니

한국의 한 연예인이 신학을 하는 전도사와

결혼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목사로서 클릭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기사 내용을 별 것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기사 밑에 수백 개의 댓 글이 달렸습니다.

거의 모든 댓글이 기독교를 비난하는 것으로

소위 도배가 되어 있네요.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무리 인터넷 댓글이라고 해도

조금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주일 목회서신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보석처럼 빛나고,

형통하고 (선하고),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풍성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말씀드렸는데

매력적인 기독교!

매력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회복하면

세상이 기독교를 그리 쉽게 보지 못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들의

멋지고 귀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드러내는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2.

어제 수요예배에서

스가랴 10장을 공부하면서

그리스도인의 힘이 두 가지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 두 가지를 갖고

매일같이/순간순간

입술로, 마음으로, 삶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첫 번째 기도: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옵소서!”

스가랴 10:5절에 의하면

여호와가 그들과 함께 한 즉 (because the Lord is with them)”

주님의 백성들이 힘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두번째 기도: “하나님,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스가랴 10:6절에서

내가 그들을 긍휼이 여김으로 (because I have compassion on them)”

수백 년 동안 버림받고 잊혀졌던 요셉(북이스라엘)이 돌아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회복시키고, 새 삶을 살게 합니다.

하나님, 우리와(나와) 함께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를(나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우리들 각 개인의 평생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간단해 보이지만

가장 귀한 두 마디 기도 속에 우리의 삶이 녹아 들고

그 안에서 새로운 시작과

삶의 열매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서머나 성도님들 한 분 한 분과

함께 하시고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샬롬

하목사 올림

(2010.8.19 메일 목회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