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 (1)

요한복음에 나오는 일곱 가지 표적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동안 여섯 가지 표적을 모두 살펴보았고, 앞으로 세 시간에 걸쳐서 마지막 일곱 번째 표적을 살펴볼 것입니다. 일곱 번째 표적은 요한복음의 표적들 가운데 가장 큰 의미를 지닌 사건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나사로는 그의 두 누이인 마리아와 마르다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3마일정도 떨어진 베다니에 살고 있었습니다. 부모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세 오누이만 살았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예수님은 부모님 없이 살아가는 이들을 각별히 사랑하셨습니다. 특별히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는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을 만큼 커다란 은혜를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의 하나뿐인 동생 나사로가 병이 들었습니다. 누이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서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고 알립니다. 예수님께 부탁한 것으로 보아서 매우 다급한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해하기 말씀을 하십니다. 지난 번 소경을 고치시면서, 그가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 보이려고 했다고 말씀하셨듯이, 이번에도 나사로의 병이 죽을병이 아니랍니다. 나사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 자신도 영광을 받게 될 것이랍니다. 이것은 믿음의 눈이 뜨지 않으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나사로는 죽게 되고 예수님께서 그를 살려내십니다. 나사로를 살리러 가시는 길에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25-26절)는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나사로의 죽음과 다시 살아남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도 장차 부활할 것을 가르쳐주시는 겁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듯이, 우리들도 죽음에서 살리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신 예수님께도 영광이 될 것입니다. 나사로의 죽음과 살리심 속에는 이런 구원의 진리가 함축적으로 들어있습니다.

나사로가 사는 베다니는 예루살렘 근처의 유다지방에 속해 있었는데 그곳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쳐서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틀을 더 머물러 계시는 것을 보고 위험한 유다지방으로 가지 않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음을 무릅쓰고 자고 있는 (예수님의 눈에 나사로의 죽음은 잠을 자는 것과 다름없었고)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서 베다니로 가시겠답니다.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서 아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위험을 불사하신 것입니다. 아직 예수님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제자들로서는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나사로와 그의 누이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어려움이 닥친 것은 도리어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드러내는 삶으로 쓰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속의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예수님의 방식은 세상의 방법과 다르고 제자들의 생각을 초월한 하늘나라 방식입니다. 여기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로마서 8장 28절 말씀이 다시 생각납니다.:“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려 선을 이루느니라.” 아멘 -河-

복된 삶의 모습

좋은 아침입니다.

1.

말로만 좋은 아침 (good morning)이 아니라

우리들 삶 전체로 좋은 아침을 맞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저도 솔직히 요즘은

매일같이 좋은 아침이라기 보다는

피곤한 아침을 맞습니다.

휴식 없이 책상에 앉아서 책과 씨름하고

말씀준비와 목회도 소홀히 할 수 없으니

정말 쉴 틈이 없습니다.

그래도

격려해 주시는 서머나 성도님들이 계시고

제 몸과 건강을 먼저 챙기고 생각해 주는 가족들이 있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2.

어제 수요일에는

스가랴 9장 말씀을 함께 나눴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종말론적인 말씀이 전반부에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지중해 연안의 두로가 꽤 잘 살았나 봅니다.

9 2-3절에 의하면

그들은 지혜도 있었고, 성곽도 튼튼하게 건축했고,

은을 티끌처럼 정금을 거리의 진흙처럼 쌓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두로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집니다.

지식, 권력, 재물등과 같은 세상의 것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에 하나님이 빠져 있다면

단지 물거품에 불과한 것을 배웠습니다.

마태복음 6 33절의 예수님의 말씀이

다시 생각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

스가랴 9장 마지막인 16-17절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는 복이 나옵니다.

저는 그것을 네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빛나는 삶

형통한(선한)

아름다운(매력적인)

풍성한 삶

수요예배에 오지 않으신 분들은

스가랴 9 16-17절을 보면서

성경에서는 각각의 삶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찾아 보십시오.

물론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완전히 회복되었을 때

모든 주의 백성들이 누리게 될 복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이미 임했다고 하셨듯이

이 세상에 살면서도

비록 완전하지 않지만

위의 네 가지 복을 맛볼 수는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나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모델하우스가 되기 위해서는

위의 네 가지 복을 꼭 누려야 합니다.

네 가지 모두 양보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들의 복된 모습이요 삶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

스가랴 9 16-17절이 주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가다듬고

하나님 백성의 복된 모습을 회복하고 누리기를

소망해 봅시다.

하나님

서머나 성도님들이

빛나는 삶,

형통한 삶 (선한 삶),

아름다운 삶 (매력적인 삶),

그리고 풍성한 삶을

이 세상에서부터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샬롬

하목사 올림

(2010.8.12 메일 목회서신)

소경이 눈을 뜨다 (2)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날은 공교롭게도 안식일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에는 생업과 관련된 일은 물론 아주 위급한 경우가 아니면 병을 고치는 일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도 사람들을 도우셨고 병도 고치셨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 지도자들과 부딪치셨습니다. 아니 그들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갖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지난 번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날도 안식일이었습니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병자가 자리를 들고 걸어갔는데,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은 그것을 가지고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트집을 잡았습니다. 이번에는 소경이 눈을 뜬 것을 두고 이웃사람들이 그를 바리새인들에게 데리고 갑니다. 소경이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소경이 눈을 뜨게 해 주신 것을 갖고 트집을 잡기 시작합니다.

결국에는 소경의 부모까지 데리고 와서 고문하듯이 자초지종을 묻습니다. 소경의 부모는 자신들은 모른다고 발뺌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때는 나라를 잃었고 예루살렘에서는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이 백성들 위에서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가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회당에서 출교시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그 부모가 그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요9:22). 동족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입니다. 나라가 없는 상황에서 동족들에게 마저 버림을 받는다면 그것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만큼 유대교의 종교 권력이 막강했습니다. 그래서 소경의 부모가 자신들은 모르는 일이니 아들에게 물어보라고 무책임해 보이는 핑계를 댄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소경은 담대합니다. 이웃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고쳐주었다고 말합니다. 유대 지도자들을 향해서도 자신의 눈을 뜨게 하신 분은 예수님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그리고 당신들도 예수를 믿기 위해서 그의 제자가 되기 원하느냐고 반문합니다. 유대 지도자들 입장에서 보면 아주 당돌한 언행입니다. 이 사람이 이처럼 담대하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얘기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신 것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평생 동안 보지 못했던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인생과 새로운 세상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그러니 누가 뭐라고 해도 그는 담대하게 예수님을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이 눈이 뜨인 사람은 바리새인들에게 쫓겨납니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다시 만나십니다. 지난번에도 38년 된 병자에게 그렇게 하셨듯이 이번에도 소경이었던 사람에게 예수님을 믿을 것을 부탁하십니다. 소경이었던 사람은 아주 분명하게 대답합니다.:“내가 믿고자 하나이다.”(요9장36절) 예수님께서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밝히십니다. 그 사람이 대답합니다.:“내가 믿나이다”(38절). 소경이었던 사람은 눈이 뜨였습니다. 그 대가로 그는 이웃들과 유대인들에게 배척받았습니다. 하지만 모든 과정을 통해서 이 사람은 진실로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육신의 눈이 뜨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는 신앙의 눈이 뜨인 것이 더 큰 축복임을 실로암 소경을 통해서 다시금 깨닫습니다. -河-

“에메트”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수요예배에서는

스가랴를 한 장씩 살펴 보고 있습니다.

(메일 서신에 교재를 첨부해 드리지요.)

구약의 예언서는

젖과 같이 부드럽고 입에 단 말씀은 아닙니다.

어쩌면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단단한 음식에 속합니다(6:12-13)

어떤 때는 삶에 지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오신

성도님들께 부담이 될 것 같아서

딱딱한 말씀을 조금 소프트하게 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성도님들이 단단한 말씀을 잘 받으시고

신앙 안에서 소화시키시는 것을 볼 때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부드럽고 입에 단 말씀만을 찾는 요즘 세상에

구약의 예언서를 한 절씩 살펴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2.

엊그제 살펴본 스가랴 8장에는

두 가지 표현들이 반복해서 나왔습니다.

가장 많이 나오는 표현은

조전도사님께서 열일곱 번 반복되었다고 하셨던

만군의 여호와라는 표현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만군의 여호와 (the Lord of hosts)”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만군의 하늘 군대를 거느리고 계시다는 뜻이지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해서

직접 나서서 싸우실 때가 있는데

그때 만군의 여호와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스가랴 8장에서

만군의 여호와가 여러 번 반복된 것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여전히 삶이 불안하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힘과 능력을 주기 위함이고

스가랴 8장에서 선포되는 약속이

확실히 이루어질 것임을 확증하기 위함입니다.

그 다음에

반복된 표현은

진리, 성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메트입니다.

히브리어 에메트

1) 하나님을 향하여 순전하고 온전한 믿음(faithfulness)

2) 거짓없이 진실된 것 (truth)

3) 흔들리지 않고 견고한 것 (firmness)

을 뜻합니다.

요즘 세상은 거짓이 난무합니다.

쉽게 흔들리고 심지가 견고하지 못합니다.

믿음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물론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진리, 진실, 성실로 해석되는

에메트임을 잊지 맙시다.

불경기가 계속됩니다.

미국 경제가 쉽게 회복될 것 같지 않습니다.

엊그제도 비즈니스 심방을 하면서

사업체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힘겨운 시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에메트입니다.

진실된 믿음! 순전한 믿음! 흔들리지 않는 믿음!

하나님

우리 교회와 서머나 성도님들께서

험한 세상을 살아가실 때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을

꼭 붙잡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샬롬

하목사 올림

(2010.8.5 메일 목회서신)

세 방향 성숙

좋은 아침입니다.

1.

성경에서는

신앙생활 또는

성도들이 모여있는 교회를

살아있는 유기체에 비유합니다.

교회를 두고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고,

성도들을 몸을 이루는 지체라고 합니다.

때로는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때까지

자라가라는 권면도 합니다.

이처럼 신앙은 살아있는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자라가야 하고,

역동적이어야 하고

생동감 있게 활동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있고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라간다는 말씀과 관련해서

우리는 두 가지 성장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양적인 성장입니다.

이것은 교회에 적용할 수 있는 성장입니다.

교회가 양적으로(수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에서도

하나님께서 믿는 자의 숫자를 날마다 더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라는 지역 상황을 고려하면

양적인 성장에 한계가 있습니다.

무작정 양적인 성장에 목숨을 걸었다가는

우리들은 물론 지역사회에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샌프란으로 이사오는 분들,

학업을 위해서 새로 오는 젊은이들,

교회를 정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방황하시는 분들을

중심으로 양적인 부흥을 조심스레 도모해야 합니다.

샌프란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도

교회가 조금씩 조금씩 양적으로 커가고 있음을 봅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 교회가 신앙의 도움을 드릴 수 있는 분들,

교회를 함께 세워나갈 분들을

하나님께서 보내주시길 기도합시다.

2.

양적인 성장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질적인 성장입니다.

한국 교회가 그 동안 양적인 성장에만 치중하다가

속 빈 강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앞으로는

공룡같이 거대한 교회보다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고

질적인 성장을 도모하는

작은 교회들이 많아지는 것이 바람직해 보입니다.

질적인 성장을

다른 말로 신앙 성숙이라고 합니다.

신앙 성숙은

세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선,

하나님을 향해서 위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고

하나님께 기쁨의 찬양과 경배를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웃을 향해서 옆으로 넓게 자라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달팽이처럼 오그라들지 않고

동심원처럼 물결치며 멀리 퍼져나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자신의 내면을 향해서 깊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말씀에 비춰서 돌아봄으로

예수님을 닮아가고

자신의 마음을 갈아엎는

내면성찰의 작업을 끊임없이 하는 것입니다.

3.

세 방향의 성숙을 이루도록

돕는 것이 말씀과 기도입니다.

세 방향의 성숙이 온전히 이루어진 상태를

거룩이라고 합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세 방향의 성숙을 추구하는 모습이

성령충만입니다.

나이가 들었는지 (?)

제 자신을 돌아보고

성숙한 목회자가 되는 것을 두고 고민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됩니다.

요즘

정말 오랜만에 도서관에 다니면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혼자서 씨름하는 시간도 제 내면에 도움이 됩니다.

우리

서머나 식구들께서

하나님을 향해서 독수리처럼 높이 날아오르고

이웃을 향해서 소처럼 묵묵히 지경을 넓혀가고

자신을 향해서 비둘기처럼 온순하게

깊이 내면을 돌아보시면 좋겠습니다.

거기에 은은한 기쁨과 감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지나이다. (딤전 4:5)

하나님

서머나 성도님들 한 분 한 분께서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을 향해서

이웃과 자신을 향해서

멋지게 자라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샬롬

하목사 올림

(2010.7.29 메일 목회서신)

소경이 눈을 뜨다 (1)

요한복음 9장 전체가 소경이 눈을 뜨는 표적을 보도하고 표적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앞으로 두 시간에 걸쳐서 요한복음9장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이 구걸하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의 측은지심(惻隱至心)이 발동했습니다. 예수님은 불쌍한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십니다. 무엇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소외된 백성들, 가난과 질병으로 고생하는 뭇 백성들을 보실 때마다 예수님의 측은지심이 발동했습니다. 이 시간 우리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기된 첫 번째 이슈는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냐는 것입니다. 당시 율법에 의하면 소경으로 태어나는 것은 부모가 죄를 지은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는 모든 질병도 심지어 죽음도 죄를 지어서 생겼다는 인과응보의 신앙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기에 길에서 구걸하는 소경을 보고“누구의 죄로 인해서 소경으로 태어났느냐?”고 질문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전혀 다른 각도에서 말씀하십니다.:“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9:3). 예수님은 소경을 바라보시면서 그를 정죄하거나 가족의 죄를 지적하지 않으십니다. 소경을 보시면서 먼저 불쌍한 마음이 드셨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이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놀라운 생각을 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종종 자신 또는 남들이 겪는 고난을 죄와 연계시킬 때가 많습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한 걸음 더 나가야 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드러날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에 진흙을 발라주시면서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땅에 침을 뱉어서 진흙팩을 만드셨고 그것을 소경의 눈에 발라주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예전 고대에 종종 있던 치료법 가운데 하나였고, 마가복음 7:33과 8:23에 의하면 예수님도 침을 뱉어서 말을 하지 못하고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을 고치신 적이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서“침”은 부정하고 더러운 것으로 여겼는데(레15:8) 예수님께서 침을 사용하셨다는 사실이 조금은 의아합니다. 이것은 안식일에 소경을 고치신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약의 율법을 뛰어넘어서 일하시는 분임을 보여주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 길이 되었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올바름입니다. 어떤 어두움의 세력이나 과거의 율법이 예수님을 막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빛이 되시기 때문입니다(요9:5). 그만큼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권세가 있으시고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하신 메시야이십니다.

또한 침을 사용하신 것은 소경으로 하여금 무엇인가 신비로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동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눈높이를 우리에게 맞추시고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는 분임을 본문 속에서 다시금 배웁니다.

진흙을 눈에 바르고 실로암 연못까지 가는 소경의 모습을 눈앞에 그려 보십시오. 우리들이라면 그렇게 했을까요? 생면부지의 사람이 와서 이상한 일을 자기에게 했습니다. 그리고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령한다면 대부분 망설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경은 실로암 연못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눈을 씻었고 드디어 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믿음과 행동이 눈을 뜨게 만든 것입니다. -河-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지난 주간에는 펜실베니아주의 스크랜튼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열린 코스타 수양회에 다녀왔습니다. 올 해로 일곱 번째 참석하는 코스타였지만 매 해 갈 때마다 가슴이 설레고 동시에 부담감도 느낍니다. 미래를 책임질 새벽이슬과 같은 젊은이들을 만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뜁니다. 요즘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교회에 대해서 좋지 않은 선입견을 갖고 있다고 하지만 코스타에 가면 참된 신앙을 가져보려는 젊은 청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도리어 그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동안 시카고에서 열린 코스타에서 주로 성경연구 세미나를 인도했는데, 이번에는 25세 이하의 젊은 청년들이 모이는 스크랜튼 코스타에서 오전 전체 집회 말씀을 맡았기에 더욱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뒷전에서 기도해 주시는 성도님들과 친지들이 계셨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에 은혜가운데 말씀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코스타 기간 중에 청년들을 만나면서 제가 마치 30여년전으로 돌아간 듯 했습니다.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젊은이들이 갖고 있는 고민은 대충 비슷했습니다.: 신앙에 대해서 무차별 쏟아내는 질문들, 진로에 대한 고민들, 그리고 젊은 시절에 누구나 가슴앓이를 하는 만남과 헤어짐의 아픔들. 인생을 조금 더 산 신앙의 선배로서 성심껏 조언해주었습니다. 어떤 때는 말없이 젊은이들의 넋두리를 들어주었습니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받으면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습니다. 그때마다 제 앞에 앉아 있거나 쭉 둘러있는 젊은이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 전도서는 솔로몬이 기록했다고 전해집니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왕의 후광을 입어서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렸던 왕입니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에 남긴 말은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 12:1)입니다. 청년의 때는 인생의 꽃망울이 터져 나오는 시기입니다. 힘차게 앞을 향해 뛰어나가는 시기입니다.

청년의 때와 대조되는 말이 “곤고한 날”입니다. 몸과 마음이 인생살이에 지쳐서 더 이상 희망을 갖지 못하는 때를 가리킵니다. 곤고한 날이 되면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쉽게 포기합니다.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자조 섞인 말투로 탄식합니다. 솔로몬은 그런 날이 오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교훈합니다.

코스타에서 젊은이들을 만나면서, ‘만약에 청년의 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이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 동안 아쉬웠던 많은 기억들, 게으름으로 인해서 흘려 보냈던 시간들, 짧은 생각에 그만 성급하게 서둘다가 놓치고 말았던 인생의 기회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아있던 아쉬움 들이 주마등처럼 머리에 스쳤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진한 아쉬움은‘이제는 늦었다’ ‘나는 할 수 없다’고 단정해서 시도도 하지 않은 채 미리 포기했던 일들이었습니다.

물론 시계추를 거꾸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지나간 시간을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기에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이라는 가정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을 수는 있습니다. 예전의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앞을 바라보며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살겠다고 마음을 다잡아 먹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 훗날,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았을 때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은 꽤 많이 줄어있을 것입니다. “

너희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전도서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창조주 하나님과 더불어 하루하루 새롭고 행복한 인생길을 걸어가기 원합니다.

(2010.7.23 SF한국일보 종교칼럼

“맛보아 알지어다”

좋은 아침입니다.

1.

7월 들어서

지난 두 주 동안 목회서신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코스타에 가느라,

지난 주는 시간을 놓쳐서

그만 빼먹고 말았습니다.

요즘은 정말로 시간이 빨리 지나가고

정해진 시간에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절실히 구하며 살고 있습니다.

목요일도 참 빠르게 다가오는군요!

하여튼 지난 두 주 동안

목요일 이메일 서신을 보내지 못한 것

(혹시 눈이 빠지게 기다리시는 분들이 계셨다면)

죄송한 마음을 먼저 전합니다.

2.

요즘 제가 우리 성도님들을 마음에 품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은

저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시는 성도님들께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꽉붙잡히시도록 도우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첫 단추를 올바로 꿰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에 참여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과 우리를 가로막던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로 의롭다고 칭함받았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 아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됨을

머리로 이해할 뿐 아니라

온 몸으로, 삶 전체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마음 깊은 곳에서 감사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을

시편기자는 다음과 같이 표현해 놓았습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34:8)

전반부의 맛보아 알지어다

히브리어 본문에서 찾아보니 다음과 같습니다:

맛보라 그리고 보라 (taste and see).

이처럼 본문에는 맛보다 (그것도 살짝 찍어서 맛을 보는 것)”

보다라는 감각적인 표현들이 사용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하신 분 (히브리어: The Lord is good)임을

맛보고 눈으로 볼 만큼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맛볼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확실히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은

하나님을 피난처 삼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피하는 것도 복이라고 가르쳐주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어느 정도로

귀하고, 감사하고,

또 가치가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한 주간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시고

영혼의 안목으로 바라보시고

삶의 길목 길목에서

하나님을 피난처 삼으시는 복된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서머나 성도님들 한 분 한 분께서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께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삶 가운데서

눈으로 볼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샬롬

하목사 올림

(2010.7.22 메일 목회서신)

“내니 두려워 말라”

인생길을 바다를 항해하는 배에 비유하곤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망망대해와 같습니다. 그곳에 우리 개인의 인생은 작은 조각배에 불과할 것입니다. 아무리 배가 작아도 바다가 고요하면 어려움 없이 항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다에서는 늘 크고 작은 풍랑이 닥쳐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네 인생길에도 풍랑이 쉬지 않고 불어옵니다. 그러고 보니 인생을 바닷길에 비유하는 것은 아주 적합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갖고 5천명을 먹이는 기적을 베푸시는 것을 본 사람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사람들을 피해서 한적한 산에 가셔서 기도하십니다. 요한복음에는 없지만 병행본문인 마태복음 14장 22절에 의하면 많은 무리들이 몰려오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먼저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자신만 남아서 무리들을 모두 돌려보내십니다. 그리고 산에 올라가셔서 홀로 기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넙니다. 갈릴리 바다는 해저 680피트가 되는 호수로 종종 호수가 뒤엎이는 것 같은 풍랑이 일곤 했답니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널 때 이미 날이 어두웠습니다. 거기에 풍랑까지 일어서 제자들이 탄 배는 밤새도록 호수 가운데서 헤매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4장 25절의 밤 사경은 우리 시간으로 새벽 3시에서 6시에 해당합니다. 제자들은 두려웠습니다. 그들이 탄 나무로 만든 배는 이미 방향을 잃고 통제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산에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시는 능력을 가진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탄 배가 풍랑을 맞은 것을 알고 계셨을 겁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먼저 기도하시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장 우선시하셨습니다. 물론 풍랑을 맞은 제자들이 담대하게 믿음으로 이길 수 있기를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마태복음에서는 제자들이“유령”이라고 했다고 전합니다. 예수님인 것을 알아본 베드로가 바다에 뛰어들어서 실제로 예수님처럼 물위를 걷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물을 내려다보는 순간 베드로는 바다 속에 빠집니다. 요한복음에는 이런 모든 사건들이 생략된 채, 예수님께서 배를 향해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두려워했다고 전합니다. 풍랑으로 혼비백산했던 제자들은 예수님마저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 오셨고,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내니 두려워말라.”그때에 비로소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안전하게 호수를 건널 수 있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실 만큼 능력이 있으신 예수님께서 풍랑까지 잔잔케하셨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표적입니다. 바다 한 가운데 풍랑을 맞은 제자들의 모습은 인생길 한 가운데서 어려움을 당하고 안절부절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밀려오는 두려움을 주체할 수 없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찾아 오셔서 안심시키시는 예수님이십니다.:“내니 두려워 말라!” 예수님은 절대로 우리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결국에는 안전한 포구로 인도해 주십니다.-河-

오병이어

오병이어(五餠二魚)의 표적은 우리들에게 매우 친숙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열두 광주리가 남은 놀라운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 건너편에 가셨습니다. 어느덧 예수님께서는 유명인이 되셔서 어디를 가든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병 고침을 받는 것은 물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들의 영적 갈증을 해소하려고 모였습니다.

예수님 당시는 말씀이 갈(渴)하던 시대였습니다. 구약의 말라기 이후로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보살피기보다 각기 자기의 길을 가기에 바빴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로마 정권과 결탁해서 자신의 배를 채웠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앙만을 지키면서 백성들을 무시했고, 어떤 사람들은 폭력을 통해서 로마 정권을 물리치려고 쿠데타를 도모했습니다. 그때 일반 백성들은 설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몸과 마음은 지쳐 있었고, 식민지하에서 하루하루 쪼들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소외되고 가난하고 힘겹게 살아가는 백성들을 찾아가셨습니다. q백성들도 예수님이 계신 곳에 모여들어서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비록 하루하루의 삶이 먹을 양식도 없을 만큼 힘겨웠지만 예수님께서 전해주시는 복음은 이들에게 소망이 되었고 능력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큰 무리”가 예수님과 더불어 산에 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때는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다가오던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무리들을 보니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한 끼라도 그들을 배불리 먹이고 싶으셨습니다. 아니 예수님은 충분히 그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어디서 떡을 사서 이 무리들을 먹일 수 있을까?“라고 물으십니다. 빌립은 베드로와 같은 마을 출신으로 일찍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을 시험(test)하신 것입니다. 빌립은 그 많은 무리를 먹이기 위해서 2백 데나리온이라는 큰돈이 필요하다고 펄쩍 뜁니다. 그동안 예수님께서 표적을 베푸시는 것을 보았다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돈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을 기대했어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었던 빌립은 안타깝게도 세상적으로 예수님의 물음에 대답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말하기를 한 아이가 도시락으로 싸온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가 있답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갖고 축사하시고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어린 아이가 내놓은 작은 음식이 시발점이 되어서 오천 명이 먹는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기적은 작고 순수한 동기에서 시작됩니다. 아무리 작은 것도 하나님께 쓰임 받으면 커다란 표적을 일으키는 시발점이 됩니다. 오병이어의 표적은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공급자가 되시고 자신이 스스로 생명의 떡이 되심을 보여줍니다. 오천 명을 먹이시는 표적을 체험한 백성들은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14절)고 고백했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오병이어의 기적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보잘 것 없는 작은 시작이 하나님의 능력을 불러일으키고 오천 명이 배불리 먹는 나눔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임할 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