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길 위에서…

베이지역에 살면서 누리는 가장 큰 혜택가운데 하나가 좋은 날씨입니다. 그런데 아주 맑은 날 자동차를 갖고 도로에 나가보면 아슬아슬하게 곡예운전을 하는 차들이 많이 눈에 띕니다. 출퇴근 시간도 아닌데 길이 막힌다 싶으면 영락없이 얼마 가지 않아서 사고차량들이 길 옆에 서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사고 날 장소가 아닌데 대형사고가 난 경우도 종종 발견합니다.

날씨가 좋고 도로도 한적한 데 왜 사고가 날까요? 밴더빌트라는 분이 “트래픽(traffic,2008)”이라는 책을 출판해서 뉴욕 타임즈의 베스트 셀러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운전습관과 교통사고의 원인 등을 운전자의 심리적 요인과 연관시켜서 분석하였습니다. 몇 가지 흥미로운 내용을 소개하면, 운전자들은 날씨가 맑고 도로가 한가해 보이면 기분이 좋아지면서 약간 방심하는 경향이 있답니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속력을 내게 되거나, 전화도 걸고, 음악도 듣고, 옆에 마음이 맞는 사람이 동승했다면 얘기꽃을 피우면서 정작 집중해야 할 운전에 소홀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고의 원인이 됩니다. 운전하는 동안 3초의 방심이 사고로 이어질 확률이 그 어느 것보다 크답니다.

앞에 여성 운전자가 있을 때 자동차 경적을 더 크게 자주 울립니다. 그런 점에서 여성운전자들은 희생자인 셈입니다. 좋은 차가 있으면 경적을 쉽게 울리지 못한답니다. 시골이나 작은 도시에서는 경적을 울리는 회수가 현저하게 줄어듭니다. 반면에 뉴욕과 같은 대도시에서는 너도나도 경적을 울려댑니다. 시골에서는 행여나 아는 사람이 있을 까 조심하는 것이고, 대도시에서는 아는 사람을 만날 확률이 거의 없기에 마구 행동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참 간사합니다. 또한 아무리 경적을 크게 울린다고 앞에서 미적거리던 자동차 운전자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습니다. 경적을 울리는 사람이나 그것을 당하는 사람이나 모두 기분만 상할 뿐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경적을 울림과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욕설에 가까운 말을 내뱉습니다. 아뿔싸! 옆 자리에 고상한 분을 모시고 간다면 자신의 인격만 손상을 입은 셈입니다.

길이 막힐 때, 옆 차선의 자동차가 빨리 가는 것 같습니다. 얼른 차선을 바꾸어 보지만 다시 그 길이 막히고 이번에는 옛 차선의 차들이 잘 빠져나갑니다. 그때 운전자가 심리적으로 당황하게 되고, 이리저리 차선을 바꾼다면 그것은 교통사고의 원인과 직결됩니다. 저자는 여러 가지 연구결과를 인용하면서 길이 막힌 상태에서 차선을 바꾸는 것보다 자기가 서 있는 차선이 잘 빠지기를 기대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조언합니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은 교통사고나 교통체증의 원인은 도로나 자동차에 있지 않고 운전자의 심리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어디 운전만 그렇겠습니까? 인생길이 활짝 개이면 자신감이 넘쳐서 이 일 저 일에 손을 대다가 집중력을 잃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실패를 거듭한다면, 그것을 만회하려고 허둥지둥 서둘다가 더 큰 수렁에 빠지기도 합니다. 운전자가 도로나 상대방을 탓하듯이, 환경이나 다른 사람들 심지어 부모나 가족을 탓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생길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자신입니다. 남의 탓을 한다고 인생길이 좋아지지 않고, 서로 기분만 상할 뿐입니다. 인생의 차선을 자주 바꿀 필요도 없습니다. 끈기를 갖고 차분하게 주어진 인생길을 운전해 가는 것이 최선이자 가장 빠른 지름길입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가 걷는 인생길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가는 인생길이 가장 행복한 길임을 믿기 때문입니다.:”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시편37:5-6)

[2010년 6월 4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스바냐서 3장을 살펴보는 세 번째 시간입니다. 역사의 격동기에 살았던 스바냐 선지자는 하나님의 관심을, 현미경을 통해서 관찰하듯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에게로 차츰차츰 좁혀 옵니다. 3장의 전반부에서(1-7절) 하나님께서는 패역과 더러움과 포학으로 대표되는 예루살렘에 거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아침마다 끊임없이 공의를 선포하셨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두 번째 문단에서(8-13절),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있는 남은 자들을 주목하십니다. 이들은 도시 전체가 하나님을 떠나는 죄를 범했음에도 남아서 신앙을 지키고 하나님을 경외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곤고함과 가난함”입니다. 이들은 세상에 별로 내세울 것이 없었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보호하셨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루살렘 가운데 남겨놓으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남은 자들은 죄의 길로 가지 않았습니다. 거짓을 말하거나 남들을 속이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서로 속고 속이는 패역한 예루살렘에서 이처럼 죄를 짓지 않고 산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남겨 놓으신 자들은 세상 한 복판에서 거룩함을 유지했습니다. 이것이 남은자의 신앙입니다.

이제 오늘과 다음 시간에 살펴볼 스바냐 3장의 마지막 부분은(14-20절) 찬양으로 시작합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예루살렘 사람들을 찬양과 기쁨의 축제의 자리로 초대합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거치고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 것을 목도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구원받은 주님의 백성들입니다. “시온의 딸”과 “예루살렘의 딸”이라는 표현은 예루살렘에 거하는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14절에 등장하는 명령형 동사들은 축제가 시작되었음을 가리킵니다.:“노래할찌어다”“기쁘게 부를찌어다”“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찌어다.”말씀을 읽고만 있어도 저절로 기쁨이 밀려오고 찬양하게 됩니다. 노래하고 기쁘게 부르는 것은 승리의 팡파르입니다. 승리의 종을 치고 승전가를 외쳐 부르는 것입니다. 반면에“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찌어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내적 기쁨입니다. 그러고 보니 안과 밖이 모두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찬양입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의 누리는 하늘나라의 삶입니다.

이렇게 소리쳐 외치며 마음으로 기뻐할 이유가 15절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백성들 가운데 계십니다. 형벌을 제해 주셨고 원수를 쫓아내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가 죽음이라는 형벌을 면제받았고, 사망의 세력을 모두 이기신 것을 연상시킵니다. 다시는 화를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우리들이 누려야 할 자유의 삶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구원을 얻은 우리들은 세상에서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더 이상 죽음의 세력이 우리를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16절에서 다시 한 번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두려움은 모든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살아 있으면 삶에 대한 공포가 있고, 죽음이 임박하다면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다. 두려움이 밀려오면 삶에 의욕을 잃고 손을 늘어뜨리게 됩니다. 절망과 낙심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입니다. 구원 받은 백성들은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손을 늘어뜨려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전능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河-

“너희는 두려워 하지 말찌어다”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베이지역에도

이상기온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5월 말이면

건기가 이미 시작되고

전형적인 화창한 날씨가 계속되어야 하는데

오늘 아침에는 비가 꽤 많이 내렸습니다.

지구의 온난화 현상을 비롯해서

지구상에 서서히 몰려오는 이상징후들을

우리들 개인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갑갑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한동안 지배하라는 뜻으로 알고

기독교인들마저도 자연을 훼손하는 일에 가책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지배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관리하라는 명령에 더 가까운데 말씀인데

각자 개인의 삶에 지쳐서

지구야 어떻게든지 신경 쓸 틈도 없었는데

비가 오고 을씨년스러운 날씨가 계속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큰 세상이 신경 쓰이는 요즘입니다.

2.

수요예배시간에

소예언서 학개를 공부하면서

저 역시 말씀의 은혜를 체험합니다.

학개라는 선지자도 생소하고

단지 2장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예언서이기에

소홀이 여기기 쉬웠습니다.

부흥회 같은 데 가면

교회를 건축할 때 학개서를 인용하면서

성전건축과 관련된

하나님의 질책과 축복에 대해서

약간(?) 겁을 주는 말씀이 전해지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학개서가 기록되던 당시의 상황을 무시한 채,

성경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추하게 해석한 소치입니다.

학개서가 기록될 당시의 이스라엘 상황은

꼭 성전이 필요했습니다.

나라도 잃고, 예루살렘 성전도 없어졌고

경제적으로도 피폐했기에

신앙의 구심점이 되는 성전이 꼭 필요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성전을 다시 짓던 공사는

18년간이나 중단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신앙과 삶이 중도에 멈춰버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맥이 풀렸고

소망이 없었고

신앙마저 흔들릴 즈음에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를 불러서

성전의 건축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기록될 당시의 상황을 먼저 살펴본 후에

그 말씀을 우리의 상황에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3.

지난 이메일 서신에도

학개서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1:14)

그 약속을 믿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달여 성전을 다시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짓는 성전이 너무 형편없었습니다.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짓는 성전이 오죽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성전을 짓기 시작했는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성전을 짓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가 보잘것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힘이 빠졌습니다.

예전에 있었던 솔로몬 성전을 본 사람들은

이전의 영광과 비교했습니다.

성전 건축을 놓고 백성들 마음 속에서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때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찌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함이니라.

(Be strong and work for I am with you)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2:4)

수요예배에서 말씀 드렸듯이

하나님께서는 2천 년도 훨씬 전에 이스라엘 백성과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그들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신이 오히려 너희 중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 말라. (2:5)

과거에 주신 언약을 하나님께서는 기억하고 계십니다.

지금 현재는 하나님의 신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머물러있습니다.

여기에 더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언약을 지키시고

성령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것을 확신하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4.

우리들 역시 하나님을 믿으면서

삶의 열매나 결과가 초라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 눈에 보잘것없는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기억할 말씀이 바로 학개 2:4-5절입니다.

스스로 굳세게 하고 일할 찌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함이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라.

하나님의 신이 너희 가운데 머물러 있으니

두려워 말라.

메일 서신을 준비하면서

어제 나누었던 학개 말씀을 다시 한번 묵상하니

말씀의 능력이 마음에 깊이 다가옵니다.

힘이 생깁니다. 왠지 자신감이 생깁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오늘 하루 학개서 2:4-5말씀을 꼭 붙잡고

두려움을 능히 넘어가시는

서머나 식구들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행여나 자신의 삶이 보잘것없다고 생각하시는

서머나 식구들이 계시다면

그 동안 열심히 하나님을 믿었는데

삶의 열매가 초라하다고 느끼시는 성도님들이 계시다면

신실하신 하나님,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는 성령님을 꼭 붙잡고

하나님 말씀대로 힘차게 다시 시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샬롬

하목사 올림

(2010 5 27)

남은 자의 하나님

므낫세라는 아주 못된 왕의 55년 통치는 이스라엘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우상숭배는 물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조차도 다른 신을 섬기는 혼합주의와 신앙자체에 대한 무관심에 빠졌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숨겨놓으신 스바냐 선지자가 나타나서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강력히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숨어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등을 돌리고 있었음을 지적하면서 회개를 촉구합니다.:“수치를 모르는 백성들아 모일찌어다.”(습2:1). 하지만 백성들은 자신들의 수치를 깨닫지 못하는 또 다른 죄를 범하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는 스바냐 3장에 나타난 예루살렘의 죄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3장 1절에 있는 “패역, 더러움, 포학”이 당시 예루살렘에 만연한 죄악이었습니다. 세상이 그토록 망가졌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세상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그 중에 거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세상에 거하셨고, 말할 수 없을 만큼 더럽고 패역한 세상에서 아침마다 끊임없이 바른 길(공의)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죄는 하나님 백성들의 영적감각을 마비시킨다는 사실을 우리도 기억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예루살렘과 온 세상을 벌하기로 결정하십니다. 오늘 본문 8절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질투의 불”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너무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스바냐와 다른 선지자를 보내셔서 어떻게든 죄에 빠진 세상을 구하려 애쓰셨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은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눈길 한번 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났고, 거룩한 백성들이 더럽고 패역한 악한 영에게 갔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떠나서 다른 사람에게 갔을 때 느끼는 것이 질투심이듯이 하나님도 자신의 백성을 향해서 질투하는 마음이 생기셨고 그것은 곧 심판으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목적은 새로운 세상을 다시 만드시려는 또 하나의 창조행위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는 산자의 하나님이십니다. 9절은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탑을 쌓으려는 인간들을 벌하셨습니다. 언어를 다르게 만드셨고 인류를 흩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런데 스바냐서에서는 바벨탑 심판과 반대되는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세상 열국이 깨끗한 입술로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로 모입니다. 9절에 보면 지면에 흩어졌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모여듭니다. 옛 것이 모두 지나고 새로운 세상이 활짝 열린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에 여전히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보다 자기가 더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것입니다. 12절에는 새로운 세상의 주역이 될 사람들이 나옵니다.“곤고한 자들은 세상 삶에 지쳐서 몸과 마음이 낮아진 사람들입니다.“가난한 자들은 말 그대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은 악에서 떠나고, 더 이상 속이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새로운 세상에서 먹고 누우면서 하늘의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끝가지 신앙을 지키고 하나님만을 의지했던“남은 자”들에게 임하는 복입니다. 서머나 식구들 모두 남은자의 하나님을 만나시고 그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제가 골몰히 생각하는 단어가

자리라는 말입니다.

자리를 잡다라는 말은

우리들이 어디엔가 있을 곳에 있어야 함을 뜻합니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말은

욕심을 부리거나 미련을 갖지 않고

마음을 비운다는 뜻입니다.

하여튼

우리들은 자리가 필요합니다.

일 자리, 쉴 자리, 놀 자리, 잠자리 등등.

히브리어로 자리는 말은

앉다” “머무르다” “거주하다라는 뜻의 야샤브라는

동사로부터 시작됩니다.

여기서 거주지” “” “정착

이민비자를 갖고 사는 사람들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영어
“resident alien”이라는 말도 히브리어 명사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결국 자리는 우리가 현재 거하는 곳입니다.

또한 우리들은 어떤 자리에든지 있어야 합니다.

공간을 초월할 수 없기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자리를 떠날 수 없습니다.

2,

구약성경 창세기의 요셉을 생각해 봅니다.

요셉의 처음 자리는 꽤 괜찮았습니다.

형들의 시기를 받으면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형들이 그를 팔아버리면서

그의 자리가 외국으로 옮겨집니다.

경호대장 보디발의 종으로 팔립니다.

요셉은 노예라는 신분으로 전락한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보디발의 집을 책임 맡은 청지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모함을 받고

다시 감옥에 갇힙니다.

그의 자리는 점점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감옥에서도 최선을 다하면서

감옥의 제반 사무를 처리하는 총무가 됩니다.

요셉이 이처럼 아버지 집에서,

이집트의 노예로,

감옥의 죄수로

그의 자리가 바뀌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와 늘 함께 하셨습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끌어올려져서

이집트의 총리라는 자리까지 올라갑니다.

나중에는 자신을 판 형제들과 아버지 야곱을

이집트로 불러서

화해의 잔치자리를 마련합니다.

3.

우리는 요셉에 대한 말씀을 읽으면서

그가 이집트의 총리가 된 모습에 초점을 맞춥니다.

온 가족과 화해한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출세지향적인 세상의 관점으로,

섣불리 결론부터 내리고 성경을 읽어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요셉에 대한 말씀에서 중요한 키워드(key word)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 39:2)

그의 자리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려가는 자리든지, 올라간 자리든지,

웅덩이에 빠진 자리든지, 꿈을 해몽하는 왕궁이든지

요셉이 어디에 있든지

요셉의 모든 삶의 과정 속에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

임마누엘 신앙이

요셉의 진정한 영성입니다.

우리들도 때로는 자리에 연연합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은 자리를 그리워하기도 합니다.

현재의 자리가 사람들이 보기에 초라하다면

기가 죽고 손을 축늘어뜨리고 살아갑니다.

세상에 살다 보니 자연스레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눈을 하나님께 향하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신뢰하면

어떤 자리에 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생각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온전한 신앙입니다.

엊그제 수요예배에서도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아주 크게 들렸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노라. (학개 1:13)

오늘 하루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그 자리에서 감사와 기쁨의 찬양을 드리는

서머나 식구들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고

우리의 자리가 너무 복에 겨워서 하나님을 잊을 수도 있고

우리의 자리가 초라해 보여서 기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서머나 식구들이 자신들이 거하는 자리를 바라보지 않고

지금 여기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샬롬

하목사 올림

(2010 520일 이메일 목회서신)

세상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꿈을 꾸는 교회라는 연속설교를 지난 주로 마무리하였습니다. 하지만 교회에 대한 말씀은 틈틈이 계속 전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겨진 사명 두 가지는 가정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은 우리들의 삶의 터전이요 보금자리입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하늘나라의 모델하우스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친교하고, 세상에 생수를 공급하는 영적 오아시스입니다.

가정과 교회가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공동체인 반면에, 세상에는 사람들이 세워놓고 운영하는 여러 가지 조직과 활동들이 있습니다. 직장, 학교, 정부, 그리고 여러 모임들이 대표적입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모임도 있고, 하나님에 대해서 무관심한 모임도 있고, 더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은 여러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향해서 어떤 마음을 가지실까요? 신약성경에 의하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

그동안 수요예배에서는 구약의 소예언서를 공부해왔습니다. 호세아로 시작된 공부가 어느덧 막바지에 다다라서 올 상반기 중에 소예언서 12권을 모두 마칠 것 같습니다. 구약의 소예언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회개와 소망의 메시지와 더불어 악한 권력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가 선포됩니다. 최근에는 스바냐서를 공부하면서, 마지막 3장을 남겨놓고 있는데 마지막 장은 앞으로 3번에 걸쳐서 주일예배에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남유다마저 멸망할 즈음이었습니다. 므낫세라는 왕이 55년 동안 통치하면서 신앙은 물론 나라가 모두 엉망진창이 되었습니다. 므낫세를 이어서 요시야가 어린나이에 왕이 됩니다. 요시야는 신앙을 바로세우는 개혁을 단행합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바로 그 즈음에 활동하면서 회개와 갱신 그리고 구원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앞으로 스바냐 3장을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꿈을 꾸시고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가진 모습을 통해서 우리들의 삶과 교회를 돌아보기 원합니다. 자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우리를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나기 원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도 비슷합니다. 악하고 타락한 세상을 바라보면 희망의 빛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조차도 스바냐 1장에서 지적한 우상숭배, 혼합주의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 속에 살아갑니다. 3장 1절의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은 당시 예루살렘을 가리키는데, 이 말씀은 현재 우리들이 사는 세상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세상 가운데 계십니다. 그곳에서 공의와 심판 그리고 사랑과 용서를 펼쳐 보이십니다. 진실로 자신을 찾는 남은 자들을 보호하시고 그들과 더불어 기뻐하십니다.

이번 설교를 통해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고 그 하나님과 기쁨을 나누는 우리 모두가 되기 원합니다. –

강건하시기를…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은

컴퓨터에 문제가 생겨서

고든 목사님과 점심식사를 한 것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컴퓨터와 씨름했습니다.

매일같이 똑같은 일상에

실증이 나기도 하지만

이렇게 컴퓨터라도 고장이 나는 날에는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일상이 도리어 그립습니다.

아무런 문제 없이

하루 하루를 맞이하는 것 자체가

행복이고 알찬 삶임을 다시금 깨달은 하루였습니다.

2.

지난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칼리스토가로 경로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제가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여섯 번째 (작년에는 두 번) 똑 같은 장소로

경로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장소만 같은 것이 아닙니다.

매번 갈 때 마다

전도사님과 권사님들이

거의 변함없이 같은 멤버로 참여하십니다.

경로여행의 프로그램도 매번 비슷합니다.

12시 경에 도착해서

간단히 점심 먹고 온천욕하기

5시경에 갈비 바비큐를 맛있게/많이 드시고

저녁에는 전도사님 방에 모여서 예배와 퀴즈 등등

피곤한 몸에 일찍 잠자리에 드신 후에

젊은(?) 권사님들께서 준비하신 아침 드시고 또 다시 온천욕하기,

점심을 간단히 먹고 중간에 와이너리나 근처 공원에서 한 두 시간 담소하고

오는 길에 이권사님댁에서

맛있는 햄버거를 대접받는 것으로 경로여행이 끝이 납니다.

매번 같은 장소 (심지어 방과 바비큐 장소도 똑 같은 곳을 예약함),

거의 같은 프로그램,

함께 가시는 권사님들도 거의 같은 멤버

이렇게 모든 것이 비슷하게 매년 경로여행을 다녀옵니다.

3.

그래도 연로하신 분들을 모시고 가기에 기도가 저절로 나옵니다.

그리고 세심히 살펴보게 됩니다.

행여나 온천욕을 하시는 것이 힘에 부치지 않으실까

저녁에 드신 갈비를 잘 소화시키실까

몸살이나 감기기운이 있는 분들은 없으신지

멋쟁이 수영복을 입으시고

온천욕을 즐기시는 전도사님과 권사님들은

꼭 아이들 같이 순수해 보이고

칼리스토가만 가면 기분이 업(up)-되심을 봅니다.

그런데 해마다 차이가 납니다.

조금씩 조금씩 온천욕을 하시는 시간이 줄어드십니다.

1-2년 전만 해도 저녁 식사 후에도 온천욕을 하셨는데

올 해는 낮에 한번으로 족하신 듯 합니다.

전도사님의 몸매는 지나치게(?) 날씬해지셨습니다.

오고 가는 길에 내년에 또 올까?”라고 말씀하시는

낸시 권사님의 말씀이 귓전을 타고 마음속까지 깊이 내려옵니다.

70대 권사님들은 10년은 젊어 보이시고

80대 전도사님과 권사님들도 예전이나 비슷해 보이시는데

왠지 모르게 마음에 애틋함이 밀려옵니다.

건강하십시오.

오래 사셔서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셔야지요.

우리 교회는 전도사님과 권사님의 기도로 세워집니다.

작은 건물이라도 우리 교회 갖는 것을 보셔야지요.

조심 조심 운전하면서 드리는 부탁입니다.

내년에도 모든 분들을 그대로 모시고

경로여행에 다녀올 수 있기를 속으로 기도하면서 말입니다.

경로여행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이모저모로 섬겨주신

모든 성도님들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 어르신들의 건강을 책임져 주옵소서.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라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을 꼭 붙잡고 살기로 약속하셨습니다.

말씀대로 전도사님과 권사님들을

하늘의 힘으로 강건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샬롬

하목사 올림

(2010 513일 이메일 목회서신)

하나님의 꿈을 꾸는 교회 (4) : “한 몸”

“하나님의 꿈을 꾸는 교회”라는 주제로 연속해서 설교하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첫째 시간에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 교회가 모델로 삼아야 할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예배, 전도, 훈련, 교제가 교회 안에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겉모습만 번드르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수함과 진실함이 교회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은 물론 세상에서 칭송을 받을 정도의 좋은 평판을 얻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이 모든 것을 성령의 임재와 역사를 통해서 이룰 수 있었습니다.

연속 설교 두 번째 시간에는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교회의 참된 모습임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전심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교회에서의 예배는 물론 6일 동안 우리의 삶 자체가 예배가 되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우리 교회가 꿈꾸는 구제와 선교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세상에서 소금으로/빛으로 사는 비결은 착한행실로 가능함을 마태복음 말씀을 통해서 배웠고, 구제와 선교는 교회가 행할 수 있는 착한행실이라고 했습니다. 구제와 선교를 위한 우리의 기도제목이 속히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오늘 마지막 시간의 주제는 “한 몸”입니다. 하나님의 꿈을 꾸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one body)을 이루는 것입니다. 몸에는 여러 지체가 있습니다. 심장처럼 생명을 유지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기관도 있고, 머리카락처럼 숫자가 줄어도 생명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 지체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몸을 이루는 지체들입니다. 버릴 것이 하나도 없고, 하나님 앞에서는 귀하고 천한 것도 없습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인 고전 12:12절에서는 “한 몸이 되었고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요, 우리를 사랑의 띠로 하나 되게 하시는 분은 우리들 안에 계신 성령님이십니다.

교회를 다른 말로 신앙공동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단지 우리교회와 같은 개체교회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신앙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여기서“공동체”라는 말은 목적이나 동기 심지어 운명까지 함께하는 모임 또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핏값을 주고 사신 성도들로 이루어진 교회야말로 진정한 공동체임에 틀림없습니다. 게다가 앞으로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될 이웃들이기에 이 세상의 어떤 공동체보다 더 찐하고 강력한 위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피로 하나님의 가족이 된 하늘나라 백성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꿈을 꾸는 교회는 가족 같은 교회입니다. 가족이라고 해서 늘 평화롭고 사랑이 넘치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 안에는 갈등도 있고 어려움도 있습니다. 하지만 피를 나눈 가족이기에 서로 받아주고, 도와주고, 품어주면서 어려움을 극복해 갑니다. 교회도 가족과 마찬가지로 동고동락하고, 갈등이 생겨도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면서 풀어가고,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마음껏 우리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요즘은 우리 교회가 말 그대로 평안하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더욱 겸손하게 그리고 서로 사랑하면서 예수님 안에서 한 몸을 이뤄야 합니다. –

봄날의 기도 – 속삭임

좋은 아침입니다.

1.

올 해는 늦게까지 비가 오더니

드디어 샌프란시스코에 걸맞은 날씨를 되찾았습니다.

하늘이 푸르고 무척 높습니다.

19th ave에서 SFSU 를 지나면

도로 한가운데로 전차길이 있지요?

철길 가에 피어있는 들꽃들이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사시느라고 무척 바쁘시지만

종종 밖에 나와서 하늘도 쳐다보시고,

해가 길어졌으니 가까운 공원에 가서 걷기도 하시고,

그곳에 피어있는 꽃들과도 대화해 보심이 어떨지요?

2.

하나님의 꿈을 꾸는 교회라는 주제로

주일설교를 준비했던 지난 한달 동안

우리 교회를 마음에 품고 간절히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기도시간 외에도

자동차 안에서, 걷다가도

집에서 휴식을 취하다 가고,

시시때때로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꿈을 꾸고 이루는 교회가 되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합니다.

교회가 그렇게 되기 위해서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이 하나님의 꿈을 꾸는 성도님들이 되시고

그 꿈을 이루는 삶이 되셔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님들을 눈에 그리면서 기도합니다.

모든 서머나 식구들께서 하나님의 꿈을 꾸시고 그 꿈을 이루게 해 주세요

그러면서 제가 은혜를 받습니다.

교회와 서머나 식구들을 위해서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은혜요 기쁨입니다.

어디서든지, 언제든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 자체가 축복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무엇으로 사는가?

교회가 무엇으로 건강하게 세워지는가?

어떻게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기도 밖에 없습니다.

3.

예전에 수요예배에서

기도에 대한 성경공부를 하면서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과 대화하듯이/속삭이듯이

기도하는 것이 신앙생활을 풍요롭게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좋은 봄날!

시시때때로 하나님과 대화로 기도하면서

하루를 지내는 것은

샌프란시스코의 경치에 비길 데 없는 또 하나의 축복입니다.

오늘 하루

일터에서, 가정에서, 자동차 안에서, 거리에서

하나님과 속삭이시면서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과

은밀한 데이트를 즐겨보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

오늘 하루 동안

서머나 식구들이

기도가운데

주님과 친밀한 교제의 시간을 갖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샬롬

하목사 올림

(2010 5 6일 이메일 목회서신)

하나님의 꿈을 꾸는 교회 (3) : 빛으로 소금으로

예전에 젊은이들과 함께 목회할 때, 개신교회는 왜 여러 교단으로 나뉘어졌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았습니다. 교회의 갈등과 분열이 고스란히 드러난 부끄러운 모습이라고 솔직히 답변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분열을 통해서도 일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각기 다른 신앙의 색깔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신앙에 맞는 교단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다양한 모습으로 세상에 전파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이 지역에 299개의 교회가 있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교회숫자가 참 많다는 생각과 동시에 한 개를 더 채워서 300개가 되면 좋겠다는 아쉬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교회가 많은 것이나 개신교 안에 여러 교단들이 있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음을 자각하고 규모가 크던지 작던지 개별 교회에 맡겨진 사명에 충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교회의 숫자는 많을수록 좋습니다. 더 많은 하나님의 사명을 다양하게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꽤 오래되었지만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오늘날 이 자리에 서 있는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신 사명에 주력하는 것이 우리 교회가 할 일입니다. 우리 교회의 사명은 주보 뒷면에 있듯이 세 가지입니다.: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에 충실하며, 2)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우고, 3) 구제와 선교에 힘씀으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려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구원의 복음을 확증하고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께 영광돌립니다. 삶을 통한 예배를 통해서 복음의 능력을 세상 속에서 발휘합니다. 교회와 성도들 안에 구원의 복음이 살아서 역사하기를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훈련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구원의 복음을 세상에 전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것 역시 훈련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교회적으로 중고등부와 청년부는 전도사님과 선생님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을 세워 나갑니다. 성인들은 구역 속회와 지속적인 성경공부를 통해서 신앙과 삶의 훈련을 받습니다. 올해도 새로 취임하신 권사님들의 헌금으로 교회안의 젊은이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게 되었습니다.

구제와 선교 역시 우리 교회에 맡겨진 중요한 사명입니다. 구제는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돕는 것입니다. 선교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는데 참여하는 것입니다. 조전도사님께서 시작하신 소년소녀돕기 사역이 성도님들의 참여덕분에 매월 30여명에게 생활비를 보내줍니다. 올해부터 네팔의 박재면 선교사님을 미력하나마 돕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농촌교회나 지방의 작은 교회들도 도울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매월 홈리스 돕기 무료 배식은 성도님들의 자원봉사를 통해서 100여명의 노숙자들을 기쁨으로 그리고 거뜬히 돕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한 마음으로 교회를 세우시는 성도님들께 박수를 보냅니다. 하나님의 꿈을 꾸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이처럼 방향을 잘 잡았으니 이제 속도와 힘을 더하면 될 것 같습니다. 우리 서머나 교회가 단지 많은 교회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올바로 감당하는 특별한(unique) 교회로 자라가기를 기도하면서 함께 노력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