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자 이웃들

지난 해에 새로 렌트해서 들어간 미국교회는 매주 수요일마다 노숙자(홈리스)들에게 저녁식사를 대접합니다. 미국 교회 목사님과 대화하는 중에 노숙자를 돕는 손길이 더 필요하다는 말씀을 듣고 여선교회와 자원하신 성도님들을 중심으로 노숙자 돕기를 시작했습니다. 올해부터는 우리 교회가 전담해서 매월 한번씩 100여명의 노숙자들에게 저녁을 대접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노숙자들을 대하거나 가까이하는 것이 편치 않았습니다. 노숙자들에 대한 편견도 갖고 있었습니다.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분들과도 친분(?)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만난 세 분의 노숙자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한 분은 비교적 깨끗한 옷을 입고 오시는 할머니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인 그 할머니는 저를 만나면 기도해 줍니다. 자신이 성령의 은사를 많이 체험했다면서 노숙자들의 영적 스승 역할을 합니다. 하루는 저에게 아주 작은 하모니카를 선물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하모니카를 즐겨 불어서 곡조만 알고 있으면 악보 없이도 연주할 수 있습니다. 즉석에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를 연주했더니 얼마나 기뻐하든지 그 얼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한 분은 중국 아저씨입니다. 이 분은 거의 매번 똑 같은 옷을 입고 있어서 가까이 가면 땀냄새가 많이 납니다. 이 아저씨는 심장이 좋지 않아서 종종 병원에 실려갑니다. 엊그제는 거리에서 괴한에게 머리를 맞았다면서 동양인들이 현금을 많이 소지하기에 괴한들의 표적이 된다고 조심하랍니다. 노숙자인 그 아저씨나 목사인 저나 현금을 많이 갖고 다닐 처지가 아닌데 서로 그런 얘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입니다. 한 번은 이 아저씨가 한 달여 보이지 않아서 큰 일을 당한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뉴욕에 있는 부모님을 방문하고 왔답니다. 그레이하운드를 타고 뉴욕을 다녀왔으니 얼마나 긴 여정이었을까요? 그에게도 찾아갈 부모님이 계셨다는 사실에 내심 깜짝 놀랐습니다. 부모님이 반겨주더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흐뭇한 표정을 짓습니다. 마음이 찡- 했습니다. 얼마나 부모님의 사랑이 그리웠으면 뉴욕까지 버스를 타고 다녀왔을까요!

또 다른 한 노숙자는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청년입니다. 키가 하도 커서 이 청년이 앉아 있는 것이나 제가 서 있는 것이나 비슷할 정도입니다. 이 젊은이는 수요일이 되면 일찍 교회에 와서 음식준비며 식탁 배열을 돕습니다. 지난 추수감사절에는 근사한 옷을 입고 왔습니다. 좋은 일이 있냐고 물었더니 취직이 되었답니다. 그런데 취직이 된 사람이 자꾸만 나타납니다. 기회를 보다가 어렵사리 직장생활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떨굽니다. 정부보조가 나오면 요리학교에 다니겠답니다. 그러면서 또 다시 씩- 웃습니다. 기도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얘기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엊그제 수요일에 만났는데 옷에서 땀냄새가 심하게 납니다. 심상치 않아서 학교는 다니냐고 하니까 돈이 없어서 못 다닌답니다.그러면서 횡설수설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참 선해 보이는 젊은이인데 무너진 인생을 다시 세우기가 그토록 어려운가 봅니다.

이렇게 지난 1년여 노숙자들을 만나면서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하나님을 믿고, 부모형제가 있고, 앞 길을 놓고 고민하는 이웃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잡채와 복음밥과 같은 한국 음식을 대접받고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면서 감사의 표시를 하는 그들에게서 정감을 느낍니다. 거리에서 그들을 마주치면 “패스터(pastor)”하면서 이가 다 빠진 채로 인사합니다. 그들의 모습과 표정 속에서 인생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배웁니다. 마음을 터놓고 대하면 누구든지 친구가 될 수 있음도 배웁니다. 무엇보다 그들을 통해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낍니다. (2010년 4월 30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사슴의 발처럼

좋은 아침입니다

1.

집에서 자동차로 10분여만 가면

280번 하이웨이 너머에 호숫가로 이어지는

산책로가 나옵니다.

오후 늦게 그곳에 운동을 갈 때면

거의 어김없이 사슴가족을 만납니다.

많으면 네댓 마리가 함께 어울려서

풀을 뜯어 먹습니다.

장난기가 발동해서

사슴 앞에서 발을 구르면

깜짝 놀란 사슴이 산등성이로 뛰어올라갑니다.

몸을 거의 피했다 싶으면 고개를 돌려서

빤히 저를 쳐다보는 눈빛은

처량하기도 하고 때로는 섬뜩하기도 합니다.

다리가 가늘고 길어서 그런가요?

사슴의 발걸음은 사뿐사뿐 무척 가볍습니다.

2.

어제 수요예배에서는

하박국 강해를 모두 마쳤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을 향해서 질문도 많았고

자기가 사는 세상을 놓고

깊은 고민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후에

자신의 생각과 신앙을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고백한 말씀이 바로

마지막 3장입니다.

하박국의 고백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떼가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3:17-19)

하박국을 모두 공부하고 나니

이 말씀이 예사로운 말씀이 아니라

마지막 날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굳게 믿은 하박국의 신앙고백인 것을 발견했습니다.

온 천지가 개벽하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는 순간에

하박국은 구원의 하나님을 꼭 붙잡습니다.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고 뼈가 썩을 만큼

무시무시한 심판 앞에서

하박국은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합니다.

마지막 19절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거닐

자신의 미래 모습을 눈에 그리면서 드리는

하박국의 찬양입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3.

하박국의 말씀을 단지

이 다음에 누릴 미래의 모습으로만 생각한다면

하나님 말씀의 위력이 반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삶 속에서 누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라!

이것은

하나님나라 백성의 변함없는 고백이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인생의 산등성이를

사슴처럼 가볍게 뛰어 올라가는 것입니다.

오늘이 4월의 마지막 날이고

내일부터 새로운 달 5월이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사슴처럼 한 달을 한 숨에 살아가시길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을 즐거워하면서

4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을 마무리하게 하시고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라는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을 갖고

힘차게 새달을 맞이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샬롬

하목사 올림

(2010 4 29일 이메일 목회서신)

하나님의 꿈을 꾸는 교회 (2) : 예배

이번 연속 설교의 제목이“하나님의 꿈을 꾸는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꿈이 무엇인지 알아야 그에 걸맞은 교회를 세울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오순절 성령강림과 동시에 탄생한 초대교회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꿈꾸시는 교회의 특징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가장 커다란 꿈인“예배”에 대해서 배우는 시간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교회가 가장 중요시해야 할 책임이요 사역입니다. 이에 대해서 존 스토트 목사님은 살아있는 교회(The Living Church)라는 책에서 진정한 예배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진정한 예배는 성경적인 예배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구체적으로 계시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예배는 성경에 근거하고, 성경말씀을 읽고 함께 나누는 순서가 예배의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진정한 예배는 모든 성도들이 함께 참여하는 예배입니다. 시편 113편 1절에서“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하였듯이 우리 모든 주님의 백성들이 한 마음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의 성호를 영화롭게 찬양해야 합니다.

셋째로 진정한 예배는 영적예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선포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으며, 영으로 찬양하고 기도하는 예배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진정한 예배입니다.

마지막으로 진정한 예배는 도덕적 예배입니다. 이것은 예배에는 당연히 올바른 삶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삶이 뒷받침되지 않는 예배는 위선일 뿐이요 허공을 치는 예식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것이 예배로 이어질 때 우리의 예배는 살아있는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로마서 12장 1절도 우리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산제사, 즉 살아있는 예배가 어떠해야 하는지 가르쳐줍니다. 무엇보다 예배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예배자일 뿐입니다. 성도들이 예배의 주체가 될 수 없고, 성도들이 예배의 기쁨을 독차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고, 그 다음에 그 기쁨과 은혜를 성도들이 공유할 때 온전한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예배는 거룩한 산제사가 되어야 합니다. 거룩함은 존 스토트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영적예배와 도덕적 예배를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성도의 삶이 세상 속에서 거룩하게 구별되었을 때 그 예배가 곧 살아있는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요즘에는 우리를 비롯한 대부분의 교회들이 첨단기기와 악기들을 동원해서 예배합니다. 예배에 오는 청중들은 찬양가운데 뜨거움을 체험하고 잘 준비된 메시지에은혜를 체험합니다. 물론 예배와 더불어 친교와 교회의 사역도 매우 조직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예배의 순서와 프로그램에 하나님이 아닌 인간들이 주역이라면 그것은 올바른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를 통해서 기쁨과 영광을 받으실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의 예배는 그리 화려하지 않고 소박합니다. 하지만 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시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라면 그것이야말로 살아있는 예배라는 사실입니다. 서머나 식구들의 삶과 우리 교회의 예배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고난을 함께 나누는 가정

좋은 아침입니다.

1.

엊그제 East bay의 안티옥에서는

어떤 부부가 아기를 자동차 안에 두고

자신들만 집안에 들어 갔다가

아기가 그만 목숨을 잃는 어이없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한국에서는 한 젊은 부부가

인터넷 도박에 빠져서 3개월 된 딸을 방치해서

굶어 죽게 했다는 신문보도도 있었습니다.

안티옥에서의 TV뉴스와

한국의 신문보도를 읽으면서

가정의 가장 귀한 부분인 부모 자식간의 사랑마저

금이 가고 있는 현실이

망원렌즈를 통해서 보여지는 듯 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2.

잠언 17 1절에서는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한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고 했습니다.

물론 가정 안에서의 화목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잠언 말씀처럼 마른 떡 한 조각밖에 없다면

그것은 매우 어려운 지경입니다.

말 그대로 극심한 어려움 속에 처한 가정임에 틀림없습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화목한 분위기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마른 떡 한 조각만 갖고도 어떻게 화목할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을

이번 주 속회 공과(“고난을 함께 나누는 가정”)에서 가르쳐 줍니다.

지난 번 위로에 대한 설교를 할 때

함께 나누었던 본문이기도 하지요 (고후 1:3-10).

이번 주 속회공과의 마지막 부분을 옮겨 왔습니다.:

고난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찾아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외 없이 누구에게나 찾아 옵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부끄러워할 것도, 수치스러워할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나누어야 합니다.특히 가정은 모든 고난의 상황을 이길 수 있는 힘이 공급되는 원천입니다. 만일 가족 안에서 이러한 위로와 격려가 이루어지면, 고난을 극복하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고난은 누구와 함께 이겨 나가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게 됩니다. 가족 안에서 두세 사람이 모여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합심하여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극복할 수 잇는 힘을 주시며, 사랑의 중보기도를 통해 큰 위로를 받게 하십니다. 가정과 교회에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할 때, 그 어느 곳에서도 받을 수 없는 성령의 풍성한 위로를 받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빵 한 조각밖에 없는 데도 화목할 수 있는 비결은

가정 안에서

서로를 위로해 주고, 손을 잡고 기도하면서, 격려해 주는 것입니다.

그때에 성령의 풍성한 위로가 임하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빵 한 조각밖에 남겨지지 않은 어려움 속에서도

화목한 가정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은

가정이 무너지듯이 교회들도 흔들거립니다.

아기를 자동차 안에 방치해 둔 부부처럼 무관심이 교회 안에 팽배해 있습니다.

인터넷 도박에 정신을 팔려 딸을 잃어버린 젊은 부부처럼

교회가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정신을 팔고 있기에 더욱 안타깝습니다.

지난 주부터 교회에 대해서 설교를 시작했는데

우리 교회가

가족 같은 교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한 가족이 된

신앙공동체로 자라가기를 기도하면서 말씀을 준비합니다.

우리 서머나 교회 안에

사랑이 있고, 위로가 있고, 서로를 향한 신뢰와 격려가 있다면

그리고 서로를 위해서 진실되게 기도해 주는 기도의 손들이 있다면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가 항상 임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

서머나 식구들의 모든 가정과 우리 교회를

주님의 넓으신 품에 품어 주시고

능하신 주의 오른손으로 확실히 붙잡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샬롬

하목사 올림

(2010 4 22일 이메일 목회서신)

하나님의 꿈을 꾸는 교회 (1)

제 마음속에 간직된 교회의 아름다운 풍경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다녔던 고향교회입니다. 언덕배기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십자가가 높이 세워져 있어서, 한간에서는 십자가 꼭대기에 설치된 피뢰침 때문에 온 동네에 낙뢰가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교회 마당에는 우물이 있었습니다. 우물 옆에는 종탑이 있었는데, 주일아침이 되면 종소리가 온 마을에 울려 퍼졌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리스도인들은 아니었지만, 교회의 종소리를 두고 불평하거나 시끄럽다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근방에 교회가 하나뿐이어서 산을 넘어서 교회에 오시는 성도님들도 계셨습니다. 그 교회가 감리교회였기에 저는 선택의 자유도 없이 저절로 감리 교인이 될 수밖에 없었지요. 지금은 커다란 도시가 들어섰고 교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제 마음속에 영원한 고향처럼 교회의 모습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목사로서 우리 성도님들은 우리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실지 늘 궁금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수십 년을 한 교회만 지키신 성도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것이 우리 교회의 저력이기도 합니다. 작년에 새로운 예배처소로 이사 오면서 교회가 단순히 건물이 아니라 그 이상임을 우리 모두 공감하고 있습니다.

미국 교회를 빌려서 예배하는 불편함도 있고, 하루속히 아담한 예배처소를 얻는 것이 우리의 기도제목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함께 예배하고 교회를 세워나가는 성도님들임을 다시 한 번 절감했습니다. 교회의 크기나 건물의 유무를 떠나서, 우리 성도님들께서 서머나 교회를 마음속의 고향으로, 신앙의 주춧돌로, 정겹고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있는 교회로 생각해 주시길 바라면서 목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서머나 교회의 두 번째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간을 맞고 있습니다. 그 동안의 일들을 모두 뒤로 하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 앞에 세워주신 푯대를 향해서 앞으로 나갈 시점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들이 교회의 기초를 어떻게 세우는가에 따라서 우리 교회의 미래가 결정될 것입니다. 토대를 깊고 넓게 만든 후에, 차근차근 교회를 세워나간다면 우리 교회는 홍수가 나도 무너지지 않는 반석위에 세워진 교회가 될 것입니다. 반면에 적당히 교회를 세우고, 그냥 지나쳐가는 이민교회 정도로 생각한다면 우리 교회의 미래를 누구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늘 말씀드리듯이 우리 안에 십자가 복음이 살아있고 온 성도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하게 쓰실 겁니다. 그런 점에서 저와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을 출발점에 서는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 가지 교회의 모델이 있지만,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사도행전 2장 42-47절의 초대교회 속에서 우리 교회가 나가야 할 목회와 사역의 방향을 찾고 싶습니다.: 1) 마음을 같이해서 모이는데 힘쓰는 교회, 2) 가르치고 배우는데 힘쓰는 교회, 3) 기쁨과 순전함으로 떡을 떼며 교제하는 가족 같은 교회, 4)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하는 공동체로 우리 서머나 교회가 더욱 성숙해 가기를 바랍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교회에 오는 것이 기쁘고, 예배하는 것이 감사하고, 서머나 교인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운 교회를 세우기 원합니다. 여기에 세상 사람들의 칭찬까지 곁들인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 “하나님의 꿈을 꾸는 교회”라는 연속설교를 통해서 우리 가운데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뜨거워지고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교회를 세우기로 결단하기 원합니다.-河

좋아하다 vs 사랑하다

좋은 아침입니다.

요즘은 이-메일 홍수입니다.

저 역시

이곳 저곳에서 하루에도 수십 통의 이-메일이 옵니다.

대부분은 정성껏 읽고 저장해 놓지만

광고성 메일이나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열어 보지도 않고 삭제해 버립니다.

제가 매주 목요일(금요일 아침)에 보내드리는 메일이

“버려지는 메일” “쌓아놓다가 한꺼번에 정리되는 메일”이 아니라

“기다려지는 메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말이 되면

어김없이 제게 오는 메일이 있습니다.

대전 침례교 신학교에서 상담을 가리키는

제 친구인 유재성 교수의 메일입니다.

3년 전인가 우리 교회에 와서 설교한 적도 있지요.

함께 공부하고 연구하는 학생들에게 보내는 메일을

저에게도 보내주는 것 같은데

짧고 유익한 글을 보내줍니다.

지난 부활절 즈음에 보냈던 메일은

국민일보 칼럼을 인용한

“사랑한다”와 “좋아한다”의 차이라는 글이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눕니다.

‘사랑한다’와 ‘좋아한다’의 차이
‘사랑한다’와 ‘좋아한다’는 비슷하게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하면 두 단어는 반대말일 수 있다.
고양이는 쥐를 좋아하는가, 사랑하는가?
고양이는 쥐를 사랑하지 않고 좋아한다.
좋아하는 것은 상대가 아프든, 상처 나든, 피가 나든 상관없이
나의 욕심 대문에 선호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아프고, 상처 나고, 피가 나더라도
상대에게 (상대의 유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주는 것이다.
———–유관재, 국민일보 ‘로뎀나무’ 칼럼 중에서—————-

나는 주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좋아하고 있습니까?
나의 욕심이나 이기적인 욕망 때문에
주님을 선호하고, 바라보고 있다면
주님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나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제시하며
나를 따라오시도록 기도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나는 주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고양이는 쥐를 좋아하는가 사랑하는가?”라는

말이 좋아하다와 사랑하다의 차이를 아주 잘 설명해 주는군요.

무슨 일이든지 좋아하기는 쉬울 것 같습니다.

반대로 싫어하는 것도 쉽습니다.

내 마음대로 결심하고 그대로 행동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것을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앞에 “진정한”이라는 말을 붙이면 더더욱 어렵지요.

사랑은 ,

허다한 죄를 덮어 주어야 하고 (벧전4:8),

말과 혀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일3:18)

좋아함을 너머서

하나님과 사람들을 사랑하는 진실됨이

우리 안에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 모두에게 사랑을 부어 주옵소서.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랑의 손길로 세상에 다가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샬롬

하목사 올림

(2010년 4월 15일 이-메일 목회서신)

위로 받고 나누고

우리는 지난 2월부터 위로에 대한 연속 설교를 함께 나누고 있습니다. 2월 한 달 동안은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외로울 때, 마다하지 않고 찾아오십니다(잃은 양 한 마리). 신앙생활이나 인생길에서 힘들고 지쳐서 죽음을 생각할 만큼 절망가운데 있을 때, 힘을 공급해 주시고 앞으로 나갈 길을 가르쳐주십니다(로뎀나무 밑의 엘리야). 인간관계에서 소외감을 느끼면서도 사람들에게 연연하고 있을 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차근차근 인도해 주십니다(레아가 만난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이나 인생길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던 것들을 잃어버린 상실의 슬픔을 위로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나인성 과부).

지난 세 번에 걸쳐서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위로를 받기만 하면 그것은 욕심이요 이기적인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실 때는 그 은혜를 누릴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웃에게 나눠주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깊이 경험할 때는 인생의 골도 그만큼 깊었다는 뜻입니다.

때때로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사건이나 질병 등을 경험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따뜻한 위로를 체험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위로를 우리와 똑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주어야 합니다. 아니 우리에게 위로를 주심은 동병상련에 있는 이웃들을 위로해 주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것을 헨리 나우웬의 말을 빌려서 ‘상처 입은 치유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했다고 인생길이 늘 행복한 것만은 아닙니다. 인생길의 어려움은 태평양의 파도처럼 쉬지 않고 밀려옵니다. 우리 모두 죄로 인해서 어그러지고 부서진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들이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깃든 대속, 구속, 화목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마음에 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에 평화가 깃듭니다.

사랑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모든 외로움, 낙심과 절망, 소외감과 상실감을 은혜로 채울 수 있습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도 지고 신앙의 갈보리 언덕을 올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 각자의 등에 지어주신 십자가가 가장 가볍고 귀한 것임을 깨닫고 인생길을 걸어갈 때 자신도 모르게 찬양과 감사가 흘러나옵니다.

이제 오늘은 위로받은 자의 삶에 대한 마지막 말씀입니다. 현재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나라도 잃고 성전도 잃고 절망과 낙심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렸다고 푸념합니다. 자신들이 이렇게 힘이 든데 하나님은 뒷짐을 지고 계시다고 불평합니다.

그런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만 바라보라고 명령합니다. 능력을 주시고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새 힘을 주시고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비상(飛上)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교훈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사람들이 해야 할 사명은 더 이상 우울하거나 기죽지 않고 하늘로 솟구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힘차게 뛰어오르는 삶이 곧 위로받은 자의 참모습입니다. -河-

이제는 겸손…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부활절은 우리 교회로서

매우 뜻 깊은 날이었습니다.

그 동안 우리를 얽어 매며

힘들게 했던 그 모든 일에서

새가 올무에서 벗어나듯이

완전히 해방된 것을 감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어떤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우리를 어디까지 인도하실 지 기대가 됩니다.

늘 말씀 드리듯이

우리 교회 한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자리하고

성령 안에서 하나됨을 이룬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마음껏 쓰실 것입니다.

2.

지난 주일 친교 시간에는

새로 조직된 구역속회 별로 식사를 했습니다.

지난 두 달여 기도하면서

구역속회를 구성했는데

각 속회마다 아주 잘 모이셔서 감사했습니다.

올 한해

하나님께서 각 속회들을 어떻게 축복하시고

그 안에서 말씀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실 지 또한 기대가 됩니다.

사도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라는 표현은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건강하게 자라야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멋지게 세워가야 합니다.

그때 속회와 같은 소그룹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소그룹을 (cell, 세포)”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 몸에 건강한 세포가 있으면 나쁜 세포가 사라지듯이,

또한 세포가 분할을 하면서 몸이 자라가듯이

교회 안의 소그룹이 건강하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도 건강해 지기 때문입니다.

온 교우들이 참여한 우리 교회 모든 소그룹을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

3.

부활주일을 보내고

지난 3일 동안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우리 교회를 하나님께 올려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부터 우리가 할 일은

겸손의 훈련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은

말씀과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매사에 하나님을 높이고

제일 먼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 마음에 쏙드는 주의 자녀가 되기를

훈련하는 것이 곧 순종이고,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입니다.

2) 성도들 간의 겸손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남의 형편을 돌아보는 배려라고 했습니다.

제가 요즘 가족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우리가 한 가족이라는 생각을 하면

서로의 허물을 덮어 줄 수 있고,

서로의 부족을 채워주기 위해서 노력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가 된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4월 셋째 주일부터 시작하게 될

그리스도인의 관계 세우기성경공부가

정확히 20명 정원을 채웠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열심히 교제를 만들면서

성경공부를 준비하겠습니다.

이번 공부를 통해서

우리 교회 성도님들 간의 관계,

가정 안에서의 부부, 자녀 관계,

세상 속에서의 인간관계까지

하나님 말씀 안에서 건강해 지기를 기대합니다.

4.

기쁜 일이 생기고

분위기가 좋을수록

차분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겸손하게 차근차근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이름의 권세가 우리 교회를 덮어야 합니다.

할렐루야!

하나님 아버지

우리 교회와 성도님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로 지켜주옵소서.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순종,

성도간의 사랑과 배려로

겸손의 길을 걷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러분 모두를

주님 안에서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샬롬

하목사 올림

부활절 아침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이 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거나 삼삼오오 모여서 허탈감을 달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몇 번씩 예언하셨지만, 제자들은 그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적어도 다시 살아나실 분이면 죽으실 때 무엇인가 암시를 주시거나,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는 기적이라도 베푸시고 돌아가셔야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모든 사람이 가야만 하는 죽음의 길을 가셨고 그것도 매우 그 비참하게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맥을 놓고 있을 때, 예수님을 죽인 대제사장과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냈습니다. 이들은 빌라도를 다시 찾아가서 적어도 사흘 동안은 무덤 문을 아주 굳게 지켜 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은 것은 아닙니다. 행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간 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세상을 혼란케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살아생전에 부활을 말씀하셨지만, 실제로 그것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안식일이 지나고 첫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습니다. 이들은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을 장사했을 때, 이미 예수님의 무덤을 확인해 두었습니다. 당시의 무덤은 동굴식이어서 무덤을 막아놓은 돌을 치우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고, 장사지낸 후에는 향품을 갖고 무덤을 찾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8장에서는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 큰 지진이 나고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서 예수님의 부활을 여인들에게 알려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때 여인들의 반응은 “무서움과 큰 기쁨”이었습니다. 복음서마다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마태복음에 의하면 무서움과 기쁨이 교차해있던 여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평강의 인사와 더불어 두려워말라고 안심시키십니다. 여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서 경배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제제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전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전하는 첫 번째 부활절 아침에 있었던 일입니다.

창세기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말씀으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일곱째 날에는 안식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서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주일(주님의 날)로 지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죄로 인해서 망가진 세상이 다시 재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부활로 인해서 창세기의 창조가 다시 회복되고 구원의 문이 새롭게 활짝 열렸습니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이브의 죄로 인해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는 것도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2010년 부활절을 맞아서 서머나 식구들 위에 부활의 소망이 삶속 깊이 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새벽 미명에 여인들을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서머나 식구들 마음속에도 찾아오실 줄 믿습니다. 우리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음껏 찬양하고 예배합시다.-河-

Good Friday

좋은 아침입니다.

Good morning!

1.

부활주일 전 주일을

종려주일(Palm Sunday),”

종려주일 이후 한 주간을

고난주간(Passion Week)”

고난주간이 끝나고

부활주일(Easter Sunday)”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고난 주간 마지막에는

성금요일이 있습니다.

성금요일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면서

그 은혜를 깊이 묵상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뜻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루 동안 금식합니다.

육신의 즐거움을 주는 식욕을 억제한 채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고,

세상 것들에 얽매이지 않고

신앙의 길을 갈 것을 다짐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금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교만과 고집스런 자아를

십자가에 매달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인생길을 걸어가기로 다짐하는 것입니다.

2.

영어로 성금요일을 Good Friday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인데

“Good”이라고 부르는 것이 약간 어색합니다.

이에 대해서 몇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는, Good에 해당하는 영어가 옛날에는 holy와 유사하게 쓰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Good Friday를 우리 말로 옮길 때는

성 금요일(Holy Friday)”이라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둘째는, Good과 하나님을 뜻하는 God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God’s Friday라는 의미가 들어있다는 견해입니다.

셋째는, Good Friday를 오늘날 의미 그대로 해석하는 견해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만 생각하면 슬픈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예수님의 죽음 너머에 있는 부활을 이미 알고 있기에

마냥 슬퍼할 수 없습니다.

지난 주에 설교한 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철저하게 우리를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위한 선한(good) 사역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목숨까지 버리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날은

말 그대로 Good Friday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세 번째 견해를 마음에 품고

올 해 Good Friday를 보내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너무 거룩하게 형상화하고 싶지 않습니다.

Good이라는 말에서 God을 연상하는 것은 왠지 임의적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야 말로 악을 선으로 이긴 최고의 사건이기에

Good! Friday – 은혜가 넘치고 힘이 생깁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견해를 택하시겠습니까?

3.

2010년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 서머나 식구들과 우리 교회가

예수님의 은혜 속으로 깊이 들어가기를 기도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의

믿음이 깊어질 때입니다.

우리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속에서

위로를 얻고, 힘을 얻고,

화평케 하는 자로 세상에 나갈 때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마음에 품고

십자가를 즐겁게 지고 신앙의 여정/주어진 인생길을 걸어가기 원합니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죽으신 구주 밖에는/ 자랑을 말게 하소서

보혈의 공로 입어서/ 교만한 맘을 버리네

못박힌 손발 보오니/ 큰 자비 나타내셨네

가시로 만든 면류관/우리를 위해 쓰셨네

(찬송가 147 1,2,3)

깊은 은혜를 체험하시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하목사 올림

(2010년 4월 1일 이-메일 목회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