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마음에 품고

예수님을 구주(救主)로 영접하고 죄와 죽음에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가장 큰 은혜와 위로는 십자가에서 시작됩니다.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자 가장 숭고한 정점(crux)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십자가는 로마 시대에 악한 죄를 저지른 죄수들을 죽이는 나무로 만든 형틀이었습니다. 당시는 로마가 세상을 지배하고 많은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었기에, 로마에 반역하거나 세상을 소란케 하는 죄인들은 십자가에 달아서 죽였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그리 신선한 이미지도 아니고, 희망의 이미지는 더군다나 아니었고, 죄와 죽음의 상징이었습니다. 속된 말로 저주와 재수 없음을 뜻하는 나무 형틀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아주 초라한 모습으로, 로마와 유대지도자들에게는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의 모습으로 그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구약성경 신명기 21장 23절 말씀대로 하면 저주를 한 몸에 받고 나무에 달려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런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악한 죄인들만 달리는 십자가에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사실 – 이것이 십자가의 아이러니요 역설입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고 가르쳐줍니다. 원래 우리가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얻었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막힌 담이 헐렸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패배가 아닌“승리”라고 성경이 전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11에서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죽음과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두 가지 대조되는 단어가 사용됩니다.“죽음”과“생명”입니다. 헬라어 본문을 따라 말하면 “예수의 죽음”과“예수의 생명”이라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은 곧 생명이신 예수님의 부활과 연결됩니다. 죽으심은 살아나심의 한 과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들이 생명을 얻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을 그의 몸에 갖고 산다고 했습니다. 자신 때문에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항상 기억하고 그 안에서 은혜와 위로를 받는 다는 고백입니다.“짊어진다”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를 연상시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자신의 인생길을 갔습니다. 그래도 항상 기뻐했고 감사했습니다. 그 길이 생명의 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길이“예수의 생명”을 체험하는 과정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우리 자신을 십자가 아래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지고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길을 묵묵히 걷는 것입니다. 힘들 때도 있고, 손해 볼 때도 있고, 낙심과 절망이 밀려올 때도 있습니다. 그 길은 엄연히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길이 곧 “생명 되신 예수님”을 만나는 길이고,“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는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고 걸어갑니다. 아니 십자가를 마음에 품고 주어진 인생길을 감사와 찬양가운데 걸어갑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위로를 받은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살아야 할 인생임을 다시금 느끼면서 십자가를 마음에 품고 앞으로 나갑니다. -河-

동상이몽

사순절 막바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다음 주일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백성들은 겉옷을 길에 펴면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라고 외치면서 종려나무를 흔들고 야단법석을 떨었습니다. 구약의 예언대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께서 로마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메시야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다윗 왕국이 재건될 것을 기대했습니다. 자신들의 소원과 욕구를 채워주는 정치적 메시야로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하지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로마를 전복시킬 의도가 전혀 없으셨습니다. 도리어 로마 권력에 의해서 자신이 전복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해방시킬 생각은 안중에도 없으셨고, 오직 모든 인류를 죄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하나님의 구원계획만을 생각하셨습니다. 가진 조롱과 멸시를 받으면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셔야 할 예수님이셨습니다.

이처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로마로부터 해방될 것을 기대하는 백성들의 마음은 말 그대로 동상이몽이었습니다. 수일 후에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욕구를 채워주지 않을 것임을 발견합니다. “호산나”를 외치면서 예수님을 맞이했던 백성들이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을 비난하는 폭도로 변합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겉옷을 깔던 백성들이 이제는 겉옷을 흔들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칩니다.

백성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뭔가 큰 일을 하실 줄 알았습니다. 물위를 걸으시고 풍랑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 귀신을 쫓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신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예루살렘을 통치하는 로마제국을 허물고 메시아 왕국을 세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권력을 잡으시면 양 옆에 앉게 해달라고 인사청탁을 하는 제자들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무력하게 로마 군병들에게 체포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제자들도 백성들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등극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줄 알았는데, 예수님께서는 도리어 극악한 죄인들이 달리는 십자가위에 올라가셨습니다. 역시 동상이몽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이유를 성경을 통해서 그리고 수없이 들은 설교를 통해서 무엇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의 마음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보다 거리에서 종려나무를 흔들면서 다윗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대하는 백성들에게 달려갑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우리들의 욕심과 기대가 채워지길 바라면서 예수님을 믿습니다.

사순절 막바지에 우리 각자가 믿고 기대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우리들 역시 예수님을 우리 좋을 대로 믿고 있지 않은지요? 자신의 긴급한 요구에 응답해 주시는 도깨비 방망이나 911 구급차 정도로 생각하지는 않는지요? 기도제목 가운데 한가지만 응답되지 않으면 불평하고 배반하는 얄팍한 신앙은 아닌지요?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철저히 복종시키셨습니다. 우리들 역시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내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생각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예수님과 함께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야 합니다. 그것이 동상이몽이 아닌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갖고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참모습입니다.(2010년 3월 26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

소망의 하나님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밖에 나가면 봄기운이 감도는 것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사는 bay 지역은 사시사철이 정확히 구분되지 않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나뭇가지에 새로운 잎이 돋아나고,

들에는 예쁜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을 봅니다.

봄!

겨울이 가고 또 한번의 사계절이 새로 시작되는 때입니다.

겨울잠을 자던 동식물들이 잠에서 깨서 기지개를 켜는 계절입니다.

농부들이 가을의 수확을 눈에 그리며 씨앗을 뿌리는 계절입니다.

봄!

봄이라는 영어 표현이 spring입니다.

힘차게 점프하는 계절입니다.

한 해의 물줄기가 시작되는 샘과 같은 계절입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잠시 짬을 내서 공원이나 들로 나가보십시오.

출퇴근 길에

길 옆에 핀 꽃들과 가로수를 보면서 봄을 느껴보십시오.

봄기운이 온 몸으로 쏵- 들어오는 것이 느껴지실 겁니다.

2.

오늘 오후에

다음 달 속회 강사님들께 드릴 공과 해설지를 만들면서

4월 마지막 주에 공부할 성경본문이 마음 깊이 다가왔습니다.

로마서 14장 13절 말씀입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로마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기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소망의 하나님”과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때 그리스도인들에게 임하는 은혜는

모든 기쁨과 평강”그리고 “소망”이라고 바울의 기도를 통해서 배웁니다.

파란 색으로 된 단어들을 가만히 묵상해 보십시오.

추운 겨울을 지내고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 깊이 다가올 것입니다.

봄과 같은 인생!

봄과 같은 신앙!

봄과 같은 소망!

하나님!

우리 서머나 식구들의 하루하루가

소망의 하나님과 성령의 능력을 의지함으로

봄과 같은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기쁨과 평강과 소망이 넘치는 오늘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샬롬

하목사 올림

(2010년 3월 25일 이-메일 목회서신)

기쁨과 찬양으로

전도용 주보에 “우울증을 극복하려면”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습니다. 어느 때부터인지 우울증(depression)이라는 말을 자주 듣고, 우울증을 앓고 있던 유명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사회적인 이슈가 되기도 했습니다. 심각한 경우는 아니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금씩 우울증 증세를 경험한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예외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우리가 삶 속에서 겪는“우울함”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동안 살펴보았던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는 순간들(외로움, 두려움과 절망, 관계의 단절과 소외, 상실감)은 자칫 잘못하면 우울함으로 빠질 수 있는 길목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길목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면 새로운 차원의 삶이 시작됩니다. 반대로 그 순간에 하나님의 손길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문제 속으로 들어간다면 우울증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가장 많이 체험한 사람이 있다면‘다윗“일 겁니다. 다윗은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장차 이스라엘 왕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고 기름부음까지 받았습니다. 그리고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을 물리치는 큰 공적도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다윗에게 찾아온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이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달려듭니다. 다윗은 광야로 피신했습니다. 다윗에게 광야는 외로움과 두려움 그리고 절망이 밀려오는 곳이었습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입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섭리 가운데 광야의 어려움을 통과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던 사울 왕에 이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하지만 다윗에게 어려움은 계속해서 닥쳐옵니다. 부하의 아내인 밧세바를 범하는 사건을 기점으로 그의 삶에 먹구름이 드리웁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는 상실감, 친아들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밤중에 도피해야 하는 관계의 상실과 소외를 다윗이 경험합니다. 그런 점에서 다윗왕이야 말로 우울증에 빠질법한 위기의 삶을 살았던 인물입니다.

구약성경 시편에 처절한 한평생을 살았던 다윗의 삶과 심정이 매우 솔직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절규합니다. 자신이 지은 죄를 놓고 애통하며 회개합니다. 침상이 젖을 만큼 눈물을 흘립니다. 자신을 무너뜨리려는 원수들 앞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합니다. 피골이 상접하는 육체의 고통도 경험합니다. 그런데 이런 인생의 위기와 고통은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하는 길목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다윗을 향해서“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다윗은 시편 30편 11-12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슬픔이 춤이 되게 하시고 기쁨이 되게 하셨다고 선포합니다.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감사합니다. 우울증에 걸릴법한 갖가지 어려움을 경험한 다윗이지만, 그는 그 어려운 길목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했습니다. 그때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절망이 변하여 감사가 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제시한 우울증을 극복하는 비결 여섯 가지 가운데 두 가지가 “노래하라. 음악을 즐기라”“하나님께 찬양하고 감사하라”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이“기쁨의 찬송과 감사”임을 기억합시다. -河-

숨은 사람 가꾸기

좋은 아침입니다.

1.

어느덧 미국에 온지 열두 해가 다가옵니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커네티컷의 한 형제께서

이민목회를 하실 생각은 없느냐고 조심스레 물어보셨습니다.

그때 저는 단호하게 공부 끝내고 한국에 갈 것이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람이 한 치 앞길을 알 수 없듯이

그때부터 10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갔고

저는 지금 이민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오십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제는 좋아하던 실내축구도 내려놓고

젊었다고 생각하면서 지고 다니던 가방도 내려놓을 때가 되는가 봅니다.

앞 일을 두고

자기 마음대로 말하는 것이 얼마나 교만한 것인지

제 스스로의 인생을 통해서 배웁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동안(童顔)이라는 얘기를 줄곧 들었습니다.

그때마다 한편으로는 좋고,

또 한 편으로는 제 나이가 있는데 은근히 무시당하는 것 같아

섭섭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제 나이를 그대로 알아봅니다.

머리에 염색을 하지 않는다면 도리어 10년을 위로 볼 것 같습니다.

거울 앞에 서서 제 모습을 보아도

올해 들어서 바짝- 얼굴이 망가진(?) 듯 합니다.

탄력을 잃었습니다.

머리 숫자도 줄어들고 이마가 반들반들 해지면서 넓어집니다.

이것이 인생임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그래도 우리 권사님들은 제가 젊어서 좋답니다.

저에게 청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청춘예찬(靑春禮讚)을 외치면서 살 생각입니다.

2.

사도 베드로는 아내들에게 주는 교훈을 하면서

우리의 외모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벧전 3:3-4)

베드로서가 쓰여질 초대교회 당시에도

외모를 꾸미는 일들이 꽤 많았나 봅니다.

이에 대해서 베드로 사도는
“숨은 사람(the hidden person)”을 꾸미라고 가르쳐줍니다.

외모를 꾸미는 것은 겉 사람을 장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겉 사람은 급격하게 아름다움을 잃어갑니다.

반면에 숨은 사람을 꾸미는 것은

겉 사람과 상관없이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값진 것(precious in sight of God)”입니다.

숨은 사람을 꾸미는 비결도 가르쳐줍니다.

첫째로, “온유함”입니다.

온유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라우스”는

“넉넉함” “부드러움”과 더불어 “겸손함”이라는 뜻도 갖고 있습니다.

둘째로, “안정된 심령(quiet spirit)”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이

매우 평온하고 안정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온유함이나 평온함 모두

삶의 깊이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모신 그리스도인들의 온전한 모습입니다.

온유하고 평온한 마음을 갖고 사는 것이

영원히 변치 않는 아름다움(imperishable beauty)이랍니다.

내적인 아름다움이기에

얼핏 봐서 드러나지 않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귀면 사귈수록

그윽한 인간미와 신앙의 향기가 드러나는 아름다움입니다.

3.

사실 요즘은 기술이 발달해서

얼마든지 겉모습을 바꿀 수 있습니다.

10년 젊어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문명이 발달해도 고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들의 “숨은 사람”입니다.

동시에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점점 아름다워지는 것이 있습니다.

“온유함”과 “평온함”으로 가꾸어지는 “숨은 사람”입니다.

사순절의 막바지를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 무엇보다 예수님의 고난과 희생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내면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남은 사순절 기간 동안

“숨은 사람”을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가꾸기 원합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 서머나 식구들은

겉모습도 아름다우십니다.

젊은 청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연세 드신 성도님들도 모두 10년은 젊어 보이십니다.

그런데 오늘아침 저는

서머나 성도님들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렵니다.:

“하나님,

우리 서머나 성도님들은

내면이 아름다우신 그리스도인들이 되게 하옵소서”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값진 것임을 말씀을 통해서 다시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샬롬

하목사 올림

(2010년 3월 18일 이-메일 목회서신)

“상처입은 치유자”

4주에 걸쳐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고, 또한 하님께서는 우리를 친히 위로해 주시는 분임을 배웠습니다. 잃은 양 한 마리가 느끼는 외로움, 로뎀나무 밑의 엘리야가 처절하게 느꼈던 두려움과 절망,야곱의 첫 번째 아내인 레아가 느꼈던 관계의 단절과 소외,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하나뿐인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나인성 과부의 상실감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들도 삶의 여정에서 예외 없이 느끼는 것들입니다.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목자의 마음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기도를 드리는 엘리야에게 해야 할 일과 미래를 활짝 열어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레아가 느끼는 슬픔을 아시고 그에게 아들을 주시고 결국에는 그녀의 입에서“내가 이제는 주를 찬양하리이다”라고 고백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상실감에 한없이 슬퍼하는 나인성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고 아들을 살려주신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그동안 살펴본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임하는 것을 체험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릴 때 하나님의 위로가 임합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지쳐서 하나님께 나갈 의지나 힘도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로뎀나무 밑의 엘리야와 나인성 과부를 찾아오셨듯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힘을 주시고 살 길을 열어 주십니다.

이제 앞으로 4주 동안은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할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나”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가 많습니다. 그때 기독교인들은 이기적이고, 기독교가 배타적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받은 은혜를 세상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얻고 힘이 생겼다면, 슬픔 가운데 있는 사람들, 소외되고 외로운 이웃들, 상실감에 빠져서 절망가운데 있는 이웃들에게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위로자>로 다가가야 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인상처 입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은 헨리 나우웬의 책 제목과 일치합니다. 우리 모두는 상처를 갖고 삽니다. 그래서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합니다. 상처를 입었지만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했기에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그들을 위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온 몸에 상처를 입으셨습니다.”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실 만큼 외로우셨고 그 순간만큼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고 느끼실 만큼 소외감과 상실감에 휩싸이셨습니다. 물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십니다. 동시에 그 상처로 우리를 치유하시고 위로하십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예수님이야말로 “상처 입은 치유자”이십니다.

이제 우리들도 세상에 치유자로 위로자로 나가야 합니다.“예수님처럼 해방을 선포하는 사람은 자신의 상처뿐 아니라 남의 상처도 돌보아야 합니다.”<헨리 나우웬>.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일로 부르셨다고 교훈합니다.“하나님께서 보내신 위로자”로 세상에 나가시는 서머나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 -河-

나를 들으시는 하나님

좋은 아침입니다.

1.

미국 경제가 좋아지는 것 같은데

우리들의 삶은 여전히 고달프고 힘이 듭니다.

한간에서는 더블딥(다시 한번 경제위기가 찾아 올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예측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예측은 아주 크게 빗나갈수록 박수칠 일입니다.

경제가 얼른 회복되어서

서머나 식구들의 살림살이는 물론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필 날이

하루속히 찾아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제가 직장생활을 할 때

한국에 막- 노래방이 생겼습니다.

그때 저의 18번은 해바라기의 “사랑으로”였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그러나 솔잎 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우리 타는 가슴 가슴마다 햇살은 다시 떠오르네

요즘도

마음이 답답할 때는 바닷가에 차를 세우고

태평양을 바라보면서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라고 노래를 부릅니다.

비록 찬송가나 복음성가가 아니어도 마음이 찡–해 집니다.

힘이 들거나 반대로 생활이 안이해 질 때

즐겨 읽는 시(詩)도 있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봄길’이라는 시랍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다시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시인의 생각과 상관없이

독자의 입장에서 시를 읽어 내려가면

마지막 연에 이르러서

우리의 길 되신 사랑의 예수님이 마음 속에 그려지기도 합니다.

봄 길을 걷는 인생!

길이 끝난 곳에 길이 되고

사랑이 끝난 곳에 사랑으로 남아있는 인생!

한번뿐인 인생길을 가면서

우리들 마음 속에 그려볼 만한 인생 아닐까요?

신앙과 목회의 여정을 가면서

“봄 길”을 걸어가고 싶은 소망을 마음에 늘 품어봅니다.

2.

어제는 수요예배에서

“미가서” 공부를 모두 마쳤습니다.

1장부터 7장까지 함께 통독하는 시간도 가졌지요.

미가서 7장은

하나님의 구원메시지입니다.

백성들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 그리고 찬양으로 미가서가 끝이 납니다.

그 가운데 미가서 7장 7절은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는 듯할 때,

“강물이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이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길도 끝난 것처럼 생각될 때,

아니 어려움 없이 인생이 잘 펼쳐질 때도,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언제나 마음에 품고 그대로 고백해야 할 말씀입니다.: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But as for me, I will look to the Lord)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 I will wait for the God of my salvation)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 (My God will hear me)

요즘 출판된 개역개정이나 표준새번역은

마지막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도다”(개역개정)

“내 하나님께서 내 간구를 들으신다” (표준새번역)

그런데 히브리어 본문은

개역성경의 번역이나 영어번역과 똑같습니다.

나의 하나님께서 나를 들으시리로다!!!

(My God will hear me)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는 물론이고

우리의 몸짓, 신음, 감사, 찬양, 마음 등등 우리의 삶 전체/존재 전체를

통째로 들어주신다는 말씀으로 들려옵니다. 할렐루야!

봄이 찾아 왔습니다.

우리 모두 미가 선지자의 고백을 우리의 고백으로 삼고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길을 힘차게

그리고 정정당당하게 걸어갑시다.

하나님,

우리 서머나 식구들의 기도와

그 삶과 모든 것을 주께서 들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0년 3월 11일 이-메일 목회서신)

위로의 하나님 : 아픔을 싸매주심

지난주에는 위로의 하나님 세 번째 시간으로 야곱의 첫 번째 아내인 레아를 위로해 주신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버지의 뜻대로 야곱의 아내가 된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그리워하면서 살았습니다. 세 번째 아들을 낳기까지 레아의 마음을 오직 남편뿐이었습니다.

레아는 아들을 낳을 때 마다 아들의 이름을 르우벤(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시므온(주님께서 내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하소연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또 이렇게 아들을 주셨구나), 레위(내가 아들을 셋이나 낳았으니 이제는 남편도 별수 없이 나에게 단단히 매이겠지)라고 지으면서 남편의 사랑을 그리워합니다.

하지만 레아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네 번째 아들을 낳고 “유다(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했습니다. 오매불망 남편만을 바라보던 레아가 네 번째 유다를 낳고 “이제는”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레아를 불쌍히 여기셔서 아들을 주시는데, 레아는 그동안 하나님 안에서 위로를 얻기보다 아들 낳은 것을 갖고 남편의 마음을 얻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레아의 마음이 남편이 아니라 자신을 향할 때 까지 기다리시고 네 번째 아들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릴 때까지 한결같이 임한다는 사실을 레아를 통해서 배웁니다.

오늘 본문속의 주인공은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나인성에 사는 한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아들 하나를 바라보면서 남편 없이 살던 과부였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뿐인 아들이 죽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아들의 시신을 메고 동구 밖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과 많은 사람들은 나인성으로 들어가고 있었고, 마을 어귀에서 장례행렬과 마주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외아들을 잃은 과부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불쌍히 여기사”라고 예수님의 마음을 표현해 놓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여인을 보시고 마음이 아프셨다는 뜻입니다. 여인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실 만큼 측은하게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가가셔서 여인의 아들을 살려내십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우리의 슬픔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여인의 슬픔을 보시고, 그녀를 불쌍히 여기시면서 위로하시고 그녀의 아들을 살려주셨듯이, 예수님께서 우리들 마음속에도 그대로 임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위로해 주시고, 우리의 아픔을 치유해 주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을 구약성경에서는“헤세드”라는 히브리어로 표현해 놓았습니다. 변함없고, 공평하고, 아주 애절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시편 103편 1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김”은 어머니가 자식을 품에 안고 보호하는 것과 같은 모성적인 사랑입니다.

우리 모두는 상처를 갖고 삽니다. 아주 오래전에 받은 상처부터 최근의 것까지, 무심코 한두 번 만난 사람들로 받은 상처부터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 받은 상처까지 우리들의 마음은 상처투성이입니다. 우리들의 상처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과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치료되고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서머나 식구들의 아픈 마음위에 포근하게 임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河-

사순절을 지내면서…

좋은 아침입니다.

1.

사순절(lent)이 시작되고

보름이 지났습니다.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로 시작된 사순절은

여섯 번의 주일을 제외한

부활절이 오기 전 40일 동안의 기간을 가리킵니다.

사순절은 아주 일찍부터 초대교회에서 지켜졌습니다.

초대 교회의 사순절은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으려는 성도들이

부활절 아침에 받게 될 세례 예식을 준비하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때는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기 위해서

지금보다 훨씬 엄격한 절차를 밟아야 했습니다.

신앙을 갖는 것은 그 동안의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new life)으로 들어가는 미래를 향한 힘찬 발걸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는 것은 생명의 위협도 불사해야 하는

비장한 결단이었기에 40일 동안 기도하면서 준비했습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은 태어나면서 영아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기에

사순절 동안이 세례 교육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사순절은 기존의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신앙과 삶을 다시금 새롭게 하는(renewal) 절기로 바뀌게 됩니다.

2.

사순절 기간 동안에는

“기도” “금식” “선행”을 실천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40일은 1년 365일의 10분의 1이 조금 넘는 기간입니다.

사순절을 경건하게 지내는 것은

한 해의 삶 가운데 십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의 십일조”이기도 합니다.

초대교회의 사순절 신앙을 본받아서

예수님을 처음 믿던 때를 기억하고

첫사랑의 설렘과 뜨거움 속으로 들어가기 원합니다.

또한 사순절을 보내면서

서머나 식구들 각자

하나님 앞에서 경건의 훈련 덕목을 정하고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면서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시고

신앙이 새롭게 되는 경험을 하시길 바랍니다.

사순절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신앙 훈련의 기회요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면서

그 은혜 속으로 깊이 잠기는 시간임을 꼭 기억합시다.

하나님,

2010년의 사순절을 보내면서

우리 교회와 서머나 식구들의 삶이 정결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뜨겁게 체험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0.3.4 이-메일 목회서신)

하늘 위에서 본 세상

저는 지금 시카고에서 인디애나폴리스로 향하는 비행기안에 있습니다. 인디애나대학교 기독학생회 수련회에서 말씀을 전하러 가는 길입니다. 비행기 여행을 할 때는 긴장하게 마련입니다.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순간에는 자신도 모르게 손과 발에 힘을 줍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카고까지는 큰 여객기를 타고 왔는데, 인디애나로 내려가는 비행기는 좌석이 두줄 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비행기입니다.

조종사 한 명을 포함해서 승무원이 세 명뿐입니다. 평상복과 다름없는 바지를 입고 있는 여승무원들도 왠지 모르게 촌티(?)가 납니다. 승객들을 기다리면서 조종사와 여승무원이 농담을 하는 모습이나, 먼저 탑승한 승객들이 옹기종기 떠드는 모습이 꼭 한국의 시외버스를 연상케 합니다. 비행기가 이륙해서 방향을 바꿀 때는 기체가 심하게 흔들리면서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입니다. 하지만 하늘 높이 올라가면 큰 비행기나 작은 비행기나 커다란 차이 없이 상공을 날아갑니다.

비행기 여행을 할 때면 의례히 하는 일이 있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는 차분히 눈을 감고 하나님께 여정을 온전히 맡기는 기도를 합니다. 이번 여행은 젊은 청년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길이기에 더욱 기대가 됩니다. 또한 저의 첫 단독 목회지를 방문하는 길이어서 마치 친정 집을 방문하는 것 같습니다. 지난 5년여 뵙지 못했던 권사님들을 뵐 생각을 하니 꼭 부모님을 만나러 가는 아들 심정입니다. 이번 여정에서 만나게 될 모든 사람들을 마음껏 축복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눌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연초에 받았던 성도님들의 1년 기도제목 묶음을 가방에서 꺼냅니다. 어느덧 비행기는 고도를 잡고 상공에 올라와서 안정되게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하늘 꼭대기에서 성도님들의 모습을 눈에 그리며 기도제목을 한 장 한 장 넘겨가면서 기도합니다. 하늘에서 기도를 하니 마치 기도가 하나님께 더욱 빨리 올리어질 것 같습니다. 물론 느낌입니다.아니 잘못된 믿음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의 기도제목을 놓고 비행기안에서 기도하는 특권을 포기할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시카고까지 오는 동안 창가를 통해서 아래를 내려다 보았습니다. 대부분 하얀 눈으로 덮여있었고, 수만 피트 상공에서 내려다본 세상은 평지나 다름없습니다. 로키산맥을 비롯해서 높은 산간지역을 지나고 있지만, 하늘 위에서는 높고 낮음을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라는 시구(詩句)가 생각났습니다. 그 옛날에는 비행기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하늘아래 뫼”라는 사실을 알아냈는지 선조들의 혜안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십여 분만 하늘로 올라가도 세상이 평평해 보입니다.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면 높은 산이나 깊은 골짜기나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높아지기 위해서 아등바등 서로 경쟁하며 살아갑니다.까치발을 하면서 1-2인치라도 조금 더 높아지고 조금이라도 더 큰 것을 가지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하늘 위에서 보면 이십 보 백 보일 뿐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세상을 내려다보시면, 인간들이 하는 행동과 모습이 얼마나 우스워 보일까요? 비행기 창에 비친 제 얼굴이 겸연쩍게 빨개집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창가에 펼쳐진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비행기가 고도를 낮춥니다. 목적지에 도착한 것입니다. 비행기 창가로 도시의 수많은 불빛과 하이웨이를 달리는 자동차의 행렬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제 수 분 후면 또 다시 아등바등 서로 경쟁하면서 살아가는 세상으로 내려갑니다. 이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하지만 하늘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가졌던 여유와 하나님께 기도했던 겸손한 마음을 간직하기로 다짐하면서, 이번 집회에서 만날 새벽이슬과 같은 젊은이들을 눈에 그려봅니다.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2010년 2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