챔피언의 눈물

좋은 아침입니다.

1.

이번 주 내내 감기로 고생입니다.

이번 감기는

콧물, 아주 심한 두통, 근육통 등을 동반한 것 같습니다.

수요일부터 감기의 최저점이 지나고

지금은 남겨진 감기를 앓고 있는 중입니다.

감사하지요!

감기와 같은 질병은 물론 모든 일에

“조금이라도 나아지다” “회복되다” “개선되다”라는

사인이 있다면 그것은 감사할 일입니다.

속도와 시간의 차이는 있어도

결국 건강을 되찾고

인생길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개선되는 조짐이 없이 자꾸만 아래로 가라앉는 것이 큰 일입니다.

건강의 문제라면 얼른 의사를 찾아야 합니다.

인생의 문제라면 얼른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방향전환을 해야 합니다.

2.

어젯밤에 우리 가족은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을 따는 장면을

인터넷으로 지켜보았습니다.

김선수가 경기하는 4분이 왜 그렇게 길게 느껴지는지요?

동작 하나 하나를 할 때마다 가슴을 졸였습니다.

한국의 해설자는 “가슴이 터질 것 같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미국TV 해설자도

경기 도중에 말을 잇지 못하다가

자기가 본 최고의 연기였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한 동작도 실수 하지 않고

무결점으로 연기를 끝낸 김연아선수!

그녀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는 듯 했습니다.

경기 결과가 발표되기 전인데도

김선수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동안 얼마나 최선을 다해서 연습을 했는지

이제 갓 스무 살인 그녀가 느낀 부담감이 얼마나 컸는지를 가늠케 해주는

결과와 상관없는 눈물이었습니다.

금메달이 확정된 것도 아니고

점수가 얼마나 나올지도 모르는 순간에

김연아 선수와 온 국민은 함께 운 것입니다.

그녀의 울음은 최선을 다한 사람이

결과에 상관없이 흘리는

감격과 감사와 회한의 눈물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김선수는 상상할 수 없는 점수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시상대에서 다시 한번 눈물을 흘렸지요.

3.

우리 같은 촌부들은

챔피언의 눈물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들의 인생이 사람들의 이목을 받을 만큼

그렇게 근사하지도, 화려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김연아 선수가 연기를 모두 끝내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면서

우리들의 삶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들도 하루 삶을 끝내고

아니면 주어진 학업이나 과업을 끝내고

“눈물을 흘릴 만큼”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김연아 선수의 눈물의 의미를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인생을 살고 있는지…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관객도 없는 인생을 살고 있지만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감사와 감격과 회한의 눈물을 흘린 적이 있는지…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 김연아 선수의 눈물을 통해서

우리 앞에 펼쳐진 인생의 경주를 어떻게 해 나가야 할 지

그 마지막에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할 지를 배울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편 126:5-6)

하나님

오늘 하루도 눈물로, 울면서

인생길을 시작하는 서머나 식구들이 있다면

그들의 눈물이

결국에는 “기쁨의 눈물”로 변화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0.2.26일 이-메일 목회서신)

위로의 하나님 : 지친 자에게 힘을 주심

하루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야고보만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산에 오르신 예수님의 얼굴이 갑자기 해처럼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옷도 빛처럼 희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양 옆에는 엘리야와 모세가 내려와서 예수님과 대화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화된 것을 두고 ‘변화산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인물입니다. 엘리야는 구약의 선지자를 대표합니다. 엘리야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엘리야가 살아서 다시 돌아 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바로 엘리야일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엘리야는 구약의 선지자 가운데 탁월한 인물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갈멜산에서 바알선지자 450명과 혼자서 대결했습니다. 바알선지자들이 아무리 불러도 그들의 신은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는 제단을 쌓고 송아지를 각을 떠서 올려놓고 그 위에 물을 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리는 불로 제물이 탔음을 증명해 보이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불로 응답하셔서 제물이 모두 탔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큰 능력을 체험했고 바알 선지자들을 모두 죽일 만큼 용맹했던 엘리야였지만 그에게도 위기가 닥쳐옵니다. 엘리야가 바알선지자들을 죽였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이 사신을 보내서 당장 내일 이맘때에 엘리야의 생명을 빼앗겠다는 통지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엘리야의 마음이 무너집니다. 혼자서 수백 명의 바알선지자들과 대결했던 엘리야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습니다.

엘리야는 결국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사환들과 함께 피신합니다. 브엘세바라는 곳에 이르러 사환들을 그곳에 머무르게 하고 혼자서 광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로뎀나무 아래 털썩 주저앉아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여호와여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나이다.”엘리야는 지금 지쳐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그는 매우 외롭습니다. 일종의 자격지심도 갖고 있고 열등감도 느낍니다. 갈멜산에서 바알선지자들과 싸웠다면, 엘리야는 지금 믿음이 모두 소진된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믿음이 없어지면, 세상 사람보다 더 연약해지는 법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엘리야를 먹이시고 일으키십니다. 또한 엘리야를 하나님의 산으로 인도해서 미세한 음성으로 그의 남은 사명을 재확인시켜 주십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하신 말씀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였습니다. 이세벨이 자신의 생명을 빼앗을 것이라는 소식에 엘리야는 믿음의 자리를 떠났습니다. 자신이 있을 자리가 아닌 광야로 도망해서 그곳에서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지쳤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소진되었기 때문입니다.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순간 엘리야를 찾으셨고, 그를 구해내셨습니다.

엘리야와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세상에서 고갈과 낙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도 우리를 찾아오셔서 위로해 주시고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할렐루야.-河-

리콜하는 인생

좋은 아침입니다.

1.

미국에 살면서 요즘처럼

“리콜(recall)”이라는

말을 많이 들은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도요타 자동차가 대규모로 리콜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거의 전 차종이 리콜을 당한 것 같습니다.

엊그제는 혼다도 리콜을 한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가속페달에서 발견된 작은 결함이지만

그것이 커다란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에

도요타는 물론 온 세계가 주목하고 있습니다.

도요타 자동차를 타시는 한 권사님께서 저에게 물어보십니다.

“목사님, 그럼 새 차로 바꿔주는 거야!”

사실 권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미국에서 판매되는 대부분의 제품들은

결함이 있거나 소비자가 만족하지 않으면

새로운 것으로 바꿔줍니다.

미국은 “리턴(return)”제도가 매우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자동차는 새 차로 바꿔주지 않습니다.

이번 경우가 아니라도

새 차를 사서 곧바로 고장이 나더라도

자동차는 새차로 바꿔주지 않고 무상으로 수리해 줍니다.

덩치가 커서 그런 것 같습니다.

2.

새로운 자동차로 바꿔주는 것이 아니라

결함이 있는 자동차를 불러들여서 고쳐주는

리콜이라는 제도를 보면서,

우리들 인생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실 우리들은 결함 덩어리입니다.

때로는 아주 위험스러운 행동도 천연덕스럽게 합니다.

우리들은 원래부터 고장이 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완벽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분수를 모르고 교만해져서

그만 치명적인 고장을 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다시금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거듭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잘못된 행동을 반복적으로 행합니다.

교만해서 그렇고, 죄를 즐겨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네 인생도

새것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인생에서

“리턴”은 없고, 단지 “리콜”만 있을 뿐입니다.

새해를 맞아서

두 달도 채 살지 않았는데

우리네 인생길 여기저기서 벌써 고장이 감지됩니다.

뭔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잘못된 것들을 얼른 하나님께 가져가서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고침을 받는 것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그래야 남은 한 해를,

아니 남은 인생을 힘차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의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고쳐주시고 다시 세워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날이 오면

내가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일으키고

그 터진 울타리를 고치면서

그 허물어진 것들을 일으켜 세워서

그 집을 옛날과 같이 다시 지어 놓겠다. (호 9:11)

이처럼 우리 하나님은 보수하시는 분입니다.

고쳐주시고 치료하시고 회복해 주시는 분입니다.

일으켜 세워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더 늦기 전에

우리 인생을 하나님 앞으로 자진리콜해서

점검 받고, 고침 받기 원합니다.

하나님,

우리의 인생길은 결함투성이입니다.

매일같이 순간마다

우리의 삶을 주님께 가져가서 고침 받게 하옵소서.

고쳐주시고, 일으켜주시고, 다시 세워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서머나 식구들과 교회 위에 임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파이팅…

하목사 올림

(2010년 2월 11일 이-메일 목회서신)

위로의 하나님 : 잃은 자를 찾으심

영국의 존 스토트 목사님께서는 목사가 설교본문과 주제를 정할 때는 대개 세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첫째는 예전적 설교입니다. 이것은 설교말씀을 예배의 형식과 내용에 맞추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소개한 교회력에 맞춰서 정해진 본문을 설교한다면 그것이 예전적인 설교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가톨릭에의 신부들께서 하시는 강론 역시 예전적 설교에 가깝습니다.

둘째는, 목회적 설교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의 삶과 신앙에 맞는 말씀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모두 은혜롭고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지만, 목회를 하면서 꼭 필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요즘처럼 불경기가 계속되고 삶이 지치고 힘들 때는 성도들께 힘을 주는 격려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성도들이나 교회의 신앙이 느슨해지고 뒷걸음을 치고 있다면, 목회적으로 경각심을 불어넣는 설교를 준비할 수도 있습니다.

셋째는, 개인적 설교입니다. 목사가 개인적으로 은혜 받은 것을 성도들과 함께 나누는 말씀입니다. 목사부터 말씀을 붙잡고 씨름하고 거기서 말씀의 능력을 체험했을 때, 전하는 말씀에 은혜가 넘치고 마음 깊숙이 전달되기 마련입니다.

지난 1월 한 달 동안 시편 62편을 갖고 말씀을 전하면서 제가 먼저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세상의 어그러진 모습을 보면서 더욱 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위기의 인생길을 걷는 다윗을 보면서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어도 뒤죽박죽인 세상 속에서 어려움을 당할 수 있고 사람들의 멸시와 시기를 받을 수 있음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잠잠히 의지하는 신앙인의 힘과 끈기를 배웠습니다. 믿는 자들의 반석이요 산성이요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을 또한 만났습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눈을 감고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을 갖습니다. 제 자신의 내면을 살피고, 하늘의 평안과 안식을 누리는 귀한 순간들입니다.

이제 오늘부터 “위로의 하나님”이라는 주제로 연속해서 설교하려고 합니다. 성경본문을 모두 정하지는 못했고 몇 주 동안 하게 될지도 확실히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매주 주시는 대로 말씀을 차근차근 준비해서 전하려고 합니다. 제가 위로의 하나님이라는 주제를 정하게 된 것은, 새해 심방을 하면서 우리 성도님들의 삶이 쉽지 않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생업이 힘겹습니다. 가정과 자녀들을 위한 기도제목도 꽤 많습니다. 건강도 예전처럼 튼튼하지 못합니다. 때로는 신앙도 흔들립니다. 아니 이 어려운 불경기 가운데서도 호황과 은혜를 누리고 있지만, 여전히 자신의 내면에는 왠지 모를 불안함과 허전함이 있어서 종종 우울해 집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서머나 식구들만의 문제라기보다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 인생입니다.

오늘 함께 나눈 말씀의 예화처럼,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들에 나두고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동전 한 개를 찾으려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성경이 가르쳐주는 하나님을 잠잠히 묵상하면, 주일마다 찬양하는 “참 좋으신 하나님”을 온 몸으로 체험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사람 한 사람을 기억하시고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힘내십시오. -河-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도 이-메일 서신을 보내지 못했는데

이번 주도 어제 저녁에 너무 피곤하여 잠자리에 들었다가

아침에 일찍 깨워 주셔서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감사-

엊그제 출애굽기 14장을 묵상했습니다.

모세가 홍해를 건너는 장면입니다.

뒤에서는 이집트 군사가 쫓아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군사들이 아니라

모세의 말을 듣고 얼떨결에 이집트를 일반 백성들입니다.

그 숫자가 무려 장정만 60만입니다.

훗날 광야 40년을 지내면서

시도 때도 없이

모세와 하나님께 불평하던 사람들이지요.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습니다.

뒤에는 이집트의 정예부대가 말을 타고 쫓아옵니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향해서

“잘 살고 있던 우리를 왜 데리고 나와서 죽이려 하느냐?”

– 이구동성으로 야단법석을 떱니다.

모세는 백성들 앞에 나가서 말합니다.:

“두려워 마십시오.

당신들은 가만히 서서

주님께서 오늘 당신들을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지켜 보기만 하십시오”(출 14:13)

모세라고 두렵지 않았을까요?

그도 두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 모세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여라

너는 지팡이를 들고 바다 위로 너의 팔을 내밀어

바다가 갈라지게 하여라.

그러면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한 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으며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출 14:16)

모세는 하나님 말씀대로 지팡이가 든 팔을

홍해를 향하여 쭉- 내밀었습니다.

그때 홍해가 갈라지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전하게 홍해를 건넜습니다.

이집트 병사들이 홍해를 건널 때는

다시 홍해가 닫혀서

물에 빠져 죽는 일이 생겼습니다.

2.

새해 심방을 하고

월초에 비즈니스 심방을 하면서

불경기가 계속됨을 실감합니다.

아침에 인터넷 뉴스를 보니

그리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부도가 날 만큼

경제 사정이 어렵답니다.

2년여 계속 우리를 괴롭힌 경제불황이

여전히 뒤에서 우리를 쫓아오는 듯 합니다.

그렇다고

앞에 펼쳐진 2010년도 아주 “맑음”은 아닙니다.

앞에서 넘실대는 홍해만큼이나 우리를 위협합니다.

이때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엇으로 살아야 할까요?

누구를 의지하면서 살아야 할까요?

어디에서 살길을 찾아야 할까요?

믿음은 불확실을 앞에 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우리의 팔을 쭉- 뻗는 것입니다.

믿음은 아무리 상황이 힘겨워도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가는 용기입니다.

믿음은 사람들의 말에 휩싸이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불안한 마음을 넘어서

살아계신 하나님께 인생을 맡기는 것입니다.

모세가 홍해를 향하여 지팡이를 쭉- 뻗었듯이

우리들도 2010년 남은 날들을 향해서

손을 쭉- 뻗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서 앞으로 나가기 원합니다.

하나님

오늘 하루도 우리 서머나 식구들

삶의 현장에서 크고 작은 문제들을 만날 것입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붙잡고

팔을 쭉- 뻗고

인생의 홍해 길을 마른 땅같이 건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0년 2월 4일 이-메일 목회서신)

새해 새 마음 (5) : 감사와 기쁨

새해를 맞아서 각 가정마다 심방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가정을 자주 방문할 수는 없습니다. 늘 바쁜 일로 쫓기는 이민생활가운데 목사를 가정으로 초대해서 예배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목사가 적어도 새해에는 교우들의 가정을 방문해서 예배하고 축복해야 한다고 믿기에 매년 새해심방을 하고 있습니다.

서머나 식구들은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는 한 목사가 심방 오는 것을 반기십니다. 아니 더 자주 오기를 기대하시는 분들도 꽤 많이 계시는데 바쁘다는 이유로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스럽기도 합니다. 이처럼 목사를 편하게 여기시고 찾아가는 것을 언제든지 환영해주시니 그것 또한 저의 감사제목입니다.

올해는 새해 심방을 하면서 송구영신 예배 때 주신 말씀을 본문으로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예전에는 꼭 암송해야 할 말씀이나 시편 말씀 가운데서 제가 준비했었는데, 올해 새해 말씀 카드는 한국에 주문을 했고 미리 간추릴 시간이 없어서 은근히 어떤 말씀이 있을지 염려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정마다 주신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가정과 개인에게 잘 맞는 말씀을 주셨는지 저도 우리 성도님들도 함께 무릎을 치면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불경기가 계속되니 아무래도 가정의 경제를 위한 기도가 제일 먼저 나옵니다. 전도사님과 권사님들의 경우 영육간에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 70이 넘으신 권사님들은 더욱 건강하셔서 우리 교회가 부흥하고 기도의 제목이 이루어지는 것을 꼭 보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자녀들을 위한 기도도 빠질 수 없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가장 기쁘고 감사할 때가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제가 영력이 특출해서 갑자기 병이 낫고 돈이 잘 벌리고 믿음이 쑥쑥 크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성도님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합니다. 기도 가운데 저와 성도님들은 물론 온 교회가 하나됨을 체험합니다. 함께 눈을 감고 간절히 기도하는 그 순간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 그곳이 천국입니다.

가정을 방문하면 주인 몰래 여기저기를 살핍니다. 어떤 변화가 있는지 목사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새로 들여온 가구가 있는지 좋은 옷이 걸려있는지에 눈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혹시 제가 기도해 드릴 무엇이 있는지 집안을 살피고, 사진틀을 들여다보고, 무엇보다 성도님의 마음을 살핍니다. 가정마다 새록새록 기도제목이 생겨납니다. 그 제목을 놓고 한 해 동안 기도해 드리는 것이 저의 특권이자 하나님과 교회가 저에게 주신 숙제입니다. 이 모든 일이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몸이 피곤하고 일이 밀려도 심방을 하고 난 뒤에 임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한 식구요 사랑의 띠로 엮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임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올 한해 하나님께서 서머나 식구들을 눈동자처럼 지켜보시고,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지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우리 모두를 안위하시길 기도합니다. -河-

새해 새 마음 (4) : 부지런함

미국을 세운 선조들 가운데 한 명인 벤자민 플랭클린은 그의 자서전에서 시간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실제로 벤자민 플랭클린은 하루 시간표를 세워놓고 한 순간도 낭비하지 않고 생활했습니다. 근면과 검소함 그리고 남을 위한 봉사가 플랭클린이 물려준 정신적 유산이기도 합니다. 플랭클린은 하루하루 주어진 시간이 인생을 구성하는 요소라고 했습니다. 건물을 짓기 위해서 벽돌을 쌓을 때, 중간 중간 벽돌이 없다면 건물이 견고하게 세워지지 못하는 것처럼 시간을 낭비한 인생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하나님께서 공평하게 주시는 하루 24시간을 알차게 활용했는지 그렇지 못하고 허송했는지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20-30대 젊은이들에게 하루 24시간은 그의 인생의 주춧돌을 놓는 매우 귀한 순간입니다. 앞으로 많은 시간이 있다고 게으름을 피운다면 게으름이 습관이 되고 그것이 성품에 스며들어서 게으름에 중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40대 이후 중년의 인생을 사는 분들에게 하루 24시간은 미래를 위한 투자입니다.

40대가 되면서 건강을 챙기라는 충고를 많이 들었습니다. 건강을 미리 챙겨놓으면 노년에 그만큼 고생하지 않는다는 조언이었습니다. 벤자민 플랭클린도 건강의 중요성을 두고“건강은 자신에 대한 의무이며 또한 사회에 대한 의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40대 이후 중년의 인생을 살면서 건강과 더불어 꼭 신경 쓰고 붙잡아야 할 덕목이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하는 생활태도입니다. 행여나 일찍이 많은 것을 이루었다면, 교만한 마음이 들어와서 그동안 이룬 것을 낭비하는 습관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생각보다 인생의 결실이 적다면 미리 포기하고 적당히 중년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바로 시작할 때라는 말처럼 중년의 인생은 여전히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음을 기억하고, 지나치게 멀리 바라보기보다 주어진 하루의 삶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알고 하루 24시간을 잡아야 합니다.

60대 이후의 인생을 사시는 어르신들이 서머나 교회에 많이 계십니다. 예전 같으면 60대는 덤으로 사는 인생이었습니다. 요즘에 60은 청춘이십니다. 70대 이후의 삶도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마음은 물론 몸도 건강하십니다. 게다가 인생을 사시면서 터득하신 지혜와 경륜까지 갖추고 계시기에 60대 이후의 삶은 “늙을 노(老)”자를 쓰는 노년(老年)이 아니라,‘일할 노(勞)“자를 쓰시는 노년(勞年)입니다. 그렇다고 60대 이후에 무리를 하시거나 욕심을 부리시는 것을 금물입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시기보다 하시던 일을 차근차근 정리하시면서 인생의 맛을 음미하실 때입니다.

하지만 60대 이후에 특별히 욕심을 내면서 추구하셔야 할 삶의 영역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동안 바쁜 인생길에 소홀히 했던 신앙에 남은 에너지와 마음을 쏟아 붓는 것입니다. 60대 이후의 신앙의 목표는 내면의 성숙입니다. 세상을 보는 안목과 사람들을 이해하는 마음을 넓고 깊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되 집착이나 상대방에 대한 섭섭함이 아니라, 현재의 모습에 만족하고 감사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삶을 닮기 위해서 애쓰시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닮는 노년의 삶은 청춘보다 아름다고 힘찰 것입니다.

2010년의 첫 번째 달이 지나갑니다. 순간순간“아버지 하나님”을 부르시면서 부지런히 삽시다. 부지런함에는 절대로 후회가 틈타지 않습니다.-河-

고요한 시간

2005년에 필립 그로닝이라는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위대한 침묵(into great silence)>이 한국에서 소리 소문 없이 5만 명 이상의 관객을 모으고 있답니다. 이 영화는 해발 1300미터 알프스 산맥에 위치한 카르투지오 수도원의 일상을 담았습니다.

영화 제목 그대로 무려 162분 동안 거의 대사가 없습니다. 단지 수도사들이 침묵으로 기도하면서 지내는 모습이 조용하게 펼쳐질 뿐입니다. 수도원을 둘러싼 아름다운 알프스 산맥의 경치, 수도사들을 깨우는 종소리, 수도사들의 발자국 소리와 경전을 읽는 소리가 이따금씩 들릴 뿐입니다.

한창 인기를 끌기 시작한 3차원 영화들이나 현란한 대사로 관객을 사로잡는 요즘 영화들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렇지만 영화 속에 흐르는 수도사들의 침묵은 매우 아름답고 어떻게 보면 화려합니다. 그들의 겉모습이 화려한 것이 아니라, 수도사들의 내면에 흐르는 신앙과 절제된 삶이 인상 깊게 마음에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서 저도 모르게 수도원의 삶에 빠져들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한번쯤 경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하루 종일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는 수도사들의 모습이 부러워 보였습니다. 함께 영화를 보던 아내가 “당신은 저런 삶을 살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아마 하루 종일 얘기 한 마디 나누지 않고 혼자서 지내는 수도원의 생활을 견딜 수 있냐는 뜻일 겁니다.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저는 원래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려서 수다를 떨거나 무슨 일을 도모하기 보다 혼자 있는 시간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목회를 하다 보니 말도 많이 하고 여러 얘기도 듣게 됩니다. 이 다음 은퇴 이후라도 기회가 된다면, 수도원 생활을 꼭 경험해 보고 싶습니다.

화려한 영상과 때로는 듣기에 거북한 상스러운 대화가 판을 치는 현대 영화들을 제치고, 말 그대로 침묵의 시간으로 들어가야 하는 <위대한 침묵>이 현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현대인들이 시끄러운 세상에 식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도시생활은 무척 시끄럽습니다. 한 밤중에도 소방차와 응급차의 소리가 들리는 거리의 소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들 입술의 말은 어떻습니까? 통계에 의하면 남성들은 평균 2만5천 개의 단어를 사용한답니다.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무려 1만 단어를 더 사용해서 3만 5천여 개의 단어를 구사하면서 대화한답니다. 그 가운데 듣기 좋고 아름다운 말들이 얼마나 될까요? 진실된 마음에서 우러나온 사랑의 대화는 얼마나 될까요? 대부분 일상의 대화들은 무의미하거나 나중에 녹음을 해서 다시 듣는다면 얼굴이 뜨뜻해질 정도의 창피한 언어들임에 틀림없습니다.

새해 첫 달에 <위대한 침묵>이라는 영화를 보면서, 시편 62편 1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여호와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 도다.” 새해 첫 주일 설교에서 올 해는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고요한 시간을 갖기로 성도님들과 약속한 것도 생각났습니다. 적어도 하루에 2-3분은 세상일을 모두 내려놓고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기로 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말을 너무 많이 합니다. 듣지 말아야 할 얘기도 너무 많이 듣습니다. 올 한해는 세상의 소리에 귀를 막고, 하고 싶은 말을 참으면서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는 훈련을 하기 원합니다. 그때에 미세하게 들려오는 하늘의 음성이 마음속에 울려 퍼지면서 우리의 삶이 더욱 풍요로워질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2010년 2월 21일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구원에서 소망까지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은 한국의 장마철을 연상시킬 만큼

폭우에 가까운 비가 며칠째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겨울 가뭄으로

캘리포니아에 물이 부족하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올 해는 정말 많은 비를 주십니다.

새해 들어서

현장에서 느끼시는 경제가

생각보다 훨씬 안 좋은 것 같다는 서머나 식구들의 염려가

이번 비와 더불어 말끔히 씻겨졌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새해 첫 달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은혜의 단비가 소낙비처럼 내리기를 기도합니다.

2.

시편 62편을 갖고

“새해 새 마음”이라는 주제로 연속해서 설교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시라는 표제어가 붙은 시편 62편은

세상살이에 지치고

사람에게 실망해서

온 마음과 삶이 만신창이가 된 시편기자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잠잠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는 고백과 결단입니다.

지난 설교 시간에도 잠깐 말씀 드렸듯이
(첨부한 설교를 잘 들으시면 중간에 나옵니다)

우리는 시편 62편 속에서 “다윗의 변화”가 감지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봄으로 그의 기도를 시작합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1절)

하나님의 구원을 발견한 다윗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2절)

그 순간 다윗을 괴롭히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3-4절)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와 같은 위기의 인생을 살아갈 때

자신을 향하여 박격포를 쏘아대는 사람들!

자신이 높은 위치에 올라갔을 때

거짓말과 저주로 자신을 떨어뜨리려 모함하는 사람들!

하지만 다윗은 다시 한번

영혼으로 (온 존재로) 고요하게 하나님만 바라보기를 스스로에게 촉구합니다.

그때 다윗의 마음에 소망이 찾아옵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5절)

1절의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구원은 말 그대로 과거의 청산입니다.

5절에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소망”을 발견했습니다.

소망은 미래를 향한 출발점입니다.

다윗은

구원에서 소망으로 이어지는

그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담대하게 고백합니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6절)

2절과 똑 같은 고백이지만

마지막에 “크게”라는 말이 6절에는 빠졌습니다.

2절에서는 흔들리지만 크게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어 표현 그대로 하면 “많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서 소망을 발견한 다윗은

6절에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라고

“크게”라는 말을 빼버린 채 자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이 고백 속에는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라는 뉘앙스가 들어 있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발견한 주님의 백성은

세상 풍파에 절대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의 삶이 구원에 뿌리를 내렸고

하늘에서 내린 소망이 그를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을 잠잠히 바라보는 가운데

– 구원에서 소망까지

– 크게 요동치 않음에서 절대로 요동치 않음까지 나아간 다윗은

자신과 백성들을 향해서 다음과 같이 담대히 선포합니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7-8절)

여기까지가 지난 세 주에 걸친 시편 62편 설교의

커다란 흐름이었습니다.

혹시라도 본문의 흐름을 놓치신 분들이 계실 것 같아서

복습 삼아 다시 설명해 드렸답니다.

이제 다음 두 주간에는

다시 한번 다윗이 경험한 세상의 모습과 (9-10절)

다윗의 마지막 결단과 선포(11-12절)를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3.

우리는 종종 구원의 단계에서 우물쭈물 걸리면서

앞으로 나가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이것만으로도 놀라운 은혜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를

믿음으로 이겨내기 위해서는

구원에서 소망으로 이어지는 확신과 선포가 꼭 필요합니다.

그때 우리들 역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라고 다윗처럼 고백할 수 있습니다.

2010년 새해에 들려오는

재난과 불황의 소식들을 그대로 마음에 품고

하나님만 잠잠히 바라보기 원합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

하나님께 이르는 소망

하나님께 속했다는 확신

하나님만을 의지하겠다는 결심이

소낙비처럼 우리 영혼 속에 시원하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이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을 확실히 의지하고

그 안에서 소망의 빛 줄기를 발견하는 서머나 식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10년 1월 21일 이-메일 목회서신)

새해 새 마음 (3) : 침묵의 시간 갖기

새해 들어서 시편 62편 말씀을 갖고 연속으로 설교하고 있습니다.“다윗의 시”라는 표제어가 붙은 시편 62편을 두고 독일의 신학자 바이저는“친구에게 배신당한 사람의 슬픔”이 담겨져 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부서지고 깨진 관계에 대한 다윗의 고뇌와 하나님을 향한 말없는 외침이 시편62편에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시편 62편 속에는 세상의 모습도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3-4절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로 악하고 못되게 변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현재 다윗의 상황은“넘어지는 담”이요 “흔들리는 울타리”와 같습니다. 가만히 놔두어도 비틀거리다가 그냥 넘어질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 다윗과 친구로 지냈던 사람들이 다윗을 향해서 박격포를 쏘아댑니다. 흔들리는 다윗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속셈입니다. 그러니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쓰리고 아팠겠습니까?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소위 세상에서 출세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높은 곳에 올라간 인생을 떨어뜨리려 애를 씁니다. 거짓말과 모함을 일삼습니다. 입에는 축복의 말을 하지만 진작 그 마음속은 시기와 질투 그리고 미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사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이토록 어지럽고, 시끄럽고, 억울한 세상을 사는 다윗은 아주 성숙한 태도로 세상과 맞서 싸웁니다. 그렇지만 다윗의 싸움은 조용한 싸움입니다. 사람들과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씨름입니다. 시편 62편 1-2절은 후렴처럼 두 번씩 반복됩니다(5-6절):“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다윗은 지금 어그러지고 부서진 세상을 뒤로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잠잠히 하나님만을 바랍니다. 하나님만을 향한 침묵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2005년 필립 그로닝이라는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위대한 침묵(into great silence)이 한국에서 소리 소문 없이 5만 명 이상의 관객을 모으고 있답니다. 이 영화는 무려 162분 동안 대사가 없는 침묵의 영화입니다. 3시간에 가깝게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침묵으로 기도하고 살아가는 모습, 수도원을 둘러싼 아름다운 알프스 산맥의 경치, 수도사들을 깨우는 종소리 만 들립니다. 해발 1300미터 알프스산맥에 위치한 카르투지오 수도원의 일상을 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침묵은 매우 아름답고 어떻게 보면 참 화려합니다.

침묵 속에 울려 퍼지는 수도사들의 모습은 시편 62편 속에서 다윗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과 아주 흡사합니다. 새해 첫 설교에서 하루에 2-3분만이라도 침묵의 시간을 가지면서 2010년을 사실 것을 부탁드렸습니다. 우리들은 말을 참 많이 합니다. 우리들의 귓전에 무수한 말들이 들려옵니다. 세상의 시끄러운 소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올 한해 세상의 소리에 귀를 막고 하고 싶은 말을 절제하면서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는 훈련을 하기 원합니다. 그때 미세하게 들려오는 하늘의 음성을 듣고 우리의 삶이 더욱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