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요셉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부터
창세기의 요셉에 대한 연속설교를 시작했습니다.

그 동안 성경의 마지막인
요한 계시록의 일곱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쓰시는 교회>에 대한 말씀을 나눴다면
성경의 첫 번째 말씀인 창세기의 요셉을 통해서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는 것입니다.

요셉에 대한 말씀은 독특합니다.
요셉은 성경의 여느 인물들처럼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예배하는 행동이 사뭇 적습니다.

대신에 요셉에 대한 말씀 속에는
본문의 해설자의 입에서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말씀이 자주 등장합니다.

지난 주에 살핀 열일곱 살 요셉은
자랑하고, 교만해서 우쭐했지만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간 요셉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주어진 일상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성인으로 빚어집니다.
그의 삶이 곧 예배였고,
그런 요셉과 하나님은 함께 하셨습니다.

2.
눈에 띠는 특별한 일을 한 두 번 잘할 수는 있습니다.
반면에 작은 일을 꾸준히 해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서
“작은 일에 충성했다”며 칭찬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오스 기니는 그의 책 <소명>에서 오스월드 챔버스의 글을 인용해서
일상적인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줍니다. 발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충동적인 용기를 가진 사람이 물 위를 걷는 것은 쉽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마른 땅 위를 걷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가기 위해 물 위를 걸었지만 땅 위에서는 멀리 떨어져서 그분을 쫓았다…… 우리는 상당한 긴장에 놀랄 만큼 잘 대처한다. 그러나 매일 24시간 동안 성도답게 사는 것, 제자로서 단조로운 일을 해내는 것, 예수님의 제자로서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고, 무시된 존재로서 사는 데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꼭 필요하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특별한 일을 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는 평범한 일에서 특별해야 하고, 더러운 거리, 비천한 사람들 중에서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이것은 5분 내에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314쪽)

또한 2세기 기독교 변증가이자 순교자였던 유스티누스는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갈릴리에서 자랐는데 그가 어렸을 때
나사렛 목수 예수님께서 만드신 쟁기가 사용되는 것을 보았답니다.

오스 기니는
예수님께서 목수시절에 만드신 쟁기와 멍에가 오랫동안
갈릴리 지역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에 주목하면서 다음과 같이 질문합니다:

“그 분이 만드신 쟁기와 멍에가
그렇게 오래 사용될 정도로 탁월한 물건이었던 비결이 무엇이었을까?”(314쪽)

3.
힘차게 시작했던 2015년도 어느덧 첫 달이 지나고
두 번째 달도 중순으로 향합니다.
엊그제가 입춘이었다니 시간의 흐름이 실감납니다.

이제 서서히 새해의 결심이 식고
원래의 습관과 타성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정상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늘 특별할 수 없습니다.
기적으로 가득 채워질 수도 없습니다.

특별한 것보다
일상적인 것에서 하나님을 찾아 만나고,
단조로운 일 속에서도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특별한 섭리를 발견하기 원합니다.

그때 일상이 곧 기적이 될 것이고,
요셉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사는 것이
예수님께서 목수시절 만드신 쟁기와 멍에처럼
훗날까지 가치가 있는 것이 되길 바랍니다.

주께서 요셉과 함께 계셔서 앞길이 잘 열리도록 그를 돌보셨다.
요셉은 그 주인 이집트 사람의 집에서 살게 되었다.
그 주인은 주께서 요셉과 함께 계시며,
요셉이 하는 일마다 잘 되도록 주께서 돌보신다는 것을 알았다.(창 39:2-3, 새번역)
The LORD was with Joseph, and he became a successful man, and he was in the house of his Egyptian master.  His master saw that the LORD was with him and that the LORD caused all that he did to succeed in his hands. (Gen 39:2-3 ESV)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5.2.5 이-메일 목회서신)

미소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거울을 보면
영락없는 50대 중반의 아저씨(?)가 거울 속에 들어있습니다.
애써 젊은 표정을 지어보지만 나이를 속일 수는 없습니다.

종종 제 표정이 근엄해 보일 때도 있답니다.
웃음기가 없을 때입니다.
그래서 살짝 미소 짓는(smile)연습도 해봅니다.

그러던 차에
오늘 MSN 홈페이지에서
<우리가 매일같이 미소 지어야 하는 11가지 놀랄만한 이유:
11 surprising reasons we should smile everyday>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만 소개하면
– 미소는 기분을 좋게 만들어줍니다.
– 미소는 스트레스를 낮추는데 도움이 됩니다.
– 미소는 사람들이 쉽게 다가오게 만듭니다.
– 미소는 두뇌건강에도 도움을 줍니다.
– 미소는 생산성을 높여줍니다.
– 미소는 창의적으로 만들어줍니다.

각각의 이유를 뒷받침하는
연구결과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UCSF연구진은
부정적인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보다
미소 짓고 긍정적인 태도를 보인 사람들이 더 창의적임을 밝혔답니다.

심지어 억지로 웃는 것(fake smile)도
남들에게 행복하고 긍정적인 사람이라는
좋은 인상을 준다는 항목도 있었습니다.

미소(微笑)의 한자어는
“작을 미”에 “웃을 소”입니다.
<작은 웃음> 그래서 미소입니다.

영어에서 s-mile은
<에스s>발음을 하면 저절로 입이 살짝 열리는데
그렇게 미소 지으면서1 마일을 걷는 격입니다.

2.
성경에 미소라는 말이 쓰인 두 구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욥기 29장 24절입니다.
내가 미소를 지으면 그들은 새로운 확신을 얻고,
내가 웃는 얼굴을 하면 그들은 새로운 용기를 얻었다.(새번역)
I smiled on them when they had no confidence,
and the light of my face they did not cast down. (Job 29:24 ESV)

고난 가운데 있던 욥은
자신의 명성과 영향력이 컸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다시 그런 시절이 오기를 소망합니다.

욥은 확신이 없거나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보면
슬며시 미소 지어 주었습니다.
욥이 밝게 웃어주면 누구도 눈길을 돌리지 못했고 결국 용기를 얻었습니다.
동방의 의인 욥은 미소 짓는 사람이었습니다.

시편 39편 13절의 다윗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구합니다.

13절을 히브리어 그대로 읽으면
제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미소 지울 수 있도록
저의 허물에 눈길을 두지 말아 주십시오.
Look away from me, that I may smile again, before I depart and am no more!”
(Psa 39:13 ESV)

세상 일이 허무한 줄 알면서도,
이렇게 저렇게 치이고, 죄를 지으며 살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허물을 용서해 주시면
웃음을 되찾을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웃음으로 인생을 마감할 수 있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13절의 한글성경들은 칠십인역이라는 헬라어 성경을 참고해서
원기를 회복하게 해달라는 기도로 번역했네요]

3.
우리가 요즘 살펴보는
요셉의 모습을 눈 앞에 그려봅니다.

보나마나 요셉은 늘 웃음지으면서 살았을 것 같습니다.
‘스마일 보이’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아버지 집에 있을 때는 물론
이집트에 노예로 끌려가서 소망 없이 지낼 때도
요셉은 미소를 잃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셉이 나중에 이집트 총리가 되는데
그의 미소도 한 몫 하지 않았을까요?

우리들 삶이 어떠하든지
미소를 간직하기 원합니다.

종종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서
최고의 미소를 올려드리는 겁니다.
“스마일”

하나님 아버지,
주님 앞에서
주님으로 인해서
미소 짓는 하루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5.2.12 이-메일 목회서신)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4)

지난 수요일부터 사순절(Lent)이 시작되었습니다. 앞으로 부활절까지 계속될 사순절 기간 동안 참빛 식구들의 신앙이 주님께 더욱 가까이 가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며,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기간이 되길 바랍니다. 매년 맞는 사순절이지만 하나님께서 올해 부어주실 은혜를 간절히 사모합시다.

사순절 동안 우리들의 마음가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각자의 삶을 단정히 하고 날마다 진정한 회개의 자리로 나갑니다. 2) 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 자신의 신앙과 삶을 돌아봅니다. 3) 금식과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함은 물론 구제와 선행을 실천합니다. 4)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 안에 가지처럼 붙어있어서 열매 맺는 삶을 삽니다. 5) 특별히 올해 사순절에는 모든 교회가 하루에 세 가지씩 감사의 제목을 노트에 기록하면서 보내기로 했습니다. 크고 작은 감사의 제목을 날마다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참빛교회 식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집트 바로왕의 경호 대장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온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니 그가 하는 일들이 형통했습니다. 주인 보디발은 요셉에게 집안의 모든 사무를 맡겼고, 요셉으로 인해서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요셉이 이방 땅에서 복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습니다. 요셉은 외모가 빼어났고 아름다웠습니다. 노예 중에서 가장 뛰어난 외모를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행동이 눈에 띠었고 매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합니다. 주인집 마님의 유혹이니 뿌리치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냉정하게 거절합니다. 주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큰 죄가 된다고 담대히 밝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붙잡고 유혹하는 보디발의 아내의 손길을 뿌리치기 위해서 겉옷을 두고 도망칩니다. 요셉의 행동에 화가 난 보디발의 아내가 자기 남편에게 요셉이 자기를 희롱하면서 동침하자고 했다는 누명을 씌어서 고소합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서 요셉은 정치범들을 가두는 감옥에 갇힙니다.

형들에 의해서 마른 구덩이에 던져졌던 요셉이 이제는 주인에 의해서 감옥에 던져지는 최악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요셉의 인생은 이렇게 자꾸만 밑으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감옥에 갇힐 때도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고 그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요셉 역시 감옥에서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감옥을 책임지는 간수가 요셉에게 모든 사무를 맡겼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도 가정의 모든 사무를 도맡아했는데, 감옥에서도 매한가지였습니다.

이처럼 요셉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 그에게 은혜를 베푸심으로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견딜힘을 주셨습니다. 요셉 역시 감옥에 갇히는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고, 감옥에서도 형통함을 누렸습니다.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간 요셉은 그의 인생이 감옥까지 떨어졌지만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받았습니다. -河-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3)

수요일부터 2015년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수요일은 사순절을 앞두고 몸과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정돈하고, 우리의 본질이 흙에서 온 먼지와 같은 존재들임을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는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입니다. 올해 사순절에 모든 성도님들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앞으로 부활절까지 하루에 3가지씩 감사의 제목을 떠올리시면서 기도하시고 별도로 노트를 준비하셔서 매일의 감사제목을 기록해 가시는 겁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위해서 고난 받으시고 급기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시고 그 은혜를 여러 각도에서 감사하는 기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속회나 가정에서 감사의 제목을 서로 나누면 은혜가 갑절이 될 것 같습니다. 온 교회가 <감사일지>를 꼭 쓰시길 부탁드립니다.

요셉에 대한 말씀이 계속됩니다. 형들에 의해서 이집트로 팔려간 요셉은 그곳에서 바로왕의 경호대장인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다시 팔려갑니다. 요셉이 이집트 고위관리의 집에 가정 일을 돕는 노예로 팔린 것입니다. 어찌 보면 불행 중 다행입니다. 고대시대에 노예는 주인의 소유물입니다. 노예에게 결정권이나 인간으로서 존중받을 권리가 전혀 없습니다. 철저하게 주인에게 예속된 존재입니다. 만약에 이스라엘에서 온 요셉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면 이집트에서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의 처지는 채색 옷을 입고 있던 야곱의 아들 요셉이 아니라 팔려온 노예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형으로부터 은 20에 요셉을 산 이스마엘 상인들이 그를 이집트의 고위관리인 보디발에게 넘겼다면 요셉의 몸값이 꽤 나갔을 것입니다. 아니 노예를 사러 시장에 나왔던 보디발에게 요셉이 눈에 띠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생기발랄한 소년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 해맑은 모습을 하고 있었을 겁니다. 먼 거리를 오느라 지쳤고, 자신의 앞길을 알지 못하니 절망했겠지만 여전히 다른 노예들과 달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보디발이 선뜻 그를 사갑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음을 강조합니다. 비록 노예로 살았지만 하나님께서 요셉의 삶을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형통하게 하였다는 말씀은 요셉의 삶에 하나님의 손길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열심히 살았을 것입니다. 비록 낯선 땅에 팔려온 노예였지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요셉으로 인해서 그의 주인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습니다. 이를 통해서 이집트의 고위관리 보디발이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을 봅니다: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았더라”(3절).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간 요셉의 상황은 절망적입니다. 그의 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래도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간직했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요셉의 진가를 확인한 보디발이 그의 집의 모든 사무를 요셉에게 맡길 정도입니다. 요셉의 진실성과 성실함 그리고 남다른 정직함의 열매였습니다. 당시의 제국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온 요셉은 이렇게 삶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 힘으로 노예의 삶을 견뎌냈습니다. -河-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2)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며 지내던 요셉에게 인생 최대의 위기가 닥칩니다. 하루는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들에서 양을 치는 형들에게 보냅니다. 요셉은 선뜻 형들을 찾아 나섭니다. 형들이 도단이라는 곳에서 양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 고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멀리서 걸어오는 요셉을 알아본 형들은 요셉을 죽일 생각을 합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말씀에서 야곱은 요셉을 특별히 사랑했지만, 형들은 동생 요셉을 미워했다고 했습니다. 요셉을 향한 형들의 미움은 시기와 질투로 발전했습니다. 요셉 혼자 채색 옷을 입고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질투가 생겼습니다. 자신들은 들에서 양을 치느라 고생을 하는데 요셉은 아버지 곁에서 편하게 지내는 것도 못마땅했습니다. 게다가 자신들이 요셉에게 절할 날이 올 것이라는 꿈 이야기를 듣고는 시기심이 불일 듯 일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자신들만 있는 들판에 요셉이 나타났으니 그를 죽일 생각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형들은 요셉을 보고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라고 비아냥거립니다. 요셉을 잡아서 구덩이에 던져서 죽이려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웁니다. 시기와 질투 의 끝이 참으로 무섭습니다. 그래도 맏이 르우벤과 유다의 중재로 요셉을 죽이지는 않고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당시 노예 한명 값인 은 이십을 받고 팔아버립니다. 이렇게 해서 요셉은 이집트로 팔려갑니다. 형들은 요셉의 옷에 짐승의 피를 묻혀서 그가 짐승에 물려서 죽은 것처럼 아버지 야곱을 속입니다. 그동안 속고 속이는 인생을 살았던 야곱이 급기야 아들들에게 속임을 당하는 안타까운 일이 생겼습니다.

요셉을 죽일 생각을 하고 결국 먼 나라 이집트에 노예로 팔아버리는 형들을 보면서 시기와 질투가 얼마나 무서운지 배웁니다. 아마 형 혼자서는 그런 못된 짓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열 명의 형들이 의기투합하니 동생을 죽일 생각까지 합니다. 이처럼 죄는 작은 것에서 시작해서 큰 것으로 발전합니다. 혼자 하면 죄책감을 느끼지만 함께 하면 도리어 죄를 즐기게 됩니다. 사악하다는 말이 맞습니다. 그런 점에서 죄를 짓게 하는 것은 악한 영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죄에 민감해야 합니다. 죄를 자각하면 곧바로 회개해야 합니다.

형들이 요셉을 사랑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요셉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꿈얘기를 하면서 자랑할 때도 친엄마 없이 자란 그를 이해해주고 도리어 격려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밀려오는 것은 야곱의 형제들에게 사랑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준다고 했는데 말입니다.

지난주에 속회가 새로 발표되었습니다. 온 교회가 서로 사랑해야 하지만, 올 한해 속회를 통해서 주님의 사랑을 나누기 원합니다. 시기하고 질투하거나 허물을 들추어내기보다 서로 품어주면서 사랑으로 행하는 속회가 되기 원합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시기와 질투 그리고 경쟁이 판치는 세상 속에서 사랑으로 행하시는 참빛
식구들 되시기 바랍니다.-河-

룻기속의 사람들

좋은 아침입니다.

  1. 새벽기도회에서는
    구약 성경 룻기를 읽고 있습니다.

룻기의 배경은
이스라엘에 왕이 없어서
각자 마음대로 행하던 사사시대입니다(삿21:25)
가나안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신앙적으로 바닥을 치고 말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가뭄이 들자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부인 나오미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땅으로 이주합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서 남편이 죽습니다.
나오미는 두 아들을 모압 여인과 결혼시킵니다.
설상가상으로 두 아들도 죽습니다.

결국 모압 땅에
나오미와 두 명의 모압 며느리만 남았습니다.

나오미는 고향에 가뭄이 그쳤다는 말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웁니다.
역이민을 결심한 것입니다.

그때 둘 째 며느리 룻이 따라 나섭니다.
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을 자신도 믿고,
어머니 나라에서 어머니 곁에 묻히겠다는 것입니다.
충성심이 대단합니다. 기특합니다.

2.
나오미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나오미와 모압 며느리 룻이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수군대면서 조롱합니다.

그때 나오미가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기쁨pleasant]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슬픔bitternaess]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룻1:20-21)

처절한 고백입니다.
잘 살겠다고 모압에 갔는데
금의환향은 커녕 최악의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나오미는 자기 가족의 실패를 솔직히 인정합니다.
보통 여자가 아닙니다.

룻은 생활전선으로 나갑니다.
추수하고 남은 이삭을 주우러 간 것입니다.

그때 룻이 우연히 간 곳이 보아스의 밭입니다.
민첩하다는 이름을 가진 보아스는
베들레헴의 유력인사였고
무엇보다 훌륭한 성품을 가졌습니다.

요즘 ‘갑질’이라는 말이 유행인데
보아스는 자신이 고용한 일꾼들을 인격적으로 대합니다.
밭에 가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길 원하노라”고 먼저 인사를 건넵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주시길 원하나이아”(삿2:4)라고 일꾼들이 화답합니다.

마음씨 좋은 보아스의 밭에 간 덕분에
룻은 이삭을 많이 주워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룻이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가서
이삭을 주었다는 말에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보아스가 나이는 많아도
당시 관습에 따라 홀몸으로 돌아온 룻을 책임질
친족 가운데 한 명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보아스는 매우 훌륭한 성품의 소유자입니다.

나오미는 룻과 보아스를 만나게 해줄 생각을 합니다.
룻이 우연히 보아스를 만났지만
나오미는 단지 우연이 아님을 간파하는 믿음의 눈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오미의 말대로 룻이 보아스에게 나가고
보아스는 가문의 절차를 밟아서
모압 여인 룻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이들에게서 다윗의 할아버지 오벳이 태어납니다.
다윗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천여 년이 흐른 뒤에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베들레헴의 유력자 보아스와
모압에서 온 외국인 룻 사이에서 생긴 일입니다.

3.
룻기를 읽다 보면
감정이 동합니다.

나오미의 가족이 모압 땅에서 겪은 일들을 차근차근 읽다 보면
고향을 떠나서 타향에 사는 우리들이기에 더 깊이 공감합니다.
나오미와 룻의 심정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룻기 속의 인물들은
강합니다. 따뜻합니다. 성숙합니다.

쉽지 않은 결정을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들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쓰셔서
이스라엘 최고왕 다윗,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삼아 주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뤄주신다는 말씀(롬8:28)이 생각납니다.

신앙이 무너지고,
전쟁과 가뭄, 미움과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사사 시대에 이렇게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에 힘을 얻습니다.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시30:11)
You have turned for me my mourning into dancing;
you have loosed my sackcloth and clothed me with gladness, (Psa 30:11 ESV)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성품
무엇보다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5.1.29 이-메일 목회서신)

절제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 제가 홈페이지로 쓰는
MSN에 흥미로운 기사가 떴습니다.

뉴 햄프셔에서
초콜릿을 과다 복용한 곰 네 마리가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곰이 죽은 근처에는
사냥꾼들이 미끼로 놓아둔
초콜릿 90파운드와 도넛이 있었답니다.

전문가들은
초콜릿 속에 들어있는 테오브로민(theobromine)이라는
물질이 곰에게 독이 되어서 죽었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과다복용(overdose)이 문제였습니다.

2.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지만
저 역시 먹는 대로 체중이 늘어나는 편이기에
밖에서는 많이 먹어도
집에서는 식사량을 엄격히 조절합니다.

그런데 절식이
금식보다 사뭇 어려운 것을 종종 경험합니다.

금식하기로 작정 하면
며칠이고 물만 먹고 경건의 훈련을 하면서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먹는 음식을 줄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절식하는 것은 정말 어렵지요.

3.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사랑으로 시작해서 절제로 끝이 납니다.

사랑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절제가 맨 끝에 나오는 것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절제를 위해서
그만큼 훈련이 필요하다는 뜻일 겁니다.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게 균형을 지키면서 정도를 걷고,
매사에 단정하게 행하는 것이 곧 절제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자신의 욕심과 마음을 통제할 수 있는 것,
있는 모습 그대로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절제입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교만하거나 자랑하지 않고
그렇다고 너무 비굴하지 않은 겸손함이
곧 절제입니다.

올 한 해
매사에 절제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너무 지나치지 않길 원합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의 가치관이나 유혹에 빠지지 않길 원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내어놓음으로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절제가 힘을 발하길 간절히 원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2-23)
But the fruit of the Spirit is love, joy, peace, patience, kindness, goodness, faithfulness,
gentleness, self-control; against such things there is no law.  (Gal 5:22-23 ESV)

하나님 아버지,
그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절제의 능력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5.1.22 이-메일 목회서신)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1)

오늘은 새로 세워진 임원들을 임명하고 축하하는 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핏값을 주고 사신 교회를 섬기는 것은 매우 감격스런 일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임원을 세우는데 까다로운 기준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직분이 어떤 지위가 아니라 섬김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정해진 기준을 충족하고 자원하는 마음이 있을 때 교회의 임원으로 세웁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작년부터는 젊은 집사님들께서 주일예배 기도를 인도하십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사명을 갖고 있는데, 젊은 집사님들을 교회의 일꾼으로 준비시켜드리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권사님들께서 배려해 주시고, 은퇴하신 권사님들께서 식사기도로 섬겨주시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젊은 집사님들에게 기도의 기회를 주신 권사님들과 기도로 섬겨주시는 집사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섬겨주신 원로집사님을 명예 권사님으로 모시고, 여섯 분의 젊은 집사님을 세웁니다. 직분을 받으신다고 갑자기 바뀌는 것은 없습니다. 교회 사역이 늘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대신에 몇 가지 부탁을 드립니다. 명예 권사님께서는 직분 그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고, 교회의 어른으로 본을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주는 명예직이기에 더욱 뜻 깊은 직분입니다. 집사님들은 성심껏 교회를 섬겨주시기 바랍니다. 궂은일을 먼저 하시고, 교회를 위해서 기여할 수 있는 사역을 찾아서 자원하시면 됩니다. 저희 교회는 일에 사람을 맞추지 않고, 일하실 일꾼이 있으면 그 사역을 시작합니다. 여러분이 하고 싶으신 사역을 마음껏 하시기 바랍니다. 힘닿는 대로 지원하겠습니다.

사역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새로 임명된 임원들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의 모든 임원들께 드리는 부탁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경건의 시간을 규칙적으로 가지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사도가 부탁했듯이 교회를 섬길 때는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힘으로 하면 금방 지치고 불평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교회와 성도님들을 섬기시고, 주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창세기 요셉에 대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지난 한달 동안 하나님께서 쓰시는 교회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는 것입니다. 요셉에 대한 말씀을 통해서 오늘 세워주신 임원들은 물론 참빛 교회 모든 성도님들께서 하나님께 쓰임 받으시길 기대합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신앙과 성품을 갖추시길 바랍니다.

요셉에 대한 말씀은 그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꾸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지만 요셉이 너무 일찍 발설하는 바람에 형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요셉과 그의 아버지 야곱은 하나님의 꿈을 마음속에 간직했습니다. 요셉이 이집트에 팔려가고 어려운 일들을 연거푸 겪었지만 하나님의 꿈을 마음에 품었기에 힘든 과정을 이겨나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河-

하나님이 쓰시는 교회 (4)

올 해 우리 교회 표어대로 <하나님이 쓰시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교회도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또한 성령 하나님께서 마음속에 거하시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전이라고 말하고 있으니(고전3:16) 우리들이 쓰임 받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쓰시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두 가지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께서 쓰심으로 일어나는 외적인 변화 또는 열매들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쓰셨다는 것이 겉으로 드러나니 당사자는 물론 주변 사람들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이것이 요한 계시록의 일곱 교회들에 있었던 “행위”일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내적인 성품의 변화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있었던 사랑, 믿음, 섬김과 인내의 네 가지 덕목이 성품 속에 배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행위와 성품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쓰시는 것이 드러나 보일 때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아보게 되고 그들도 하나님께로 올 것입니다.

저는 위의 두 가지 표시들 가운데 특별히 성품의 변화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행위는 좋을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어서 하나님께서 쓰심을 한결같이 드러내 보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반면에 우리의 성품은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합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들을 보고‘예수 믿는 사람답다’라고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신다는 증거가 됩니다. 신앙과 삶의 통합이 이루어진 행위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을 닮은 성품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쓰임받기 원합니다.

오늘 살펴볼 서머나 교회는 빌라델비아 교회와 마찬가지로 책망 없이 칭찬만 받았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고난의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겪고 있는“환난과 궁핍”을 알고 계셨습니다. 여기서 환난이라고 하면 밖에서 오는 핍박을 가리킬 것입니다. 궁핍은 물질적인 빈곤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라오디게아 교회와 반대로 서머나 교회는 가난했습니다. 자랑할 것이 없는 초라한 교회였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의 실상이 제각각인데 그 가운데 서머나 교회의 상황이 가장 열악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서머나 교회를 두고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고 칭찬하십니다. 라오디게아의 책망과 정반대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믿음이 부요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목숨 걸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앞으로도 고난이 계속 닥칠 것이라니 이들의 상황이 얼마나 어려운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시는 당부의 말씀이 “죽도록 충성하라”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믿음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환난의 기간이 열흘로 정해져 있음을 알려 주십니다. 이들 앞에 생명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늘 좋을 수 없습니다. 환난과 핍박이 수시로 밀려옵니다. 그때도 죽도록 충성하면서 신앙을 지켜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고난의 끝에 생명의 면류관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河-

스타트업(startup)

지금부터 150여년 전 수십만의 사람들이 미국전역에서 캘리포니아로 몰려왔습니다. 골드러시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스타트업이라고 불리는 벤처회사를 세우거나 그곳에서 일하기 위한 젊은이들이 실리콘 밸리와 샌프란시스코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2만여개에 가까운 회사들이 새롭게 시동을 걸고 트윗터나 페이스북처럼 세계적인 기업으로 도약합니다. 너도나도 서부로 몰려왔던 그 옛날 골드러시때와 달리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로 무장한 젊은이들의 행보입니다. 그들의 꿈과 열정이 우리 지역에서 꽃을 피우기도 하고 또한 안타깝게도 소리 없이 사라집니다.

엊그제는 20대 한인여성 세 명이 세운 스타트업 회사가 미국은 물론 한국 언론에 일제히 보도되었습니다. 3천만 불에 회사를 팔라는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한 것이 세간에 주목을 받은 것입니다. 8억불 매출이 가능한 회사를 헐값에 팔 수 없다고 당차게 말하는 것을 보니 이들이야 말로 노다지 금광을 발견한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이들은 여느 스타트업 창업자들처럼 매의 눈을 갖고 시장을 들여다보고, 아이디어를 내고, 밤낮없이 일했을 것입니다. 20대 젊은 여성들이 엄청난 회사를 세워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울 뿐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불과 십여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기업가들의 전유물이었던 창업이 젊은이들의 로망이 되어서 자신의 꿈도 펼치고 실제로 많은 돈을 버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변하고 있는데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는 여전히 제자리 걸음입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읽기보다 안이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만 응답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여전히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교회를 젊은이들은 외면합니다. 지난 10여년 이상 동성애 문제를 두고 상당한 에너지를 쏟았지만 동성결혼이 기정사실화 되면서 교회의 대패로 막을 내릴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교인들이 고령화되면서 교회에서 젊은이들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얘기도 심심치 않게 듣습니다. 가나안 성도라는 신조어도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믿지만 기존의 교회 행태에 식상해서 교회에 ‘안나가’는 젊은이들을 가리킵니다. 말 그대로 교회의 위기입니다.

작금의 미국과 한국 개신교의 위기는 1900년대 중반 영국교회가 경험한 것과 유사합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부흥>이라는 책에서 당시 영국 사회를 다음과 같이 진단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 관심이 없습니다: “성경은 평범한 책이 되었고, 여타의 책들과 똑 같은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성경을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거룩한 책이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더 이상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 하는데도 교회는 건물을 짓는 등 자기영역을 늘리는데 몰두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우리가 절제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한시가 급합니다”라고 교회의 각성을 촉구합니다. 하지만 요즘 신문보도에서 보듯이 영국 교회는 거의 와해되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꿈꾸던 부흥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남 얘기가 아닙니다. 영국 교회을 비롯한 유럽 교회의 몰락은 우리들에게 커다란 경종을 울립니다. 초대교회 시절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할례와 안식일을 주장하다가 결국 세상에서 사라진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부르시고 전혀 다른 패러다임의 이방인 교회를 통해서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변화하는 세상과 담을 쌓거나 안이하게 대처한다면 영국교회처럼 또한 유대교를 고집하던 예루살렘 교회처럼 무너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 것에 교회가 반응해야 합니다. 복음의 정체성을 지켜야 하지만 변화하는 세상에 유연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매력적인 복음을 세상에 제시해야 합니다. 더 이상 성도들을 교회에 묶어두지 말고 세상 속으로 파송해야 합니다. 누룩처럼 세상 속으로 파고드는 선교적 교회, 선교적 그리스도인들로 탈바꿈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우월성을 주장하면서 교리를 주입하기 보다 섬김과 희생적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듯이 다시금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이라는 평판을 얻어야 합니다. 기업가들만 스타트업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 교회들도 다시 시동을 걸고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한시가 급할 수 있습니다. 2015년 새해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은 신앙과 교회의 새로운 스타트업일 수 있습니다. (2015년 1월 22일 SF한국일보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