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 : 기다림

교회력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화의 왕으로, 구원의 주님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기도하며 기다리는 대강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것을 수백 년 전에 이미 예언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와 미가와 같은 선지자를 통해서 유대땅 베들레헴에 메시야가 태어날 것을 성경에 예언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야가 하루속히 오시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기다림만큼 지루하고 견디기 힘든 것도 없습니다. 기다림의 끝과 시간을 알지 못한 채 막연히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다림에 지치거나, 확실한 보장이 없기에 중간에 포기해 버립니다. 오늘 본문 속에는 자신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메시야 예수님을 만날 것을 확신하면서 긴 세월을 기다린 두 사람이 나옵니다.

시므온은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던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로마의 식민지였기에 정치적으로 압제를 받았습니다. 조국이 없으니 경제나 사회가 어렵고 어둡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때 시므온은 하나님께서 백성을 구원하고 위로하시기 위해서 메시야를 보내주실 것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였고 성령께서 주시는 약속도 받았습니다:“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눅2:26). 하루는 성령께서 시므온에게 성전에 들어가라고 지시하십니다. 그랬더니 그곳에 부모님을 따라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오신 아기 예수님께서 계셨습니다. 시므온이 예수님을 금방 알아보고 예수님을 품에 안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향해서 아기에 대해서 예언합니다. 이처럼 시므온은 믿음으로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그 임재와 인도하심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때 아기 예수님을 처음 만나서 그가 세상을 죄에서 구원할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아보았습니다.:“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이처럼 시므온은 마음이 열리고 눈이 열렸기에 메시야를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또 한분은 안나입니다. 안나는 결혼하고 7년 만에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84년을 과부로 살았으니 안나는 거의 100살에 가까운 분입니다. 안나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성전에 머물면서 금식하며 기도하며 섬기는 거룩한 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셨을 때 안나도 마침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고 성전의 모든 사람들에게 아기 예수님이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야라고 외칩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평생을 기다림으로 사신 분들입니다. 메시야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 성전을 떠나지 않으신 분들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보고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라고 생각한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므온과 안나는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신앙 안에서 깨어있었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들은 끝까지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이었기에 아기 예수를 맞으신 인물들로 성경에 기록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다리는 자를 쓰십니다. -河-

12월을 맞으며

좋은 아침입니다.

1.

어느덧 2009년의 마지막 달을 맞았습니다.

달력에 마지막 한 장이 남은 것을 보면서

왠지 마음이 싸- 했습니다.

어느 때부터인지 몰라도

달력의 맨 마지막 장을 남겨놓고 있으면

여러 가지 상념에 젖습니다.

한번

지난 열한 달의 삶을 커다란 테이블 위에

쭉 늘어놓았다고 가정해 보았습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 보니

지난 한 해 동안의 삶이

마치 벼룩시장 테이블 위에 놓여진

오래된 제품들처럼 산뜻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거추장스러운 것들,

너무 오래된 것들,

고장 났다가 간신히 고쳐진 것들,

벼룩시장에서 싼값에 사가지만 결국에는 다시 버릴 물건들,

그래도 왠지 정감이 가는 오랜 친구와 같은 삶의 순간들과 추억들!

이처럼 한 해를 돌아보니

삶의 구비구비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하심이 임했음에

감사의 고백이 절로 나왔습니다.

2.

12월은 한 해 동안의 삶을

가지런히(decently)

정리하고 정돈하는 시간입니다.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부끄러운 것들은 불로 태워 없애야 합니다.

깨끗이 손질할 것들은 말끔히 고쳐야 합니다.

귀한 것들은 곱게 싸서 보관해야 합니다.

엉클어진 것들은 가지런히 정돈해 놓고

새해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때 꼭 보관해 놓을 것이 있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행복했던 순간들입니다.

한없이 기뻤던 순간들입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저서 고백록에서

참 행복과 참기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참다운 행복이란

당신[하나님] 안에서, 당신을 향하여, 그리고 당신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옵니다.

참 행복이란 이것뿐 그 외에는 없습니다. 혹시 다른 종류의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른 종류의 기쁨을 추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다운 기쁨은 아닙니다.

올 한 해 동안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 때문에

누렸던 참 행복과 참 기쁨을

열심히 기억해 내고 찾아내셔서

마음 한 켠에 가지런히 보관해 놓으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

올 해의 마지막 달을 지내면서

서머나 식구들의 마음이

하나님 안에서 누린 참 행복과 참 기쁨의 순간들로

가득 채워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09년 12월 3일 이-메일 목회서신)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 : 온유함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업적이나 외적인 조건을 보고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여기서 마음의 중심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 간절함, 경외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또한 마음의 중심은 성품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신약성경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나오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들의 특징적인 성품입니다:“오직 성령의 열매를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할 법이 없느니라.”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의 성품과 삶 속에 드러나야 하는 매우 중요한 덕목들입니다.

성령의 열매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쓰시는 성품을 하나 선택하라면, 저는 “온유”를 꼽겠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직접“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네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의 마음도 헤아리셨고 그들도 맞아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만큼 낮아지셨습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힘없이 갈보리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분노하지 않으시고 그 모든 고초를 받아들이셨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예수님의 온유함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온유한 마음을 갖고 세상에 오셨다면, 구약 성경의 모세는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된 예입니다. 온유의 반대말은 “난폭함”입니다. 모세야 말로 혈기가 아주 강했던 인물입니다. 그가 이집트 왕자로 있을 때, 이집트 사람들이 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이집트 사람을 죽였습니다. 다음날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싸움에 성급하게 끼어들었다가 전날 살인사건의 목격자를 만납니다. 바로에게 고발하겠다는 말을 듣고 두려움에 떨면서 미디안 광야로 도망갑니다. 이 모든 사건들이 출애굽기 2장 11-15절에 나타나있는데 모세가 얼마나 난폭하고 경솔한 사람이었는지 잘 보여줍니다. 그에게서 온유함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살인을 저지른 것이 탄로날까봐 얼떨결에 미디안 광야로 도주한 모세는 그곳에서 40년을 지냅니다. 이집트 왕자의 신분은 이미 없어졌고 양을 치는 목동이 되었습니다. 그곳 제사장의 딸과 결혼도 합니다. 40년은 그의 인생 가운데 3분의 1에 해당하는 기간입니다. 모세는 그 기간 동안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모세안에 있던 혈기, 난폭함, 경솔함이 사라지고 말 그대로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비로소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이렇게 구약성경의 모세는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사람을 쓰십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만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온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 속에는 “가난함”이라는 뜻도 들어있습니다. 온유는 마음이 가난한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남을 탓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갑니다. 온유에는 “겸손”이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입니다. 이처럼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께 쓰임받기에 안성맞춤으로 준비된 사람입니다. -河-

Happy Thanksgiving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은 추수감사절이었습니다.

저 역시 지난 주 설교를 묵상하면서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훈련하면서 보냈습니다.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자꾸만 저의 마음을 하나님께 갖고 가서

하나님께 맡길 때

저절로 감사가 나왔습니다.

오늘은

미국 교회에서 주최한

홈리스 만찬에 다녀왔습니다.

여선교회 회장님 가족,

이은자 권사님 내외분, 동한씨

그리고 김덕례 권사님까지…

우리 교회 식구들도 오셔서

우리에게 지정된 테이블에 앉으신 홈리스를 섬겼습니다.

매주 수요일 홈리스를 돕다 보니

이들과의 만남이 어색하지 않습니다.

눈에 익고 저를 좋아하는(?) 반가운 분들도 만납니다.

추수감사절의 정신을 조금이나마 실천할 수 있었던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2.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외적인 조건이 조금 나아졌거나

더 많은 것을 갖게 되었다고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내면 깊은 곳에서 샘처럼 솟아나는 감사입니다.

오스 기니라고 하는 분이

“인생(Long Journey Home)”이라는 책에서

그리스도인의 감사를 잘 표현해 놓았습니다.

당신은 특별한 존재로 인한 감사를 느껴 본 적이 있는가?

모래 속에서 발가락을 움직일 때,

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 소리를 들을 때,

장미 위의 이슬 방울을 바라볼 때,

살아 있다는 것의 경이로움을 느껴 본적이 있는가?

자연의 어떤 부분도 스스로 창조하거나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적이 있는가?

당신과 나, 그리고 온 우주를 포함한 이 모든 것들은

존재하기 위해 다른 누군가의 은혜를 입고 있다.

만물이 이토록 기대어 있는 그 분은 과연 어떤 분일까?

그 분은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시지요!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고 하나님께로 전해집니다.

세상의 감사와는 차원이 다르기에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

우리 안에 하나님으로 인한

깊고 오묘한 감사가 매일 같이 샘솟게 하옵소서.

감사를 통해서

세상의 명예와 염려 그리고 불안을 떨쳐 버리게 하옵소서.

아무리 가늘더라도

감사의 끈이 쉬임없이 이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09.11.26. 이-메일 목회서신)

두 개의 바구니

올해도 어김없이 추수감사절을 맞이했습니다. 성경에서는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라고 교훈하지만 막상 세상에 나가면 감사보다는 불평과 원망이 앞서는 것이 우리네 범인들의 삶입니다. 게다가 “범사에”라는 수식어가 부담이 됩니다.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in everything)” 감사하라는 권면이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라는 말속에는 “모든 상황에서(in all circumstances)” 감사하라는 뜻도 들어있습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고 범사에 감사하기로 결심도 하지만, 막상 삶 속에서 범사에 감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엊그제는 101번 도로를 이용해서 샌프란시스코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아침나절인데도 생각보다 도로가 많이 막혔습니다. 알고 보니 앞에서 접촉사고가 나서 교통이 통제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심리가 참 묘합니다. 길이 막히다가 갑자기 소통이 원활해 지면 제한속도를 생각하지 않고 앞으로 질주합니다. 저 역시 약속 시간에 늦었기에 사고가 난 곳을 지나자마자 엑셀레이터를 밟고 달렸습니다.

그런데 앞에 가던 차가 속도를 내지 않습니다. 얼마나 답답한지 차선을 바꾸어보았습니다. 하필이면 앞에 있던 차도 따라서 차선을 바꿉니다. 하도 답답해서 경적을 울리고 싶었지만 꾹 참고 찬양CD를 틀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왠 일입니까? 5분도 안되어서 앞에 경찰차가 있는 겁니다. 앞에 갔던 차들이 줄줄이 단속에 걸렸습니다. 그 순간 제 앞길을 막았던 자동차의 운전자가 얼마나 고맙게 느껴지던지요! 이처럼 우리들은 어떤 일이 벌어져야 감사하지, 그 이전에는 불평하고 원망하고 때로는 씩씩대면서 화를 냅니다.

하나님께서 두 명의 천사에게 각각 커다란 바구니를 주면서, 한 천사에게는 세상에서 불평을 바구니에 담고, 다른 천사는 감사만 바구니에 담아오라고 부탁하셨답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서 불평 바구니를 든 천사가 기우뚱거리면서 돌아왔습니다. 바구니가 너무 작아서 세상의 불평을 모두 담을 수 없다고 세상 사람들처럼 불평을 합니다.

한참 있다가 감사를 담은 천사가 얼굴에 미소를 뛰면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바구니가 텅텅 비어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정을 물으니 천사가 대답합니다.: “세상에 내려가보니 감사를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돌아다녔는데 반도 채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제 바구니에 들어있는 감사를 생각하니까 제 마음속에 감사가 넘쳤습니다.”

우리들 삶 속에도 불평과 감사의 바구니가 있다면 아마 불평 바구니는 틀림없이 가득 찼을 것이고, 감사 바구니는 비교적 헐렁할 겁니다. 이처럼 우리들 역시 감사보다는 불평에 익숙합니다. 감사는 노력해야 얻을 수 있는데, 불평은 저절로 생깁니다. 감사할 것들을 찾기가 쉽지 않은데 불평할 것들은 주변에 널려있습니다.

일년에 한번 추수감사절을 지킬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감사절만큼은 감사할 것들을 찾아보고, 세어보고, 인생의 감사바구니에 곱게 간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범사에 감사하기로 다짐할 수 있기에 추수감사절기는 그 어떤 쇼핑보다 우리 마음에 풍성함을 가져다 줍니다.

올 추수감사절을 보내면서, 마음 속에 있는 불평바구니를 비어내고 그것마저 감사 바구니로 바꾸어서 두 바구니 모두 감사를 가득 담는 행복한 삶을 살기로 결심합시다. (2009.11.26 SF 한국일보 종교컬럼)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 : 범사에 감사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지만 그것을 지키는 것은 무척 어렵습니다. 사실은 모든 일에 감사하려는 마음을 갖고 생활하는 것만으로도 박수를 쳐 줄 만합니다. 그만큼 우리의 세상살이가 힘겹고, 태평양 바다에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오듯이 삶의 문제들이 계속해서 밀려오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면서 살려고 발버둥치는 우리들에게 1년에 한번 추수감사절이 주어진 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추수감사절기를 맞으면서 한 해를 돌아봅니다. 그리고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헤아려봅니다. 무엇보다 시간이 무척 빠르게 흘렀습니다. 어르신들은 더욱 빠르게 느끼셨을 겁니다. 커다란 강물처럼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이지만, 그 안에 하나님의 손길과 도우심이 숨겨져 있음을 발견합니다. 하얀 종이를 꺼내놓고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써 내려가면 생각보다 많은 복을 받았음을 새삼 발견합니다. 그때는 자신도 모르게“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의 유래는 정확히 390여 년 전인 1620년 메이플라워를 타고 보스턴 근교 플리머스에 도착했던 청교도들이 최초로 추수감사를 드린 것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02명의 청교도들은 66일의 항해 끝에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신대륙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동부의 혹독한 겨울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간신히 겨울을 난 청교도들은 인디안 원주민들의 도움을 받아서 봄철에 씨를 뿌렸고 그 해 가을에 첫 번째로 수확을 할 수 있었습니다.

시편 126편 5절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라는 말씀이 이들에게 그대로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자신들을 도왔던 인디언들을 초청하고, 살아남은 모든 청교도들이 함께 모여서 첫 번째 추수감사예배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처럼 추수감사절의 전통 속에는 세상의 어려움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그들을 도운 이웃들을 향한 고마움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들 역시 추수감사절을 맞으면서 이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삶의 굽이굽이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임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셨기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또한 이웃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한 해 동안 도움을 준 이웃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처럼 추수감사절은 험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과 이웃의 도움을 기억하고, 하나님께는 예배로 이웃들과는 감사의 축제를 벌이는 절기입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으면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쓰실까를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매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작은 일속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찾아냅니다. 그 은혜에 감격해서 자신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립니다. 감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축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河-

불청객이 찾아오면…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2년여 어려움을 겪으면서

제 마음에 한 가지 증세(?)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어느 순간 마음이 가라앉는 것입니다.

그때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지요?

저만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거칠고 험한 세상을 힘겹게 사는 우리 모두에게

때때로 조금씩 나타나는 징후들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도

어두움의 그림자가 다가옵니다.

삶의 무게가 우리를 짓누르고

이런 저런 일들로 힘겨울 때

종종 찾아오는 불청객입니다.

2.

불연 듯 때로는 슬며시

마음 속에 불청객이 찾아오면

아내와 함께 동네 뒷산을 걷습니다.

요즘은 왕복 5마일을 걸을 때도 있습니다.

자꾸 걸으니 조금씩 더 멀리 걷게 되는군요.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을 바라보면서

심호흡을 합니다.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느낍니다.

어떤 때는

그 즉시 책상에 앉아서 하나님 말씀을 펼칩니다.

한 가지 책을 정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습니다.

줄을 치면서…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면서…

말씀 속에 깃든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면서…

위로와 격려의 말씀에 힘을 얻습니다.

오늘 저녁에도

베드로전서를 읽었습니다.

5장 밖에 되지 않아서 쉽게

그렇지만 구절 구절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면서

읽고 묵상했습니다.

베드로전후서는 힘들 때 자주 읽는 말씀입니다.

역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해야 하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 안에서 살길을 찾아야 함을 다시금 느낍니다.

3.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사도 베드로는

큰 괴로움을 주고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불시험(painful trial)을 당해도 놀라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도리어 즐거워하고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벧전 4:13-14)

즐거워하고 기뻐할 이유는

말도 할 수 없는 시련과 환난이 닥쳐도

영광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리어 예수님으로 인해서 욕을 받는 것이 복된 일입니다.

이처럼 신앙은 역설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말씀이 마음 한 가운데 능력으로 임했을 때

깨닫게 되는 신비입니다.

지난 주에도 소개했던 데이빗 제레마이어 목사님의 책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이 세상은 쾌락을 전면에 내세우고, 고통은 뒤에 숨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때로 고통이 전면에 드러나지만,

그 배후에는 항상 기쁨이 있다.

4.

하나님,

신앙의 여정을 걷는

서머나 식구들의 삶이 때로는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그 배후에 있는 기쁨을 찾고 누리게 하옵소서.

고난 가운데도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는

신앙의 신비, 능력, 역설을 몸으로 체험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목사 올림

(2009.11.19. 이-메일 목회서신)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 : 산 제사를 드리라

모든 사람들에게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혼자서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서로 어울리며 살아가고, 서로를 인정해 주고 또 인정받으면서 사는 것이 아름다운 세상임에 틀림없습니다.

형제가 많은 집안에서는 서로가 부모님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하고 서로 시샘을 합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선생님의 인정을 받으려고 손을 높이 들고 선생님이 자신을 지적하기를 기다렸습니다. 사춘기가 되면 또래집단인 친구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인정받지 못하면 왕따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결혼 적령기가 되면 배우자에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나이가 들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자기를 인정해 준다고 믿을 때, 동기부여가 되어서 더욱 열심히 일하게 됩니다. 이처럼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인정받는다는 것은 무척이나 기쁘고 보람된 일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도 이처럼 기쁜데 하물며 하나님께 인정받는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식처럼 아끼는 제자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2:15). 하나님 말씀을 옳게 분별해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으라는 부탁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께 인정받으려는 궁극적인 목적이 나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마음껏 쓰시도록 자신을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것은 곧 하나님께 쓰임 받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이라는 주제로 연속해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께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드려야 합니다. 이것을 두고 오늘 본문에서는너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롬12:1)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몸을 드려야 합니다. 여기서 몸은 단순히 육체가 아니라 삶 전체를 가리킵니다. 우리의 삶 전체를 거룩한 산제사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구약시대의 제사는 죽은 동물을 갖고 지냈습니다. 동물을 죽이고 그 위에 각을 떠서 그 안에 자신의 죄를 담아서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우리의 삶을 거룩한 산제사로 하나님께 드립니다.삶을 통한 제사요 예배입니다. 구약에서 거룩한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듯이 우리들의 삶도 거룩해야 합니다.

거룩은 구별됨(separation)입니다. 세상의 유행과 풍조에 휩싸이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 거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부터 거룩한 산제사를 기대하시고 그것을 기뻐받으십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시고 높이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河-

굿 모닝 2

좋은 아침입니다.

2주전 이-메일 목회서신을 통해서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시기를 부탁 드렸습니다.

저도 눈을 뜨자 마자

침대에서 곧바로 “하나님 아버지”를 부릅니다.

우리처럼 의지도 약하고, 힘도 없는 범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아니 우리 자신을 알면 알수록

아침만이 아니라 하루 종일 순간순간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면서 살 수 밖에 없음을 실감합니다.

데이빗 제레마이어라는 목사님께서 쓰신

“생명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Signs of Life)”이라는 책에서

아침에 드리는 기도에 대한 내용이 있기에 함께 나눕니다.

매일 아침 그분에 대한 헌신을 재다짐하고, 그날 하루 당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인도해 주시기를 간구하라.

대영제국 군목을 지낸 테일러 스미스 주교(Bishop Taylor Smith, 1860-1937)는 이런 글을 남겼다.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나는 즉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신속하게 옷을 입고, 세수와 면도를 한 뒤 머리를 빗는다. 그 다음에는 정신을 차리고 정식으로 제복을 갖춰 입은 다음, 조용히 서재로 간다. 거기서, 전능하신 하나님과 나의 왕 그리스도, 내 주권자 되신 분의 충성스런 종으로 겸손히 그 앞에 서서, 그날 하루를 주님을 위한 섬김을 다짐한다.”

그 다음에는 유쾌한 태도로 하루를 시작하라. 우리 얼굴에는 그리스도의 믿음이 드러나야 한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의 권고를 잊지 마라: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다시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 삶에서 빛을 발하는 희망과 기쁨을 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가장 효과적으로 증거할 수 있다.

오늘 하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쾌한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오늘 하루

삶의 처소에서 만나는 이웃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시는 작은 예수의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능력을

삶 한 가운데서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힘내십시오.

하목사 올림

(2009.11.12. 이-메일 목회서신)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 : 변화를 받아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 최고의 인생을 사는 비결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쓰고 계시다는 것을 느낄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데는 빈부와 귀천이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다면 가장 귀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인생을 살 수 있을지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거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하나님께 쓰임받기 보다 반대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잘못을 종종 범합니다.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 보다 자신을 먼저 앞세워서 그렇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어그러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욕심을 내려놓지 못하고, 시기와 질투 속에 사람들과 경쟁해서 이기려는 마음이 불타오릅니다. 늘 불안하고 자기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안절부절 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그것을 두고 오늘 본문인 로마서 12장 2절은 변화 받지 못해서 그렇다고 가르쳐줍니다.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변화입니다.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의 변화입니다. 시기와 질투에서 사랑과 배려로의 변화입니다. 무엇보다 옛사람에서 새사람으로의 변화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변화 받는 비결을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라고 했습니다.“마음”이라는 말 속에는 생각, 뜻, 태도 등과 같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화를 받으라고 했지 변화하라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스스로 변화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은 바로 성령의 사역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변화를 받으라는 명령은 한번만 변화되라는 뜻이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늘 변화를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늘 변화되어야 합니다. 생각이 변해야하고,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으로 변화되어야 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도 변해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항상 변화를 경험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세상 풍조와 유행을 따르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송사리가 커다란 강물을 거슬러서 올라가듯이, 성령 안에서 변화된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지혜와 힘이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변화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선하신 길을 따라갑니다.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삶을 삽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합니다.

요즘 우리 시대에 성령 안에서 온전히 변화된 그리스도인들이 흔치 않습니다. 적당히 믿는 분들, 자기의 욕심을 성취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분들이 매우 많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자꾸만 무력해 집니다. 우리 서머나 식구들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매사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생각하시면서 하나님께 마음껏 쓰임 받으시길 바랍니다.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보면서 살아가듯이,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인생의 목적과 태도를 하나님께 맞추시는 멋진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