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시는 하나님

좋은 아침입니다.

지난 주에 부탁 드렸듯이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하나님 아버지”를 찾으셨는지요?

로마서 10:12절의 말씀대로

매사에 주님을 부를 때 풍성한 은혜가 임할 줄 믿습니다.: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제가 지난 3개월 동안 코스타에서 만났던 형제 자매들과

온라인으로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이번 주가 마지막인데, 마지막 성경본문이 살전 5;23-24절입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모든 삶이 거룩해 지기를 원하십니다.

성화의 길입니다.

동시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거룩함을 이루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결심하고

그 삶을 위해서 안간힘을 쓸 때

하나님께서 우리 손을 잡고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힘겹고 거친 인생길이 펼쳐질 때 마다

빌립보서 1장 6절을 묵상하면서 힘을 얻습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아멘

오늘도 각자의 삶의 처소에서

열심히 살아가실 서머나 식구들을 눈 앞에 그려봅니다.

그리고 “파이팅!”을 외쳐드립니다.

여러분 모두로부터

“하나님께서 이루셨습니다.”라는 간증과

“하나님께서 이루실 줄 믿습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이

끊이지 않기를 기도하겠습니다.

하목사 올림

(2009년 11월 5일 이-메일 목회서신)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

지난 6주 동안‘행복에의 초대’라는 주제를 갖고 연속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세상이 주는 행복은 아침안개처럼 금방 사라집니다. 세상에서 행복을 얻으려는 것은 먼 산에 걸려있는 무지개를 쫒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면 때때로 불안감이 밀려옵니다. 세상의 행복은 누가 더 많이 갖고 더 많은 것을 누리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상대적인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서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행복은 세상의 행복을 뛰어넘습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밖에서 행복을 찾지 않고, 마음속에 행복을 간직하고 살아갑니다.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말씀이 주는 약속과 능력을 누리며 살아갑니다.무엇보다 예수님으로부터 얻은 행복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행복의 극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 씀임 받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한 평생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갑니다. 짧은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께 쓰임 받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수만 있다면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행복입니다.

성경 속에 하나님께서 쓰신 인물들이 많이 나옵니다. 모세는 이집트의 왕자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귀족 출신입니다. 에스겔은 제사장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반면에 아모스는 양을 키우던 목자였습니다. 다윗 역시 들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었지요. 예수님의 제자들의 직업도 다양합니다. 마태는 삭개오와 같은 세리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입니다. 반면에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의사입니다. 사도바울은 교육을 많이 받았고 로마 시민권까지 갖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을 통해서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쓰신 인물들 가운데 많은 경우가“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대표적입니다. 오늘 살펴본 사도행전 4:13절에서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학문도 없는 범인”이라고 부릅니다. 당시 높은 지위를 차지한 사람들 눈에 베드로와 요한은 말 그대로 보잘 것 없어 보였을 것입니다. 배운 것도 없습니다. 외모도 초라합니다. 보통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고쳤습니다. 솔로몬 행각에서 설교를 했는데 5천명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루살렘 시내가 이들이 행한 능력과 전한 복음으로 떠들썩해졌습니다. 이들의 힘과 능력이 어디서 왔습니까? 성령 충만을 받았고, 예수님께서 이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당시의 종교지도자들도 이해하기 힘든 신기한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통 사람인 베드로와 요한을 들어서 쓰신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두 눈을 두루 살피시면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 가운데 세상에서 보잘것없고 천해 보여도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과 순수한 믿음을 갖고 있는 보통 사람을 찾으십니다. 세상의 보통 사람들, 세상 기준으로 미련하고, 천하고 멸시받는 인생들을 쓰셔서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밝히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고전1:26-28).

여기에 우리네 보통 사람들도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께 쓰임 받는 최고의 인생을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서머나 식구들 모두 하나님께 쓰임 받는 주님의 귀한 백성들이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河-

굿 모닝!!!

좋은 아침입니다.

Good Morning!

우리가 자주 쓰는 아침인사입니다.

그런데 정말 “Good morning이십니까?’라고

누군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면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일 것 같습니다.

그때 Good morning앞에 예수님 때문에라는 말을 붙히면

금방 대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때문에 좋은 아침입니다!

벌써 2년이 지났나요?

제가 한참 동안 서머나 식구들께 부탁 드린 것이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십시오.

그때는 많은 분들이 그대로 실천하셨습니다.

지금은 많이 잊어버리셨지요?

혹시 잊어버리셨다면

내일 아침부터 눈을 뜨자 마자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고 하루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시편 65 8절에 보면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이것보다 더 큰 복이 있을까요?

아침은 새날의 시작입니다. 시작이 즐거워야 합니다.

저녁은 하루의 마침입니다. 마무리도 즐거워야 합니다.

즐거움의 이유와 원천은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 하나님께로부터 오는/하나님께서 주시는 즐거움입니다.

여기서 즐거워하게 하신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에는

즐거워 소리치다” “즐거워 찬양하다라는

적극적이고 청각적인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10월의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두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는 워낙 날씨가 좋지만

주초에 씨애틀에 가보니 가을 기운이 역력했고

낙엽도 지고 비도 부슬부슬 내렸습니다.

이처럼 가을이 외로운 계절이라고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항상 기뻐합니다.

주께서 아침이 되는 것과 저녁이 되는 것을 즐겁게 하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

우리 서머나 식구들,

각지에서 이메일을 받는 모든 주의 백성들,

주님으로 인해서 아침을 맞고 저녁이 되는 것이

한없이 즐겁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샬롬,

하목사 올림

(2009 10 29일 이메일 목회서신)

행복에의 초대 : 옷깃을 만지는 믿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갈릴리 지역에 퍼져나갔습니다. 병도 고치시고, 폭풍도 잠잠케 하시고, 귀신을 쫒아내신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오늘 본문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숫가 반대편 거라사 지역에서 귀신을 쫓고 오신 후이기에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많은 무리들 가운데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12년을 혈루병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혈루병은 하혈을 하는 병의 일종으로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부정한 병입니다. 이 여인은 12년 동안 유명한 의사를 모두 찾아 다녔지만 헛수고였습니다. 병세가 더 심해졌고 재산도 모두 탕진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 여인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거리로 나와서 무리들 틈에 섞여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어떻게든 예수님을 만나야했습니다. 자신을 괴롭히고 절망가운데 빠뜨리는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는 지난번에 살펴본 여리고 소경처럼 예수님을 향해서 외칠 용기도 없었습니다. 삭개오처럼 나무위에 올라갈 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에게는 “예수님의 옷깃만 만져도 자신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내가 그의 옷깃만 만져도 구원을 얻으리라”(막5:28).

여인은 예수님 뒤로 가서 몰래 예수님의 옷깃을 만집니다. 그러자 그 즉시 그녀의 병이 낫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바로 그 순간, 자신의 몸에서 능력이 나간 것을 직감하신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십니다. 그리고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믈으십니다. 혈루병을 앓고 있던 여인은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 옷깃에 손을 댔지만,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모두 말씀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을 향해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다”라고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의 옷깃만 만지면 자신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여인의 믿음이 그녀를 살렸습니다.

옷깃을 만지는 믿음 – 구약성경 민수기 15장 37-41절에 의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옷단 귀퉁이에 청색 술을 달았습니다. 옷에 끝에 달린 청색 술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하고, 자신의 욕심과 교만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혈루병을 앓고 있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깃을 만진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보겠다는 결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자신을 돌아보시고 고질병에서 고쳐주실 것이라는 믿음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옷깃을 만지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모든 인생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옷깃만이라도 만지려는 겸손한 믿음이 요청됩니다. 예수님의 옷깃에도 능력이 임한다는 확신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실 이 여인이 예수님의 옷깃만 만져도 자신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엄청난 믿음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옷깃을 만졌을 때 예수님은 그것을 감지하십니다. 우리의 작은 신음까지 들으시고 기억하십니다. 옷깃을 만지기만 해도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보시고 우리의 삶 한가운데 능력을 베풀어 주십니다. 옷깃을 만지는 믿음 – 예수님 안에서 행복을 누리는 또 한 가지 비결입니다.-河-

끝까지 견디십시오

이번 달 칼럼주제를 생각하다가 그 동안 썼던 칼럼의 제목들을 훑어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작년 10월에 썼던 칼럼 제목이 “고통가운데 계신 분들께”였습니다. 경제가 어려워지기 시작할 때 썼던 칼럼이었고 하나님께서 고통 받는 분들의 편이 되어주신다는 글이었습니다. 그로부터 꼭1년이 지났지만 미국경제가 여전히 바닥을 헤매고 있습니다.

아마추어 레슬링에서 “빠떼루”라는 벌칙이 있었습니다. 원래는 “파테르”라는 레슬링 용어인데 한국의 한 해설자께서 빠떼루라고 발음한 것이 유행어가 된 것입니다. 빠떼루는 레슬링 경기에서, 상대방 선수가 자신을 굴려 넘어뜨리지 못하도록, 벌칙을 당한 선수가 최대한 몸을 매트에 붙이고 일정 시간을 견디는 동작입니다. 실제로 경기를 지켜보면 빠떼루가 자주 나옵니다. 우리나라 선수가 빠떼루를 받으면 마음이 조립니다. 상대방 선수가 팔로 우리선수의 허리를 감고 몸을 돌리려 할 때, 매트에 몸을 붙이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합니다. TV로 지켜보는 시청자의 마음도 조마조마한데 빠떼루를 당하는 선수와 코치의 마음은 오죽하겠습니까?

그런데 인생을 살다 보면 우리들 역시 빠떼루와 같은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이 잘못했거나 실수해서 레슬링 경기처럼 벌칙을 받기도 합니다. 이미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벌칙이든 실수의 대가이든지 다 지나갈 때까지 몸을 낮추고 견디는 것이 상책입니다. 때로는 자신과 상관없이 닥쳐오는 인생의 빠떼루도 있습니다.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이 인생의 매트에 바짝 엎드려서 빠떼루가 끝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빠떼루 자세에서 중요한 것은 머리를 드는 것입니다. 레슬링 경기에서 빠떼루 자세를 취하는 선수는 몸은 땅에 붙이지만 머리는 들고서 방향을 잡고 상황을 파악합니다. 인생길에서 만나는 빠떼루에서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머리를 숙이면 무기력해집니다. 방향감각을 잃기 쉽습니다. 호랑이에게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습니다. 왜 인생의 빠떼루를 당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하면 빠떼루를 견딜 수 있을지, 빠떼루가 지나가면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지 생각해야 합니다.

요즘 들어서 미국의 불경기가 끝났다는 언론보도가 눈에 띕니다. 실제로 다우주가지수도 1만선에 육박했고, 불경기의 근원지였던 뉴욕의 월가에서는 다시 보너스를 풀면서 돈 잔치를 한다는 씁쓸한 소식도 들립니다. 그런데 우리네 서민들의 살림살이는 말할 수 없을 만큼 힘겹습니다. 찬 바람이 나면 나아질 것을 기대했던 비즈니스도 여전히 잔뜩 흐림입니다. 아니 더 어렵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옵니다. 언론에서 떠드는 경기회복의 뉴스가 우리들에게 전해지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습니다. 게다가 경제학자들에 의하면 경기 회복 국면에 더 많은 기업들이 문을 닫는답니다. 계속되는 어려움에 그만 힘이 빠져서 두 손을 드는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끝까지 견딜 때입니다. 머리는 들고, 몸은 인생의 매트에 딱- 붙이고 인생의 빠떼루를 견뎌내야 합니다.성경에서도 끝까지 견딜 것을 교훈합니다.:”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4) 인내를 온전히 이루십시오. 매사에 마음을 단단히 먹고 견디십시오. 견디는 것이 힘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가 마지막에 웃습니다.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2009.10.22)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굿 모닝!!!

1.

어느덧 10월 한 달도 저물어갑니다.

지난 주 설교시간에 말씀 드렸듯이

저는 일주일을 3일로 사는 것 같습니다.

주일에 설교하고,

수요일에 성경공부하고,

토요일에 주일을 준비하면서

나머지 월 화 목 금은 어디로 가 있는지

눈 깜짝 할 사이에 지나갑니다.

어디 저만 그럴까요?

서머나 식구들 가운데는

일주일을 하루로 사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아니 시작만 하면

한 달도 금방 가지 않던가요?

이렇게 빨리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삶을 경영(business)하는 것이 아니라

바쁘다 바빠를 외치면서 허둥지둥 분주하게(busyness)살아갑니다.

2.

갈라디아서 5 6절 마지막에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faith working through love)”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곱씹으면서 묵상해 봅니다.

몇 번을 입술로 중얼거려봅니다.

눈을 감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마음 속에 이 말씀을 담습니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삶 속에 갖고 있으면 삶이 부요 해지고

자신감도 넘칠 것 같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게 승화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은

삶의 능력을 더해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붙잡고 살아가실

서머나 식구들을 눈 앞에 그리며 기도합니다.

하나님,

오늘 하루 동안

서머나 식구들의 마음 속에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세요.

서머나 식구들의 삶 속에

당신의 사랑을 가득 부어주세요.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바쁜 일상 속에서

순간순간 당신의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도와주세요.

당신의 사랑을 흠뻑 받고

참된 믿음이 높이높이 자라가게 도와주세요.

그 믿음으로 오늘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기게 도와주세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서머나 모든 성도들과 교회 위에

구체적으로 임하기를 소원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참된 믿음이듯이

사랑으로 드리는 기도 역시 그 힘이 무척 강하답니다.

지금 바로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아니 왠지 기도해 주고 싶은 이웃들

(설령 그들이 썩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사랑으로 기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샬롬,

하목사 올림

(2009. 10.22 메일 목회서신입니다)

행복에의 초대 :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고

우리가 살고 있는 샌프란시스코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입니다. 샌프란시스코 북쪽에 위치한 금문교는 최고의 관광명소이지요. 교회 앞길을 다니는 전차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타임머신을 타고 100년 전으로 돌아온 듯합니다. 샌프란시스코의 고층건물들은 아름다운 스카이라인을 형성합니다. 공항 쪽에서 101번 도로를 타고 올라오면 오른 편에 끝없이 넓은 베이(bay)가 펼쳐집니다. 주말에는 하얀 요트들이 바다에 떠있는데 푸른 하늘과 멋진 조화를 이루는 장관입니다. 샌프란시스코 49er’s 풋볼 구장도 멀리 보입니다. 도심으로 들어오면 아름다운 도시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참 아름다운 도시라는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그렇게 베이브릿지를 타면, 왼쪽에 커다란 빌딩이 나타납니다. 사무실 같기도 하고 주거용 빌딩처럼 보이는 꽤 높은 건축물입니다. 그것도 고속도로 바로 옆에 있어서 다리를 건널 때마다 마주치게 됩니다. 저는 이 빌딩을 볼 때 마다 왠지 모르게 주변 경관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건물 주변에는 오래된 작은 건물들이 그대로 있습니다. 그래서 이 건물이 더 커 보이고, 심지어 외로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차라리 도심에 있었다면 다른 고층 건물과 어울려서 멋진 스카이라인을 형성했을 텐데 하는 아쉬운 생각도 해봅니다. 앞으로 그 건물을 중심으로 재개발 계획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현재는 뭔가 생경한 느낌의 고층 건물입니다.

기독교를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관계”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사람들과 사랑의 관계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친환경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 이웃, 세상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태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이웃을 향해서는 상대방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고 배려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세상을 향해서는 하나님께서 아름답고 선하게 창조하신 세상을 잘 보존해서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겸허한 삶입니다.

오늘 본문에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면서 따로 서서 기도하는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에게는 부족할 것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보아도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성전의 한 구석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기도하는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은 기도하면서 자기가 행한 일들을 모두 나열하면서 은근히 자랑합니다. 하지만 세리는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회개할 뿐입니다.

바리새인에게서 겸손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는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높다는 우월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자신을 한없이 낮춥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면서 겸손한 자세로 가슴을 치며 회개합니다. 바리새인은 혼자 우뚝 서 있는 고층건물처럼 보이는 반면에, 세리에게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자신의 자리에서 진실하게 하나님을 찾는 겸손함이 있습니다. 이들을 보고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세상사람들은 홀로 높은 성을 쌓으면서 행복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은 철저하게 낮추고 대신에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는 겸손과 경외의 삶을 살아갑니다. 거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河-

풍선소년해프닝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10 15) 오후

콜로라도주에서 일대 소동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집 뒤뜰에 커다란 풍선기구를 만들어놓았답니다.

그런데 바람이 불면서 이 풍선이 날아갔습니다.

집 주인은 풍선아래 있는 상자 속에

자기 아들이 타고 있다고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수천 피트 상공을 날아가는 풍선은 TV에 중계방송이 되었습니다.

덴버 국제공항도 풍선이 지나가는 동안 활주로를 폐쇄했고

인근 공군기지에서 블랙호크 헬기까지 동원되어서

풍선 속의 아이를 구하려는 작전이 펼쳐졌습니다.

풍선은 공중에서 곡예비행을 하면서

50마일을 날아서 결국 지상에 내려앉았습니다.

구조대가 서둘러 풍선에서 바람을 빼고

소년을 찾았지만 소년은 없었습니다.

중간에 풍선에서 무슨 기구가 떨어졌다는 목격자들의 진술로

잠시 이 소년은 추락사한 것으로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몇 시간 후,

여섯 살 박이 소년은 자기 집 거라지 다락방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답니다.

소년의 형이 동생이 풍선 기구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바람에 기구가 날아갔습니다.

아버지는 날아가는 기구에 자기 아들이 있다고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 소년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고함을 친 것이 무서워서

다락방에 숨었고 그곳에서 낮잠을 자면서 편안이 있었습니다.

자신을 찾는 소리를 들었지만

무서워서 다락방에 계속 숨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TV인터뷰에서 아버지는

자신이 고함친 것을 아들에게 사과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신의 아들이 풍선에 있지 않고 집안에 숨어 있었던 것

그리고 발견된 것만도 기뻐하는 듯 했습니다.

숨었다가 발견된 소년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이 사건과 관련된 뉴스를 다시 보면서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CNN 래리 킹 쇼에도 나왔네요)

여러 사람들이 동원되었습니다. 공항도 일시 문을 닫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마음을 졸였습니다.

블랙호크 헬기가 3시간 상공에 떠 있었는데

그 비용만도 $13,800.-에 달한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큰소리를 치면서 야단한 것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동생이 풍선 안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는 형의 말로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풍선에 있다고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여섯 살 먹은 소년은 자신을 찾는 것을 알고도 다락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욱하는 감정표출,

형의 섣부른 추측,

당사자 소년의 숨음(hiding) 이 가져온

웃어넘기기에는 왠지 뒷맛이 개운치 않은 해프닝입니다.

(혹시 꾸며낸 일이 아닌지 경찰수사도 고려한다는 보도도 있네요)

2.

과도한 감정표출은 주위사람들을 위축시키고 겁먹게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온유함(gentleness)을 강조합니다.

섣부른 추측은 사실을 왜곡시킵니다.

일의 전말을 신중하게 살펴보고 판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숨는 것은 좋지 못합니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이브도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낯을 피해서 숨었습니다.

숨는 것은 떳떳하지 못한 행동입니다.

정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니

정도가 다를 뿐 이런 일들은 우리들 주변에서도 종종 발생합니다.

가정에서 또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심하게 표출할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 마음에 상처를 받습니다.

섣부르게 판단하고 추측해서

작은 일을 크게 만드는 경우도 꽤 많습니다.

정직하지 못한 것은

이유를 불문하고 옳지 못한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정직과 투명함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 7:29)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케 하시도다. (26:7)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어떤 말을 하거나 행동하기 전에 잠시 멈춰서 한번 더 생각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투명한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첩경을 평탄케 해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목사 올림

(2009 10 15일 이메일 목회서신)

예수님을 닮으려는 갈망

예수님께서 사셨던 2천 년 전의 이스라엘도 지금 우리네 세상만큼이나 깜깜하고 답답했습니다. 삭개오처럼 민족을 등지고 돈을 벌기위해서 권력과 결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리고 소경처럼 앞을 보지 못해 사람들이 던져주는 동전소리에 목숨을 걸기도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래도 나았습니다. 배를 갖고 고기를 잡으면서 나름대로 생활을 영위했으니까요. 그중에도 어리석은 부자처럼 자기 배만 채우고 재산을 꼭꼭 잠겨두는 욕심쟁이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줄도 모르고 천년만년 살줄 알았으니 정말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그런 세상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사람들을 차별 없이 만나주셨습니다. 고쳐주셨고, 살려주셨고, 위로하시면서 저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뽕나무 위의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주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도 찾아오십니다.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삼아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행복을 찾아낸 사람들입니다. 행복은 나누어야 합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시고 갈보리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의 마음과 발자취를 따라가는 “작은 예수의 삶”을 살 때 가능합니다. 기독교인들이 누리는 행복의 세계, 행복의 언어들, 행복의 몸짓들이 우리 서머나 식구들께 임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16세기에 살았던 십자가의 성 요한이 남긴 기도문을 소개합니다. 다음 한 주간 우리들 각자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河-

오, 예수님.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

사랑받으려는 갈망으로부터, 칭송받으려는 갈망으로부터,

높임 받으려는 갈망으로부터, 선호 받으려는 갈망으로부터,

의논의 대상이 되려는 갈망으로부터, 승인받으려는 갈망으로부터,

인기 얻으려는 갈망으로 부터 구해 주십시오.

오, 예수님!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

모욕당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부터, 멸시당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부터,

책망 받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부터, 잊혀질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부터,

잘못될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부터, 비웃음당할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부터,

다른 사람이 저보다 더 사랑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부터,

오 예수님,

은혜를 베푸셔서 이런 갈망을 갖게 하소서.

다른 사람이 저보다 더 존중 받기를 바라는 갈망,

세상의 기준에서 다른 사람이 더 높아지고 저는 더 낮아지기를 바라는 갈망,

다른 사람이 선택받고 저는 제외되기를 바라는 갈망,

다른 사람이 칭송받고 저는 주목받지 않길 바라는 갈망을 주십시오

체험적인 신앙

좋은 아침입니다.

1.

수요일 성경공부 시간에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의 일생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다음 주에는 요한 웨슬리가 남겨준 신앙의 교훈들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웨슬리의 신앙여정을 설명하면서

그가 두 번에 걸쳐서 회심을 경험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웨슬리는 그의 나이 21세였던

1725년에 토마스 아 켐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비롯한 경건서적을 읽고

개인의 영성을 돌아본 후에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결심합니다.

나는 즉각 내 삶 전체를 곧 모든 사유와 말과 행실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중간은 없다는 것, 삶의 모든 부분이(약간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제물이 되든가 그렇지 않으면 자기 자신에게 곧 사실상 악마에게 제물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확신하였다.” -John Wesley, Works.Vol VIII.-

그 이후에 웨슬리는 영국 국교회의 정식 목사가 되었고

미국 조지아에 3년 동안 선교를 위해서 왔었지만

그의 마음 속에 뭔가 채워지지 않는 영적 갈증이 있었고

마음에 확신이 부족했습니다.

그러다가 1738 5 24일 저녁에

올더스게이트라는 거리의 한 작은 집회에 우연히 참석했다가

이상하게도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합니다.

저녁에 나는 별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올더스게이트 거리에 있는 한 집회에 참석하였는데 거기에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8 45분경에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시는 일을 설명하고 있을 때 나는 내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다고 느꼈으며 구원을 위해, 다만 그리스도만 믿고 있음과 주께서 내 죄를 아니 내 죄까지도 다 거두어 가시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건져주셨음을 믿는 확신을 얻었다.”

–John Wesley, Journals 1738.5.24-

웨슬리는 이렇게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한 이후에

내적 평안과 확신을 갖게 되었고

더욱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웨슬리의 두 번에 걸친 회심을 두고

배리 태브러햄이라는 분은

첫 번째 회심을 종교적 회심, 두 번째 회심을 영적 회심

첫 번째 믿음을 종의 믿음, 두 번째 믿음을 아들의 믿음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제가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첫 번째가 지적인 회심이었다면

두 번째는 온 존재와 삶이 변화되는 실존적 회심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2.

신앙에서 체험이 꽤 중요합니다.

체험적인 신앙은 확신으로 이어지고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립니다.

물론 지나치게 체험을 강조하고 추구하면

신앙이 주관적이 되거나 신비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웨슬리는 체험 이성을 같이 강조했습니다.

머리로만 믿고 체험이 부족한 신앙은

쉽게 흔들리고, 회의와 불안이 반복해서 찾아옵니다.

헨리 블랙커비라는 분이 쓴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Experiencing God)”이라는 성경공부 교재가 있습니다.

내용도 좋지만

책의 제목이 참 마음에 듭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

여러분들은 신앙의 여정 가운데

하나님을 체험한 간증이 있으십니까?

아니 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과 동행하시면서

그분의 손길을 체험하십니까?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어지럽고 복잡한 세상입니다.

하루 하루 세상살이가 만만치 않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하나님의 크고 작은 손길과 간섭하심을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때로는 솜털처럼 부드러운 손길로 우리를 감싸주시고

때로는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해 주시고

우리가 너무 힘들어할 때는 우리를 등에 업고 가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이토록 좋으신 하나님을 꼭 붙잡고

남은 일주일도

감사와 기쁨 가운데 사시길 기도하겠습니다.

파이팅!

하목사 올림

(2009.10.8일 이-메일 목회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