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의 초대 4 – 네 집에 유하겠다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빗 리스만은“군중속의 고독(the lonely crowd)”이라는 책에서 사람들의 유형을 세 가지로 나눠서 설명합니다.:

  첫째가 전통적인 유형인데 이러한 사람들은 사회가 요구하는 것에 자신을 맞춰서 살아갑니다. 근대화가 되기 이전의 세상은 전형적인 전통적인 사회였고, 전통을 무시하면 죄인취급을 받았습니다.

  둘째는 자기 지향적인 유형(inner-directed type)입니다. 전통적인 세상에서는 자기 스스로 무엇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개인의 자유가 강조되면서 사람들은 자기의 인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됩니다.

  셋째로 타인 지향적인 유형입니다. 문명이 발달하고 세상이 산업화되면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스레 경쟁이 치열해 졌고 사람들 간에 마음의 벽이 높아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끝없는 경쟁을 하다 보니 불안과 초조가 밀려옵니다. 여기서 군중 속의 고독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속에서 삭개오라는 인물을 만납니다. 삭개오가 살던 시대는 유대교의 전통과 율법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때는 이스라엘이 나라를 잃었고 로마의 식민지였기에 민족의 전통과 종교를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로마를 위해서 일하는 세리가 됩니다. 당시의 세리들은 자기 민족에게 세금을 거둬서 로마정부에 바치는 일을 했기에 동족으로부터 민족의 반역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삭개오가 세리라는 직업을 스스로 택했고 요즘말로 하면 세무서장까지 되었으니 그는 자기 지향적인 인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삭개오의 인생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삭개오는 군중속의 고독을 온 몸으로 느끼며 살았습니다. 그가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세리가 되었지만, 사람들 역시 그를 사람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외로운 인생이었습니다. 지난주에 배운 여리고 소경이 거지라는 천한 신분 때문에 외로웠다면, 삭개오는 나름대로 자기의 꿈을 이루면서 성공했지만 내면의 문제로 인해서 외로웠습니다.

그런 삭개오가 예수님을 찾습니다. 키가 작은 삭개오가 체면을 버리고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뽕나무에 올라갑니다. 여리고 소경은 예수님을 불렀지만, 삭개오는 단지 나무에 올라앉아서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구경합니다. 그것이 삭개오가 한 행동의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삭개오를 보시고“속히 내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밤에 삭개오의 집에 유하시겠답니다. 이 말은 삭개오에게 정말 기쁜 소식(복음)이었습니다. 세무서장까지 되었지만 누구도 그의 친구가 되어주지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그의 친구가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신 것은 곧 그의 마음의 집에 들어가신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삭개오와 그곳에 모인 군중들을 향해서“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라고 선포하십니다.

삭개오를 부르신 예수님께서 우리들도 부르십니다. 삭개오의 집에 들어오신 예수님께서 우리들 마음속에 계십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우리들이 누리는 행복입니다. 세상의 행복은 남의 눈치를 보느라 힘겹고 초조합니다. 설령 세상에서 성공했어도 시시때때로 밀려오는 외로움과 불안감을 해결하기 힘듭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누리는 행복은 세상의 행복을 뛰어넘습니다. 감사와 기쁨이 넘칩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새로운 인생길이 열립니다. 그 길이 곧 행복의 길이요 생명의 길인 줄 믿습니다. -河-

“다니고 싶은 교회”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 저녁

주보 용지를 찾으러

산호세 서점에 다녀왔습니다.

서점에 가면

정말 사고 싶은 책들이 너무 많습니다.

요즘은 한국에서 양질의 책들이 꽤 많이 출판되네요.

여유만 되면 책 읽기를 즐기시는 성도님들께

한 두 권 선물하고 싶지만……마음뿐입니다 (죄송).

그래도 서점에 가면

몇 권을 구입해 옵니다.

오늘은 재미있는 제목의 책을 발견했습니다.

강원도에서 26년째 국어 선생님을 하시는 분이 쓰신

떠나고 싶은 교회 다니고 싶은 교회라는 책입니다.

책 앞에 있는 표제가 참 마음에 듭니다.

성도들이 살아있는 교회

목회자도 행복한 교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

머리말에 있는 한 구절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교회가 세상을 바라보며 탄식을 해 왔지만

이제는 세상이 교회를 향하여 장탄식을 하고 있다.

어떻게 이 지경이 되었는지

부끄럽고, 정말 긴 탄식이 나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교회(God’s church 고후 1:1)”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즉 하나님께서 소유한 교회이기에

교회는 다시 일어섭니다.

이 세상에서 천국의 모델 하우스로 굳게 설 것입니다.

2.

이 책에서는 미국의 목회자 메드포드 존스라는 분의

역동적인 교회의 특징을

몇 가지로 정리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복음과 말씀 중심의 목회

역동적인 교회들의 설교는 주로 강해설교(본문중심)였으며

성도들의 삶 속에서 그 말씀이 구현되도록

실제적인 안내자 역할을 하는 메시지였다.

예배와 헌신적인 삶의 강조

역동적인 교회들이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만한 신령한 제사다(벧전 2:5)

선을 행하고 서로 나눠주고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린다(13:15-16)

만인 사제적인 목회

역동적인 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은 겸손하면서도 동시에 권위를 가진 실체,

이를 테면 종이면서 지도자라는 정체성을 확실히 가져야 한다.

사랑이 넘치는 친교

역동적인 교회는 성도들에게 각종 그룹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매우 다양하게 제공해 주는 편이다.

교회생활이 좀더 개방적이고 수용적이며 탐구적이 된다.

우리 서머나 교회는 위의 네 가지 가운데

어떤 것이 강하고 또 부족한 지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우리 교회의 표어를 놓고

지금 이 순간 각자의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교회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합시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스도께서 주인 되신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성령의 임재와 역사가 있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기독교의 중심은 한 가지 밖에 없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나누는 영적인 교제,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갖는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이다.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교제)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는 에클레시아(교회)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고키치 구로사키

우리 교회를 가슴에 품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 모두가 행복한 교회

하나님 눈에 쏙드는 교회를 세워나가길

한 마음으로 다짐합시다.

해피 추석

하목사 올림

(2009년 10월 1일 이-메일 편지)

행복에의 초대 3 –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번 주와 다음 주는 여리고에 살고 있는 두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행복의 세계로 들어온 사건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갈릴리 사역을 마치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약 15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여리고라는 동네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가까이 오셨을 때 길가에서 구걸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입니다. 당시 소경은 죄인취급을 받았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소경인 사람은 부모가 죄를 지어서 그 죄가 대물림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요9:2). 후천적으로 소경이 된 사람 역시 본인이 죄를 지어서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당시 팔레스타인은 먼지가 많고 건조한 지역이어서 눈병이 흔했고 심하면 앞을 못 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무리들과 함께 여리고를 향해서 가고 계실 때 길가에서 구걸하던 여리고 소경이 무리들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습니다. “무슨 일이냐?”- 영적인 호기심입니다. 소경으로 구걸하는 사람이면 모든 것을 체면하고 살 수도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도 도심에 가면 집이 없는 분들이 거리에 노숙합니다. 그분들의 표정을 보십시오. 그저 동전 몇 푼을 생각할 뿐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체념했거나 버림받았다는 절망감에 세상과 담을 쌓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경은 무슨 일이냐고 무리들에게 묻습니다. 이 소경은 비록 앞을 보지 못하고 구걸하는 처지였지만, 세상에 관심이 많았고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든 개척해 보려는 의지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고 말합니다.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에 대해서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갈릴리에서 많은 소경을 고쳐주셨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말에 소경은 외치기 시작합니다.:“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군중들이 소경에게 말해 준 나사렛 예수는 나사렛 출신 요셉의 아들 예수입니다. 그런데 소경은“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바꿔서 말을 합니다. 다윗의 자손은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할 메시야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소경은 예수님께서 구세주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소경을 꾸짖습니다. 죄를 지어서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 주제에 감히 예수님을 부르고 소동을 피냐는 것입니다. 여리고 소경은 사람들의 저지를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크게 소리 지릅니다.

예수님께서 그냥 지나치실 분이 아니지요. 멈추십니다. 소경을 데리고 오랍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네가 내게 무엇을 해주기 원하느냐?” 소경이 곧바로 대답합니다.“주여, 보기를 원하니이다.” 예수님 앞에 자신의 기도제목을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꿈은 이루어졌습니다. 소경이 곧 보게 되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예수님을 쫒았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고 구걸을 하면서 살던 여리고 소경에게 하늘의 행복이 임한 것입니다.

행복은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행복은 예수님을 향하여 부르짖는 것입니다. 행복은 예수님과 만나서 자신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함 받는 것입니다. 하늘의 행복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예수님을 따라 삽니다. 할렐루야! -河-

육신의 건강도 중요합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1.

어제 UN 총회에서 재미있는 일(사실은 황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각 나라 대표에게 주어진 시간은 15분인데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가 혼자서 90여분 이상을 연설했습니다.

하긴 예전에 쿠바의 카스트로는 혼자서 4시간여를 연설한 적이 있답니다.

카다피의 연설은 UN 총회에 40년 만에 처음선 독재자의

한 맺힌(?) 괴변이었습니다.

그의 연설 가운데 재미있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요즘 신종플루(swine flu)가 세계적으로 유행입니다.

이것을 두고 미국이 약을 팔아 먹기 위해서

일부러 퍼뜨린 전염병이라고 했습니다.

괴변도 참 희한하지요?

지구상에 자기 혼자서 호위호식하고

백성들을 이용하고,

세계를 어지럽히는 독재자들이

하루속히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2.

요즘 제가 기도할 때 마다

올 겨울 우리 교회 전도사님과 권사님들께서

flu 걸리시지 않고 넘어가기를 기도합니다.

어디 권사님뿐인가요?

우리 서머나 식구들 모두

flu없이 건강하게 올 겨울을 나셨으면 좋겠습니다.

신종 flu가 아니어도 요즘 감기가 무척 독합니다.

기침이 심하고 잘 낫지를 않는다고 하니

각별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10월에 예방주사가 나온답니다.

예배 광고에서 말씀 드렸듯이

예방접종을 하셔야 합니다.

외출하고 오시면

손을 깨끗이 닦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맑고 밝게 사셔야 합니다.

스트레스를 받으시면 안되지요.

염려나 스트레스가 몰려오면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냥 던지세요.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겁니다.

이것이 잘 안되시지요?

그만큼 세상살이가 힘드셔서 그렇습니다.

어지럽고 힘겨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전도서 말씀이 좋은 교훈을 줍니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3:12)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와 재산을 주셔서 누리게 하시며

정해진 몫을 받게 하시며

수고함으로써 즐거워하게 하신 것이니

이 모두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니

덧없는 인생살이에 크게 마음 쓸 일이 없다. (5:19-20)

덧없는 인생살이에 크게 마음 쓰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행복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샬롬

하목사 올림

(2009.9.24 이-메일 목회서신) 

행복에의 초대 2 – 말씀에 의지하여

우리가 믿는 기독교를 두고“만남의 종교”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혼자서 믿거나 혼자서 도를 닦는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물론 이것을 위해서 먼저 교회에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오랫동안 또는 얼마동안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부터인지 (이 순간을 구체적으로 강렬하게 체험하는 경우도 있고 슬며시 자연스럽게 믿어지는 경우도 있는데) 하나님께서 마음속에 계신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대화를 시작하는데 이것이 기도입니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읽고 순간순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느끼면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시작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과 계속되는 친밀한 교제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매우 행복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베드로는 게네사렛 호수 (갈릴리 호수)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어부였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실패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를 찾아가신 그날 베드로는 밤새도록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밤새도록 헛수고를 한 베드로 일행이 아침나절 해변에서 그물을 씻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호숫가를 방문하셨고 수많은 무리가 그를 따라와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배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거기에 앉아서 말씀을 전하십니다. 베드로는 계속해서 그물을 닦고 있었겠지요.

말씀을 모두 마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명령하십니다.:“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4절).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잔뼈가 굵은 베드로에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한 낮에 깊은 곳에는 고기가 없습니다. 깊은 곳은 한 밤중에 고기가 모이는 곳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은“선생”인 랍비이고, 예수님의 세상 직업은 목수입니다. 어부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으신 분이 엉뚱한 소리를 하신 겁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합니다.:“선생이여 우리가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5절)

될성부를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베드로는 뭔가 달랐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니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말씀에 의지하여”- 이것이 신앙입니다.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이것이 순종이요 생활(삶)입니다. 이처럼 말씀에 의지해서 그대로 행하는 것이 곧 신앙생활 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확실히 믿고, 하나님의 말씀(레마)을 붙잡고 살아야합니다.

베드로는 고기가 많이 잡힌 것을 보고 예수님 발 앞에 무릎 꿇었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대낮에 깊은 곳에서 고기가 많이 잡힌 경험을 하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깨달은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베드로는 고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어부의 행복은 고기를 많이 잡는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에게 그 행복이 임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행복을 초월한 진정한 행복이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행복은 세상의 행복을 뛰어넘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이 넘치는 행복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과 더불어 누리는 행복의 세계로 들어갑시다. -河-

한 불쌍한 인생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쓴 “사람에게 얼마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파흠은 남의 땅을 빌려서 열심히 농사를 짓는 순진한 소작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농부의 마음에 욕심이 슬며시 들어오면서,자기 소유의 땅을 많이 갖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파흠은 마을을 방문한 나그네로부터 비슈키르라는 지역에 가면 비옥한 땅을 매우 싼 값에 구입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듣습니다. 많은 땅을 소유하는 것에 인생을 건 파흠은 여러 날을 걸어서 나그네가 알려준 곳에 도착합니다. 정말 그곳 사람은 친절하고 여유가 있었습니다. 파흠은 그들이 땅이 많고 부유해서 그렇게 목가적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파흠은 그곳의 촌장을 만나서 땅을 사기 위한 조건을 흥정합니다. 그런데 이곳의 규정이 이상했습니다. 촌장은 하루치 땅 값을 1천 루블에 팔겠다고 했습니다. 1천루블은 요즘 환율로 환산하면 40달러 밖에 안 되는 적은 금액입니다.문제는 하루치 땅 값인데, 그것은 해가 뜰 때 출발해서 해가 질 때까지 밟고 돌아온 모든 지역을 가리킨답니다. 이와 같은 거래조건을 전해 들은 파흠은 매우 흡족해 했습니다. 아주 싼 값에 넓고 비옥한 땅을 소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기 때문입니다.

파흠은 밤잠을 설치면서 땅 사는 날을 기다렸습니다. 이튿날 해가 뜨자 마자, 하루치 땅을 구입하기 위해서 길을 떠납니다. 시간을 아끼려고 힘껏 달렸습니다. 더 많은 땅을 갖기 위해서 쉬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면 갈수록 더 비옥한 땅들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파흠은 조금 만 더, 조금 만 더 욕심을 부리다가 그만 오후를 훌쩍 넘기고 말았습니다. 파흠은 죽을 힘을 다해서 마을로 돌아옵니다. 해가 막 지려는 순간, 간신히 촌장이 있는 마을에 돌아왔지만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파흠의 하인이 그를 일으키려는데 입에서 피가 흘렀습니다.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지나친 욕심이 결국 그의 목숨을 앗아간 것입니다. 그러자 하인은 곡괭이를 들고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의 길이인 6피트 되는 구덩이를 파서 파흠을 그곳에 묻어 주었습니다.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 땅에 대한 욕심이 유달리 많았던 파흠에게 필요한 땅은 겨우 6피트였습니다.파흠이 적당히 멈추고 돌아왔다면, 많은 땅을 싸게 살 수 있었고 자신의 꿈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눈 앞에 펼쳐진 땅을 보면서 끝없는 욕심이 생겼고 그것이 지나쳐서 그만 목숨을 잃고 만 것입니다.

이 소설을 읽고 있으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파흠의 모습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싶어합니다. 우리들의 욕심이 한이 없습니다.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했습니다. 무엇이든지 지나치면 차라리 시도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도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커지면 사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결국 욕심은 사망에 이르게 하는 지름길입니다. 실제로 마음에 욕심을 품고 살면 스트레스도 더 많이 받습니다. 무엇보다 감사를 잃어버립니다. 동시에 행복도 사라집니다. 이처럼 욕심은 불행의 시작입니다.

기껏해야 6피트 정도의 땅만 필요한 우리네 인생입니다.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주어진 삶에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행복인 것을 톨스토이를 통해서 배웁니다.(SF 한국일보 2009.9.17 종교칼럼)

입술의 열매

좋은 아침입니다.

1.

기독교는 말씀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개신교는

오직 성서로라는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말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입술의 말에 대한 교훈이 많이 등장합니다.

잠언에서는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15:23)

라고 입술의 말에 대해서 가르쳐줍니다.

또한 신약성경의 야고보서에서도 다음과 같이 교훈합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나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xml:namespace prefix = st1 />3:2).

이처럼 말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

온 몸

더 나가서 삶 전체를 통제하고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사람들은

선한 말을 해야 합니다.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말을 통해서도 예수님의 향기가 드러나야 합니다.

말에 대한 이해인 수녀의 시를 소개합니다.

내가 키우는 말

행복하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정말 행복해서

마음에 맑은 샘이 흐르고

고맙다고 말하는 동안은

고마운 마음 새로이 솟아올라

내 마음도 더욱 순해지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잠시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마음 한 자락이 환해지고

좋은 말이 나를 키우는 걸

나는 말하면서

다시 알지.

오늘 하루

행복하다고 말합시다.

고맙다고 말합시다.

아름다운 말을 많이 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고

우리 입술에서 나오는 선한 말이 우리의 영혼과 삶을

아름답게 살찌우는 것을 꼭 기억합시다.

샬롬

하목사 올림

행복에의 초대 1 – 어리석은 부자

모든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합니다. 모두들 행복을 얻기 위해서 불철주야 열심히 살아갑니다. 행복을 취하는 방법도 제각각입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을 많이 소유하면 행복해 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출세한 자녀들을 보면서 행복감을 느낍니다. 명예나 권력을 손에 쥐려는 것도 결국은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사는 지역을 옮겨보기도 합니다. 색다른 취미생활을 시작합니다.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과 교제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추구하는 행복은 무지개와 비슷합니다. 산봉우리에 무지개가 걸려 있어서 헐레벌떡 산에 올라가보면 무지개는 저기 산 아래 들판에 드리워있습니다. 부지런히 들판으로 뛰어 내려가면 다시 저 앞산에 걸려 있습니다. 이처럼 한 평생을 살면서 행복을 따라가지만 진정한 행복을 취하고 그것을 누리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외부에서 행복을 찾기 때문입니다. 앞에 말했던 재물, 권력, 명예, 자녀 등등은 모두 밖에 있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아무리 많이 갖고 있어도 더 갖고 싶어집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같습니다. 만족감이 없고 자꾸만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게 되면서 도리어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립니다. 행복은 마음속에 임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평안하고,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것이 곧 행복입니다. 인생의 폭풍이 아무리 거세고 험난해도 마음에 평안함이 있다면 행복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감사가 넘치고 기쁨이 솟아난다면 그야말로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어리석은 부자가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물질을 많이 소유하면 행복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본문 속의 부자를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계획성도 있고, 실천력도 있고, 야망도 갖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근면했기에 많은 소출을 냈을 것입니다. 예상보다 풍년이 들자 더 큰 창고를 짓기로 마음에 계획했습니다. 자신이 쌓아둔 물질을 갖고 앞으로 여러해 동안 즐기면서 행복한 인생을 살겠다는 야망도 갖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이 부자는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모아서 훗날 먹고 마시면서 편하게 살겠다는 것이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 사람을 “어리석은 자”라고 단정하십니다. 물질 속에서 행복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자기가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재물만 갖고 있으면 천년만년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재물에 마음을 쏟다가 모든 것 특히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부자입니다.

행복은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 속에 들어갔을 때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 6-7절에서 매우 귀한 교훈을 하였습니다.:“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평안이 서머나 식구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길 기도합니다.-河-

감사하는 마음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열흘 동안

반가운 친구들이 이곳을 방문해서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 명은 대학 후배로 선교단체의 대표로 있는 목사였고

다른 한 친구는 대한항공에서 화물기를 몰고 온 고등학교 동창이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캐나다에 들렸던 죽마고우와 전화로 얘기할 수 있었습니다.

먼 곳에서 친구가 찾아오는 것은 참 기쁜 일입니다.

오랜 만에 만나는 친구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잊고 살았던 얼굴들이 떠오르고

마음 한 켠에 묻어 두고 있었던 옛 추억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슬며시 그 시절 그 곳으로 마음이 달려 갑니다.

우리들은 많은 것을 잊고 삽니다.

사람들도 잊고 살고, 옛 추억도 잊고 삽니다.

때로는 평생 잊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마음 속 깊이 간직해 놓은 것들 마저

나이가 들면서 잊혀지는 것을 볼 때는 서글픈 생각이 듭니다.

2.

모든 것을 잊어 버려도 이 세상 사는 동안

끝까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굳건한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은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마음과 삶에 감사가 빠지면

믿음도 흔들립니다.

불안해 지고 사정없이 삶이 요동을 칩니다.

감사하는 삶을 살 때

틀림없이 찾아 오는 두 친구가 있습니다.

바로 기쁨과 평안입니다.

감사를 잃어버리면 기쁨도 잃어버립니다.

감사와 기쁨을 잃어버리면 평안도 잃어버립니다.

지난 주 여성 성경 공부 교재에 있었던

감사에 대한 글귀를 옮겨 놓습니다.

감사하는 마음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마음입니다.

감사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무작정 사용하시는 사람입니다.

감사하는 신앙 범사에 감사한다면 그것은 최고로 멋진 신앙입니다.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생겨도

아무 때든지 어디서든지

감사하면서 살아갑시다.

샬롬

하목사 올림

건강한 교회를 향하여

지난 수요일부터 10주간 과정의 임원교육이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부임한 이래 지난 3년 동안 틈틈이 임원교육을 했지만, 교회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과 우리 교회 사역을 중심으로 훈련했습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라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의 공동체라고 했습니다. 또한 고전1:2 말씀대로 “하나님의 교회”즉 교회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는 지체라고 배웠습니다.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을 네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1)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명이 예배입니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뿐만 아니라 우리의 몸을 드리는 삶을 통한 예배도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2) 교회는 전도하고 선교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를 위해서 교회가 모였다면 전도와 선교를 위해서 세상으로 다시 흩어져야 합니다. 구제와 선교는 우리 교회가 실천해야 할 커다란 사명입니다.

3) 교회는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훈련하고 세워야합니다.

4) 교회 안에서는 성도들 간에 사랑과 격려의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교회가 하나가 되고, 하나님의 가족임을 체험하게 됩니다.

앞으로 남은 9주 동안에는 새로운 주제들을 공부하게 됩니다. 그동안 배웠던 교회에 대한 훈련이 성경적 관점이었다면, 이번 훈련에서는 세계 교회사와 한국 교회사를 3주에 걸쳐서 공부합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교회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속한 교단의 역사와 특징 그리고 규칙을 배우는 것은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데 필수적입니다. 무엇보다 감리교회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에 대한 작금의 관심은 교파를 불문하고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웨슬리로부터 시작된 감리교회의 전통을 함께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그 후에는, 교회의 체제와 직분에 대해서 공부하게 됩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가 바르게 세워져가기 위해서 교회의 조직과 시스템이 바르게 정비되어야 합니다. 또한 교회를 섬기는 직분에 대해서 바른 자의식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배운다고 모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교육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으면 최선을 다해서 교회를 섬기게 마련입니다.

우리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자라가고 하나님의 경륜이 드러나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우리 모두 열심히 배우고 깨달은 것을 그대로 실천해야합니다. 우선 교회를 섬기는 임원들께서 솔선하셔야 합니다. 그 다음에 온 성도가 열심을 다해서 교회를 섬길 때 우리 교회는 건강하고 튼튼한 교회로 세워질 것입니다.

이번 임원교육을 수요예배 시간에 하는 것은 임원이 아니어도 관심 있는 모든 분들의 참여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살아서 역사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며, 구제와 선교에 열심을 내는 하나님 마음에 합한 교회를 세워갑시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