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를 마치면서

룻기를 설교하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가뭄을 피해서 모압땅으로 피난갔던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는 이방 땅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습니다. 그리고 모압 며느리 룻과 함께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자신들을 마중나온 고향 사람들에게 다시는 자신을 기쁨의 여인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고통의 여인 마라라고 부르라고 부탁할 정도로 무너진 인생입니다. 하루는 며느리 룻이 보리이삭을 주우러 갔는데 우연히도 보아스의 밭에 갔습니다. 그때 마침 보아스가 들에 나왔다가 룻을 만납니다. 이렇게 보아스와 룻은 처음 만나게 되고, 나오미의 조언을 들은 룻이 보아스에게 접근함으로 부부가 됩니다.

룻기를 여러 각도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무심코 읽으면 룻기는 보아스와 룻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이루어지기 어려운 사랑이 시어머니 나오미의 기지와 보아스의 지혜로운 처신으로 결실을 맺게 된 것입니다. 또 구약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보면 룻기는 다윗왕의 조상이 누구인지 가르쳐줍니다. 왕이 없던 시절을 묘사하는 사사기와 다윗왕이 주인공인 사무엘서의 중간에 룻기가 위치해 있고, 다윗의 고조할머니가 룻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것을 성경 전체로 확대하면 룻은 영광스럽게도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족보에 보아스와 이방 여인 룻의 이름이 나옵니다. 이처럼 룻기는 비록 4장 밖에 되지 않는 짧은 말씀이지만 성경 전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룻기의 중요성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룻은 모압여인이었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만이 선택된 민족이라는 우월의식에 젖어 있었습니다. 이방 민족은 사람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모압여인 룻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다윗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룻기 속에는 빈부귀천, 남녀노소, 민족에 대한 차별 없이 모든 사람들을 받아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저는 룻기를 연속설교하면서 신약성경의 두 구절을 룻기와 연관해서 기억하기를 부탁드렸습니다. 룻기가 펼쳐지는 무대 뒤편에서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일하신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을 로마서 8장 28절과 연결시켰습니다.:“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또한 룻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듯한 선한 사람들입니다.

서로를 축복하고 격려해주고 배려해주는 모습과 관련해서 마태복음 5장 16절을 소개했습니다.:“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이 두 구절을 꼭 기억하시고 가능하시면 암송하셔서 마음에 새기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구약성경 룻기에 임한 하나님의 섭리가 서머나 식구들 위에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룻기 속에서 만났던 룻과 나오미 그리고 보아스의 선한 마음을 우리 모두 닮아서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빛 된 삶을 사시길 부탁드립니다.-河-

아주 조금만 있어도

좋은 아침입니다.

1.

오늘 아침 한국일보와 함께 배달된

뉴욕 타임즈에 케네스 코프랜드 목사가 주장하는

형통의 복음(prosperity gospel)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코프랜드 목사는 세계 134개국에 방영되는 방송설교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으면 부자로 살 수 있다는

형통의 복음을 전하는 분입니다.

그의 설교에 걸맞게 코프랜드 목사는

자가용 비행기와 보트는 물론 매우 사치스러운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부자로 사는 것이 자랑이요 축복이라는 것이지요.

그의 자녀들이 모두 그가 운영하는 선교단체에서 목사로 일을 합니다.

그가 운영하는 선교단체는 1년에 1억 달러의 수입을 올리는 기업에 가깝습니다.

최근에는 탈세혐의로 미국 상원에서 조사를 시작했지만

코프랜드 목사는 이에 응하지 않아서 언론의 집중포화를 받기도 했습니다.

형통의 복음

현대인들 특히 요즘처럼 불경기를 보내는 사람들의 귀를 솔깃하게 만듭니다.

매주 일정액의 헌금을 보내면

코프랜드 목사가 그를 위해서 기도해 준답니다.

하루라도 그의 기도를 듣지 않으면 인생이 실패할 것 같은 불안감에

매일같이 작은 돈이지만 송금하는 분들도 있답니다.

신문 기사를 모두 읽고 기사의 제목을 다시 보았더니

“Love of God, and Money”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돈을 많이 버는 것!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달콤한 유혹입니까?

코프랜드 목사의 사위 가운데 한 명이 기자에게 남긴 말입니다.

“물질에 대한 염려가 마음 속에서 늘 생깁니다.

그때마다 염려하지 마시고 좋은 밭에(코프랜드의 선교단체와 같은 곳에) 씨를 뿌리세요.

그것이 바로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경기 부양책(God’s stimulus plan)입니다.

이 말을 믿고 전 세계 사람들이 코프랜드 목사의 집회에 참석합니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면서 온라인으로 그의 교회에 헌금합니다.

쌈짓돈이 모여서 거액의 헌금이 됩니다.

그것이 어떻게 쓰이는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습니다.

2.

이제 우리 서머나 식구들은 이런 기사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읽을 수 있는

신앙의 안목이 생기신 줄 압니다.

여성 성경공부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복을

절대적인 복과 상대적인 복으로 나눠서 설명드렸습니다.

돈을 많이 벌고 세상에서 잘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복의 잣대가 되면 위험하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로날드 사이더 라는 분이 쓴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다 (Genuine Christianity)”라는 책에

11가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특징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불꽃 같은 거룩함, 용서하는 사랑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

         풍성한 결혼생활을 누리는 그리스도인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

         지상의 하늘나라인 교회

         몸과 영혼을 사랑하는 교회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 교회

         정의 실현에 앞장서는 기독교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는 기독교

         창조 세계를 돌보는 기독교

         섬김의 도를 실천하는 그리스도인

위의 책은 앞에 소개한 형통의 복음만큼이나 아주 매력적인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답은 사뭇 다릅니다.

이 세상을[우리들 삶의 터전을] 좀더 살기 좋은 곳으로 변화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대답은 간단하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예수님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믿고,

그 분이 사신대로 살아가는 무리가 아주 조금만 있으면 된다.

3.

어제 요나서 마지막 강의 때 소개했던

하박국 선지자의 유명한 고백이 다시 떠오릅니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 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찌라도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3:17-18)

요즘 같은 불경기를 사는 우리들로부터

하나님께서 가장 듣고 싶어하시는 고백아닐까요?

하나님,

서머나 식구들이 세상의 어려움 앞에 굴복하지 않게 하옵소서.

세상의 형통함에 목숨 걸지 말게 하옵소서.

풍족하다고 교만하지 않고, 부족하다고 의기소침하지 않게 하옵소서.

머리 둘 곳도 누울 곳도 없으셨지만

진리의 복음 들고 세상에 생명의 빛을 비추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옵소서.

세상의 부유함 때문이 아니라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 하루도 감사와 기쁨으로 사시길

예바레하 야웨!!!

하목사 올림

(2009 8 27일 이메일 목회서신)

사랑의 완성 : 기업을 무를 자

보아스가 타작마당에서 잠을 자고 있을 때, 모압 여인 룻이 슬며시 침상에 올라와서 프러포즈를 했습니다. 어쩌면 룻기에서 가장 스릴있고 흥미진진한 장면입니다. 시어머니의 말만 듣고 사전에 약속도 없이 외간남자 그것도 자신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지위를 가진 보아스의 침상에 든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룻을 맞아 줍니다. 룻을 안심시켜 줍니다.:“내가 네 말 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룻의 프러포즈를 받아 준 것입니다.

룻기 4장을 이해하기 위해서 당시의 관습을 알아야 합니다. 룻이 살던 당시는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형제나 친족 가운데 장가를 들지 않은 사람이 있거나 자신을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와 다시 결혼을 했어야 합니다. 한번 시집오면 그 가족의 소유(?)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집안의 가장이 죽고 남자 없이 여자만 남거나 미성년의 자녀들이 있는 경우, 그들의 재산이나 가족을 가장 가까운 친척이 접수하는 관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런 친척을 두고“기업을 무를 자”라고 한 것입니다.

룻과 보아스가 사랑의 결실을 맺기 위해서 넘어야 할 장애물이 있었는데 그것은 순위에서 보아스보다 앞서 있는 친척이 한명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룻과 그 재산을 접수하겠다고 나오면 보아스와 룻은 결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보아스는 동네의 모든 원로들을 모아놓고 그 친척을 부릅니다. 그리고 나오미의 기업을 접수하겠냐고 묻습니다. 이 사람은 갑자기 재산이 자신에게 들어오게 되는 것을 알고는“내가 무르리라(I will redeem it)”고 답변합니다.

지혜로운 보아스가 재산과 함께 모압여인 룻도 아내로 맞아야 한다고 덧붙힙니다. 그 친척은 손사래를 치면서“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6절)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권리를 포기합니다. 보아스는 철저한 사람입니다. 증인들 앞에서 이 사실을 확실히 해 놓습니다. 포기한 사람이 자신의 신을 벗어서 이웃들에게 주는 행동을 하게 만든 것이지요. 보아스와 룻의 결혼이 성사되는 순간입니다.

이렇게 보아스가 룻의 남편이 되었지만 그 앞전에 그는 룻과 나오미의“기업을 무를 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고엘”이라는 히브리어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셨습니다. 죄로 인해서 죽을 밖에 없는 우리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살려주셨습니다. 보아스가 룻의 기업을 물러서 그의 아내로 맞았듯이, 예수님께서 값주고 사셔서 우리를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로부터 룻과 나오미의 모든 것이 보아스의 것이 되는 은혜를 누렸듯이, 우리들의 모든 인생도 예수님의 통치와 능력 속에 있게 되었습니다. 보아스가 룻을 받아들인 것은 철저한 그의 호의요 은혜였습니다. 똑같이 예수님께서 죄많고 자격도 없는 우리를 자신의 백성으로 삼아 주신 것은 전적인 은혜입니다. 이처럼 룻기 속에는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예수님의 모습이 들어있습니다. 할렐루야! -河-

“일상 – 그 하나님의 신비”

어느덧 8월도 다 지나갑니다. 이 달이 가면 올해도 3분의 2가 지나는 셈입니다. 이렇듯 빠르게 흘러가는 세월을 두고 고려시대의 한 시인은 이렇게 읊었습니다: “한 손에 막대기 잡고 또 한 손에 가시를 쥐고/ 늙어가는 것을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을 막대기로 치려고 하였더니/ 어느새 백발이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커다란 강처럼 유유하게 흘러가는 시간 한가운데서 느끼는 인생의 무상함을 노래한 시조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한탄만 하고 있으면 한번뿐인 인생이 너무 초라해 집니다. 호주 출신의 작가 마이클 프로스트가 쓴 “일상–그 하나님의 신비(Eyes Wide Open: Seeing God in the Ordinary)”라는 책이 있습니다. 영문 제목을 그대로 옮기면“눈을 크게 뜨세요 그리고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세요”쯤 될 것입니다. 저자는 현대인들이 일상 속에 깃든 하나님의 은혜와 손길을 수없이 놓치고 산다고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들려오는 새소리, 일정하게 동이 터오는 새벽빛과 아름다운 저녁노을, 호숫가에 피어 오르는 아침 안개 등등 일상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손길을 조목조목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너무 특별하고 커다란 은혜를 추구한 나머지 잔잔히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언제나 곁에서 힘이 되어주는 남편과 아내, 우리들의 분신인 자녀들, 또 부모형제, 친구와 이웃들의 소중함을 잊고 삽니다. 길 가에 피어 있는 꽃들 속에도 하나님의 손길과 배려가 깃들여 있는데 무심코 지나칩니다. 하루 동안 겪는 무수한 사건들 속에도 하나님의 간섭과 섭리가 있건만 모든 것이 제 힘으로 된 듯이 으쓱대거나 일이 안되면 쉽게 절망합니다. 우리들 곁에서 동행해 주시는 하나님을 느끼는 것은 매우 짧은 시간뿐이고 대부분 불평을 입에 달고 삽니다. 왜 그럴까요?

마이클 프로스트는 두 가지 이유를 제기합니다. 첫째는 현대인들이 너무 바쁘게 생활하기 때문이랍니다. 삶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기 위해서는 약간의 서행이 필요합니다. 100마일로 달려가면서 경치를 구경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속도를 줄여야 주변을 자세히 관찰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사물을 대충 보고 넘어가기 때문이랍니다. 멈춰 서서 손으로 만져보고, 눈으로 살펴보고, 코로 향기를 맡아 보았을 때 그 속에 깃든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을 두고 프로스트는 이목집중의 훈련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에 눈과 귀를 집중해서 살펴보고 감지하는 훈련입니다. 그러면 이곳 저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보물찾기 하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은 저 멀리 무지개처럼 펼쳐있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그리고 손이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서 하나님의 숨결이 들려옵니다. 그것을 감지하는 그리스도인은 무척 행복한 삶을 살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배웠기에 매사에 감사가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프로스트는 다음과 같이 우리를 일깨워 줍니다:“나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미적 감각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것이든 일상적인 것이 가장 특별한 것이다. 단순한 대답과 산문체 일색의 단조로움이 아니라 세심한 관찰력과 미적 감각, 창조 세계를 끌어안으려는 시인의 마음을 회복한다면 당신의 인생은 아름답게 변할 것이다.”-河-     (2009.8.20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샬롬 샬롬

좋은 아침입니다.

1.

컴퓨터 파일을 살펴보니

지난 번 이메일 서신을 보낸 날짜가

6 11일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일들로

조금만 쉬고 보내겠다고 한 것이

두 달을 훌쩍 넘겼습니다.

이렇게 하다가

9월을 맞을 것 같아서

마음을 다잡고 서신을 띄웁니다.

2.

제가 이번 주 붙잡고 묵상하는 말씀은

이사야서 26 3절입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히브리어 본문을 자세히 읽으면

이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평강에 평강으로

우리가 다 아는 말인 샬롬 샬롬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완벽한 평강(perfect peace)입니다.

하나님의 완벽한 평강를 누리는 사람은

1) 심지가 견고한 사람입니다.

    매사에 (계획, 인생의 목적, 생각까지) 하나님을 온전히 기대고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2) 주님을 의뢰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믿음에 확신이 더해진 것이지요.

중고등부 교사를 할 때

아이들을 둘씩 짝을 지워주고

한 명은 눈을 가리고

다른 한 명이 눈을 가린 친구를 인도해 주는 게임을 한 적이 있습니다.

눈을 가린 친구는

옆에서 자신을 붙들고 인도하는 친구를 전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다른 곳으로 갑니다.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불안하니까 허우적거리고 머뭇거립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도

똑 같은 이치입니다.

한 마디로 인생의 핸들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지요.

이사야서 26 3절은 우리가 그렇게 하면

불안함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완전한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약속입니다.

3.

요즘 사업체나 직장이 무척 어렵습니다.

따라서 마음이 많이 불안합니다.

제가 간절히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서머나 식구들도 계십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늘의 평강이 요청됩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의 고삐를 하나님께 맡겼을 때 임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오늘 하루만큼이라도

(물론 늘 그래야 하지만 아주 힘들때는 하루 하루 사는 것도 비결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봅시다.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께

인생의 고삐를 맡깁시다.

하나님께 기대서 그 안에서 평안함을 누립시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26:3)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시든지

모든 서머나 식구들 위에 임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힘 내 십 시 오 !

샬롬

하목사 올림

2009.8.20 메일 목회서신

사랑의 시작 : 룻과 보아스

보아스가 자신의 밭에서 마음대로 보리이삭을 주워갈 것을 허락했기 때문에 룻과 나오미는 양식 걱정을 하지 않고 한 철을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어머니 나오미가 룻울 불러놓고 마음에 있던 얘기를 합니다. 언제까지 여자 둘이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룻도 새로운 시작을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나오미는 룻이 보아스의 밭에 가서 보리 이삭을 주워올 때마다 룻을 보아스에게 시집보내고 싶은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룻을 불러놓고 자신의 의중을 얘기하면서 오늘 밤에 보아스가 타작마당에서 밤을 지새울 때 슬며시 그의 잠자리에 들어갈 것을 부탁합니다.

“목욕을 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3절)라는 나오미의 말은 룻으로 하여금 신부 장단을 하고 보아스에게 가라는 것입니다.“그 발치에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4절)는 것은 룻에게 보아스의 침상에 오르라는 야릿한 뉘앙스를 갖고 있는 히브리식 표현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어떤 사람이 죽으면 형제나 자식 아닌 가까운 친족이 남겨진 재산이나 부인을 취해서 가문의 대를 잇는 관습이 있었습니다(신25:5). 보아스는 돌아가신 시아버지 엘리멜렉의 친족입니다. 그러니까 나오미는 엘리멜렉이 룻에게 있어서 가장 적합한 남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룻을 보아스에게 시집보내기 위해서 꾀를 쓴 것 같습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말에 그대로 순종합니다. 마침 보아스는 보리 추수를 모두 끝내고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서”보리 낟가리 옆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수확한 것을 집에 가져가기 전까지 주인은 낟가리를 지키면서 그곳에서 잠을 잤습니다. 룻은 밤중에 슬며시 보아스의 침상에 오릅니다. 보아스가 한밤중에 깜짝 놀라서 잠을 깹니다. 룻이 자기 발밑에 있는 것입니다. 웬만한 사람 같았으면 모압여인 룻을 저주하고 날이 밝았을 때 마을 사람들 앞에서 아주 큰 창피를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도리어 룻을 축복합니다. 게다가 보아스는 룻의 마음속에서“인애(헤세드)”즉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다고 칭찬합니다(10절).모압 사람이지만 그녀의 부지런함과 시어머니를 모시는 효심으로 인해서 룻은 이미 마을에서 “현숙한 여인”(11절)이라는 평판을 얻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보아스도 아름다운 여인 룻을 마음에 두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룻은 보아스의 말대로 그 밤을 함께 머뭅니다. 그리고 동이 트기 전에 보리 여섯 되를 주고 룻을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돌려보냅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매우 현명한 여인입니다. 룻에게 자초지종을 듣고는 잠잠히 보아스의 처분을 기다리자고 제안합니다. 룻기의 사랑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지만 나오미의 지혜, 룻의 순종, 보아스의 배려로 룻과 보아스의 사랑이 움트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랑이 열매를 맺으면 보아스가 나오미와 룻을 책임지고 이들에게는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바로 보아스는 룻과 나오미에게 구세주(redeemer)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빈손으로 고향에 돌아온 나오미에게 이런 충만한 축복을 예비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헤세드 –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축복입니다.河-

룻이 보아스를 만나다

가뭄을 피해서 모압으로 피난 갔던 나오미가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잃고 모압 며느리 룻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금의환향해도 모자랄 판에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어서 돌아왔으니 나오미의 마음이 오죽했을까요? 동네사람들이 구경나온 자리에서 나오미는 자신의 현재 모습을 있는 그대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더 이상 기쁨 또는 즐거움이란 뜻의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고통스럽다는 뜻의 마라라고 불러달라고 당부합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에게 닥친 재난이 하나님께서 벌주신 것이라고 사람들 앞에서 담담하게 밝힙니다. 그렇게 나오미의 베들레헴 귀환은 빈털터리 초라한 모습으로 시작했습니다.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돌아오던 시기는 풍년이 들어서 보리를 추수하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나오미와 룻은 양식걱정을 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그때 선하고 부지런한 며느리 룻이 이삭을 주우러 들에 나가기로 결심합니다. 모압 여인이 이스라엘 들판에 나가는 것 자체가 비난을 무릅쓴 행위입니다. 그녀가 들에 나가면 또 다시 동네에 빅뉴스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룻은 시어머니를 위해서 생활전선으로 뛰어든 것입니다.

그때 베들레헴에는 보아스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보아스는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척입니다. 그리고 보아스라는 이름이“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듯이 그는 베들레헴의 유력 인사였습니다. 룻이 들로 나가서 보리이삭을 주운 곳이 바로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우연히”라고 기록했습니다(2:3). 물론 우연히 벌어진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 우연은 없습니다. 운이 좋다는 말도 통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뜻이 깃들어 있는데 이것을“하나님의 섭리”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룻기에 대한 설교를 들으면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보아스는 부족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마음이 비단결처럼 곱고 말 그대로 신사였습니다. 그는 들에서 일하는 일꾼들과도 서로 하나님의 축복을 비는 인사를 했습니다. 모압여인 룻이 자신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 것을 보고 부정 탄다고 좇아낼 만도 한데 룻을 살뜰하게 챙겨줍니다. 아니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이방 여인에게 하나님의 복을 빌어줍니다. 이처럼 보아스는 하나님께 사로잡힌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마음을 소유한 인물이었습니다. 여기서부터 룻기의 말씀은 칠흑 같이 어두운 분위기에서 동이 터오는 새벽하늘 분위기로 서서히 전환됩니다.

룻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선합니다. 당시 사사시대는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 매우 혼란스럽고 시끄럽던 때였는데 이상하리만큼 룻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착하고 말 그대로 “평화의 사람들”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복도 내리시지만 벌도 내리신다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앙)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이들이 하나님을 확실히 만났고, 혼탁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발버둥 치며 노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처럼 살았던 인물들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들처럼 선하고 구별된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소원합니다.河-

베들레헴에 돌아오다

모압땅을 떠난 시어머니 룻과 모압 며느리 룻이 드디어 베들레헴에 돌아옵니다. 그때는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아서 걷거나 기껏해야 낙타와 같은 짐승을 타고 여행했습니다. 나오미와 룻은 며칠을 걸어서 고향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중동의 뙤약볕에 얼굴도 많이 타고 옷차림도 아주 허름했을 겁니다. 고향에 와보니 소문에 듣던 대로 고향땅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어서 사람들이 보리를 수확하고 있었습니다.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온 자신의 처지와 비교하면 만감이 교차했겠지요.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돌아왔다는 소문이 작은 동네에 쫙 퍼집니다. 이것을 두고 오늘 본문 19절에서는 온 성읍이 나오미와 룻이 돌아온 것을 두고 들썩거렸다고 했습니다. 작은 동네 베들레헴에 빅뉴스였던 것입니다. 소문을 듣고 동네사람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모압에 가서 축복을 받고 성공을 해서 아주 큰 재산과 종들을 데리고 온 줄 알았습니다. 소위 금의환향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사실은 어떻습니까? 남편 엘리멜렉도 두 아들도 없습니다. 그리고 나오미가 외국 며느리를 데리고 거지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은 수군댔을 겁니다. 그리고 누군가 “이가 나오미냐?”라고 입을 열었습니다. 아니 나오미가 어떻게 이 지경이 되었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핀잔의 말을 했고, 어떤 사람은 진심으로 동정어린 마음에서“이가 나오미냐?”고 말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19절은 베들레헴에서 돌아온 나오미와 룻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모습을 가감 없이 전하고 있습니다.

나오미는 담담합니다. 조금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자신을 숨기려고 하지도 않고 그 나마 남은 자존심을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자신을 더 이상“기쁨”이라는 뜻의 이름인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고난”이란 뜻의 마라라고 부를 것을 부탁합니다. 고향을 떠날 때는 풍족해서 떠났는데 빈손으로 왔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도 잃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축복하신 것이 아니라 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빈털터리가 되었다고 담담하게 자신에게 닥친 쓰디쓴 인생길을 고향사람들에게 보고합니다.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누구나 자신의 약점이나 실패를 숨기려고 합니다. 더구나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두고 하나님 탓을 하거나 사람들 탓을 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이 모든 것을 자신의 가슴에 끓어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마라라고 불러달라고 얘기합니다. 대단한 용기입니다. 마음을 다 비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자신에게 닥친 알 수 없는 고난을 두고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회개하고 깊이 생각한 하나님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선포입니다.

나오미는 이렇게 고향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솔직히 내보였습니다. 나오미도 사람입니다. 그녀의 마음이 편할 리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나오미와 룻을 진심으로 지켜보는 분이 계셨습니다. 바로 자신을 사랑하는 자, 자신이 부른 사람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복음성가의 가사대로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께서 나오미와 룻을 주목하고 계셨습니다.河-

나오미와 룻

지난주에는 모압땅으로 피난갔던 나오미의 가정에 밀어닥친 고난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병약한 두 아들과 가족을 살리려고 모압으로 피난을 갔는데 피난길이 남편과 두 아들을 잃게 된 고난의 길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래도 나오미는 두 며느리와 함께 모암땅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향 베들레헴에 가뭄이 그치고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나오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합니다. 그런데 이제 남은 두 며느리들이 문제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의 관습에 따라서 나오미가 두 며느리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그들로 하여금 다른 남자를 찾아서 결혼할 수 있도록 남겨놓고 떠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오늘 본문에도 나오듯이 나오미에게 다른 아들이 있다면 그들과 결혼시키는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첫째 아들이 결혼해서 죽으면 그의 아내는 결혼하지 않은 다른 형제들이 아내로 맞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두 아들을 모두 잃었기에 더 이상 며느리들을 시집보낼 아들이 없었습니다.

결국 두 며느리를 모압땅에 두고 가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며느리들에게 자세하게 사정을 설명해 줍니다(12-13절). 매우 자상한 시어머니입니다. 자신이 늙어서 자식을 낳을 수도 새로 남편을 얻을 수도 없고, 설령 남편을 얻어서 아들을 낳아도 그들이 장성하기를 기다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처음에는 나오미가 두 며느리와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것은 며느리들에게 못할 일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나오미는 두 며느리를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두 며느리는 게다가 이스라엘 출신이 아니라 모압 여인들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에 가면 문화도 다르고 워낙 이스라엘 민족이 배타적이어서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자신보다 두 며느리에게 좋은 결정을 합니다. 매우 힘든 상황 속에서도 사랑하는 두 며느리를 진심으로 배려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나오미의 마음씨가 얼마나 곱습니까?

처음에는 두 며느리 모두 나오미를 떠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결국 오르바라는 며느리는 나오미의 간곡한 부탁에 모압땅에 남기로 합니다. 그런데 룻은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가겠답니다. 14절에 보면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꼭 붙잡았습니다. 시어머니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함께 가게 해달라고 통사정을 했습니다. 나오미와 함께 생사를 같이 하겠답니다. 그가 나오미를 버리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벌하실 것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룻의 결심이 완강한 것을 알아차린 나오미가 그녀와 함께 베들레헴에 돌아가기로 결정합니다.

나오미가 두 며느리와 이별하고 혼자서 고향땅에 가기로 결심하는 장면은 언제보아도 눈물겹습니다. 나오미의 외롭고 기구한 운명이 그대로 들어나기 때문입니다. 그 와중에도 나오미와 룻이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은 매우 감동적입니다. 룻은 끝가지 시어머니를 모시겠답니다. 나오미는 룻을 위해서 모압에 남으라고 설득합니다. 아픈 마음을 뒤로 하고 서로를 배려하는 모습은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됩니다. 하물며 이들을 지켜보신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셨을까요?河-

피난길이 고난길이 되다

앞으로 6주에 걸쳐서 구약성경의 룻기를 연속으로 설교할 예정입니다. 룻기의 배경은 구약의 사사시대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출애굽하여 40년 광야시대를 지나서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 땅에 들어간 직후가 바로 사사시대입니다.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도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에 하나님께 갔고 그 다음에는 사사들이 등장해서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사사는 재판관이라는 뜻이지만 이들은 실제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였습니다. 삼손과 기드온이 당시의 유명한 사사들입니다. 사사시대는 이스라엘이 매우 어지러운 때였습니다. 사사들이 없으면 백성들은 가나안땅의 우상을 섬기고 연이어 이웃나라가 쳐들어와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사사기 후반부에는 이스라엘 민족 안에 내분이 생겨서 처참한 동족상잔의 비극이 발생합니다.

룻기의 배경이 되는 사사시대는 이처럼 하나님께 불손종한 백성들이 판을 치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했으며, 폭력이 난무한 어지럽고 절망스러운 시대였습니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극심한 가뭄까지 들었습니다. 그때 베들레헴에 엘리멜렉(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엘리멜렉은 가뭄을 피하기 위해서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땅으로 피난을 갑니다.

고향을 등지고 살 길을 찾아서 모압땅에 왔지만 그곳에서 이들은 더 큰 재난을 경험합니다. 말 그대로 피난길이 고난길이 된 것입니다. 먼저 가장인 엘리멜렉이 죽습니다. 그의 부인 나오미와 두 아들만 남게 된 것입니다. 나오미는 그곳에서 두 아들을 모압 여인들과 장가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이들이 모압에 가서 10년쯤 살았을 때 두 아들마저 죽습니다.

룻기는 이렇게 한 가족에 임한 고난으로 시작합니다. 이들에게 닥친 고난은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룻기는 이 고난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바뀌는지 매우 흥미롭게 설명해 줍니다. 이들의 고난 뒤편에 하나님께서 계셨습니다. 또한 룻기에 나오는 세 명의 주요 등장인물들(나오미, 룻, 보아스)은 모두 하나님을 진실 되게 믿는 아름다운 믿음의 소유자들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당시의 세상은 매우 혼탁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기보다 내부의 분열과 싸움으로 불신의 벽이 높아지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었고, 하나님은 이들을 주목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서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룻의 후손 가운데 다윗 왕이 탄생하고 천여 년 후에는 룻의 가보에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 룻기 연속설교를 통해서 서머나 식구들게 다음과 같은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우리 자신과 역사 속에 임하는 하나님의 귀한 섭리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나오미가 겪은 고난의 삶에 우리들 삶의 여정을 대입해보고 그 안에서 위로와 힘을 얻는 것입니다. 셋째로, 혼탁한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쓰신 나오미, 룻, 보아스의 성품을 살펴보고 이들을 닮는 멋진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결심하는 것입니다. 룻기 연속설교를 통해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잔잔히 그리고 깊이 임하기를 바랍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