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평화 세상을 향한 용기”

저는 지난 일주일동안 시카고 휘튼 대학에서 열리는 2009년도 미주 코스타에 참석했습니다. 올해도 여느 해와 다름없이 1400여명이 참석했고 같은 시간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열리는 대학생코스타에도 600여명이 참석했습니다.

이번에 제가 맡은 강의는 귀납법적 성경연구라는 세미나인데 성경연구에 관심이 있는 젊은이들은 물론 목회자들이 참석했습니다. 같은 주제를 갖고 네 번째 세미나 강의를 하고 있지만 하나님 말씀을 올바르게 연구하는 방법을 소개한다는 점에서 늘 마음이 설레고 또한 두렵기도 합니다. 그래도 뒷전에서 기도해 주시는 서머나 식구들이 계시기에 열심히 전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덧 코스타에 참석한 지 여섯 해가 지났습니다. 처음에는 강사로 참석했어도 서먹서먹했었는데 이제는 1년 만에 만나 뵈는 동역자들과 교제하는 것도 코스타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이 되었습니다. 모두 훌륭하신 강사님들이 한국은 물론 미국의 전역에서 모이셨습니다. 그것도 강사비는 물론 교통비까지 받지 않는 자비량 섬김입니다.

코스타에서는 목사님들만 강사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직업을 갖고 계신 평신도들께서 열심히 섬기시면서 세상 속에서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삶으로 본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김한준 집사께서 인디애나폴리스 코스타에 성경연구방법을 가리키고 오셨습니다. 이렇게 좋으신 분들과 하나님의 꿈을 나누고, 한국과 미국에 있는 교회들의 미래를 걱정하고 대안도 제시해보는 것은 매우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강의 외에도 저는 보스턴과 뉴욕이 속한 북동부지역의 멘토로 섬겼습니다. 4박5일 동안 조장들이 얼마나 열심히 조원들을 섬기는지 모릅니다. 금방 헤어질 조원들이고 어쩌면 한번뿐인 만남인데도 소중히 여기고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아직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형제자매들이 있다고 멘토인 저희들에게 만나달라고 사정을 합니다. 식사시간에도 저희들을 초청해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조언을 듣습니다.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서 자정이 넘을 때까지 조별로 활동하면서 예수님 안에서 형제와 자매가 되었음을 확인합니다.

휘튼대학 캠퍼스를 오가는 코스탄들(코스타에 참석한 형제자매들을 부르는 명칭)의 모습을 보면 꼭 천국에 온 것 같았습니다. 강사로 멘토로 그들에게 무엇인가 가르쳐주기 위해서 갔었지만 결국에는 제가 더 많이 배우고 돌아왔습니다.

이번 2009년 코스타의 주제는“예수의 평화 세상을 향한 용기”였습니다. 요즘같이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평화가 깨진 불안한 시대에 꼭 맞는 주제였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이웃과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평화라는 메시지가 선포되었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용기 있게 세상으로 나갈 것을 결단했습니다.

코스타 기간 중에도 시시때때로 우리 교회와 서머나 식구들을 생각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도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우리 교회가 세상 속에 빛과 소금이 되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의 평화가 임하고 그것을 세상에 전하는 멋진 교회로 세워지기를 함께 기도합시다.河-

고넬료와 베드로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고 예루살렘에서부터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복음이 폭발적으로 전파되면서 핍박이 이어졌습니다. 핍박을 피하기 위해서 많은 기독교인들은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오직 성령이 너희가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1:8)는 예수님의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교회가 핍박을 받으면서 성도들이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들은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전화위복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핍박을 사용하셔서 복음이 사방으로 전파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 와중에 스데반은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서 순교합니다.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 있었던 사울이라는 청년은 다메섹으로 가는 중에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감옥에 잡아넣으면서 핍박을 가하던 유대청년이 한 순간에 예수님을 만나서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가는 곳마다 기적을 일으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불길처럼 온 세상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늘 본문은 고넬료라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사건입니다. 고넬료는 가이사랴 지방에 파견된 로마 장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곳에서 유대인들로부터 하나님을 소개받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당시 유대교에서는 유대인이 아니면서 하나님을 믿는 이방인을 두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God-fearer)”이라고 불렀는데 본문 2절에 고넬료를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고넬료는 매우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을 성심껏 도와서 그들로부터 매우 좋은 평판을 얻었습니다. 로마 군인이 식민지의 백성들로부터 칭찬받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고넬료는 또한 시간을 정해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루는 고넬료가 오후 세시에 기도하는데 천사의 음성을 듣습니다. 욥바로 사람을 보내서 그곳에 있는 베드로를 데려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고넬료는 곧바로 욥바로 사람을 보냅니다. 그때 베드로는 욥바에서 도르가라는 여제자가 죽은 것을 살려내는 기적을 행하고 그곳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베드로 역시 기도하는데 환상을 봅니다. 구약의 율법을 따르면 먹을 수 없는 짐승들이 가득 들은 광주리였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먹으라고 하십니다.“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10:15)는 말씀에 베드로는 당황합니다. 그때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를 부릅니다. 베드로는 그들과 함께 고넬료 집에 와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고넬료와 그 집에 모인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믿은 첫 번째 로마사람이 된 것입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온 백성을 구제하면서 이웃을 섬겼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깨끗한 그릇이었습니다.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화가 담겼으니 얼마나 기쁘고 감사하였겠습니까?  -河-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복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세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복음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너희가 예수를 죽였다는 설교를 듣고“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2:37)라며 회개하면서 성령을 선물로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복음에 대해서 저항하고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막는 훼방꾼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나 초대교회 때나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언제나 복음에 대해서 적대적이었습니다. 자기들이 구축해 놓은 기득권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했고, 그들이 믿는 신념에 꽁꽁 매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부류는 이 모든 상황을 멀찍이 떨어져서 관망하는 구경꾼들입니다. 이들은 복음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자신들의 일이 아니기에 무관심할 뿐입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구경꾼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증인”들입니다. 지난 번 설교에서 증인은 1)“마르투스”라는 헬라어 의미 그대로 순교의 각오를 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이라고 했습니다. 2) 예수님의 증인이기에 예수님만을 전하지 자신의 뜻이나 생각을 전하지 않습니다. 3) 재판정에 증인이 서듯이 이들은 세상 속에서 예수님을 변호하는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은 성령을 체험하고 권능을 받고 난 후에 아주 훌륭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면서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변호한 것이 대표적인 증인의 모습입니다.

복음이 예루살렘에 전해지면서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싫어하는 훼방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권력을 갖고 있었기에 앉은뱅이를 고친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무슨 이유와 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지 심문했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각오한 베드로는 담대하게 답변합니다.:“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행4:10). 다시는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종교 지도자들의 위협에 베드로와 요한은 더욱 담대하게 답변합니다.:“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행4:19). 불과 두어 달 전에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이런 용기가 생긴 것이 의아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잡혀있는 동안에 다른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을 졸이면서 기도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감옥에 갇히면 복음도 갇힌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풀려났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교회에 닥친 첫 번째 위기를 넘긴 것입니다. 그때 모든 사람들이 일심으로 소리를 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서 복음은 더욱 빠르고 강하게 예루살렘에 전파됩니다. 이렇게 주님의 교회는 그 생명력을 이어갔고 더욱 크게 부흥해 갔습니다. 할렐루야! -河-

유쾌하게 되는 날

최근에 마음을 활짝 열고 화통하게 웃어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눈코 뜰 새 없이 돌아가는 이민생활에 늘 이마가 찌푸려있지는 않으십니까? 그동안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면 왠지 모르게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는 것처럼 느끼십니까? 인간관계도 원만치 못하고, 세상살이도 늘 흐림이었고, 재미있는 일들도 자주 일어나지 않는 지지부진한 인생을 사셨습니까? 다른 사람의 얘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모두의 얘기요 하소연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읽어가면서 눈이 번쩍 뜨이는 말씀을 만나셨을 겁니다. 바로 사도행전 3장 19절의“유쾌하게 되는 날”이라는 표현입니다. 어찌 보면 개역 성경이 아주 멋지게 번역했습니다. 왜냐하면 헬라어 본문의 뜻은 “새롭게 되는 때(refreshing time)”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나프스크시스“라는 헬라어 속에는“영적인 힘(spiritual strength)”라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 가지 의미를 모두 합치면 이런 뜻이 됩니다. 새롭게 되는 날은 유쾌한 날입니다. 바로 영적인 힘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3:1-8:3절까지는 예루살렘에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약속대로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권능을 받은 제자들이 제일 먼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증인이 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유대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여전히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었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종교지도자들이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그 한 가운데 성령이 임했고, 그곳에서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예루살렘의 전도가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앉은뱅이가 나은 것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고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해서 먹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다가 앉은뱅이를 보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걷게 합니다. 성전 밖에 있던 앉은뱅이는 걷고 뛰면서 성전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것을 보고 모여든 군중들 앞에서 다시 한 번 설교합니다. 그때 베드로의 설교 가운데 등장한 말이 바로“유쾌하게 되는 날”“새롭게 되는 날”“영적인 힘을 얻는 날”입니다. 이것은 앉은뱅이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었듯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예수 이름의 권세가 임할 때 유쾌함이 임합니다.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하늘의 힘과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앉은뱅이는 당시 예수님의 복음을 듣지 못한 모든 사람들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그들은 비록 걷고 뛰었지만 영적으로 앉은뱅이였습니다. 유쾌함이 없었고 늘 이마를 찌푸리고 살았습니다. 앉은뱅이에게 예수 이름의 권세가 임했을 때 걷고 뛰었고 하나님을 찬미하였듯이 예수님을 믿을 때 유쾌한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을 누리는 비결이 19절 앞에 나와 있습니다.:“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예수님 안에서 유쾌함을 누리는 서머나 식구들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河-

아 버 지

저는 아버지께서 마흔 아홉에 낳으신 말 그대로 늦둥이입니다. 아버지께서는 평생 동안 흙과 씨름하신 평범한 농부셨습니다. 약주를 한잔 하시면 말문이 열리시지만 그 전에는 차근차근 얘기하시는 법이 없으신 우리 시대의 전형적인 무뚝뚝한 아버지셨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릴 적에는 밤만 되면 왜 그렇게 등이 가려웠는지요? 저의 짧은 팔로 등을 긁적거리면 아버지께서는 슬며시 다가오셔서 커다란 손으로 말없이 등을 긁어 주셨습니다. 농사일로 거칠어진 아버지의 손길이 등에 닿을 때마다 얼마나 시원했는지 모릅니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됐다고 말씀드릴 때까지 말없이 제 등을 긁어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표현은 안 하셔도 세상에서 저를 가장 사랑하셨습니다. 언제나 머리를 쓰다듬으시면서 쉰 가까이 낳은 자식이 커가는 것을 대견해 하셨습니다. 귀한 막내 아들이 농부가 되는 것이 싫으셨는지, 아버지의 일을 도우려고 논밭에 나가면 극구 만류하시면서 얼른 들어가서 공부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버지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드린 적이 별로 없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법대를 가서 법관이 되기를 바라셨지만 저는 문과대를 택했습니다. 직장에서 승승장구하며 여느 집 자식들처럼 아버지의 자랑이 되기를 바라셨지만 목사가 되겠다고 어느 날 갑자기 신학교를 갔습니다. 팔십이 넘으신 아버지를 뒤로 하고 태평양을 건너서 유학 길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가시는 길도 지켜드리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께서 하늘나라에 가신 후, 아버지의 수첩 속에 저의 옛날 직장 명함이 들어 있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한없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께서 하나님께 가신 지 5년이 지났지만, 바쁜 목회를 핑계로 아버지 묘소에 가서 큰 절 한번 올리지 못했습니다. 자식에 대한 섭섭함과 노년의 외로움을 속으로 감내하셨을 아버지를 생각하면 죄송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그런 제가 어느덧 두 아들을 둔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저는 아들과 친구처럼 지내는 말 그대로 신세대 아빠입니다.아이들과 한 침대에서 뒹굴고, 가끔씩 아이들과 팔씨름을 하면서 수선을 피웁니다. “사랑한다”는 말도 종종 합니다.하지만 그러다가도 아이들이 자기들 고집대로 하는 것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 장가도 가기 전에 이놈들이 벌써 아버지를 무시하나……’ 별 것도 아닌 일에 섭섭한 마음이 듭니다. 어쩌면 자기는 모로 걸으면서 자식들에게는 바르게 걷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아빠인지도 모릅니다.

곧 아버지 날이 다가옵니다. 올 해는 왠지 모르게 하늘 나라에 계신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납니다. 말없이 깊은 정을 주신 아버지의 마음과 손길을 생각해 봅니다.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우실 만큼 무뚝뚝하신 아버지셨지만 그 아버지가 그립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불러봐도 아버지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대신에 마흔 아홉에 낳으신 늦둥이가 어느덧 대학생이 된 아들을 둔 아빠가 되어 있을 뿐입니다. 제가 아버지께 받은 사랑을 얼만큼이나 자식들에게 나눠 줄 수 있을 지……자식들이 내 생각대로 가지 않아도 속으로 삭히고 자식들이 잘 되기를 응원해 주고 기도해 줄 수 있을지……

내리사랑이라고 자식이 아버지를 뛰어넘을 수 없음을 다시금 실감하면서 마음 속으로 그리운 아버지를 불러 봅니다.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2009년 6월 18일)

초대교회가 시작되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사도들에게 임하면서 하루에 3천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불과 50여일 전까지만 해도 나사렛 예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듯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3년 동안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두루 다니시면서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기사와 이적을 행하셨지만 결국 힘없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에수님께서 40여 일 동안 세상에 계셨지만 그때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치셨고, 약속하신 성령이 임할 때 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도할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그리고 홀연히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40일 만에 승천하시기까지의 기간은 성령의 임재를 준비하는 고요한 시간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성령이 임할 것을 믿고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리고 오순절에 약속하신 성령이 임했습니다. 성령을 체험한 제자들은 거리고 나와서 각 족속의 언어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베드로가 설교하니 3천명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인구를 10만 명 정도로 추산했을 때, 인구의 3%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순식간에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그때부터 예루살렘에는 나사렛 예수와 제자들에 대한 소식이 단연 톱뉴스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오순절에 성령이 임한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예루살렘을 뒤흔들어버린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성령의 임재와 역사가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성령이 임하고 사도들을 통해서 놀라운 기사와 이적이 자꾸만 나타나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날마다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솔로몬의 행각이라는 곳에 모여서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각자 흩어지면 가정에서 말씀을 듣고 기도에 힘썼습니다. 우리들이 구역속회로 모이는 것과 유사한 형태입니다. 그렇게 처음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가정에서 가정으로 퍼져나갔고 이것이 교회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처음 생긴 교회는 지난 번 설교에서 성경의“능력”을 소개할 때 사용했던 3가지(다이너마이트와 같은 폭발력, 다이나모 발전기 같은 지속력, 다이내믹한 역동성) 능력을 모두 갖춘 교회였습니다. 기사와 이적이 폭발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기도에 힘쓰면서 날마다 새로운 힘을 공급받았습니다. 무엇보다 재산을 서로 나눌 정도의 역동적인 공동체였습니다.

이러한 초대 교회의 모습은 오늘 날 교회의 모델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을 영어의 “WELL(우물)”이라는 글자를 따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배(Worship), 전도(Evangelism), 가르침/교육(Learn), 사랑의 교제(Love). 우리 서머나 교회 속에도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 교회도 폭발적이고, 날마다 새로워지는 역동적인 공동체로 자라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성령의 임재와 역사가 있을 때 가능함을 잊지 맙시다. -河-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수요예배에서는 아모스서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아모스서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어렵다기보다는

그 동안 들어왔던 신앙의 지경을 넘어섭니다.

우리들의 신앙은 상당히 개인주의적입니다.

우선 내가 복을 받고

내가 잘되는 것에 신경을 씁니다.

그만큼 이민생활과 유학생활이 어려워서 그렇겠지요.

또 한가지 이유는

교회에서

축복과 형통을 말하는 익숙한 말씀이 주로 선포되고

예언서의 말씀은 아주 가끔 (언제 들었는지 가물가물할 만큼)

전해 지기 때문에 생소하게 들리는 것입니다.

아모스서를 시작하면서

우리들 신앙의 지평이 를 넘어서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세상 만들기까지 넓혀보자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회, 경제, 정치의 모습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말씀이 추상적이고, 쉽게 마음에 다가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 각자의 구원과 축복을 넘어서

세상 속에서 공의정의가 물같이 넘치데 까지

이른다는 사실을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면서 말씀을 준비합니다.

세상사에 몸과 마음이 힘들고 지쳐도

우리들의 신앙은

바르고 공평한 세상을 꿈꾸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눈을 따라갔으면 좋겠습니다.

수요예배에 오지 못하셔도

제가 이메일 서신에 첨부하는

수요성경공부 교재를 한번 쭉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

아모스서 5장은 애가라는 말로 시작했습니다.

애가는 옛날 이스라엘에서 사람이 죽었을 때 부르는 노래였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죽었다고 본 것입니다.

신앙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신앙이 무너지면

그 삶 역시 죽은 것임을 꼭 기억합시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생명의 길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애가를 부르는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살 길을 열어놓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아모스 5장 4절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길은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대하고, 사모하고, 의지하고,

삶의 중심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딱 두 마디입니다.: 디르슈니 이흐예이브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길은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어렵지도 않습니다.:

디르슈니” – 나를 찾으라

이흐예이브” – 살 것이다.

3.

저는 오늘 하루 종일 이 말씀을 묵상하고

입술로 고백하면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목양하는 목사로서

제가 살 길은/우리가 교회가 살 길은

바로 여호와를 찾는 것임을 확실히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서머나 식구들 모두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

이 어려운 시대에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비결,

힘들어 죽겠다는 말이 절로 나오지만

그 안에서 살 길을 제시하는 오아시스과 같은 하나님의 음성으로

이 말씀을 꼭 붙잡고 오늘 하루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사시길 기도하겠습니다.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샬롬

하목사 올림

(2009 6 11메일 목회서신)

이제부터는…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한 마음으로 잘 해냈습니다. 서머나 식구들 모두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사랑합니다.”- 지난주일 예배를 마치고 목사인 제가 서머나 식구들께 드리고 싶은 말입니다.“하나님 고맙습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음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더욱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충실하고 성령 안에서 한 마음이 되어 바른 교회를 세워나가겠습니다.”- 모든 서머나 식구들께서 하나님께 드려야 할 감사의 고백이고 헌신의 결단입니다.

어거스틴이라는 초대교회의 교부는 시간에 대한 생각을 서구사회에 소개하고 정리한 분입니다. 시간에는 과거,현재,미래가 있지만 결국 모든 시간은 현재에 통합된다고 했습니다. 과거는 현재에 기억으로, 미래는 현재 속에 기대로 섞여있습니다. 그런데 현재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물처럼 끊임없이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매순간 닥치는 삶 속에서 의미를 찾고, 허무하게 지나가는 시간이 아니라 각자의 영혼 속에 길이 남겨질 영원한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교회의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프로그램이나 행사에 연연할 수는 없습니다. 대부분 지나가는 것들이고 유행에 따라 변할 것들입니다. 대신에 교회가 실행하는 사역을 통해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천국의 모델 하우스로서 세상에 드러나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자신을 돌아보고(self-reflection)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 교회는 이런 과정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신다고 생각되면 쉬운 길도 돌아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마음이 찢어지는 아픔과 아쉬움도 꾹 참고 가슴에 품었습니다. 앞으로도 하나님의 뜻 앞에 우리 자신의 욕심과 생각을 내려놓는 자세는 바르고 멋진 교회를 세워나가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요청됩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첫째로, 신앙의 성숙을 위해서 각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은 각 사람의 머리 위에 임했습니다. 교회의 성숙과 부흥은 신실한 성도님들의 숫자에 비례합니다. 성령충만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열심히 훈련해야합니다. 서머나 식구들 각자 하나님 안에서 멋진 그리스도인들로 세워지시길 열심히 돕겠습니다.

둘째로, 교회의 영적 시스템을 견고하게 갖춰 나가야합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입니다. 모든 지체는 하나님 앞에서 귀하고, 모든 지체는 각각의 역할과 기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투명하고, 바르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합니다. 교회 안에 성령의 임재와 역사가 나타나는 영적구조를 갖춰야 합니다.

마지막은 겸손하게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은 순종입니다. 사람들 앞에서의 겸손은 사랑과 배려입니다. 겸손한 성도님들로 가득 찬 교회는 저절로 부흥이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위해서 빌2:2-4절 말씀을 기억하면 멋진 교회를 세울 수 있습니다.:

마음을 합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같은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하라.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멋지게 빚어 가실 줄 믿고 기도에 힘씁시다.-河-

평생 요절말씀

좋은 아침입니다.

1.

지난 주일

이전 감사 및 장로권사 취임 축하예배는

우리 모두의 기도와 섬김으로 은혜 가운데 마쳤습니다.

교회가 꽉찬 것을 보면서

우리 교회의 저력과 가능성을 확인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우리 교회가 그만큼 부흥했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시작인걸요.

우리들이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시길 기도합시다.

모두모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멀리서 기도와 마음으로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2.

어젯밤에는 그 동안 밀렸던 급한 숙제를 했습니다.

미루어놓고 하지 못했던 이메일도 보내고,

글도 써서 답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7월 코스타에서

조장들의 멘토로 섬기게 되는데

제가 맡은 동부지역 조장 홈페이지에 가서 제 소개 글도 올려놓았습니다.

15 15답을 하라는데 쉽지 않았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밝고 창의적인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고

조심 조심 소개글을 올렸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을 묻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저는 평생요절인 마태복음 6 33절 상반절을 적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고 살기로

청년시절에 결심하고 이 말씀을 저의 평생 요절로 삼았습니다.

그때는 목회를 생각하지 않을 때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인생을 살든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을 최고의 핵심가치로 삼고

제 인생을 살고 싶었습니다.

여전히 부족하고 하나님의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지금도 이 말씀을 붙잡고 삽니다.

마태복음 6 33절의 상반절만

제 인생의 요절로 삼은 이유가 있습니다.

후반절은 이렇습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대부분 마태복음 6 33절을 묵상하면서

상반절 보다 후반절에 귀가 솔깃합니다.

모든 것을 더하고 얻는 삶을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려고 합니다.

지난 주 설교처럼 주객이 전도된 것이지요.

또한 마태복음 6 33절 후반절은

하나님께서 해 주실 일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국 은혜의 삶입니다

후반절의 말씀이 저에게도 평안과 확신을 더해주지만

저는 상반절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 앞에서 제 할 도리를 다할 뿐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설령 모든 것을 더해 주지 않으셔도

저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제가 수행해야 할 최고의 사명이고

마땅히 실천해야 할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3.

여러분들의

평생 요절 말씀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은

무엇을 구하면서 살고 계십니까?

행여나 마태복음 6 33절을 읽고 묵상하면서도

모든 것을 더해 주실 것을 욕심껏 구하면서 살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너무나 눈에 보이는 결과에 연연합니다.

그것을 두고 서로를 판단합니다.

오십보 백보요 도토리 키재기인데 말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딱 맞춰놓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서 살아봅시다.

성령 안에서 의와 기쁨과 화평을 누려봅시다.

인생의 축을

“나”에서 “하나님”께로 옮겨 놓읍시다.

4.

지난 주일 함께 불렀던 복음송가를 일주일 내내

흥얼거리고 있습니다.

형제(자매)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우리의 모임 중에 임하신 하나님 영광 아름다워라

존귀한 왕이 여기 계시니 사랑하며 섬기리

여러분 모두를 주님 안에서

사랑합니다.

샬롬

하목사 올림

2009년 6월 4메일 목회서신

오순절 성령강림

120명의 사도들은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대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열흘쯤 지났을 때 오순절이 되었습니다. 오순절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과 가을에 추수감사절처럼 지키는 수장절과 함께 구약시대의 3대 절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순절은 유월절이 지나고 50일이 되었을 때 지키는 절기여서 오순(五旬)절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구약에서는 오순절이라는 말 대신에 유월절이 지나고 7일마다 지키는 안식일이 7번 찾아왔을 때 지킨다는 뜻에서 칠칠절 또는 다른 말로 맥추절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처럼 오순절은 유월절에 씨를 뿌린 곡식을 처음으로 수확한 것을 기념하는 첫 열매 수확의 감사 절기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이 끝나고 잡히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사흘 만에 살아나셔서 40일 동안 세상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오순절이 되었으니 제자들이 열흘 쯤 기도했을 때 오순절을 맞았고 그때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임했습니다. 오순절에 제자들이 경험한 성령강림은 기독교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오순절 날이 되었을 때 제자들은 한 곳에 모여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때 갑자기(홀연히,suddenly) 하늘에서 급하고 강한 바람과 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소리가 제자들이 앉아 있는 집 전체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불의 혀와 같은 것이 임했는데 제자들은 그것을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불의 혀와 같은 뜨거운 기운이 그곳에 있는 모든 제자들에게 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약속한 성령이 열흘 만에 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4절에 보면, “저희가 다 성령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성령임재와 충만의 표시로 제자들이 방언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제자들은 집을 나와서 예루살렘 성전과 거리고 나온 것 같습니다. 그때 오순절을 맞아서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많은 사람들이 제자들이 방언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제자들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쓰는 언어로 예수님의 복음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전했습니다. 이것을 보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는 즉석에서 복음을 전해서 3천명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생긴 사건들입니다. 그때부터 제자들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오늘이 바로 2천 년 전 오순절의 성령강림을 기념하는 성령강림주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오늘 저녁에 이전감사 및 임원취임 축하예배로 모입니다. 기독교 역사의 뜻 깊은 날, 우리 교회도 새로운 교회에 와서 뜻 깊은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에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우리들 역시 새로운 마음으로 교회를 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난 한 달 동안 사도행전 1장 8절을 갖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제 그 말씀이 열매를 맺어서 우리 교회에 성령의 임재와 역사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들 역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동참함으로 교회의 역사를 새로 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