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증인

좋은 아침입니다.

지난 주일

새 예배 장소에서의 첫 예배는

마이크 때문에 긴장했었지만

예배가 진행되면서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인도하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거의 빠짐없이 오신 서머나 식구들께도

감사한 마음과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모두 모두 고맙습니다.

이번 주부터 새벽기도회가 없으니

마음이 꽤 허전합니다.

대신에 그 동안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오는지

잠이 쏟아져서 어쩔 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했는데

하나님 사랑합니다라는 제 고백에 감격하셔서

요즘 저를 부쩍 많이 사랑해 주시나 봅니다.

지난 번 새벽기도회에서

이사야서 뒷부분을 읽으면서 위로와 힘을 많이 얻었습니다.

얼마나 귀한 말씀을 새벽마다 주시는지

제 마음에 받아 넣느라 힘겨울 정도였습니다.

요즘은 주보에 나오는 말씀을 갖고 (“생명의 삶말씀)

큐티를 하는데 또 다시 이사야서 뒷부분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지 모릅니다.

이사야서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힘차게 앞으로 나가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열심히 말씀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8절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며 겁내지 말라.

내가 예로부터 너희에게 듣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알리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

나 외에 신이 있겠느냐

과연 반석은 없나니 다른 신이 있음을 내가 알지 못하노라.(개역개정)

8절 한 가운데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You are my witness)”

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증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한 분 뿐이시고,

정말로 살아계시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심을 변호할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증인은 정직해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겁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대변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

각자의 삶의 처소에서

하나님의 증인으로 하나님을 변호합시다.

하나님을 자랑하면서 하루를 살아 봅시다.

하나님께서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샬롬

하목사

p.s.1. 지난주에 교회계약을 하고 와서 그냥 잠들어버려서 이메일 서신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죄송.

(2009년 3월 12일 이-메일 목회서신)

믿음, 사랑, 소망

기독교 신앙을 표현하는 말이 꽤 많습니다. 그 가운데 믿음 사랑 소망은 기독교 신앙의 세 기둥이라고 말할 정도로 우리의 신앙을 세워주는 토대입니다. 이를 두고 보른캄이라는 신학자는 “믿음 소망 사랑의 삼주덕(三主德)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진수”라고 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 있을 때에 비로소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로 이루어진 신앙 공동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믿음의 역사”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믿음에는 행함이 뒤따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입으로만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반쪽믿음입니다. 믿음에 행함이 동반될 때 온전한 믿음이 됩니다. 또한 “믿음의 역사“라는 말 속에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다는 의미도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믿음의 역사를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음으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과 연결되면 믿음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또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진실로 믿으면 사랑을 나누고 싶어집니다. 받은 사랑이 너무 많아서 그 사랑을 나눠주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 역시 수고가 필요합니다. 올바른 사랑은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희생과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수고입니다. 여기서 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코포스”입니다. 저는 이 단어를 외울 때 발음을 생각해서 “코피가 날 만큼 열심히 일하는 수고”라고 연상해서 외웠습니다. 한 평생 살면서 코피가 날 만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 자체가 행복입니다.

믿음과 사랑이 현재 우리들이 가져야할 신앙의 태도라면, 소망은 우리의 신앙을 저 멀리 미래까지 연장시켜줍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소망은 특별히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서를 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를 고대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지 불과 20여년 후에 기록된 말씀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신앙을 유지하는 것이 힘겨워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를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소망에는 늘 인내가 필요합니다.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 –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 세 가지를 마음에 품고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이것을 두고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칭찬했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가 새로운 처소에서 첫 예배를 드리는 뜻 깊은 날입니다. 우리들은 그동안 온전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힘든 시간을 견뎌냈습니다. 이제 더욱 마음을 합해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 그리고 소망의 인내가 넘치는 교회를 세워갑시다. -河-

주님의 나의 방패

좋은 아침입니다.

어떤 일을 빼놓지 않고 꾸준히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갑자기 LA를 다녀오게 되어서

목회서신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ㅠㅠ

세상을 살다 보면 누군가 자신을 방어해 주고

막아주었으면 할 때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께서 방패막이가 되어 주셨습니다.

어느 정도 컸을 때는 친구끼리 서로를 방어해 주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덧 사십 대 후반이 되다 보니

제 자신이 누군가의 보호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나이가 들면서 자신을 보호해 줄 분들은 점점 사라지고,

보호해 주어야 할 대상들은 점점 늘어갑니다. 어깨가 무거워집니다.

이것이 인생이겠지요?

하지만 염려하지 마십시오.

시편 7 10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보호자가 되신다고 깨우쳐줍니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My shield is God Most High

Who saves the upright in heart.

요즘 같은 불경기에는 견디는 것이 능력입니다.

경솔하게 앞으로 나가는 것 보다

현재의 자리를 잘 지키는 것도 지혜입니다.

높고 높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방패가 되십니다.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십니다.

하나님의 방패 속에 들어가는 비결은

정직한 삶입니다. 투명한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직한 자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오늘 하루도 모든 서머나 식구들의 방패가 되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샬롬

하목사

(2009년 2월 26일 이-메이 목회서신)

하나님을 닮아가라

발가락이 닮았네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아내가 아기를 낳았는데 아무래도 자신의 아기 같지가 않습니다. 주인공은 고민을 하다가 아기의 발가락이 자신과 닮았다고 말하는 가슴 아픈 줄거리의 소설입니다.“닮았다”는 것은 서로 유사한 것을 넘어서 어떤 특별한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집 두 아들 가운데 큰 아이는 할머니와 엄마를 닮았습니다. 둘째는 저를 닮았습니다. 어르신들 말대로 씨가 같아서 그렇고 요즘 말로 유전자가 동일해서 비슷한 외모와 성격을 갖고 태어난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습니다. 그 형상이 죄를 지으면서 부서졌지만, 예수님을 믿음으로 다시 회복되었으니 우리 가운데 어디엔가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있습니다. 레위기 11장 4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찌어다”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은 구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은 어디에 있어도 무엇을 해도 구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닮으라는 말씀이 생소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소위 성직자들이나 특별한 직책을 맡고 있는 분들이 할 일이지 보통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아니 솔직히 하나님을 닮아서 별로 이익이 생길 것 같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닮는다고 돈이 벌리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에서 출세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적당히 세상과 섞여서 살아가면 이익이 생길 것 같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닮는 것은 세상의 복이나 명예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닮아서 세상에서 손해를 볼 수도 있고, 세상 사람들에게 핀잔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닮아 가야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자녀가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닮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을 닮는 것은 영생의 삶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거룩한 백성들이 모인 곳입니다. 이 세상에서 거룩을 훈련하고, 마음과 삶 속에 거룩을 새겨놓으면 이다음 하나님 나라에 가서 거룩한 백성으로 멋지게 살 수 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제 아들을 보고 사람들이 하목사 아들인 것 같다고 말하듯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닮으면 세상 사람들이 금방 우리를 알아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모습, 행동, 마음과 삶 속에서 하나님을 생각해 내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요즘은 교회도 많고 교인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막상 찾아보면 하나님을 속 빼닮은 그리스도인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가 사람들의 입에 부정적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서머나 식구들은 어디에 있어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금방 표시가 날 만큼 하나님을 닮아 가시길 기도하겠습니다.-河-

날마다 새 날을 맞습니다

“날마다 새롭다”는 뜻을 가진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원래 이 말은 주전17세기경 중국 은나라의 탕왕이 세숫대야에 기록했던 “일신일일신우일신(日新日日新又日新)”을 줄인 말입니다. “하루가 새롭고,날마다 새롭고, 또 새롭다”는 뜻입니다.

중국 최초의 고대왕조를 세웠던 은나라의 탕왕은 이 글귀를 청동 세숫대야에 새겨놓고 아침마다 자신을 돌아보고 하루를 새롭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아마 탕왕은 청동대야에 물을 받아 세수를 하면서, 지난 날과 지난 밤의 어두운 일들을 모두 씻어 버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수대야에 새겨진 글귀를 보면서 하루를 새롭게 살려고 결심했을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을 돌아보고 하루하루를 새롭게 살려는 노력덕분에 지금까지 덕이 넘치는 어진 임금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저는 직장 생활을 하다가 뒤늦게 신학을 공부했고 40줄에 들어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처음 목회지에서 겁도 없이 우리 네 식구가 교회를 개척했다가 개척초기에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나중에 교회가 번듯하게 세워졌지만 지금도 개척 당시를 떠올리면 우리 네 식구는 서로를 바라보면서 웃을 뿐입니다. 그 이후로 우리 큰 아들은 목사가 되지 않고 평신도로 봉사하겠다고 합니다.

목회의 길에 접어든지 어느덧10년이 가까워 오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목회는 늘 어렵게만 느껴집니다. 목회 현장에서는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납니다. 마음이 털썩 내려앉아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눈물로 기도할 때가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그때마다 제가 암송하고 묵상하는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3장 23절 말씀입니다.:”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예레미야 애가는 제목 그대로 예레미야 선지자의 눈물의 노래입니다. 애가서는 첫 구절부터 ‘슬프다”로 시작해서 마지막 구절에도 하나님의 진노가 끝나지 않았고 자신들을 완전히 버리셨다고 고백할 정도의 슬픈 말씀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애가서의 한 가운데 위에 인용한 소망의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폐허가 된 예루살렘과 절망 가운데 있는 백성들의 마음속 한가운데 아침마다 새롭게 임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것은 은나라를 세웠던 탕왕이 세수대야에 새겨놓았던 “일신우일신”과 비교할 수 없는 확실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저는 힘들고 낙심될 때마다 이 말씀을 마음 한 가운데 새겨놓고 하루를 새롭게 시작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새로운 힘을 더해 주고 목회와 삶의 현장 한 가운데 소망을 주시는 것을 몸소 체험합니다.

아침이 오는 것이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 만큼 삶이 힘겹고 자신감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무감각하게 아침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일상에 길들여져서 새로움과 삶의 경이로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역시 마음 판에 “일신우일신”이라는 글귀를 새겨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어제가 힘들고 절망 속에 있었어도 오늘은 하나님께서 주신 새날입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아침마다 새롭게 임하는데 우리들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뿐입니다. 날마다 새롭게 임하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체험하고 싶습니다.날마다 새로운 날을 주심에 감격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싶습니다. 주의 성실이 아침마다 크기 때문입니다.(2009년 2월 19일 SF 한국일보 칼럼)

온전한 믿음

지난주까지 수요예배에서는 신약 속에 나타난 아브라함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작년 연말까지 연속으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대해서 설교했고 새해 들어서 신약 속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살펴 본 것입니다. 구약만 생각하면 아브라함은 영락없는 유대인의 조상입니다. 신약에서 비로소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인물로 재해석하면서 아브라함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조상이 되고 우리들 역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3장 6-7절에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라고 분명히 가르쳐줍니다. 아브라함은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계획 속에 등장한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를 통해서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지금 우리 안에서 성취되고 있습니다.

또한 야고보서 2장에서는 아브라함이 단순히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할례를 행하고, 하나뿐인 아들이삭을 바친 신앙의 행위를 통해서 그의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고 가르쳐줍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그 믿음에 걸맞은 행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야말로 신행(信行)이 일치했던 인물이었고 결국 하나님의 벗(God’s friend)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수요예배에서 말씀드렸듯이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후에 지나치게 믿음이 강조되었습니다. 물론 로마서의 말씀대로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율법의 행위나 각자의 행동으로 구원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믿음”속에 행함이 포함되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믿는다고 하면서 신앙과 삶 속에 믿음의 행위가 없는 것은 야고보의 말대로 죽은 믿음입니다. 믿음 뒤에는 반드시 신앙의 행위가 뒤따라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과 행위를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난 한 주간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기사가 모든 신문의 헤드라인으로 장식했습니다. 종교와 신분, 당파와 성별을 떠나서 40만에 이르는 추모객은 물론 국내외의 모든 국민들이 그 분의 소천을 추모했습니다. 그것은 그 분께서 신앙과 삶을 통해서 성직자의 본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요즘 개신교가 사람들의 입방아에 자주 오릅니다. 이기적이고 배타적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런 세간의 비판에 일일이 변명하기보다 삶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세상에 보일 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확고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선한행실로 신앙과 삶 속에 선명히 드러나야 합니다. 그것이 온전한 믿음임 꼭 기억합시다. -河-

마음에 새겨진 말씀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이후에도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그의 백성들을 축복하셨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구약성경의 처음 다섯 권을 모세오경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토라”라고 하는데“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신약성경의 요한복음은 창세기와 똑같이“태초에”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또 다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나중에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처럼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 자신을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신명기 6장 4-9절의 쉐마 역시 하나님 말씀을 들으라는 명령입니다.“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명령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을 듣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귀로 들은 말씀이 마음 판에 새겨져야 합니다.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해야 합니다. 말씀을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내면이 말씀으로 가득차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듣는 것을 넘어서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암송하고, 자꾸만 되새길 때 말씀이 능력으로 우리 가운데 임합니다.

그 다음에는 마음에 새긴 말씀을 밖으로 표현해야합니다. 제일 먼저 가정 안에서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요즘은 가정성경공부가 많이 약해져 있습니다. 가족끼리 모여서 성경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것은 매우 생소합니다. 하지만 말씀 교육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정에서 성경을 공부하면서 자란 자녀들은 훗날 큰 인물이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처음에는 어색할 수도 있지만 가족끼리 성경을 공부하는 시간을 만들어봅시다. 아침에 하나님께 받은 큐티 말씀을 저녁시간에 식구들끼리 도란도란 둘러앉아서 나누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자녀들과 함께 잠언이나 시편말씀을 돌아가면서 읽기만 해도 가정 속에 말씀이 살아 역사할 것입니다.

말씀은 사회 속으로 퍼져야 합니다. 길을 가거나 일터에서도 말씀은 살아있어야 합니다. 마음 판에 새긴 하나님의 말씀을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생각해내고, 최선을 다해서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쉐마의 신앙은 변명이나 핑계대지 않습니다. 그대로 지켜 행할 뿐입니다. 또한 마음 판에 새긴 말씀은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그것을 손목이나 미간에 부치고, 집의 문설주와 문에 붙여 놓고 살라고 교훈합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라는 것입니다. 시시때때로 말씀을 기억해내고 묵상하라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합니다. 말씀을 따라 살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합니다.

다음 한 주간은 서머나 식구들 모두 하루도 빼놓지 마시고 큐티를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매일매일 주시는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고,` 그 말씀을 붙잡고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능력이 그대로 임할 줄 믿습니다. -河-

여호와 닛시

좋은 아침입니다.

미국에 불경기의 먹구름이 짙게 드리우고 있습니다.

실업률이 치솟는 것을 보면서

직장에 다니시는 서머나 식구들과 자녀들을 위해서 저절로 기도하게 됩니다.

지난 번 설교에서 말씀 드렸듯이

경제가 안 좋을 때는 잘 견디는 것도 세상을 사는 지혜입니다.

또한 이럴 때 일수록 불평보다 감사의 말을 주고 받는 것이

서로에게 힘이 됩니다.

이번 주 뉴스위크에는 흥미로운 기사들이 몇 가지 실렸습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사회주의자들이 되고 있다(We are all socialists now)”

약간의 파격적인 커버스토리와 붉은 손과 푸른 손이 서로 악수하는 삽화가

표지를 장식했습니다. 한참을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했습니다.

몇 장을 넘기니 요즘 신학교에 입학하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미국의 신학교들이 전반적으로 10% 정도의 입학신청서가 늘었답니다.

불경기 때나 세상이 뒤숭숭할 때 일어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랍니다.

한계를 느꼈을 때 절대자를 찾는 것은 인간의 회귀본능 같습니다.

그렇다고 신학교 졸업생들이 모두 목회를 하는 것은 아니랍니다.

예일대학 신학대학원을 예로 들면서

절반 정도가 목회를 하고,

나머지 절반은 자선단체나 비영리단체 등에서 일을 하면서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인생을 설계한다는 색다른 조사결과도 보도했습니다.

어려울 때, 한번쯤 멈춰 서서

자신이 걸어 온 인생길을 돌아보고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새롭게 다잡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신학교 기사에서 한 장을 더 넘기니

이번에는 이야기하기(story-telling)”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요즘처럼 어려울 때

예전에 할머니나 부모님들로부터 들었던 얘기를 기억해 보자는 것입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지금의 어려움을 우리 부모님 세대들도 모두 겪으셨습니다.

아니 더 심한 전쟁과 환난도 이겨내셨습니다.

어렸을 때 부모님들께서 들려주시던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힘을 얻고,

우리들 역시 현재의 어려움을 잘 극복해서

자녀들과 후손들에게 용기를 주는 이야기를 남겨 주어야겠습니다.

요즘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 어렵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멈춰 있으면 그것은 말 그대로 패배입니다.

차분하게 어려움에 대처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이겨내야 합니다.

서로에게 좋은 이야기를 해 주면서 격려해야 합니다.

어제 아침에 묵상했던 이사야서 62 10절이

불경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실제적인 교훈을 줍니다.

성문으로 나아가라 나아가라    Pass through, pass through the gates!

백성의 길을 예비하라             Prepare the way of the people.

대로를 수축하고 수축하라       Build up, build up the highway!

돌을 제하라                           Remove the stones.

만민을 위하여 기를 들라        Raise the banner for the nations.

힘들수록 멀리보고 넓게 생각하고

신 하나님의 생각 속으로 들어가시길 바랍니다.

오늘 하루

여호와 닛시,

하나님의 깃발을 높이 들고

주어진 인생길을 힘차게 걸어갑시다.

샬롬

하목사 올림

균형잡힌 신앙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 아침에

새벽기도회에서 이사야서 58장을 묵상했습니다.

이사야서 58장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이 무엇인지 가르쳐줍니다.

금식이라고 제한했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 신앙, 삶으로 넓혀서 생각해도 괜찮습니다.

우리들은 대개 자신의 기도제목이나 문제해결을 위해서 금식합니다.

때로는 자신의 신앙을 위해서 금식합니다.

이처럼 금식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이사야서58장에서는

금식의 지경을 이웃사랑으로 넓혀 놓습니다.

6-7절 말씀을 함께 묵상하고 싶습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꺽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금식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과 지경을 꽤 넓게 펼쳐놓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은 이웃사랑의 실천이 꼭 수반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제가 어렸을 때 다녔던 교회에서는

어르신들께서 금식을 하고 성미를 교회에 헌물하셨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와 당시 감리교인들은 일주일에 한번씩 금식했는데

금식해서 절약된 식량으로 가난한 이웃을 섬겼습니다.

요즘은 금식이나 우리들의 신앙이

많이 개인주의화, 이기주의화 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이 아침에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 보고

하나님과의 튼튼한 관계와 더불어

이웃과의 관계도 아름답게 세워나가는

균형잡인 신앙을 갖기로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때 임하는 은혜가 이사야서 58 8 절 이하에 나옵니다.

그 중에 11절 말씀을 갖고 여러분들을 축복하고 싶습니다.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아멘

하목사 올림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본문인 신명기 6:4-9을 쉐마라고 부릅니다. 쉐마라는 말은 오늘 본문의 첫 단어가 히브리어“쉐마”로 시작된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히브리어 쉐마는 “들으라(listen)”는 뜻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들으라는 것일까요? 그것은 제일 먼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들으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고, 우리를 인도하셨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을 우리가“주님”이라고 부르고“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오직 한분뿐이십니다. 여기서 유일신 신앙이 나왔습니다. 우리들은 오직 한분뿐인 하나님을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믿음은 하나님께 집중되어야 하지 세상의 어떤 것을 하나님 대신 믿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곧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오직 한 분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심을 믿는 것이 쉐마의 첫 번째 교훈입니다.

둘째로 쉐마의 구체적인 내용이 6장 5절에 나옵니다:“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쉐마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으로 집약됩니다. 사랑하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아하브”에는 여러 가지 뜻이 들어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말은“미워하다”의 반대말로 사람들끼리 서로 아끼고 사랑할 때 사용합니다.

또한 아하브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임한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하브에는“음식 등을 맛보다”라는 뜻도 들어있습니다. 사랑은 체험해야 하고 상대방이 맛볼 수 있을 만큼 느껴져야 합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언약을 맺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한분뿐인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마음을 다해서, 성품을 다해서, 그리고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쉐마는 이처럼 우리의 모든 것을 드려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느끼실 정도록 사랑하라는 교훈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진실되고 뜨겁게 사랑할 때, 도리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임하게 됩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주셨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향해서“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더불어 나눈 사랑을 세상 속에서 실천합니다. 여기까지 나간다면 세상 사람들이 저절로 하나님께 돌아올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과 신앙생활의 클라이맥스입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