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숨의 기도

좋은 아침입니다.

한 해가 이렇게 저물어 갑니다.
제가 오늘 신문 칼럼에도 썼듯이
우리에게는 언제나 아쉬움과 조금 심한 경우 후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 감사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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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포스터라는 분은 그의 책 기도(Prayer)”에서
단숨의 기도라는 기도의 방법을 소개합니다.

단숨의 기도는
아주 짧고 한 숨에 드릴 수 있는 기도입니다.
단숨에 말할 수 있는 짧고 간단한 간구의 기도
바로 단숨의 기도입니다.

하루 동안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때마다 아주 짧은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 주옵소서.
하나님, 제게 힘을 주옵소서.
하나님, 이 어려움에서 건져주옵소서.
하나님, 제게 온순함을 가르쳐주옵소서.
하나님, 우리 아이들에게 지혜를 주옵소서.
하나님, 우리 사업장을 지켜주옵소서.
하나님, 제가 주의 일꾼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는 얼마든지 단숨의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 기도에 우리의 힘과 마음을 쏟아 부으면
비록 짧은 기도지만
초점 없이 드리는 긴 기도보다 능력이 있습니다.

데오폐인이라는 수도사는 단숨의 기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머리 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모기들처럼 계속해서 다툴 때,
이 싸움을 없애려면 마음을 단 한 가지 생각에만 고정시켜야 한다.
이 일을 돕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은 짧은 기도이다.
그 기도는 마음을 단순하게 그리고 집중하게 한다. (170)

하나님 앞에
단숨의 기도를 드리면서
한 해를 정리하고
새 해를 준비하시는 서머나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

샬롬

하목사
(2008. 12.18일 이-메일 서신)

아쉬움을 넘어 감사를…

어떤 사람이 사막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내려 쪼이는 햇볕과 뜨거운 모래의 열기를 참고 여행하다 보니 기진맥진해서해가 떨어지자마자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꿈결에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일 해가 돋거든 당신의 주머니마다모래를 가득 채우시오. 분명 좋은 일이 있을 것이요사막이야 널린 것이 모래 아닙니까? 여행자는 다음 날 아침 동이트자마자 주머니에 모래를 가득 채웠습니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모래가 주머니에 가득 채워져 있으니걷는 것이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조금 걷다가 모래를 적당히 덜어내고 밤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이튿날 잠에서 깨어났을 때 다이아몬드 몇 개가 바닥에서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깜짝놀라서 일어나 보니 주머니에서 다이아몬드, 에메랄드, 진주와 같은 보석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주머니의 모래들이모두 보석으로 변한 것입니다. 여행자는 땅을 쳤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중간에 모래를 버리지 말았어야 했는데,주머니가 많이 달린 옷을 입고 왔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왕이면 커다란 자갈을 짚어 넣을 걸 등등 아쉬움과 후회에털썩 주저앉아서 가슴을 쳤습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여기저기서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들의 한결같은 교훈은 욕심에 대한 경계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더 가지려는 소유욕이 있습니다. 옛 어른들의 표현을 빌리면 “움켜지려는 마음”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주머니 속에 있는 보석들도 공짜로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잃어버린 것에 미련을 둡니다. 그러다 보니 아쉬움과 후회가 밀려옵니다. 대신에 감사하는 마음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집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지나간 날들을 돌아보면 아쉬운 것이 많습니다. 특히, 올 해는 쓰나미처럼 갑자기 밀어닥친 금융위기와 경제불황으로 사막과 같은 광야길을 걸어 왔기에 아쉬움이 더욱 큽니다. 그 가운데 흘러 보낸 시간이 매우 아쉽습니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면서 허무하게 흘러 보낸 시간들을 떠올리면 하나님께 부끄러울 따름입니다.부지런히 살겠노라고 새해에 결심했지만 편한 것을 추구하는 천성이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었습니다. 분주하게 살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한 시간들도 많습니다. 내 뜻대로 살아 보려고 발버둥치고 내 이름을 드높이려고 열심히 뛰어다녀봤지만 허전함만 남아 있습니다.

한 해를 보내고 나서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시니라는 잠언말씀의 의미를 새삼 깨닫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아쉬움이 밀려들지만 거기에 매여 있는 것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애를 쓰고 순간순간 알차게 계획하며 살았다 해도 아쉬움은 늘 남는 법입니다.

이제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아쉬운 일보다 감사한 일들을 기억해 내고 싶습니다. 우선 마음 속에 감사 주머니를 하나 만들어 놓는 겁니다. 그리고 가정적으로, 직장과 사업 속에서 감사하고 기뻤던 일들을 감사 주머니에 담아보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끝까지 채울 수 있을까 걱정도 되지만, 올 초부터 지금까지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려보면감사 주머니가 순식간에 가득 찰 겁니다. 그 주머니를 가슴에 안고 기우뚱거리면서 하나님 앞에 나오는 순간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2008.12.18 SF한국일보 칼럼)

감찰하시는 하나님

좋은 아침입니다.

요즘은 교회의 예배처소를 찾는 것이
최고의 기도제목이자 관심사입니다.
church search team에서 부지런히 찾고 계시고
온 성도님들께서 함께 기도하시니
가장 적합한 예배처소가 찾아질 줄 믿습니다.

지난 화요일 새벽기도회에서는
이사야서 18장을 함께 묵상했습니다.
구스 즉 이디오피아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었습니다.
18 4절에는 하나님께서
구스의 모든 일을 감찰하고 계시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감찰하다는 표현을 붙잡고 묵상했습니다.

구스를 감찰하신 하나님의 눈길은 심판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 밑에 있는 구스의 죄까지 감찰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눈길을 피할 수 없었지요.

한 해를 마감하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께 숨길 것이 없습니다.
생각나는 죄와 부끄러운 일들을 낱낱히 회개하고 새해를 맞읍시다.

감찰하시는 하나님!
은혜의 말씀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조용히 내려다보시고,
지켜보신다는 뜻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눈길은 우리에게 은혜로 임합니다.
하나님의 눈길은 우리 삶을 환하게 비춥니다.
하나님의 눈길은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스폿라이트하시며 인도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눈길이 임하는 곳에 위로가 있고 하늘의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서 우리 서머나 식구들을
감찰하시고 꿋꿋하게 지켜주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내가 새벽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거할찌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139 1, 9-10)

샬롬

하목사

(2008.12.12
메일 서신)

질그릇 인생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7절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질그릇에 비교했습니다. 바울이 살던 로마시대에 질그릇은 당시의 귀족들이나 부자들이 사용하던 구리그릇이나 금은 그릇에 비해서 평민들이 사용했습니다. 질그릇은 구리그릇에 비해서 쉽게 깨졌습니다. 또한 질그릇을 만드는 원료인 진흙을 쉽게 구할 수 있었고 만드는 과정도 간단해서 가격이 저렴했습니다. 따라서 질그릇에 보화를 비롯한 귀한 물건을 담아놓는 것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이 우리들을 질그릇에 비유한 것은 매우 적합한 표현입니다. 우리들은 실제로 흙으로 빚어졌고 흙으로 돌아가야 할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사소한 충격에도 쉽게 부서지는 말 그대로 질그릇들입니다. 우리의 인생길도 질그릇처럼 투박하고 때로는 부서지고 깨지면서 힘겹게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그릇의 가치는 무엇으로 만들어져있느냐에 의해서 결정되기보다 그 안에 무엇을 담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도바울은 질그릇 안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화가 담겨져 있다고 선포합니다. 보화를 담을 수 없는 질그릇이지만 보화를 담는 그릇으로 하나님께서 그릇의 용도를 바꿔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담겨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들의 가치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질그릇으로 높아졌습니다. 이것이 은혜요 그리스도인들이 제일 먼저 감사해야 할 고백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창세기 20장 속의 아브라함은 영락없는 질그릇입니다. 그동안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체험했고, 하나님을 만나서 대화도 나눴고, 이삭을 낳게 될 것이라는 약속도 받았습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차근차근 견고하게 빚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아브라함은 처음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서 이집트로 피신 갔을 때처럼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잘못을 범합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이 도루묵이 되는 듯해서 본문을 읽고 있는 우리들의 마음도 안타까울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브라함이든 우리들이든 질그릇 인생의 한계입니다. 질그릇이 아무리 뛰어나도 구리그릇이 될 수 없듯이, 우리들 역시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수준에 올라갈 수 없음을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질그릇은 말 그대로 질그릇입니다. 아브라함도 같은 실수를 범하는데 우린들 오죽하겠습니까? 우리들 자신이 질그릇임을 인정하고 스스로 가치를 높이려는 노력을 접어야 합니다. 대신에 우리 안에 담겨진 보화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 한 가운데 와 있습니다. 비록 질그릇 인생들이지만 우리 안에 예수그리스도께서 편안히 거하실 수 있도록 정결한 마음을 준비하고 각자의 삶을 돌아보아야겠습니다.-河-

2008년의 마지막 달을 맞으며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네 번째 맞는 연말입니다. 동부와 중서부에 있을 때는 11월만 되면 기온이 내려가고 눈이 오는 것을 보면서 겨울이 찾아왔음을 실감했습니다. 연말연시는 늘 그렇게 겨울의 한 가운데 있었기에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찾아옴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시사철이 비슷한(물론 샌프란시스코의 겨울은 체감온도가 무척 차갑지만) 서부에 와서는 연말이 다가오는 것도 모른 채 새해를 맞곤 합니다. 그러다보니 두루뭉술하게 한 해를 마무리할 때도 있습니다.

올 해도 한 달 남았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다사다난한 2008년이라는 표현이 맞을 겁니다. 교회적으로도 올 한 해를 은혜 가운데 잘 견뎠고 우리 안에 꿈틀거리는 부흥의 기운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 하나님께서 핏값으로 세우신 교회를 책임지심을 체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뿐 아니라 우리들 각자의 삶도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니 모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진실하고 성실하게 주어진 삶을 살면서 한 해를 마무리해야겠습니다.

2008년의 마지막 달인 12월을 맞으면서 여느 해와 똑같이 서머나 식구들께 세 가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로
, 12월 한 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큐티를 하시기 바랍니다. 이왕이면 큐티하면서 느낀 점들을 결단의 기도와 더불어 짧게 기록해 놓으시길 바랍니다. 교회 홈페이지에 각자의 큐티를 올려서 함께 나누어도 좋겠습니다. 특별히 12월 한 달 동안 주보의 “첫 아침을 주님과 함께”의 순서대로 잠언을 하루에 한 장씩 묵상해 가면서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삶의 지혜를 습득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 연초에 약속한 것들을 되새기고 그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선 하나님 앞에서 드린 약속과 서원이 있다면 한 해가 가기 전에 지켜야합니다. 가족을 비롯한 이웃에게 한 약속도 슬며시 넘어가지 말고 성심껏 지켜야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했던 약속도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2008년에는 정기적으로 운동을 하기로 하였는데 그동안 지키지 못했다면 12월 한 달 만이라도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보십시오.

셋째로
, 선한 일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올 해초 설교를 하면서, 평생 동안 하나님과 자기 자신만 아는 선한 일을 한 가지씩 정해서 그것을 실천해 보시기를 부탁드렸습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은 모르고 오로지 하나님과 자신만 알기에 이다음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 앞에 펼쳐 보일 수 있는 은밀한 선행입니다. 아무쪼록 12월 한 달 동안 하나님께만 칭찬받을 수 있는 선한 일을 은밀히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누구보다 자신이 기쁘고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뿌듯하실 겁니다.

서머나 식구들 모두 하나님 앞에서 2008년의 마지막달을 알차게 보내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河-

하나님의 열심

Happy Thanksgiving!

1.
추수감사절 weekend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 목회서신에서 말씀 드렸듯이
적어도 이번 한 주간은
하나님과 이웃들에게 감사의 고백만 하면서 지내자고 했습니다.

감사의 말만 하는 것이 저 역시 쉽지 않더군요.
하지만 감사하려는 마음을 갖게 되고
감사의 자리로 돌아오려고 노력하는 제 모습을 보면서
결심이 중요함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남은 이틀 동안도 더욱 더 감사하면서 삽시다.

2.
다음 주일부터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강절이 시작됩니다.

오늘 아침에 묵상했던 이사야서 9 6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예언이 나왔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 정사를 매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추수감사절이 지나면 이제 곧 성탄절 시즌이 다가옵니다.
올 해는 미국의 경제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더욱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우리 마음 깊이 다가오고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이 그립습니다.

3.
이사야 9 7절 후반절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열심(The zeal of the Lord)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을 따라 사는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강인합니다.
행복합니다.
감사할 줄 압니다.

요즘 우리 모든 성도님들께서
릴레이로 금식을 하면서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책상 위에 펼쳐진 금식기도표를 보면서
싸인업하신 성도님들을 위해서 저절로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 교회의 모든 기도제목을
가장 선한 것으로 이루어가실 줄 믿습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아서
편하게 쉬고 있는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고
그 열심으로 우리의 모든 인생길을 친히 이루어가심을 믿고 감사합시다.

샬롬

하목사
2008.11.27 이-메일 목회서신

순례자들의 추수감사

올해는 추수감사절을 맞는 우리들의 마음이 그리 편치 않습니다. 좀처럼 흔들릴 것 같지 않던 미국경제가 불안감에 휩싸여있습니다. 월가에 불어 닥친 금융위기는 우리네 서민들의 삶 속까지 파고 들었습니다. 경제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가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가운데 추수감사절을 맞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400여년 전 유럽에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신대륙으로 이주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신대륙에서의 새로운 삶을 향한 커다란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순례자들(Pilgrims)”이라고 불렀습니다. 우선, 영국 성공회에 반대해서 네덜란드의 레이든이라는 지역에 살고 있던 일단의 청교도들이 신대륙에 가기 위해 스피드웰이라는 배로 영국 런던에 도착했습니다. 영국 런던에서 메이플라워라는 무역 선을 하나 더 빌려서 두 대의 배로 대서양을 건널 예정이었습니다.

신앙의 자유는 물론 생사가 걸린 순례길이였으니 얼마나 철저히 준비하였겠습니까? 하지만 처음부터 어려움이 닥쳐왔습니다. 우선 스피드웰이라는 배에 문제가 생겨서 대서양을 건널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할 수 없이 메이플라워호에 짐과 102명의 순례자들이 옮겨 타고 한대의 배로 대서양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대서양을 절반쯤 건넜을 때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102명의 승객 가운데 한 명은 거친 폭풍에 바닷속으로 빠졌다가 간신히 살아나기도 했습니다. 노약자들은 심한 뱃멀미로 고생을 했습니다.

항해 도중에 임신부 가운데 한 사람이 아이를 낳아서 102명으로 시작된 순례길이 새 생명의 탄생과 더불어 103명으로 마칠 것 같은 기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대륙에 도착하기 5일 전에 한 명이 목숨을 잃고 102명의 숫자를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이들은 원래 계획한대로 뉴욕의 허드슨강에 도착하려 했지만 북쪽 보스턴 근교의 케이프 코드에 닻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해 겨울을 비좁은 배 안에서 보내면서 순례자들 가운데 절반이 폐렴과 전염병 등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처럼 추수감사절의 유래 속에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나선 순례자들의 아픔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들은 66일 동안 대서양의 거친 파도와 싸웠습니다. 죽어가는 신앙의 동지들을 가슴에 묻으면서 어떻게든 신앙의 꿈을 펼치려 사력을 다했습니다. 원주민의 도움을 받는 행운도 있었지만 낯선 환경을 개척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첫 번째 추수감사절을 보내는 순례자들의 마음은 말 그대로 만감이 교차했을 것입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신대륙에 왔던 순례자들의 계획이 조금씩 어긋나고 목적지까지 변경된 것을 보면, 신앙의 순례길이 뜻대로 되지 않음을 발견합니다. 절반이 목숨을 잃은 것을 보면서 신앙을 찾아 떠나는 순례길의 험난함과 아픔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걷는 신앙의 순례길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400년 전 신대륙에 도착한 순례자들이 모진 역경을 이겨내고 첫 번째 추수감사절을 지켰듯이, 우리들 역시 어떤 어려움과 희생이 닥쳐와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서로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다면 감사의 축제를 벌일 날이 우리 앞에 분명히 찾아 올 것입니다.

2008년 추수감사절을 보내면서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희망이라는 두 글자를 아로새겨 놓았으면 좋겠습니다.(2008. 11. 20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감사절에…

올 해도 어김없이 추수감사절이 찾아왔습니다. 시간이 매우 빠르게 흘러감을 다시 한 번 실감합니다. 이처럼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을 대하는 태도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지나간 시간을 두고 아쉬워하는 사람입니다. 이루지 못한 것을 두고 아쉬워합니다. 자신에게는 불행한 일만 닥쳤다고 운명을 두고 한탄합니다. 자신의 선택을 놓고 후회할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지나온 시간을 두고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뒤를 돌아보면 아쉬운 일도 많고 후회할 일도 많지만 그 속에서 감사할 일을 찾는 사람입니다. 모래 속에 금이 숨겨져 있듯이 우리의 삶이 모래알처럼 까칠하고 부석거려도 그 안에 감사라는 보석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을 찾아서 헤아리고 귀하게 간직할 줄 아는 사람이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으면서 우리 교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들은 올 한 해도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성도님들께서 한 마음으로 어려운 기간을 잘 견디셨습니다. 무엇보다 매 주일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수요예배에서는 소예언서 공부를 시작할 만큼 믿음이 자랐습니다. 지속적으로 성경공부도 진행되어서 이제 내년쯤에는 제자훈련을 시작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새벽기도회와 금요심야기도회를 통해서 교회가 기도로 세워짐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중고등부 학생들은 친 전도사님의 영적 지도하에 신앙이 자라고 있습니다. 청년부도 선생님들의 헌신적인 섬김으로 새벽이슬 같은 주님의 청년으로 훈련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교회를 은밀히 섬겨주시는 성도님들 덕분에 저는 한결 가볍게 목회할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하니 교회적으로 감사할 일이 참 많습니다. 저 역시 서머나 교회에서 목회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서머나 식구들 각각의 삶을 돌아봅니다. 금융위기와 경기침체의 여파가 가계가 밀려왔습니다. 모든 이민생활이 그렇듯이 하루 하루의 삶이 그리 녹록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 가운데 무거운 마음으로 추수감사절을 맞고 계신 분들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힘을 내십시오. 거기서 멈춰계시면 과거를 두고 아쉬워하는 유형의 삶을 살게 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삶의 유형을 감사하는 삶으로 바꾸어야합니다. 삶 속에 숨겨진 감사의 제목들을 캐내고 그 안에 깃든 하나님의 손길과 은혜를 헤아려보는 것입니다. 어두운 곳을 보지 않고 밝은 곳을 보면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마음에 품고 꿋꿋하게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다음 한 주간은 감사할 일들만 생각해 봅시다. 하루에 수백 번이라도 하나님 앞에 감사의 고백을 해봅시다. 감사 속에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河-

거룩한 씨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은 새벽기도회 시간에

이사야서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잠언, 전도서, 아가서와 같은 성문서를 묵상하면서

삶의 구체적인 교훈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왠지 영적으로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서에 들어오면서

예언자의 말씀이 영혼 깊숙이 다가옴을 느낍니다.

예언서 말씀이 그리 쉽지 않지만

그래도 구절 구절이 우리의 영혼을 적시고

깊은 영성의 세계로 인도해 줍니다.

2.

내일 새벽기도회 말씀을 준비하면서

너무 좋은 표현을 발견했습니다.

이사야서 6장은 이사야 선지자가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Here am I. Send me.)”

라고 응답하면서 예언자로 부르심을 받는 귀한 말씀입니다.

이사야를 예언자로 세상에 보내시는 하나님께서

세상이 하나님을 등지고 많이 어그러졌지만

그 속에 하나님께서 거룩한 씨를 숨겨두셨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 중에 십 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 <?xml:namespace prefix = st1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smarttags” />6:13]

 

3.

요즘처럼 기독교가 세상 속에서

천덕꾸러기가 된 적도 없습니다.

교계를 둘러보아도

우리 주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돌아보아도

실망감이 몰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눈은

어그러지고 부숴진 세상이나

그릇된 신앙에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땅에 간신히 남아있는 그루터기,

아니 땅 속에 숨어있는 거룩한 씨를 주시하고 계십니다.

그루터기에서 싹이 나고,

거룩한 씨가 대지를 뚫고 나와

새들이 깃드는 커다란 나무가 될 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서머나 식구들과 우리 교회가 그루터기처럼

하나님께 쓰임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거룩한 씨가 되어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거룩한 씨를 품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힘차게 살아가시길 뒷전에서 기도하겠습니다.

샬롬

하목사

2008.11.20 이-메일 목회서신

성숙함을 향하여

신앙생활을“성숙함으로의 여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에서는 젖을 먹는 갓난아이 신앙부터 딱딱한 음식을 먹는 장성한 신앙까지 자라야한다고 교훈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우리의 신분이 종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변화된 것입니다. 오늘 예로 들었듯이 거지가 왕자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신분이 바뀌었지만 그의 성품이 모두 바뀐 것은 아니어서 미숙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미숙한 신앙의 특징은 자기중심적이라는 점입니다. 기도의 내용은 대부분“주세요”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축복이라는 말에 집착하고, 희생이나 고난이라는 말에는 부담을 느낍니다. 자신의 주장이나 말이 교회 안에서 받아드려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합니다. 미숙한 신앙은 공동체 속에서 분열과 갈등, 비난과 미움을 일으킵니다. 시기와 질투 역시 미숙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무엇보다 미숙한 신앙은 공동체는 물론 세상 속에서 사람들의 낯을 찡그리게 만듭니다. 이처럼 미숙한 신앙은 삶이 뒷받침되지 않습니다. 신앙의 연수와 상관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미숙한 신앙에 머물러있는 경우를 봅니다. 요즘 기독교가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것도 그리스도인들의 미숙한 신앙 때문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 16장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미숙한 행동을 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는 하갈이라는 종을 아브라함에게 주어서 대를 잇게 합니다. 아브라함의 아이를 잉태한 하갈이 안주인 사래를 멸시합니다. 하갈의 멸시에 마음이 상한 사래는 남편 아브라함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아브라함은 사래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무책임한 행동을 합니다. 이번에는 사래가 하갈을 학대합니다. 하갈은 주인의 아이를 잉태한 채로 광야로 도망갑니다. 성숙하게 행동한 인물이 한 명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처럼 성숙하지 못한 행동을 하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영적 건망증이 도져서 하나님을 잠시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면 영락없이 미숙한 일에 휘말립니다. 둘째는, 믿음에 걸맞은 성품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믿음에 비해서 성품이 자라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약속이 당장 이루어지지 않아서 조급해 할 때 미숙한 행동을 합니다. 서두르면 그릇된 판단과 행동을 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미숙함도 온전한 신앙에 이르는 한 과정입니다. 창세기 16장에서 하갈을 위로하시고 다시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내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미숙한 신앙 속에서도 역사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성숙함을 향해서 앞으로 나가려는 마음가짐과 노력입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