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단비

*매주 금요일 아침 이-메일보내드리는 편지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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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가

우기(雨期)에 접어들었습니다.

지난 토요일에는 비가 하도 많이 와서

주일에 꼭 비가 그치기를 기도했었습니다.

주차사정이 어려운 우리 교회인데

비까지 오면 서머나 식구들께서

교회에 오시기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지난 주일은 날씨가 참 좋았지요!*^^*

비가 오기 시작하니 세상이 푸르러지고 있습니다.

새벽기도회를 끝나고 공원에 가보니

나무들이 생기를 되찾았습니다.

여름철에

나뭇잎은 약간씩 축 늘어져있었습니다.

푸르기는 하지만 생기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비가 오기 시작하니

나뭇잎들이 힘을 얻었습니다.

2.

나뭇잎들에게 단비가 내렸듯이

우리 서머나 식구들께도

은혜의 단비가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추수감사절이 있는 11월을 맞아서

감사의 단비도 촉촉히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11월 한달 동안은

감사한 일들만 생각하면서

매사에 감사하면서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 위에는

성령의 소낙비가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교회의 표어대로

“성령의 임재와 역사”가 충만이 임했으면 좋겠습니다.

미국에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사는

미국에 희망의 단비가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3.

한 주간을 마무리하면서

시편 16편 11절을 함께 묵상하기 원합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You have known to me the path of life;

You will fill me with joy in your presence,

with eternal pleasures at your right hand.

샬롬

하목사
2008.11.6

하나님의 섭리와 약속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을 보여주시면서 후사를 약속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아만”이라는 히브리어에서 우리가 모두 아는 말인“아멘”이 나왔습니다. 아멘은 진실로(truly)라는 뜻입니다. 특히 아멘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약속이 분명히 이루어질 것을 믿을 때 드리는 입술의 고백입니다. 기도 속에서는 진실된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고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해서 간구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몸에서 후사가 나온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아멘“으로 응답했습니다.

약속을 믿은 아브라함을 의롭게 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식을
거행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더욱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성껏 제물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솔개가 제물위에 내려앉았습니다.아브라함이 솔개를 쫓았지만 좋은 징조는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아주 큰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들이 이방땅 이집트에서 400년간 종살이하다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시 가나안 땅에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솔개를 쫓았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시고 아브라함이 밟고 있는 땅을 후손들에게 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섭리(providence)안에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세상 모든 역사 속에 하나님의 뜻이 깃들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본문 속에서 아모리 족속의 죄가 언급되고 이방나라들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나온 것 역시 하나님께서 세상을 주관하고 계심을 나타내줍니다. 또한 아브라함과 함께 하시고 그의 모든 것을 보고 계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지켜보십니다.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그들을 구원해주십니다.

세상 속에 깃든 하나님의 뜻을 일반적인 섭리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뜻을 특별섭리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처럼 세상만사와 우리 각자의 삶에 뜻을 두시고 그것을 이루어가십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준비한 제물 사이를 하나님의 임재 상징인 불꽃이 지나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뜻을 섭리 가운데 친히 이루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렇듯이 우리들 역시 약속의 자녀들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가운데서도 자신의 약속을 친히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 약속을 누리고 체험하는 길은 매사에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와 서머나 식구들 한 분 한분 위에 하나님의 섭리와 약속이 분명히 드러나기를 기도하겠습니다.-河-

하나님의 약속

수요예배에서 배우는 호세아서에 의하면 이스라엘은“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었기 때문에 멸망했습니다. 진실이 믿음이라면, 인애는 헤세드라고 불리는 변치 않는 사랑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도 예외가 아닙니다. 옳고 그름의 진실과 믿음이 퇴색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을 이웃에게 전해야 하지만, 자기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던 아브라함만큼이나 우리들 역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많이 부족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알아야 합니다. 삶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적인 지식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매우 부족합니다.

신앙은 인간의 실존과 한계를 뛰어넘는 놀라운 경험입니다.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아멘”으로 순종하며 나갈 때 신앙은 성장합니다. 우리가 연속해서 살펴보는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떤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도하심에 점차적으로 순종해 가면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빚어 가시는 하나님은 매우 신실하십니다.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반복해서 확인해 주시면서, 아브라함이 곁길로 가지 않도록 도와주십니다. 오늘 함께 살펴본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이번에는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들을 보여주시면서 그의 후손이 그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생생하게 약속하십니다. 갖가지 제물을 준비하게 하시고 그 위에 불로 지나게 하심으로 아브라함 앞에서 눈에 보이는 언약식을 거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는 이유는 아담과 이브 이후에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헤세드)때문입니다. 또한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들을 기억하고 아브라함에게 분명히 이루어질 것을 재차 확인해 주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그가 선택한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는 분입니다. 자신이 맺은 언약을 역사 속에서(개인의 삶 속에서) 이루시는 분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배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과도 언약을 맺으시고 그것을 지키십니다. 가장 크고 귀한 언약은 구원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들 각자의 삶 속에 임하는 하나님의 약속들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세상 속에서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인생을 살기 원하시기 때문에 친히 약속을 이루어가십니다. 할렐루야!-河-

멜기세댁을 만난 아브라함

우리의 인생을 만남의 연속이라고 정의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첫 번째 만남은 부모님과의 만남입니다. 부모님과의 만남은 태어나면서 곧바로 시작되는 일종의 숙명적 만남입니다. 성장해 가면서 친구들을 만납니다. 특히 사춘기를 지나면서 어떤 친구를 만나는가에 따라서 인생관이 바뀔 만큼 친구와의 만남은 중요합니다. 친구의 만남과 더불어 좋은 스승을 만날 수 있다면 더 없는 축복입니다. 자신의 인생길을 올바로 제시하고 인도해줄 스승 또는 인생의 멘토를 갖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행복입니다. 부모님 다음으로 숙명적인 만남이 있다면 그것은 배우자와의 만남입니다. 평생을 함께 동반자로 살아갈 아내와 남편을 만나는 것은 그 어떤 만남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귀한 만남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길에서 가장 중요한 만남이 한 가지 더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부모님과의 만남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맺어진 숙명적 만남이라면, 하나님과의 만남은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까지 이어지는 영생의 만남입니다. 부모님과의 만남을 우리가 선택할 수 없지만, 하나님과의 만남은 우리의 선택사항입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만남은“거듭 태어남(born again)”이라고 불릴 정도로 모든 것이 새롭게 펼쳐지는 출발점입니다.

창세기 14장의 아브라함(당시는 아브람)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목에서 멜기세댁이라는 살렘왕이자 제사장을 만납니다. 오늘 본문은 물론 역사적인 자료를 살펴보아도 멜기세댁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인물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7장에서 예수님을 멜기세댁에 비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신 것처럼, 멜기세댁이 아브라함을 하나님께로 인도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지만 자신이 부르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확실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멜기세댁과의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을 “천지의 주재요 가장 높으신 여호와”라고 자신의 말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브라함을 찾아온 멜기세댁 왕은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봐도 틀림이 없습니다.

멜기세댁을 통해서 하나님을 확실히 알게 된 아브라함은 소돔왕을 향해서 더 이상 사람의 힘을 빌어서 부자가 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전합니다(창14:23). 세상 속에서 사람이 아니라 천지의 주재요 가장 높으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겠다는 선포인 셈입니다. 하나님을 확실히 만나고,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깨닫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기로 결심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담대한 선언입니다.-河-

고통 가운데 계신 분들께

지난 주에 시립 도서관에 들렸다가 표지가 온통 푸른 색인 책을 발견했습니다. 무심코 손에 들고 서문을 읽고 있는데 마음에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책 제목이 에밀리 디킨슨의 시(詩)에서 따온 Blue Peninsula였습니다. 우리 말로 번역하면 “푸른 반도”라고 해야 할까요? 병명을 알 수 없는 불치병으로 육체와 생명까지 마비되어가는 아들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마음을 글로 옮긴 책이었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하도 잘 웃어서 “이삭”이라고 이름을 지었답니다. 이삭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 100세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그만 웃어버립니다. 그래서 아들 이름이 “웃음”이란 뜻의 이삭이 되었습니다. 책 속의 이삭이는 14살까지 이름처럼 잘 웃고 밝은 아이로 건강하게 자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이삭이가 다리를 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몸이 비틀리고 걷기 조차 힘들게 되었습니다. 여러 유명한 의사들을 찾아갔지만 병명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몸은 정상이 아니었어도 정신이 살아있으니 아들을 대학에 보냅니다. 그런데 입학해서 3개월이 지났을 때 학교로부터 정신질환이 있어서 더 이상 학업이 불가능하다는 연락을 받습니다. 퇴행성 치매증세가 나타나서 생각이 멈추고 기억력이 급격히 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왜 그런 현상이 이삭이에게 생겼는지 아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이름조차 모르는 불치병을 8년째 앓고 있는 아들을 둔 어머니는 자신의 심정을 칼 필립스라는 시인의 싯구를 인용해서 세상에는 “숨도 쉴 수 없는 제4의 장소”가 있는 것 같다고 토로했습니다. 그래도 이 어머니는 자신의 책 마지막 장에 세 가지 단어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평안(peace), 소망(hope), 기쁨(delight).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한 것들은 대개 육체나 마음에 심한 고통을 주기 마련입니다.때때로 신앙으로도 견디기 힘들 만큼 어려운 순간이 찾아옵니다. 원인도 모르고 끝도 보이지 않으면서 점점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고통의 순간들입니다. 시인의 말처럼 세상에는 숨을 쉴 수 조차 없는 제4의 장소가 있는 듯 합니다. 이처럼 모든 인생길은 힘겹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인생의 파도는 끊임없이 밀려옵니다. 그때마다 혼자만 어렵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일을 하는 목사인 저도 견디기 힘들만큼 어려울 때가 있답니다. 물론 극단적인 생각은 금물입니다.<?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대학 1학년 때, 영어 교과서에서 읽었던 “The show must go on(쇼는 계속되어야 한다)”이라는 문구가 생각납니다.혹시 지금 너무 힘드십니까?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펼쳐주신 인생의 무대에 다시 올라가십시오.여러분의 그 모습을 보고 힘을 얻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골방에서 기도해 주시는 분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설령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 없어도 너무 외로워하지 마십시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여러분 편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 여러분의 오른손을 붙잡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주 너의 하나님이다. 내가 너의 오른손을 붙잡고 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돕겠다.”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xml:namespace prefix = st1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smarttags” />2008.10.16)

하나님의 사람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면서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려던 아브라함! 이집트에 내려가면서 보여주었던 아브라함의 행동은 매우 실망스러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순간에도 아브라함과 함께 계셨고 바로 왕으로부터 사래를 구출해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돌아온 아브라함은 벧엘이라는 곳에 정착했습니다. 그곳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곳입니다. 아브라함이 다시금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예배했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집트에서 가져온 재산이 화근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재산이 많아지면서 종들이 서로 영역싸움을 하였습니다. 지난번의 문제가 가뭄 때문에 음식이 부족해서 생겼다면, 이번에는 재산이 너무 많아져서 야기된 문제였습니다. 지난번에는 아내 사래와의 문제였다면, 이번에는 조카 롯과의 문제였습니다. 이처럼 신앙의 여정에는 문제가 찾아옵니다. 따라서 문제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중요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이제 서로 다른 지역에서 각자 생활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많이 변해있습니다. 이전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모습은 온데간데없습니다.“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13:9) –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선택권을 줍니다. 당시의 관습상 가장인 아브라함은 조카에게 선택권을 부여할 이유가 조금도 없었습니다. 이집트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아브라함의 성품이 넉넉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롯은 물이 많고 비옥한 평지를 택합니다.

조카 롯이 떠나고 아브라함이 혼자 남아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십니다. 아브라함이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의 모든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시면서 그 땅을 한번 밟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다시 한 번 약속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언제나 아브라함과 함께 하셨고 그를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경험하는 축복입니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선택권을 양보했지만 그는 대신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땅에 살고 있든지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다시 그곳에 단을 쌓고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의 신앙은 조금씩 자라갔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으로 빚어가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삶입니다. -河-

아브라함의 실수

세상에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루의 삶을 돌아보면 실수의 연속이었음을 발견합니다. 운전하면서 실수하고, 사람들을 만나서 말로 행동으로 실수하고, 사업장이나 직장에서 실수를 해서 손해를 보기도 합니다. 아무리 완벽한 사람도 실수하게 마련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실수를 했습니다. 그것도 일반인들이 하기 힘든 매우 큰 실수를 범했습니다. 자기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도착하자 그곳에 아주 큰 가뭄이 찾아왔습니다. 가나안 땅은 지중해성 기후로 캘리포니아와 마찬가지로 겨울과 초봄이 우기입니다. 그때 비가 오지 않으면 일 년 내내 비를 볼 수 없는 극심한 가뭄에 시달려야 합니다. 가뭄이 들자 아브라함은 가족을 이끌고 이집트로 피난을 갑니다. 이집트는 나일강이 있어서 좀처럼 가뭄이 들지 않았고, 덕분에 세계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집트 국경 근처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브라함은 정처 없이 떠나야만 하는 나그네(sojourner)인생을 살았습니다. 새로운 곳에 가서 정착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갑자기 사래의 아름다운 외모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너무 예쁜 사래를 취하려고 자신을 죽일까봐 염려가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래에게 이집트에 가면 아내가 아니라 누이로 행동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아내 사래는 바로왕의 눈에 들어서 왕궁에 들어가는 운명에 처합니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이집트로 피난을 갔는데, 아브라함 자신의 실수로 오히려 아내를 잃게 된 것입니다. 사래를 다시 아내로 찾아올 방도가 아브라함에게 없습니다. 막막할 뿐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바로에게 재앙을 내려서 사래를 풀어주게 합니다. 이렇게 창 12:10-20절 말씀은 이렇게 하나님의 간섭으로 해피엔딩으로 끝이 납니다. 아브라함은 큰 실수를 범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와 사래를 구해주셨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우리들도 실수를 범합니다. 아브라함처럼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하나님을 잠시 잊어버릴 때도 있습니다. 그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자신의 백성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실수를 통해서도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깨달을 수 있도록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래서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河-

믿음의 시작

아브라함의 연속 설교를 시작하면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주제는“신앙의 여정입니다. 아브라함은 평생을 나그네(sojourner)로 살았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갈데아 우를 떠난 것을 시작으로 하란을 거쳐서 가나안 땅에 오기까지의 믿음의 여정, 가나안 땅에서 이집트와 그랄이라는 곳을 오가는 그릇된 여정, 마지막에 외아들 이삭을 바치기 위해서 모리아 산을 오르는 순종의 여정 등등 아브라함은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는 말 그대로 유목민 생활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인생여정만 옮겨 다닌 것이 아닙니다. 그의 신앙여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온 가족을 데리고 하란을 떠났던 아브라함의 믿음은 대단해 보입니다. 이 정도라면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100점을 맞고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은 사정없이 흔들립니다. 가뭄이 찾아오니 먹을거리를 찾아서 이집트로 내려갑니다.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아브라함은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종을 취해서 이스마엘이라는 자식을 낳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가장 커다란 종교 갈등을 일으키게 된 시작점입니다.

이와 같은 아브라함의 허물은 아브라함 역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음을 가르쳐줍니다. 먹을 것을 찾아서 약속의 땅을 떠났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비겁한 행동을 저질렀고,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자기 고집대로 일을 벌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었을까요? 어떻게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는 결심을 할 정도의 큰 믿음을 갖게 되었을까요? 아브라함의 인생/신앙 여정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방 땅에서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를 지켜주시고, 그에게 약속의 자녀 이삭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에서 하나님은 늘 주도권을 잡고 아브라함을 훈련시키셨고,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어가셨습니다.

물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위대함도 있습니다. 고집을 부리고, 실수를 하면서도 그가 결국에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지만 우리와의 차이점은 그에게“행함이 있는 순종”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고 아브라함을 열국의 아비로 택하셨고 그를 복의 근원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같은 순종의 인물, 신앙의 여정을 하나님과 더불어 시작할 믿음의 인물을 찾고 계십니다. -河-

신앙의 여정

오늘부터 구약성경 창세기의 대표적인 인물인 아브라함에 대해서 연속설교를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은 신구약성경을 통틀어서 믿음의 조상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또한 창세기에서 노아의 홍수와 바벨탑 이후에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을 통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11장을 태고사라고 부르고 이어지는 12-50장을 족장사라고 부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의 이락 지역인 당시의 메소포타미아 갈대아 우르에서 이방신을 조각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던 아버지 데라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데라는 그곳에서 비교적 성공적으로 비즈니스를 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원래 이름“아브람”의 뜻이 “높으신 아버지”란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던 아브라함의 가족이 아버지 데라의 인도로 서쪽으로 이주를 해서 하란이란 곳에 정착하게 됩니다. 유목민의 생활을 시작한 셈입니다. 아버지 데라가 하란에서 죽고, 아브라함의 나이 75세가 되었을 때 아브라함과 사라는 조카 롯 부부와 함께 다시 서쪽으로 여행을 해서 가나안에 정착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약속이 창세기 12장 2-3절입니다.:“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은 얻을 것이니라.”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12:1)는 하나님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신앙여정은“떠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은 그의 생활터전이요 기득권이 유지되는 안정된 생활 기반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것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을 향해서 떠났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불릴만한 최초의 순종이었습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이 말해주듯이 신앙은 순례길입니다. 어느 한 곳에 안주하지 않는 떠남의 연속이 신앙 여정입니다. 한 곳에 머무르면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사람과 환경을 의지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을 향해서 미련 없이 일어나 떠나는 것이 큰 믿음입니다. 현재 어디에 안주해 계십니까? 혹시 앉은뱅이와 같은 신앙은 아니십니까? 이제 일어나십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을 향해서 과감히 앞으로 나갑시다.-河-

행복은 마음 속에 있습니다

지난 9 12일자 한국일보에 가슴을 찡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효부 베트남 댁 마당에 3각 희망이 떴습니다”라는제목과 더불어 세 식구가 환하게 웃는 사진이 실렸습니다. 얼핏 보면 한국 농촌의 평범한 가족처럼 보이지만, 이 번에“배용순 효부상”을 받은 베트남 댁 딘티덩씨에 대한 기사였습니다.

배용순 효부상은 독립운동가 매헌 윤봉길 의사의 부인 배용순여사를 기념하기 위해서 제정되었습니다. 배용순 여사는윤봉길 의사와 16세에 결혼해서 10년 만에 남편을 잃고 50여 년을 시부모님과 자녀들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며 한 평생을 사신 분입니다. 이번에 26회째를 맞이하는 시상식에 전국에서 세 분의 효부(孝婦)들이 선정되었는데 외국인 며느리로는 처음으로 전북 부안의 베트남 댁 딘(딘티덩)씨가 선정된 것입니다.

신문 기사에 의하면 딘씨는 3년 전 현재의 남편을 만나서 낯선 땅 한국으로 시집왔습니다. 그때 딘씨는 꿈 많은 20세 약관의 아가씨였습니다. 남편 오현모씨는 43세였으니 스물 세 살이나 연상인 어쩌면 아버지뻘 되는 남편과 결혼한 것입니다. 게다가 남편 오씨는 2급 장애인이었고 벽돌공장에 다니는 생활보호대상자였습니다. 팔순을 바라보는 시어머니도 모셔야 했습니다.

이쯤 되면 딘씨의 결혼생활이 어떨 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아마 요즘 젊은이들에게 이런 운명이 주어진다면 대부분결혼생활을 포기할 것입니다. 그런데 딘씨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 갔습니다.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를도우려 열심히 밭일을 다녔습니다. 워낙 억척스럽게 일을 하니 동네에서 인기가 높답니다. 두 살배기 딸도 낳았습니다.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셨습니다. 동네사람들 사이에 “아, 그 얌전하고 착한 월남 새댁, 정말 요즘 한국 며느리보다낫당께”라고 칭찬이 자자하답니다.

딘씨에 대한 신문기사는 태평양 건너에 살고 있는 생면부지의 저를 울고 웃게 했습니다. 딘씨는 요즘 “너는 내운명”이라는 드라마에 빠져있답니다. 스무 살 나이에 띠 동갑을 두 번 가까이 지난 장애인 남편과 낯선 외국 땅에서살아가면서 “남편은 내 운명”이라고 말하는 딘씨! 신문기사를 읽어가면서 저도 모르게 마음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젖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인생도 있구나!왠지 딘씨가 안쓰러워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기사에 실린 딘씨의 활짝 웃는사진을 보면서, 이번에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습니다. 마음이 흐뭇해지고 ‘이것이 행복이구나!’는 생각이들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간 새벽예배에서 함께 나누었던 잠언 15장 말씀 두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고난 받는 자는 그 날이 다 험악하나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잔치하느니라”. 딘씨의 삶은 겉으로 보면 고난이요 역경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웃는 모습은 항상 잔치하는 삶입니다.얼굴이 빛이 납니다. 마음이 즐거워서 그렇겠지요.

행복은 우리들 마음 속에 있습니다. 밖에서 행복을 찾으면 늘 허전하고 쫓고 쫓기는 삶의 연속입니다. 반면에 마음속에깃든 행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키워갈 때 복에 겨운 삶을 살 수 있음을 바다건너 월남댁을 통해서 배웠습니다.(SF한국일보 2008 9 18일 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