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고 오묘한 그 말씀 2

“그림의 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 본 대로 성경말씀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이라는 것을 알아도 그 말씀을 올바로 대하지 못하면 그림의 떡과 같습니다. 또한“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면서 성경말씀을 읽고, 수없이 설교를 들었지만 말씀이 겉에서만 빙빙 돌 뿐 내면 깊이 자리 잡지 못한 경우도 많습니다.

오늘은 정금보다 귀하고 송이꿀보다 더 단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힘입는 비결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 말씀을 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편 119:18).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성경말씀을 푸는 비결은 바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영혼의 눈을 열어주셔야 성경 말씀이 하나님 말씀으로 마음에 다가옵니다. 따라서 우리들도 시편기자와 똑같이 “내 [영혼의]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진실 되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성경 말씀을 하나님께서“나에게 주시는 생명의 양식”으로 받아야 합니다. 생명의 양식이라는 것은 성경 말씀이 나를 살리게 하는 힘을 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임하셨을 때 사무엘은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3:10)라고 대답했습니다. 성경 말씀을 대할 때 사무엘과 똑같은 마음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고 큐티를 하다보면 특별히 다가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지난 설교에서 예로든 성 어거스틴에게 로마서 13장 13-14절 말씀이 그의 마음을 친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성경을 연애편지 읽듯이 가슴으로 읽으시길 부탁드렸습니다. 적어도 한 구절 또는 한 단어가 자신의 마음에 깊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말씀으로 붙잡는 것입니다. 잠시 멈춰서 그 말씀을 반복해서 읽고 묵상하면서 말씀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해야 합니다. 작은 쪽지에 적어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수시로 그 말씀을 되새기면 말씀이 정말로 생명의 양식인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신 말씀을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아는 것이 깨달음이 되고, 깨달음이 삶으로 이어질 때 말씀의 능력이 실제 삶 속에서 발휘됩니다. 이것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강하고 견고한 신앙을 갖는 최고의 비결입니다.-河-

달고 오묘한 그 말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허락하신 가장 큰 특권은“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핫라인(hot line)입니다. 힘들고 속이 상할 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세상 속에서 기쁨의 파도가 몰려올 때도 골방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더불어 그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지난 연속설교에서 배웠듯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들은 하나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을 누리고 소망의 빛을 발견합니다. 이처럼 기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주신 가장 강력한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허락하신 가장 귀한 선물(gift)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정말 많은 선물들을 주셨습니다. 제일 큰 선물은“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주신 구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선물로 주신 구원은 선물 목록에 포함시키기 어려울 만큼 크고 절대적입니다. 가정과 자녀들, 직업, 건강, 그리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 등등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들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선물 중에서 가장 귀한 선물(the most precious gift)를 들라면 저는 망설이지 않고“성경”을 듭니다. 성경 속에 구원의 길도 나와 있습니다. 성경 한 구절 한 구절에는 하나님의 숨결이 깃들어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 말씀의 귀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소성케합니다. 이 구절을“하나님 말씀은 우리들 자신을 새롭게 합니다”라고 풀어서 쓸 수 있습니다. 성경을 하나님께서 내 자신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고, 읽고, 그것을 마음에 새길 때 말씀이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또한 하나님 말씀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 마음에 기쁨이 임합니다. 성경 속에 아로새겨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들 마음속에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 생깁니다. 분별력, 영안, 총명함을 터득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것을 지켜 살 때, 하나님께서 말씀 대로 사는 사람에게 주시는 특별한 상(賞)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몸소 체험한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두고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하나님 말씀은 금 아니 잘 정련된 금보다 훨씬 귀하고, 꿀 그것도 꿀 송이에서 막 따온 꿀보다 훨씬 달콤합니다.” 아멘! -河-

속사람을 강건하게

모든 사람에게는 강해지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은 이후에 세상은 타락했고, 타락한 세상에서 생존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땅은 끊임없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냅니다. 타락한 세상의 모든 자원과 양식은 제한되어 있고 사용해 버리면 없어집니다. 그러니 계속해서 일을 해야 하고, 자신의 영역을 확보해야합니다. 자연스레 경쟁사회가 된 것입니다. 약육강식이라는 말도 나왔습니다. 그러다보니 너도나도 힘을 키웠습니다. 강해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사람은 크게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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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육신(body)입니다. 육신은 눈에 보이는 몸입니다. 강한 몸을 갖고 싶어서 운동을 합니다. 아름다운 몸을 갖고 싶어서 치장을 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모두 육신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그렇지만 육신은 죽음과 더불어 썩어질 몸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육신에 투자해도 100년을 넘기기가 어렵습니다.

둘째는
정신(mind)입니다. 정신은 생각입니다. 영혼에서 혼에 해당합니다. 갑자기 황당한 일을 당했을 때, 혼이 나갔다고 말하는 것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동물도 본능에 따라서 움직이는 육신을 갖고 있지만, 자유롭게 생각하고 선택하고 결심하는 정신은 인간만 갖고 있습니다. 정신에서 양심이 나오고, 인륜지사의 도덕이 나옵니다. 정신이 살아있는 사람은 존경을 받고, 정신의 산물인 학문과 지식은 문명을 일으키는 동력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을 구성하는 것이 영(spirit)입니다. 영은 존재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무형의 자리입니다. 구약시대에는 대제사장만이 들어가는 지성소(holy of the holy)가 있었고,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자리였습니다. 영은 바로 지성소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영”이 살아나는 것을 뜻합니다. 육신과 정신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지만, 깊은 교제는 바로 영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사도바울은 이 영을 다른 말로 속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 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속사람이 튼튼한 사람이 진정으로 강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영으로 교제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붙드심을 경험하기 대문입니다. 속사람이 강한 인생은 어떤 어려움이 와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기 때문입니다.-河-

수요예배에서는 (4)

지난 8개월 동안 수요예배에서는 신앙의 기초를 튼튼히 닦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새해와 더불어 시작된 “복음이란 무엇인가?”에 이어서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차례로 살펴봄으로 우리의 신앙이 복음에 대한 확실한 고백과 올바른 기도위에 세워져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우리 교회의 수요예배는 또 하나의 성경공부입니다. 그래서 제가 올해 들어서는 교재를 준비해서 나눠드리고 그 교재를 갖고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마 수요예배만 모두 참석하셔도 신앙과 성경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실 겁니다.

이번 주부터 수요예배에서는 구약성경에 있는 12권의 소예언서를 차례로 한 주에 한 장씩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미 살펴본 요나서 같은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소선지서는 우리들에게 매우 생소합니다. 주일설교에서 다루기에는 그 내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렇기에 자칫하면 평생 예수님을 믿었어도 호세아에서 말라기에 이르는 소선지서의 말씀을 거의 접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구약 성경의 소예언서는 400여년에 걸쳐서 12명의 선지자들이 기록한 말씀입니다. 각 예언서의 분량이 10장 내외여서 이름 앞에 소(小)자가 붙었습니다. 소예언서를 기록한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세우신 인물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궁극적으로 사랑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 끝까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소개하고 전했습니다.

또한 이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를 하나님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세상을 원하시는 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갖고 담대히 전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소예언서를 읽고 공부하면서 교회는 물론 세상 속에 세워나갈 하나님 나라의 모습도 배울 수 있습니다.

쉽게 배우기 어려운 소예언서 강해에 여러분 모두를 초대합니다. 이번 강해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말씀으로 맑게 정화되고, 예언자들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의 메시지를 듣게 될 것입니다. 바빠서 참석하지 못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녹음을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하여튼 우리 서머나 교회가 말씀 위에 바로 서고, 모든 성도님들께서 송이꿀보다 달고, 상한 골수를 쪼개는 말씀을 몸소 체험하시길 늘 소원합니다. -河-

인간승리

베이징 올림픽이 한창 진행 중입니다. 중국이 세계로 도약할 마음을 먹고 대대적으로 준비한 올림픽이기에 개막전부터세인의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게다가 독립을 요구하는 티벳과의 갈등, 베이징의 심각한 공기오염과 테러의 위험까지겹쳐서 올림픽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높았습니다. 올림픽 개막에 맞춰서 발발한 그루지아와 러시아간의 전쟁소식도올림픽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마음을 무겁게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이해관계에 따라서 지나치게 상업화된 올림픽을보면서 눈살이 찌푸려집니다. 이 모든 것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매우 복잡함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

그래도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에서 어김없이 들려오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백미는 역시 인간의한계를 극복하고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들이 전해주는 인간승리에 대한 미담(美談)입니다.

이번 올림픽에는 장애인올림픽(패럴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던 두 선수가 참가했습니다. 한 선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수영선수 나탈리 투아(24)입니다. 투아는 8년 전 시드니 올림픽에 도전했지만 출전자격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오토바이 사고로 왼쪽발의 무릎 밑을 절단하는 수술을 하게 됩니다. 수영선수로서는 치명적인 부상이었습니다. 하지만투아는 장애를 딛고 일어섭니다투아는 이번 올림픽에 수영의 마라톤이라고 불리는 10km 경주에 출전합니다.한쪽다리로 앉아서 환하게 웃고 있는 투아선수의 사진을 보면서 그녀의 집념과 노력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힘차게물살을 가르며10km의 장거리를 헤쳐나갈 투아의 투혼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또 한 선수는 폴란드의 탁구선수 파르티카(19)입니다. 이 선수는 태어날 때부터 오른손 팔꿈치 아래가 없었습니다. 7살때부터 언니를 따라서 탁구 라켓을 잡고 2000년 시드니 장애인올림픽에 11세의 나이로 참가해서 올림픽 최연소기록을 세웠습니다. 수영선수에게 다리 하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손으로 하는 운동인 탁구선수에게 팔 한쪽이정상이 아닌 것도 커다란 장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르티카는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고 자신의 조국 폴란드를대표해서 단체전에 나섭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 밖에도 미국의 수영 선수 에릭 셴토(24)는 지난 6월 말 올림픽 예선 직전에 고환 암 선고를 받았지만 수술을 연기한채 올림픽에 참가했습니다. 자신과 똑 같은 고환암을 극복했던 미국의 싸이클 선수 암스트롱을 떠올리며, 올림픽에참가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병과 싸우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답니다. 불굴의 정신력입니다.

장애를 딛고 일어선 선수들이 정상인과 겨루어서 메달권에 진입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금메달을 목에 건선수들보다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올림픽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금메달을 몇 개씩 목에 거는올림픽 영웅들의 빛에 가려서 이들은 쓸쓸히 조국 행 비행기를 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야말로 금메달감입니다. 아니 이 선수들은 이미 금메달을 마음에 걸고 올림픽에 참가한 인간승리의주인공들입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에 잔잔한 감동과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불어넣어주기 때문입니다. (SF한국일보 2008.8.21 종교칼럼)

이웃을 위한 기도

기도에 대한 연속설교 마지막 시간입니다. 저는 이번 시리즈 설교를 통해서 기도가 개인의 소원이나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해서는 안 됨을 강조했습니다. 기도응답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변함없는 믿음입니다.

실제로 우리들이 원하는 대부분의 기도응답은 세상과 관련된 것입니다. 기도제목 대부분은 먹고사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물론 일용할 양식도 중요하지만, 성숙한 믿음은 세상의 일들을 뛰어넘어서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우리의 발은 세상을 딛고 있지만 기도를 통해서 세상 저 너머에 펼쳐진 은혜의 세상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살펴보았던, 한나, 야베스, 아사, 다윗 그리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공통점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서머나 식구들께서 기도의 중심을 “나”에서 “하나님”으로 이동하시기를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그때에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기쁨과 평안함과 자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도의 백미가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라면, 기도의 가장 아름다운 열매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군병들을 위해서 드리신 예수님의 기도입니다.:“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얼마나 깊고도 넓은 기도입니까? 범인의 옅은 믿음으로는 따라 하기조차 힘든 기도입니다. 자신을 핍박하고 조롱하면서 급기야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을 웬만해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넓이가 그만큼 넓었던 것입니다.

우리들 기도는 대개 내 삶의 주변에서 맴돕니다.“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기도의 종착점은 이웃을 위한 기도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원수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거기까지 나가지 못해도 우리들의 기도 속에는 이웃을 위한 기도가 꼭 포함되어야 합니다. 가족과 교회 식구들을 위한 기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금요심야기도회에서 중보하듯이 나라와 민족의 지도자들, 선교사들, 기도가 필요한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서 중보 기도의 날개를 활짝 펼쳐야 합니다.

내가 남을 위해서 기도할 때 누군가 또 나를 위해서 기도해 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는 기도의 체인으로 서로 서로 엮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표현입니다.-河-

예수님의 기도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기도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이 기도하는 법을 물었을 때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새벽에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먼저 떠나보내고 밤새도록 홀로남아서 기도하셨습니다. 이처럼 복음서 속의 예수님은 기도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기도 가운데 백미는 오늘 우리가 살펴본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시고 하나님 앞에서 처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는 십자가의 죽음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지 미리 보여줍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음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의 길까지 경험하셨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삶과 죽음의 여정을 모두 도우실 수 있음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가셨던 겟세마네 동산은 예루살렘 경내에 있었습니다. 겟세마네는“기름짜는 기계”라는 뜻입니다. 어쩌면 겟세마네는 올리브기름을 짜던 장소를 가리킬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실 때마다 겟세마네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요18:2). 즙을 짜내듯이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교제하시던 예수님의 골방이 바로 겟세마네였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39절)라고 기도를 마치십니다. 이 기도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 손 들고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항복의 기도입니다. 여기까지 이르기를 예수님은 세 번 기도하러 나가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여전히 잠에 곯아떨어집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중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지요.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처절한 영적 싸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괴로움의 기도, 외로움의 기도, 죽음의 기도, 그러나 영광과 능력의 기도라고 정리해드렸습니다. 겟세마네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예수님은 의연하게 십자가를 지시고 모든 인류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할렐루야!-河-

골방에서

연속해서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 연속설교를 통해서 기도에 대한 성경적이고 바른 교훈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기도를 단지 세상에서 복을 받고 인생길을 형통케 만드는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기도를 옛날 우리 조상들이 뒤꼍 장독대위에 냉수를 떠놓고 집안의 안녕과 자녀들의 출세를 비는 주술행위정도로 전락시켜도 안 됩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기도를 왜곡시키는 주범들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의 시간입니다. 기도 응답의 여부와 상관없이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기뻐할 수 있어야합니다.

제가 이번 연속설교를 통해서 강조한 기도의 자세는 한나에게서
배운
간절함입니다. 고난 가운데 태어났지만 기도로 운명을 바꾼 야베스의 영적씨름입니다. 아사왕을 통해서
한결같이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웠습니다. 처음이 좋아도 끝이 나쁘면 실패한 인생입니다. 아사가 기도를 잊어버렸을 때 그의 인생은 추락했습니다.

시편 51편에 나타난 다윗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상한심령의 기도 기뻐하심을 배웠습니다. 죄로 인해서 우리의 심령이 상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나 외부의 환경 때문에 마음이 산산조각 부서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서진 마음을 기뻐 받으시고, 새롭고 정한 마음을 창조해 주십니다. 기도는 이처럼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만져주심과 새롭게 하심을 경험하는 축복의 시간입니다.

이 모든 기도들은 하나님과 우리 자신이 단둘이 만나는 골방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외선적인 사람들은 회당이나 거리에서 기도합니다. 자신이 기도하는 사람임을 자랑하기 위함입니다.

그렇지만 진실로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골방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골방기도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만 드리는 은밀한 기도입니다. 골방기도의 매력은 하나님 역시 은밀하게 응답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복잡하고 바쁜 세상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골방기도가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밀하신 손길과 마음을 체험하는 영적 오아시스와 같은 장소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한 주간 여러분들의 삶 속에 하나님과 단둘이 만나는 자신만의 골방을 꼭 준비하시고 하나님과의 은밀한 데이트를 마음껏 즐기시길 바랍니다. -河-

성경파노라마

지난주부터 성경공부가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서머나 교회에 온 이후에 지난번의 기초성경공부와 큐티학교에 이어서 세 번째로 인도하는 성경공부입니다. 이번 성경공부는 지난 두 번의 공부와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공부라기보다 성경 자체에 대한 공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고 예수님을 믿었어도 성경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성경이 어떻게 기록되었고 어떻게 우리 손에 들려지게 되었는지 등등 성경 개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합니다. 또한 성경 66권 전체의 주제나 각 권의 내용과 주제에 대해서도 대충 넘어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들의 신앙이 말씀에 굳게 선 성숙한 신앙이라기보다, 내 마음대로 믿고 그저 복을 받으려는 개인주의 신앙에 머무르곤 합니다.

제가 늘 강조하듯이 말씀위에 세워진 신앙이 견고합니다. 성경은 모든 신앙과 교회생활의 잣대(정경,ruler)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되었기에 말씀 속에 하나님의 숨결과 뜻이 깃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으로 우리들 안에서 살아서 역사하십니다. 따라서 말씀의 능력을 올바로 체험하고 삶 속에 적용하기위해서 성경 전반에 대한 공부가 꼭 필요합니다.

첫 번째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이번 성경공부가 어쩌면 조금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깨닫고 적용하는 시간이기보다, 성경 자체에 대한 공부를 하기 때문입니다. 학창시절로 돌아갔다는 심정으로 공부에 임하실 것을 부탁드렸고 참석하신 모든 분들이 너무 좋아하셨습니다. 저는 이번 성경공부에 임하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기대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서머나식구들께서 말씀을 보고 이해할 수 있는 하늘의 지혜를 터득하시도록 돕고 싶습니다.

이번에 참여하지 못하시는 서머나식구들께서는 다음 기회에 참여하시면 됩니다.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 다음 기회에는 꼭 등록하시기 바랍니다. 매사가 그렇듯이 성경공부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성경공부에서는 앞으로 13주 동안 신약성경을 통독하기로 했습니다. 성경공부에 참여하지 않으셔도 신약통독을 시작해 보십시오. 하루에 3장씩만 읽으면 앞으로 두 달 안으로 신약을 끝까지 읽으실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말씀 위에 굳게 서는 든든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河-

내 아우를 지키는 자 니이까?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아들은 농부였고 둘째는 양을 치는 목자였습니다. 농부인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그리고 목자인 아벨은 양을 잡아서 하나님께 각각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왠 일인지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형 가인의 제사는 거절하셨습니다.

신약성경 히브리서에는 믿음으로 드린 아벨의 제사가 가인의 제사보다 하나님 보시기에 더 나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인과 아벨의 사건을 직접 다루고 있는 창세기 4장에는 하나님께서 왜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고 이후에 일어난 가인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가인은 자신의 제사가 거절당하자 얼굴색이 변할 정도로 몹시 화를 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화를 내지 말 것을 요청하셨지만 가인의 분노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가인은 죄가 문지방에 웅크리고 있으니 분을 참고 마음을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들로 나가서 동생 아벨을 죽입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라는 죄목을 갖게 된 순간입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가인은 시치미 뚝 떼고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고 반문합니다. 현재 분사형을 사용하고 있는 히브리 본문을 다음과 같이 직역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금 지키고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맞습니다. 형은 동생을 지켜주는 사람입니다.형이 동생을 지켜주지 않으면 세상에 누가 동생을 지켜준단 말입니까? 이어지는 하나님의 질문이 가인의 비수를 찔렀을 것 같습니다.:”(그런데) 네가 무슨 짓을 하였느냐?“

형 가인이 동생 아벨를 죽인 사건은 하나님께서 동생의 제사만 받으신 것에 대한 형의 질투로 시작되었습니다. 가인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장남인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이 섭섭할 수도 있습니다. 정성껏 준비했다면 더더욱 이해가 안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질투는 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럴수록 자신을 한번 더 돌아보고, 동생 아벨을 찾아가서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기쁨을 함께 나누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인은 시기하고 질투했습니다. 그것이 분노로 발전했고 결국 자신이 지켜주었어야 할 동생을 죽이는 큰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시기와 질투 – 관계를 단절시키는 주범입니다. 마음속에서 만족을 빼앗아가고 불안과 분노를 갖다 주기에 누구보다 본인 스스로에게 커다란 해가 됩니다.

가인의 이야기가 단순히 옛날 이야기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지나치게 경쟁적입니다. 시기와 질투는 신앙에서도 그대로 표출됩니다. 하나님을 독점하려는 성향이 너무 강합니다. 축복을 혼자만 받거나 다른 이 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복을 받아야 성이 찹니다. 그리고 툭하면 분노하고 화를 냅니다.

언제부터인지 가인의 모습이 이처럼 우리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아벨과 가인의 사건을 보면서, 우리들이 서로에게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함을 다시금 느낍니다.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이웃의 기쁨을 함께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과거에 그랬던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앞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결심도 신빙성이 없습니다. 현재진행형(‘지금 지켜주고 있는 자’)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쓰러지기 쉽고 부서지기 쉬운 연약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SF 한국일보 2008.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