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파도타기

미국에 처음 와서 우리 가족은 동부에 살았습니다. 네 식구를 데리고 늦깎이 유학을 왔었던 저는 학업과 삶이 힘들 때마다 아내와 함께 대서양이 훤히 내다 보이는 해변가 바위를 찾곤 했습니다. 동부에서 중서부로 이사한 후에 바다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늘 아쉬웠습니다. 3년 전 샌프란시스코에 오면서 내심 기뻤던 것은 다시 태평양이라는 넓은 바다를 바라볼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힘들고 마음이 무거우면 바닷가를 찾습니다. 해변가 바위에 앉아서 넓게 펼쳐진 태명양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확 트입니다. 바다 끝에 있어도 하나님께서 그곳까지 함께 해 주신다는 시편 말씀도 생각 납니다.  밀려왔다가 부숴지는 파도를 보고 있으면 ‘인생살이도 다 그렇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바닷가에 가보면 파도타기를 즐기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서핑 보드 위에 몸을 싣고 파도를 타면서 묘기를 연출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제 마음도 시원해 집니다. 그리고 파도를 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배우는 교훈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파도 타기를 하는 사람들은 밀려오는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커다란 파도가 밀려 오기를 기대하는 듯 합니다. 우리들 역시 삶 속에서 밀려오는 파도를 겁내지 말아야 합니다. 타락한 세상은 끊임없이 엉겅퀴와 가시덤불을 냅니다.인생의 파도가 밀려 올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아무리 큰 파도가 밀려와도 그것을 타고 넘겠다는 단호한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파도 타기를 하는 사람들은 파도 위를 절묘하게 타고 다닙니다. 그러다가 파도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파도에 묻혀서 넘어집니다. 인생의 파도타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 속에 들어가 있으면 문제를 옳게 파악하기 힘들어서 허둥대거나 넘어지게 됩니다. 인생의 파도를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그 위를 타고 넘는 여유와 자신감이 요청됩니다.

또한 파도타기를 하는 사람들은 파도에 부딪쳐서 넘어져도 다시 일어납니다. 한번 넘어졌다고 파도타기를 포기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도리어 더 깊은 바닷속으로 들어가서 더 큰 파도를 타고 나오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인생 길에서 넘어지는 것은 다시 일어나기 위한 전 단계일 뿐입니다.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서 인생의 파도를 맞으려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파도타기를 하는 사람들은 철저히 준비합니다. 파도타기에 앞서서 옷을 갈아입습니다. 서핑 보드도 늘 옆구리에 끼고 다닙니다. 이들은 무엇보다 파도를 타려는 마음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인생의 파도는 언제나 밀려옵니다. 고난의 파도가 없는 인생은 소설이나 영화에나 나올법한 일입니다. 인생의 파도가 밀려올 때, 파도를 타고 넘을 수 있는 도구, 방법,마음가짐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인생의 파도가 아무리 크고 험해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으면 파도에 묻히는 일은 없습니다.

준비된 사람은 언젠가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여기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굳건한 믿음이 있다면 인생길에 밀려오는 파도를 타고 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저기서 불경기라는 말이 들려오고 마음을 어둡게 하는 소식이 자꾸만 전해집니다. 이럴 때에도 밀려오는 파도를 멋지게 타고 넘으면서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몫임을 기억합시다. 힘내십시오! (SF 한국일보2008.5.22일 칼럼)

범사에 감사

복음성가 가운데 감사의 내용을 가사에 듬뿍 담고 있는 찬양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몇 소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날 구원하신 주 감사/ 모든 걸 주신 것 감사…응답하신 기도 감사/거절하신 것 감사…아픔과 기쁨도 감사/절망 중 감사…길가에 장미꽃 감사/장미꽃 가시 감사…내일의 희망도 감사/영원토록 감사해.”

위의 가사 속에는 그동안 강조했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들어있습니다. 기도가 응답된 것에 대한 감사는 물론 응답되지 않은 기도에 대한 감사도 들어있습니다. 남과 비교하지 않으면 어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답니다. 받은바 은혜를 기억하면 그것만으로도 감사가 넘칩니다. 장미 줄기에 돋힌 가시까지 감사할 수 있다면 범사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마지막으로 내일의 희망을 가슴에 품고 살아갈 때 끊임없는 감사가 솟아날 것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우리에게“범사에 감사하라”(살전5:18)고 가르쳐줍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겪는 모든 일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을 향해서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라는 것입니다.

말은 쉬운데 범사에 감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이 녹록치 않기 때문입니다. 힘겨운 세상에 살다보면 감사보다 불평이 먼저 나옵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불평은 저절로 나오지만, 감사는 힘써 찾아야 나오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남들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친구 집에 놀러 가면 친구들이 대부분 뒤꿈치가 구멍 난 양말을 신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누구하나 부모님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명품 브랜드 옷을 입지 않으면 마음이 편하지 못합니다. 서로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과시하려는 욕심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면 감사가 사라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가장 큰 비결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인도하심대로 사는 것입니다. 빌립보 감옥에 갇혀서 기도하고 찬양했던 바울과 실라가 바로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이들은 감옥이라는 상황 속에서도 기도했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옥문이 열리듯이, 감사하면서 살 때에 막힌 인생길이 열립니다. 무엇보다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환경에 상관없이 행복합니다.-河-

“네 부모를 공경하라”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미국에서는 어머니날과 아버지날을 따로 지키지만 교회는 한국의 전통대로 어버이 주일로 지킵니다. 세상에 부모님 없이 태어난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하나님 다음으로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것은 성경의 일관적인 가르침입니다. 또한 성경에는 부모님을 공경한 사람들에게 임하는 장수와 형통의 복도 나옵니다 (신5:16).

부모님을 극진히 모시고 효도를 다했던 일화는 동서고금에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어버이날에 가슴에 달아드리는 카네이션에 대한 유래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금부터 100여 년 전 미국의 한 마을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던 소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무덤에 카네이션을 심었습니다. 이 소녀는 어머니를 추모하는 모임에 흰색 카네이션을 달고 나갔는데, 이것이 시초가 되어서 Mothers day에 생전에 계신 어머니 가슴에 빨간색 카네이션을 달아드리는 전통이 생긴 것입니다. 카네이션은“제 마음 속에 부모님의 은혜와 사랑을 늘 기억하고 있습니다(always on my mind)”라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부모님을 공경하셨습니다. 서른이 되기까지 예수님은 장남으로 육신의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을 섬기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족을 떠나서 복음사역에 3년간 매진하셨습니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형제요 자매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예수님과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만납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은 육신의 어머니를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마리아에게“(어머니의) 아들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아들이 고통을 당하고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마리아의 마음 역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힘들고 아팠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둔 그 순간에도 어머니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고 여생을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하셨습니다. 매우 아름답고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부모님께서 세상에 계시지 않으니 허전한 것은 이루 말할 수 없고 오늘처럼 어버이주일을 맞이할 때마다 밀려오는 죄송함과 후회를 막을 길이 없습니다. 이다음에 후회하지 않을 만큼 생전에 계신 부모님께 최선을 다해서 효도하십시오. 나중으로 미루다가 영원히 기회를 놓칠 수도 있습니다.-河-

셀폰 이야기

지난 달에 우리 가족 모두 셀폰을 바꿨습니다. 그 동안 큰애와 저만 셀폰을 갖고 있었는데 새롭게 계약을 하면서 아내와 둘째도 셀폰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큰 애와 똑 같은 모델을, 아내는 둘째와 같은 모델을 선택했습니다.

집에 와서 그 동안 사용했던 셀폰을 모아둔 상자를 열어보았습니다.  6년 전 처음으로 사용했던 셀폰의 모습이 촌스럽고 투박해 보였습니다. 한 쪽 머리에는 수신 안테나가 뿔처럼 달려있습니다. 표면이 지나치게 미끄러워서 떨어뜨리기 일쑤였습니다. 살펴보니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입니다.

지금은 골동품처럼 보이는 전화기를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예전 생각이 납니다. 처음에는 길을 가다가 괜히 집에 전화를 걸곤 했었습니다. 한 동안 전화가 오지 않아서 교인들에게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가 나중에는 통화한도를 관리하느라 월말이 되면 쩔쩔매곤 했습니다. 긴급한 연락 받고 신속히 달려갔던 일, 길을 가다가 교인들의 기쁜 소식을 전해 듣고는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다가 옆에 있던 사람들을 보고 머쓱해 했던 일 등등 투박한 셀폰이지만 많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셀폰은 샌프란시스코로 옮긴 지 6개월여 만에 갖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국산 전화기였습니다. 빨간색이 중간에 들어가서 왠지 세련되어 보였습니다. 머리에 있던 뿔도 없어졌습니다. 신호음도 바꿔보고, 초기화면도 바꿔보면서 고성능 셀폰에 적응해 나갔습니다.

무엇보다 두 번째 셀폰의 압권은 전화기에 장착된 카메라였습니다. 드디어 저도 셀카를 하게 된 것입니다. 혼자서 또는 아내와 함께 사진을 찍어봅니다. 웃는 표정, 찡그린 표정, 기쁜 표정, 교인들이 보면 깜짝 놀랄 화난 표정…. 젊은이들처럼 표정을 지어보지만 화면 안에는 영락없는 40대 중반의 아저씨가 들어있었습니다. 어떻게 해도 표정과 모습이 어색하기만 했습니다.그래도 요즘 세대를 따라잡기 위해서 노력하는 스스로의 모습에 감동을 받고 격려하면서 셀폰에 추억을 담아 놓았습니다.

이제 세 번째로 갖게 된 셀폰은 뿔도 달리지 않고 두툼하지도 않은 슬림형입니다. 와이셔츠 주머니에 넣고 다녀도 불편함이 없을 만큼 가볍습니다. 새로운 셀폰을 구입할 때 아내는 서로 헷갈린다고 말렸지만,  함께 갔던 큰 아이가 저와 같은 모델을 선택하기를 은근히 바랬습니다.

이제 큰 아이는 올 여름에 대학에 갑니다. 지난 10년 동안 미국에 와서 가족이 똘똘 뭉쳐서 살았는데 큰 아이가 집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표현은 못해도 섭섭한 마음을 누를 길이 없습니다. 그래도 같은 전화기를 갖고 있으면 이심전심 마음이 통해서 부자지간에 자주 연락을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큰 애가 아빠의 마음을 알았는지 저와 똑 같은 점잖은 모델을 선택했습니다. “휴- 역시 저 놈 속에 내 피가 흐르고 있구나. 고맙다 아들아!”

자녀들이 커가면서 왠지 작아지는 아버지의 모습, 그렇지만 아이들이 조금만 생각해줘도 마음 속에서 울컥할 만큼 기뻐하고 감동하는 부모의 마음은 세대를 초월해서 똑같음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셀폰의 모델과 기능은 해가 다르게 바뀌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우리들의 마음은 언제나 한결같았으면 좋겠습니다.

새롭게 장만한 셀폰을 통해서 나누게 될 하늘나라 이야기 그리고 아로새겨질 추억들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흐뭇해 집니다. (2008 5.1 SF한국일보 컬럼)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

오늘 우리가 살펴본 누가복음 2장 속에는 시므온과 안나라는 두 분의 노인이 등장합니다. 이 분들은 메시야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평생동안 성전을 지켰습니다.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했습니다. 그는 로마의 식민지하에서 고통을 겪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기를 기다렸습니다. 위선적인 세상 속에서 성령의 임재를 경험했던 신실한 인물이었습니다. 시므온을 소개하면서 유독“성령”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 것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안나는 84년 동안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도하고 금식하면서 성전을 섬겼던 여선지자였습니다. 안나라는 이름의 뜻은“은혜”입니다. 안나 선지자 아버지의 이름은“바누엘”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32장에 나오는“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라는 히브리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안나 선지자는 신실한 신앙의 가문에서 태어났고 평생을 하나님께 헌신한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처음 방문했을 때, 이 분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백성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고 감사의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렇지만 시므온과 안나는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막연히 메시야만을 평생동안 기다렸던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성경에서 메시야가 온다고 예언했지만 언제 어디서 올지는 아무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분들은 노아가 홍수가 임할 것이라는 말씀을 받고 백주대낮에 산위에다 방주를 만들었듯이, 평생 동안 메시야가 오시기를 묵묵히 기다렸습니다.

이 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분명한 “소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명은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평생과업입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소명을 확실히 알고 있었고, 그 소명을 위해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실제로 아기 예수님을 만남으로 소명을 이루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을 가슴에 안고 찬양할 때 시므온이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소명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만이 누리는 기쁨이요 감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발견한 그리스도인은 행복합니다. 소명을 붙들고 걸어가는 그리스도인은 늘 감사가 넘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남들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담대합니다. 주신 소명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고 힘차게 앞으로 나갑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붙잡고 사는 행복한 서머나 식구들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河-

들꽃 처럼

지난 주간에는 오랜 간만에 새벽예배를 마치고 금문공원에 갔었습니다. 아침 이슬을 머금고 더욱 푸르러진 나무들이 두 팔을 활짝 벌려반갑게 인사하는 듯 했습니다. 봄철이 되니 공원 여기저기에 봄꽃이 예쁘게 피었습니다. 산책로 길목마다 군데군데 피어있는 이름 모를 들꽃들의 색깔이 형형색색 아름답습니다. 사람들이 만든 물감으로 칠한다면 그토록 예쁜 색깔이 나오지 못하겠지요. 가까이 다가가서 꽃잎을 조심스레 만져보고, 코를 가까이해보니 향기가 전해집니다.

말없이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아름다운 자태와 은은한 향을 내는 들꽃들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꽃들을 왜 여기에 피게 했을까? 꽃도 예쁘고 향기도 그윽한 데 왜 한 자리만 지키고 있을까? 여기저기 다니면서 자신의 자태를 뽐내면서 살아도 좋을 텐데…….말도 하지 못하고 손짓도 하지 못하니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으면 자신의 모습과 향기를 자랑할 수 없으니 얼마나 답답할까? 등등 여러 가지 생각이 났습니다.

저는 들에 서 있는 식물들을 보면서 은혜를 받습니다. 식물들은 꽃씨가 떨어진 곳에 뿌리를 내리고 일평생 그 자리에서만 삽니다. 누군가 옮겨주지 않으면 자기 힘으로 한 뼘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렇게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평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식물들이야 말로 창조주 되신 하나님의 명령에 100% 순종하는 피조물입니다.

반면에 우리 사람들은 참 변덕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만끽한다고 제 마음대로 움직이고, 자리를 이동합니다. 그리고 창조주를 향해서 불평합니다. 왜 자신을 이토록 초라하게 만들어놓았냐고, 자신이 움직일 때 왜 제지하지 않으셨냐고…….피조물 가운데 특별히 인간들에게 시간과 공간을 통제할 자유를 주셨는데, 우리 인간들은 그 자유를 이처럼 남용하고 있습니다.

공원을 거닐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하나님, 들꽃처럼 살게 해 주세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도 자신의 자리를 굳게 지키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과 세상을 향해서 향기를 내뿜게 해주세요. 자신의 자리에서 예쁜 꽃을 활짝 펴서 하나님께만 칭찬받는 들꽃과 같은 인생을 살게 해 주세요.”

봄의 한 가운데 와 있습니다. 오늘은 예배 후에 공원에 가셔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과 자연을 깊이 느껴보십시오. 하나님의 창조섭리가 깃든 자연과 더불어 심호흡을 해 보십시오. 새 힘이 생길 것입니다. -河-

여디디야

설교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다윗은 인생 최대의 실수 아니 죄를 범합니다. 자신의 충직한 신하였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습니다. 바늘도둑이 소도둑이 된다는 우리 속담이 있듯이 다윗의 죄는 점점 커졌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서 전쟁터에서 열심히 싸우고 있던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죽이는 일을 꾸미게 됩니다. 그리고 밧세바를 자신의 아내로 삼았습니다.

왕의 권력을 이용해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시대였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분명히 죄였습니다. 그런 다윗 앞에 나단 선지자가 나타나서 그의 죄를 지적했습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 앞에서“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자신의 죄를 솔직히 고백합니다. 그리고 시편 51편은 다윗이 하나님께 드린 회개기도입니다.“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라는 고백이 다윗의 마음을 잘 대변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죄값을 물으셨습니다. 나단선지자의 예언대로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낳은 첫 번째 아들은 다윗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죽게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아들인 솔로몬이 태어났습니다.

솔로몬을 낳고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불안했을까요? 첫째 아이처럼 죽을지도 모른다는 염려, 하나님께서 또 어떤 벌을 내리실지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을 “평화”라는 뜻의 솔로몬이라고 지었습니다. 여기에는 모든 잘못을 청산하고 하나님과 화목하려는 다윗의 마음도 깃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용서해주십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다윗을 찾아오셔서 그를 위로해 주시고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여디디야“-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자라는 이름을 솔로몬에게 주신 것입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아들이라는 말씀을 듣고 다윗은 한없이 기뻤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격했을 것입니다. 그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죄책감과 불안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을 것입니다. 다윗은 물론 그의 후손인 솔로몬까지 사랑하시겠다는 약속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솔로몬은 다윗을 이어서 이스라엘 세 번째 왕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을 향한 아니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무조건 사랑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주님의 자녀들입니다. 할렐루야 -河-

“하물며”

오늘 우리들이 살펴본 마태복음 7:7-12절 말씀은 유명한 구절입니다. 성경에서“구하라…얻을 것이요, 찾으라…찾을 것이요. 두드리라…열릴 것이다”라는 말씀보다 마음에 쏙 드는 말씀도 별로 없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 삶 속에 실제로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보다, 우리가 그렇게 기도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가 본문의 초점임을 알 수 있습니다. 11절 후반부의“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는 구절에 매우 중요한 단어가 우리 성경에 빠져있습니다. “그를 (하나님 아버지를)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가 원문에 가까운 번역입니다.

우리들은 기도 제목들을 갖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 제목들이 이루어지면 좋아서 어쩔 줄 모릅니다. 기도응답이 없으면 기운이 빠지고 신앙도 함께 식어갑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보다, 기도제목의 응답 여부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이 좌우되는 경우입니다.

오늘 본문은“하나님 아버지”를 구할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기도응답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체험하고 찬양하는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9-11절에서 우리가 믿고 기도하는 하나님을 세상의 아버지와 비교해서 설명했습니다. 아들이 떡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아버지는 없습니다.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아버지도 물론 없습니다.

그러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어떠실까요?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서 그 아들을 보내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분입니다. 상한 갈대도 꺽지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니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여기서 하물며의 의미는 영어로“훨씬 더(much more)”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 아버지는 세상의 아버지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훨씬 더 적합한 것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 아버지 자신을 구하고 그 하나님 마음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어떤 응답이 와도 가장 좋은 것으로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가 진정으로 우리 위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河-

상한 갈대

올 해는 유난히 독감이 극성입니다. 한차례 감기가 지나가면 또 다시 새로운 바이러스가 유행을 합니다. 이번 감기는 머리가 무척 아픈 목감기인 것 같습니다.

저도 지난 한 주간동안 몸살과 감기로 무척 고생했습니다. 예전에도 감기가 한번 걸리면 일주일 정도 몸져누울 만큼 심하게 앓곤 했었지만, 샌프란시스코에 와서는 긴장을 해서인지 감기를 앓을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에는 그동안 미뤄놓았던 감기들이 한꺼번에 밀려온 듯 호되게 고생을 했습니다.

벽기도회를 끝내고 집에 가서, 또는 교회에 누워있으면서 지난겨울 감기와 몸살로 고생하셨던 서머나 식구들을 생각했습니다. 할머니 권사님들은 거의 예외 없이 감기를 앓으셨습니다. 젊은 성도님들도 이번 감기에 속수무책이셨습니다. 일주일 이상 바깥출입을 못하면서 앓아누우신 경우도 많이 있었습니다.

새벽기도회와 금요심야 기도회에서 감기와 몸살에 걸리신 성도님들을 위해서 기도했었지만, 얼마나 아프실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제가 막상 아파보니 이번 독감이 얼마나 아픈지 알 수 있었습니다. 머리가 아프고, 콧물이 줄줄 흐르고, 목과 편도선이 붓고, 밖에 나가면 온 몸이 춥고…“우리 성도님들께서 이렇게 아프셨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은 실제로 함께 아파하고 겪어봐야 그 정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않으면 피상적으로만 동정하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신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들이 겪는 어려움을 모두 경험하심으로 우리들을 속속들이 이해하기 위해서 사람이 되신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얼마나 귀하고 좋으신 분입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이사야서 42장 1-4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세우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입니다.“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이 바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메시야는 뒤틀린 세상을 바로잡는 공의의 사자입니다. 그렇지만 세상의 재판관처럼 목소리를 높이지 않습니다. 거리를 다니면서 그 위용을 뽐내지도 않습니다. 도리어 예루살렘 한복판을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걸어가시는 분입니다.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십니다.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십니다. 상한 갈대는 짓밟혀서 쓸모가 없게 된 갈대입니다. 꺼져가는 등불 역시 희미한 빛을 내니 새로운 등불로 갈아주는 것이 세상 이치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상한 갈대를 꺽지 않으십니다.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십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하찮은 것들에도 소망을 버리지 않으시고 결국에는 살려내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또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상한 갈대와 같은 우리들을 누구보다 더 많이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우리 모두 힘을 냅시다. -河-

피난처

요즘은 통신수단이 무척 발달했습니다. 이제는 길을 가면서도 전화로 통화할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컴퓨터를 켜고 실시간으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즐깁니다. 전화를 걸기 위해서 공중전화 박스를 찾고, 편지를 부쳐서 한 달 후에나 서로 연락을 주고받던 때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입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과 언제든지 전화나 인터넷으로 연결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는데도, 사람들은 “외롭다”는 말을 합니다. 아니 실제로 외롭습니다. 이것을 두고 폴 틸리히라는 신학자는 모든 인간은 혼자라는 외로움과 싸우고 있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이 외로움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홀로 있다는 것과 이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은 인간의 운명”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마음과 처지를 진심으로 이해해 주는 이웃을 갖는 것은 무척 어렵습니다. 모두 자신을 이해해 주기 바랄 뿐, 남을 이해하는 것에는 인색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어려운 순간이 닥치면, 이 커다란 우주공간에 자기 혼자 덩그러니 서있는 것처럼 외롭습니다. 틸리히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우리의 운명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시편 62편 속의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 다윗은 힘이 없습니다. 3절에 있듯이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같습니다. 곧 무너져 내릴 지경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무너져 내릴 판인데, 사람들은 거기에 일제히 공격을 합니다. 4절에서는 높은 낭떠러지에서 사람들이 떼밀고 있다고 했습니다. 겉으로는 축복의 말을 하지만 속에는 저주로 가득하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외롭고 절박한 순간입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봅니다.:“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다윗은 위기와 외로움의 순간에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반석이 되시고, 구원이 되시고, 산성이 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다윗의 피난처가 되어주셨습니다. 사람들이 공격해 올 때도 다윗은 하나님께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너무 힘들고 외로울 때도 하나님께 숨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를 반겨주셨습니다. 하나님을 피난처 삼는 주님의 백성들에게 임하는 복입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