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만찬에 대하여

개신교가 지키는 성례전은“세례”와“성만찬”입니다. 성만찬은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유월절 만찬에 근거합니다. 마태복음 26:26-28에서,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이것이 내 몸이니라하시고,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이를 두고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23절 – 25절에서,“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 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하셨으니”라고 성만찬을 강조합니다.

성만찬은 위의 성경말씀 대로, 포도주와 떡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념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성령 안에서 성도 간에 하나 됨을 확인하는 예식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성만찬 포도주와 떡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임재한다고 믿었습니다. 감리교회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는 성만찬을 은혜 받는 길 가운데 하나로서 특별히 강조하였습니다. 또한 2천년 기독교회사에 성만찬을 통해서 많은 기적과 은혜의 체험이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이처럼 성만찬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확인합니다. 포도주를 마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떡을 먹으며 우리를 위하여 아끼지 않고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생각합니다.

바울의 말씀 속에“기념하라”는 말은 단순한 기념이 아니라 “어떤 사건에 참여함으로 기념하라”는 뜻입니다. 즉, 우리는 포도주와 떡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신비를 경험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함께 나누는 성만찬에 임할 때에, 우리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신앙의 결단을 새롭게 하려는 마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만큼 신성하고 귀한 예식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만찬에 참여하신 서마나 식구들의 마음과 삶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크고 귀한 은혜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河

외로움 저 너머

부활절을 기다리면서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보낼 때 마다 색다른 은혜를 체험하곤 합니다. 그래서 매년 맞는 부활절이지만 소홀히 하거나 관습적으로 지낼 수 없습니다. 사순절 마지막 주간에 마가복음을 묵상했습니다. 마가복음은 네 개의 복음서 가운데 가장 짧고, 사건의 전개가 빠르고 역동적인 복음서입니다.


영국 런던대학의 킹즈 칼리지 학장이었던 리처드 버리지라는 분은 네 편의 복음서, 한 분의 예수라는 책에서 마가복음에 그려진 예수님을 묶여진 사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첫 번째 장()에서 예수님은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표준새번역 막1:15)고 사자처럼 포효하십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속의 예수님은 참으로 외로우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교훈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귀머거리를 고쳐주면서 에바다(열려라)”라고 외치시고, 소경의 눈을 띠어주시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지도 못합니다.


예수님을 묶여진 사자라고 묘사한 것은 외롭게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3년 동안 동고동락하며 가르치셨던 제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넘깁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예수님 곁을 떠났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예수님을 버려도 자신만은 끝까지 예수님과 함께 하겠다던 베드로 역시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빌라도의 법정에 모인 백성들은 극악무도한 강도 바라바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예수님 편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급기야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다시 한번 묶인 사자처럼 포효하십니다.:“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이처럼홀로이셨던 예수님의 모습이 저에게 가장 크게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속의 예수님은  의연하게 행동하십니다. 외로움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임을 당당히 선언하면서 주어진 길을 걸어가십니다.

그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려는사명감때문이었을 겁니다. 제자들이 곁을 떠나고,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물론 로마의 군인들까지 얼굴에 침을 뱉으며 조롱을 하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상황에 휩싸이지 않으시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마음뿐이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큰 소리를 지르고 운명하실 때 성전 휘장이 두 폭으로 찢어지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옛 시대는 가고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예수님에 비하면 어림없지만 우리들 역시 신앙의 순례길을 걸어가면서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세상 천지에 혼자 서 있는 것 같은 영적고독의 순간들입니다. 앞으로 나가고 싶어도 손 발이 묶인 듯 꼼짝달싹하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때는 홀로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손발이 묶인 사자처럼 인생의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 간다 하여도 예수님처럼 포효하면서 외로움 저 너머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꿋꿋하게 인생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 끝에는 부활의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2008.3.20 SF한국일보)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제목의 연속설교 세 번째 시간입니다. 첫 번째 시간에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살려주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지난 시간에는 죄를 짓고 쫓겨나는 아담과 이브에게 구원의 표시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하나님의 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오늘은 우리 모두를 위해서 그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외아들을 내어주셨다는 사실을 올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요일 사도신경 강해에서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한 것을 두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별개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여기에 보혜사 성령까지 합쳐지면 자칫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세 분인 것처럼 잘못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똑같은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교리인데, 삼위일체 교리 속에는 우리의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신앙의 신비”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인간의 언어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을 구별해서 알려주셨습니다.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역시 하나님이시지만, 외아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우리의 이해를 도와주신 것입니다.

외아들은 가장 귀한 존재입니다. 외아들을 내어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귀한 것을 우리들을 위해서 내어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자녀 삼으시겠다는 표시입니다. 따라서 성경 속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부자지간으로 설명할 때, 그 속에 깃든 의미에 초점을 맞춰야지 실제로 하나님이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신다고 생각하면 잘못된 신앙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곧 자신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이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다른 모든 것을 주시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오늘 예배하는 하나님, 세상 속에서 우리가 의지하는 하나님, 골방에서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는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즉 외아들까지 내어주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우리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다음 한 주간,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시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느껴보시기 바랍니다.-河-

가죽옷

창세기 3장은 성경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장(章)입니다. 3장 속에는 인간이 어떻게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는지를 가르쳐줍니다. 뱀의 꼬임에 넘어간 이브가 아담과 더불어 선과 악을 구분하는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려는 교만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결국 아담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마에 땀을 흘려하는, 이브는 해산의 고통을, 뱀은 흙을 먹으면서 기어 다녀야 하는 저주를 받습니다. 결국 창세기 3장에서 첫 번째 인간인 아담과 이브가 죄를 범하므로,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근본적인 죄가 들어왔고, 결국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이 모든 죄를 깨끗이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3장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시작인 셈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에게 나타난 첫 번째 현상은 눈이 밝아진 것입니다. 그런데 눈이 밝아진 결과는 자신들이 벌거벗은 것을 알아차리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자신의 몸을 가립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목전에서 숨게 됩니다. 3:10절에서 아담이 이렇게 대답합니다.:“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여기서 “벗었다”는 것은 자신들의 죄가 드러났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신의 수치가 드러난 것입니다. 그것을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서 가렸지만 일시적입니다. 나뭇잎이 시들면 다시 수치가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담과 이브에게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해서 입히십니다. 여기서 가죽옷은 온 몸을 덮을 수 있는 튜닉(tunic)입니다. 죄를 덮어주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뜻합니다. 또한 가죽옷은 나뭇잎과 달리 영원함을 뜻합니다.

죄를 지은 아담과 이브를 에덴에서 내어 쫓으시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할 계획을 벌써 세워놓으신 것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가죽옷을 만들 때 짐승을 죽였을 것을 전제해서 훗날의 피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에게 가르쳐주셨다고 주장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자신의 명령을 어긴 것은 물론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던 아담과 이브에게 구원의 표시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십니다. -河-

삼일절에…

지난주에 한국일보와 함께 배달된 뉴욕타임즈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습니다. 미국인들의 지식수준이 형편없다는 기사였습니다. 일례로 TV퀴즈쇼에서 부다페스트가 수도인 나라를 묻는 질문에 출연자는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헝가리”라는 답이 주어졌지만 출연자는 의아해했습니다. 도리어“헝가리(hungary)”를“헝그리(hungry)”로 잘못 이해하는 실수도 범했습니다.

요즘세대는 돈을 많이 벌어서 자기만 즐겁게 살면 될 뿐, 문학작품을 읽거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고민하거나, 자신의 뿌리를 찾는데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깊은 샘처럼 사려 깊은 이웃을 만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쁜 이민생활, 유학생활에 쫓겨서 정말 중요한 것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특히 조국이나 겨레를 생각하는 것은 왠지 어색합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조상들이 갖고 있던 기상과 예의범절, 역사의식을 잊고 삽니다.

어제가 3.1절이었습니다. 3.1절은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독립운동입니다. 8.15해방이 열강들에 의해서 주어졌다면, 비록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3.1운동은 우리 민족 스스로 일제에 맞서서 독립을 도모했던 몸부림이었습니다.

전남 통영에서는 기생들이 반지를 팔아서 독립운동에 나섰다는 새로운 역사자료가 공개되었습니다. 그들을 따라서 3천명의 군중들이 만세운동을 했다니, 당시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염원을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독립선언서를 제창한 33인 가운데 기독교인이 15명, 그 가운데 감리교인이 7명이었습니다. 그때는 그만큼 기독교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3.1절이 되면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서 “기미년 3월1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독립만세..”- 3.1절 노래를 불렀습니다. 교장선생님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세 번씩 외쳤습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조금 살만하다고 머리와 가슴에 품어야 할 역사를 잊어버리지는 않았는지…재물을 쫓느라 마음과 생각을 풍요롭게 하는 덕목들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는지…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이민생활이지만 3.1절을 보내면서 두고 온 조국을 위해서 기도하고, 우리들의 뿌리를 뒤새겨 봄으로 한국인이라는 자긍심을 회복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河-

열매맺는 신앙

누가복음 8장의“씨 뿌리는 자 비유”를 살펴보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마태, 마가, 누가, 즉 공관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제가 특별히 누가복음 본문을 택한 것은 누가복음이“씨가 뿌려진 밭”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살펴본 세 가지 밭의 공통점은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신앙과 삶이 헛수고로 끝이 났습니다. 씨는 분명히 생명력과 가능성을 품고 있었는데 그만 밭이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세 가지 밭은 조금씩 차이가 있었습니다. 길가는 씨가 뿌려지자마자 밟히거나 새에 의해서 없어졌습니다. 싹을 틔울 겨를이 없었습니다. 바위는 싹이 났지만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했습니다. 가시떨기는 싹도 났고 뿌리도 깊이 내렸습니다. 그런데 가시떨기의 기운에 막혀서 위로 자랄 수가 없었고 결국 열매를 맺는데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의 해석에 의하면, 길가는 말씀을 듣자마자 잊어버리는 마음밭입니다. 세상에 온 마음이 가있기 때문입니다. 바위는 기쁨으로 말슴을 받지만 어려움과 시험이 닥치면 말씀을 잊어버리는 감정적이고 일시적 신앙입니다. 길가와 바위가 말씀을 듣는 마음에 문제가 있다면, 가시떨기는 환경이 문제입니다. 말씀을 잘 받았지만 환경의 시험을 이기지 못한 경우입니다. 염려, 세상에 대한 욕심, 세상의 쾌락에 대한 유혹이 마음속에서 생길 때 그만 말씀을 잃고 말았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 동안의 설교를 통해서, 길가와 같은 마음을 말씀을 꼭 붙잡음으로, 바위와 같이 딱딱한 마음은 죄와 상처를 몰아내고 찬양을 통해서 회복함으로,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은 기도를 통해서 가시떨기를 헤치고 위로 자라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말씀, 찬양, 기도는 우리의마음을 옥터로 변화시키는데 꼭 필요한 덕목들입니다.

이제 오늘 마지막으로 살펴본 좋은 밭은 앞에 나온 세 가지 나쁜 밭을 갈아엎어서 만들어진 옥터입니다. 좋은 밭은 길가와 달리 말씀을 잘 듣습니다. 바위 밭과 달리 말씀을 끝까지 간직합니다. 가시떨기와 달리 결국에는 열매를 맺습니다. 본문 속에도“듣고, 지키어…결실하고”라는 세 가지 동사가 적절히 쓰였습니다.

오늘로 연속설교를 마치지만, 서머나 식구들 모두 100배의 결실을 맺는 좋은 마음 밭을 소유하시길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河-

가시떨기를 헤치고

누가복음 8장에 나오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세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씨가 가시떨기에 떨어졌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팔레스타인 지역은 지중해성 기후로 햇볕이 무척 따가웠습니다. 그래서 야생에서 자라는 식물들은 건조한 기후와 따가운 햇볕을 견딜 수 있는 생명력이 강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성경에 종종 등장하는 찔레, 엉겅퀴, 가시나무가 모두 여기에 속합니다. 가시떨기로 밭의 경계를 삼아서 짐승과 사람들의 발걸음을 막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런 잡초류들이 밭에서 곡식들과 함께 자라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도 여기에 속합니다.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는 길가나 바위와 마찬가지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씨가 뿌려져서 싹이 나고 어느 정도 자랍니다. 그런데 가시떨기의 나쁜 기운에 막혀서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말라죽게 됩니다. 성경은 가시떨기에 “질식해서(choked)”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얼마나 가시나무의 세력이 강하면 그런 표현을 사용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가시떨기를 세 가지로 정리해 주셨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3가지 나쁜 가시들(three evil thorns)입니다. 첫 번째 가시는 염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염려는 지속적으로 근심케 하는 미래에 대한 불안함 등을 가리킵니다. 염려는 믿음이 자라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염려는 하나님께 던져버려야 합니다.

두 번째 가시는 재물에 대한 욕심입니다. 재물은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을 가져도 더 갖고 싶은 것이 재물입니다. 재물에 마음을 두면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자명한 진리입니다.

세 번째 가시는 세상의 쾌락입니다. 세상이 주는 즐거움은 말초적입니다. 대신에 자극적이고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힘듭니다. 염려, 재물욕, 쾌락은 모두 우리들 마음에서 생기는 것들입니다. 이 세 가지 가시는 중독성 요소를 갖고 있어서 한번 빠지면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서서히 질식시킵니다.

가시떨기에서 헤어 나오는 가장 좋은 비결은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노력이 요청됩니다. 자기절제와 경건의 훈련을 통해서 가시덤불로 가득한 우리의 마음 밭을 갈아엎고 옥터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열매 맺는 삶을 사는 비결입니다. -河-

사순절을 맞는 마음

올해도 어김없이 사순절을 맞습니다. 지난 수요일이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이었고 그 이후로 주일을 뺀 40일의 기간을 사순절이라고 부릅니다. 사순절은 부활절을 앞두고 기독교에서 2000년 가까이 지켜온 절기입니다. 사순절을 맞는 서머나 식구들께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첫째로, 사순절 기간 동안에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3년을 살펴보면, 예수님은 그에게 오는 모든 사람을 용납하셨고 사랑하셨습니다. 어렵고 힘겹게 사는 서민들의 마음을 공감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맡겨진 사명에 충실하셨습니다. 자신의 명예나 업적을 내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조차 숨기실 때가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복음서를 차근차근 읽어보십시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마음과 삶을 살펴보시고 그 속에서 예수님의 은혜를 깊이 느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사순절 기간 동안에 기도에 힘쓰시길 바랍니다. 사순절의 전통은 금식기도입니다. 금식은 우리의 식욕을 억제하면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겠다고 결심하는 표시입니다. 생업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 안에서 금식을 정하시고 기도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셋째로, 사순절 기간 동안 남모를 선행을 실천해 보십시오. 교회의 전통에서 사순절 금식은 곧 선행으로 이어졌습니다. 금식해서 절약한 물질로 남을 도왔는데,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을 희생하면서 남을 돕는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가족들에게, 주위의 이웃들에게, 남모르는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어보십시오. 그만큼 세상이 밝아질 것입니다.

사순절을 뜻 깊게 보낸다면 1년 중 적어도 10분의 1(시간의 십일조)을 하나님께 구별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고 삶에 실천함으로 예수님을 쏙- 닮은 서머나 식구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河-

수요예배에서는 (2)

지난 한 달 동안 수요예배에서는“복음”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가장 쉬워 보이지만 막상 설명하려면 힘든 것이 복음입니다. 하도 들어서 익숙하지만 실제로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면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난 4주에 걸쳐서 복음에 대해서 정리했고, 복음의 능력을 힘입어서 2008년을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앞으로 올 해 상반기에는 주일예배 시간에 함께 고백하는 “사도신경”과 함께 찬양으로 드리는 “주기도문”에 대해서 강해할 계획입니다. 사도신경이 성경에 없기 때문에 경하게 여기는 교파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신경만큼 기독교의 신앙을 잘 정리한 고백문도 없습니다. 게다가 사도신경은 초대교회에 그 뿌리를 두고 있고, 오늘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한 마음으로 고백할 때 사도신경을 능가할 어떤 고백문도 없습니다. 따라서 사도신경의 유래와 내용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말 그대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기도의 형식과 내용을 모두 포함한 완벽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주기도문을 가운데“기도”는 빼고 “주..문” 외우듯이 빠르게 암송합니다. 또한 교회에서 어떤 모임을 마무리할 때 쓰는 폐회문구가 되어 버렸습니다. 사도신경 강해에 이어서 주기도문을 함께 살펴봄으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하는 서머나 성도님들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수요예배가 매우 중요합니다. 40분 정도의 성경공부 시간입니다. 하지만 주일예배나 새벽예배에서 다루지 못하는 내용을 심도 있게 다루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생업에 바쁘시고 교통편이 여의치 않아서 참석하지 못하시는 분들이 많으신 것이 못내 아쉽고 죄송스럽습니다. 그래도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올 해 상반기 수요예배에 참석하시길 권합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을 정리하는 유익하고 은혜로운 시간이 될 것입니다.

목사로서 소원이 있다면, 하나님 말씀을 올바로 가르칠 수 있고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쉽고 명료하게 전달할 수 있는 시간을 자주 갖는 것입니다. 올 상반기 수요예배를 통해서 우리들의 신앙이 정돈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부요한 서머나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河-

믿음의 시작 (Challenging Start)

2008년 첫 달을 맞아서 저는 “시작”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도바울의 말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앞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무작정 앞만 보고 나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들 앞에는 확실한 푯대가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을 닮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푯대입니다.

또한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우리들 인생길의 목표입니다.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닮고 그 안에서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 앞을 바라보며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앞을 향해서 나가다보면 장애물을 만납니다. 여호수아 3장에서 가나안땅에 들어가려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요단강이 가로 막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꼭 붙잡고 믿음으로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넘실거리는 요단강에 법궤를 메고 들어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여호수아와 제사장들은 법궤를 메고 요단강에 첫 발을 내딛습니다. 그들의 발바닥이 강물에 닿자마자 물이 벽을 이루며 멈추었습니다. 성경은 강물이 상류와 하류에 각각 얼음처럼 쌓아져서 정지했다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인생길의 요단강에 발을 내듣는 모험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무모한 모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면서 믿음으로 첫발을 내딛는 모험입니다. 일단 내딛기로 마음먹으면, 발바닥만 닿아도 강물이 갈라져서 길이 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보장된 모험입니다.

2008년도에는 서머나 식구들 각자 하나님 안에서 모험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앞을 가로막는 요단강이 있다면 과감히 발을 내딛는 것입니다. 그동안 꼭 시작하고 싶었는데 자신이 없어서 망설이던 일이 있다면 한번 믿음으로 시작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와 능력이 우리 안에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과감히 여러분 앞을 가로막고 있는 요단강에 첫발을 내딛으십시오. 이전에 알지 못했던 놀라운 일이 생길 것입니다. 믿음은 늘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모험입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