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배에서는 (1)

제가 일주일 동안 인도하는 예배는 크게 세 가지인데 각 예배를 차별화해서 말씀을 전합니다. 주일예배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에 초점을 맞춥니다. 일주일 동안 힘겹게 세상에서 사신 서머나 식구들께 힘을 주는 말씀을 준비합니다. 

새벽기도회에서는 제가 큐티한 것을 메시지화해서 말씀을 전합니다. 하루를 살면서 생명의 양식으로 삼을만한 말씀을 한 가지로 요약해서 메시지를 준비합니다.

수요예배에서는 신앙성장에 유익한 말씀을 시리즈로 전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 성도님들께서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도록 돕는 시간입니다. 저는 이처럼 서머나 성도들께서 하나님 말씀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체험하시기를 기도하면서, 말씀을 준비하고 전하는 것에 최고의 우선순위에 두고 있습니다.

올 한 해 동안 수요예배에서는“참된 복이란?”“에베소서1:1-6절강해”“고난극복”“유다서강해”“은혜 안에 거하는 삶”에 대해서 시리즈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수요예배에 참석하시는 분들께서는 제목만 들어도 내용이 기억나실 겁니다. 물론 많이 잊어버리셨겠지요? 하지만 보슬비에 옷이 젖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옵니다. 자꾸 듣다보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커지고, 성품이 변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저절로 품게 될 것입니다.

이제 남은 기간 동안 6주에 걸쳐서“신앙성숙”이란 제목으로 수요예배 말씀을 준비할 계획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예수님을 닮아 가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의 성숙입니다. 갓난아이의 신앙은 작은 시험에도 심하게 흔들리고 요동을 칩니다. 자기 본능대로 살아갑니다. 어린아이의 신앙 역시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분별력이 부족하고 이기적인 신앙입니다. 장성한 신앙은 교회는 물론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됩니다. 하나님께 무엇을 요청하기보다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해드릴지 먼저 생각합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서, 예수님을 꼭 빼닮은 “예수쟁이”로 성숙해 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신앙입니다.

이번 시리즈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의 신앙이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 점검하실 수 있을 겁니다. 올 해 마지막 수요예배를 통해서 말씀의 은혜가 풍성히 임하고,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河-

추수감사절 이야기

올해도 어김없이 추수감사절을 맞이합니다. 아시다시피 추수감사절은 한국의 추석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가장 큰 명절입니다. 추수감사절이 되면 4천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가족의 품을 찾아 길을 떠난다고 합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청교도들의 전통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1620년 겨울, 102명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를 타고 현재 보스턴의 남쪽에 위치한 플리머스에 도착하였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대서양의 거친 파도를 이겨냈지만 도착하자마자 동부의 혹독한 겨울을 이기지 못하고 거의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됩니다. 살아남은 50여명의 청교도들 역시 신대륙의 생소한 환경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때 인근지역에 살고 있던 아메리칸 인디언 원주민들이 청교도들을 도와줍니다. 곡식을 심는 법,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잡는 법, 독이 있는 채소를 분간하는 법 등을 원주민들을 통해서 배운 청교도들은 이듬해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거둡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 자신들을 도왔던 원주민들을 초대해서 축제를 벌였던 아름다운 전통이 추수감사절 속에 깃들어 있습니다. 그렇게 해마다 추수감사절을 지키다가 1863년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이었던 아브라함 링컨이 추수감사절을 국가의 공휴일로 제정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칠면조 요리입니다. 칠면조는 원래 멕시코 북부와 미국동부가 원산지인 꿩 과에 속하는 동물입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칠면조를 유럽에 전해주어서 유럽에서는 일찍이 칠면조 요리가 유행했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목덜미의 깃털이 일곱 가지 색깔로 변한다고 해서 칠면조라고 부릅니다. 칠면조가 추수감사절 음식이 된 것은 청교도들이 추수감사절에 야생터키를 잡아서 인디언들과 함께 잔치를 벌인 전통 때문입니다. 요즘도 추수감사절을 맞으면, 미국 전역에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터키들이 식탁에 오릅니다.  

추수감사절 전날 백악관에서는 대통령이 터키 한 마리를 놓아주는터키 사면식(turkey pardoning)”이 거행됩니다. 백악관의 추수감사절 만찬을 위해서 선택된 칠면조들이 미국의 유명한 농장에서 일년 동안 특별관리를 받으면서 사육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한 마리가 만찬석상에 올라가는 대신 풀려나서 그 여생을 동물원이나 야생 농장에서 호강을 하면서 보내는 행운을 잡는 것입니다.

트루먼 대통령이 1947년에 제정해서 올해로 60번째 터키 사면이 이루어질 예정이랍니다. 수많은 터키들이 죽음을 당하는 것에 미안한 마음을 갖는 미국국민들의 마음을 대통령이 대신 풀어주는 예식처럼 생각됩니다. 올 해는 과연 어떤 터키가 부시 대통령에게 선택되어서 목숨을 부지하게 될지 자못 궁금합니다. 또 동료들을 뒤로 하고 홀로 풀려나는 터키의 마음은 과연 편안할지!  

이처럼 추수감사절은 한 해를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리는 절기입니다. 또한 청교도들이 원주민들의 도움 없이는 살아남기 힘들었듯이 우리들 역시 부모형제 그리고 이웃의 도움이 있었기에 올해도 무사히 추수감사절을 맞게 되었음을 감사하면서 이웃들과 더불어 따뜻한 마음의 정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올 추수감사절에도 세계 곳곳에서 아름답고 정겨운 이야기들이 많이 들려왔으면 좋겠습니다. 복되고 풍성한 추수감사절 맞으십시오. (S.F 한국일보 종교칼럼. 2007.11.15)  

주를 찬양하라

구약 성경의 시편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예배할 때 부르던 찬양과 기도들입니다.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는데 각 글자가 음가(音價)를 갖고 있어서 랍비들은 성경에 운(韻)을 붙여서 노래하듯이 읽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본 시편47편 역시 한님을 찬양하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시편47편을 두고 어떤 학자들은 왕이 보좌에 나가는 즉위식을 연상시킨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학자들은 다윗이 오벳에돔에 있던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온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오늘 다윗의 입장에서 말씀을 준비해서 전했습니다.

시편 47편의 전반부는 승리의 찬양입니다. 만왕의 왕 되신 하나님 앞에 세상의 어떤 나라도 맞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열방을 그 백성들의 발아래에 두셨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에 국가를 세운 후에 주변 국가들을 차례로 물리친 것을 연상시킵니다. 우리들 역시 왕 되신 하나님을 굳게 믿고 앞으로 나갈 때, 세상의 어떤 세력도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환난 날에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47편의 후반부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향한 찬양입니다. 특별히 6절에서는 찬양하라는 말씀이 네 번 반복됩니다. 동서남북 온 땅이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뜻일 겁니다. 우리들 삶의 모든 지경에서 주님을 찬양하라고 특별히 네 번을 반복한 것 같습니다. 이제 여호와의 법궤가 다윗성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동안은 전쟁처럼 필요할 때만 여호와의 능력이 임했다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들어와 계십니다. 우리들 마음이 하나님을 모시는 보좌인 셈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우리들이 할 일은 주님의 이름을 가장 높이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지존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통해서 자신이 높여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가정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온전히 높여드립시다.-河-

큐티학교를 시작하면서

오늘부터 큐티학교가 문을 엽니다.

큐티(QT)는 영어로 Quiet Time(고요한 시간)의 준말입니다. 저는 80년대 초반에 큐티를 처음 접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 교회에 큐티가 보급되지 않았고 몇몇 선교단체에서 큐티를 소개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물론 시중에 나와 있는 교재도 없어서 영문번역본을 선배들이 일일이 손으로 써서 복사한 것을 갖고 큐티를 하였습니다.

처음 큐티를 할 때 간사님과 선배들로부터 이런 저런 충고와 제안을 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때도 큐티학교와 비슷한 시간이 있어서 배운 것을 실습하고 숙제를 제출하면서 큐티를 배웠는데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힘들었지만, 매일같이 큐티를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체험했었습니다. 그 이후로 어언 30년 가까이 큐티를 해오고 있습니다.

큐티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하나님과 단 둘이 만나는 거룩한 시간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단둘이 만나는 시간이기에 하나님을 매우 친밀히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비밀스러운 데이트를 즐기는 시간인 셈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 한 구절 한 구절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들은 그 말씀을 곱씹고 깊이 묵상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우리의 마음과 삶믈 올려드립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주일학교 학생들부터 할머니 권사님들까지)께서 큐티를 하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큐티학교를 정기적으로 개설할 예정이니 이번에 등록하지 않으신 분들은 다음 기회에 꼭 참석하시길 바랍니다.

큐티학교에 오시는 분들은 그곳에서 배우시겠지만, 참석하지 못하시는 분들도 매일같이 제가 주보에 소개하는“첫 아침을 주님과 함께”본문을 함께 읽으시면서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큐티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익히지 않으셨어도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깊은 깨달음을 주실 줄 믿습니다. 매일같이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삶의 활력소가 될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 6주간 주보에 소개된 큐티 본문 가운데 하나를 택해서 큐티 방식에 가깝게 말씀을 전할 예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으로 우리를 먹여주실지 기대가 됩니다.-河-

종교개혁 주일에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은 마틴 루터가 당시의 타락한 캐톨릭교회를 비판하는 95개조의 반박문을 비텐베르그 대학교 성당 정문에 게시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때가 1517년 10월 31일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개신교회는 10월 마지막 주일을 종교개혁주일로 지킵니다.

오늘 설교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마틴루터는 그리 강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한 것도 사회적인 파장과 개혁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종교를 놓고 학문적 토론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본심과 상관없이 종교개혁의 불길이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 성당을 건축할 목적과 은행 빚을 갚을 목적으로 교황청에서 면죄부를 팔고, 성직자들이 권력과 결탁하면서 교회 안에 물질과 권력을 중시하는 세상의 물결이 흘러들어왔습니다. 게다가 힘없는 서민들과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편에 서 있어야 할 교회가 가진 자들 편에 서면서 이미 중세의 교회는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잊어버린 지 오래였습니다. 그 즈음 마틴 루터가 교회를 반박하는 성명서를 게시하자 사람들의 마음속에 종교개혁의 불길이 붙여진 것입니다. 더 이상 참지 못하신 하나님께서 마틴 루터를 사용하신 것이지요.

요즘 개신교를 가리키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저항자)라는 말 역시 당시 캐톨릭 교회에 반기를 들었던 루터와 그를 지지하는 제후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마틴루터의 종교개혁은 세 가지 캐치프레이즈로 요약됩니다.:“오직 믿음으로”“오직 은혜로”“오직 성경으로.”이 세 가지는 우리 개신교회가 세워진 기초석과 다름없습니다. 행위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우리들은 은혜로 살아갑니다. 신앙과 교회의 기준은 오직 말씀뿐입니다.

더불어 우리 개신교인들이 명심할 것은 끊임없는 개혁입니다. 고인 물은 썩게 마련입니다. 현실에 안주하면 하나님보다 사람의 뜻이 앞서게 됩니다. 또한 변화와 개혁은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원동력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날마다 새롭게 다가오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과 교회가 말씀에 따라서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믿음 안에서, 은혜로, 말씀으로 변화를 경험하면서 힘차게 살아가시는 서머나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 -河-

피난처되시는 주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성경은 두 가지로 정리해 줍니다. 구약성경 창세기에서는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낸다(창3:18)고 했습니다. 가시덤불은 우리를 얽어맵니다. 엉겅퀴는 생명력이 강해서 아무리 뽑아내도 자꾸만 나옵니다. 그래서 세상을 살면서 어려운 일이 생기고 발을 얽어매는 사건들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신약성경 빌립보서에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어그러지고 뒤틀렸다고 표현합니다. 세상이 구조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바른 것을 찾기는 불가능합니다. 세상에 빠지면 자신도 모르게 어그러지고 뒤틀리게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선한 사람이 세상 속에서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어려움이 닥칩니다. 세상자체가 뒤틀려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타락하고 보기 흉하게 변한 것은“죄”때문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영역인 선악과를 먹음으로 인해서 세상에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죄가 온 세상을 망쳐놓았습니다.

죄는 마치 암세포와 같습니다. 건강한 육체에 암세포가 생기면 건강한 세포를 오염시킵니다. 그리고 급기야 생명을 빼앗아갑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죄가 침투하면 건강한 영혼도 어그러집니다.

이렇듯 죄 많은 세상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늘 힘겹습니다. 시편기자도 의인에게 고난이 많다고 했습니다.(시34:19) 바르게 살면 살수록 어려움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뒤틀린 세상이 그를 억누르고 괴롭혀서 그렇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들이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피난처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시14:6)

세상 속에 사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피난처가 되어주십니다. 피난처라는 말 속에는 1) 우리가 그 품속으로 달려가면 우리를 맞아주시는 하나님, 2) 산성이 되어 주셔서 어떤 세력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지켜주시는 하나님, 3) 안전하게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깃들어있습니다.

다음 한 주간동안 서머나 식구들 모두 하나님을 피난처 삼아서 하늘의 위로를 경험하시고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능히 승리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河-

칭찬과 격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한국의 연예오락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상대방을 비난하는 말과 저속한 말을 사용해서 문제라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사회자와 출연진들이 서로를 비하하고 조소하면서 시청자들로 하여금 대리만족을 느끼게 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한국의 오락 프로그램들이 방송이 지켜야 할 선을 넘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기사를 읽으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한번 우리의 입을 떠난 말은 다시 뒤돌아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얼굴의 한 가운데 입을 한 개만 만들어 놓으신 것 같습니다. 성경의 교훈대로 입에 파수꾼을 세워놓고 신중하게 말을 하라는 뜻이겠지요. 또한 남을 비난하고 비판하는 말은 상대방에게 커다란 상처를 입힙니다. 어떤 경우는 말로 인해서 받은 상처가 평생 동안 쓴 뿌리가 되어서 마음 속 깊이 자리잡기도 합니다.

<카네기 인간관계론>이라는 책에서는 비난을 집비둘기에 비유했습니다. 집비둘기는 언제나 때가 되면 집으로 다시 돌아온다고 합니다. 비난 역시 집비둘기처럼 언젠가는 자신에게 다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칭찬은 무쇠도 녹인답니다. 칭찬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일의 능률을 향상시키는 힘이 있답니다. 또한 모든 사람들은 인정받고 싶어하고 칭찬받고 싶어하기에 칭찬을 많이 하면 그만큼 좋은 친구들을 얻을 수 있답니다.

어떤 여성이 자기계발 프로그램에 참석했습니다. 한번은 그 프로그램에서 남편들에게 자기 부인에게 요구하고 싶은 것을 여섯 가지만 적어서 프로그램 진행자에게 제출해 달라는 과제를 주었습니다. 대부분의 남편들은 얼씨구나 하고 부인에 대한 불만 가운데 가장 큰 것부터 여섯 가지를 골라서 제출했습니다. 그런데 한 남편은 다음 날 아침에 꽃집에 전화를 해서 붉은 장미 여섯 송이를 자기 아내에게 배달해 달라고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장미와 함께 “당신에게는 고쳐야 할 여섯 가지가 하나도 없소. 나는 지금 당신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오.”라고 쓴 카드를 보냈답니다. 남편이 어떤 단점을 지적하고 비판할 지 가슴 졸이던 아내는 장미 여섯 송이와 카드를 받고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남편을 맞이했답니다.

우리 모두는 비난보다 칭찬을 듣고 싶어 합니다. 국어사전에서 칭찬을 “좋은 점을 지적해 주고 잘한다고 추켜세우는 것’이라고 정의해 놓았습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칭찬거리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10가지 가운데 9가지가 마음에 안 들어도 마음에 드는 1가지를 갖고 칭찬의 말을 건넬 수 있습니다.

격려는 “마음이나 기운을 북돋아 주는 것”입니다. 칭찬이 과거나 현재에 일어난 일을 대상으로 한다면, 격려는 앞으로 생길 좋은 일을 기대하면서 힘을 북돋아 주는 것입니다. “잘 할 수 있습니다.” “해 내실 수 있을 겁니다.” “힘 내십시오”라는 격려의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우리들은 이미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칭찬과 격려의 말은 듣는 사람에게 약이 됩니다. 힘이 됩니다. 그리고 용기를 줍니다. 격려는 무너진 인생을 다시 세워주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 동안 만나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칭찬을 해 주세요. 손을 꼭 잡으면서 격려의 말을 건네보세요. 무엇보다 우리들 자신의 마음이 밝아지고 행복해 질 겁니다.(SF 한국일보 종교칼럼, 2007.10.18)

말씀대로 사는 삶

천국백성들인 우리들이 세상 속에서 살다보면 여러 가지 예상치 못한 일들을 겪습니다. 그래서“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저 하늘에 있네.”라는 가사의 복음성가가 생겼나 봅니다. 그렇다고 세상살이를 푸념과 실의에 가득 찬 채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세상에 보내신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을 두고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은 어두움을 몰아냅니다. 아무리 깜깜절벽이라도 작은 촛불 하나면 어두움은 힘을 쓰지 못하고 사라집니다.

소금은 부패를 방지해 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는 곳마다 어두운 세상이 밝아져야 합니다. 더럽고 썩어져가는 세상이 신선함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들은 빛과 소금으로 살지 못합니다. 남을 돕거나 세상을 밝히는 것 이전에 우리들 자신부터 부족합니다. 정리할 것이 많습니다. 자신이 바로 서있지 못하니 남을 돕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변화무쌍한 세상 풍조 앞에서 우왕좌왕하고, 때로는 유혹에 빠져서 자신도 모르게 세상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도 많습니다. 기독교인들의 무력한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시편 37:31절에서는 세상살이에서 실족하지 않고 꿋꿋하게 걸어가는 비결이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마음속에 하나님의 법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있을 때, 그 말씀이 우리의 삶을 통제합니다. 길을 가르쳐줍니다. 잘못된 것을 지적해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깨우쳐줍니다.

말씀을 마음에 두는 비결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이 큐티(Quite Time:QT경건의 시간)입니다. 하루 가운데 일정한 시간을 정해놓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은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도록 돕습니다. 말씀대로 살면 일상의 삶에서 실족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시작될 큐티학교를 통해서 말씀을 마음에 품고 실족하지 않는 삶을 사는 비결을 배우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은 인생길을 비추는 빛입니다.-河-

여호와께서 붙드심이로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진실로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두고 신명기 33장 29절에서는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Happy are you, Oh Israel!)”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우리들은 행복자들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해 주셨고,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었고,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니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시편 37:23-29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의롭게 된 천국백성들에게 임하는 복을 다섯 가지(五福)로 정리해 놓았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23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정해주시고 그대로 인도하십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정해주셨다면 그 길은 최선의 길임에 틀림없습니다. 무엇보다 그 길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붙드심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주십니다(24절). 마치 엄마가 아기의 손을 붙잡고 길을 가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손을 붙들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넘어지지만 완전히 엎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손을 붙잡고 있는 한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셋째는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믿음과 선행은 후손들에게 그대로 돌아갑니다(26절). 우리들이 뿌린 신앙의 씨앗이 후손들에게 복으로 임한다는 축복선언입니다.

넷째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입니다(28절). 변덕쟁이 우리들이 종종 하나님 곁을 떠날 때가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와 늘 함께 하시고 지켜주십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복은 땅을 기업을 받는 입니다. 물론 여기서 땅은 이 세상의 부동산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들은 천국에 땅을 상속받은 복덩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삽시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이 받은 복은 이처럼 세상의 복과 차원이 다릅니다. 세상의 복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이 복을 누리는 비결은 지난 두 시간에 걸쳐서 배운 천국백성의 삶의 규칙을 그대로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행복에 겨운 그리스도인으로 삽시다! -河-

여호와께 맡기라

시편 37:1-9절 말씀을 통해서 하늘나라에 시민권을 둔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그러지고 뒤틀린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한 마디도 요약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trust in the Lord)가 거친 세상에서 승리하는 최고의 비결입니다.

또한 오늘 배운 대로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맡기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 염려와 근심 그리고 앞길까지도 하나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맡기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의미가 “굴리다”이듯이 우리의 모든 짐을 하나님께 굴려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길을 홀가분하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인생길을 맡긴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시편 37편7-9절에 나옵니다.

째는 잠잠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여기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현재의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린다고 두 손을 놓고 있으면 안 됩니다. 사람을 만나야 한다면 만나야 합니다. 실력을 키워야 한다면 열심히 노력해서 탁월한 능력을 갖춰야 합니다.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오의 빛처럼 높이실 것입니다.

셋째로, 어그러지고 뒤틀린 세상에 대해서 분노하지 말아야 합니다.세상에 대해서 분노하면 저절로 불평이 나옵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사람에 대해서 죄를 짓고 때로는 세상 유혹에 넘어갑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이나, 실패한 경험,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분노한다면 그것은 아직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했다는 표시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상처와 분함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때 상황에 관계없이 마음 깊은 곳에서 감사가 나옵니다. 하늘의 평안을 경험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온전히 맡깁시다. 작은 것부터 커다란 인생의 문제까지 하나님 손에 얹어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한 주간을 시작합시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책임져 주실 겁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