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머나 교회는…

서머나 교회는

직장생활을 하다가 뒤늦게 목회의 길에 접어들었지만 저는 대학시절부터 교회와 선교단체(IVF)에서 교사와 리더로 영적리더쉽을 훈련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많은 목회자들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제가 목회한다면 이런 교회를 세우고 싶은데’라는 꿈이 있었습니다. 2000년 여름, 하나님께서는 생각지도 않게 인디애나로 저를 보내셔서 목회의 꿈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목회를 시작하면서 평생 동안 제가 목회하는 교회에서 표어로 삼기로 한 세가지 교회의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교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 되신 교회, 성령의 임재와 역사가 있는 교회.
구약의 인물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인물이었습니다. 다윗의 일생이 파란만장하였지만 하나님 앞에서 다윗만한 인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쓰셔서 이스라엘 왕국을 세우셨고, 무엇보다 그의 혈통 속에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께 쓰임 받은 가장 큰 이유는 그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서머나 교회가 하나님께 쓰임 받기 원한다면 우선 하나님 마음에 합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우리 교회의 사명으로 알고 실천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마음껏 축복하시고 귀하게 사용하실 겁니다.

교회의 주인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예수님의 약속대로 성령이 강림하고 그 능력으로 성도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말씀을 배우고 교제함으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8절에서는 교회를 두고 “하나님께서 피값”으로 사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심으로 그를 믿는 자에게 구원이 임했고, 구원을 얻은 성도들이 모여서 교회가 되었습니다. 우리 서머나 교회의 주인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꼭 기억합시다.

교회 안에는 성령의 임재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은 지혜의 영이요, 우리를 돕는 보혜사가 되십니다. 무엇보다 성령은 능력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과 세상에 변호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충만한 교회는 은혜가 넘치고 활력이 넘칩니다. 모든 성도들의 삶이 능력으로 가득 차고, 교회생활이 즐겁고, 하나님의 일에 자원하는 손길이 넘치게 마련입니다. 성령 충만한 성도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교회를 세워가고, 세상으로 흩어짐은 분명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령 충만한 성도들,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서머나 교회의 사명은…

서머나 교회 담임목사로 갖고 있는 꿈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사역은 다음의 세 가지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입니다.

첫째로, 복음이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뭐니 뭐니 해도 복음을 전하고 복음 안에서 예수님을 닮은 제자들을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우리 안에 살아있고, 그 복음의 능력이 서머나 성도들의 삶을 움직이며, 세상으로 전파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사람을 세우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16:9)라는 말씀을 기억합니다.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길이 머무는 서머나 교회와 성도님들이 되도록 기도와 말씀으로 열심히 훈련하며 전심으로 하나님을 추구하기 원합니다. 또한 실제로 2세와 우리 교회를 찾는 젊은이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쓰시는 인물들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교회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서 돕게 될 것입니다.

셋째로, 선교와 구제에 힘쓰는 교회입니다. 고인 물은 썩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것은 세상 속으로 흩어지기 위함입니다. 타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 한국의 농촌이나 어촌에 있는 미자립 교회, 마지막으로 소년소녀 가장을 책임지고 전적으로 돕기 원합니다. 이 밖에 우리 교회가 속한 지역사회를 돕는 일에도 교회가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앞에서 말씀 드린 우리 교회의 세 가지는 우리 교회가 지속적으로 실천해야 할 교회의 사명입니다.

이제 당장 올 해 안에 함께 이루고 싶은 일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배를 통한 영적 부흥입니다. 저는 주일예배와 수요예배 그리고 새벽예배를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 여러분들도 기쁘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예배에 동참하셔서 주일 예배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꼭 체험하시길 부탁 드립니다. 수요예배도 가능하시면 많이 참석하시길 바랍니다. 부흥회와 성경공부가 합쳐진 뜨거운 수요예배로 꾸며가겠습니다.

둘째로, 우리 모든 서머나 식구들께서 동참하실 일이 있습니다. “잃은 양 찾기” 캠페인입니다. 주변에 신앙생활을 하다가 이런 저런 이유로 쉬고 계신 분들이나, 예수님을 아직 알지 못한 분들을 올 한해 동안 한 분씩만 전도합시다. 먼저 잃은 양 전도 대상자를 기도가운데 선정하시고, 지속적인 권면과 도움을 통해서 교회까지 꼭 인도하시는 겁니다. 오늘 주일부터 당장 기도를 시작하시고 대상자가 선정되면 저에게 이름을 주십시요. 저도 기도로 돕겠습니다.

그리고 서머나 식구들 각 개인과 가정의 신앙성장이 있어야겠습니다. 성경공부 모임을 만들어서 여러분들의 신앙성장을 돕겠습니다. 열심히 심방을 다니겠습니다. 심방이 필요하신 분들은 망설임 없이 말씀해주십시요.여러분의 가정과 사업체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심방 역시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신앙성장을 위해서 기도와 말씀 읽기에 전념합시다. 기도하지 않는 삶은 매우 불안합니다. 말씀에 기초한 신앙만이 요동치 않고 견고합니다. 교회적으로는 물론 성도님들 각자가 올 한해 기도와 말씀에 진력하기로 새롭게 결심하시길 부탁 드립니다.

서머나 교회에 꼭 가보고 싶다.

계획을 세우고 일을 시작하지만 그 일을 이루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첫 번째 표어가 “하나님 마음에 합한 교회”입니다. 우리 서머나 교회가 앞으로 더욱 풍성해지고 아름다운 교회로 세워지기를 함께 기도합시다. 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 혼자서도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함께 일하실 일꾼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저 역시 더불어 교회를 세울 동역자들이 서머나 교회에 많아지기를 소원하고 새벽마다 이것을 두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 힘을 합쳐서 우리 교회가 샌프란시스코는 물론 북가주 전역에서 꼭 가보고 싶은 교회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성령 안에서 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 마음에 꼭 합한 교회를 세워갑시다.

서머나 교회에서 여러분들을 만나서 목회의 꿈을 펼치게 되고, 무엇보다 여러분의 사랑과 기도 속에 목회를 시작하게 됨을 거듭 감사 드립니다.

쉼표와 숨표

저는 노래를 부를 때 박자를 잘 못 맞춥니다. 쉽게 말해서 “박자 치’인 셈입니다. 한번은 오케스트라 연주회에 간 적이 있습니다. 웅장한 음악과 감미로운 선율도 저의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심벌즈 연주자의 동작에 제 눈이 고정되었습니다.저처럼 박자를 못 맞추는 사람에게는 한 참을 쉬고 있다가 이따금씩 박자에 맞춰서 심벌즈를 울리는 모습이 참 신기했습니다.저는 찬양을 하면서 손뼉을 쳐도 조금만 지나면 옆에 분들과 박자가 맞지 않아서 어색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노래를 부르면서 박자를 맞추지 못하는 것은 바로 쉼표 때문입니다. 음정은 비교적 잘 잡습니다. 음표의 길이도 적당히 맞출 수 있습니다. 그런데 쉼표가 나오면 속수무책입니다. 속으로 ‘하나, 둘’을 세어도 번번이 들어가는 박자를 놓칩니다. 못 갖춘 마디로 시작하면 여지없이 두 번째 가사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저는 노래하다가 쉼표가 나오면 편안히 쉬지 못하고,피아노 반주자나 옆 사람의 눈치를 살펴야 합니다.

노래에서 쉼표뿐만 아니라 숨표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숨표에 따라서 숨을 쉬어야 노래의 가사가 제대로 전달된답니다. 합창을 할 때는 함께 숨을 쉬어야지, 숨표를 무시하고 제 멋대로 숨을 쉬면 다른 사람과 호흡이 맞지 않습니다.그때도 호흡이 짧은 저는 틈틈이 숨을 쉽니다. 그러다 보면 박자를 놓치기 일쑤입니다.

음악뿐 아닙니다. 우리들의 삶에도 “쉼표와 숨표”를 지켜야 합니다. 쉴 때 쉬지 않으면 나중에 피곤이 몰려와서 집중력을 잃기 쉽습니다. 인생길의 쉼표를 지키지 않고 일만하다가 중한 병에 걸리는 경우도 종종 봅니다.  “숨쉴 틈도 없이 바쁘다’는 말이 있는데, 아무리 바빠도 숨은 쉬고 살아야 합니다. 하늘을 쳐다보면서 심호흡을 하고 나면 마음이 상쾌해 집니다. 숨쉴 틈도 없이 바쁘게 산다는 것이 자랑거리는 아닙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쉼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엿새 동안 일하시고 일곱째 날 안식함으로 “쉼”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성경의 “안식”은 세상일의 중단입니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에는 집안의 종들까지 일손을 멈춰야 합니다. 세상일을 접고 온전히 하나님을 생각하고 예배하는 시간입니다. 세상에서 6일 동안 열심히 일하고, 일곱째 되는 날은 세상일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안식일은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의 모드 전환입니다.

현대인들이 일주일 가운데 하루를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루를 쉰다고 해도 그 동안 밀린 일들을 해야 합니다. 눈코 뜰새 없이 바쁜 이민생활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만큼 우리들은 직장과 사업 그리고 복잡한 인간관계에 쫓겨서 살아갑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쉬는 법을 터득할 만큼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만큼 바쁘게 살아왔습니다. 그래도 이제부터 조금 쉬어갑시다. 인생의 쉼표와 숨표를 지키면서 살아봅시다. 하루를 온전히 쉬지 못한다면, 일주일에 단 몇 시간 또는 몇 분이라도 세상 일을 내려놓고 숨 고르기를 하면서 하늘나라의 삶을 연습해 봅시다. 그래야 인생의 엇박자를 막을 수 있습니다. (SF한국일보 종교칼럼 2007.8.23)

얍복강 가에서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어머니 복중에서부터 형 에서와 다퉜습니다. 에서의 발 뒤꿈치를 붙잡고 둘째로 세상에 태어났지만 장자권에 대한 그의 집념은 대단했습니다.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사더니,훗날 아버지 이삭이 노년이 되었을 때는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습니다. 형 에서의 복수심에 위협을 느낀 야곱은 외삼촌이 있는 메소포타미아로 피신을 갑니다. 외삼촌 집에서 야곱의 삶은 그의 말대로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낸” 20여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얻기까지 14년이 흘렀습니다. 외삼촌 라반은 야곱의 품삯을 열 번이나 바꿔치기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야곱은 온 가족을 이끌고 가나안을 향해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이 눈 앞에 보이는 얍복이라는 강가에 도착했을 때, 거기서 큰 문제에 봉착합니다. 그의 목숨을 노리던 형 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데리고 그를 죽이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외삼촌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날이 밝으면 형 에서와 맞닥뜨려야 합니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입니다.

칠흑 같은 밤입니다. 가족들을 먼저 얍복강을 건네 보내고 야곱은 홀로 강가에 남았습니다. 그때 누군가 야곱에게 와서 싸움을 걸어옵니다. 야곱은 날이 새도록 그와 씨름했습니다. 야곱은 결코 지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야곱이 씨름하는 장면을 두 인물 모두 “그(he)”라는 3인칭 주어를 사용해서 관람석에서 씨름경기를 관전하듯이 리얼하게 묘사했습니다. 비록 환도뼈가 부러졌지만 야곱은 끝까지 견딥니다. 마침내 그의 이름이 하나님과 사람을 이겼다는 이스라엘로 바뀌게 됩니다. 그가 원하던 축복도 받았습니다. 아침이 되어서 환도뼈가 부러진 야곱이 절뚝거리면서 다시 길을 떠날 때 아침 햇살이 그의 얼굴을 비췄습니다. 해피엔딩입니다.

우리들 역시 인생의 얍복나루에 홀로 남아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홀로 남았더니”라는 성경구절을 쉽게 읽고 넘겨서는 안됩니다. 한 밤중에 얍복강가에 홀로 남아 있는 야곱의 모습을 눈앞에 그리면서 한참 동안 이 구절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묵상의 마지막에는 얍복강가의 야곱의 모습 속에서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내야 합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인생길 한 운데 홀로 남아있는 외롭고 절박한 상황 – 인생의 순례길 속에서 우리들 역시 비슷한 상황에 처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들이 꼭 만나야 할 분이 있습니다. 우리들 각자의 얍복나루까지 친히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길 때까지 우리와 씨름해 주시고 결국에는 축복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과 씨름하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의 얍복나루에 홀로 남겨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내가 졌다’고 말씀하실 때까지, 이름이 바뀌고 환도뼈가 부러질 때까지 하나님과 씨름해야 합니다. 그때 밤은 지나가고 아침 햇살이 우리의 인생길을 환히 비춰줄 것입니다. 하나님과 씨름하는 그리스도인의 인생길은 언제나 해피엔딩입니다. (SF한국일보 종교칼럼 2007.7.19)

길되신 예수 그리스도

저는 어린 시절을 한국의 조그만 농촌 마을에서 보냈습니다. 제가 살던 동네는 산 밑에 자리잡고 있었고, 동네 앞으로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들에 나가면 이리저리 펼쳐진 논두렁길이 나옵니다. 가을 녘 논두렁 길을 걷다 보면 황금빛으로 물들은 들판의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비좁은 논두렁 길이지만, 길 양 옆에는 부지런한 농부들이 심어놓은 콩이며 깨와 같은 곡식들도 여물어갑니다. 들판을 가로질러 이리저리 펼쳐진 논두렁 길은 제 기억 속에 풍성함으로 남아있습니다.

어릴 적 친구들과 함께 뒷산에 올라갔던 오솔길도 잊을 수 없습니다. 나무들 사이로 간간히 비추는 햇살을 맞으며 이마의 땀을 훔치면서 오솔길을 걸어갑니다. 새들이 지저귑니다. 이름 모를 들꽃들이 방긋 웃으며 인사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사시사철 푸른 모습으로 자기 자리를 지키는 소나무들도 만납니다. 꼬불꼬불 이어진 작은 길이지만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어느새 산정상에 도착합니다.

미국에 와보니 길이 참 시원시원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동 서부를 관통하고 남과 북으로 이어진 고속도로는 활짝 뚫린 신작로입니다. 넓은 평원을 가로지른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으면 가슴이 확 트입니다. 저 멀리 지평선이 보이고, 아지랑이가 피어 오를 정도로 까마득히 보이던 길도 금세 눈앞으로 다가옵니다. 자동차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광경도 자주 봅니다. 그런데 막상 그곳에 도착해 보면 언덕이 평지처럼 밋밋해서 거뜬히 오를 수 있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릴 때마다 우리의 인생길도 신작로처럼 넓게 그리고 평편하게 펼쳐지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길 가운데는 황당한 경우도 있습니다. 지름길이라고 생각하고 기분 좋게 운전해 왔는데 눈앞에 “우회하라”는 표지판이 있을 때는 매우 당황스럽습니다. 우회도로는 참을 만 합니다. 돌아가면 되니까요. 그런데 낯선 길을 운전하다 보면 종종 “막다른 길(dead end)”을 만납니다. 그때는 참 허탈합니다. 뒤돌아나가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인생길도 마찬가지입니다.지름길인 줄 알고 신나게 달려왔는데 그 길이 우회도로입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길이기에 막다른 길을 만나기도 합니다. 열심히 달려온 길이 막다른 길일 때 밀려오는 절망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때 우리가 꼭 선택해야 할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나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끊어진 길을 이어주셨습니다. 이웃과의 단절된 관계도 길 되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로 이어주십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오솔길 같은 포근함도 느낍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모두 맞아주시는 신작로와 같은 넓디넓은 마음도 갖고 계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면 “Dead End”를 만나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길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인생길을 새롭게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소망 가운데 인생길을 걸어가는 행복한 순례자들입니다. (SF한국일보 종교칼럼, 2007.6.14)

예배하는 가정

구약 성경의 창세기에는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으로 이어지는 족장들이 나옵니다. 이들의 신앙과 삶에 대한 기록을 족장사라고 부릅니다. 족장(族長)은 말 그대로 가족의 수장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이 부족이나 국가를 형성하기 전에 가족단위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창세기의 족장들은 완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실수를 연거푸 두 번씩 저지릅니다. 부전자전이라고 하더니 이삭 역시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입니다. 창세기의 세 번째 족장인 야곱의 인생은 말 그대로 파란만장입니다. 아버지를 속여서 장자권을 얻어낸 야곱은 평생 동안 속고 속이는 일에 연루됩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의 열 두 아들이 훗날 열 두 지파의 조상이 됩니다.

창세기의 족장들이 이렇듯 완벽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 이삭,야곱 모두 한 가정의 가장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열심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땅에 이르자 마자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백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린 사건은 아브라함 믿음의 백미입니다. 그의 아들 이삭 역시 이곳 저곳으로 옮겨다는 유목생활 중에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외삼촌 집으로 피신가는 도중에 꿈을 꾸고 자기가 베고 있던 돌 베개를 세워서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이처럼 창세기의 족장들의 삶 한 가운데에는 언제나 “예배”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한 가정을 이끌면서 그들은 기쁠 때나 슬플 때, 죄를 지었을 때나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했을 때,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일찌감치 선택했고 믿음의 조상으로, 복의 근원으로 삼으셨을 것입니다.

지난 달 버지니아텍에서 일어난 참사 이후에 한인사회에 자녀교육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 동안 자녀들이 좋은 학교에 가고 좋은 직장을 얻는 것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면, 이제는 자녀들의 성품과 그들의 삶 전반에 관심을 가질 때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가정 예배를 활성화했으면 좋겠습니다. 온 식구가 일 주일에 최소한 한 번만이라도 둘러 앉아서 가정의 제사장되신 아버지의 인도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자녀들의 마음을 만져주실 겁니다.기도제목을 함께 나누면서 부모들의 애환과 자녀들의 고민을 서로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정에서 찬송이 울려 퍼질 때,자녀들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들이 사라지고 밝은 생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가정을 예배하는 가정으로 만듭시다. 그러면 창세기 족장들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축복이 그대로 임할 것입니다. 부모나 자녀들이나 실수도 저지르고 때로는 죄도 짓지만, 예배 가운데 하나님께서 가족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예배하는 가정 –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는 비결입니다. (SF한국일보 종교칼럼, 2007.5.17)

벧세메스를 향하여

성경 속에는 갖가지 동물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노아는 홍수가 그치고 땅이 말랐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까마귀와 비둘기를 방주 밖으로 날려보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양이나 염소 그리고 때로는 소와 비둘기가 쓰였습니다.이 밖에도 독수리와 같은 날짐승, 사자와 같은 들짐승 그리고 고래처럼 큰 물고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수많은 동물들이 성경에 등장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동물들 가운데 제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바로 구약성경 사무엘상6장에 나오는 벧세메스 길을 걸어갔던 두 마리의 암소입니다. 살아가면서 또는 목회를 하면서 힘겨울 때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서 깊이 묵상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에 패하면서 하나님의 법궤를 팔레스타인에게 빼앗겼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팔레스타인의 신당에서는 그들의 신 다곤이 하나님의 법궤 앞에서 고꾸라지고 팔다리가 끊어졌습니다.법궤가 가는 곳마다 전염병을 일으키고 큰 재앙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비록 전쟁에서 졌지만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능력 있는 신임을 적지 한 가운데서 보여준 셈입니다.

결국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법궤를 벧세메스라는 곳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하고 암소 두 마리를 데려왔습니다.이들에게는 아직 젖을 떼지 않은 새끼들이 있었습니다. 한 번도 멍에를 메어보지 않은 신출내기입니다. 이 암소 두 마리에게 난생 처음으로 멍에를 메게 하고, 새로 짠 수레를 연결시킵니다. 수레 위에는 법궤를 올려놓습니다. 암소 두 마리가 스스로 법궤를 끌고 벧세메스를 향해서 곧장 나아가면 팔레스타인에 일어난 재앙이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임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두 마리의 암소가 발을 맞춰서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게다가 자신들의 발걸음을 주시하고 있는 수많은 팔레스타인들의 눈길이 얼마나 부담스러웠겠습니까? 멍에를 처음 메었으니 얼마나 불편하였겠습니까? 배가 고파서 엄마를 찾는 송아지들의 울음소리가 귓전을 울렸을 테니 어미의 마음이 오죽했겠습니까? 당장이라도 멍에를 떨쳐 버리고 새끼들에게 돌아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본문은 두 마리의 암소들이 울부짖으면서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꿋꿋하게 벧세메스를 향해서 나아갔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벧세메스에 도착하자마자 이들은 희생제물로 드려졌습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자신의 몸까지 제물로 드려진 벧세메스의 암소를 생각하면 비록 동물이지만 조용히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그리고 벧세메스로 향하는 두 마리의 암소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을 연상시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뜻을 모두 이루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또한 벧세메스를 향하는 암소는 삶의 고통과 아쉬움을 가슴에 품고 신앙의 순례길을 걸어가는 우리들의 모습, 아니 이 시간 벧세메스의 암소를 생각하면서 가슴을 쓸어 내리는 바로 당신의 모습입니다. 소리를 내지도 못한 채 속으로 울음을 삭히면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꿋꿋하게 벧세메스 길을 향해서 나아가는 당신!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그리스도인이십니다. 힘내십시오!(SF한국일보종교칼럼, 2007.4.17)

두 남자 이야기

바다에 폭풍이 일어 배 한 척이 난파하면서 배에 타고 있던 남자 둘이 손바닥만한 섬까지 어렵사리 헤엄 쳐 갈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쩔쩔매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기로 하였다. 그 와중에도 누구의 기도가 더 힘이 있는지 알고 싶어 두 사내는 작은 섬을 둘로 갈라서 각각 차지하고 기도를 시작하였다.

그들은 제일 먼저 먹을 것을 청하기로 결정하였다. 기도가 끝나자 한 남자가 자기 구역에서 나무열매를 발견하고 배를 채웠다.다른 남자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일 주일이 흐른 뒤, 이쪽 남자는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서 아내를 얻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자 이튿날 배 한 척이 난파되더니 그 배의 유일한 생존자인 아리따운 여인이 섬에 도착하였다. 저쪽 남자의 기도는 하나도 응답되지 않는 듯 했다. 아내까지 얻은 남자는 신이 나서 이제 자녀와 집과 의복을 달라고 기도하였다.그랬더니 기도하는 것 마다 모두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가족이 그 섬을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다음날 보니 배 한 척이 가까운 해변에 와 있었다.

섬에 남아 있을 친구가 걱정이 되었지만 기도의 응답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축복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에 자신의 짐만 열심히 챙겼다. 그리고 섬을 막 떠나려고 하는데 하늘에서 소리가 들여왔다. “너는 어찌하여 네 동료를 남겨두고 떠나려 하느냐?” 기도가 모두 응답된 남자가 자신 있게 대답하였다. “내가 받은 복은 내가 빌어서 받은 것이니 나 혼자 누려야 할 몫입니다. 저 친구는 응답 한번 받지 못한 걸요.” 그때 하늘에서 이런 책망이 들려왔다. “헛소리 말아라. 내가 응답한 기도는 바로 저 사람의 기도니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남자가 응수하였다. “저 친구가 무슨 기도를 했기에 내가 받은 이 모든 복이 그의 덕이란 말입니까? 어디 말 좀 해 보시지요?” “저 사람은 너의 모든 기도가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했느니라.”

<이야기 속에 담긴 진실>이란 책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어떻게 보면 상투적이고 흔한 이야기 같지만 자세히 읽고 생각해보면 그냥 넘길 수 없는 진실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이웃사랑이 어떤 것인지도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복음성가의 가사가 떠오릅니다. “당신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 내릴 때…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누군가 기도하네.” 우리는 너무 자주 교만해 집니다. 조금만 상황이 나아지거나 좋은 일이 생기면 어깨가 으쓱해지고 세상이 자기 것인 양 우쭐댑니다. 모든 것을 혼자서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자기만의 하나님을 상정하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기도를 드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 힘으로 된 것이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큽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도움과 기도가 우리를 이 자리까지 인도해 주었습니다.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가져야 할 겸손한 마음입니다. 부활절을 대망하며 사순절을 보내는 요즈음,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주고 서로를 배려할 수 있는 따뜻한 마음들로 우리네 세상이 가득 찼으면 좋겠습니다. (SF한국일보종교칼럼 2007.3.15)

인재를 키우는 교회

요즘 언론에서 회자되고 있는 “요코 이야기 (원제 So far from the bamboo grove)”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본국 교단지의 요청으로 책을 사려고 미국서점에 들렸습니다. 곧바로 고객센터를 찾아서 책 제목을 직원에게 건넸습니다. 은근히 책이 없다는 말을 듣고 싶었는데 잠깐 기다리는 말을 남긴 직원이 직접 찾아서 책을 건네줍니다. 직원의 친절이 그 날은 그리 달갑지 않고 도리어 마음이 씁쓸했습니다. 그동안 동부의 몇몇 중학교에서는 이 책이 필수 독서목록에 들어 있었답니다.  한 한인 학생이 그 책을 읽고 학교에 문제를 제기함으로 세간의 이슈가 된 것입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절은 일본인들에게는 전쟁에서 패한 국치일입니다. 요코 이야기는 당시에 함경도 나남(청진)에 살던 요코라는 일본인 소녀가 가족과 함께  한반도를 떠나서 일본에 도착하기까지의 힘겨운 여정을 그린 일종의 수기와 같은 소설입니다. 이들이 원산과 서울을 거쳐서 부산까지 내려가는 여정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사연들, 당시에는 있지도 않았는데 요코가 오빠의 말을 듣고 책에 기록했다는 공산당의 만행, 일본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는 동안 여자 셋이 넘겨야 했던 힘겨운 순간들을 열한 살 소녀의 눈으로 기록했습니다.

책 서두에 있는 지도에 동해를 “일본해”라고 표기한 것부터 눈에 거슬렸습니다. 아무리 개인적인 경험이라지만, 우리 민족이36년간 일제 강점기에 겪은 수모는 온데간데없습니다. 대신에 한 가족이 한국을 떠나면서 겪은 단지 몇달 동안의 어려움을 마치 유대인의 아우슈비츠 탈출기인양 기록하였습니다. 현재 73세가 된 저자 요코는 보스턴 근교의 학교들을 순회하면서 이 책의 내용을 중심으로 강연을 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니 더욱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책을 모두 읽고 책에서 손을 떼고나니, 책의 내용보다 우리의 모습이 더 안타까웠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라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눈물로 호소하다가 한을 품고 생을 마감하는 정신대 할머니들을 보면서 그저 동정만 했고 나라 안에서만 야단법석을 떨었지 세상에 알리려는 노력은 부족했습니다. 현재 미국의 대학에서는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과목과 전공들이 커다란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엘리 위젤이라는 작가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경험을 문고판100여 쪽에 불과한 책(“Night”)을 써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했는지…

기독교 신앙에서는 사람을 키우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은 물론2천년 교회사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사람을 통해서 일하셨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해진 초창기에 한국교회는 훌륭한 신앙의 지도자들과 민족 지도자들을 많이 배출했습니다. 그때는 교회가 사회를 선도했었습니다.

요코 이야기에 지혜롭게 대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들의 이야기”를 세계에 알릴 인재를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무엇보다 교회가 사람을 키워야겠습니다. 교회의 재정에서 선교비를 책정하듯이 장학기금도 빠짐없이 책정해야겠습니다.특별히 이국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기에 조국과 한민족의 우수함을 세상에 알릴 동량(棟梁)들을 키우는데 교회가 더욱 힘써야겠습니다.  (SF한국일보종교칼럼, 2007.2.15)

요코이야기를 넘어서

* 감리교 교단지인 기독교타임즈에서 요코이야기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보냈던 원고입니다. 같은 소재로 한국일보에도 칼럼을 썼습니다.

일제말기 일본이 패망할 때, 세 모녀가 한국을 탈출하면서 겪은 경험담을 소설형식으로 기록한 “요코 이야기” (원제: So Far from the Bamboo Grove, 대나무 숲 저 멀리)가 국내는 물론 이곳 한인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당시에 나남(청진)에 살던 열 한 살의 여자 주인공이자 저자인 요코는 언니와 어머니와 함께 서울과 부산을 거쳐서 일본으로 귀향하게 된다. 요코 이야기는 그 여정에서 자신들이 한국인들로부터 받았거나 목격한 폭행, 죽음의 위협, 강간의 순간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당시에 창설되지 않았던 인민군에 대한 기록 등 역사적인 사실을 왜곡한 것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지만, 이 소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일제 36년 동안 우리 민족을 강점했던 가해자가 소설 속에서는 피해자로 뒤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요코 이야기를 구입하기 위해서 미국서점에 들렀다. 내가 살고 있는 샌프란시스코는 이번에 처음으로 문제가 제기되었던 보스턴과는 정반대에 위치한 도시이기에 서점에 책이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면서 서점에 들어갔는데, 서점 직원이 영문판 요코 이야기를 손수 찾아서 가져다주었다. 그 순간만큼은 왠지 서점 직원의 친절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책을 사서 읽으려니 서두에 있는 지도에 눈이 먼저 갔다. 동해를 일본해(Sea of Japan)라고 표기해 놓은 것부터 눈에 거슬렸다.

책은 총 11장(章)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처음 여섯 장이 이들 세 모녀와 뒤에 남겨진 아들이 한국을 떠나는 과정을, 나머지 다섯 장은 일본에 도착한 후의 삶을 기록했다. 소설의 반전은 모녀가 겪은 한국에서의 어려움보다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가 죽는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 이후로 두 자매가 힘겹게 바느질 등을 해서 생계를 유지한다. 오빠와 두 자매가 재회하는 것으로 소설이 끝이 난다. 뒤에 쳐졌던 오빠는 한국인으로 위장해서 한반도를 떠난다. 오빠를 도운 한국 농부와 그 가족의 이름이 자세히 기록된 것이 새삼 눈길을 끈다. 아무리 개인적인 경험이라지만, 소설 속에는 우리 민족이 일제 치하에서 당한 수모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소설 다빈치 코드가 그랬듯이 내용과 구성이 사실적이어서 독자들로 하여금 소설의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게 할 가능성 또한 컸다.

미국에서 요코 이야기는 우리식으로 중학교 1-2학년 학생들이 영어시간(미국의 국어시간)에 읽어야 하는 독서목록에 들어있다. 처음에 문제가 제기된 동부의 보스턴과 뉴욕의 많은 중학교들이 요코 이야기를 독서목록에 포함해서 그곳의 한인단체들이 항의하는 일들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2월20일자 한국일보 미주 판에서는 LA의 한 중학교에서도 요코 이야기가 독서목록에 포함되어서 한인 학부모들이 학교에 항의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렇지만 미국의 학교들은 교사나 학교 당국 또는 교육청의 방침에 따라 독서목록을 결정하기 때문에 미국 전 지역의 중학생들이 요코 이야기를 읽는 것은 아니다.

일부지역이라고 해도 뉴욕이나 보스턴과 같은 대도시의 학생들이 요코 이야기를 읽는다는 것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감수성이 강한 10대 초반의 미국 청소년들이 요코 이야기를 읽고 한국 사람들에 대해서 무슨 생각을 할까? 혹시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을 핍박한 것으로 이해하지는 않을까? 우리 2세들이 수업시간에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곤욕스럽지는 않을까? 등등 여러 가지 질문이 생겼다. 여기에 일본을 은근히 선호하는 미국사람들의 정서를 생각하면 쉽게 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현재 73세가 된 저자 요코 왓킨슨이 보스턴 근교의 학교들을 순회하면서 이 책의 내용을 중심으로 강연을 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니 더욱 마음이 불편했다. 마치 유대인의 아우슈비츠 탈출기처럼 자신의 한반도 탈출여정을 소개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뉴욕을 중심으로 일고 있는 한인단체들과 학부모들의 항의는 의미가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출판의 자유가 보장된 미국에서 저자 요코 왓킷슨의 완강한 변명을 뭐라고 할 수 없다. 국내에서 일고 있는 논란들은 자칫 단순히 민족주의적 분노에 그칠 수도 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할 수 있는 현실적 대응은 요코 이야기를 독서 목록에 넣은 학교의 한인 학부모들이나 인근의 한인단체들이 해당학교와 교사들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일이다. 그리고 가정은 물론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한국 역사를 올바로 가르치는 일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갔으면 한다. 나는 요코 이야기를 끝까지 읽고 나서,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미국의 대학에서는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과목과 전공들이 커다란 인기를 끌고 있다. 엘리 위젤이라는 작가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경험을 문고판 100여 쪽에 불과한 책(“Night”)을 써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했는지…얼마 전 워싱턴에서 자신들의 짓밟힌 삶을 눈물로 호소했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모습도 눈앞에 스쳤다.

요코 이야기가 갖고 있는 문제에 지혜롭게 대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요코 이야기를 너머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세계에 알릴 인재를 키워야 한다. 이 일을 위해서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들이 앞장서야 할 것이다. 단지 교세확장에만 주력할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안목에서 우리 조국 대한민국과 한민족의 우수함을 세상에 알릴 동량(棟梁)들을 키우는데 교회가 더욱 힘써야할 때임에 틀림없다. (기독교타임즈 2007.2.21)

성탄절 새벽송

제가 어릴적 자랐던 시골마을에서는 크리스마스가 최고의 절기였습니다. 성탄절 이브 저녁에는 연극을 하면서 배우의 꿈도 키워보고, 캐롤송을 부르면서 가수의 꿈도 키울 수 있었습니다. 밤새워서 대본을 외우고 노래 가사를 외우던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무엇보다 성탄절 날 교회에서 주는 과자와 사탕은 왜 그렇게도 맛이있었던지…

중학생이 되면서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새벽송 대열에 참여했습니다. 처음에는 새벽송 자체보다 교회에서 밤새도록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이 더 재미있었습니다. 새벽 서너 시가 되면 목사님께서 사시는 주택에서부터 새벽송이 시작되었습니다. 등치가 큰 청년이 커다란 자루를 어깨에 메고 앞서 갑니다. 집집마다 준비해 놓은 과자며 사탕을 담을 자루입니다. 대열을 인도하시는 집사님은 잡담은 물론 발걸음도 살금살금 걸으라고 주의를 주십니다. 그런데 장난꾸러기 아이들에게 그 말이 통하나요? 뒤에서 여학생들을 놀래 키고 남들이 찬양을 할 때는 추녀 끝의 고드름을 따서 피리 부는 시늉을 하면서 장난을 치곤 했습니다.

성탄절 날 새벽에 눈이 하얗게 내리면 정말 장관입니다. 산 넘어 동네로 통하는 오솔길의 소나무들은 눈꽃으로 덮여 있습니다.하얀 눈이 덮인 들판에 달빛이 비추면,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금방이라도 다시 나타나실 것 같습니다. 어떤 때는 기온이 너무 떨어져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새벽송을 돌곤 했습니다. 마음이 넉넉한 집사님들께서 중간 중간에 떡국을 대접해 주셨습니다. 추위에 꽁꽁 언 몸을 녹이면서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먹던 떡국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결혼을 하면서 도시에 있는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1980년대 말만 해도 도시 교회들도 새벽송에 열심을 냈었습니다.그런데 도시의 새벽송은 영—불편했습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다른 교회 새벽송 대원들과 만납니다. 왁자지껄입니다.때로는 서로 타려고 경쟁을 합니다. 아파트 복도에서 노래를 부르면 반대편 집의 문이 열리기 일쑤입니다. 시골에서 살금살금 걸어가던 낭만도, 천사의 목소리로 노래를 하려고 생 달걀을 한 개씩 먹고 출발하던 열심도 도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대신에 먼거리를 차를 타고 가야하는 것을 두고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더니 슬며시 새벽송이 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한인교회들도 새벽송을 돌았답니다. 그런데 요즘은 새벽거리를 다니는 위험과 도시의 복잡함,무엇보다 성탄절을 가족과 함께 보내려는 미국문화에 새벽송은 점차 자취를 갖춘 듯 합니다.

새벽송이 사라진 것은 괜찮은데, 새벽송을 돌면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고 새해의 복을 빌어주던 정겨운 마음까지 사라진 듯 해서 아쉽습니다. 어디 새벽송뿐입니까? 매일같이 날아드는 세일 전단들과 TV광고를 보면서 성탄절을 세상에 송두리째 빼앗긴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시대에 탄생하신다고 해도 여관을 잡기는 매우 어려우실 것 같습니다.

매년 맞는 성탄절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어릴 적 성탄절이 생각나는 것은 옛날에 대한 좋은 추억 때문만은 아닙니다. 교회도 많고 그리스도인들도 많고 온 세상이 성탄절인 줄 알지만, 진정으로 예수님의 탄생을 알릴 천사들의 발걸음과 목소리가 그립기 때문입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 (SF한국일보 종교칼럼 2006.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