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因緣)

수필가 피천득님은 그의 수필 인연(因緣)”에서 일제시대 동경에서 만났던 아사코(朝子)라는 여인과의 세 번의 만남을 소개합니다. 소학교 1학년에 다니는 어린 소녀로 처음 만났고, 그로부터 십 년 후 풋풋한 여대생으로 만나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논하였답니다. 마지막 만남은 그녀가 한 남자의 부인이 된 후의 약간은 어색한 만남이었습니다. 한 여인과 수필가와의 인연은 이처럼 지속되었고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다고 했습니다. 이렇듯 모든 만남은 우리들의 인생여정에 큰 자취를 남기게 마련입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 담임으로 부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일보 손기자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제 개인적인 얘기와 지난 8년여 미국에서 공부하고 목회하던 얘기를 나누는 가운데 칼럼을 쓰겠냐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제 성격이 그리 적극적이지 못한데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글을 쓰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수락을 하고 난 다음 날부터 은근한 부담감이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마음에 설렘도 있었습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에 대한 설렘과 지면을 통해서 좋은 분들과 귀한 인연을 맺게 될 기대에서 오는 설렘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일상사를 예사로 볼 수 없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모든 만남 조차도 우연이 아닙니다.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는 매일 매일의 삶 역시 뒤돌아보면 순간순간마다 깊은 뜻이 베어있습니다. 이것을 두고 기독교에서는 섭리(providence)”라고 합니다. 우리들의 삶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깃들어 있어서 어떤 것도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에도 하나님의 뜻이 깃들어있다고 말할 정도입니다(10:29). 녹록하지 않은 이민생활이지만 매사에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다면 삶에 생동감이 넘칠 것입니다. 일상 속에 베어있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고 그것을 음미할 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감사와 기쁨이 솟아날 것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하나님의 섭리를 체험할 수 있을 겁니다. 이처럼 일상의 작은 것들 가운데서 의미를 찾고 하나님의 숨결이 깃든 성경말씀 앞에 우리의 삶을 비춰보고 싶습니다.

칼럼의 제목을 옹달샘이라고 붙였습니다. 깊은 산 속 옹달샘은 누구나 쉬어가는 곳입니다. 옹달샘 근처에 모이면 모두 이웃이 되고 목을 축이고 나면 한결 여유로워집니다. 옹달샘이 비록 작은 샘물이지만 계곡을 지나서 작은 개울을 이루고 강을 만나서 넓은 바다로 흘러갑니다. 옹달샘은 그렇게 대양을 품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독자들을 만나는 것을 두고 섭리라는 거창한 표현을 쓰기는 조금 부담스럽습니다. 그래서 인연이라는 말을 빌려왔습니다. 지면을 통해서 좋은 인연을 만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깊은 산 속 옹달샘처럼 누구든지 오셔서 샘물 곁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맑은 샘물로 목을 축이셨으면 좋겠습니다. 넓은 대양을 마음에 그리면서

(SF한국일보 종교칼럼, 2006.5.30)

지금은 잠잠히 기도할 때 (2007.8.5)

아프간 인질사태로 기독교가 세상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더욱이 기독교의 추한 모습들만 세상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사실 이번에 아프간에 간 스물세명의 선교단원들 대부분이 신문보도와 달리 단단히 각오를 하고 떠났답니다.

지구상에 단기선교여행을 떠날 곳은 저 멀리 아프리카로부터 남미와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아프가니스탄은 가장 위험한 나라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도 이들은 아프간을 선교지로 선택했고 남자들은 그곳 풍습대로 수염을 길렀습니다. 인터뷰에 응한 여자들의 이슬람 복장도 그들이 준비한 것이랍니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면 이들의 심정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여행이 금지된 아프간에 장난삼아 선교를 떠나시겠습니까? 믿음과 소명이 없으면 떠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들을 두고 (신문보도대로라면 이들 가운데 몇몇이 경솔한 행동을 했다고) 싸잡아서 혹평을 해서는 안 됩니다.

100여 년 전에 벽안의 선교사들이 한반도에 왔었습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의 영향으로 외국 사람들을 배척하던 때였습니다. 그때 태평양 건너 미국의 젊은이들이 무척이나 가난했던 동양의 작은 나라 조선에 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우리 민족을 위해서 병원도 지어주었고 학교도 세웠습니다. 6.25때는 선교사들이 전쟁고아들을 도왔습니다. 지금 아프가니스탄에 가 있는 선교사들 역시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민족이 세계열강에 진 사랑의 빚을 대신 갚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동안 각 교회들이 행하던 선교에 대해서 이번 기회에 전반적으로 재고해 보아야 합니다. 방법이나 절차에 하자가 있었다면 과감히 고쳐야 합니다. 무엇보다 경쟁적으로 또는 대외에 과시하기 위해서 선교를 했다면 철저히 회개해야합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서서“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님의 유언을 진실된자세로 실천할 때입니다.

무엇보다 더 이상 희생자가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를 두고 뭐라고 해도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잠잠히 기도해야겠습니다.:“주님! 저들을 구해주옵소서.”-河-

8월을 맞으며 (2007.7.29)

2007년이 시작된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일곱 달이 지났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빠르게 지나가는지 모릅니다. 그동안 서머나 성도님들 각 개인의 삶도 녹록치 않았지만, 교회적으로도 쉽지 않은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인도해 주심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또한 그동안 교회를 가슴에 품고 함께 기도하면서 달려온 서머나 식구들께 무한 감사들 드립니다. 앞으로도 하나님 앞에서 참된 교회를 세워나가기 위해서 한 마음으로 정진해야겠습니다.

8월을 맞으면서 주일예배를 비롯한 우리 교회 사역에 몇 가지 변화가 있어서 말씀을 드립니다.

첫째로, 8월부터 금요심야기도회가 시작됩니다. 교회의 힘은 말씀과 기도에서 나옵니다. 여러 가지로 힘든 상황이었지만 지난 5월부터 성경공부가 시작되어서 은혜가운데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구할 때입니다. 기도회는 금요일 저녁 10시에 시작해서 1시간 정도 저와 함께 기도하시고 12시까지 자유롭게 기도하는 시간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서는 물론 개인적으로 기도가 필요하신 서머나 성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대합니다.

둘째로, 주일예배 기도순서에 약간의 변화가 있습니다. 그동안 담임목사가 하던 주일대표기도에 조전도사님과 권사님들이 참여하시게 됩니다. 대신에 봉헌기도는 집사님들만 담당하게 됩니다. 대표기도를 인도하실 권사님들께서는 정성껏 준비해 주시고, 모든 성도님들도 함께 참여하는 마음으로 기도에 임해주시길 바랍니다.

셋째로, 봉헌시간에 헌금하신 분들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는 순서도 생략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은밀한 헌신과 봉사를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도 여기에 해당되기에 겸손한 마음으로 은밀히 봉헌하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기도제목이나 함께 나눌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 외에는 헌금하신 분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다음 주 주보에 싣겠습니다. 또한 저는 재무부에서 전달해주는 헌금봉투를 목회실 책상에 놓고 봉헌하신 분들을 위해서 여느 때보다 더욱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교회의 예배와 사역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모습으로 발전해 가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교회로 자라기를 바랍니다.-河-

신앙의 동지 (2007.7.15)

동지(同志)라는 말은“뜻을 같이 한 동료”라는 뜻입니다. 한 평생을 살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 가운데 같은 뜻을 품고 어떤 일을 함께 해내는 동료를 만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시작은 좋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관계가 소원해지고 뜻이 갈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전해주신 유재성 목사님은 저와 논산 훈련소에 같이 입소했던 군대동기입니다. 훈련소 뿐 아니라 군대 3년을 평택에 위치한 캠프 험프리스라는 곳에서 함께 군대생활을 했습니다. 유 목사님은 군종사병으로 저는 신우회장으로 병영에 있는 작은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 시절 함께 신우회 활동을 했던 신우들이 제대한 이후에도“험우회”라는 이름으로 모였습니다. 험우회라는 명칭 속에는“캠프 험프리스 재경 신우회”“험한 세상을 함께 헤쳐 나가는 신앙의 친구들”“(발음그대로)허무한 세상 속에서 같은 뜻을 품고 살아가는 신앙의 동지들”이라는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유목사님은 일찍이 유학을 와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셔서 지금은 대전에 있는 침례대학교 상담학 교수로 있습니다. 저는 직장 생활을 하다가 뒤늦게 신학을 시작해서 이렇게 서머나 교회를 섬기고 있지요. 20대 초반 짧은 머리에 똑같은 제복을 입고 만났던 다른 험우들도 한국과 미국으로 흩어져서 사회 각 분야에서 각자의 몫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말씀에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화력이 좋아도 혼자 타는 장작은 금방 꺼지게 마련입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신앙의 순례길을 함께 걸어갈 신앙의 동지들이 필요합니다. 어려울 때는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 주고, 좋을 때는 함께‘할렐루야’를 외치면서 하나님을 찬양할 신앙의 동지들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멋진 교회가 되려면, 같은 뜻을 품은 동지들로 똘똘 뭉쳐야 합니다. 서로 서로에게 신앙의 동지가 되어야합니다. 그때는 저절로 근사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 함께 멋진 교회를 세워나갑시다.-河-

성령강림 주일에 (2007.5.27)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령강림주일은 사도행전 2장 1절 이하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에 40일 동안 세상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이 임하기를 기다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120명의 신도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성령을 기다리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령이 언제 임할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열흘 남짓 기도했을 때, 유대인의 명절인 오순절이 다가왔습니다. 명절을 맞아서 예루살렘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때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약속하셨던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 순간을 사도행전 2장 2-3절을 이렇게 전합니다.:“그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길이 솟아오를 때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것 같은 혀들이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성령이 임하면서 사도들이 큰 힘을 얻었습니다. 한 번에 삼천 명이 회개하는 역사도 일어났습니다. 성령의 바람이 부는 곳마다 복음이 폭발적으로 전파되었습니다. 회개의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는 곳마다 방언이 터지고 병이 낫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성령 하나님은 능력으로 교회 위에 임했습니다.

2천 년 전 오순절에 임했던 성령이 지금도 우리 가운데 그대로 역사합니다. 성령이 임하는 곳에 부흥이 일어납니다. 성령이 임하는 곳에 온전한 그리스도인들이 세워집니다. 내가 변하고 가정이 변하고 일터가 변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은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새롭게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와 서머나 성도들 위에 성령이 능력으로 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령충만함을 사모합시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읍시다.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그리스도인으로 거듭 태어납시다. -河-

부활의 소망이 있으십니까? (2007.4.8)

올 해도 어김없이 부활절을 맞이했습니다. 부활절은 기독교의 가장 큰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은 로마시대의 축제일을 그대로 계승한 것입니다. 이에 반해서 부활절은 실제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다시 살아나신 날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의 명절인 유월절 이후에 예수님께서 잡히셨고 안식 후 첫날 살아나셨다는 성경의 증언 때문입니다. 부활절은 음력으로 춘분이 지난 후 보름이 지난 첫 번째 주일로 매년 정해집니다. 유대인의 달력이었던 음력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부활주일은 대개 3월 22일에서 4월 25일 사이에서 결정됩니다.

우리 신앙에서 부활절이 중요한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들이 주일날 모여서 예배하는 것이 바로 부활절과 관련이 있습니다. 2천 년 전 초대교회의 교인들은 안식일인 토요일이 아닌 주일날 모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주일예배는 바로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찬양하는 하늘나라의 축제인 셈입니다.

우리 신앙에서 부활절이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우리의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4절에서 사도바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구원도 믿음도 헛되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10장 9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을 때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교회가 그러하듯이 우리들의 신앙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위에 세워져야 함을 꼭 기억하십시오.

마지막으로 부활신앙으로 무장하고 있으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 삶 속의 죽음의 세력을 모두 몰아내고 승리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있을 때 모든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자신감과 담대함으로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이 서머나 성도님들의 영혼과 삶 속에 그대로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河-

하나님의 승리 (2007.8.26)

여호수아가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여리고성을 함락시킨 말씀은 언제 읽어도 통쾌합니다. 여리고성은 인근에서 가장 강한 성이었기에 40년간 광야에서 생활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복하기에 역부족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승리를 안겨주십니다.

사실 여호수아는 여리고성을 공격하기에 앞서서 치밀한 계획을 세웠던 것 같습니다. 두 명의 정탐꾼까지 적진에 보내서 여리고성의 상황을 살피게 한 것이 좋은 예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 자신의 방법을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십니다. 군인들을 데리고 여리고성을 하루에 한 바퀴씩 6일 동안 돌라는 것입니다. 일곱 명의 제사장이 일곱 개의 양각 나팔을 들고 여호와의 법궤를 중심으로 도는 것입니다. 이레째 되는 날에는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면서 성을 일곱 바퀴 돌아야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 바퀴를 돈 후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아주 크고 길게 불면 그 나팔 소리를 듣고 온 백성들이 크게 함성을 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이 무너질 것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어쩌면 어리석어 보이는 일입니다. 성을 돈다고 성이 무너지겠습니까? 일곱 번째 날에 일곱 번을 도는 것이 무슨 효과가 있겠습니까? 나팔소리에 백성들이 함성을 질러서 성이 무너진다는 것도 믿기 힘듭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사람들에게 놀림거리가 될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난공불락이었던 여리고성이 한 번에 무너졌다고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의 상식과 세상의 방법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말씀하시는 대로 행하기 원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신앙은 모험입니다. 특히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 닥쳤을 때 더욱 그렇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계획이나 자존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좇으려는 겸손함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서머나 식구들의 삶 속에 멋진 승리로 늘 함께 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河-

그리스도인의 인내 (2007.8.19)

히브리서는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시작될 무렵에 쓰였습니다. 기독교를 믿는다는 사실로 인해서 로마제국이 사람들을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었고 심하면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하고 개종했던 사람들이 신앙을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던 유대인들이 다시금 유대교로 돌아갔습니다. 바로 그 상황에서 기록된 말씀이 히브리서입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킬 것을 권면합니다. 힘들수록 더 열심히 모이고 믿음위에 굳게 서 있으라고 합니다. 특히, 우리가 함께 살펴보고 있는 히브리서 11장은 구약에 나오는 믿음의 인물들을 소개하면서 신앙의 열조들처럼 우리들 역시 “믿음으로”살 것을 교훈합니다.

편안할 때는 누구나 예수님을 잘 믿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으면서 좋은 일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신앙 여정이 늘 장밋빛 융단이 깔린 아스팔트는 아닙니다. 힘겨울 때가 더 많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피해도 입고,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고난이 찾아와서 마음과 몸이 지칠 때도 있습니다. 그때 꼭 필요한 것이 “인내”입니다.

모세는 이집트 왕궁에서 청년시절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을 괴롭히는 이집트 군인을 죽인 것이 탄로가 나자 미디안 광야로 피신했습니다. 광야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40년은 모세 인생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긴 세월입니다. 그곳에서 모세는 양을 치면서 인고(忍苦)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40년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면서 또 다시 광야에서 40년을 보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그리던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아쉽게도 하나님께 부름을 받습니다. 모세는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서 하나님께 가장 귀하게 쓰인 받은 사람입니다. 그것은 바로 모세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처럼 믿으면서 끝까지 참았기 때문입니다. 인내가 모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든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인내해야 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신앙의 끈을 놓지 말고 끝까지 견뎌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지켜주시고 최후승리를 약속하십니다. 믿음가운데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서머나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河-

두려움 극복 (2007.8.12)

모든 사람이 두려움을 느낍니다. 인간에게 가장 큰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죽음 앞에서 두렵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한 번도 가지 않은 길을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삶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지금은 사업이 잘되고 직장이 아무리 튼튼해도 미래는 늘 불확실합니다. 거기서 두려움이 생깁니다. 요즘은 질병에 대한 두려움도 만만치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명령하십니다.:“두려워 말라!”

성경에서 많이 반복되는 말씀가운데 하나가 “두려워 말라”입니다. 실제로 신구약 성경에서“두려워 말라”는 명령은 개역성경에만 79번 나옵니다. 거기에 “무서워 말라”까지 합치면 90번에 가깝습니다. 이것은 모두 명령형입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이 아니라 무조건 지켜야 하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뱅겔이라는 신학자는 두려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하나님만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외의 모든 것을 두려워한다.” 위의 말 속에 그리스도인들이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는 비결이 나옵니다. 두려움을 물리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점점 더 두렵습니다. 삶이 아슬아슬해지고 염려와 근심이 자꾸만 밀려옵니다. 두려움의 대상을 바꿔야 합니다. 세상의 일들이나 미래를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것들 뜻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의 두려움은 모두 없어집니다.

모세의 부모님이 바로왕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모세를 석 달 동안 숨길 수 있었던 것도 믿음 때문입니다. 바로를 두려워했다면 절대로 그런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왕보다 더 위대하신 전능자 하나님을 믿었을 때,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이처럼 두려움은 믿음으로 물리칠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세상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믿음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河-

믿음의 조상 (2007.7.22)

창세기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 가운데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불립니다. 창세기 12장 1-4절 말씀 속에서 그가 왜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당시는 이름이 아브람)에게“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1절)”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아브라함이 가야할 목적지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어디로 가라고 목적지를 분명히 가르쳐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일단 본토와 친척을 떠나면 하나님께서 가야할 길을 보여주시겠다는 식입니다. 그때에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조카 롯의 가족까지 데리고 말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히브리서 11장 말씀에서는 아브라함의 순종을 세 가지로 정리해 놓았습니다.

첫째는 떠나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과감히 현재 있는 자리를 떠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고 편해도 세상의 자리를 놓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자리를 향하여 신앙의 순례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과거의 아픈 기억이나 실패 또는 씻을 수 없는 상처도 버려두고 떠나야합니다.

둘째로, 믿음은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주춤거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할 걸음씩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앞길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확실치 않아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앞으로 나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셋째로, 믿음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자리에 거하는 것입니다. 가나안땅에 도착한 아브라함이 가뭄을 피해서 이집트로 내려갔을 때 죄를 지었습니다. 그렇지만 비록 장막에 거했어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땅에 있을 때 아브라함은 복을 누렸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하나님께서 있으라는 곳에 거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을 확실히 인정하고 그 말씀에‘아멘’으로 화답하면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은 앞길이 불확실해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신앙의 순례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선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