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제타 스톤

좋은 아침입니다.

1.
엊그제 매우 흥미로운 뉴스가 있었습니다.
10년 전 유럽우주국에서 쏘아 올린 로제타 우주선에서
필레(philae)”라는 냉장고 크기만한 탐사선이
혜성에 착륙했다는 소식입니다.

미국의 한 방송에서는
필레가 지름이 약 6킬로미터 정도인 혜성에 착륙하는 것은
2층 발코니에서 페니를 떨어뜨려서
토마도 캐첩병 속으로 쏙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혜성을 만나기 위해서 로제타호가 10년 동안
64억 킬로를 운행했다는 것이나
지구로부터 5억 킬로 떨어진 혜성에 탐사선을 착륙시켰다는 뉴스를 보면서
어느 한가지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과학의 세계를 접했습니다.

옛날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예술작품으로 묘사했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네요.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편 8:3-4)

2.
저는 뉴스를 보면서
로제타(Rosetta)”라는 우주선의 이름에 더 마음이 갔습니다.

로제타 스톤이라고 하지요.
요즘은 어학을 공부하는 교재로 유명하지만,
실제로 로제타 스톤은 1799
나폴레옹 군대가 이집트 원정길에서 발견한
가로 세로 각각 114cm 72cm되는 석판입니다.

이 석판에는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이집트 문자
그리고 그리스어 즉 세가지 언어로
이집트 왕의 업적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같은 내용을 세 가지 언어로 기록해 놓았기에
서로 비교하면서
그 동안 풀지 못했던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습니다.

우주선 로제타의 이름 속에도
우주의 신비를 풀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들어 있을 것입니다.

3.
우주가 신비이듯이
고대 문서의 의미가 신비에 쌓여있었듯이
우리들의 삶도 어떻게 보면 알 수 없는 신비입니다.

어떤 때는 도통 무슨 의미인지
또 우리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알 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들에게도
우리들의 삶을 읽을 수 있는
로제타 스톤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로제타 스톤은 무엇일까요?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이
십자가라는 렌즈를 통해서 조명될 때
이해가 되고, 설명되고, 또 앞으로 나갈 길을 발견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목숨까지 바치시고
죽음은 물론 모든 악을 물리친 예수 그리스도!
영원한 생명과 부활로 이어지는 십자가의 길!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이제는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십자가 붙들고 살겠다는 결심입니다.

우리 참빛 식구들께서
힘들 때 십자가 바라보고
감사할 때도 십자가로 나가고
막막할 때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힘들 때는 자기 십자가 어깨에 메고
인생의 신비를 하나씩 하나씩 풀어나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삶을 꿰뚫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바라보며
사도 바울처럼 고백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20)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 It is no longer I who live, but Christ who lives in me. And the life I now live in the flesh I live by faith in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Gal 2:20 ESV)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에 깃든
지혜, 사랑, 은혜, 그리고 능력을 힘입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11.14 메일 목회서신)

신앙의 인물 – 우찌무라 간조

오늘 살펴볼 신앙의 인물은 일본 기독교 역사에 토대를 놓았고 기독교는 물론 일본의 사회와 문화 발전에 공을 세운 우찌무라 간조(内村鑑三)입니다. 우찌무라 간조는 1861년 무사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는 전형적인 군인이었고, 아버지는 문무를 겸비한 학자였습니다. 일본에는 천주교가 1549년에 일찍이 전래가 되었지만 200여년간 박해를 받아서 30만 이상의 순교자를 냈습니다. 명치유신이후에도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가 금지되었다가 1873년 기독교 금령이 해제되었습니다.

우찌무라 간조가 기독교를 접하게 된 것은 삿포로 농업대학에 입학하면서 부터입니다. 그곳에는 선교사들은 물론 기독교를 믿는 학생들이 열심히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친구의 소개로 기독교 모임에 나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학 시절 우찌무라 간조는 기독교에 반대하는 아버지를 전도하기 위해서 마가복음 주석을 선물하기도 합니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서양종교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주석을 모두 읽고는 예수님을 믿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 이후에 우찌무라 간조를 통해서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우찌무라 간조는 미국으로 유학을 왔습니다.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 How I became a Christan>라는 책에 그가 미국에 와서 경험한 일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님을 마음속에 진심으로 받아들인 것도 미국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그가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은 곳이 바로 샌프란시스코였습니다. 우찌무라 간조는 미국에 처음 왔을 때의 느낌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1884년 11월 24일 새벽에 나는 황홀한 눈으로 기독교 국가의 희미한 윤곽을 처음으로 포착했다. 다시 한 번 나는 내가 묵었던 3등 선실로 내려가 거기서 무릎을 꿇었다. 여러 사람들의 흥분에 뒤섞이기에는 너무도 진지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나지막한 해안 산맥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자 내 꿈이 실현되었다는 생각에 감사하는 마음이 나를 압도했고,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금세 금문교를 지났고, 눈앞에 펼쳐진 굴뚝과 돛대들은 모두 하늘을 향해 우뚝 서 있는 교회 첨탑처럼 보였다.”

미국에 온 우찌무라 간조는 성경식 이름이 많이 있는 것에 다시 한 번 놀랍니다. 사람들이 성스러운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을 보고 또 한 번 놀랍니다. 소매치기도 당하고 처음 미국에 온 대가를 혹독하게 치릅니다. 팁을 요구하는 것을 보고는 “자선까지 물물교환을 하는 이 나라에 대해 놀라움과 씁쓸함을 감추지 못하고 망연자실”했다고 적었습니다. 시카고를 거쳐서 보스턴에 간 우찌무라 간조는 애머스트 대학과 커네티컷 하드포드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일본으로 돌아가서 신학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지난주에 배운 썬다싱이나 종교개혁자 루터가 한 순간에 예수님을 체험한 것과 달리 우찌무라 간조는 끊임없는 고민과 질문을 통해서 차근차근 기독교의 진리를 깨우쳤습니다. 일본에서는 신앙의 동지들과 기도하고 말씀을 읽으면서, 미국에 와서는 그의 스승들과 목사들과 교제하면서 신앙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무엇보다 성경 말씀에 기초한 신앙을 중요하게 여겼고 기독교를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사명감을 갖고 평생을 살았습니다.“맑고 기분 좋은 날이다. 고요하다. 아직도 너무 외로울 때가 많지만 나의 하나님을 의지한다.”그의 일기 중에서.-河-

신앙의 인물 – 썬다싱

우리가 믿고 있는 기독교 신앙은 2천년 교회사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물론이고 교회사 속에 등장하는 신앙의 선배들 역시 우리에게 커다란 귀감이 됩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와 그의 동역자 필립 멜랑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일으키셔서 타락한 중세 가톨릭에 대항하는 프로테스탄트 개신교를 탄생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성취하심을 보여준 좋은 예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인물은 인도의 성자라고 불리는 썬다싱입니다. 썬다싱은 1889년 인도의 핀잡 람플이라는 작은 동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종교심이 매우 깊어서 아들이 자신들이 믿는 시크교의 수도사가 되길 원했습니다. 특별히 마음이 곱고 지혜로웠던 그의 어머니는 썬다싱이 열네 살 때 돌아가셨지만 썬다씽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썬다싱은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종교심이 깊은 사람으로 자랐습니다.

썬다싱은 마을에 있는 선교사들을 대적했습니다. 선교사가 전해준 성경을 불사르고 그들의 전도를 애써 뿌리치면서 자신이 믿던 종교의 수도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신이 강림하지 않으면 새벽기차에 몸을 던져 죽겠다는 결심을 하고 신의 임재를 구합니다. 그때 이상한 빛이 방을 비췄습니다. 불이 난 것처럼 환한 빛이었는데 썬다싱은 그 빛 속에서 자신이 믿던 신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 예수님을 만났던 사도바울을 연상시킬 정도입니다.

썬다싱은 세례 받고 30일 만에 성경 하나 들고 전도자의 길을 떠났습니다. 수많은 고난과 핍박을 무릅쓰고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목숨 걸고 전했습니다.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다니면서 손과 발에 동상이 걸리고 추위와 배고픔이 밀려왔지만 영혼을 향한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습니다. 목숨의 위협을 당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번번이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주셨습니다.

한번은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출신의 스토크라는 수도사를 만났습니다. 그때는 썬다싱이 계곡을 다니다가 쓰러져서 간신히 목숨을 구했던 때였는데 스토크 선교사가 편하게 예수를 믿지 왜 고생을 사서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선다씽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답니다:“나는 참 행복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생하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우리들의 신앙을 돌아봅니다. 썬다싱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 편하게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신앙은 태만해져있고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삽니다. 영혼구원에 대한 열심도 많이 식었습니다. 기독교인은 목숨을 내놓고 예수를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신앙은 매우 이기적입니다. 내 욕심을 먼저 챙깁니다. 썬다싱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받은 은혜를 이웃 사랑으로 실천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길을 꿋꿋하게 걸어가기 원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꼭 붙들고 나가는 근사한 참빛 식구들 되시기 바랍니다.-河-

십자가 십자가

한국에 있을 때 10월의 마지막 날이 되면 라디오의 전파를 타고 수없이 들려오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10월의 마지막 밤에 아무런 뜻도 모른 채 연인과 헤어진 사연을 노래한 가요입니다. 10월의 마지막 밤에 헤어진 커플들은 물론 이 세상에 이별의 슬픔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울립니다. 미국에 오니 10월의 마지막 날에는 헬로윈으로 떠들썩 합니다.아이들은 헬로윈 코스튬을 하고 학교에 갑니다. 저녁에는 사탕을 얻으러 다니는 아이들로 거리가 북적이고 샌프란과 같은 대도시에서는 말 그대로 광란의 파티가 벌어집니다.

그런데 10월의 마지막 날은 개신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날입니다. 마틴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그 성당에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를 향한 95개조의 반박문을 게시하면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고 결국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가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루터의 신학을 여러 가지로 논할 수 있겠지만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십자가 신학입니다.

루터는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했고 그것을 그의 신학은 물론 삶에 적용했습니다. 루터가 이처럼 십자가 신학을 주장하게 된 것은 중세 가톨릭 교회들이 십자가 고난을 외면한 채 부활의 영광만을 지나치게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영광의 신학을 인간의 이성과 노력, 업적을 통해서 인간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신학이라고 비판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을 높이고, 영원한 진리가 아니라 잠시 있을 세상의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는 소위 값싼 은혜를 설파하는 천한 신학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루터는 십자가 신학이 모든 신앙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은 하나님께서 친히 죽음의 자리까지 내려간 사건입니다. 모진 고난과 수치를 십자가 위에서 한 몸에 실제로 겪으셨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인간의 교만과 자랑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 세상 속에서 누리는 영광과 형통이 십자가를 통과한 것이 아니라면 그릇된 신앙입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라는 영국의 신학자는 자신이 청년시절에 루터의 십자가 신학을 이해할 수 없었고 도리어 거부했다고 고백합니다. 그가 믿는 신앙 까지도 이성을 사용해서 증명해 내고 글이나 말로 표현해 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학교를 졸업하고 부목사로 교회를 섬기면서 루터의 십자가 신학을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상아탑 안에서 머리로 생각하던 신앙과 그가 몸으로 부딪친 목회현장은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교회에서 만나는 성도들의 삶은 신학적 지식이나 이성으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고 처절했습니다. 그때 맥그래스는 루터가 말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을 실제 삶 속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때때로 십자가를 교리적으로 이해하곤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대속(代贖)의 교리가 십자가의 모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해지고, 악에 대하여 승리하시고, 하나님과 화해한 사건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위대하고 신비로운 사건이 교리에 머문다면 우리의 신앙은 매우 추상적이 될 것입니다. 10월의 마지막 밤에 연인과 헤어짐을 노래한 감상이나 헬로윈 코스튬을 입고 돌아다니는 아이들처럼 십자가가 단순한 감상이나 신앙의 겉치레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교리를 넘어서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가사처럼 주 달려 죽으신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려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고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훈련해야 합니다. 십자가 위에 우리의 이기심과 쓸데없는 자존심을 못박고 자신의 옛자아가 죽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작은 예수가 되어서 세상 속에서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종교개혁 주간을 맞으면서 십자가를 믿는 신앙과 그 안에서 체험하는 은혜가 교리를 넘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삶으로 이어지길 원합니다.(2014년 10월 31일 SF 한국일보 종교 칼럼)

Speed Limit

좋은 아침입니다.

1.
어제는 새크라멘토 근처
욜로 카운티(Yolo county)에 있는
감 밭에 다녀왔습니다.

캘리포니아가 극심한 가뭄인데
실제로 농사를 짓는 지역에 가보니
농작물들이 마른 곳도 있고
하루속히 단비가 흡족히 내려야 함을 실감했습니다.

과수원에 가까워 지면서
로컬 도로로 옮겨 탔는데
길가에 있는 스피드 리밋(speed limit)표지판의 숫자가 요동을 칩니다.

55 – 35 – 25 – 55

55마일 지역인 줄 알고 달렸는데
35마일 존으로 갑자기 바뀝니다.
게다가 근처에 학교가 있으면
25마일로 바뀝니다.

그 지역에 익숙하신 집사님 말씀으로는
경찰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가
속도 위반한 차들에게 가차없이 티켓을 준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어느 때보다 길 옆에 있는
스피드 리밋 표지판을 주의해서 보게 되었습니다.

2.
그런데 생각해보니
우리들 인생길에도 스피 리밋이 있을 것 같습니다.

고속도로에서 너무 늦게 달려도 티켓을 받듯이
인생길을 가는 우리들도 너무 늦게 걸어가고 있다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속도를 내야 합니다.

너무 빨리 달려도 문제입니다.
그때는 속도를 줄여야 합니다.

물론 속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방향이지요.
아무리 빨리 달려도 방향이 맞지 않으면 큰 일입니다.

너무 늦게 걷는다면
게으름 때문일 것입니다.
너무 빠르게 걷는 것은 욕심 때문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스피드 리밋을 지키면서
운전하듯이
하나님 앞에서
속도를 지키면서
주어진 인생길을 걸어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임을 배웁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여호수아 23:6)
Therefore, be very strong to keep and to do all that is written in the Book of the Law of Moses,
turning aside from it neither to the right hand nor to the left, (Jos 23:6 ESV)

하나님 아버지,
너무 느리지도 않고
너무 빠르지도 않고
하나님 안에서 자기 속도를 지키면서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10.23 메일 목회서신)

*I-280도 곳곳에 경찰이 숨어 있습니다. 스탠포드에서 올라오시는 성도님들도 스피드 리밋을 꼭 지켜주시길.^^

행함이 있는 믿음

좋은 아침입니다.

1.
한 달에 한번
은퇴하고 이곳에 와 계신
신학교 은사님을 모시고
요한 웨슬리 설교를 읽고 있습니다.

갑자기 내일 설교 한편을
발제해야 해서 준비를 하는데
설교 제목이 흥미롭습니다:
믿음으로 세워지는 율법 (the law established through faith)”

믿음과 율법
즉 은혜와 행위는 서로 상반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웨슬리는 믿음과 율법/ 은혜와 행위가 함께 간다고 말합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합니다.
율법없이 죄를 깨닫기 힘듭니다.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하지만
선행과 성결(거룩함)의 행위가 없다면
그 믿음은 온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온전해 졌을 때
비로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율법이 완성됩니다 (5:17).

웨슬리는 그의 설교에서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
은혜에 도취되어서
삶이 나태해지고, 방만해 지는 것을 무섭게 꾸짖습니다.

이제 주님을 향한 열정이 덜 하다는 말입니까?
금식을 하는 일과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과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부르는 일에 덜 열심입니까?
, 회개하십시오! 여러분의 믿음 없음을 슬퍼하십시오! 어디서 떨어졌는지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불성실을 비탄하십시오.
이제부터 열정을 다하여 처음 일들을 다시 찾아 행하십시오.
(설교 35, 믿음으로 세워지는 율법 I)

이 밖에도 웨슬리는
먹거리부터, 의복, 시간과 물질의 사용에 이르기까지
은혜라는 핑계로 대충 살아가는 신자들의 삶의 모습을 조목조목 점검합니다.

2.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 것은
대단한 특권입니다.
그렇다면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음에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삶이 피곤하고, 힘겹고,
앞 길에 대한 염려와 근심으로 인해서
신앙까지 나약해져서는 안됩니다.

이제 올 해도 두 달 남았습니다.
추수감사절만 지나면 한 해가 휘리릭 지날 것입니다.

믿음을 바로 세우고
삶의 고삐를 다잡고
새 달을 맞기 원합니다.

여러분이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일에서 그를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서 열매를 맺고, 하나님을 점점 더 알고, 하나님의 영광의 권능에서 오는 모든 능력으로 강하게 되어서 기쁨으로 끝까지 참고 견디기를 바랍니다. ( 1:10-11)
so as to walk in a manner worthy of the Lord, fully pleasing to him, bearing fruit in every good work and increasing in the knowledge of God. 11 May you be strengthened with all power, according to his glorious might, for all endurance and patience with joy, (Col 1:10-11 ESV)

하나님 아버지,
믿음과 삶이 하나가 되게 하시고
그 안에서 주님의 능력을 힘입게 하옵소서.
새 달을 맞아서 매사에 열심을 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10.30 메일 목회서신)

축복

좋은 아침입니다.

1.
요즘 목요서신에서는
새벽에 읽는 신명기 말씀을
계속 나누게 됩니다.

오늘은
신명기에서 매우 익숙한
28장을 읽었습니다.

28장에 나오는 축복의 말씀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 백성들을 향한 최고의 축복선언이기 때문입니다.

몇 가지 유명한 구절을 옮겨 옵니다.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5-6)

여호와께서 명령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할 것임이니라 (8-9)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13-14)

익숙한 말씀들이지요?
어머니들께서 기도하실 때 많이 쓰시던 말씀도 있구요.

2.
그런데 28장을 읽다 보면
앞의 열네 구절만 축복이고 뒤에 15절부터 57절까지는
축복의 말씀을 모두 되엎는 저주가 나옵니다.
28장 앞에 있는 27장에도 마찬가지이고요.

저주의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꼼짝없이 저주를 받아야 할 우리들인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저주를 끊고
은혜 가운데 축복으로 들어가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3.
28장에 나오는 축복들을
욕심껏 모두 취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약속의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말씀이니
우리가 모두 취하는 것도 격에 맞지 않습니다.

하지만 12절 말씀이 깊이 다가왔습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무엇보다 우리들의 손으로 하는 것에 복을 주시면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헛바퀴 도는 인생이 아니라
열심히 일한 것에 열매가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겁니다.

남에게 꾸지 않고 베풀며 사는 것도 복입니다.
빚을 지고 사는 인생은 늘 쫓깁니다.
큰 재산을 축적하지 못해도
조금이라도 베풀며 살 수 있다면 보람된 인생입니다.

이것이 우리들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살다 보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순간들이 꼭 있습니다.
하늘의 보고를 여시고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린다면 더 없이 행복한 인생입니다.

신명기 말씀은
하나님 나라 법칙입니다.
어그러지고 뒤틀린 세상이기에
하나님을 믿어도 모든 축복이 그대로 임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오늘 새벽에는
12절의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참빛 교회 식구들 모두에게 그대로 임하길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께서는, 그 풍성한 보물 창고 하늘을 여시고, 철을 따라서 너희 밭에 비를 내려 주시고, 너희가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많은 민족에게 꾸어 주기는 하여도 꾸지는 않을 것이다.
The LORD will open to you his good treasury, the heavens, to give the rain to your land in its season and to bless all the work of your hands. And you shall lend to many nations, but you shall not borrow.

(Deu 28:12 ESV)

하나님 아버지,
참빛 교회 식구들 께 하늘의 은혜를,
수고한 대가를,
베풀며 사는 복을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10.16 메일 목회서신)

종교개혁 주일에

개신교에서는 10월 마지막 주일을 종교개혁주일로 지킵니다. 1517년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그 성당에 당시 로마 가톨릭의 타락과 비리를 고발하는 95개조의 반박문을 게시하면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날이 바로 10월 31일이었습니다. 개신교회가 시작된 날입니다.

마틴 루터는 당시의 가톨릭교회가 면죄부를 팔면서 교인들의 돈을 착취하고, 교황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이 정치 세력화되는 것을 보면서 분개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물론 교회의 사명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던 마틴 루터는 타락한 교회를 반박하는 95개 조항을 조목조목 기록해서 비텐베르그 성당에 게시했고 이 사건이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마틴 루터로부터 시작된 개혁의 불꽃은 독일은 물론 온 유럽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교회가 하나님보다 위에 올라가있고, 백성들 위에 군림하던 종교지도자들의 타락에 환멸을 느낀 백성들이 종교개혁에 동참했습니다.“오직 신앙으로”“오직 성경으로”“오직 은혜로”라는 캐치 프레이즈 그대로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고, 타락한 가톨릭 교회에 저항하는 종교개혁이 펼쳐진 것입니다.

개신교라는 것은 신앙의 개혁을 추구하는 교회라는 뜻입니다.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 부패하게 마련입니다. 부와 권력을 갖게 되면 하나님을 뒷전으로 옮겨놓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려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회개하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어서 날마다 교회의 모습을 돌아보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교회가 되길 기도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개신교를 프로테스탄트라고 합니다. 당시에 철옹성 같았던 로마 가톨릭에 저항해서 종교개혁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잘못 된 것, 하나님의 뜻에 위반되는 교회와 세상의 모습에 개신교는 저항합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조용하게 도운 인물이 오늘 우리가 살펴볼 필립 멜랑톤입니다. 그는 루터보다 14세나 아래여서 마틴 루터를 스승으로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멜랑톤은 학자였습니다. 루터가 과격하게 몸으로 종교개혁을 주도했다면 멜랑톤은 학문적으로 또한 그의 삶을 통해서 루터를 돕고 종교개혁에 동참했습니다. 루터가 당시 가톨릭 교회와 싸우면서 종교개혁을 주도했다면 멜랑톤은 타협과 평화를 주장하면서 종교개혁의 속도를 조절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누군가 먼저 시작할 때 불꽃이 타오를 수 있음을 루터를 통해서 배웁니다. 하지만 한 사람이 개혁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앞에서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고, 뒤에서 은밀하게 돕는 손길도 있어야 하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함께 참여하는 발걸음도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진정한 혁이 성취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주일을 맞아서 우리들 개인의 신앙과 삶이 새로워지길 원합니다. 개신교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이 임하길 기도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주님의 나라가 되길 소원하면서 그 길로 나가기 원합니다. 우리 참빛 교회도 날마다 새로워지고 주님의 나라를 이루는데 귀하게 쓰임받길 원합니다.-河

멋지고 근사하게

좋은 아침입니다.

1.
새벽기도회에서 읽고 있는
신명기 말씀을 두고
저는 하늘나라 생활방식이라고 부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2세들에게 행한 모세의 설교이기에
하나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들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땅에 들어가면
하나님 백성으로 손색이 없도록 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주신 말씀이기도 하지요.

물론
어그러지고 거슬리는 세상(2:15)에 살다 보니
신명기는 물론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가 어렵지만
우리들의 눈과 마음은 하나님 말씀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2.
오늘 새벽에는 신명기 23장을 읽었습니다.
그 가운데 마지막 두 절 말씀이 특별했습니다.

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는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되느니라 그러나 그릇에 담지는 말 것이요, 네 이웃의 곡식 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 (신명기 23:24-25)
“If you go into your neighbor’s vineyard, you may eat your fill of grapes, as many as you wish, but you shall not put any in your bag. 25 If you go into your neighbor’s standing grain, you may pluck the ears with your hand, but you shall not put a sickle to your neighbor’s standing grain.  (Deu 23:24-25 ESV)

가난한 자들에 대한 말씀이었는데
배고프고 가난한 사람들은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가서 배불리 먹을 수 있습니다.
곡식 밭에 들어가서 이삭을 손으로 따도 됩니다.

밭 주인들은 포도원과 밭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개방해야 합니다.

더불어 살아가고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경제 시스템인 셈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배가 고프고 가진 것이 없어도
포도를 그릇에 담아와서는 안됩니다.
곡식밭에 낫을 대서도 안됩니다.
이것은 욕심입니다.
무례한 행동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힘겹게 사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살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의 포도나 곡식을 갖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것은
엄격하게 금하십니다.

일정한 선을 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례하게 행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3.
이처럼 신명기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불쌍히 여기심)
하나님의 공의(엄격하심)
개인의 삶과 세상에 온전히 적용하라는 교훈입니다.

간혹 그리스도인들이 비난을 받는 것은
포도를 그릇에 욕심껏 담기 때문입니다.
무례하게도 낫으로 곡식을 베기 때문입니다.
과욕을 부리거나 얌체처럼 행동해서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아무리 배가 고프고 힘이 들어도
매사에 지나치면 안됩니다.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백성이라는 품위(decency)를 지켜야 합니다.

오늘 하루
우리들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백성으로 멋지고/근사하게 살기 원합니다.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24:19)
When you reap your harvest in your field and forget a sheaf in the field, you shall not go back to get it. It shall be for the sojourner, the fatherless, and the widow, that the LORD your God may bless you in all the work of your hands. (Deu 24:19 ESV)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면서
좌로나 우로 치우침 없이
근사하게 살아가는 참빛식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10.9 메일 목회서신)

하나님 바라보면서

좋은 아침입니다.

1.
어제 수요예배에 가기 위해서
I-280 고속도로를 탔는데
저 멀리 검은 연기가 피어 오릅니다.

그러더니
소방차와 경찰차까지
비상벨을 울리면서 달려갑니다.

길이 꽉 막혔습니다.
일찍 나섰기에 망정이지
늦장을 부렸다면 예배시간에도 늦을 번 했습니다.

버스 한대가
완전히 불에 타서 길 옆에 세워져 있습니다.
승객들이 길 옆에서 다음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니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그렇게 막히던 도로가
사고현장을 지나가니
다시 말 그대로 고속도로가 됩니다.

2.
수요예배 끝나고
문 앞에서 잠시 얘기하고 있는데
하는 소리가 납니다.

교회 앞길에서 사고가 났습니다.
큰 사고는 아니지만
충돌을 한 차의 앞 범퍼가 너덜너덜하게 떨어졌습니다.

두 차의 운전사가 나와서
서로의 잘못을 가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의도적으로 한 일은 아니니
두 사람 모두 속이 상하긴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순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3.
요즘은 유난히 길이 막힐 때가 많습니다.
미국의 경제가 좋아진다는 말이 맞는 지
도로에 자동차들이 부쩍 는 것 같습니다.

길이 막히면 누구나 조급증이 밀려옵니다.
그때마다
얌체 같은 차들이 있습니다.
알지 못하는 사정이 있겠지만
막힌 길을 요리조리 차선을 옮기면서
머리만 들이대는 차들입니다.

하지만
조금 가다 보면
얌체처럼 끼어들던 차가 제 옆에 있습니다.
말 그대로 오십보 백보인 셈입니다.

4.
어느 덧 10월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참 빠릅니다.
이제 올해의 남은 날들은 말 그대로 화살처럼 지나가고
또 다시 새해를 맞게 될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조급증이 발동할 수도 있고,
이런 저런 염려와 불안이 밀려올 수도 있습니다.

우리네 인생길은 늘 불완전합니다.
룰루랄라 노래가 나올 정도로
쉬운 순간은 잠시뿐입니다.

우리의 앞길을 모두 알 수 없습니다.
순간에 닥치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갑자기 버스가 불에 타고,
교회 앞에서 사고가 나고
길이 막힐 것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요즘 생명의 삶 큐티가 전도서인데
전도서 말씀이 깊이 다가옵니다.

좋은 때에는 기뻐하고, 어려운 때에는 생각하여라.
하나님은 좋은 때도 있게 하시고 나쁜 때도 있게 하신다.
그러기에 사람은 제 앞일을 알지 못한다. (7:14, 새번역)
In the day of prosperity be joyful, and in the day of adversity consider: God has made the one

as well as the other, so that man may not find out anything that will be after him. (Ecc 7:14 ESV)

좋은 때는 기뻐하고
어려울 때는 자신을 돌아보고 기도하면서
담담하게 주어진 인생길을 걸어갈 뿐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의 여정을 따라 갑니다.

그 안에서 느끼는
하늘의 기쁨,
하나님의 손길,
세상이 빼앗지 못하는 평안,
감사와 기쁨이 있습니다.

요즘 주일 설교를 통해서 배우듯이
하나님 주신 말씀, 한 구절을 곱씹으면서
말씀과 기도로 주어진 인생길을 멋지게 살아가기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도
참빛 식구들의 삶의 여정에 함께하시고
삶이 예배가 되고, 그 안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하목사 드림
(2014.10.2 메일 목회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