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은혜 (2)

십자가의 도(道)

 

지난주에 살펴보았듯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구약의 율법이 요청하는 속죄 제사를 완성하신 사역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양이나 소 등의 제물을 준비하고 자신들의 죄를 양이나 소에게 전가(전가 transfer)한 후에, 제물을 죽였습니다. 율법에 따라 정확하게 준비한 제물을 제사장에게 갖고 가면, 제사장은 생명의 상징인 피를 제단에 뿌리고 제물을 불에 태워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매번 이런 절차를 밟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사야 53장에 예언한 대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나무에 매달아 죽는 것이 저주의 상징인 신명기 말씀(신21:22-23)처럼 저주받은 사람들이 죽는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 손과 발에 못 박힘, 군인들의 채찍에 온 몸에 피를 흘리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십자가 사역은 구약 율법의 완성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제물이 되셨습니다. 제사장이 되셨습니다. 한 번 죽으심으로 영원히 효력이 있는 속죄 사역을 완벽히 마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제물을 준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사장에게 나갈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보다 앞서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모든 죄에서 해방됩니다.

 

우리는 예사롭게 생각할 수 있지만,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엄청난 혜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듯이 성전 제사는 끝나고 믿음을 통해서 의롭게 되는 새로운 은혜의 시대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경험했고 믿기 전과 후의 실제적인 변화를 고백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방인에게도 전파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합니다:“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오늘 본문에서도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고 하였습니다.

 

죄인들이 죽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만을 알겠다고 말하는 것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미련해 보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했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과 제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십자가의 은혜와 능력 속에 빠져들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물론  초대교회에게서 십자가는 신앙의 핵심이었고 생명이었습니다. -河-

십자가의 은혜 (1)

주님의 보혈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이 임하기를 기다리라고 부탁하셨습니다(행1:8).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예수님의 약속대로 성령이 임하기를 기도하면서 기다렸고, 약 열흘 뒤인 오순절에 놀랍고 신비로운 모습으로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때부터 제자들은 목숨 걸고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을 시작으로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었고, 오늘날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이 모든 시작점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3년의 공생애를 마치고 예언하신 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없으면 영광스러운 부활도 없습니다. 부활이 없으면 오순절 성령강림도 없으니 기독교는 세상에 탄생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부활과 더불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수없이 들었던 십자가의 의미를 새롭게 배우고 정리하며, 온 교회가 십자가의 은혜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 당시의 십자가는 반역이나 살인 등 악한 죄를 지은 범인들이 달리는 형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골고다 언덕의 이름이 “해골”이었듯이 그곳에는 십자가에 달려 죽은 죄인들의 잔해들이 가득했습니다. 저주받은 곳이었습니다.

 

로마 시대 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에서도 나무에 달리는 것은 저주받은 것이었습니다(신21:22-23). 율법을 범하고 죽을 죄를 지은 사람들을 나무에 매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과 구약 시대에 죄를 범한 사람들이 나무에 달리는 것이 겹치는 부분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저주 받은 사람들이 달리는 나무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나타내는 표현이 “주님의 보혈”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제사법에 따라서 제물로 선별된 양을 죽이고 그 피를 제단에 뿌리는 피의 제사와 맞물립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구약 시대에 양이나 소 등 제물을 바쳐서 백성들이 죄에서 정결케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때는 매번 성전에 와서 속죄의 제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단번에 구약의 율법을 완성하셨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의 죄를 거룩한 보혈로 깨끗이 씻어 주셨습니다. 매번 속죄제사를 드릴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한번 죽으심으로 그를 믿는 자의 죄를 영원히 없애 주셨기 때문입니다. -河-

부활의 은혜

올해도 어김없이 부활절을 맞습니다. 팬데믹 이후에 부활절을 맞을 때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처음 발생했던 2020년 3월에 모든 예배를 온라인으로 전환하면서 부활절에는 다시 만나자고 광고했던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웬걸,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이 2년여 계속되었습니다. 한창 힘들 때는  교회에 다시 모여서 예배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그때의 기억이 아련한 추억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함께 모여서 부활절은 물론 주일 예배를 드리지 못할 때를 생각하면, 지금 우리의 모습에 감사할 뿐입니다. 작년 말부터 주일학교 아이들까지 함께 예배할 수 있으니, 한국말을 쓰는 참빛 공동체가 말 그대로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늘 그렇듯이 어려웠던 기억을 떠올리면 감사가 나옵니다. 막연했던 상항이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묵묵히 걸으니 빛이 찾아왔습니다.

 

올해도 지난해에 이어서 <부활의 은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준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굳게 신뢰할 때 우리도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부활을 믿는 자가 누리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서 부활의 은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그를 신뢰할 때, 영원한 생명의 부활을 선물로 얻습니다.

 

주일학교 아이들과 부활절 달걀(Easter Egg)에 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달걀 안에는 생명이 들어있습니다. 어미 닭은 생명을 갖고 있는 유정란을 3주 동안 품고 있습니다. 어김없이 3주가 되면 달걀을 깨고 병아리가 세상에 탄생합니다. 신비로운 생명의 탄생입니다. 어미 닭이 3주 동안 달걀을 날개 아래 품고 있는 것도 감동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실 때, 우리 안에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이 들어옵니다. 생명의 씨앗이 우리 안에 심깁니다. 겉으로 보면 모든 달걀이 비슷하지만, 생명을 갖고 있는 유정란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께서 생명으로 계신다는 것도 겉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압니다. 생명을 품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달걀을 뚫고 병아리가 세상에 태어나듯이, 올해 부활절을 맞으면서 우리 안에서 탈피(脫皮)해야 할 것들이 있다면, 껍질을 벗고 새로운 시작을 선언하기를 원합니다. 어두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무덤 문을 활짝 열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혜가 우리를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하길 원합니다.

 

새롭게 시작합시다. 힘겨운 세상이지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더불어 새로운 세상을 열어갑시다.-河-

찬송가 해설 (13) 갈보리산 위에

갈보리산 위에 (찬송가 150장)

 

앞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나눌 예정입니다.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기독교도 세상에 탄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부활도 없습니다.

 

고난주간과 부활절을 맞으면서, 교회가 함께 십자가에 관한 말씀을 나누게 되어 감사합니다. 우리 안에 십자가의 은혜, 십자가의 능력, 그리고 십자가에서 비롯되는 믿음이 충만해지는 시간이길 원합니다.

 

오늘은 베데스다 연못에 관한 말씀을 마치고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시작하는 길목에서 찬송가에 얽힌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살펴볼 찬송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즐겨 부르는 “갈보리 산 위에”(찬송가 150장)입니다: “갈보리 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가 고난을 당한 표라”로 시작합니다. 영어 제목은 “Old Rugged Cross(오래된 험한 십자가)”입니다.

 

이 찬송은 1912년 조지 베나드(George Bennard, 1873-1958) 목사님이 만들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는 물론 당시의 부흥 집회에서 많은 은혜를 끼친 찬송입니다. 찬송가 인기가 한창이던1960년대에는 미국인들이 가장 즐겨 부르는 찬송으로 뽑힐 정도였습니다.

 

조지 베나드 목사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찬송을 꼭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시상(詩想)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만 눈에 그려질 뿐이었습니다. 고민과 기도 속에 미시간 집회를 인도하는 날에 찬송시가 폭포수처럼 떠올라서 단숨에 찬송을 완성했습니다.

 

베나드 목사님은 집회를 주최한 미시간 포카곤 감리교회의 담임 목사 앞에서 기타를 치면서 자신이 방금 완성한 “갈보리 산 위에”를 불렀습니다. 찬송을 들은 보스트윅(Rev. Bostwick) 담임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불멸의 찬송을 허락해 주셨군요. 다른 찬송을 통해서 받아 본 경험이 없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라고 극찬하셨습니다. 보스트윅 목사님은 이 찬송을 출판하는 재정을 담당했고, 그 찬송은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가면서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갈보리 산 위에”를 처음 연주한 미시간 포카곤 감리교회는 미시간주의 문화유적으로 지정되었고, 찬송가 가사를 동판에 새겨 놓았답니다.

 

찬송가 “갈보리 산 위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형상화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험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님의 보혈을 바라보니 죄 사함의 은혜가 밀려옵니다. 그러니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후렴구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河-

 

 

요한복음 5장 (4)

영생을 사는 것

 

지난 한 달 동안 요한복음 5장의 베데스다 연못에 관한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본문의 핵심 메시지는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을 찾아가셨고 그곳에 누워있던 38년 된 병자를 일으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베데스다 연못이라는 시스템에 주목해서 말씀을 나눴습니다. 일등만 살아남는 베데스다의 법칙이 요즘 세상과 비슷했습니다. 무엇보다 천사가 내려오는 것조차 불확실한 상황에서 ‘혹시나’하고 기다리는 연못가 병자들의 모습이 못내 안타까웠습니다. 미래 지향적인 삶으로 보이지만, 정작 헛된 희망이 이들을 묶고 있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을 본 유대인들은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38년 동안 누워있던 병자가 일어나서 걷는 놀라운 사건은 보지 않고 쓸데없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과거에 묶여 있어서 그렇습니다. 선입견과 자기 고집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반면, 예수님을 만나서 38년 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지긋지긋한 병에서 해방된 사람은 담대하게 자신을 고치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선포하고 증언했습니다. 병이 나았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몸으로 경험했습니다. 거칠 것이 없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누워서 천사가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인생에서 일어나 걷고 자기의 삶을 개척하는 능동적인 새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잡아서 죽일 생각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자신들이 쌓아놓은 기득권이 위협받기 때문입니다. 지키는 것에 연연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17절)고 하시면서 자신의 길을 가십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신 것을 두고 꼬투리를 잡습니다. 사형에 해당하는 신성모독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박해하고 급기야 죽이려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아버지가 생명을 주관하시듯, 예수님이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도 당연합니다. 아버지는 심판하는 권한도 아들에게 맡기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동격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경멸하고 박해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것과 같습니다.  신성모독이라는 죄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생명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것이 생명의 길입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