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2)

구약 시대 하박국 선지자는 정의가 무너지고 패역한 세상에 살았습니다. 폭력이 난무합니다. 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을 믿는 백성의 타락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안타까워서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세상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는 언제까지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기다려야 하는지 한탄하며 기도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당시의 제국인 바빌론 군대를 동원해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표범보다 빠른 말들, 이리보다 사나운 군대가 먹이를 가로채는 독수리처럼 이스라엘을 덮칠 것입니다. 섬찟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어떻게 세상 제국에게 공격을 당하고 심판을 받을 수 있냐고 하나님께 반문합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이 하나님을 모르는 훨씬 패역한 세상 제국에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논리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망대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립니다.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 말씀을 멀리서도 읽을 수 있게 기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바빌론을 동원해서 하나님 백성을 심판하시지만,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 백성을 깨우치기 위해서 잠시 세상 나라를 동원하실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돌아오면 다시 회복되고 살 것입니다. 하지만, 근본부터 포학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바빌론은 영원히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하고 찬송합니다. 하나님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회개하고 마지막으로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게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진정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망대에 올라갔을 때,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합2:4)는 하나님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 백성이 망가졌고 세상도 망가졌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생명을 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의인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하박국 말씀을 인용했고, 훗날 마틴 루터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믿음은 의롭게 사는 힘입니다. 세상을 이길 힘이요, 세상 속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길입니다. 믿음으로 승리하기 원합니다. 믿음으로 의로운 길을 걷기 원합니다. 믿음이 힘과 능력입니다.-河-

믿음은…(1)

올해 우리 교회의 표어가 <든든히 서게 하소서>입니다. 제가 참빛교회에서 목회한 지 19년 만에 90일 안식일을 갖게 되었기에 제가 없는 동안에도 교회가 든든히 서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습니다. 그에 앞서서 올해는 우리 모두 신앙의 기초를 든든히 다지고 싶었습니다. 나무에 비유하면, 터를 넓게 잡고 뿌리를 깊이 내리기 원해서 “든든히 서게 하소서”라는 표어를 정했습니다.

 

든든히 서기 위해서 앞으로 4주 동안 믿음에 관해서 공부할 예정입니다. 믿음에 관한 이론적인 설명보다는 믿음이 우리 삶에 어떻게 연결되는지 실제적인 면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나타나는 변화, 예수님을 믿기에 드러나는 특징들,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까지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주일 마틴 루터가 작사하고 작곡한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루터가 시편 46편을 묵상하다가 찬송가를 만들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시편 46편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큰 힘이 되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근원부터 과정 그리고 마지막 종착점을 설명합니다.

 

시편 46편을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1-3절은 하나님의 창조가 무너진 상태입니다. 선하고 아름다운 창조가 창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습니다.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립니다. 산이 바닷물에 빠졌습니다. 자연스레 바닷물이 솟아서 다시 산이 흔들리는 혼동이 발생했습니다. 세상이 근본적으로 망가진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때도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피난처 삼고, 하나님 주시는 힘으로 견딥니다. 특별히 어려울 때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믿음을 잃지 않은 것입니다.

 

두 번째 4-7절은 회복의 과정입니다. 한 시내가 흘러서 하나님의 성을 회복합니다. 성소에 기쁨이 넘칩니다. 하나님께서 성 중에 계시니 성이 흔들릴 수 없습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라는 루터의 찬송이 생각납니다. 새벽부터 하나님께서 도우십니다. 뭇 나라들이 소리치면서 활동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세상이 잠잠합니다. 이처럼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피난처가 되십니다.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만군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세 번째 8-11절은 마지막 심판을 암시합니다. 하나님께서 본격적으로 앞장 서십니다. 계속되던 전쟁이 그칩니다. 활을 꺾고 창을 끊어 내시고 수레를 불사르십니다. 전쟁 무기를 전부 없애십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앞에 서서 직접 말씀하십니다:“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로다.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10절). 마지막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최후 승리를 바라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河-

찬송가 해설 (10)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송가 585장)

 

연속 설교 중간에 나누는 찬송가 해설 열한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찬송가 585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겠습니다. 이 찬송은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가 작사하고 작곡한 찬송가로 유명합니다.

 

가톨릭 사제였던 마틴 루터는 당시 교황과 사제들이 성경과 달리 자기들의 잇속에 따라서 백성들을 오도하는 것을 보고 분개했습니다. 결국 그가 대학 교수로 있던 비텐베르크 성당의 정문에 “95개 조 반박문(논조)”을 게시합니다. 1517년 10월 31일이었습니다.

 

마틴 루터의 원래 의도는 자신이 반박한 가톨릭교회의 그릇됨을 놓고 학자들과 토론회를 개최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의도와 달리 당시 인쇄술의 발달에 힘입어 루터의 반박문이 독일은 물론 유럽 전체로 퍼져 나가면서 종교 개혁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당시 가톨릭 교회는 마틴 루터를 사제에서 파문했습니다. 생명의 위협도 가했습니다. 프레더릭 제후의 도움으로 바르트부르크성에 숨어살면서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했는데, 루터의 독일어 성경 역시 당시 백성들의 눈을 뜨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독교 신앙과 교회가 알려준 신앙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1521년 마틴 루터가 보름스에서 열린 제국회의에 불려 나갑니다. 그곳에서 마틴 루터는 그릇된 교회의 교리에 순응할 수 없기에 자신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했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로 끝나는 루터의 보름스 연설이 유명합니다.

 

하지만, 종교 개혁자 루터의 길은 험난했습니다. 루터가 힘들었을 때, 시편 46편을 묵상하면서 찬송가로 만들었는데 그것이 <내 주는 강한 성이요>입니다. 이 찬송은 당시 종교 개혁가들의 군가처럼 불렸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모든 것이 가능하고, 세상의 그 무엇도 자신들을 이길 수 없음을 찬송을 부르면서 확인했습니다. 지금도 마틴 루터가 95개 조 반박문을 게시했던 비텐베르크 성당의 탑 꼭대기에 “강력한 성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A mighty fortress is our God)”는 찬송가 첫 구절이 지금도 새겨져 있습니다.

 

<웨슬리의 찬송가 부르는 자세> 1.찬송가를 많이 배우십시오. 2. 곡조대로 부르십시오. 마음대로 고쳐 부르지 마십시오. 3. 회중과 함께 부르십시오. 4. 큰소리로 용기 있게 부르십시오. 죽은 듯이 또는 반쯤 잠을 자듯이 찬송하지 마십시오. 5. 겸손하게 부르십시오. 자기 목소리를 크게 내지 말고 조화를 이루어 찬송하십시오. 6. 박자에 맞춰서 부르십시오. 너무 느리거나 빨리 부르면 안 됩니다. 7. 영으로 노래하십시오.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음악에 마음을 빼앗기면 안 됩니다. -河-

 

돌보시는 하나님 (7)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하나님

 

“주가 돌보신다”는 찬양 가사에서 감동을 받고 지난 7주 동안 <돌보시는 하나님>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각자 살기도 바쁩니다. 경쟁은 치열하고 격차는 더 커지면서 공동체 의식도 무너지고 있습니다. 우선 내가 살아야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애틋하게 생각하시고 실제로 돌보신다는 말씀은 복음(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가는 길을 돌보시는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몸과 건강, 염려와 불안, 두려움을 포함한 마음과 생각을 돌보시는 하나님에 관해서 공부했습니다. 개인의 영역을 넘어서 하나님께서는 가정, 교회, 세상을 돌보심을 배웠고, 지난 시간에는 특별히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같은 약한 자들을 돌보심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마지막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돌보십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끝까지 돌보셨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땅을 약속하셨고,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서 그 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우상을 섬겼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주신 땅을 잃어버리고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갑니다. 그리고 온 세상에 흩어진 디아스포라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길 선지자들을 통해서 촉구하셨습니다. 돌아오면(회개) 모든 것을 용서하고 회복시키신다고 말씀하셨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은 그들에게만 은혜와 복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세상의 빛이 되어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을 보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구원의 역사가 펼쳐지길 기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들만 하나님이 선택하신 민족이라는 선민의식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꾸로 이해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주도하시는 새로운 구원입니다. 대상도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을 새로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삼으셨습니다. 끝까지 돌보시고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이 지금도 유효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끝까지 우리를 돌보실 것입니다. 우리와 더불어 일하시면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河-

 

돌보시는 하나님 (6)

약한자를 돌보시는 하나님

 

돌보시는 하나님>이라는 연속 설교에서 빠질 수 없는 주제는 성경에서 분명하게 알려주는 나그네, 고아, 과부로 대표되는 약한 자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무조건 불쌍히 여기시고 돌보는 백성들입니다.

 

나그네는 정착할 곳 없이 타향에 살거나 이곳저곳을 떠도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은 원래 유목민이었습니다. 가나안 땅도 그들의 원래 터전은 아닙니다.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훗날 그의 후손들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면서 나그네 삶의 서러움을 톡톡히 경험했습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 나그네라고 부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나님 나라에 있기 때문입니다(빌3:20). 이 땅이 결코 고향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모든 것을 걸지 않습니다. 세상이 우리의 목적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면서 나그네로 살아갈 뿐입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야말로 나그네입니다. 미국에 터전을 잡았지만, 마음은 조국에 가 있습니다. 나그네로 살다 보니 타향살이의 설움도 느낍니다. 우리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미국에 왔고 그 목적을 갖고 살아갑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나그네의 삶을 몸소 실천하고 있기에 나그네를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이 깊이 다가옵니다.

 

고대사회에 고아와 과부는 돌봄이 꼭 필요했습니다. 고아는 부모가 없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 남편이 없는 과부는 세상에서 이용당하기 쉬웠습니다. 고대사회에서 고아나 과부의 권리는 거의 없었기에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이들을 도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그네, 고아, 과부와 함께 가진 것이 없는 사회적 약자도 하나님께서 돌보십니다. 권력의 압제 속에 살아가는 민초를 하나님께서 돌보십니다. 물질이 없는 가난한 자들도 돌보십니다. 또한 이들을 돌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15:11).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하나님께 꾸어 드리는 것이어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아 주신다고 했습니다(잠19:17).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25장에서는 주리고 목마른 자들을 돕는 것이 곧 예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심판 날에 예수님께서 찾으시고 칭찬하시는 진정한 하나님 백성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약한 자들을 돌봤으니, 하나님께서 좋아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절대적인/상대적인 약자들을 배려하고 존중하기 원합니다.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펼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