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선한 목자라

에고 에이미 (4)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일곱 가지 <에고 에이미(나는…I am)>를 한 가지씩 공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신 자기소개입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라” “나는 세상의 빛이라” “나는 양의 문이라”를 배웠습니다.

 

오늘은 네 번째 <에고 에이미>인 “나는 선한 목자라”를 공부합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양의 문과 연결됩니다. 요한복음 10장은 양을 돌보는 참된 목자와 양을 해치기 위해서 담을 넘어오는 도둑과 강도를 비교했습니다. 참된 목자는 우리의 문을 통해서 양의 출입을 돕습니다. 양의 이름을 부르면, 양들도 자기 이름을 부르는 목자의 음성을 압니다. 하지만, 도둑과 강도는 양의 이름을 모릅니다. 양들도 그들을 모릅니다. 양들이 따라나서지 않으니 도둑질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양의 문으로 소개하십니다. 양의 우리를 지키는 문입니다. 예수님을 통과할 때 생명과 구원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따르는 양들은 예수님의 문으로 출입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들어가는 모든 사람은 구원을 받고, 들어가고 나가면서 먹을 양식(“꼴”)을 얻습니다. 도둑과 강도들은 양을 죽이려는 것만 생각하지만, 양의 문이신 예수님은 풍성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자연스럽게 자신을 “나는 선한 목자라”고 소개하십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정성껏 돌봅니다. 목숨을 내어놓을 정도로 양을 사랑합니다. 반면, 봉급만 받고 형식적으로 양을 돌보는 삯꾼 목자는 물질에만 관심을 둡니다. 이리가 오면 양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목숨을 먼저 챙깁니다. 양을 들에 두고 도망갑니다. 이리가 양을 물어가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삯꾼 목자들이 많았습니다. 백성들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어떤 생활을 하고, 어떤 신앙을 갖든지 상관하지 않고 자기들 잇속만 챙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질타하십니다. 그래도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 말씀을 듣지 않고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들은 뇌물을 받고 성직을 매매하던 헬라 시대의 제사장들과 비슷했습니다. 더 멀리는 에스겔 선지자가 말하던 삯꾼 목자와 정확히 일치했습니다:”내 양 떼가 노략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이라. 내 목자들이 내 양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고 내 양 떼를 먹이지 아니하였도다”(겔34:8). 하나님께서는 직접 자신의 양을 찾고 돌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기는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없다고 정의대로 그것들을 먹으리라(겔34:15-16).

 

에스겔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약속이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할렐루야! -河-

 

나는 양의 문이라

에고 에이미 (3)

 

신약성경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신 일곱 가지 말씀이 나옵니다. 헬라어 <에고 에이미(나는…I am)>로 시작합니다. 처음 시간에 “나는 생명의 떡이라,” 지난주에는 “나는 세상의 빛이라”는 예수님의 <에고 에이미>를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몸을 주셨습니다. 어두운 세상을 생명의 빛으로 밝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 오신 것을 말씀하실 때는 초막절이라는 이스라엘의 3대 명절 기간이었습니다. 낮에는 성전에 물을 붓고, 밤에는 불을 켜는 초막절 기간이 끝나면서,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 오셨음을 알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빛은 절대로 꺼지지 않습니다.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추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오늘 우리가 배우는 세 번째 예수님의 <에고 에이미>는 “나는 양의 문이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을 때는 유대인의 명절 가운데 하나인 수전절(하누카) 기간이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 가운데 한 명인 셀류시드 왕조의 안키오커스 4세(주전175-164)의 통치를 받을 때였습니다. 안키오커스는 이스라엘은 물론 정복한 민족들에 헬라 문화를 강요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 지내는 것은 물론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금지했습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헬라 제국에 뇌물을 바치고, 대제사장의 직분을 사고파는 일을 했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을 헬라식으로 바꾸는 데 앞장섰습니다. 예루살렘은 혼란에 빠졌고, 커다란 신앙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에서 20여 마일 떨어진 작은 마을 데모인에 살고 있던 제사장 맛다디아와 그의 다섯 아들이 무력으로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하스몬 왕조(주전143-주후63년)를 세웠습니다. 맛다디아의 셋째 아들 유다 마카비(“망치”)가 혁명을 주도했기에 마카비 혁명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했을 때, 성전에는 하루 분 기름밖에 없었는데, 신기하게도 여드레 동안 불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마카비 형제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회복한 것을 기념하는 유대인의 절기가 “수전절/하누카(봉헌)”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실 때가 바로 유대인의 절기 수전절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도 마카비 시대의 제사장들과 마찬가지로 로마 제국에 아부하면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사랑으로 양을 돌보는 목자가 없었습니다(겔34장):”내 양 떼가 노략 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이라”(겔34:8). 그때 예수님께서 자신이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안전하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들어가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河-

나는 세상의 빛이라

에고 에이미 (2)

 

“에고 에이미(I am)” – 예수님께서 직접 밝히신 일곱 가지 “나는 누구인가?”에 관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오병이어의 기적에 이어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소개하시는 말씀을 배웠습니다. 여기서 떡은 예수님의 몸(살)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해서 그의 몸을 내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주신 사랑이요 희생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배울 두 번째 “에고 에이미”는 “나는 세상의 빛이라”입니다:“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8:12). 빛은 어두움의 반대입니다. 어두움은 또한 죽음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죽음을 몰아낼 생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빛 되신 예수님을 따르는 주님의 백성들은 어두움에 다니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기적을 표적(sign)이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기적 자체를 넘어서 기적이 주는 교훈을 자세히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생명의 떡으로 이어진 것이 대표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소개하셨을 때도 말씀하신 배경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3대 명절 중의 하나인 초막절을 맞아서 성전에 올라가셨습니다. 초막절은 추수감사절에 해당합니다. 많은 사람이 예루살렘 성전에 모였습니다. 초막절에는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떠서 제단에 붓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초막절이 끝날 즈음, 성전에 물을 붓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 외치십니다:”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7:37-38). 여기서 생수의 강은 실로암 연못의 물을 넘어서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가리킵니다.

 

낮에는 제단에 물을 붓는 예식을 행하였다면, 밤이 되면, 성전에 불을 밝혔습니다. 성전의 헌금함 앞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하셨는데(8:20), 성전 헌금함은 여성들까지 들어갈 수 있는 여성의 뜰에 있었고 이곳에서 초막절 불을 밝혔습니다. 초막절이 끝나니 불이 꺼졌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초막절에, 제단에 물을 붓고 밤에 불을 켜는 예식은 구약 성경에 기초한 전통이었습니다(슥 14:7-8). 무엇보다 빛에 대한 성경 말씀은 곳곳에 등장합니다. 특별히 구약성경에서 예고한 빛이 세상에 오셨음을 예수님께서 알리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어두움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믿습니다. 세상에 깃든 어둠을 몰아내고 생명을 주시길 간절히 원합니다.-河-

 

나는 생명의 떡이라

에고 에이미 (1)

신약성경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신 일곱 가지 말씀이 나옵니다. 헬라어 “에고 에이미(나는…I am)”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소개하는 예수님의 일곱 가지 표적(sign)과 함께 하나님에게서 오신 예수님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앞으로 7주에 걸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설명하시는 요한복음의 “에고 에이미”를 한 가지씩 살펴볼 예정입니다. 헬라어 “에고 에이미”는 떨기나무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I am who I am)”(출3:14)라고 하신 것과 맞물립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만 자신을 계시하셨다면,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알리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제일 먼저 등장하는 “에고 에이미”는 “나는 생명의 떡이라”(요 6:35)입니다. 요한복음 6장은 71절이나 되는 매우 긴 말씀입니다. 또한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표적(sign)이라고 부릅니다. 기적이 뜻하는 의미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기적에 이어서 기적의 의미를 설명해 주는 말씀(해설)이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6장은 예수님께서 빈 들에서 어린아이가 갖고 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 천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들어 축사하시고 사람들에게 나눠주니 모두 배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자신들의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면 먹거리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물질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이 한번 마시면 다시는 목마르지 않은 신기한 물(magic water)을 구한 것처럼,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백성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 신기한 떡(magic bread)을 얻고 싶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자리를 뜨십니다.

 

이튿날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썩을 양식을 구하지 말고, 영생을 주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고 말씀하십니다(27절). 그리고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백성들은 물론 제자들도 예수님 말씀을 명확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는 백성들 간에 분쟁이 일어나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여전히 먹고 마시는 것, 즉 세상의 물질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떡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생각 속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셔서 백성들을 살리는 것뿐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의 몸과 피를 그를 믿는 자를 위해서 내주시는 생명의 떡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河-

강하고 담대하라 (6)

시편 27편을 통해서 <강하고 담대하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정확한 확인은 어렵지만, 체로키 인디언들에게 전해지는 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우리 마음에는 좋은 늑대와 나쁜 늑대가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나쁜 늑대는 분노 질투 슬픔 후회 탐욕 교만 열등감 좌절을 가져다주고, 선한 늑대는 기쁨 평화 사랑 희망 친절 겸손함 관대함 신뢰를 선물한다고 했습니다. 손자가 두 늑대가 싸우면 누가 이기는지 물었을 때, 할아버지는 “네가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기지”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인디언 할아버지의 현명한 대답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틈틈이 어떤 늑대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지 점검했고, 마음에 불안과 두려움이 찾아오면 제가 나쁜 늑대에게 먹이를 주었음을 반성했습니다. 매우 현실적인 지혜였습니다.

 

팔로 알토에서 목회했던 존 오트버그(John Ortberg) 목사님의 <하나님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가까이 계십니다(God is closer than you think)>는 책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것을 듣고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하느냐는 우리의 몫입니다. 여기서 목소리는 단순한 음성이 아니라 우리에게 닥치는 여러 가지 일까지 포함합니다.

 

예를 들면, 재정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은 부자들을 질투하고 자신의 삶을 비관합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어려운 중에도 감사를 잃지 않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아냅니다.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올라갔습니다. 한 사람은 자기 명예를 위해서 권력을 행사하고 사람들을 부려 먹습니다. 다른 사람은 동료들의 만족과 성장을 위해서 함께 노력합니다. 두 사람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은 계시지 않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자신을 돌아봅니다. 좋은 생각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교훈입니다.

 

오트버그 목사님은 실존 인물이었던 존 내쉬(John Nash)의 인생을 소재로 삼은 “뷰티플 마인드(A Beautiful Mind)”라는 영화도 소개합니다. 피해망상증을 앓았던 주인공은 있지도 않은 일들을 상상하고, 두려움에 떨며 살아갑니다. 수학자였던 내쉬가 국방부의 군사 작전 프로젝트에 참여하는데, 누군가 자기를 죽일 수 있다는 두려움에 빠지고 맙니다. 그래도 주인공은 정신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정신적으로 매우 힘든 가운데서도, 좋은 말을 듣고 좋은 생각을 하면서 이뤄낸 업적이었습니다.

 

오트버그 목사님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뷰티플 마인드가 꼭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여러 가지 소리가 들려올 때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고 경청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예”라고 답하고,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 때 마음과 생각이 변화됩니다. 우리에게 “뷰티플 마인드”가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평강을 누릴 때입니다(롬8:6).-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