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마음 (2): 긍휼/ 마태 9장 27-31절
Category: 생명샘
예수님의 마음 (2): 긍휼
예수님의 마음을 대표하는 단어는 “긍휼(compassion)”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나인성 과부를 향한 예수님의 긍휼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긍휼을 구하는 시각 장애인 두 사람이 은혜와 치유를 경험한 사건을 배웁니다.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헨리 나우웬의 책에서 예수님의 긍휼을 설명한 부분을 발췌해서 소개합니다:
‘스플랑크니조마이(splangchnizomai)라는 헬라어 동사는 이 표현이 얼마나 심오하고 강력한 것인지 보여 준다. ‘스플랑크나(splangchna)는 몸의 내장, 오늘날 우리가 하는 말로 ‘뱃속(gut)’을 가리킨다. 이곳은 가장 친밀하고도 강렬한 감정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강렬한 사랑과 강렬한 미움이 커 가는 중심 장소이다. 복음서가 예수님의 긍휼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분의 뱃속(내장)이 움직였다고 표현할 때는 무언가 아주 깊고 신비스러운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느끼신 긍휼은 피상적이거나 스쳐 지나가듯이 느끼는 슬픔 혹은 동정과 사뭇 다른 것이었다.
긍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라카밈(rachamim)’인데 이것은 야훼의 자궁을 일컫는 말이다. 예수님의 긍휼이 어찌나 깊고 중심적이며 강력한 감정인지, 하나님의 자궁이 움직인다는 식으로 밖에는 표현이 안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모든 온유와 친절이 숨어 있으며, 바로 여기서 하나님은 아버지이자 어머니가 되신다. 바로 여기서 모든 감정과 열정이 거룩한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된다. 예수님의 마음이 긍휼로 움직일 때, 모든 삶의 근원이 떨리고 모든 사랑의 근거가 활짝 열리며, 거대하고 마르지 않고 다함이 없는 하나님의 온유하심이 드러난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치유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는 긍휼을 눈으로 보게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신비이다. 예수님은 무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유리 방황하는 것을 보시고, 자신의 존재 중심으로부터 그들과 한가지로 느끼셨다(마9:36). 예수님은 눈먼 자들, 중풍 병자들, 귀머거리들이 사방에서 자신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는,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떠셨고, 마음으로 그들의 고통을 함께 겪으셨다(마14:14). 며칠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수천 명이 지치고 배고픈 것을 보시자, 예수님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고 말씀하셨다 (막8:2). 예수님을 부르며 따라갔던 소경 두 명에 대해서도(마9:27), 예수님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었던 나병 병자에 대해서도(막1:41) 그리고 외아들을 장사 지내던 나인 성 과부에 대해서도(눅7;13)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으며, 예수님은 친밀한 감성으로 그들의 슬픔의 깊이를 느끼셨다. -河-
예수님의 마음 (1): 긍휼
예수님의 생각에 이어서 오늘부터 예수님의 마음에 관한 공부를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마음 한 가운데 “긍휼(compassion, 불쌍히 여기심)”이 있습니다. 긍휼은 또한 하나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탄식하면서 기도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마음속에도 긍휼이 있습니다. 이처럼 긍휼은 삼위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헨리 나우웬의 <긍휼>이라는 책에서 옮겨온 글을 나누면서 예수님의 마음에 관한 공부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긍휼이라는 단어는 긍정적인 느낌을 준다. 우리는 스스로를 긍휼 어린 사람,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선하고 온화하며 이해심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싶어 한다. 대체로 긍휼을 인간의 고통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전제하는 것이다. 가난한 노인이나 굶주린 어린아이, 혹은 전신이 마비된 군인이나 겁에 질린 여자아이를 보고 긍휼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명백한 인간의 속성 중에서 긍휼을 제외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긍휼이 없다고 비난한다면 우리는 마음 깊이 상처를 받지 않겠는가? 사실 우리는 인간 답다는 것과 긍휼이 많다는 것을 즉각 동일시한다. 긍휼 없는 인간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하지만 인간 답다는 것과 긍휼이 많다는 것이 동일하다면, 왜 인류는 갈등과 전쟁, 미움과 억압으로 찢겨 있는가? 그리고 왜 우리들 가운데는 기아와 추위 때문에, 혹은 쉼터가 없어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단 말인가? 또 왜 우리는 인종적, 종교적 차이로 인해서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하는가? 왜 수백만의 사람들이 소외와 분열 혹은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단 말인가? 왜 우리는 서로 상처 주고 괴롭히고 죽인단 말인가? 세상은 왜 이리도 혼란스럽단 말인가?
이런 질문들을 생각할 때, 우리가 긍휼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긍휼을 뜻하는 영어 단어(compassion)는 라틴어 ‘파티’(pati 고통)와 ‘쿰’(cum 함께)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 두 단어를 합치면 ‘함께 고통받다’라는 의미가 된다. 긍휼은 우리에게 상처가 있는 곳으로 가라고 고통이 있는 장소로 들어가라고, 깨어진 아픔과 두려움, 혼돈과 고뇌를 함께 나누라고 촉구한다. 긍휼은 우리에게 비참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울부짖고, 외로운 사람들과 함께 슬퍼하며, 눈물 흘리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도전한다. 긍휼은 우리에게 연약한 사람들과 함께 연약해지고, 상처 입기 쉬운 자들과 함께 상처 입기 쉬운 자가 되며, 힘없는 자들과 함께 힘없는 자가 될 것을 요구한다. 이런 의미에서 긍휼을 생각하면, 긍휼에는 평범한 친절이나 부드러운 마음씨 이상의 것이 관련되어 있음을 분명히 알게 된다. -河-
2025년 10월 3주 말씀
예수님의 마음 (1): 긍휼/ 누가 7장 11-17절
예수님의 기도
요한복음 17장(대제사장의 기도)
그동안 요한복음의 일곱 가지 <에고 에이미>를 통해서 예수님의 생각을 살펴보았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생명”과 “사랑”이라는 두 주제를 늘 생각하시면서 3년 공생애를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밝히 드러내신 <에고 에이미 I am>가 생명으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께 나오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입증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서로 사랑할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요한복음 17장은 유월절 만찬을 마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온 세상의 죄를 없애고,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실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높은 담을 허무시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연결하십니다.
하나님과 세상의 중재자가 되시기에 요한복음 17장을 “대제사장의 기도”라고 부릅니다. 3년 공생애를 마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속에는 예수님의 생각이 구체적으로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의 소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기도를 시작하십니다.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가 영화롭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제자들 역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았습니다(17:1-8).
하나님을 찬양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서 세 가지 주제로 기도하십니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는 것은”이라는 표현이 세 번 등장합니다. 첫 번째로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이신 것처럼 하나가 되길 기도하십니다(9-14절). 예수님께서 세상이 아니라 “내게 주신 자들”이라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따로 언급하십니다. 그만큼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을 애틋하게 생각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제자들이 악에 빠지지 않도록 세상 속의 제자들을 지켜주시길 기도하십니다(15-17절).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지 않으시고 세상 속으로 파송하십니다. 대신 제자들이 세상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세상의 핍박도 견딜 수 있기를 기도하십니다. 주의 말씀인 진리로 보존하시길 기도하셨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해 듣고 믿게 될 미래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믿는 자들이 하나가 되고, 이들이 서로 사랑함으로 세상이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 분임을 믿도록 돕는 촉매가 되길 기도하십니다. 세상에 남겨진 제자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예수님의 소원이었습니다.-河-
2025년 10월 2주 말씀
예수님의 기도: 요한복음 17장
2025년 10월 1주 말씀
에고 에이미 (7): 요한복음 15장 1-8절
나는 참 포도나무라
에고 에이미(7)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일곱 가지 <에고 에이미(나는…I am)>를 한 가지씩 공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신 자기 소개문입니다. 그동안 배운 예수님의 <에고 에이미>는 다음과 같습니다:“나는 생명의 떡이라” “나는 세상의 빛이라” “나는 양의 문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예수님의 마지막 <에고 에이미>는 “나는 참 포도나무라”(요 15;1)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날 유월절 만찬에서 주신 말씀입니다(요13-16장). 예수님의 첫 번째 설교(13-14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떠나시고 제자들이 거할 집을 마련한 후에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15장부터 시작되는 두 번째 설교에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장차 받게 될 어려움도 예고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가시면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제자들을 진리로 인도하고 위로하며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포도원 또는 포도나무는 구약 시대부터 하나님 백성인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포도원을 바르게 관리하지 못하고 엉망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포도나무에 비유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최상급 포도를 기대했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렸습니다. 소용없게 된 포도나무가 불에 탈 것이라는 말씀도 있습니다(시편80편).
이처럼 구약의 포도원과 포도나무는 쓸모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포도원을 직접 농부 되시는 하나님께서 관리하십니다. 많은 포도나무가 아니라 참 포도나무 한 그루만 존재합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백성들이 포도나무가 되어서 열매를 맺을 필요가 없고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되면 저절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포도나무 가지들을 정리하십니다. 겨울철을 보내면서 쓸모없게 변한 가지는 잘라 버리십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 예수님을 팔아먹을 가룟 유다 등을 가리킬 것입니다. 포도가 잘 열리도록 성한 나무들도 정리해 주십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당할 어려움을 뜻할 것입니다. 나머지 가지들이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열매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열매를 ‘전도’ 또는 ‘선교’라고 하셨습니다. 개인 차원을 넘어서는 공동체 사역입니다. 예수님께 붙어 있고 예수님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 서로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이로써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되고, 예수님의 복음이 전파됩니다. -河-
2025년 9월 4일 말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요한복음 14장 1-6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에고 에이미 (6)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일곱 가지 <에고 에이미(나는…I am)>를 한 가지씩 공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신 자기 소개문입니다. 그동안 배운 예수님의 <에고 에이미>는 다음과 같습니다:“나는 생명의 떡이라” “나는 세상의 빛이라” “나는 양의 문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여섯 번째 <에고 에이미>가 등장하는 요한복음 14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직전, 유월절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가룟 유다는 자리를 떠났습니다.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은 어디든지 가겠다고 다짐하지만, 예수님은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이 뒤숭숭했습니다. 마음에 근심이 가득했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믿고 따랐는데 떠나신다니 자기들만 홀로 남게 생겼습니다. 제자들의 생각과 마음을 간파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4:1).
예수님은 떠나시지만, 아버지 집에 제자들이 거할 곳을 준비해 놓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가까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종말입니다. 마지막 때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제자들과 모든 성도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동안 여러 번 알려주셨지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알지 못합니다.
의심 많은 도마가 나서서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5절)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목적지를 알지 못하니, 어떤 길을 가시는지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여섯 번째 <에고 에이미>를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6절).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도마 역시 예수님께서 실제로 가실 길에 주목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셔야 할 십자가의 길도 아닙니다. 이들에게는 예루살렘에 올라오신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길을 가시고, 실제로 로마 권력을 물리치고 왕이 되실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십자가의 길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길이라는 말씀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진리와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14장 후반부에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오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시고 다시 오실 때까지 보혜사 성령께서 제자들과 성도들 안에 머무시고 도우실 것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갈 수 있습니다.-河-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