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경 바디매오 4

여리고 성 길가에서 구걸을 하던 소경 바디메오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칩니다. 주변사람들이 그를 윽박지르고 핀잔을 주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외쳐 부르짖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자신의 불쌍한 인생에 빛이 비추고, 예수님의 은혜로 새로운 삶이 펼쳐질 수 있음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디메오 앞에서 발길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멈추심과 부르심은 소경 바디메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순간순간 필요한 은혜입니다. 우리들 삶의 여정에서 발길을 멈춰주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면 저절로 감사의 고백이 나옵니다.“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간이 무엇이관데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 8:4)라는 시편기자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소경 바디메오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바디메오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겉옷을 두고 뛰어나갔습니다. 겉옷은 일교차가 심한 중동 지역에서 밤마다 이불역할을 합니다. 앞에 펼쳐놓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귀에 동전을 던져줍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꼭 필요한 필수품을 버려두고 예수님께 나간 것입니다. 또한 겉옷을 둔 것은 자신을 두르고 있던 것을 버린 것입니다. 소경 바디메오가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갔음을 가르쳐줍니다.

예수님께서 바디메오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바디메오는 소경입니다. 그가 예수님께 불려나왔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눈이 뜨는 것을 원했을 텐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질문하십니다. 바디메오는 “(다시)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얼른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이나 바디메오의 대답이나 당연한 것을 묻고 답한 셈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보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을까요? 본문이 속한 마가복음 10장 앞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그를 시험하기 위해서 이혼에 대한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여느 경우와 마찬가지로 지혜롭게 대답하십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나와서 예루살렘에 가셔서 왕이 되면 자신들을 좌우에 앉혀 달라고 부탁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는지 되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소경 바디메오를 부르신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소경에게 먼저 질문하십니다.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당시의 기득권자들인 유대지도자들이나 제자들은 예수님께 질문하고 부탁했지만, 불쌍한 소경을 앞에 두고는 예수님께서 그에게 질문하십니다. 시험하는 질문도 아니고 어려운 것을 요구하는 질문도 아닙니다. 소경의 입장에서 가장 답하기 쉬운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여리고 소경의 입에서 다시 보기를 원한다는 고백을 듣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상황을 구체화하시면서 소경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시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바디메오의 눈이 밝아 졌습니다. 다시 보게 되었으니 하고 싶은 일들이나 가고 싶은 곳도 많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을 만나서 자신이 더 이상 죄인이 아님을 밝히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디메오는 그 길로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소경 바디메오는 예수님을 부르짖는 행동부터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결심까지 우리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바디메오의 외침을 외면하지 않으신 예수님, 그에게 다정하게 말씀하시고 다시 보게 해 주신 예수님, 우리들도 예수님의 긍휼하심을 간절히 구하고 은혜의 손길을 체험하기 원합니다. -河-

소경 바디매오 3

연속해서 살펴보고 있는 여리고 소경 거지 바디메오는 자신이 스스로 표현했듯이 불쌍한 인생입니다. 길가에 주저앉아서 남의 손끝만 바라보는 절망적 삶을 살고 있습니다. 중간에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서 시력을 잃었기에 바디메오가 느끼는 좌절감은 말할 수 없을 만큼 컸을 것입니다.

그가 사는 길은 은혜를 힘입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스스로 일어날 수 없는 저주받은 인생이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그를 죄로부터 풀어주어야 합니다. 앞을 못 보게 된 것이 죄를 지은 결과라는 사람들의 판단과 따가운 눈초리로부터 자유케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죄의 권세를 주관하는 하나님의 용서가 꼭 필요합니다. 바디메오의 눈을 뜨게 해서 새로운 삶을 살수 있도록 이끌어 줄 수 있다면 금상첨화입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기적도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소경 바디메오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다가왔을 때 사생결단을 하고 외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절박한 외침입니다.

복음서 속에 나타난 예수님은 밝은 눈과 귀를 갖고 계심에 틀림없습니다. 웬만한 외침을 그냥 스쳐지나가지 않으십니다. 뒤로 슬며시 다가와서 옷깃을 만진 여인의 손놀림도 예수님은 감지해 내십니다. 38년 동안 병을 앓고 있는 베데스다 연못의 중풍병자도 외면치 않고 포착해 내십니다. 나인성에 들어갈 때 장례행렬과 마주칩니다. 외아들을 잃고 슬픔에 가득 차 있는 나인성 과부의 모습과 마음도 알아차리십니다. 키가 작은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의 얼굴을 한번만 보고 싶어서 사람들의 이목을 무릅쓰고 나무에 올라가서 앉아 있었는데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다가오셔서 그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을 찾고 부르는 사람들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셨고, 자신의 은혜와 능력을 구하는 사람들을 친히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애타게 부르짖던 여리고 소경의 외침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소경이 예수님을 부른다고 윽박질렀지만 예수님은 여리고 소경의 외침에 발걸음을 멈추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발걸음을 멈추는 순간 사람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을 것입니다. 이제 현장에는 예수님과 여리고 소경만 남겨져 있는 듯 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입을 여십니다.:“그를 부르라”

소경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목소리가 남달랐을 것입니다. 불쌍한 인생 소경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신 목소리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 조용히 하라고 소경을 야단치던 사람들이 이제는 소경을 향해서 부드럽게 말합니다.:“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이처럼 군중들의 심리는 조변석개처럼 변덕스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의 말을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여리고 소경처럼 예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드리고, 오직 예수님께만 집중하는 영적 집중력이 매 순간 요청됩니다.

다음 한 주간 우리의 인생길에 머물러 서서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을 만나길 원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서로 소통을 하지만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멈추시는 발걸음과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河-

소경 바디매오 2

여리고 소경 거지, 디메오의 아들 바디메오 –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마가복음 본문 속의 주인공입니다. 자신의 이름도 잃어버린 채 아무런 존재감도 없이 길가에서 구걸을 하며 살아가는 저주받은 인생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기에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할 수 없습니다. 일어서서 마음대로 걸어갈 수 없는 주저앉아 있는 인생입니다. 길가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타인 의존적 인생이기에 더욱 불쌍합니다.

바디메오가 앉아 있는 곳에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모여든 군중들이 다가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각자가 커다란 기대를 갖고 예수님과 더불어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는 군중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따르는 성공지향적인 발걸음들입니다.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가족과 생업을 버리고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남달랐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들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군대처럼 많은 귀신들도 예수님 앞에서 벌벌 떨었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고 계십니다. 오죽했으면 요한과 야고보 형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했을까요.

소경 바디메오는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오시는 길목에서 두 명의 소경을 고쳐주셨다는 소문을 들었을 것

입니다. 여리고 세무서장 삭개오도 예수님께서 찾아 주셨고 그에게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복을 선포하셨다는 소식도 들었을 것입니다. 앞은 볼 수 없지만 귀는 밝습니다. 게다가 귀동냥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길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소경 바디메오가 “나사렛 예수”가 오신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이 다가오고 계신 것입니다. 눈을 뜰 수 있는 행운이 자신에게도 찾아 온 것입니다.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그 만큼 절박했을 것입니다.

바디메오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은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의 자손 가운데 메시야가 태어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나사렛 출신 예수가 곧 메시야라는 말이 “다윗의 자손 예수”라는 고백입니다. 바디메오가 일자무식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막무가내로 달려 나가는 몰상식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바디메오는 괜찮은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가 중간에 시력을 잃은 것 같습니다. 디메오의 아들로 불린 것을 보면 아버지 디메오가 지명도가 있는 인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꾸짖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예수님을 정확히 메시야라고 부르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현재 모습만 보고 저주하고 꾸짖습니다. 거지, 소경 주제에 감히 어디를 나서냐는 것입니다. 바디메오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재차 부르짖습니다.:”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불쌍히 여겨달라는 외침은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인 인간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를 사모하는 외침이기 때문입니다.

바디메오는 주위의 면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그의 마음은 오직 예수님을 향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했습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한 주간 주님을 향해서 부르짖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키리에 엘레이손)”-河-

소경 바디매오 1

앞으로 4주 동안 함께 나눌 말씀은 소경 바디메오가 예수님을 만난 사건입니다. 여섯 구절 밖에 되지 않는 짧은 말씀이지만 바디메오가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되는 과정을 차근차근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본문의 시점은 갈릴리 사역을 마치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때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십니다. 무거운 발걸음이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의연하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여리고라는 도시가 있었습니다. 여리고는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여서 사막을 지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상인들이 꼭 지나가는 곳입니다. 종려나무로 유명했던 여리고에 커다란 세관이 있었는데 그곳의 세리장이었던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것도 성경에 나옵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15마일 정도 떨어져 있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예수님을 쫓는 허다한 무리들이 여리고성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퍼졌기에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예수님께서 어떤 기적을 베푸실 지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따랐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늘 말씀하시던 대로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실 줄 알고 예수님을 추종하던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이나 무리들은 개선장군처럼 여리고를 떠나서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이 십자가의 길임을 아셨던 예수님의 마음은 무거우셨을 겁니다. 그때 여리고 어귀에 한 소경이 앉아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디메오라는 사람의 아들입니다. 자신의 이름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유명했든지 아니면 당시의 풍습대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불렸을 것입니다. 바디메오의 직업은 거지입니다. 길 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는 뜻입니다. 당시에는 소경으로 태어난 것을 두고 자신이 죄를 지었든지 아니면 부모가 죄를 지어서 그랬다고 믿었습니다. 바디메오의 경우 날 때부터 소경이었는지 아니면 중간에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하여튼 저주받은 인생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 가에 앉아 있지만 외로운 인생입니다. 남의 손을 바라보면서 구걸하면서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바디메오는 타인 의존적인 삶을 살면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여리고 도시의 한 켠 길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는 바디메오의 모습 속에는 우리의 모습이 거울처럼 들어있습니다. 물론 우리들은 바디메오에 비할 데 없이 훌륭합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들 역시 사람들이 오가는 길가에 앉아 있는 소경 바디메오처럼 세상에 털썩 주저앉아서 사람들의 처분을 기다릴 때가 종종 있습니다. 사람들의 도움은 궁극적인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바쁘고 흥청거리는 세상 속에 살지만 혼자서 외로움을 곱씹기도 합니다. 두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만 정작 하늘의 진리를 분별하는 영적인 눈이 감겨 있을 때도 있습니다.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한 채 필요 없는 것들을 바라보면서 헛된 꿈을 꿉니다. 어쩌면 소경 바디메오보다 더 불쌍해 보입니다. 그러다보니 늘 갈증을 느낍니다. 영적 목마름입니다. 예수님께 나가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때 궁극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입니다. 우리들에게도 예수님의 도움의 손길이 꼭 필요합니다.-河-

참된 예배자 – 온전한 삶으로

올해 주제인 <참된 예배자가 됩시다>에 대한 연속 설교 마지막 시간입니다. 처음 시간에 이사야 말씀을 갖고 소개했듯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예배하는 존재로 지으셨고 주님의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사43:7). 이사야 43장 21절에서도 “이 백성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찬송은 말 그대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는 대표적인 행위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신앙 한 가운데 예배가 있음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이기에 예배하는 우리들의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배웠듯이“영과 진실로”예배해야 합니다. 시편 50편에서는 예배자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들을 자세히 소개하였습니다.:감사하는 마음, 서원을 갚는 신실함과 순종, 어려울 때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는 믿음. 신명기 6장 말씀을 살펴보면서 예배자의 마음 한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사랑고백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배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되시고 구원자 되신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서, 목숨을 다해서, 힘을 다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는 시편 51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것은 상한심령이라는 말씀을 나눴습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부서진 마음까지 기뻐 받으십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의 상한 심령이 새롭게 재창조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이처럼 예배는 우리들 신앙 한 가운데 위치해 있습니다.

참된 예배자로서의 마음가짐이 준비되었다면 그것이 삶으로 이어져야합니다. 오늘처럼 주일에 교회에 와서 성도들과 더불어 예배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찬양과 기도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예배후의 교제를 통해서 서로를 격려하고 성령 안에서 하나됨을 확인합니다. 여기까지는 대부분의 교회나 성도님들이 잘 하시는데 그 다음 단계를 깜빡할 때가 많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세상으로 나가서 살아가는 엿새 동안의 삶도 예배가 되어야한다는 사실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이 말하듯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삶의 예배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로마서 12장 1절에 있듯이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몸은 우리의 존재 또는 삶 전체를 아우르는 말입니다. 우리들의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예배로 드려져야 하고, 우리의 모든 삶이 예배가 되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몸으로 드려지는 예배, 즉 우리의 몸이 가는 곳이 예배처소가 되고 우리가 하는 일이 곧 예배가 되는 것이 삶을 통한 예배입니다. 세상 속에서 이런 삶을 사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세상은 교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심한 경우 하나님을 대적하는 곳에서 우리가 일을 하고 부대끼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도 우리의 예배를 기다리십니다. 좋을 때는 감사의 예배를, 힘들 때는 부르짖는 외침의 예배를, 마음이 상했을 때는 부서진 마음을 드리면서 삶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와 허락하신 생업과 가정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삶 속에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일터가 하나님 나라로 변할 것입니다. 삶이 주님 앞에 드려지면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깊이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河-

참된 예배자 – 상한 심령으로

창세기 4장에는 가슴 아픈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가 두 아들을 낳습니다. 가인과 아벨입니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었고 아벨은 양을 치는 목동이었습니다. 하루는 둘이 똑같이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열납하지 않으셨습니다. 형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고 동생의 제사만 받으신 것이 불편했습니다. 일종의 시기와 질투로 그의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의 상한 마음이 분함으로 발전했고 안색이 변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마음을 가라앉힐 것을 부탁하십니다. 제사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마음입니다. 분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그것이 죄로 연결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결국 동생 아벨을 돌로 쳐서 죽입니다. 그이후로 가인은 유리방황하는 사람이 됩니다.

제사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훨씬 중요함을 가인을 통해서 또 한 번 깨닫습니다. 창세기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왜 받지 않으셨는지 자세히 나오지 않습니다. 제사 자체보다 그 이후에 벌어진 사건, 특히 가인의 심리변화에 초점을 맞춥니다. 아벨에 대한 관심도 크지 않습니다. 형 가인의 분노에 희생된 인물일 뿐입니다. 그런데 아벨의 제사에 대해서 신약성경 히브리서에서 다시 언급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것은 믿음으로 드렸기 때문입니다(히11:4). 가인은 제물에 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제사와 마음이 따로 놀았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린 제사가 아니라 건성으로 제사를 드렸을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아벨은 믿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지하는 마음으로 제사를 드렸고 그의 제사는 열납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나올 때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참된 예배자는 진실된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와야 함을 꼭 기억합시다.

그렇다고 하나님께 나올 때마다 좋은 마음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상한 마음을 갖고 하나님께 나올 수도 있습니다. 제물의 내장과 기름기를 즐겨 받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상한 마음을 기다리십니다. 시편 51편 속의 다윗은 죄인입니다. 왕의 권력을 사용해서 부하의 아내와 간음죄를, 부하를 죽게 만든 살인 교사죄를 저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해서 세운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 인생 가운데 가장 심하게 무너진 순간입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지적에 자신이 죄인임을 솔직히 시인합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드린 회개와 결단의 기도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큰 죄를 지은 자신을 버리지 마시길 애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의 영을 거두어가시면 자신의 인생이 끝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정한 마음을 창조해 주시길 간절히 부탁합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서진 마음을 기뻐 받으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다윗처럼 죄로 인해서 부서집니다. 세상에서 받은 상처들로 부서지기도 합니다. 가인처럼 자신을 다스리지 못해서 분노와 혈기로 인생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 존재 자체가 질그릇과 같아서 부서지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오늘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들의 마음도 이런 저런 일들로 부서져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도 상한 마음(부서진 심령)을 갖고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상한 마음, 통회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기뻐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받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기 원합니다. -河-

참된 예배자 –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창세기 1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만물을 지으신 후에 맨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이 세상의 피조물 가운데 인간만이 유일하게 하나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만큼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귀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생육하고 번성하고, 세상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말 그대로 만물의 영장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이 우주만물의 창조를 파노라마처럼 웅대하게 기록했다면, 창세기 2장의 창조는 꽤 오밀조밀합니다. 우주만물의 창조 가운데 아담과 이브를 만드신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진흙을 빚어서 아담을 만드셨습니다. 1장에서 말씀으로 모든 세상을 만드신 것에 비하면 매우 친근하고 인간적인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진흙을 갖고 형상을 만드신 후에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고독해 보여서 그의 돕는 배필 이브도 만드셨습니다. 아담은 이브를 보자마자“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이들과 친밀하게 교제하셨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짓기 전까지 에덴동산은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말 그대로 하늘나라였습니다. 에덴동산의 평화를 아담과 이브가 깹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욕심에 금단의 열매 선악과를 따먹은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찾으셨습니다. 에덴에서 쫓아내실 때에도 가죽옷을 손수 만들어서 입혀주셨습니다. 하지만 죄의 삯은 냉혹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노동을 해야 하고 해산의 고통을 감수하게 되었습니다. 뱀은 물론 세상 만물도 저주를 받아서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만물이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끊어진 관계를 잇고 싶어 하셨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셨습니다. 노아를 통해서,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구원 계획을 펼치셨습니다. 모세와 같은 훌륭한 지도자들을 통해서, 다윗과 같은 왕이나 제사장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끊어진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해서 애를 쓰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십니다. 33년을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사시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죄로 인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끊어진 간격을 십자가로 이어주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은 창세기 1장에서 말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 회복되면서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지위를 다시금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관리하는 청지기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다시금 부여된 사명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예배하고 경배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충 예배해서도 안 됩니다. 신명기 6장 5절 말씀대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우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참된 예배의 한가운데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된 사랑고백이 있어야 함을 기억합시다.-河-

참된 예배자 – 감사함으로

참된 예배자가 됩시다”라는 올해 주제에 맞춰서 참된 예배가 어떤 예배인지에 대한 말씀을 연속해서 나누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신령(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라고 했습니다. 구경하듯이 예배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예배에 참여하고 하나님께 자신의 깊은 마음(영)과 몸을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라는 말씀을 나눴습니다. 또한 영으로 드리는 예배에서 성령을, 진정(진리)로 드리는 예배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신 예수님을 그리고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 즉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의 예배가 온전하고 참된 예배임을 배웠습니다.

예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샤하”에는 왕이나 신에게 몸을 숙여서 경배한다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하나님께 나올 때 예물을 갖고 오듯이 구약시대에는 제물을 갖고 와야만 하나님께 예배가 가능했습니다. 따라서 구약성경의 율법조항들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의 종류와 하나님께 나와서 경배하는 제사 방법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매우 복잡한 절차들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예배할 때 구별된 마음과 태도가 중요함을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이렇게 복잡한 제사를 드리다보니 제사의 본뜻은 사라지고 제사의 형식만 남게 되었습니다. 어떤 예물을 어떻게 드리느냐가 관심사입니다. 눈에 보이는 제물들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의 신앙을 가늠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예배가 왜곡되기 시작했습니다. 내용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50편 본문은 잘못된 제사에 대한 경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물에 연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온 세상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것입니다. 수소를 드리던지 숫염소를 드리던지 하나님께서는 제물의 종류에 따라서 일희일비하지 않으십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끊이지 않았지만, 하나님 마음이 편치 않으셨습니다. 제물은 끊이지 않는데 형식적인 제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참된 제사는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제사보다 순종이 낫고,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무엇보다 감사로 드리는 제사를 받으십니다. 하나님께 나오는 사람은 감사한 마음을 갖고있어야 합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올 때 참된 예배자가 되기 힘듭니다. 둘째는 서원을 갚는 예배입니다. 새해에 하나님 앞에서 많은 결심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침마다 성실하게 찾아오듯이 우리들도 하나님 앞에서 신실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했던 결심들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 서원을 갚을 수 있습니다. 셋째는 환난 가운데 부르짖는 예배입니다. 어려움이 생기면 먼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참된 예배자의 모습입니다. 부르짖는 것은 하나님만이 도움이 되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환난에서 건져주시고 우리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도록 변화시켜주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시편 51편 17절에서 있듯이 상한 심령(broken spirit)을 구하십니다. 하나님은 근사한 것, 완전한 것을 구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들은 모두 양 같아서 완벽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서진 마음,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기뻐 받으십니다.

참된 예배는 손에 들고 있는 제물이 아니라 마음에서 결정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부서진 마음까지 드리는 예배자가 되기 원합니다. -河-

참된 예배자 – 영과 진리로

새해 우리 교회의 표어는“참된 예배자가 됩시다”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덕목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예배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예배가 많이 왜곡되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목적인데 종종 예배하는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고 하나님은 뒷전에 몰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고 시대의 조류에 맞추다보니 예배의 본질을 상실한 것입니다.

새해를 설계하면서 우리 교회와 성도님들에게도 예배의 회복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배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과 발걸음이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배가 회복되면 인간적인 생각이나 세상의 풍습들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려는 명예욕이나 힘을 과시해 보려는 권력욕도 참된 예배자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참된 예배자들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섬기는 교회도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교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 되신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 성령의 임재와 역사는 자연스레 따라올 것입니다.

예배의 회복은 공동체뿐만 아니라 우리들 각자에게도 필요합니다. 지난 열두 달을 보내고 또 다시 새해를 맞지만 마음 한편에 늘 찜찜한 것들이 있습니다. 세상살이에 대한 염려와 근심, 앞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받은 상처들, 스스로에게 갖는 실망감 등등 우리들의 마음이 그리 편치 않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우리 안에 슬며시 들어온 죄의 속성들이자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참된 예배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줍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인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그것이 이웃과의 관계 회복으로 연결됩니다.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풍성한 은혜를 체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참된 예배자를 찾고 계시다고 말씀하십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in spirit and truth)로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신령은 “영”으로 예배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영으로 예배하는 자신의 백성을 찾으십니다. 그렇다고 신비로운 것들을 생각할 것은 없습니다. 영으로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죄를 고백하면서 정결한 마음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 말씀대로 예배하는 것이 곧 신령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진정 곧 진리는 거짓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거짓”“교만”“불의”입니다. 이 세 가지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위선”입니다. 위선은 겉과 속이 다르고 -척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것은 진실됨입니다. 진실은 하나님 앞에서 겉과 속이 똑같은 것입니다. 솔직함입니다. 거짓이 있으면 곧바로 고백하고 정직한 길을 가기로 결심하는 것이 진실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나오는 참된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올 한 해 참된 예배자로 하나님께 나갑시다. 2013년에 예배의 회복을 이루는 우리 교회와 성도님들이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河-

승리의 종

이사야서 53장을 살펴보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이사야서 53장은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여기서 고난 받는 종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어떤 개인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다른 이들은 어려움 가운데서 끝까지 하나님을 믿은 이스라엘의 신실한 백성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처절한 역사가 하나님의 구속사역에서 희생물로 쓰였다고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에서는 이사야서 53장을 700여년 후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받고 믿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의 모습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고난 받는 종은 풍채도 없고 아름다운 것도 없는 연약한 모습이었기에 사람들은 그를 무시했고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가 질고와 핍박을 당하는 것을 보고 자신이 죄를 지어서 형벌을 받는다고 조롱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우리의 질고를 대신 지셨고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우리의 허물로 인해서 찔리셨고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서 몸과 마음이 상하셨습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해서 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렸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고난 받는 종은 철저하게 자신을 내어주셨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이처럼 본문에 나타난 고난 받는 종은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신 예수님이심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면서도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들이 모두 양같아서 그릇행하고 하나님을 버렸는데 예수님께서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이 되셔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우리의 모습 그대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는 어떤 폭력이나 거짓된 일을 꾸미지 않으셨는데 죽으셔야했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를 홀로 담당하신 것입니다. 구약의 유월절 어린양처럼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함 받고 하나님과 화목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상하게 하셨고 고통을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속죄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지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온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악을 이기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십자가위에서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모두 이루셨습니다. 마지막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셨습니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송구영신의 계절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깊이 묵상하고 그 사랑과 은혜 속으로 깊이 들어가기 원합니다. 이사야서 53장을 반복해서 정독함으로 그 안에 깃든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이 눈으로 보일 듯이 그려지고 그가 이루신 사역이 우리의 마음에 깊이 아로새겨지기 원합니다. 거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이 새 힘과 소망을 줄 것입니다. 할렐루야!-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