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살아나서 하나님의 군대가 되는 것으로 시작했던 연속설교 마지막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사방에 흩어져있던 뼈들이 모여서 골격을 이루고, 거기에 살이 붙고 가죽이 입혀지는 놀라운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마지막으로 생기가 불어넣어지자 흩어졌던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습니다. 죽어있던 뼈들이 새로운 생명을 입게 된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은 “너희의 죄와 허물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는 선언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어있는 모습은 에스겔 골짜기의 뼈들을 연상케 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 2-3절에서 죄와 허물로 죽은 것을 두고 소속이 달라서 생긴 결과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불순종하는 그룹에 속해있었습니다. 그때는 세상의 유행을 따랐고, 육체의 욕심을 채우고,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습니다. 이것이 곧 죄와 허물로 죽었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한없이 크시고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에스겔 골짜기에 죽어있던 뼈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군대를 만드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들에게 그대로 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그 큰 사랑이 우리를 살렸고 결국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의 통치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은혜가운데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을 살리셨듯이 은혜로 우리를 살리시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도하신 일입니다. 에베소 2장 9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했습니다.:”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선물인 구원을 누리는 매스터 키가 곧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우리를 은혜로 인도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일어나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 이뤄지는 프로세스입니다. 우리들이 할 일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 누릴 뿐입니다. 그래서 누구도 구원을 두고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은혜로 구원받은 이후의 삶에 대해서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 하나님께서 손수 창조하신 존재라는 뜻입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군대가 된 것도 하나님께서 손수 하신 일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들을 새롭게 지으신(창조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인해서 세상 풍조와 육체의 욕심을 쫓던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선한 일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특권이요 사명입니다.

우리 참빛 교회 식구들도 자신의 성품은 물론 가정과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것이 마른 뼈가 살아난 하나님의 군대, 죄와 허물로 죽었다가 은혜로 살아난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쁨으로 걸어가야 할 인생길입니다. 날마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길을 걸어가시는 근사한 주님의 백성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河-

하나님의 선물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에베소서 2:8)

지난주에는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죄와 허물로”죽어있었다는 말씀을 나눴습니다. 여기서 죄는 피조물인 인간이 자신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고 거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에 자기가 왕입니다. 신앙의 세계인 영적인 부분을 알지 못하기에 육체가 원하는 대로 따라갑니다. 충동적인 삶이되기 쉽다고 했습니다. 육체의 욕심대로 살아가고, 혼자 있으면 불안하기에 세상 풍습을 쫓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돌아와야 할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행동들이 곧 허물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들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르신 것입니다. 이것이 대속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세력을 이기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인정하고 그 예수님을 마음에 믿으면 하나님께서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십니다. 또 함께 일으키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와 부활에 깃든 구속의 은혜입니다. 우리 혼자는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예수님과 함께 살아났습니다.

이러한 구원의 사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가운데 진행됩니다.“은혜”는 아무런 조건도 없이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호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는 곧 선물로 우리에게 임합니다. 선물은 주는 사람이 주관합니다. 선물은 값을 지불하지 않고 거저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이 곧 은혜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에게 임한 것이 선물입니다.

이 은혜를 우리 자신의 것(선물)으로 만드는데 꼭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히브리서 11장 6절에 있듯이 1)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는 것, 2) 하나님을 믿는 것이 헛된 것이 아니라 반드시 보상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3)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들에게도 새로운 생명이 임했음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의지적인 결단입니다. 믿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기쁜 소식인 복음을 듣는 그 순간 믿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은 지속적인 자라감입니다. 한번 믿고 마는 것은 위험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또는 상황에 따라서 믿음이 흔들리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했으면 그 믿음을 끝까지 지키고 가꾸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 안에 은혜로 임한 구원의 선물이 활동하고, 구원의 은혜가 넘치게 임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얻은 구원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께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행위를 따라서 나눠주신 것이 아니기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또한 구원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그저 선물로 받은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이 세상사는 동안 서로 격려하면서 믿음의 공동체/구원 공동체를 은혜 가운데 세워 갈 뿐입니다.-河-

너희를 살리셨도다

지난주에는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군대로 살아나는 말씀을 나눴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본 환상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생기(영)가 임하면서 다시금 생명을 회복하는 예언이었습니다. 어디 이스라엘 백성들만 그랬을까요? 우리들도 마른 뼈들처럼 여기저기 흩어져있고, 절망과 낙심 가운데 살아가는 인생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에서 뼈들이 모이고 힘줄과 살과 가죽이 붙고 마지막에 생기가 불어넣어졌듯이 우리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생명의 능력을 부어주셔서 지금 이 자리에 올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요약하는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사랑”입니다.“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8)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크고 넓은 주님의 사랑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은 이웃과 세상에 나눌 때 사랑이 완성될 것입니다. 신앙을 요약하는 또 다른 표현은 “소망”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소망을 마음에 품고 살아갑니다. 현재의 모습이 어떠할지라도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마지막 예수님을 만날 소망을 가슴에 품고 떳떳하게 주님을 맞기 위한 삶의 여정을 걸어갑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누리고 있는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그 날을 사모합니다. 현재의 어두움이 물러가고 주님께서 주시는 빛의 날이 올 것을 확신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의 신앙을 요약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는 “생명”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자체가 생명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죽음에서 생명, 그것도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 안에 사망권세를 이길 생명의 능력이 임했습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을 살아나게 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그대로 임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에베소서 2장 말씀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임한 것을 증거합니다. 1절부터 대단한 말씀이 선포됩니다.:“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허물과 죄는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에 우리를 다스리던 세력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데 급급했습니다.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요 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잘 살지 모르지만 결국 그 끝은 죽음이라고 성경이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을 찾아오신 것과 같습니다. 4절에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듬뿍 나타나있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그 큰 사랑”이라고 하나님의 사랑을 최고로 표현합니다.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에서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깃든 생명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은혜 가운데 거저로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선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생명을 품고 삽니다. 죽을 육체로 살지만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생명의 능력으로 한 주간 힘차게 사시길 바랍니다.-河-

마른 뼈가 살아나다

지난 4주 동안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신 예수님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저주의 땅이라고 불리던 사마리아에 가셨습니다. 수가라는 동네의 우물가에서 사람의 눈총을 피해서 물을 길러 온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수의 복음을 전하십니다.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확인한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메시야가가 우물가에 있다고 전파합니다. 여인의 말을 듣고 예수님께 나온 동네사람들은 이틀 동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들 스스로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라고 고백합니다. 버려진 땅에서 울려 퍼진 복음의 메아리였습니다. 버려진 인생을 살았던 여인에게 생수의 복음이 임한 결과였습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들은 사마리아 여인처럼 힘겹게 살아갑니다. 한번 마시면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생수의 복음이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 여인처럼 예수님을 메시야로 마음에 모실 때 우리 삶에 드리운 깊은 그림자가 사라질 것입니다. 새롭게 변화되고 세상을 향해서 담대히 나가는 활기찬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에스겔서의 말씀 역시 매우 독특합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데리고 골짜기로 가십니다. 그곳에 가보니 마른 뼈들이 가득했습니다. 마른 뼈는 하나님을 떠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에스겔은 마른 뼈들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하나님의 영에 이끌려서 골짜기 사방을 다니는데 가는 곳마다 마른 뼈들뿐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을 하십니다.:“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마른 뼈가 살아나는 것이 인간의 상식이나 생각으로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에스겔 선지자는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지혜롭게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마른 뼈들이 서로 모이게 하고, 살이 붙고 혈관이 생기고 마지막으로 생기가 돌아서 살아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에스겔은 하나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합니다. 신기하게도 마른 뼈들이 사방에서 모여들더니 사람의 골격이 되고, 그곳에 살이 붙고 가죽이 덮입니다. 마지막으로 생기가 들어가니 살아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 많은 뼈들이 모두 살아났으니 수많은 사람들이 생긴 셈입니다. 이것을 에스겔에서는 군대라고 표현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마른 뼈들은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절망가운데 있었습니다. 자신들에게서 생명이 떠났고 결국 멸절될 것이라고 자포자기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마른 뼈의 환상을 보여주시면서 마른 뼈와 같은 이스라엘이 살아나게 될 것이라는 소망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토록 많은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살아났을 때 하나님의 군대가 될 것이랍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의 삶이 곤고했듯이 우리들의 삶에도 곤고함이 있습니다. 마른 뼈들처럼 아무런 쓸모가 없고 다시 살아날 것 같지 않은 절망감에 휩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임할 때 마른 뼈도 살아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낙심되고 절망스러운 부분들에 하나님의 생기가 임하길 바랍니다. 힘겹고 곤고한 인생길 한 가운데 마른 뼈들을 살려서 하나님의 군대를 만드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마음껏 체험하기 원합니다. -河-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4

세상의 구주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에 대한 말씀 마지막 시간입니다. 한낮에 물을 길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시작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지나서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주제까지 발전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인생이 힘겹고 처량했기에 메시야를 기다리면서 하루하루 살았을 것입니다.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때가 온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여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여자가 가로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25절). 여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예수님께서 “내가 그로라”고 자신이 메시야임을 여인에게 밝히십니다.

여인은 자신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거셨고 자신의 가장 아픈 곳을 언급하시면서 그곳도 만져주셨습니다.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참된 예배라는 것도 가르쳐주셨습니다. 여인은 무척 기뻤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그의 인생에 빛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를 괴롭히던 인생의 어려운 순간들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둔 채 동네로 뛰어갑니다. 메시야를 만났다고 자랑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메시아임에 틀림없으니 예수님을 만나러 가자는 초청입니다.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이웃들에게 전한 것입니다. 훌륭한 전도법입니다. 여인의 말을 듣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서 행한 일을 간증합니다. 자신의 수치스러운 과거를 예수님은 물론 사람들에게도 담대히 밝힐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서 열등감이나 죄책감에서 벗어났습니다.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자신을 괴롭히고 얽어매는 줄이 끊어졌습니다. 여인의 기뻐하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누구보다 동네사람들은 여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완전히 새사람이 된 것을 보고 그들도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이틀을 머물다 가실 것을 부탁합니다. 동네사람들이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라고 고백합니다. 처음에는 여인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지만, 이틀 동안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자신들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다 함께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로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믿은 동네사람들이 함께 부르는 찬양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자유함을 경험합니다. 그를 속박하는 인생의 문제와 어려움으로부터의 자유함입니다. 죄로부터 자유함입니다. 사람들의 이목으로부터 자유함입니다. 자기가 이고 온 물동이를 예수님 앞에 버려두고 동네로 갔던 여인처럼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인생의 짐을 예수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고 치유와 회복의 손길을 경험하면 자기도 모르게 세상에서 예수님을 증거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의 전도는 힘이 있습니다. 확신 가운데 복음을 소개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들 인생의 우물가에 찾아오셔서 말을 거십니다. 우리에게 생수의 복음을 전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하길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은 새로운 인생을 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마음에 품고 그것을 전하는 전도자의 사명을 기쁨으로 감당합니다. -河-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3

신령과 진정으로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은 점점 더 진지한 대화로 발전됩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유대 청년이신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마실 물을 달라는 것으로 대화가 시작되었지만 예수님의 깊은 뜻은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생수의 복음을 소개하고 싶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낮에 물을 길러 나왔던 여인의 깊은 곳을 건드리십니다. “네 남편을 데려오라” – 이것은 사마리아 여인의 모든 삶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요, 꼭꼭 숨겨놓고 싶은 사연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문제를 해결해 주고 싶으셔서 생수의 복음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향해서 선지자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는 예배로 넘어갑니다. 처음에 예수님께서 마실 물을 달라고 했고, 여인은 한 번 마시면 다시 목마르지 않는 기적의 물을 달라고 했는데 지금은 예수님이나 사마리아 여인이나 물에 관심이 없습니다. 대신에 여인이 제기한 예배의 문제를 놓고 예수님께서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 조목조목 가르쳐주십니다.

당시의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림신 산에서 따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여인이 살고 있던 수가성은 구약의 전통적인 성지인 세겜 근처에 있었는데 그곳에 그림신산이 있었고 주전 400년경부터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 산에서 예배했습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면서 예배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다윗과 솔로몬 시대 이후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한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반면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기 전부터 조상들이 세겜에서 예배했다면서 자신들이 정통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두고 예수님께서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면 가장 먼저 바뀌는 것이 예배에 대한 자세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당연히 교회에 나오고 예배에 참석합니다. 예수님을 깊이 만난 사람이라면 예배가 감격스럽고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합니다.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뿐만 아니라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예배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선지자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에 자신이 갖고 있던 예배에 대한 궁금증을 예수님 앞에 풀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림신 산이나 예루살렘과 같은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배드리는 장소가 어디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어디서 예배하든지 하나님께 예배하면 됩니다. 아무리 자신들이 정통이라고 말해도 예배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올바른 예배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배자의 마음가짐도 강조하십니다.“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령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의 임재와 역사 가운데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영(spirit)이시기에 신령으로 예배해야합니다. 진정은 거짓 없는 진실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정직한 마음을 기뻐 받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여인이 메시야가 오시면 이 모든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을 보탭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바로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여인에게 드러내십니다. 여인은 물동이를 내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메시야를 만났다고 자랑하고 전도합니다. 자신을 구원해 줄 메시야를 만난 여인은 이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모든 상처와 아픔은 회복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과 삶을 만져주신 예수님께서 오늘 예배 가운데 우리 모두에게 같은 은혜를 내려주실 믿습니다. -河-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2

네 말이 참되도다

유대인이라면 상종하지도 않았던 사마리아땅을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당시에는 천대받던 여인에 먼저 말문을 여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내려오시던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성에 들렸을 때 생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사마리아를 지나가셨을 것입니다. 천년 가까이 이어져온 편견을 깨기 위함이었고, 무엇보다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사마리아에도 펼치기 위함이었습니다.

한 낮에 물을 길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먼저 말을 거셨습니다. 물을 달라는 화두로 사마리아 여인과 말문을 트신 것입니다. 먹는 물로 시작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로 발전합니다. 처음에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던 여인도 한번 먹으면 다시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신다는 말씀에 바싹 다가서면서 관심을 보입니다. 인적이 드문 한 낮에 물을 길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이 부담스러워서 한 낮에 왔을 것입니다. 살아가는 것이 버거우니 물을 길러 오는 것도 신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 모금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구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여인의 마음을 읽으셨음에 틀림없습니다. 우물가에서 여인을 만나는 순간 그녀의 심정을 알아차리셨기에 물을 달라고 먼저 말을 거셨을 것입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달라는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어쩌면 생뚱맞은 그러나 하기 힘든 말을 하십니다: “네 남편을 불러오라.” 예수님께서 여인의 개인사를 건드신 것입니다. 물을 달라고 했을 때 퉁명스럽게 대답할 정도의 여인이라면 남편을 불러오라는 말에 화를 낼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여인이 솔직합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마음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는데 지금 살고 있는 남자도 그녀의 남편은 아닙니다. 유대인의 율법에 의하면 세 번까지 결혼할 수 있는데 이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습니다. 이 한 가지 사실만 보아도 여인이 살아온 인생이 어떠했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인생이 자기 마음대로 풀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사람들의 이목이 부담스러워서 인적이 드문 한 낮에 물을 길러 우물가에 온 것입니다. 마음에 깊은 상처와 아픔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을 걸었을 때 퉁명스럽게 대답한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여인의 아픔을 이미 아시고 차근차근 그녀에게 생수와 같은 영생의 복음을 소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마음이 열린 사마리아 여인도 자신의 상황을 솔직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를 향해서“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선지자임에 틀림없다고 고백합니다. 우물가에 마실 물을 길러 온 여인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의 복음이 그녀에게 임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가장 깊은 곳을 만져주셨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들었던 마음의 아픔과 상처를 예수님께서 건드리셔서 그녀로 하여금 예수님을 선지자라고백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신앙은 마음 깊은 곳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때 임하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치유와 회복의 손길입니다 -河-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 1

물을 좀 달라

누구든지 조금씩은“편견(偏見)”을 갖고 사람들이나 세상을 바라보게 마련입니다. 말 그대로 한쪽으로 치우쳐서 판단하고 그것만이 옳다고 여기는 태도입니다. 편견이 지나치면 사고나 관계에서 균형을 잃게 됩니다. 만사를 자기중심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자칫 외톨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모든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빌4:5).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마22:39). 이처럼 신앙생활은 자기중심에서 하나님중심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거기서 이웃사랑까지 나가면 금상첨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년간의 공생애기간 동안 편견 없이 모든 사람들을 만나셨고 그들에게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사건이 앞으로 한 달 동안 살펴볼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 당시 사마리아는 자신들만의 신앙을 고집했고 그림신산에서 따로 예배하면서 예루살렘 사람들과 적대관계에 있었습니다. 물론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인들도 사마리아 사람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외국 사람들과 섞여 살면서 신앙의 순수성을 잃어버렸다는 이유로 천한 백성 취급을 했습니다. 경건하다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땅을 밟는 것조차 부정하다고 생각해서 먼 길을 돌아서 다닐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내려가는 길에 사마리아를 들리십니다. 수가라는 동네의 우물가에서 쉬고 계실 때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러 왔습니다. 우리 시간으로 정오에 혼자서 물을 길러 온 것을 보면 이 여인에게 특별한 사연이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말을 건네십니다.:“물을 좀 달라.” 외간남자가 여인네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것도 당시 관습에 맞지 않습니다. 게다가 유대출신인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접근하신 것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물가라는 환경에 맞게 물이라는 주제로 여인과 대화를 시작하십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말씀에 툴툴거리면서 답변을 하다가 한 번에 갈증을 해소하는 기적의 물을 말씀하시자 여인이 바싹 다가섭니다. 예수님께서 한번 먹으면 다시 목마르지 않는 특별한 물(magic water)을 주실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먹는 물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물가에서 여인을 만나셨고, 그 여인에게 특별한 사정이 있음을 감지하신 예수님께서 물이라는 소재를 갖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생수(living water)를 제시하십니다. 먹는 물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은 마시는 물이 아니라 생명으로 인도하는 영생의 물이었습니다. 생수의 샘이 복음 속에 들어있고, 복음을 체험한 사람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게 됩니다. 이처럼 우물가에서 시작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먹는 물로 시작해서 기적의 물을 지나서 생수로 발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땅을 밟으시고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시면서 편견을 깨뜨리셨습니다. 사람들이 꺼려하는 곳에 가셨고 당시로서는 천한 신분인 여인에게 생수의 복음을 소개하셨습니다. 우물가에 걸맞은 물을 주제로 여인의 관심을 끌어내셨습니다.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편견 없이 모든 사람에게 임합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우리들 각자의 상황에 맞게 다가옵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가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도 찾아오십니다. 생수의 복음을 주시기 위함입니다.-河-

일상의 기도

2012년 기도에 대한 연속설교 마지막 시간입니다. 올해는 특별히 구약의 인물 네 사람을 통해서 우리의 기도생활을 점검하고 다시금 기도의 자리로 나오길 결심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시간입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댕기는 줄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올려지고, 하나님을 마음에 모십니다. 기도하는 시간만큼은 세상의 시름을 잊을 수 있습니다. 기도 시간은 우리들 삶의 오아시스입니다. 기도는 온 세상을 마음에 품을 수 있을 만큼 지경이 넓습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구약의 인물은 창세기의 에녹입니다. 그동안 살펴본 히스기야나 한나 그리고 지난주의 다니엘과 달리 에녹은 기도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에녹에 대한 창세기의 말씀은 단지 4절밖에 되지 않고 그것도 아담의 족보 속에 등장할 뿐입니다. 그런데 에녹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갔습니다.:“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11:5).

그렇다면 에녹이 어떻게 해서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께 갈 수 있었을까요? 창세기 5장 24절에 의하면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여기서 동행의 의미는 하나님과 더불어 인생길을 걸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것이라고 풀어서 설명합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모든 인생길을 하나님과 더불어 행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로마서 12장 1절 말씀대로 삶 자체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드려졌다는 것입니다.

에녹은 아담의 7대손으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 하나님께서 최초로 만드신 아담이 살아있었습니다. 노아의 홍수 이전에는 인간의 수명이 꽤 길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의 족보를 살펴보면 에녹은 아담과 더불어 308년을 함께 살았으니 아담으로부터 하나님이 누구신지, 에덴동산은 어떤 곳이었는지,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경위까지 많은 얘기를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에녹은 비록 타락한 세상에 살지만 에덴동산처럼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했고 하나님께서 그를 기쁘게 여기셔서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 데려가신 것 같습니다.

에녹이 어떻게 하나님과 평생을 동행했을까요? 그는 하나님과 친밀하게 대화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단둘이 만나는 기도의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매사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데 온 마음을 쏟았을 것입니다. 그의 삶 자체가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심을 매순간 경험했을 것입니다.

지난주일 다니엘에게서 배운 대로 우리는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시간에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약속을 지키는 신실함입니다. 또한 히스기야나 한나처럼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 어려운 상황을 솔직히 아뢰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의 삶 자체도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리면서 일상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연초에 나눠드린 <하나님의 임재연습>에 나오는 로렌스 형제처럼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기도가 되기 원합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깊이 누리시길 바랍니다. 참빛 교회 성도님들께서 일상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체험하시길 바랍니다.-河

다니엘의 기도

2012년 기도에 대한 연속설교에서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기도의 인물들을 통해서 올바른 기도에 대해서 배우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인물은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에 의해서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단순한 포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총명한 소년들을 장차 왕을 보좌할 관리로 키우기 위해서 특별히 데려온 것입니다. 다니엘과 함께 왕궁에 잡혀온 소년들 가운데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하나님을 잘 믿었습니다. 다니엘서의 처음 여섯 장에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이방 땅 바벨론에서 어떻게 그들의 신앙을 지켰고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였는지 알려줍니다. 흥미진진합니다.

이들에게는 매 순간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포로로 잡혀왔기에 하나님을 마음대로 섬길 수도 없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도 시험거리가 되었습니다. 왕궁에서 특별 교육을 받으면서 진수성찬을 먹을 수 있었지만 식탁의 고기들은 대부분 바벨론 신에게 제사지낸 음식들입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해서 이방의 음식으로 자신의 몸을 더럽히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채식만 먹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얼굴을 다른 소년들보다 더 빛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네 소년가운데 다니엘은 더욱 뛰어났습니다. 그는 꿈을 해석하는 능력까지 갖고 있었는데 당시는 꿈을 정확히 해석하는 것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왕의 꿈을 해석합니다. 그리고 바벨론의 고위관리가 됩니다. 다른 소년들도 이방 땅에서 출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신앙이 출세에 걸림돌이 됩니다. 사람들이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하나님 믿는 것을 두고 모함했기 때문입니다. 쇠를 녹이는 풀무 불에도 들어갔지만 하나님께서 살려 주셨습니다. 다니엘과 세친구들은 목숨걸고 끝까지 신앙을 지켰습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했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니엘이 120명의 고위 관리들 가운데 세 명뿐인 총리로 임명되었을 때 그를 모함하던 사람들로 인해서 사자 굴에 던져지는 말씀입니다. 다니엘은 군계일학이어서 그의 총명함과 유능함을 견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유다라는 조그만 나라에서 포로로 잡혀온 사람이 출세를 하니 시기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왕궁의 대신들이 다니엘을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해서 음모를 꾸밉니다. 30일 동안 바벨론 왕이 아닌 다른 누구에게라도 절을 하면 사자 굴에 던져서 죽게 하자는 법을 신설합니다. 이것은 다니엘을 겨냥한 음모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왕이 이 조서에 도장을 찍어서 만방에 공포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니엘에게 또 다시 위기가 닥친 것입니다. 집에 돌아온 다니엘은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창문이 열린 방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성전을 바라보면서 기도한 것입니다.“전에 하던 대로”- 다니엘은 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어려운 순간에만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늘 기도했습니다. 방은 다니엘의 기도처였고, 하루에 세 번씩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했습니다. 기도로 무장된 다니엘이었기에 사자 굴에 던져 진다해도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다가 순교하는 것이기에 감사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으면 건져주실 것이니 감사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구해주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과 함께 하심을 다니엘을 통해서 다시금 배웁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