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2

복음은 기쁜 소식이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또는 예수님을 통해서 임한 기쁜 소식을 뜻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이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아무런 이익도 없이 순전히 우리를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상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우리들에게 쉼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의 멍에를 가볍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기쁜 소식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두 번째야말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임한 최고의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함 받았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우리가 예수님을 마음에 받아들임으로 임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은혜이고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복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가 연약할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고 가르쳐줍니다. 우리들은 실제로 힘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연약하다 못해 무력합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연약한 인간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연약함을 담당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연약함은 죄 가운데 빠진 상태는 아닙니다. 단지 자신의 의지를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연약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제 죄인이 되었습니다. 죄 가운데 빠졌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죄를 지었으니 벌을 주어 마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위해서도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죄를 지어서 십자가에 달려 죽을 사람은 우리들인데 예수님께서 대신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증명해 보여주셨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때도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연약한 것은 인간의 실존입니다. 죄를 짓는 것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하나님과 화해시켜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은 우리들이 연약할 때, 죄인되었을 때, 심지어 원수되었을 때도 사랑으로 임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죽으심으로 우리들은 강해졌고, 의롭게 되었고, 또한 하나님과 화해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우리는 요즘 2012년 사순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경건생활을 훈련하는 기간이지만 그에 앞서 우리에게 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되새기고 체험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모든 참빛 교회 성도님들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마음껏 누리고 감사하면서 사순절을 보내시길 기도하겠습니다.-河-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1

세상살이가 만만치 않습니다. 인생길이 어렵고 힘겹습니다. 인생이 잘 풀려도 내심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이왕이면 돈 많이 벌고 권력까지 얻어서 큰소리치면서 살고 싶은 생각에 열심히 일합니다. 큰 야망이 없다면, 남에게 싫은 소리 듣지 않고 아쉬운 소리 하지 않을 만큼만 살기를 소원합니다. 그렇지만 뭔가 허전하고 아쉬운 것이 우리네 인생길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까만 속이 보입니다. 속에서 나오는 추한 것들을 성경이 정리해 놓았는데 어찌 그리도 잘 맞는지요! “악한생각, 음란, 도적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속임, 음탕, 흘기는 눈, 훼방, 교만, 광패”(막7:21-23)-13가지 우리 마음에 담긴 그릇된 모습을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잡초처럼 끊임없이 마음속에서 생겨납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시기, 악독, 수군수군, 비방, 하나님을 미워함, 능욕, 교만, 자랑, 악을 도모함, 부모거역, 우매, 배신, 무정, 무자비”(롬1:29-31)- 21가지 악한 모습을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계시는 듯해서 등골이 오싹합니다. 우리들은 이처럼 내적인 부조화, 부도덕한 심성 때문에 갈등을 겪고 자기 스스로 함정에 빠지곤 합니다. 물론 이러한 추한 모습들이 우리가 사는 사회로 그대로 전이되어서 세상도 우리 마음 이상으로 왜곡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것들을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생긴 죄의 결과라고 가르쳐줍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선한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단의 꼬임에 넘어가서 하나님처럼 되려다가 우리들 자신은 물론 우리가 사는 세상까지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기독교에서는 원죄(original sin)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많은 문제들이 야기됩니다. 우리들 안에서는 위에 나열한 죄의 모습들 외에도 불안함과 두려움을 일으킵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지만 죽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외롭습니다.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사람들을 찾아 나섭니다. 그런데 인간관계들이 실망으로 끝나기 일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시기와 질투, 경쟁과 갈등, 그리고 거짓과 악행이 난무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떠난 세상의 모습들입니다.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고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춥고 배고팠습니다. 희망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산으로 들로 모였습니다.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 귀신들린 사람들도 예수님께 나와서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세상에서 소외되고 사람취급 받지 못하던 여인들과 천민들도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회개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기쁜 소식으로 임하십니다. 우리 힘으로 풀 수 없는 죽음, 고통, 불안, 죄의 문제를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십니다:“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河-

축복하는 교회 (5) : 시편 118편 4

시편 118편 말씀을 함께 나누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시편 118편은 어려움을 겪었던 백성들과 지도자(왕 또는 제사장)가 성전에 나와서 지나온 어려움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겪은 어려움은 최악이었습니다.“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17절)라고 말할 정도로 죽음에 근접한 어려움이었습니다. 적군이 쳐들어와서 에워쌓습니다. 포위망이 점점 좁혀져서 꼼짝없이 죽게 되었을 때, 여호와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끊어내고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여호와의 오른손의 권능이 이들에게 임함으로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경험도 했습니다. 이 모든 일은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 나와서 부르짖는 기도를 통해서 가능했습니다.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한 것입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심을 확신했습니다.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함을 몸소 체험하고 그것을 감사의 찬양으로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시편 118편의 피날레입니다. 이보다 더 즐겁고 기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감사의 찬양을 아무리 많이 올려드려도 부족합니다. 여호와의 구원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니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놓으셨고 드디어 그 날이 임했습니다. 이처럼 선하신 뜻을 친히 이루시는 하나님 앞에서 이들은 한 마음으로 또 한 번 주님께 기도합니다.:“이제 구원하소서. 이제 형통케 하옵소서.” 앞길을 하나님께 맡기는 찬양이요 간구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임하면 그 길은 아무리 어려워도 형통한 길입니다. 여기서 형통함은 성공이라고 옮길 수 있습니다. 번성케 되고 인생길이 활짝 열리는 것을 뜻합니다. 광활한 곳에 세우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인생길을 활짝 열어주시길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26절은 이들이 성전에서 서로 축복하는 장면입니다.“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는 주님의 백성들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마태복음 21장 9절에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예수님을 향해서 백성들이 찬양했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와 같은 표현입니다. 26절의 후반부는 성전에 모여서 서로 축복하는 모습입니다. 비록 구약의 말씀이지만, 오늘 본문 속에서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셨을 때, 하나님의 구원이 성취되고 구원받은 백성들이 함께 모여서 축제의 시간을 갖는 것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찬양이 27절 이하에도 계속됩니다. 여호와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얼굴빛을 비춰주셨습니다. 어두움이 물러나고 밝은 세상이 되었습니다. 죽음의 세력과 얽어매고 있던 모든 것들이 끊어지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백성들은 희생제물을 제단 뿔에 묶어놓고 다 함께 행진하면서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8-29절).

시편 118편을 끝부분에서 백성들이 부르는 찬양은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 모두가 합창할 찬양일 것입니다. 한 주간 동안 세상에서 주님의 이름과 그 오른손의 능력을 체험한 우리들이 성전에 모여서 함께 노래할 찬양이기도 합니다. 그 찬양이 세상으로 흘러넘칠 때 우리 교회가 축복하는 교회가 되고 우리 각자는 축복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河-

축복하는 교회 (4) : 시편 118편 3

지난주에는 시편기자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를 에워싸고 있던 모든 세력을 끊어버린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이름에는 우리를 얽어매는 모든 것들을 끊어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거기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까지 합쳐지면 죽음의 세력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께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큰 능력을 주십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누리는 특권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또 한 가지 표현이 지속적으로 반복됩니다. 그것은“여호와의 오른손”입니다. 성전에 모인 백성들 앞에 나와서 자신과 민족위에 임했던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는 왕은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그들을 구원했다고 고백합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손은 하나님의 권능을 표시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을 대표하는 말이라면, 여호와의 손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베푸시는 능력을 뜻합니다. 따라서 성경에는 여호와의 손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그 손의 능력으로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왼편이 아니라 오른 편이라는 표현도 특이합니다. 오른편은 권세와 위엄의 표시입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외울 때, 예수님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계신다는 고백이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한 능력을 가진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무엇보다 구약성경에서 여호와의 오른손은 능력의 상징입니다.:“여호와께서 그 오른손, 그 능력의 팔로 맹세하시되”라고 이사야 선지자는 말했습니다 (사 62:8). 하나님의 오른손은 능력의 팔입니다. 하나님 능력이 행사되는 수단입니다. 또한 이사야 41장 1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오른 손을 붙잡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도 오른손에 능력을 베풀어주십니다. 물론 오른 손에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임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오른 손을 붙잡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오늘 말씀 16절에도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온 세상에 높이 선포된 것을 뜻합니다. 여호와의 오른손의 능력이 임함으로 적군들이 가시나무 타듯이 금세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만방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능력의 주이심이 드러났습니다. 또한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풀었다고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오늘 본문의 왕과 민족은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었는데, 여호와의 오른손의 능력이 이들을 살렸습니다. 놀라운 능력, 권세 있는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이처럼 여호와 이름의 능력으로 죽지 않고 살아서 찬양하고 간증할 수 있음이 무척이나 감사했습니다. 의인의 장막에서 기쁨과 찬송이 흘러나옵니다. 이 모든 것이 기적같이 신비한 사건이었기에 하나님께 나와서 감사의 고백과 간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세상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오른손의 능력을 힘입고 살기 원합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는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으로 우리의 이웃과 세상을 축복하기 원합니다.-河-

축복하는 교회 (3) : 시편 118편 2

축복하는 교회라는 올 해 주제에 맞춰서 시편 118편을 차례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까지 합쳐서 앞으로 3주간동안 연속해서 설교하게 될 텐데 그 동안 시편 118편을 곁에 두시고 여러 번 반복해서 읽으시고 말씀을 깊이 묵상하시면서 한해를 살아가시는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이번 기회에 우리가 확실히 알고 넘어갈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복”에 대한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인간을 영원한 존재로 창조하셨는데 그만 인간이 죄를 지어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지은 인간을 다시금 영원한 존재로 회복시켜 주시길 원하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해서 그들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려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죄의 문제를 손수 해결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으면 은혜가운데 구원을 얻고 영생의 삶을 살게 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생입니다. 하나님을 떠났던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다시금 하나님께 가까이 할 수 있고, 하나님을 상급으로 알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복입니다. 나머지 세상에서 생각하는 복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수단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하라고 주시는 도구에 불과하지 궁극적인 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구원임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복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그 복을 누릴 때 우리들이 세상을 온전히 축복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 본문에서도 성전에 모인 백성들 앞에 나온 왕이 하나님께서 자신과 민족을 어떻게 도우셨는지 간증합니다. 전쟁을 겪은 것 같습니다. 적군들이 에워싸서 꼼짝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본문에 “에워싸다”는 말이 3번 나오는데 이에 대한 히브리어의 의미는 말 그대로 적군에 의해서 포위당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최악의 상태였습니다. 이것을 본문에서는 마치 왕이 적군에 의해서 포승줄로 묶여있는 것처럼 묘사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왕이 묶여 있으니 왕의 위신이 말이 아닙니다. 그때 왕은 지난 시간에 배웠듯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자신을 묶고 있는 줄을 끊었습니다. 왕이 다스리는 국가를 포위한 적군을 물리쳤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왕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줄을 끊어 버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위기의 순간에 왕은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았습니다. 그 이름의 권세로 적군과 맞섰습니다. 그때 자신을 에워싸고 묶고 있던 세력들을 끊어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의 권세가 새해를 사시는 참빛 교회 식구들께 그대로 임하길 원합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모든 것들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끊어내는 능력이 참빛 교회 식구들 위에 임하길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시편기자처럼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요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라고 고백하기 원합니다. -河-

축복하는 교회 (2) : 시편 118편 1

지난 주일에는 코스타 강사로 오셨던 김도현 목사님께서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은혜로 값없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갚을 수 없는 빚을 하나님께 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아무런 대가도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을 이웃들에게 갚아가면서 사시길 원하실 뿐입니다. 특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이처럼 복음전도와 믿음에 합당한 삶이 곧 우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진 빚을 갚는 길입니다.

복음에 빚진 자로서 그 빚을 갚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올 해 우리 교회 주제처럼 “축복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웃들을 축복하면서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초청할 수 있습니다. 나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받은 복을 더불어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복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 연속 설교 처음 시간에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복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복은 세상에서 말하는 복과 본질적으로 달랐습니다. 부귀영화, 무병장수, 자녀들의 성공과 출세와 같은 세상의 복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에 비할 바가 될 수 없었습니다. 세상의 복이 아침안개처럼 없어질 유한한 복이라면, 예수님을 믿음으로 누리게 되는 복은 영원한 복임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급이 되시는 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가까이하는 것 자체가 복이라고 시편기자는 고백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나눌 복은 예수님을 믿고 누리게 되는 하늘의 신령한 복입니다. 우리는 그 복을 흠뻑 받았습니다.

오늘 살펴본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어 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두고 편 가르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책임지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시기에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돕는 자들을 붙여주시고 그들과 더불어 주님의 일을 이루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인생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을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광활한 곳에 세우실 것입니다.

시편 118편의 기자는 고통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고통 가운데서 기도에 응답하시고 광활한 곳에 세우시는 하나님을 만났기에 담대하게 “하나님은 내 편이시라”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온 백성을 향해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피난처 삼고, 고통이 밀려오면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체험할 것을 초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받은 복을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세상을 축복할 수 없습니다. 마음을 먹는다고 축복하는 교회가 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길에 서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축복을 흠뻑 체험해야 합니다.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경험하고 그것을 간증할 수 있는 신앙입니다. 그때 우리들의 말은 물론이고 삶까지 받은 축복을 나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河-

주헌절을 지내면서…

교회력은 초대교회 이후 기독교회가 여러 절차를 걸쳐서 제정한 교회의 달력(church calendar)입니다. 종교개혁시대에는 교회력이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가톨릭의 성자들을 숭배한다는 이유로 배척되기도 했지만, 현대에 와서 교회력의 중요성이 다시금 강조되고 있습니다. 교회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중심으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력에 따르면 전반부 6개월은 예수님의 탄생, 사역, 고난,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는 절기들이고, 후반기 6개월은 오순절 성령강림이후에 성령과 더불어 동행하는 성도와 교회의 삶을 뜻합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교회력을 따라서 한 해를 보내면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고 성령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매 주일 예배순서 앞에 교회력을 표기하고 있습니다.

교회력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강절(Advent)부터 시작됩니다. 성탄절 4주전부터 시작되는 대강절은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오실 것을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대강절 기간 동안 강단에 촛불을 하나씩 켜가면서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립니다. 또한 교회력을 상징하는 색깔이 있는데 대강절은 보라색입니다. 보라색은 권위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 비록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지만 온 인류를 구하실 메시야요 왕으로 오셨음을 보여줍니다.

성탄절 이후 사순절 전까지의 6주간은 주현절입니다. 주현(Epiphany, “빛으로 나타나심“)이라는 의미대로 빛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public life)를 시작하십니다. 우리들과 똑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께서 드디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할 메시야이심을 세상에 보이신 것입니다. 현재 우리는 주현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주현절의 색깔은 흰색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죄가 없으신 하나님이심을 뜻합니다.

주현절이 끝나고 고난주간 전까지가 사순절(Lent)입니다.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로 시작되는데, 금식과 선행 등을 실천하면서 1년 365일 가운데 10분의 1이 조금 넘는 40일을 경건하게 보내게 됩니다. 사순절의 색깔도 대강절과 마찬가지로 보라색입니다. 예수님을 닮는 거룩한 삶을 통해서 신앙의 깊은 세계로 들어가기 위함입니다. 사순절이 끝나면 고난주간(Passion week)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기억하고 우리들 역시 자기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기로 결단하는 기간입니다. 고난주간의 색깔은 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하는 빨강입니다. 고난 주간이 끝나면서 곧이어 부활주일을 맞습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큰 절기입니다. 부활주일의 색깔은 흰색입니다. 부활주일 새벽에 흰옷을 입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부활절 후 7주간이 끝나면 오순절 성령강림절입니다. 그리고 오순절 이후의 약 6개월 기간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강조됩니다. 그러고 보니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님을 믿는 믿음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성령의 인도하심과 능력으로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 것도 중요합니다. 오순절 이후부터 그다음 대강절까지 긴 6개월 동안의 색깔은 초록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새로운 생명과 신앙의 성숙을 뜻할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력을 따라서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고 성령의 임재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뜻 깊은 일입니다. 매주간 주보에 있는 교회력을 따라서 올 한해를 주님과 동행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河-

축복하는 교회 (1) : 참된 복

새해를 맞아서“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를 가장 많이 듣습니다. 물론 우리들 자신도 누구를 만나든지 똑같은 인사를 건넵니다. 이처럼 새해에 복을 많이 받으시라는 덕담은 예수님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누구나 하는 인사말입니다. 그런데 새해에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를 주고받으시면서 과연 여기서 말하는 복이 무엇일까를 잠시라도 생각해 보셨는지요? 교회에서 말하는 복이나 옛날 우리 조상들이 뒤꼍에 냉수를 떠놓고 새벽정성을 드리면서 복을 비는 것과 같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복” 또는 “축복”에 대해서 성경적인 관점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앞에서 지적한 대로 하나님을 믿고 복 받는 것이나 조상들이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면서 복을 빌던 것을 똑같은 일로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 같은 동양인들이 복에 민감하기 때문에 자칫 우리의 신앙도 기복주의로 흘러가기 쉽습니다. 실제로 교회에 나오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자녀들이 출세하는 형통함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성경에도 하나님을 믿으면 부귀영화를 누리고 자녀들에게 복이 임할 것을 약속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부모를 공경할 때 장수의 복도 임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복이 단지 세상에서 누리는 복에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우리들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에베소서 1장 3절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신령한 복입니다.“신령한”이라는 말에서부터 세상의 복과 차이가 있음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가장 큰 복으로 여깁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시편 23편의 다윗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 가장 큰 은혜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구약 성경 창세기에서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너의 가장 큰 상급”(창15:1)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상급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 자체가 가장 큰 상급이요 축복입니다. 시편 73편 28절에서는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했습니다. 자신과 하나님이 함께 거하는 것, 살아계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복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복은 하나님 중심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생 속에 간섭하시고 임재하심을 체험하는 것이 복이라고 가르쳐줍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물질이나 장수에 대한 복을 어떻게 봐야할까요?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일까요? 꼭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세상에서 열심히 살면 물질의 복은 물론 건강과 자녀의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더 잘 알고 믿기 위한 수단이지 결코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복을 많이 주셨다면 그것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더 열심히 믿으라는 표시입니다. 만약에 조금 가난하고 세상에서 그리 출세하지 못했어도 하나님을 알고 영생의 삶을 누린다면 그것 역시 똑같이 복된 인생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말하는 복의 기준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입니다.

올해 우리 교회 표어가 “축복하는 교회”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들은 한 해 동안 하나님을 더욱 열심히 믿고 더 많은 은혜를 체험해서 그것을 갖고 세상을 축복해야 함을 깨닫습니다.“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를 주고받을 때도 “더욱 열심히 하나님을 믿읍시다”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참된 복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날마다 동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올 한 해 우리 교회와 참빛 교회 식구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이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길 기도하겠습니다. -河-

2012년을 맞으며

새해 첫날입니다. 어제 저녁 송구영신예배로 모였고 또 다시 새해 첫날 신념감사 주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새해 첫 번째 날이 주일인 경우가 자주 오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새해 첫날 하나님께 나와서 예배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그래서 올 한 해가 더욱 은혜가 넘칠 것 같은 믿음이 생깁니다.

작년이 교회적으로 매우 뜻 깊은 해였다면, 새해는 이제 우리 교회를 통해서 주님의 부흥이 이루어지길 소망합니다. 올 해 우리 교회 주제가 “축복하는 교회”입니다. 가만히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참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세어보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복이 자꾸만 생각나서 나중에는 하나님께 불평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더 많은 것을 받기 원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달라고 하나님께 애원하는 욕심과 집착을 보이곤 합니다. 올 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기 원합니다. 축복을 받는 교회에서 축복을 하는 교회로 하나님 앞에 서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였을 때, 서로 축복하기 원합니다. 세상에 나가서 우리의 이웃을 축복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사는 샌프란시스코와 미국을 축복하고 우리의 조국인 대한민국도 축복하기 원합니다.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축복을 한다고 세상이 바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통해서 하늘의 복이 전해질 것을 믿고 기대하기에 마음껏 축복하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참빛 교회 식구들의 인사가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로 확정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마음으로 말로 또 우리의 행함으로 축복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기 원합니다. 외국 사람들에게도 “God bless you”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들 자신이 복의 통로로 손색이 없는 정결함과 투명함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닮을 수 있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그릇이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에 부족함이 없는 겸손한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그 복이 우리 안에서 차고 넘쳐서 세상으로 흘러가도록 출구를 열어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이웃사랑입니다. 세상과 소통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워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바로 하나님의 대행자로 세상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새해를 맞는 참빛 교회 식구들게 특별히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 모두 진실된 신앙을 갖기로 결심하고 애써야한다는 것입니다. 진실은 어디서나 통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신앙은 힘이 있습니다. 가짜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진짜가 되기로 함께 결심하고 그 길로 나가기 원합니다.

둘째는,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하나로 똘똘 뭉쳐있고 교회에서 십자가의 복음이 선포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욱 귀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매사에 어떤 일을 앞두고잠시 멈춰서“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고 그 다음에 행동으로 옮깁시다. 자신의 주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품고 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이 우리를 하나 된 공동체로 만들 것입니다.

셋째로, 한 해 동안 말씀과 기도에 힘쓰는 것입니다. 참빛 교회 식구들 모두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일독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토요일은 새벽기도회에 오셔서 주님께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말씀이 우리를 살리고 기도가 우리를 힘입게 만들어줍니다.

올 한해도 참빛 교회 식구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세울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부디 영육간에 강건하시고 주님 안에서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참빛 교회 식구들 한 분 한 분을 주님 안에서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河-

잠언이 주는 교훈 (3)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제각각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위주로 세상을 삽니다. 자기 마음에 맞으면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불쾌하고 그릇되었다고 비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심하게 봅니다. 자신의 생각이 올바르더라도 그것을 표현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따라 갑니다. 소위 줏대가 없다는 말을 듣기 십상입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은 좋지만 자칫하면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한 채 우왕좌왕할 수도 있습니다.

요즘 시대에는 사람중심이 아니라 물질중심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질 즉 돈만 있으면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잠언에는 물질에 대한 실제적인 교훈이 많이 등장합니다. 부유함은 부지런히 산 결과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잠11:16), 물질로 친구를 사귀는 등 재물이 가져다주는 유익도 간과하지 않습니다(잠9:4).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 때에 물질의 복도 주신다는 말씀도 나옵니다(잠 22:4). 하지만 불의의 재물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경고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물질만을 추구하는 삶에 대해서는 마지막 심판 날에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잠 11:4).

무엇보다 잠언 말씀에서는 하나님 중심의 삶이 최고의 행복임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최우선에 두라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대해서는 첫 번째 시간에 세 가지로 정리해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 하나님을 실제로 두려워하는 삶,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하는 삶. 잠언 말씀을 읽어가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이 나오는 구절들을 따로 노트해보시면 하나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금방 깨닫게 되고,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도 구체적으로 알게 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우리들의 세상살이에 꼭 필요한 자신감(confidence)과 연결시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확실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붙어 있기에 자신 있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신을 포함해서 사람들을 의지하는 것은 자신감보다는 절망 내지는 상대적 박탈감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물질도 금방 없어지고 가질수록 더 갖고 싶어지기에 궁극적인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자신감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지하는데서 옵니다. 여기서부터 이웃사랑도 나와야 하고, 세상에서의 형통함도 비롯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생명의 샘(the fountain of life)이 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핵심이 빠지면 나머지 것들도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자동차에서 엔진이 없다면 아무리 비싼 자동차라도 단지 고철에 불과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경외할 때 그 복이 우리 자녀들에게도 임합니다.:“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26절)

여호와를 경외할 때 사망의 그늘이 우리 곁에 접근하지 못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면서 의인의 삶을 걸어갈 때, 죽음의 순간에도 피할 길이 열리고 소망을 얻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생명의 근원이요 하나님 백성들에게 자신감을 주는 원천입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