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이 주는 교훈 (2)

잠언을 한 장씩 읽어가면서 올해의 마지막 달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잠언 말씀을 읽고 묵상하신 분들은 잠언이 가르쳐주는 지헤가 얼마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지 실감하셨을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잠언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의 자세와 방법을 자세하게 가르쳐줍니다.

잠언에서는 지혜를 의인화해서 말하기도 합니다. 잠언 1장 20절에서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인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지혜에 해당하는 단어가 “호크마”인데 이것은 여성명사로 쓰였습니다. 그리고 잠언에서는 지혜를 여성처럼 그리고 인격화해서 지혜가 우리를 부르고 초대하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지혜를 따라 사는 삶이 얼마나 구체적인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지혜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생생하게 들려야함을 깨우쳐주는 대목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대조해 가면서 지혜로운 삶이 무엇인지 깨우쳐줍니다. 우선, 속이는 저울과 공평한 추입니다. 하나님은 속이는 저울을 미워하십니다. 반면에 공평한 추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속임수와 거짓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공평과 정직을 쫓아 살아야 함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정직과 패역도 대조되어 나타납니다. 정직은 안과 밖이 같은 것입니다. 말과 행실이 일치하는 것이 곧 정직입니다. 반면에 패역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으 패역입니다. 정직한 길을 좇아갈 때 그곳에 생명이 있습니다. 6절에서 다시 한번 정직과 패역을 대조하면서 하나님께서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고 패역한 자는 자기의 악으로 멸망하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정직한 길에 서야 합니다. 그 길이 살길이요 구원의 길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멸시하는 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12절). 지혜는 남을 비난하거나 깍아 내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명철한 자는 자신의 자리에서 잠잠히 있을 뿐입니다. 남의 것을 참견하고 비판하기보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묵묵하게 주어진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멸시하는 구체적인 예가 13절에 나옵니다. 두루 다니면서 험담을 하는 것은 이웃을 멸시하는 행위입니다. 말이 많으면 남의 비밀을 여기저기에 퍼뜨리게 됩니다. 물론 실수를 하게 마련입니다. 입이 무거운 것이 좋습니다. 입술의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신실한 마음을 갖고 있으면 남의 비밀을 숨겨주고 도리어 그것을 갖고 하나님께 기도해 줍니다.

지혜를 따라서 사는 하나님의 백성은 요란하지 않습니다. 지혜를 알고 깨닫고 그것을 실천하는 주님의 백성들은 자신은 물론 이웃을 살리는 길에 섭니다. 지금까지 읽으신 잠언 말씀에 “생명”또는 “생명나무”라는 말이 여러번 반복된 것이 그 증거입니다. 오늘도 지혜가 우리를 부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살도록 초대합니다. 잠언을 읽어가면서 우리의 삶이 하늘의 지혜로 가득 찰 수 있기를 바랍니다. -河-

잠언이 주는 교훈 (1)

12월 한 달은 잠언을 하루에 한 장씩 읽어 가면서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시길 부탁드렸습니다. 잠언은 시편과 전도서와 더불어 구약성경에서 성문서에 속해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성문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시편) 사랑하며(아가서), 세상에서 어떤 마음가짐과 행실로 살아야하는지 (욥기, 잠언, 전도서)를 가리켜주는 말씀입니다.

이 가운데 잠언은 하나님의 백성이 갖추어야 할 하늘의 지혜와 삶의 방식을 자세히 가르쳐줍니다. 전통적으로 잠언은 솔로몬 왕이 기록했다고 전해집니다. 지난주까지 살펴보았던 말씀의 주인공이기도 한 솔로몬왕은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리고 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고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갖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참빛교회 식구들께서 솔로몬의 잠언을 매일같이 읽으시고 하늘의 지혜를 구하시면서 새해를 맞으시길 바랍니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잠언은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왕 솔로몬의 잠언이라”로 시작됩니다. 여기서 잠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샬”은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지혜나 지혜의 스승들이 전해주는 짧은 경구(警句)를 가리켰습니다. 또한 비유라는 뜻도 있는데 실제로 잠언을 읽다 보면 여러 가지 상황들을 비유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부지런한 사람의 삶을 개미의 움직임에 비유한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처럼 잠언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거룩한 백성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방식을 구체적으로 교훈해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통해서 잠언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지혜, 훈계, 명철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도록 우리들에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잠언이라는 말의 해설이기도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 백성다운 삶을 위해서 잠언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늘의 지혜로 살아야 합니다. 의롭고 공평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정직한 모습이고 세상에서는 좌우로 치우침이 없는 삶을 가리킵니다.

셋째로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고 젊은이들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슬기는 세상을 살아가는 실제적인 처세를, 지식과 근신은 앞길이 밝은 젊은이들이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그것을 분별해 낼 수 있는 능력을 뜻합니다. 넷째로, 이미 지혜롭고 명철한 자들에게는 학식과 지혜를 더욱더 알려서 더 깊고 오묘한 지혜의 세계로 초대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쉬지 말고 하늘의 지혜를 구하고 배우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잠언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식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잠 1:7).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려는 믿음과 마음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잠언을 읽으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더욱 커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올 한해를 마무리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온 세상의 창조주 되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새해를 맞이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잠언 말씀 속에 숨겨놓으신 하늘의 지혜와 교훈을 보물찾기 하듯이 찾아내시고 삶 속에 그대로 적용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참빛 교회 식구들께 아름다운 관과 금 목걸이처럼 존귀하고 아름다운 하늘의 지혜로 장식해 주시길 기도하겠습니다. -河-

기도하는 집 (4)

솔로몬이 아버지 다윗의 뜻을 따라서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께 성전을 봉헌하면서 드린 기도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솔로몬은 자신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전이되길 기도했습니다. 성전에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임하고 밤낮으로 하나님의 눈과 귀가 성전을 향하기를 기도했습니다. 또한 성전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기를 소원했습니다. 누구든지 성전에 와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웃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 죄를 짓고 어려움이 찾아 왔을 때 죄를 돌이키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한꺼번에 닥쳐서 꼼짝달싹할 수 없을 때도 성전에서 손을 펴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임하기를 기도했습니다.

심지어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성전에 나와서 기도할 때 그들의 기도까지 들어주시길 간구했습니다. 성전에 올 수 없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전쟁터에 나갔거나 포로로 잡혀갔기 때문입니다. 그때도 있는 자리에서 성전을 향해서 기도할 때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길 간구했습니다.

성전에 하나님의 임재가 없다면 그것은 단지 건물에 불과합니다. 동시에 성전에서 기도가 끊어진다면 하나님의 전으로서 사명을 감당하기 힘이 듭니다. 하나님의 눈이 주야로 성전을 향하시는 것은 주의 백성들이 성전에 나와서 기도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참빛 교회 성전이 만민이 나와서 기도하는 집이 되길 원합니다. 참빛 교회 식구들이 성전에 와서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을 체험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마친 솔로몬이 이제 백성들을 향해서 그들을 축복합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축복기도를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가만히 헤아려보면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5년여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일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어디로 갈지 몰랐고 때로는 우리의 생각을 고집했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정해놓으신 시간표에 따라서 정확하게 일하셨음을 우리 모두 체험했습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참빛 교회 식구들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은 정확하게 일하십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을 활짝 연다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몸소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들도 솔로몬처럼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솔로몬이 백성들과 더불어 고백하는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빠짐없이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떠나지도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하신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들에게도 임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이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손색이 없는 신앙과 삶을 겸비하는 것입니다. 그때 세상 만민들이 우리를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에 전파되는 놀라운 일이 생길 것입니다. 우리들이 복의 통로가 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으로 전해지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참빛교회 식구들이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河-

기도하는 집 (3)

토요일 새벽기도회에서는 이사야서 56장 말씀을 함께 읽고 나누었습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예언서인 이사야서는 후반부로 가면서 심판에 대한 예언에서 구원과 회복에 대한 말씀으로 바뀌고, 구원의 지경이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에서 온 세상 사람들로 동심원처럼 퍼져 나갑니다. 이사야서 56장도 모든 민족의 구원에 대한 말씀을 여는 서문과 같은 장(障)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외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민족들을 이방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어려웠고 하나님 역시 이방인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으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56장은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방인들 가운데 하나님과 연합하여[믿고]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종[백성]이 되어서 주님의 말씀과 약속을 지키는 경우에 해당하지만, 구약시대에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다는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찍이 솔로몬왕은 성전을 완공하고 하나님께 봉헌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인들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이름을 믿는다면 성전에 와서 기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성전에 와서 크고 높으신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여 주실 것을 간구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능력이 임한 신약시대라면 당연히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이 임하지만, 예수님 이전의 구약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을 지은 솔로몬이 이방인들에게 성전을 개방한 것 역시 굉장한 파격입니다.

이처럼 성전은 누구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 성전의 문은 하나님을 믿고 그 이름을 의지해서 기도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이사야서 56장 7절에서는 이것과 연관해서“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a house of prayer for all nations)”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에서 드리는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누구나 성전에 와서 손을 펴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성전을 향해서 기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서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전쟁터에서 주님의 성전을 향해서 기도합니다. 그때도 하나님께서 저들의 기도를 들으시길 솔로몬이 간구합니다. 우리들의 경우 세상의 삶이 전쟁터와 같을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으로 우리를 보내셨기에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살이가 쉽지 않습니다. 그때 우리들이 있는 자리에서 성전을 향해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돌봐 주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합니다.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우리들안에 여전히 죄악된 모습이 남아서 우리 자신을 괴롭히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습니다. 죄로 인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났다고 해도 우리는 그 자리에서 성전을 향해서 하나님께 회개와 결단의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니다. 그리고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이 모든 것이 성전에서 드리는 기도의 응답입니다. 주의 전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었을 때 우리 모두가 누리는 은혜요 축복입니다. 참빛교회 새 성전에 주님의 이름이 임하고, 모든 사람들이 와서 주님께 부르짖는 기도하는 집이 되길 원합니다.-河-

기도하는 집 (2)

새 성전에서 모이는 두 번째 주일입니다. 우리 교회가 자체 건물을 갖게 된 것은 말 그대로 꿈만 같은 일입니다. 새로운 예배처소를 주시길 열심히 기도했지만 우리의 기도가 이토록 빠르게 현실로 이루어질 줄 몰랐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실 때(time)를 예비해 놓고 계셨습니다. 올 봄에 저는 그동안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친히 인도하시고 간섭하시는 것을 눈으로 목도하였다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사실을 교회를 통해서 체험하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서 하루에 5분씩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렸고 우리 모두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기도 가운데 임하신다는 사실을 고백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교회 이름을 바꾸고 새로운 성전까지 갖게 된 것은 틀림없는 하나님의 은혜요 기도의 응답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가 할 일은 더욱 열심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밤 10시에 기도하던 것, 하루에 5분씩 기도하던 것도 계속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것이“항상 기도하라”는 하나님 말씀을 실천하는 비결입니다. 무엇보다 새벽기도회에 많이 오셔서 함께 기도하기 원합니다. 이처럼 우리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합니다.

연속해서 살펴보는 열왕기상 8장은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봉헌하면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입니다. 솔로몬 역시 성전에 하나님의 이름이 임할 것을 간구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전이 기도하는 집이 되고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드리는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오늘 본문은“만일”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구절이 4번 나옵니다. 만일로 시작되는 말씀은 성전에 와서 기도하는 대표적인 사례들일 것입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잘못한 사람들이 성전에 와서 하나님께 회개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주님께 죄를 짓고 전쟁에서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이들은 성전에 와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죄를 용서해 주시고 다시금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는 회복의 역사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민족이 주님께 죄를 범해서 가뭄과 기근과 같은 자연재해가 임했을 때에도 성전에 와서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비를 내려 주신답니다. 땅에 기근이나 전염병이 돌아서 사람들이 죽어갈 때도 성전에 나와서 손을 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땅을 고쳐 주실 것입니다.

이처럼 성전은 하나님과 세상을 잇는 장소입니다. 무엇보다 죄를 범한 자들이 성전에 와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성전에서 드리는 기도를 들으시고 가장 선한 것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 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참빛 교회 성전이 말 그대로 기도의 집이 되길 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더욱더 기도로 세워지고 기도의 사람들로 가득차기를 간절히 바랍니다.-河-

기도하는 집 (1)

오늘은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신 새성전에서 첫 번째로 예배하는 날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듯이 우리 교회가 이토록 아름다운 성전을 갖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증거입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우리 모두 한 마음으로 감사의 찬양을 드리기 원합니다. 할렐루야!

우리 교회가 자체건물을 갖게 된 것을 두고 몇 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모인 에클레시아(부름받은 성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건물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 안에 성도가 없거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이 없다면 그곳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건물은 예배와 사역을 돕는 도구요 그릇임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이제는 참빛 교회 식구들 한 분 한 분이 하나님 백성으로 더욱 멋지게 세워지셔야 합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는 성도들로 우리 교회가 가득 차야 합니다. 아름다운 성전만큼이나 우리의 신앙도 멋지게 자라가야 함을 잊지 말고 이제는 신앙 성숙에 더욱 매진합시다.

둘째로, 교회는 하나님께 속해야 합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교회가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께서 주인 되신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거기에 성령의 임재와 역사가 임했을 때 주님의 교회가 온전해 집니다. 구약 성경의 솔로몬은 성전건축을 마치고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립니다. 앞으로 우리가 연속해서 살펴볼 말씀입니다. 말 그대로 봉헌(奉獻)- 하나님께 성전을 드리는 것입니다. 성전은 마땅히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전에서의 모든 활동과 사역들은 하나님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행여나 하나님보다 자신의 생각이나 이익을 앞세우는 일이 교회 안에 생기면 안 됩니다. 우리는 매사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실까”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임재하시고 우리 교회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셋째로, 교회는 기도하는 집입니다. 교회에 기도의 불이 꺼지면 교회로서 존재가치가 사라진 것입니다. 솔로몬도 성전을 하나님께 바치면서, 성전에서 드리는 기도에 하나님의 응답이 임하기를 간절히 구했습니다. 부르짖는 기도와 외치는 기도, 상한 마음의 기도, 이웃과 세상을 위한 중보기도 – 기도가 살아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미국 교회를 사용하느라 기도할 시간을 낼 수 없었습니다. 이제 마음껏 기도할 수 있는 터전이 생겼습니다. 참빛 교회성전에 기도의 불이 활활 타오르길 바랍니다. 기도로 세워지는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교회 뿐 아니라 우리들의 가정과 개인의 삶도 기도로 세워집니다. 성전에 오셔서 마음껏 부르짖으시고 외치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다시금 아름다운 성전을 허락하신 우리 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동안 교회 이전을 위해서 앞에서 뒤에서 그리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모든 성도님들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더욱 겸손히 멋진 교회를 세워나갑시다.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은 참 좋으신 분입니다. 할렐루야! -河-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이라는 찬양 가사처럼 우리들은 참 좋으신 하나님(God is so good)을 믿습니다. 여기서“좋다”라는 말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틀림없으시고(의로우시고), 선하시고,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분으로 임하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하늘 아버지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호세아 말씀에서 가정을 버린 아내를 끝까지 찾아갔던 남편처럼 하나님께서는 등을 돌린 자신의 백성들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절대로 버리지 않으십니다. 무엇보다 우리들이 하나님만을 인정하고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 다른 모든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처럼 성경이 가르쳐주는 하나님의 모습을 차근차근 살펴보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말 그대로 좋으신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을 삶 속에서 체험한다면 우리들도 앞에서 소개한 찬양의 마지막 가사처럼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좋으신 하나님과 더불어 사랑의 하나님(God is love)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요한일서 4장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잘 가르쳐줍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8절/16절)고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말씀대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은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것을 통해서 증명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신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지를 가장 잘 보여줍니다. 그래서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두고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내리사랑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자식이 알아주지 않을 때가 많지만 부모님은 무조건적으로/변함없이 자식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내리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고 그 사랑에 감사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목숨까지 바치면서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지금도 공기처럼 우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우리가 할 일은 마음을 열고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좋으신 하나님/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 다음에는 받은 사랑을 이웃들에게 조건 없이 나눠줘야 합니다. 값없이 받은 사랑이기에 값없이 이웃과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분수처럼 넘쳐서 세상으로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갖고 있기보다 이웃과 더불어 나눌 때 더욱 풍성해 지고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죽음이나 심판이 와도 담대합니다.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임하고 그 사랑이 세상으로 흘러갈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이 하나님 나라로 변할 것입니다. 그때까지 더욱 열심히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과 나누기 원합니다.-河-

너는 내 백성이라

하나님 – 어려서부터 또는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던 분들에게는 익숙한 말이지만 뒤늦게 하나님을 믿으신 분들에게는 생소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이라고 말해도 그것이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어도 하나님에 대한 막연한 생각을 지우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경은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가르쳐주는데 그것이 쉽지 않았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에 보이는 신들을 찾아가서 그것들을 숭배했습니다. 대표적인 신이 가나안의 토속 신이었던 바알이었습니다. 바알은 황소와 같은 모습을 갖고 있었습니다. 바알을 숭배하면 큰 복을 받고 자식을 많이 낳는 번영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알을 믿는 종교는 성적으로도 문란해서 육체의 탐욕을 채워주기도 했습니다. 일단 눈에 보이고 자신들에게 물질적인 복을 갖다 주고 자유롭게 즐기면서 종교생활을 할 수 있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등지고 바알을 섬겼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구약 성경의 호세아서는 이스라엘에 바알을 비롯한 이방신들을 섬기는 우상숭배가 극에 달했을 때 선포된 예언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를 알기 쉽게 설명하십니다. 호세아가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한 것처럼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부부관계로 가정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신부로 생각하신다면 신부된 이스라엘은 남편 되신 하나님께 순결한 모습으로 나갔어야합니다.

남편만을 사랑하면서 평생을 사는 것이 올바른 신부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신랑 되신 하나님을 놓아두고 다른 신인 바알을 남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결혼한 부인이 다른 남자를 따라 나선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자신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을 다시금 신부로 맞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에서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19-20절은 신랑 되신 하나님께서 신부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대우해 주시는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약속은“의로움”“공평함”“은총”“긍휼”“진실함”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아무리 못되고 그릇된 길로 가도 우리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변덕스럽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약속을 지키십니다. 대신에 하나님은 신부된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 저희들도 하나님을 끝까지 사랑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길 기다리십니다. 그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땅에 임하십니다. 우리들 마음에 임하시고 우리의 삶속에 임하십니다. 우리의 생업에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실로 사랑하심을 이 땅의 복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신의 백성으로 삼아주시고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이에 대한 우리의 고백은 한 가지 뿐입니다.:“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23절) 아멘 -河-

하나님의 붙드심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커다란 주제로 다섯 번째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를 향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선한 뜻을 갖고 계시다는 믿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필요합니다. 사실 교회에 오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체험이라고 누누이 말씀드린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머리카락까지 세신 바 될 정도로 우리를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 특히 성령을 주셔서 새로운 생명을 허락하시고,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을 펼쳐 보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을 미리 알고 계십니다.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서 들의 백합화나 공중의 새와 비교할 수 없는 귀중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가장 최고의 자리에 모시고, 하나님을 가장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좋으신 분으로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우리가 마음 문을 열고 하나님을 받아들이면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 마음과 삶 속에서 활동하십니다. 우리보다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예비하시기에 우리들은 미리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염려하는 것은 믿음이 적다는 표시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여기 저기 두리번거리면서 마음이 분산되는 것 역시 올바른 믿음의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의 필요를 미리 아시고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만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신앙의 길을 경주할 때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길과 인도하심을 체험할 수 있음을 꼭 기억합시다.

오늘 살펴볼 시편 139편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심을 가르쳐줍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두 가지 모습을 연상해야 합니다. 첫째는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5절에 있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두르시고 우리를 안수해 주십니다.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 안에 내재(內在)하십니다. 동시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멀찍이 존재하십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하늘에 계신다고 말했고 이런 하나님을 초월적인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이 세상은 물론 우리들의 인생길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십니다. 9절 말씀대로 우리가 바다 끝에 가 있더라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위치를 다 파악하십니다. 여기서 바다 끝은 절박한 상황을 가리킵니다. 시편이 쓰이던 당시에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지 못해서 바다 끝에는 폭포수와 같은 낭떠러지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바다 끝에 있다는 것은 백척간두의 아찔한 순간에 처해 있음을 뜻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능하신 손으로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오장육부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우리의 신체가 얼마나 신묘막측합니까? 우리들이 모태에서 조성되기 전에 이미 우리를 알고 계셨다고 오늘 시편기자가 고백합니다(15절). 그 하나님을 우리가‘아버지’라고 고백할 때, 하나님은 언제나 좋으신 하나님으로 우리들 각자에게 임하십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다음 한 주간 우리를 감싸시고, 하늘에서 돌보시고, 우리를 신묘막측하게 창조하신 하나님을 사모하면서 그 하나님의 마음과 손길을 삶 속에서 체험하시길 바랍니다.-河-

너희는 먼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우리들은 염려를 달고 살아갑니다. 밖에서 밀려오는 염려에 대처하고 나면 마음속에서 염려가 생깁니다. 반대로, 안에서 생기는 염려를 해결하고 나면 밖에서 염려가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이러한 현상은 예수님을 따라 나섰던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산상수훈을 말씀하시면서 먹고 사는 것과 관련해서 염려하지 말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염려는 믿음이 적다는 표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모두 알고 계시는데 염려한다면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중의 새들이나 들의 백합화를 먹이시고 입히십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목숨까지 바꾸면서 사랑하신 우리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실 겁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안다면 하나님을 신뢰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갖고 있을 때 마음의 염려가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에 맞추는 것입니다.“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먼저”입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가 눈앞에 닥칠 때에도 그 문제보다 먼저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신앙에서 먼저 하나님을 찾는 우선순위만 확실히 정해지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저절로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들은 여기서 실패하곤 합니다. 그래서 수 천길 아래 낭떠러지 밑에 있는 물을 먼저 바라보고는 잔뜩 겁을 먹습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된 곳은 어디나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고 주관하신다면 우리 마음도 곧 하나님 나라가 됩니다. 가정과 교회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들이 사는 세상에도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희락의 하나님 나라가 임해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하나님 뜻대로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가 여기에 어울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거룩함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듯이 우리들도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바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손색이 없도록 멋지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더해 주시는 “더함의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둘째로 34절에 있듯이 내일 일을 두고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가 염려하는 것들의 거의 대부분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보다 앞서가시는 여호와 이레 하나님을 믿는다면 내일 일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일의 염려는 그때 닥쳐서 해도 됩니다. 오늘 이 순간을 하나님께 드리려는 삶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오늘(present)은 하나님께서 우리들 각자에게 주신 선물(present)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주어진 삶에 충실할 때 미래의 염려가 사라집니다. 염려가 밀려올 때는 그 자리에서 기도하고 지금 주어진 삶 속에서 먼저 하나님을 찾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십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