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 가득한 인생 4 : 이삭의 웃음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이삭은 하나님께서 아버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는 과정에서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제물로 드려지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버지를 따라나섰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자신이 제물로 드려지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삭은 의연하게 대처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주신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듯이 이삭도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 들였습니다.

제단 위에 결박당한 채 누워 있었던 이삭의 마음을 생각해 보셨는지요? 아버지 아브라함이 칼을 들고 자신을 죽이려던 순간에 이삭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지는 것이지만 그는 마지막 죽음의 순간을 젊은 시절에 경험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삭은 죽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숫양을 예비해 놓으셨고 이삭 대신 양이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잠깐 동안 일어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삭의 인생에 모리아산에서의 경험은 잊을 수 없는 강렬한 하나님 체험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목숨이 오가는 순간에 모든 것을 예비하시는 여호와 이레 하나님을 몸으로 체험했습니다. 어떤 말씀이든지 믿음으로 순종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의 모든 것을 지켜보시고, 가장 선한 길로 예비해 놓으신다는 사실도 아버지 아브라함과 함께 체험했습니다. 이삭이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그의 인생길에서 여호와 이레 하나님을 확실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 역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구체적으로 임한 여호와 이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삭의 어머니 사라가 죽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물론 이삭 역시 어머니 사라를 잃고 슬픔에 쌓여 지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이삭을 장가들일 계획을 세웁니다. 가장 아끼는 종을 불러서 자기 친족들이 있는 하란으로 가서 이삭의 규수감을 구해오라는 부탁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먼 길을 떠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삭의 규수감을 분명하게 가르쳐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우물가에 물을 길러 나온 여인들 가운데 물을 달라고 했을 때, 자신과 약대들에게 물을 주는 여인이 있으면 그 여인을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이삭의 규수감으로 알겠다는 것입니다.

종의 바람대로 우물가에서 아리따운 여인 리브가가 그에게 물을 건네줍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이 여인이 하나님께서 이삭을 위해서 예비해 두신 규수감이라고 확신합니다. 알고 보니 아브라함의 친척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었던 가문에서 자란 여인이었습니다. 리브가는 물론 그녀의 아버지도 이삭의 아내로 데려가겠다는 종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이 모든 상황의 인도하심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여호아 이레의 하나님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는 모든 과정에서도 역사하신 것입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서 종을 멀리 보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삭은 종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들에 나가서 산책합니다. 단지 산책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비해 놓으셨음을 믿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깊이 묵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종이 리브가를 데리고 이삭 앞에 나타납니다. 리브가를 본 이삭은 마음이 흡족했습니다.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아내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리브가를 데리고 어머니의 장막으로 들어갑니다. 드디어 어머니를 잃고 슬퍼하던 이삭이 다시금 웃음을 되찾은 것입니다.

이처럼 이삭은 하나님의 예비하심과 준비하심 가운데 그의 인생길을 걸어가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할렐루야! -河-

웃음 가득한 인생 3 : 하나님의 웃음

하나님의 약속은 정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약속의 자녀 이삭이 태어난 것입니다. 천사가 아브라함의 집에 와서 이삭이 태어날 것이라고 말했을 때, 장막 뒤에서 이 얘기를 들었던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웃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사라에게 임한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도 웃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자식의 이름은 이삭(웃음)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고 아브라함과 사라는 얼굴을 땅에 대고 웃었지만, 하나님은 이들에게 진정한 웃음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이삭이 태어난 것입니다. 이삭을 낳은 후, 사라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창20:6).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이삭을 주셨고, 아브라함과 사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체험하고 한없이 기뻐했습니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난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면 꼭 특별한 말씀을 하시곤 했는데 이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번에는 아브라함을 시험(test)하십니다. 그런데 그 시험이 너무 어렵습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달라는 얘기를 한 적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100세에 이삭을 얻은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브라함을 부르시더니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네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고 말씀하십니다.

다음 날 아침, 아브라함은 일찍 일어나서 종들과 이삭을 데리고 길을 떠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습니다.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찌니이다”(욥1:21)는 욥의 고백을 연상시킵니다.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리아 땅에 오자 종들을 그곳에 남겨두고 아들 이삭과 단둘이 길을 갑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번제에 쓸 장작을 메고 가게 한 것을 보면 이삭이 꽤 컸고 아브라함은 많이 연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산에 두 부자가 도착해서 제단을 쌓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묶어서 제단에 올려놓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릴 참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시험이었음을 밝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이 아니라 번제로 드릴 양을 이미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여기서 여호와 이레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 갈 것은 아버지의 말씀에 그대로 따른 이삭의 모습입니다. 이삭은 아버지와 함께 모리아로 갔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결박해서 제단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서 죽이려고 했을 때도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이삭이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게 되었던 또 다른 비결을 발견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아끼지 않고 하나님께 드린 아브라함, 하나님과 아버지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던 이삭을 보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이처럼 이삭은 하나님께도 웃음을 주었습니다, -河-

웃음 가득한 인생 2 : 사라의 웃음

지난주에 함께 나눴듯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큰 민족을 이루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라는 아기를 낳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과 사라가 가진 딜레마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때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나타나셔서 같은 약속을 하십니다.

 상식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던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합니다. 처음에는 자기 집에서 태어나서 자란 충직한 종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으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창15:4)고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사라의 아이디어로 이집트에서 온 여종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얻습니다. 그것 역시 하나님의 계획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다음과 같이 재차 약속하십니다: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창17:19).

사라가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고나서 사라는 실제로 아기를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강조하는 표현들이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첫째로,“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as he said) 사라를 권고하사”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쓰인 히브리어는 “평상시에 하는 말”을 뜻합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을 찾아온 천사들이 평상적인 언어로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했고, 그 말을 엿들은 사라가 장막 뒤에서 웃었습니다. 하나님은 천사들의 일상적인 말 그대로 아이를 갖지 못하는 사라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둘째로 1절 후반부에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as he spoke/promised)”라는 같은 표현이 반복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쓰인 히브리어는 앞에 쓰인 표현보다 의미가 깊습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에서는 단순히 ”말하다“는 번역보다 ”약속하신대로“라고 번역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녀가 아이를 갖도록 하셨습니다.

2절에 있듯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때가 되니 아브라함과 사라의 아들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이 정확히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말실수를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23:19). 우리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예사롭게 받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주신 말씀, 깊은 기도 가운데 마음에 주신 약속을 꼭 간직하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어떻게 이루시는지 기대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1년 전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과 사라 모두 속으로 웃었고 그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이삭(웃음)”으로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백세에 얻은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짓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진정한 웃음을 주신 것입니다. 사라는 하나님께서 비로소 자신을 웃게 하셨다고 기뻐합니다. 사라의 웃음은 아브라함은 물론 온 세상을 웃음 짓게 했습니다.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졌기에 기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정확히 이루어졌기에 기쁨의 웃음을 지은 것입니다. -河-

웃음 가득한 인생 1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에 대한 연속 설교를 마쳤습니다. 일곱 교회의 모습은 곧 우리 교회의 모습이었고, 우리들 각자가 그리스도의 성전이라고 했으니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안에는 예수님께 칭찬받을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동시에 질책을 받아서 마땅한 교회의 모습, 삶의 모습도 있습니다. 교회에 주신 말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약속은 “흰옷 입은 자”의 반열에 서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자신을 돌아보는 회개와 주님을 찾는 열심”이 필요함도 깨달았습니다. 지난 겨울동안 함께 나눈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 설교말씀 가운데 깊은 깨달음이 있었던 것을 마음에 새기고 앞으로 신앙생활 가운데 실천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제 오늘부터는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이삭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이 성경의 마지막 장이었는데, 성경 맨 처음인 창세기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저는 이번 연속설교의 제목을 “웃음 가득한 인생”이라고 정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 그의 아들 이삭의 이름은 “웃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아브라함이 웃었습니다. 어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천사가 아브라함에게 와서 아내 사라가 내년 이맘때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아브라함의 사라가 천막 뒤편에서 듣고는 사라 역시 웃었습니다. 자신에게 생산능력이 모두 끊겼는데 어찌 아이를 낳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듬해 사라가 아들을 낳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이름을 이삭(웃음)이라고 짓습니다.

창세기에 이삭에 대한 말씀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삭만을 위한 말씀은 한두 장 정도에 불과하고, 아브라함에 대한 말씀과 야곱에 대한 말씀 가운데 샌드위치처럼 위치해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여러 가지 일을 당하고, 야곱의 인생이 말 그대로 험악했던 것에 비해서 이삭은 그의 이름처럼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이삭의 어떤 점이 하나님 안에서 웃음 가득한 인생을 살게 하였을까요? 이번 연속 설교를 통해서 이삭이 웃음 가득하고 어려움 없는 인생을 살았던 비결을 발견하고 우리들 역시 이삭의 믿음을 닮기 원합니다.

이삭의 어머니 사라는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는 약속을 하십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그냥 아멘으로 받았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의 몸에서 아들이 낳을 것이라고는 믿지 못했습니다. 아내 사라의 태가 닫혔고 게다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연령이 지났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이 다른 방도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첫 번째로 그가 생각했던 것은 자기의 종 가운데 다메섹이라는 사람을 상속자로 삼아서 그를 통해서 큰 민족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네 씨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하갈이라는 몸종을 통해서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하나님의 계획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상식과 이성을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늘의 복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태를 여셔서 아브라함의 아들을 낳게 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도 아내 사라도 그것을 듣고 웃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상식을 초월해서 일하시는 분임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새 해 첫 달을 보내는 요즘, 우리들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우리들 상식에 가둬놓고 있지는 않습니까? -河-

내가 사랑하는 자

지난주에 이어서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가운데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일곱 교회 가운데 칭찬만 들은 교회는 죽도록 충성하였던 서머나 교회와 끝까지 신앙을 지켰던 빌라델피아 교회였습니다. 반면에 다른 네 교회들은 칭찬과 동시에 질책도 받습니다. 그런데 유독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는 칭찬 없이 질책만 받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부족함이 없던 부유한 교회였습니다. 자칭 “부족함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자기 만족도가 높았던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라오디게아 교회는 지난주에 살펴보았듯이 미지근한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번드르르했지만 실상 신앙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면 벌거벗은 영적상태입니다. 라오디게아의 신앙의 모습이 17절에 잘 나타나있습니다:“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겉으로 보면 멋진 교회였지만 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형편없고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교회다는 것입니다.

칭찬할 것이 하나도 없었던 라오디게아를 향한 예수님의 교훈이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서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는 두 가지 명령을 하십니다. 열심을 내는 것은 미지근한 신앙에 대한 예수님의 처방입니다. 회개하라는 것은 형식적인 신앙과 자기 우월의식에서 돌아서라는 깨우침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명칭이 확실히 눈에 들어옵니다. 예수님은 칭찬할 것도 없고 교만하기 이를 데 없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내가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십니다. 이들은 진실된 신앙에서 떠나갔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사랑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필레오”라는 동사가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친구간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이들을 친구로 대해주십니다.

20-21절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들이 회개하고 열심을 내는 신앙을 회복했을 때 임하게 될 축복입니다. 예수님께서 문 밖에서 서서 문을 두드리십니다. 친히 자신의 목소리로 이들을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문을 열면 예수님은 들어가셔서 식탁을 함께 나누실 것입니다. 고대사회에서 식탁을 나누는 것은 매우 친밀하다는 표시였고 귀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보좌에 함께 앚을 것이라는 약속도 주십니다. 여기서 보좌는 왕의 보좌입니다. 그곳에 함께 앉을 수 있는 사람은 왕의 자식들입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미지근한 신앙과 자기 교만에 빠진 라오디게아 교회도 회개하고 다시금 신앙을 회복하면 예수님의 보좌에 함께 앉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들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문이 열릴 때만 고대하십니다. 직접 문을 열고 들어오실 수 있지만, 우리들이 자발적으로 문을 열기를 기다리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모르는 불신자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회의 기독교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예수님을 문 밖에 서 계시도록 홀대할 때가 많다는 증거입니다.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합시다. 그리고 예수님과 더불어 신앙의 식탁을 나누고 왕의 보좌에 앉을 준비를 합시다. 할렐루야!-河-

차든지 덥든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들 가운데 마지막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말씀을 두 주에 걸쳐서 전하려고 합니다. 라오디게아라는 도시는 알렉산더 대왕 이후에 셀류시드라는 왕조가 소아시아를 다스렸는데 그때 왕이었던 셀류시드 2세가 라오디세라는 부인의 이름을 따서 지은 도시였습니다.

라오디게아는 당시 금융과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또한 안약을 비롯한 의학도 발달해서 지금으로 말하면 의과대학 같은 학교가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도시가 부유하다보니 라오디게아 교회에 모여든 성도들도 세상의 부유함을 누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처럼 라오디게아 교회는 세상에서 자랑할 것이 많은 소위 ‘난사람‘들로 이루어진 교회였습니다. 본문 17절에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도들의 수준과 모습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는 라오디게아 교회였지만 이들의 믿음은 말 그대로 형편없었습니다. 자칭 부자라고 할 만큼 풍족한 생활을 했지만 이들의 영적 상태는 벌거벗은 모습이었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가난하다 못해서 가련해 보였고 영적인 눈이 가리어져 있었습니다. 겉만 화려한 신앙입니다. 또한 세상적으로 풍족하고 어려움이 없다보니 믿음이 식었습니다. 차지도 더웁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입니다. 간혹 본문의 찬 것과 더운 것에 초점을 맞춰서 말씀을 이해하려는 경우가 있는데, 본문의 핵심은 찬 것과 더운 것에 있지 않고“미지근함”에 있습니다. 차지도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을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것입니다. 세상의 물질과 명예가 교회에 흘러 들어와서 교인들의 신앙을 미지근하게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라오디게아는 물 공급이 어려웠습니다. 약 6마일 떨어진 히에라폴리스라는 도시에서 뜨거운 온천수를 갖고 왔지만 라오디게아에 도착하면 미지근한 물로 변했습니다. 또한 동쪽으로 11마일 떨어진 골로새에서 차가운 물을 갖고 왔는데 차가운 물 역시 라오디게아에 도착하면 미지근해졌습니다. 물이 미지근하면 먹기 힘듭니다. 물로서 가치가 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도 라오디게아 교회의 믿음을 미지근한 물에 비유하시면서 “내 입에서 너를 토해 내치리라”(16절)고 강력히 경고하십니다. 입에서 토해 내서 내친다는 말씀은 보통 무서운 말씀이 아니지요!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말씀은 풍족함을 누리는 미국이나 한국에 있는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주시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불경기라고 하지만 미국에 사는 우리들은 상대적으로 부유한 생활을 합니다. 세상의 물결이 교회에 흘러 들어와서 교회 안에 물질주의, 세상의 명예, 개인의 욕심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난 사람들이 그들의 신앙과 상관없이 교회에서 큰 소리를 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꽤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예수님의 명령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미지근한 신앙을 청산해야 합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미지근한 신앙으로 우물쭈물하는 것보다 확실한 신앙으로 무장하고 열심을 내야 합니다. 세상 것을 자랑하기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예수님의 이름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올 한 해 세상의 가치들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기뻐하고 그 능력을 누리시길 간절히 바랍니다.-河-

하나님 성전의 기둥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 가운데 여섯 번째인 빌라델피아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는 두 번째 시간입니다. 빌라델피아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더불어 질책 없이 칭찬만 받았던 교회라고 했습니다. 두 교회 모두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았습니다. 오죽했으면 유대인들을 두고“사단의 회”라고 표현했을까요!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들은 몸에 할례를 받음으로 선택받은 백성의 표시를 지니고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이방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무엇보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기독교가 점점 커지자,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을 핍박했습니다. 동네나 도시에 있던 회당에서 기독교인들을 좇아냈습니다. 심지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을 저주하였습니다.

빌라델피아 교회도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회당에 들어 갈 수 없었습니다. 빌라델피아 교회가 큰 힘을 가진 교회가 아니었기에 유대인들의 핍박에 속수무책이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지켰고,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적은 능력의 교회였지만 예수님을 믿는 신앙 하나만은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빌라델피아 교회를 칭찬하시고 이들을 축복하십니다.

무엇보다, 그들을 핍박하던 유대인들이 빌라델피아 교인들 앞에 절하는 일이 생길 것이랍니다.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빌라델피아 교회를 붙잡고 계시고,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는지를 보여주시겠다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지금 자신들을 괴롭히고 핍박하는 유대인들이 장차 그들의 발 앞에 절할 날이 온다는 사실은 빌라델피아 교인들이 믿음을 지키는데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 힘든 것을 예수님께서 보상하신다는 약속입니다.

둘째로, 끝까지 신앙을 지켰기 때문에 훗날 세상이 당할 시험을 면제해준다는 약속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계명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신앙은 인내입니다. 지금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끝가지 참고 신앙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보상해 주십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면 기쁨으로 단을 거둘 날이 있기 마련입니다.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신다는 말씀대로 빌라델피아 교회는 비교적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끝까지 참으면서 주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우리의 삶이 형통할 것입니다. 시험의 때를 면해 주신다는 약속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임할 줄 믿습니다.

셋째로,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생명의 면류관을 상급으로 주신답니다. 빌라델피아 교인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은 유대인들의 비난과 핍박을 참게 만들어 주는 소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면류관을 빼앗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얻게 된 구원을 빼앗을 세력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열어놓으신 열린문은 그 어떤 세력도 닫을 수 없습니다.

넷째로, 신앙으로 끝까지 승리한 자들을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십니다. 당시 빌라델피아에는 많은 신전이 있었고, 신전에 기둥이 있어서 그곳에 성자들의 얼굴이나 이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성전의 기둥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빌라델피아 교인들을 기억하신다는 칭찬입니다. 세상의 신전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인 하나님 성전에서 안전하고 존귀하게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는 축복입니다. 이처럼 빌라델피아 교회는 칭찬과 축복만 받았습니다. 비록 적은 능력이었지만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결과입니다. 올 한 해,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된다는 기대와 소망을 갖고 끝까지 말씀 가운데 살아갑시다. 약속을 붙잡고 이기는 자의 신앙으로 나아갑시다. -河-

열린 문을 향하여

2011년 새해 첫 번째 주일을 맞고 있습니다. 새해가 되면 우리들의 마음도 소망과 기대로 가득 차게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365일이 어떻게 펼쳐질 지에 대한 기대요 결심입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몇 년을 돌아보니, 올 해처럼 홀가분하게 한 해를 시작한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하나님 안에서 갖는 기대도 크고 또한 늘 평안할 때 틈을 타는 사단의 유혹에 대한 경각심도 갖게 됩니다. 올해 교회의 표어대로 사랑으로 서로 섬기면서 가족 같은 교회를 세우기 원합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소아시아에 세워진 교회들이지만, 일곱 교회는 결국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들 각자가 성전이라고 하셨으니 일곱 교회의 모습은 우리들 자신의 모습입니다. 교회나 우리들 각 성도들이나 칭찬받을 것을 갖고 있습니다. 신앙을 지키고, 서로 섬기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것 자체가 칭찬받을 일입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과 교회를 섬긴 우리 서머나 식구들의 믿음은 말씀 속의 서머나 교회처럼 칭찬을 받기에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물론 완벽한 교회나 신앙은 없습니다. 교회든 우리들 각자이든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럽고 꾸지람을 받을만한 것들이 있습니다. 첫사랑을 잊어버린 경우,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서 거룩함을 상실한 경우, 죽은 믿음처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교회나 우리들의 삶과 신앙 속에 조금씩은 다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말씀에 비추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부끄럽거나 잘못된 것들은 깨닫는 대로 회개해야 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날마다 아니 순간마다 자신을 돌아보면서, 회개의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칭찬과 꾸지람에 이어서 하나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시는 약속이 나옵니다. 가장 귀한 약속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입니다.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하시고, 작은 일에 죽도록 충성한 성도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또한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것을 이김(승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기는 자에게 만나를 주시고 생명책과 흰 돌에 이름을 새겨 주십니다. 만국을 다스릴 권세와 새벽별을 주십니다.

지난주에 사데교회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요즘 세상이 사데교회처럼 죽은 신앙의 모습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사데교회에도 흰옷 입은 자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목하시고 소망을 두시고 귀하게 사용하실 주님의 백성들입니다. 올 한 해 동안 서머나 식구들 모두 흰옷 입은 자로, 남은 자들로 하나님 앞에 나가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제 오늘 살펴본 빌라델피아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함께 꾸지람을 받지 않았습니다. 빌라델피아 교회는 작은 자들이 모여 있었고 교회의 사역이 그리 화려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적은 능력을 갖고 최선을 다해서 주님의 일을 감당했던 훌륭한 교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빌라델피아 교회에 열린 문을 주시겠답니다. 문도 열려있고 그 문의 열쇠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갖고 계십니다. 빌라델피아 교회와 성도들에게 열린 문에 들어갈 특권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열어놓으신 문을 그 누구도 닫을 수 없습니다.

새해를 시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들에게도 새해의 문을 활짝 열어주 신 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열어주신 구원의 문, 신앙의 문, 사랑과 소망의 문으로 서머나 성도님들 모두 들어가시는 귀한 은혜와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河-

흰옷 입은 자

오늘은 우리 교회가 지키는 성탄감사주일이자 올 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올해는 경인년 범띠 해였습니다. 범처럼 포효하면서 힘차게 한 해를 시작했고, 그동안 계속되던 불경기가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에 2010년을 맞이했었는데 여전히 미국의 경제는 한 겨울입니다. 더 힘든 한 해였다는 생각이 들만큼 서머나 식구들의 삶이 힘겨웠습니다. 그래도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시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때로는 안타깝고, 감사하고, 목사로서 더욱 힘껏 돕지 못해서 죄송했습니다.

우리 교회 역시 올해의 시작이 아주 상쾌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성도님들께서 한 마음으로 교회를 지켜주셨기에 감사함으로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습니다. 비록 큰 부흥은 이루지는 못했어도 교회가 양적으로 조금씩 자라가고, 교회의 사역도 소박하지만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있습니다. 올바른 곳으로 방향을 잡고 한걸음씩 나가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무엇보다 올 한 해도 전도사님과 연로하신 권사님들께서 건강하게 지내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해가 갈수록 기운이 떨어지신다는 말씀을 하시지만, 전도사님과 모든 권사님들께서 아름답고 견고한 믿음으로 새해를 맞으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돌아보니 우리 서머나 식구들과 우리 교회는 힘은 들었어도 감사한 가운데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살아있었고, 말씀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어떻게든 온전한 신앙의 길로 나가려는 마음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해를 신앙 가운데 열심히 사신 서머나 식구들께 감사와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

올 한 해 동안 주변을 돌아보니 안타까운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경제가 여전히 어렵고, 한국에서는 연평도 사건이후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또한 인터넷을 비롯한 세상의 여론은 기독교에 대해서 많은 반감을 갖고 있는 듯합니다. 심지어 성탄절을 맞아서 “메리 크리스마스”대신에 “해피 할러데이”라는 인사가 여기저기서 들립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에 주인공이신 예수님은 없어지고, 세상의 여러 풍조와 상술이 자리 잡고 있는 듯해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사데교회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사데교회는 죽은 교회였습니다. 교회라는 이름은 있었지만 진정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없으니 형식과 껍데기만 있는 추한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회복시키려 했지만 이미 복음이 사라진 교회를 되살리기가 불가능할 정도였습니다. 사데 교회를 묵상하면서, 메리 크리스마스에서 해피 할러데이로 성탄절의 참뜻이 놀고, 먹고, 마시는 세상의 휴가철로 변질된 요즘 세상이 생각났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일그러지고 망가진 세상을 가슴에 품고 기도해야겠습니다. 하나님 통치와 주권이 세상에도 그대로 임하기를 기도해야겠습니다.

사데교회가 죽은 교회였지만 그곳에도 신실한 사람들은 남아 있었습니다. 이들 역시 지난 주 두아디라 교회의 남은 성도들처럼 “이기는 자”라는 칭찬을 받습니다. 사데교회가 거룩함을 상실하고 어두운 세상의 세력이 교회에 드리웠는데, 그곳에서 흰옷을 입은 성도들이 남아 있었다니 얼마나 귀한 모습입니까? 이들의 이름은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고, 예수님께서 이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친히 변호하신답니다. 흰옷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망가져도 서머나 성도님들은 흰 옷 입은 성도들로 이기자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시면서 새해를 맞으시길 기도하겠습니다.-河-

“새벽별을 주리라”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를 살펴보는 네 번째 시간입니다. 요한 계시록은 소아시아에 있던 일곱 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일곱 교회들은 명칭 그대로 각 지역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교회마다 장점이 있습니다. 동시에 책망 받을 일들도 갖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세상에 완벽한 교회는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의롭게 되었지만 여전히 죄를 짓는 부족한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 있기 때문이겠지요. 영적인 관점에서 보면,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영들이 성도들의 신앙을 흔들고 교회를 무너뜨리는데 혈안이 되어 있기에 온전한 교회를 세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세상에 완벽한 교회는 없습니다. 교회마다 흠이 있습니다. 티가 있고 주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시고 사도들이 사역하던 초대교회들도 문제가 있었는데, 그로부터 2천여 년이 지난 지금 완벽한 교회를 기대하는 것은 욕심일 것입니다. 대신에,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를 차례차례 살펴보면서, 교회의 부족함과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유혹의 세력들을 분별해 내고,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다함께 기도하며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오늘 살펴 본 두아디라 교회는 처음 보다 나중이 좋았습니다. 지난번에 살펴 본 에베소 교회는 첫사랑을 잃어버려서 책망을 받았는데, 두아디라 교회는 끝이 좋았으니 그들의 섬김과 사역이 훌륭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가 있던 두아디라는 우상숭배와 세상 풍습이 만연했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버가모 교회가 산위에 세워진 요새와 같은 교회였다면, 두아디라 교회는 분지에 세워졌습니다. 그만큼 세상의 풍습과 물품들이 쉽게 흘러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복음이 전해져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믿음과 사랑 위에 인내까지 겸비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는 두 얼굴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냈지만, 동시에 우상을 겸해서 섬겼습니다. 이세벨이라는 자칭 여선지자가 교회를 혼란시켰기 때문입니다. 이세벨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아합왕의 왕비 이름입니다. 구약 성경의 이세벨이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에 들어와서 바알과 우상숭배를 전했듯이, 두아디라 교회의 이세벨도 교회에 음란한 세상 문화와 우상숭배를 전했습니다. 이들이 행했던 죄는 행음과 우상숭배입니다. 행음은 쾌락을 좇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섬겨야 할 교회가 다른 신들을 겸해서 섬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가 하나님과 우상을 겸해서 섬기는 것을 두고 혼합주의라고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하나님과 세상을 겸해서 섬기는 혼합주의가 만연해 있습니다. 하나님과 돈을 겸해서 섬기는 물질주의, 하나님을 이용(?)해서 성공하려는 세상의 욕심과 이따금 들려오는 성적인 타락 등이 대표적인 혼합주의 신앙의 모습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하는 것은 힘이 듭니다. 반면에 물에 물 탄 듯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식으로 적당히 행하기는 쉽습니다. 요즘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이처럼 쉬운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두아디아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경고와 축복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커다란 환난이 임한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이 짓는 죄를 모두 알고 계시기 때문에“각 사람의 행위대로”심지어 자녀들까지 심판하시겠답니다. 반면에 하나님만을 섬기면서 신앙을 굳게 지킨 신실한 성도들을“이기는 자, 끝까지 주님의 일을 하는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에게 만국을 다스릴 권세와 새벽별을 주신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만국을 다스리고, 새벽별처럼 빛나는 영생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끝까지 신앙을 지켜서 새벽별처럼 빛나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