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아침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이 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거나 삼삼오오 모여서 허탈감을 달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몇 번씩 예언하셨지만, 제자들은 그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적어도 다시 살아나실 분이면 죽으실 때 무엇인가 암시를 주시거나,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는 기적이라도 베푸시고 돌아가셔야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모든 사람이 가야만 하는 죽음의 길을 가셨고 그것도 매우 그 비참하게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맥을 놓고 있을 때, 예수님을 죽인 대제사장과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냈습니다. 이들은 빌라도를 다시 찾아가서 적어도 사흘 동안은 무덤 문을 아주 굳게 지켜 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은 것은 아닙니다. 행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간 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세상을 혼란케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살아생전에 부활을 말씀하셨지만, 실제로 그것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안식일이 지나고 첫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습니다. 이들은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을 장사했을 때, 이미 예수님의 무덤을 확인해 두었습니다. 당시의 무덤은 동굴식이어서 무덤을 막아놓은 돌을 치우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고, 장사지낸 후에는 향품을 갖고 무덤을 찾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8장에서는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 큰 지진이 나고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서 예수님의 부활을 여인들에게 알려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때 여인들의 반응은 “무서움과 큰 기쁨”이었습니다. 복음서마다 조금씩 차이가 나지만, 마태복음에 의하면 무서움과 기쁨이 교차해있던 여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평강의 인사와 더불어 두려워말라고 안심시키십니다. 여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서 경배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제제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전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전하는 첫 번째 부활절 아침에 있었던 일입니다.

창세기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말씀으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일곱째 날에는 안식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서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주일(주님의 날)로 지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죄로 인해서 망가진 세상이 다시 재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부활로 인해서 창세기의 창조가 다시 회복되고 구원의 문이 새롭게 활짝 열렸습니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이브의 죄로 인해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는 것도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2010년 부활절을 맞아서 서머나 식구들 위에 부활의 소망이 삶속 깊이 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새벽 미명에 여인들을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서머나 식구들 마음속에도 찾아오실 줄 믿습니다. 우리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음껏 찬양하고 예배합시다.-河-

십자가 마음에 품고

예수님을 구주(救主)로 영접하고 죄와 죽음에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가장 큰 은혜와 위로는 십자가에서 시작됩니다.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자 가장 숭고한 정점(crux)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십자가는 로마 시대에 악한 죄를 저지른 죄수들을 죽이는 나무로 만든 형틀이었습니다. 당시는 로마가 세상을 지배하고 많은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었기에, 로마에 반역하거나 세상을 소란케 하는 죄인들은 십자가에 달아서 죽였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그리 신선한 이미지도 아니고, 희망의 이미지는 더군다나 아니었고, 죄와 죽음의 상징이었습니다. 속된 말로 저주와 재수 없음을 뜻하는 나무 형틀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아주 초라한 모습으로, 로마와 유대지도자들에게는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의 모습으로 그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구약성경 신명기 21장 23절 말씀대로 하면 저주를 한 몸에 받고 나무에 달려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런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악한 죄인들만 달리는 십자가에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사실 – 이것이 십자가의 아이러니요 역설입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고 가르쳐줍니다. 원래 우리가 십자가에 달려서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얻었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막힌 담이 헐렸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패배가 아닌“승리”라고 성경이 전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11에서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죽음과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두 가지 대조되는 단어가 사용됩니다.“죽음”과“생명”입니다. 헬라어 본문을 따라 말하면 “예수의 죽음”과“예수의 생명”이라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은 곧 생명이신 예수님의 부활과 연결됩니다. 죽으심은 살아나심의 한 과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들이 생명을 얻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을 그의 몸에 갖고 산다고 했습니다. 자신 때문에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항상 기억하고 그 안에서 은혜와 위로를 받는 다는 고백입니다.“짊어진다”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를 연상시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자신의 인생길을 갔습니다. 그래도 항상 기뻐했고 감사했습니다. 그 길이 생명의 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길이“예수의 생명”을 체험하는 과정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우리 자신을 십자가 아래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지고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길을 묵묵히 걷는 것입니다. 힘들 때도 있고, 손해 볼 때도 있고, 낙심과 절망이 밀려올 때도 있습니다. 그 길은 엄연히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길이 곧 “생명 되신 예수님”을 만나는 길이고,“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는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기쁨으로 십자가를 지고 걸어갑니다. 아니 십자가를 마음에 품고 주어진 인생길을 감사와 찬양가운데 걸어갑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위로를 받은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살아야 할 인생임을 다시금 느끼면서 십자가를 마음에 품고 앞으로 나갑니다. -河-

기쁨과 찬양으로

전도용 주보에 “우울증을 극복하려면”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습니다. 어느 때부터인지 우울증(depression)이라는 말을 자주 듣고, 우울증을 앓고 있던 유명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사회적인 이슈가 되기도 했습니다. 심각한 경우는 아니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금씩 우울증 증세를 경험한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예외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우리가 삶 속에서 겪는“우울함”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동안 살펴보았던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는 순간들(외로움, 두려움과 절망, 관계의 단절과 소외, 상실감)은 자칫 잘못하면 우울함으로 빠질 수 있는 길목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길목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면 새로운 차원의 삶이 시작됩니다. 반대로 그 순간에 하나님의 손길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문제 속으로 들어간다면 우울증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가장 많이 체험한 사람이 있다면‘다윗“일 겁니다. 다윗은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장차 이스라엘 왕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고 기름부음까지 받았습니다. 그리고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을 물리치는 큰 공적도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다윗에게 찾아온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이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달려듭니다. 다윗은 광야로 피신했습니다. 다윗에게 광야는 외로움과 두려움 그리고 절망이 밀려오는 곳이었습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입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섭리 가운데 광야의 어려움을 통과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죽이려던 사울 왕에 이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하지만 다윗에게 어려움은 계속해서 닥쳐옵니다. 부하의 아내인 밧세바를 범하는 사건을 기점으로 그의 삶에 먹구름이 드리웁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는 상실감, 친아들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밤중에 도피해야 하는 관계의 상실과 소외를 다윗이 경험합니다. 그런 점에서 다윗왕이야 말로 우울증에 빠질법한 위기의 삶을 살았던 인물입니다.

구약성경 시편에 처절한 한평생을 살았던 다윗의 삶과 심정이 매우 솔직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절규합니다. 자신이 지은 죄를 놓고 애통하며 회개합니다. 침상이 젖을 만큼 눈물을 흘립니다. 자신을 무너뜨리려는 원수들 앞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합니다. 피골이 상접하는 육체의 고통도 경험합니다. 그런데 이런 인생의 위기와 고통은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하는 길목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다윗을 향해서“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다윗은 시편 30편 11-12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슬픔이 춤이 되게 하시고 기쁨이 되게 하셨다고 선포합니다.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감사합니다. 우울증에 걸릴법한 갖가지 어려움을 경험한 다윗이지만, 그는 그 어려운 길목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했습니다. 그때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절망이 변하여 감사가 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제시한 우울증을 극복하는 비결 여섯 가지 가운데 두 가지가 “노래하라. 음악을 즐기라”“하나님께 찬양하고 감사하라”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이“기쁨의 찬송과 감사”임을 기억합시다. -河-

“상처입은 치유자”

4주에 걸쳐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고, 또한 하님께서는 우리를 친히 위로해 주시는 분임을 배웠습니다. 잃은 양 한 마리가 느끼는 외로움, 로뎀나무 밑의 엘리야가 처절하게 느꼈던 두려움과 절망,야곱의 첫 번째 아내인 레아가 느꼈던 관계의 단절과 소외,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하나뿐인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나인성 과부의 상실감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들도 삶의 여정에서 예외 없이 느끼는 것들입니다.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목자의 마음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기도를 드리는 엘리야에게 해야 할 일과 미래를 활짝 열어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레아가 느끼는 슬픔을 아시고 그에게 아들을 주시고 결국에는 그녀의 입에서“내가 이제는 주를 찬양하리이다”라고 고백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상실감에 한없이 슬퍼하는 나인성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고 아들을 살려주신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그동안 살펴본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임하는 것을 체험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릴 때 하나님의 위로가 임합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지쳐서 하나님께 나갈 의지나 힘도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로뎀나무 밑의 엘리야와 나인성 과부를 찾아오셨듯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힘을 주시고 살 길을 열어 주십니다.

이제 앞으로 4주 동안은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할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나”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가 많습니다. 그때 기독교인들은 이기적이고, 기독교가 배타적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받은 은혜를 세상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얻고 힘이 생겼다면, 슬픔 가운데 있는 사람들, 소외되고 외로운 이웃들, 상실감에 빠져서 절망가운데 있는 이웃들에게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위로자>로 다가가야 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인상처 입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은 헨리 나우웬의 책 제목과 일치합니다. 우리 모두는 상처를 갖고 삽니다. 그래서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합니다. 상처를 입었지만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했기에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그들을 위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온 몸에 상처를 입으셨습니다.”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실 만큼 외로우셨고 그 순간만큼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고 느끼실 만큼 소외감과 상실감에 휩싸이셨습니다. 물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이십니다. 동시에 그 상처로 우리를 치유하시고 위로하십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예수님이야말로 “상처 입은 치유자”이십니다.

이제 우리들도 세상에 치유자로 위로자로 나가야 합니다.“예수님처럼 해방을 선포하는 사람은 자신의 상처뿐 아니라 남의 상처도 돌보아야 합니다.”<헨리 나우웬>.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일로 부르셨다고 교훈합니다.“하나님께서 보내신 위로자”로 세상에 나가시는 서머나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 -河-

위로의 하나님 : 아픔을 싸매주심

지난주에는 위로의 하나님 세 번째 시간으로 야곱의 첫 번째 아내인 레아를 위로해 주신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버지의 뜻대로 야곱의 아내가 된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그리워하면서 살았습니다. 세 번째 아들을 낳기까지 레아의 마음을 오직 남편뿐이었습니다.

레아는 아들을 낳을 때 마다 아들의 이름을 르우벤(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시므온(주님께서 내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하소연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또 이렇게 아들을 주셨구나), 레위(내가 아들을 셋이나 낳았으니 이제는 남편도 별수 없이 나에게 단단히 매이겠지)라고 지으면서 남편의 사랑을 그리워합니다.

하지만 레아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네 번째 아들을 낳고 “유다(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했습니다. 오매불망 남편만을 바라보던 레아가 네 번째 유다를 낳고 “이제는”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레아를 불쌍히 여기셔서 아들을 주시는데, 레아는 그동안 하나님 안에서 위로를 얻기보다 아들 낳은 것을 갖고 남편의 마음을 얻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레아의 마음이 남편이 아니라 자신을 향할 때 까지 기다리시고 네 번째 아들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릴 때까지 한결같이 임한다는 사실을 레아를 통해서 배웁니다.

오늘 본문속의 주인공은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나인성에 사는 한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아들 하나를 바라보면서 남편 없이 살던 과부였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뿐인 아들이 죽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아들의 시신을 메고 동구 밖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과 많은 사람들은 나인성으로 들어가고 있었고, 마을 어귀에서 장례행렬과 마주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외아들을 잃은 과부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불쌍히 여기사”라고 예수님의 마음을 표현해 놓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여인을 보시고 마음이 아프셨다는 뜻입니다. 여인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실 만큼 측은하게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가가셔서 여인의 아들을 살려내십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우리의 슬픔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여인의 슬픔을 보시고, 그녀를 불쌍히 여기시면서 위로하시고 그녀의 아들을 살려주셨듯이, 예수님께서 우리들 마음속에도 그대로 임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위로해 주시고, 우리의 아픔을 치유해 주십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을 구약성경에서는“헤세드”라는 히브리어로 표현해 놓았습니다. 변함없고, 공평하고, 아주 애절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시편 103편 1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김”은 어머니가 자식을 품에 안고 보호하는 것과 같은 모성적인 사랑입니다.

우리 모두는 상처를 갖고 삽니다. 아주 오래전에 받은 상처부터 최근의 것까지, 무심코 한두 번 만난 사람들로 받은 상처부터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 받은 상처까지 우리들의 마음은 상처투성이입니다. 우리들의 상처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과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치료되고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서머나 식구들의 아픈 마음위에 포근하게 임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河-

위로의 하나님 : 지친 자에게 힘을 주심

하루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야고보만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산에 오르신 예수님의 얼굴이 갑자기 해처럼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옷도 빛처럼 희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양 옆에는 엘리야와 모세가 내려와서 예수님과 대화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화된 것을 두고 ‘변화산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인물입니다. 엘리야는 구약의 선지자를 대표합니다. 엘리야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엘리야가 살아서 다시 돌아 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바로 엘리야일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엘리야는 구약의 선지자 가운데 탁월한 인물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갈멜산에서 바알선지자 450명과 혼자서 대결했습니다. 바알선지자들이 아무리 불러도 그들의 신은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는 제단을 쌓고 송아지를 각을 떠서 올려놓고 그 위에 물을 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리는 불로 제물이 탔음을 증명해 보이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불로 응답하셔서 제물이 모두 탔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큰 능력을 체험했고 바알 선지자들을 모두 죽일 만큼 용맹했던 엘리야였지만 그에게도 위기가 닥쳐옵니다. 엘리야가 바알선지자들을 죽였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이 사신을 보내서 당장 내일 이맘때에 엘리야의 생명을 빼앗겠다는 통지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엘리야의 마음이 무너집니다. 혼자서 수백 명의 바알선지자들과 대결했던 엘리야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습니다.

엘리야는 결국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사환들과 함께 피신합니다. 브엘세바라는 곳에 이르러 사환들을 그곳에 머무르게 하고 혼자서 광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로뎀나무 아래 털썩 주저앉아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여호와여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나이다.”엘리야는 지금 지쳐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그는 매우 외롭습니다. 일종의 자격지심도 갖고 있고 열등감도 느낍니다. 갈멜산에서 바알선지자들과 싸웠다면, 엘리야는 지금 믿음이 모두 소진된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믿음이 없어지면, 세상 사람보다 더 연약해지는 법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엘리야를 먹이시고 일으키십니다. 또한 엘리야를 하나님의 산으로 인도해서 미세한 음성으로 그의 남은 사명을 재확인시켜 주십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하신 말씀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였습니다. 이세벨이 자신의 생명을 빼앗을 것이라는 소식에 엘리야는 믿음의 자리를 떠났습니다. 자신이 있을 자리가 아닌 광야로 도망해서 그곳에서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지쳤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소진되었기 때문입니다.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순간 엘리야를 찾으셨고, 그를 구해내셨습니다.

엘리야와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세상에서 고갈과 낙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도 우리를 찾아오셔서 위로해 주시고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할렐루야.-河-

위로의 하나님 : 잃은 자를 찾으심

영국의 존 스토트 목사님께서는 목사가 설교본문과 주제를 정할 때는 대개 세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첫째는 예전적 설교입니다. 이것은 설교말씀을 예배의 형식과 내용에 맞추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소개한 교회력에 맞춰서 정해진 본문을 설교한다면 그것이 예전적인 설교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가톨릭에의 신부들께서 하시는 강론 역시 예전적 설교에 가깝습니다.

둘째는, 목회적 설교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의 삶과 신앙에 맞는 말씀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모두 은혜롭고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지만, 목회를 하면서 꼭 필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요즘처럼 불경기가 계속되고 삶이 지치고 힘들 때는 성도들께 힘을 주는 격려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성도들이나 교회의 신앙이 느슨해지고 뒷걸음을 치고 있다면, 목회적으로 경각심을 불어넣는 설교를 준비할 수도 있습니다.

셋째는, 개인적 설교입니다. 목사가 개인적으로 은혜 받은 것을 성도들과 함께 나누는 말씀입니다. 목사부터 말씀을 붙잡고 씨름하고 거기서 말씀의 능력을 체험했을 때, 전하는 말씀에 은혜가 넘치고 마음 깊숙이 전달되기 마련입니다.

지난 1월 한 달 동안 시편 62편을 갖고 말씀을 전하면서 제가 먼저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세상의 어그러진 모습을 보면서 더욱 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위기의 인생길을 걷는 다윗을 보면서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어도 뒤죽박죽인 세상 속에서 어려움을 당할 수 있고 사람들의 멸시와 시기를 받을 수 있음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잠잠히 의지하는 신앙인의 힘과 끈기를 배웠습니다. 믿는 자들의 반석이요 산성이요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을 또한 만났습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눈을 감고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을 갖습니다. 제 자신의 내면을 살피고, 하늘의 평안과 안식을 누리는 귀한 순간들입니다.

이제 오늘부터 “위로의 하나님”이라는 주제로 연속해서 설교하려고 합니다. 성경본문을 모두 정하지는 못했고 몇 주 동안 하게 될지도 확실히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매주 주시는 대로 말씀을 차근차근 준비해서 전하려고 합니다. 제가 위로의 하나님이라는 주제를 정하게 된 것은, 새해 심방을 하면서 우리 성도님들의 삶이 쉽지 않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생업이 힘겹습니다. 가정과 자녀들을 위한 기도제목도 꽤 많습니다. 건강도 예전처럼 튼튼하지 못합니다. 때로는 신앙도 흔들립니다. 아니 이 어려운 불경기 가운데서도 호황과 은혜를 누리고 있지만, 여전히 자신의 내면에는 왠지 모를 불안함과 허전함이 있어서 종종 우울해 집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서머나 식구들만의 문제라기보다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 인생입니다.

오늘 함께 나눈 말씀의 예화처럼,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들에 나두고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동전 한 개를 찾으려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성경이 가르쳐주는 하나님을 잠잠히 묵상하면, 주일마다 찬양하는 “참 좋으신 하나님”을 온 몸으로 체험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사람 한 사람을 기억하시고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힘내십시오. -河-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마지막) : 믿음의 사람

시간이 이렇게 빠를 수가 있습니까? 한해를 시작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09년도 나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나이로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제가 이 정도인데 할머니 권사님들과 서머나 성도님들께서는 훨씬 빠르게 시간의 속도감을 느끼실 것 같습니다.

올 한해가 정말 빨리 지나갔다는 생각이 듭니다. 연초에는 예배 처소를 찾느라 정신없이 두 달여를 보냈고, 새로운 예배당으로 이전해 와서는 정착하고 이전감사 예배드리고 나니 벌써 여름이 닥쳤습니다. 매주 닥치는 일들을 놓고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서 씨름하면서 한 해가 저물었습니다. 앞으로는 시간이 더 빨리 지날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듣기 위해서 작은 일부터 최선을 다하고 무엇보다 하나님께 인정받도록 매사에 충성을 다해야겠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오늘까지 아홉 번에 걸쳐서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눴습니다.“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렙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고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빠르게 흘러가는 인생의 물결 속에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인생이 된다면 그야말로 가장 큰 행복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기준을 세상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세상에서 출세해서 명예를 얻거나 남들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갖는 등 소위 세상에서 난 사람이 되는 것을 두고 하나님께 쓰임 받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에서 멀리 떨어진 것입니다. 물론 세상에서 난사람이 됨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멋진 인생을 펼쳐 보이면 그만큼 신앙의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하나님께 쓰임 받은 길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은 도리어 세상에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예수님도 세상에 계시는 33년 동안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고, 급기야 자신이 뽑은 제자의 배신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교회가 온 세상으로 전파되는데 큰 역할을 했던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의 사도바울은 세상에서 전도유망한 젊은이요 이미 난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은 후 그의 인생은 굶주리고, 사람들에게 쫓기고, 감옥에 갇히는 등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고난 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께 쓰임 받은 예는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 꼭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행여나 은연중에라도 그렇게 생각하신 분들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면 오늘 생각을 바꾸시고 세상의 지위와 상관없이 쓰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은 우리들의 삶의 처소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매 순간 체험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감사가 넘치고, 작은 일에 충성하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감지하고, 끝까지 견디는 것이 곧 하나님께 쓰임 받는 모습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내면과 성품이 예수님을 닮아갈 때 그 자체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처지가 어떠하든지 우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와 복음이 전파된다면 하나님께 가장 귀하게 쓰임 받는 것입니다. 그때 필요한 마지막 덕목이 바로“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계시다는 “존재에 대한 확신”,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상주신다는 “열매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음껏 쓰십니다. 믿음의 사람은 담대합니다. 감사가 넘칩니다. 성품과 삶 속에서 예수님이 드러납니다. 서머나 식구들과 우리의 자녀들 그리고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 온전히 쓰임받기를 기도합시다.-河-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 : 무릎꿇음

오늘은 2009년도 성탄주일입니다. 성탄절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자신을 비워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자신을 죽기까지 낮추시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심으로 온 세상의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성탄절은 요즘 세상에서 말하듯이 연말에 찾아오는 휴일(holiday)이 아닙니다. 싼 값에 쇼핑을 즐기는 날도 아닙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금 마음 깊은 곳에 모시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살기로 결심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본래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33년을 우리와 똑같은 인생을 경험하시면서 지내셨습니다. 때로는 피곤하셔서 뱃전에 몸을 기대고 주무셨습니다. 불쌍한 사람들을 바라보시며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열두 명의 제자들을 불러서 훈련시키셨지만 그 가운데 한 명으로부터 배신감도 맛보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는 죽음 앞에서 심히 괴로워하셨고 육신의 괴로움에 절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우리와 똑같은 인생을 사신 것을 두고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같이 기록했습니다.:“그는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을 받은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히2:18, 표준새번역).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이처럼 여러 가지 고난과 핍박을 받으셨지만, 예수님은 한 번도 세상에 무릎 꿇지 않으시고 꿋꿋하게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그 원동력이 어디에 있었을까요? 신약성경 가운데 누가복음은 그 이유를 예수님의 기도에서 찾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누가복음 은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특별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기도하셨습니다 (눅3:21-22). 열두 명의 제자들을 세우시기 직전에 예수님은 온 밤을 새우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눅 6:12-13).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셨지만 그는 본래 하나님과 본체셨습니다. 한 번은 사랑하는 제자들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이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온 몸에 광채가 나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신 것입니다. 그때도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눅9:28-30).

무엇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만큼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온 인류의 죄를 한 몸에 지고 가시는 길이 결코 쉽지 않으셨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 잔을 자신에게서 치워달라고 하실 정도로 고뇌하시면서 솔직한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면서 자신을 뜻을 내려놓으십니다(눅22:39-46). 마지막으로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도의 백미는 십자가에 위에서 드리신 용서의 기도입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위해서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4:34).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서 기도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지 않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세상에서 가진 것이 없고 많이 부족해도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사람을 쓰셔서 하나님의 능력을 세상에 드러내십니다. 할렐루야! -河-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 : 충성됨

한 해의 마지막달을 맞이하면 왠지 마음이 숙연해 집니다. 지난날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밀려옵니다. 그렇지만 이미 지나간 세월이기에 지금 와서 후회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새해를 두고 인생에서 최고의 해로 만들겠다고 다짐하고 기대하지만 솔직히 불안한 것도 사실입니다. 이처럼 우리들 인생은 지난날들에 대한 아쉬움과 다가올 날들에 대한 불안한 기대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때로는 방향을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면서 시간을 허비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가장 집중하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시점은 바로 현재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나중에 후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순간을 소홀히 여기면 우리들의 앞길도 평탄치 않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현재’가 가장 중요합니다. 영어에서 현재는 present입니다. 이 단어는 동시에‘선물’이라는 뜻도 갖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현재야 말로 우리들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잘 활용하고 누리면 인생 전체가 행복해 질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들에게 주어진 현재의 시간을 행복하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살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현재에 충실(faithful)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충성”또는“신실”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공통적으로‘피스토스“라는 말입니다. 헬라어 피스토스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믿음직스럽다. 충실하다. 의지할 만하다. 실패하지 않는다.”주어진 삶에 순간순간 충실한다면 결국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덕을 끼치는 믿음직스럽고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겠지요!

오늘 본문에서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세 명의 종들에게 재산을 나눠주었습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열심히 노력해서 각자 갑절의 이익을 남겼습니다. 반면에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돈을 땅에 묻어 놓았습니다. 훗날 주인이 돌아와서 종들을 부릅니다. 그리고 자신이 맡겨놓은 돈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묻습니다. 갑절의 이익을 남긴 종들에게는 최고의 칭찬을 합니다.:“잘하였도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반면에 한 달란트를 땅에 묻은 종을 두고“악하고 게으른 종/무익한 종”이라고 야단칩니다. 그리고 어두운 밖에 내어 쫓으라고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충성된 사람을 쓰십니다. 그것도 작은 일 즉 현재 주어진 일에 충성된 사람을 쓰십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였을 때 더 큰 일도 맡기시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잔치자리에 초청하십니다. 우리들의 시간은 우리들 것이 아닙니다. 신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들의 삶 전체가 우리들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은 하나님의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기들일 뿐입니다. 본문에서 주인이 다시 와서 종들을 불러서 회계하였듯이, 우리들 역시 하나님 앞에 갔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인생을 회계하실 것입니다. 그때“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주어진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믿음직스러운 서머나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도 믿을만하다는 평판을 듣는 빛과 소금된 주의 백성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높이시고 멋지게 사용하실 것입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