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하심

고대 이스라엘에서 우기인 겨울과 봄에는 양들을 집 근처의 목초지에서 목양하였답니다. 그때는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내리는 계절이기에 조금만 나가도 푸른 초장이 있었고 쉴만한 물가가 있어서 목자들은 양들을 그리고 인도했습니다. 하지만 건기가 시작되는 여름과 가을철에는 양들을 이끌고 고산지대를 다녀야 했습니다.

양무리를 이끌고 산악지대를 오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양들에게는 산을 오르는 것보다 내려오면서 골짜기를 지나는 것이 더 힘들고 위험했습니다. 갑자기 돌풍이 불기도 하고, 짐승들도 출몰했습니다. 무엇보다 동작이 둔하고 멀리 보지 못하는 양들이 골짜기를 내려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목자의 인도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길을 가는 양들은 목숨을 잃기 쉬웠습니다. 그래서 목자는 자신의 양을 한 마리 한 마리 세심하게 보호하고 돌봐야했습니다.

원래 목동이었던 다윗은 이러한 상황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시편 23편 4절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인생 가운데서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사울왕에게 쫓겨서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겼습니다. 신하의 아내인 밧세바를 범한 순간도 영적으로 그에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였습니다.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서 밤중에 도주할 때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났습니다. 다윗은 그때마다 자신이 양과 함께 거닐었던 골짜기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양들을 보호해 주었던 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간구했을 것입니다. 다윗은 결국 시편 23편 4절에서“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는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시편 23편 4절 말씀의 다윗처럼 우리들 역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가 있습니다. 질병으로, 삶의 환난으로, 자신과 씨름을 하면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에도 곁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또한 죽을 정도로 위태롭고 힘겨운 순간에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경험해야 합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는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는 통로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지만 매일같이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만을 다닐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그곳은 종전에 설교했듯이 우리가 가게 될 천국입니다. 아니면 이 세상에서 잠깐씩 맛보는 세상 속의 천국이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거룩한 쉼의 시간입니다.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과 만나는 큐티시간이 바로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 역시 타락한 세상 속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거닐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때에 다윗처럼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위로하심을 느낄 수 있다면 그곳이 도리어 은혜의 자리로 변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처럼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할렐루야!-河-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맨 처음 행하신 기적이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가나라는 동네의 한 혼인잔치에 참석하셨습니다. 잔치가 한창 진행 중인데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부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명령대로 물을 붓고 그것을 떠서 손님들에게 갖다 주었을 때 놀랍게도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된 기적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준 요한복음에 기록된 일곱 가지 기적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키워드는“변화”입니다.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는 것은 인간의 생각이나 상식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물과 포도주는 성분이 전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를 두고“변화의 종교”라고 합니다.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분쟁이 있는 곳에 화해가, 아픔이 있는 곳에 치유가,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이 생깁니다. 우리 안에 복음이 들어오면 우리들 역시 변화를 경험합니다. 생각이 변하고, 행동이 변하고, 삶 자체가 변화됩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로마서 1장 16절에서“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변화를 일어나게 하는 동력입니다.

시편 23편 3절에서“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라는 말씀이 바로 복음 안에서 경험하는 변화를 뜻합니다. 여기서“소생시키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돌아오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가리킵니다. 모든 삶의 스타일을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으로 돌려놓는 것입니다. 여기서 소생케된다는 것을 거듭남으로 이해하면 이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되는 한 순간의 경험입니다.

하지만 소생케되는 것은 매일 매일 우리들 안에서 일어나야 하는 계속적인 과정입니다. 이것은 매일 매일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로 돌려놓는 훈련입니다. 아직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지 않으셨다면, 사순절을 보내면서 예수님을 여러분 인생의 구주로 맞아들이십시오. 여러분의 영혼과 삶이 소성케 될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셨다면 매일같이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생케하시도록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어려워도 매일의 삶속에서 소생케하시는 은혜만 체험할 수 있다면 행복하실 겁니다. 자유하실 겁니다. 복음의 능력과 그 안에서 변화를 경험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소생케된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하는 은혜는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거시고 바른 길,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심에 더해서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면 그 삶은 하늘을 향하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바른 삶일 것입니다.-河-

쉴만한 물가

염소는 자기 스스로 독립해서 살아갈 수 있는 반면에 양은 목자가 꼭 필요합니다. 신약성경에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오는데 여기서 염소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기 멋대로 사는 인생을 가리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염소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우리 마음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혼자 힘으로 살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전형적인 염소의 삶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은 이후로 우리의 삶은 도리어 하나님께 예속되었습니다. 우리 중심의 삶에서 하나님께 의존하는 삶으로 바뀐 것입니다. 양이 목자의 인도와 보호를 받아야하듯이 우리들 역시 하나님의 인도하심 없이는 살수 없는 존재로 바뀐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시편 23편 1절의 고백은 여호와 하나님을 목자삼고 자신이 그의 양임을 인정한 다윗의 신앙고백입니다. 때로는 염소처럼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집니다. 그것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서는 자기 자신을 넘을 수가 없습니다. 말 그대로 뛰어봐야 벼룩인 셈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목자삼고 살면 삶의 범위가 하나님의 지경까지 확대됩니다. 거기서“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의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자족(自足)의 표현이자 가능성의 고백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시편 23:2절에는 여호와를 목자삼고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사는 주님의 백성들이 누리는 은혜가 나옵니다. 첫째로,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시는 은혜입니다. 푸른 초장은 양들에게 필수적인 먹을거리입니다. 둘째로, 쉴만한 물가는 마실 것을 가리킵니다. 양들은 한 번에 많은 물을 마십니다. 선한목자는 양들이 충분히 마실 수 있는 물가를 알고 있고 양들을 그곳으로 인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는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는 바로 우리가 이다음 가게 될 천국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나라는 생명수가 넘치는 곳입니다. 푸른 초장처럼 물댄 동산과 같은 곳이 우리가 가서 영원히 살게 될 하나님 나라입니다. 할렐루야!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 나라를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천국의 모델하우스이기 때문이고, 예수님을 믿는 순간 천국 시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와 같은 하늘나라의 삶은 첫째로, 교회 안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말씀의 꼴을 공급해 주고 예배를 통해서 생명수 샘물가의 편안한 쉼을 허락합니다. 또한 가정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체험해야 합니다. 가정은 우리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공급해주는 푸른 초장과 같은 곳입니다. 가정은 천국과 같은 쉼을 공급해 주는 안식처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들 마음이 바로 푸른 초장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속에 생수의 강이 흘러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우리 마음속에 임하기 때문입니다.-河-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지난주에는 신앙의 토대인 믿음, 소망,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믿음에는 행함과 역사가, 사랑에는 수고가, 소망에는 인내가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덕목들입니다. 우리교회 안에 그리고 모든 성도님들의 신앙과 삶 속에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항상 있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교회에 와서 어떤 말씀을 전해야 할 지 깊이 생각했습니다. 전하고 싶은 말씀이 많이 있었습니다. 아직 제가 젊고 열정이 있어서인지 교회의 부흥을 위한 말씀을 힘차게 전하고 싶었고, 새로운 곳에 왔으니 교회를 확실히 바꿔보고 싶은 마음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서두르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지난 2년 동안 한 순간도 긴장을 놓지 않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여기서 무리하게 앞으로 나가는 것은 사람의 생각이요 욕심이었습니다. 지금은 심호흡을 하면서 잠시 쉬어갈 시간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차분하게 미래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앞으로 나가길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와 성도님들께 아주 따뜻한 은혜의 말씀을 전하길 원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성도님들의 상한 마음을 말씀으로 어루만져주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때 제일 먼저 떠오른 말씀이 시편23편이었습니다.

시편 23편은 목자 되신 하나님의 세심하신 인도로 시작됩니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인생의 어려움도 들어있습니다. 사실 우리네 인생은 푸른 초장만 거닐 수 없습니다. 인생의 폭풍은 수시로 몰려옵니다. 때로는 죽음의 순간을 오갈 수도 있습니다. 그때에도 하나님께서 똑같이 인도하시고 함께하심을 다윗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고백을 하도록 우리를 인도하시고 훈련시키십니다.

실제로 양은 매우 근시안이라고 합니다. 눈 앞 1피트정도밖에 볼 수 없기에 떼를 지어 다닌답니다. 그때 맨 앞에 서서 양들을 인도하는 목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어디 양들만 그렇습니까? 우리들 역시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양들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우리들도 마음대로 인생길을 갈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다가 엄한 곳에 가서 망가지고 손해를 볼 때도 많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인생길을 인도해 줄 선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들의 선한 목자가 되신다고 깨우쳐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인생길을 인도해주시니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 역시 다윗처럼“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河-

믿음, 사랑, 소망

기독교 신앙을 표현하는 말이 꽤 많습니다. 그 가운데 믿음 사랑 소망은 기독교 신앙의 세 기둥이라고 말할 정도로 우리의 신앙을 세워주는 토대입니다. 이를 두고 보른캄이라는 신학자는 “믿음 소망 사랑의 삼주덕(三主德)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진수”라고 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 있을 때에 비로소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로 이루어진 신앙 공동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믿음의 역사”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믿음에는 행함이 뒤따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입으로만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반쪽믿음입니다. 믿음에 행함이 동반될 때 온전한 믿음이 됩니다. 또한 “믿음의 역사“라는 말 속에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다는 의미도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믿음의 역사를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음으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과 연결되면 믿음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또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진실로 믿으면 사랑을 나누고 싶어집니다. 받은 사랑이 너무 많아서 그 사랑을 나눠주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 역시 수고가 필요합니다. 올바른 사랑은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희생과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수고입니다. 여기서 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코포스”입니다. 저는 이 단어를 외울 때 발음을 생각해서 “코피가 날 만큼 열심히 일하는 수고”라고 연상해서 외웠습니다. 한 평생 살면서 코피가 날 만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 자체가 행복입니다.

믿음과 사랑이 현재 우리들이 가져야할 신앙의 태도라면, 소망은 우리의 신앙을 저 멀리 미래까지 연장시켜줍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소망은 특별히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서를 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를 고대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지 불과 20여년 후에 기록된 말씀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신앙을 유지하는 것이 힘겨워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를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소망에는 늘 인내가 필요합니다.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 –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 세 가지를 마음에 품고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이것을 두고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칭찬했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가 새로운 처소에서 첫 예배를 드리는 뜻 깊은 날입니다. 우리들은 그동안 온전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힘든 시간을 견뎌냈습니다. 이제 더욱 마음을 합해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 그리고 소망의 인내가 넘치는 교회를 세워갑시다. -河-

하나님을 닮아가라

발가락이 닮았네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아내가 아기를 낳았는데 아무래도 자신의 아기 같지가 않습니다. 주인공은 고민을 하다가 아기의 발가락이 자신과 닮았다고 말하는 가슴 아픈 줄거리의 소설입니다.“닮았다”는 것은 서로 유사한 것을 넘어서 어떤 특별한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집 두 아들 가운데 큰 아이는 할머니와 엄마를 닮았습니다. 둘째는 저를 닮았습니다. 어르신들 말대로 씨가 같아서 그렇고 요즘 말로 유전자가 동일해서 비슷한 외모와 성격을 갖고 태어난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습니다. 그 형상이 죄를 지으면서 부서졌지만, 예수님을 믿음으로 다시 회복되었으니 우리 가운데 어디엔가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있습니다. 레위기 11장 4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찌어다”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은 구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은 어디에 있어도 무엇을 해도 구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닮으라는 말씀이 생소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소위 성직자들이나 특별한 직책을 맡고 있는 분들이 할 일이지 보통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아니 솔직히 하나님을 닮아서 별로 이익이 생길 것 같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닮는다고 돈이 벌리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에서 출세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적당히 세상과 섞여서 살아가면 이익이 생길 것 같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닮는 것은 세상의 복이나 명예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닮아서 세상에서 손해를 볼 수도 있고, 세상 사람들에게 핀잔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닮아 가야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자녀가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닮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을 닮는 것은 영생의 삶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거룩한 백성들이 모인 곳입니다. 이 세상에서 거룩을 훈련하고, 마음과 삶 속에 거룩을 새겨놓으면 이다음 하나님 나라에 가서 거룩한 백성으로 멋지게 살 수 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제 아들을 보고 사람들이 하목사 아들인 것 같다고 말하듯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닮으면 세상 사람들이 금방 우리를 알아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모습, 행동, 마음과 삶 속에서 하나님을 생각해 내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요즘은 교회도 많고 교인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막상 찾아보면 하나님을 속 빼닮은 그리스도인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가 사람들의 입에 부정적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서머나 식구들은 어디에 있어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금방 표시가 날 만큼 하나님을 닮아 가시길 기도하겠습니다.-河-

마음에 새겨진 말씀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이후에도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그의 백성들을 축복하셨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구약성경의 처음 다섯 권을 모세오경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토라”라고 하는데“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신약성경의 요한복음은 창세기와 똑같이“태초에”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또 다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나중에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처럼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 자신을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신명기 6장 4-9절의 쉐마 역시 하나님 말씀을 들으라는 명령입니다.“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명령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을 듣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귀로 들은 말씀이 마음 판에 새겨져야 합니다.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해야 합니다. 말씀을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내면이 말씀으로 가득차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듣는 것을 넘어서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암송하고, 자꾸만 되새길 때 말씀이 능력으로 우리 가운데 임합니다.

그 다음에는 마음에 새긴 말씀을 밖으로 표현해야합니다. 제일 먼저 가정 안에서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요즘은 가정성경공부가 많이 약해져 있습니다. 가족끼리 모여서 성경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것은 매우 생소합니다. 하지만 말씀 교육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정에서 성경을 공부하면서 자란 자녀들은 훗날 큰 인물이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처음에는 어색할 수도 있지만 가족끼리 성경을 공부하는 시간을 만들어봅시다. 아침에 하나님께 받은 큐티 말씀을 저녁시간에 식구들끼리 도란도란 둘러앉아서 나누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자녀들과 함께 잠언이나 시편말씀을 돌아가면서 읽기만 해도 가정 속에 말씀이 살아 역사할 것입니다.

말씀은 사회 속으로 퍼져야 합니다. 길을 가거나 일터에서도 말씀은 살아있어야 합니다. 마음 판에 새긴 하나님의 말씀을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생각해내고, 최선을 다해서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쉐마의 신앙은 변명이나 핑계대지 않습니다. 그대로 지켜 행할 뿐입니다. 또한 마음 판에 새긴 말씀은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그것을 손목이나 미간에 부치고, 집의 문설주와 문에 붙여 놓고 살라고 교훈합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라는 것입니다. 시시때때로 말씀을 기억해내고 묵상하라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합니다. 말씀을 따라 살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합니다.

다음 한 주간은 서머나 식구들 모두 하루도 빼놓지 마시고 큐티를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매일매일 주시는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고,` 그 말씀을 붙잡고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능력이 그대로 임할 줄 믿습니다. -河-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본문인 신명기 6:4-9을 쉐마라고 부릅니다. 쉐마라는 말은 오늘 본문의 첫 단어가 히브리어“쉐마”로 시작된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히브리어 쉐마는 “들으라(listen)”는 뜻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들으라는 것일까요? 그것은 제일 먼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들으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고, 우리를 인도하셨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을 우리가“주님”이라고 부르고“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오직 한분뿐이십니다. 여기서 유일신 신앙이 나왔습니다. 우리들은 오직 한분뿐인 하나님을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믿음은 하나님께 집중되어야 하지 세상의 어떤 것을 하나님 대신 믿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곧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오직 한 분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심을 믿는 것이 쉐마의 첫 번째 교훈입니다.

둘째로 쉐마의 구체적인 내용이 6장 5절에 나옵니다:“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쉐마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으로 집약됩니다. 사랑하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아하브”에는 여러 가지 뜻이 들어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말은“미워하다”의 반대말로 사람들끼리 서로 아끼고 사랑할 때 사용합니다.

또한 아하브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임한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하브에는“음식 등을 맛보다”라는 뜻도 들어있습니다. 사랑은 체험해야 하고 상대방이 맛볼 수 있을 만큼 느껴져야 합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언약을 맺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한분뿐인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마음을 다해서, 성품을 다해서, 그리고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쉐마는 이처럼 우리의 모든 것을 드려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느끼실 정도록 사랑하라는 교훈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진실되고 뜨겁게 사랑할 때, 도리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임하게 됩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주셨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향해서“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더불어 나눈 사랑을 세상 속에서 실천합니다. 여기까지 나간다면 세상 사람들이 저절로 하나님께 돌아올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과 신앙생활의 클라이맥스입니다. -河-

여호와를 앙망하라

신앙에는 종종 의심과 회의가 따라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도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생활이 그렇게 좋아진 것 같지도 않습니다. 산적한 문제가 풀리지도 않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과 신앙에 대해서 회의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조금 심해지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돌보지 않으시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이사야서 40장 속의 이스라엘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를 잃어버렸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무너졌습니다. 현재는 포로의 신분으로 남의 나라에서 종살이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온 땅에 그 이름이 창대케 되고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커다란 환난이 닥친 것입니다. 어려움이 닥치고 기도해도 앞길이 활짝 열리지 않는 암담한 현실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의심했고 자신들의 신앙을 놓고 회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사야서 40장 26절은“야곱아!”로 시작됩니다. 야곱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만은 버리지 않았던 창세기의 인물입니다. 그는 밤새도록 하나님과 씨름해서“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 많은 성경의 인물들 가운데“야곱”을 언급하면서 회의와 낙심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전혀 돌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에게 아무런 빛도 비추지 않았습니다. 암담한 포로의 시대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귀한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입니다. 현재는 이스라엘이 어려움 속에 있지만, 그것은 세상의 시계를 통해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영원이라는 하나님의 시계를 갖고 현실을 보면 현재의 어려움은 순간에 지나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신 명철이 한이 없으신 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실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야곱을 버리지 않으셨듯이 자신의 택한 백성을 절대로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은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입니다. 앙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 가운데 기다리는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모하는 것입니다. 비록 마음에는 회의와 의심이 생겨도 그의 영혼은 끝까지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때 임하는 은혜는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가고 달음박질해도 지치지 않는“새 힘”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앙망할 때 임하는 새로운 힘으로 작금의 어려움을 능히 이겨내시는 서머나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河-

새해 새 마음 : 기도

새해 새 마음이라는 주제로 연속설교를 하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첫 번째 주일에는“결심”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이 그랬듯이 새해를 맞는 우리들 역시 하나님 앞에서 꼭 지키고 싶은 것을 결심하고 뜻을 정하고 살자고 했습니다. 작심삼일이지만 3일마다 100번만 결심하면 일 년 내내 뜻을 정한 것을 지킬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서머나 식구들 모두 연초에 세운 결심을 지금까지 지키고 계실 줄 믿습니다.

두 번째 주일에는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보면서, 우리들 역시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면 놀라운“변화”를 체험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는 것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생기는 완전한 변화를 가리킵니다. 지난주일 설교의 주제는“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기쁨이 샘솟는 샘물을 마음속에 품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사하고 찬송하고 꿈을 갖고 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기쁨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두신 기쁨은 추수 때의 풍성함보다 더하다고 했으니 세상이 주는 기쁨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영생의 기쁨입니다.

어느 덧 새해의 첫 달이 지나고 있습니다.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 앞에서 세월을 아끼라는 하나님 말씀이 다시 한 번 새롭게 다가옵니다. 또한 아무리 굳게 결심을 해도 우리들은 질그릇처럼 연약한 존재이기에 자꾸만 넘어지고 마음도 무너집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일입니다. 세상의 문이 모두 닫혀도 하늘문은 열려있습니다. 그곳에 들어가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 힘을 덧입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요일5:14절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신감과 담대함을 가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시편107:10-22절속에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응답이 금방 오지 않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그 어려움을 조금 더 연장시켜주시는 듯합니다.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훈련이요 연단의 기간이지만 무척 참기 힘든 순간입니다. 이처럼 모든 가능성이 사라지고 자신의 생명마저 위태로울 때 시편기자는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외쳐 기도한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최고의 특권입니다.

2009년 한 해의 경제전망이 매우 어둡습니다. 우리들 개인의 삶도 만만치 않게 힘들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기도로 살 때입니다. 무릎 꿇고 하나님 앞에 외쳐 부르짖으면서 우리 앞에 닥친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살 때입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