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새 마음 : 기쁨

기쁨을 국어사전에서는“즐거운 마음이나 느낌”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기쁨에 해당하는 영어 JOY를 웹스터 사전에서는“평안하거나 좋은 행운이 찾아왔거나 어떤 일에 성공했을 때 또는 어떤 사람이 자기가 바라는 일을 성취했을 때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이라고 뜻을 풀이해 놓았습니다. 이처럼 기쁨은 우리 안에서 생기는 감정입니다. 웹스터 사전이 정의했듯이 어떤 일이 잘되거나 뜻한 바를 이루었을 때 기쁨이 찾아옵니다. 힐티라는 사상가는 “무릇 마음에 있어서 가장 건강한 것은 순수한 기쁨이다. 가장 나쁜 것은 계속되는 절망적인 슬픔이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에도 기쁨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에는“항상 기뻐하라(Be joyful always)”고 교훈할 정도입니다. 사실 항상 기뻐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이 그만큼 녹록치 않고 어려움이 늘 닥쳐오기 때문입니다. 인생길이 늘 평탄한 것은 아닙니다. 언제나 행운이 따라오지도 않습니다. 마음에 품은 뜻을 이루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그렇다보니 웹스터 사전이 정의하는 것처럼 기쁜 감정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요즘처럼 불경기에는 기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더욱 어렵지요. 기쁨보다 염려와 근심이 앞서고 때로는 우울함과 슬픔이 밀려오기도 합니다.

이처럼 기쁨을 외부에서 찾으면 항상 기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경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기쁨을 안에서 찾으라는 것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 기쁨을 만들어내는‘샘’을 가지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릇에 담겨진 물은 자꾸만 채워놓아야 합니다. 오래된 물은 변질됩니다. 하지만 깊은 산속 옹달샘은 마르지 않습니다. 늘 신선하고 맑은 물이 자꾸만 샘솟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이처럼 안에서 샘솟는 기쁨입니다. 따라서 외부의 환경이 어떻게 변화되어도, 심지어 마음이 조변석개로 변해도 기쁨의 샘을 간직하고 있으면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활기차게 인생을 개척해 갈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사람만이 누리는 하늘의 기쁨입니다.

“새해 새 마음”이라는 연속설교 세 번째 시간에“기쁨”이라는 제목을 택했습니다. 새해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을 마음에 품고 샘솟는 기쁨을 누리면서 살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 기쁨을 누리는 세 가지 비결이 있습니다. 첫째는,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는, 찬양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두신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꿈을 꾸는 사람은 기쁨을 잃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마음에 품고 사는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세상이 어려워도 하늘을 보면서 씩-웃고 기쁨으로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河-

새해 새 마음 : 변화

새해의 두 번째 주일입니다. 시간이 참 빠르게 흐르지요? 이렇게 올 한해도 화살처럼 훌쩍 지나갈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요한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기적을 행하신 사건입니다. 가나는 “갈대밭”이라는 뜻을 갖고 있고 예수님께서 자라신 나사렛 근처에 있던 동네였습니다. 예수님은 물론 제자들과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잔치에 초대된 것을 보면, 결혼식이 열리던 집은 예수님의 친척이거나 매우 친한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특히, 마리아는 그 집의 종들을 모두 알고 있고 종들은 마리아의 말을 잘 듣는 것을 보아도 두 가족이 매우 친근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결혼식은 신랑 집에서 열렸고 가족은 물론 온 동네의 축제였습니다. 축하연에 빠져서는 안 되는 음식이 바로 포도주였습니다. 또한 결혼식은 길게는 일주일동안 열렸기 때문에 주최 측에서는 음식을 풍성하게 마련해야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이것을 눈치 챈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을 찾아서 포도주가 없다고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종들에게 여섯 개의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명령합니다. 물이 모두 채워졌을 때, 예수님께서 종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이제는 떠서 연회장에 갖다 주라.”그랬더니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결혼식장은 훨씬 맛이 좋은 포도주에 기쁨이 넘쳤습니다.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된 기적은 여러 가지를 시사합니다. 2장 1절의“사흘되던 날“은 예수님께서 사흘 후에 부활하신 것을 연상시킵니다. 유대인들이 손을 씻던 항아리가 6개 있었다는 것은 완전수인 7에서 하나가 부족한 숫자입니다. 유대인의 율법과 신앙이 불완전함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항아리에 물을 가득 부음으로 율법으로는 부족했던 구원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완성되었습니다. 물이 변해서 포도주가 된 것은 또한 새로운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가르쳐줍니다. 예수님의 시대는 물처럼 밋밋한 시대가 아니라 포도주가 있는 기쁨과 축제의 시대입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사건은 엄청난 변화입니다. 물은 무색무취입니다. 게다가 항아리에는 먹는 물이 아니라 손을 씻는 물이 담겨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켰습니다. 포도주에는 색깔, 맛, 향기가 고루 들어있습니다. 손을 씻는 항아리의 물이 잔치에 쓰이는 포도주로 변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고 그 말씀에 순종했을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도 예수님의 말씀이 임하면 물과 같은 인생이 포도주와 같은 인생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향기롭고 맛깔스러운 인생이 됩니다. 값어치로 보아도 물과 포도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올 한해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사건이 서머나 식구들의 성품과 인생 속에 임하기를 기도하겠습니다.-河-

새해 새 마음 : 결심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는 말 그대로 새로운 해(new year)입니다. 아무런 글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가 우리 앞에 놓여있는 셈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365일이라는 백지수표를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2009년이라는 새해의 백지 위에 어떤 인생의 그림을 그려갈 지 계획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새해결심을 합니다.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하겠다는 결심, 좋지 않은 습관을 정리하겠다는 결심, 자기개발을 위해서 필요한 것을 배우겠다는 결심,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성경을 일독하겠다는 결심 등등 새해의 결심은 각자의 꿈과 처지에 따라서 제각각입니다.

하지만“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고 했습니다. 마음먹고 결심한 것을 기껏해야 3일 동안만 유지한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우리들의 의지가 약하다는 것이겠지요. 어떤 분들은 3일 만에 결심한 것을 잊어버리고 살려면 아예 새해결심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결심을 지키지 못했을 때 도리어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랍니다. 아무리 그래도 새해를 맞아서 한 두지씩 마음에 각오를 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듯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다니엘은 당시의 강대국인 바벨론이 지배하던 시대에 살았습니다. 바벨론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똑똑하고 잘생긴 소년들을 선발해서 왕궁으로 데려갔습니다. 왕을 보필 할 현지 전문가들로 양성하기 위함입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다니엘이었습니다. 다니엘의 이름은 “하나님은 나의 재판관이시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바벨론의 왕궁에 잡혀간 바벨론과 그의 세 친구들은 바벨론의 학문과 언어를 익히는 훈련을 받습니다. 이름도 바벨론식으로 바뀌었습니다. 또한 다니엘은 왕이 먹는 궁정식도 먹어야했습니다. 당시의 모든 궁정식과 포도주는 이미 우상에게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우상의 제물로 드렸던 음식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로 뜻을 정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관할하는 관리에게 자신의 뜻과 결심을 전합니다. 포로로 잡혀 온 소년이 왕궁에서 작은 반란을 일으킨 셈입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지혜로웠습니다. 열흘 동안 자신을 시험해 볼 것을 제안합니다. 열흘 동안 채식만 한 다니엘은 왕의 진미를 먹은 다른 소년보다 훨씬 아름다웠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의 결심을 도와주셨고, 다니엘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훗날 다니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바벨론에 펼쳐 보이는 위대한 신앙의 인물이 됩니다.

이제 우리 앞에 놓여있는 2009년이라는 백지수표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들 각자의 몫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다니엘처럼 뜻을 정하고 그것을 하나님과 세상 앞에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뜻을 꿋꿋하게 실천할 때 우리들 역시 세상을 이기는 그리스도인 될 수 있을 것입니다.-河-

여호와 이레

지난 석 달여 계속되었던 아브라함에 대한 연속설교를 마치는 시간입니다. 처음에 말씀드렸듯이 저는 이번 연속설교를 통해서 우리 서머나 식구들께서 무엇보다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거장들이 되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와 똑같이 실수하고 자기의 뜻을 성급하게 실행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비웃기도 했던 보통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차근차근 변화되어갑니다. 신앙의 여정에서 꼭 명심해야 할 말이 바로“변화”라는 단어입니다. 옛성품이 새로운 성품으로 변화되는 것이 올바른 신앙입니다. 한 곳에 멈춰있지 않고 조금씩이라도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 앞으로 변화되어가는 것이 성숙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100세에 주신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릴만큼 믿음의 사람으로 성숙했습니다. 처음에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일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인물이 되어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한 말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 말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셔도 그대로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는 믿음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에 두말없이 순종했습니다. 아버지로서 아들을 번제로 드리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삭이 “제물이 어디에 있느냐?”고 질문했을 때, 아버지의 마음은 찢어졌을 것입니다. 아들 이삭이 곧 제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이 모든 것을 참고 견뎠습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이러한 순종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그동안 살펴보았듯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그에게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이 창대케 되고,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지속적으로 나타나셔서 그를 도우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급기야 이삭을 주심으로 25년 만에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는 성급했고 변덕스러웠지만, 하나님은 변함없는 사랑으로 그들을 찾아오셨고, 아브라함의 앞길을 모두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 우리의 미래를 예비해 놓으시는 하나님. 우리가 가야할 길을 미리 보고 계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인생을 미리 보시고 모든 것을 완벽하게 예비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 역시 순간순간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함으로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2009년 새해를 맞는 서머나 식구들 위에 여호와 이레 하나님의 은혜가 구체적으로/실제적으로 임하기를 기도하겠습니다.-河-

신실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히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실 때에“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창12:2)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다음에는“네 몸에서 날 자가 후사가 되리라”(창15:4)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7장과 18장에서는“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창17:19)고 더욱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약속은 처음에는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추상적인 말씀으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아들의 이름과 기한까지 정해진 구체적인 약속으로 발전해 갑니다.

말씀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모습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창12장에서는 단지 말씀만 하셨습니다. 15장에서는 불꽃으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과 일방적인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17장에서는 말씀으로 약속하시고 언약의 표시로 아브라함의 몸에 할례를 행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18장에서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도록 아들이 태어날 것을 아주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점진적으로 아니 아브라함이 이해하고 믿기 쉽도록 매우 세심하게 아들 이삭이 태어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의 반응은 정반대입니다. 처음에는 선뜻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100세의 아브라함과 평생동안 아기를 낳은 적이 없는 사라에게 아들이 태어난다는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세상의 일반적인 상식과 자신들의 경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브라함과 사라가 모두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웃고 맙니다. 이들의 웃음은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기 힘들다는 뜻의 비웃음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어떻게 생각하든지 자신의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말씀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마지막 약속을 받고 1년이 지났을 때 사라에게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창 21장 1-2절 말씀 속에는 “그 말씀대로”라는 표현이 두 번나오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라는 표현도 나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정확히 이루어졌음을 강조하는 표현들입니다. 이것을 체험한 사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웃게 하셨다고 진실로 기뻐합니다. 남편에게 아이를 낳아주지 못했던 죄책감이 모두 사라졌다고 감사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처럼 신실하신 분입니다. 우리들 믿음의 분량에 맞게 말씀하시고 그 약속의 말씀을 이루어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한 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맞는 송구영신의 계절에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 서머나 식구들 위에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河-

질그릇 인생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7절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질그릇에 비교했습니다. 바울이 살던 로마시대에 질그릇은 당시의 귀족들이나 부자들이 사용하던 구리그릇이나 금은 그릇에 비해서 평민들이 사용했습니다. 질그릇은 구리그릇에 비해서 쉽게 깨졌습니다. 또한 질그릇을 만드는 원료인 진흙을 쉽게 구할 수 있었고 만드는 과정도 간단해서 가격이 저렴했습니다. 따라서 질그릇에 보화를 비롯한 귀한 물건을 담아놓는 것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이 우리들을 질그릇에 비유한 것은 매우 적합한 표현입니다. 우리들은 실제로 흙으로 빚어졌고 흙으로 돌아가야 할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사소한 충격에도 쉽게 부서지는 말 그대로 질그릇들입니다. 우리의 인생길도 질그릇처럼 투박하고 때로는 부서지고 깨지면서 힘겹게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그릇의 가치는 무엇으로 만들어져있느냐에 의해서 결정되기보다 그 안에 무엇을 담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도바울은 질그릇 안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화가 담겨져 있다고 선포합니다. 보화를 담을 수 없는 질그릇이지만 보화를 담는 그릇으로 하나님께서 그릇의 용도를 바꿔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담겨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들의 가치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질그릇으로 높아졌습니다. 이것이 은혜요 그리스도인들이 제일 먼저 감사해야 할 고백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창세기 20장 속의 아브라함은 영락없는 질그릇입니다. 그동안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체험했고, 하나님을 만나서 대화도 나눴고, 이삭을 낳게 될 것이라는 약속도 받았습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차근차근 견고하게 빚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아브라함은 처음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서 이집트로 피신 갔을 때처럼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잘못을 범합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이 도루묵이 되는 듯해서 본문을 읽고 있는 우리들의 마음도 안타까울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브라함이든 우리들이든 질그릇 인생의 한계입니다. 질그릇이 아무리 뛰어나도 구리그릇이 될 수 없듯이, 우리들 역시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수준에 올라갈 수 없음을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질그릇은 말 그대로 질그릇입니다. 아브라함도 같은 실수를 범하는데 우린들 오죽하겠습니까? 우리들 자신이 질그릇임을 인정하고 스스로 가치를 높이려는 노력을 접어야 합니다. 대신에 우리 안에 담겨진 보화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 한 가운데 와 있습니다. 비록 질그릇 인생들이지만 우리 안에 예수그리스도께서 편안히 거하실 수 있도록 정결한 마음을 준비하고 각자의 삶을 돌아보아야겠습니다.-河-

성숙함을 향하여

신앙생활을“성숙함으로의 여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에서는 젖을 먹는 갓난아이 신앙부터 딱딱한 음식을 먹는 장성한 신앙까지 자라야한다고 교훈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우리의 신분이 종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변화된 것입니다. 오늘 예로 들었듯이 거지가 왕자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신분이 바뀌었지만 그의 성품이 모두 바뀐 것은 아니어서 미숙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미숙한 신앙의 특징은 자기중심적이라는 점입니다. 기도의 내용은 대부분“주세요”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축복이라는 말에 집착하고, 희생이나 고난이라는 말에는 부담을 느낍니다. 자신의 주장이나 말이 교회 안에서 받아드려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합니다. 미숙한 신앙은 공동체 속에서 분열과 갈등, 비난과 미움을 일으킵니다. 시기와 질투 역시 미숙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무엇보다 미숙한 신앙은 공동체는 물론 세상 속에서 사람들의 낯을 찡그리게 만듭니다. 이처럼 미숙한 신앙은 삶이 뒷받침되지 않습니다. 신앙의 연수와 상관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미숙한 신앙에 머물러있는 경우를 봅니다. 요즘 기독교가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것도 그리스도인들의 미숙한 신앙 때문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 16장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미숙한 행동을 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는 하갈이라는 종을 아브라함에게 주어서 대를 잇게 합니다. 아브라함의 아이를 잉태한 하갈이 안주인 사래를 멸시합니다. 하갈의 멸시에 마음이 상한 사래는 남편 아브라함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아브라함은 사래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무책임한 행동을 합니다. 이번에는 사래가 하갈을 학대합니다. 하갈은 주인의 아이를 잉태한 채로 광야로 도망갑니다. 성숙하게 행동한 인물이 한 명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처럼 성숙하지 못한 행동을 하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영적 건망증이 도져서 하나님을 잠시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면 영락없이 미숙한 일에 휘말립니다. 둘째는, 믿음에 걸맞은 성품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믿음에 비해서 성품이 자라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약속이 당장 이루어지지 않아서 조급해 할 때 미숙한 행동을 합니다. 서두르면 그릇된 판단과 행동을 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미숙함도 온전한 신앙에 이르는 한 과정입니다. 창세기 16장에서 하갈을 위로하시고 다시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내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미숙한 신앙 속에서도 역사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성숙함을 향해서 앞으로 나가려는 마음가짐과 노력입니다. -河-

하나님의 섭리와 약속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을 보여주시면서 후사를 약속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아만”이라는 히브리어에서 우리가 모두 아는 말인“아멘”이 나왔습니다. 아멘은 진실로(truly)라는 뜻입니다. 특히 아멘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약속이 분명히 이루어질 것을 믿을 때 드리는 입술의 고백입니다. 기도 속에서는 진실된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고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해서 간구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몸에서 후사가 나온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아멘“으로 응답했습니다.

약속을 믿은 아브라함을 의롭게 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식을
거행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더욱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성껏 제물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솔개가 제물위에 내려앉았습니다.아브라함이 솔개를 쫓았지만 좋은 징조는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아주 큰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들이 이방땅 이집트에서 400년간 종살이하다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시 가나안 땅에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솔개를 쫓았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시고 아브라함이 밟고 있는 땅을 후손들에게 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섭리(providence)안에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세상 모든 역사 속에 하나님의 뜻이 깃들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본문 속에서 아모리 족속의 죄가 언급되고 이방나라들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나온 것 역시 하나님께서 세상을 주관하고 계심을 나타내줍니다. 또한 아브라함과 함께 하시고 그의 모든 것을 보고 계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지켜보십니다.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그들을 구원해주십니다.

세상 속에 깃든 하나님의 뜻을 일반적인 섭리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뜻을 특별섭리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처럼 세상만사와 우리 각자의 삶에 뜻을 두시고 그것을 이루어가십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준비한 제물 사이를 하나님의 임재 상징인 불꽃이 지나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뜻을 섭리 가운데 친히 이루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렇듯이 우리들 역시 약속의 자녀들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가운데서도 자신의 약속을 친히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 약속을 누리고 체험하는 길은 매사에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와 서머나 식구들 한 분 한분 위에 하나님의 섭리와 약속이 분명히 드러나기를 기도하겠습니다.-河-

하나님의 약속

수요예배에서 배우는 호세아서에 의하면 이스라엘은“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었기 때문에 멸망했습니다. 진실이 믿음이라면, 인애는 헤세드라고 불리는 변치 않는 사랑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도 예외가 아닙니다. 옳고 그름의 진실과 믿음이 퇴색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을 이웃에게 전해야 하지만, 자기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던 아브라함만큼이나 우리들 역시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많이 부족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알아야 합니다. 삶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적인 지식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매우 부족합니다.

신앙은 인간의 실존과 한계를 뛰어넘는 놀라운 경험입니다.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아멘”으로 순종하며 나갈 때 신앙은 성장합니다. 우리가 연속해서 살펴보는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떤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도하심에 점차적으로 순종해 가면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빚어 가시는 하나님은 매우 신실하십니다.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반복해서 확인해 주시면서, 아브라함이 곁길로 가지 않도록 도와주십니다. 오늘 함께 살펴본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이번에는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들을 보여주시면서 그의 후손이 그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생생하게 약속하십니다. 갖가지 제물을 준비하게 하시고 그 위에 불로 지나게 하심으로 아브라함 앞에서 눈에 보이는 언약식을 거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는 이유는 아담과 이브 이후에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헤세드)때문입니다. 또한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들을 기억하고 아브라함에게 분명히 이루어질 것을 재차 확인해 주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그가 선택한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는 분입니다. 자신이 맺은 언약을 역사 속에서(개인의 삶 속에서) 이루시는 분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배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과도 언약을 맺으시고 그것을 지키십니다. 가장 크고 귀한 언약은 구원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들 각자의 삶 속에 임하는 하나님의 약속들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세상 속에서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인생을 살기 원하시기 때문에 친히 약속을 이루어가십니다. 할렐루야!-河-

멜기세댁을 만난 아브라함

우리의 인생을 만남의 연속이라고 정의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첫 번째 만남은 부모님과의 만남입니다. 부모님과의 만남은 태어나면서 곧바로 시작되는 일종의 숙명적 만남입니다. 성장해 가면서 친구들을 만납니다. 특히 사춘기를 지나면서 어떤 친구를 만나는가에 따라서 인생관이 바뀔 만큼 친구와의 만남은 중요합니다. 친구의 만남과 더불어 좋은 스승을 만날 수 있다면 더 없는 축복입니다. 자신의 인생길을 올바로 제시하고 인도해줄 스승 또는 인생의 멘토를 갖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행복입니다. 부모님 다음으로 숙명적인 만남이 있다면 그것은 배우자와의 만남입니다. 평생을 함께 동반자로 살아갈 아내와 남편을 만나는 것은 그 어떤 만남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귀한 만남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길에서 가장 중요한 만남이 한 가지 더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부모님과의 만남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맺어진 숙명적 만남이라면, 하나님과의 만남은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까지 이어지는 영생의 만남입니다. 부모님과의 만남을 우리가 선택할 수 없지만, 하나님과의 만남은 우리의 선택사항입니다. 또한 하나님과의 만남은“거듭 태어남(born again)”이라고 불릴 정도로 모든 것이 새롭게 펼쳐지는 출발점입니다.

창세기 14장의 아브라함(당시는 아브람)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목에서 멜기세댁이라는 살렘왕이자 제사장을 만납니다. 오늘 본문은 물론 역사적인 자료를 살펴보아도 멜기세댁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인물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7장에서 예수님을 멜기세댁에 비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신 것처럼, 멜기세댁이 아브라함을 하나님께로 인도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지만 자신이 부르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확실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멜기세댁과의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을 “천지의 주재요 가장 높으신 여호와”라고 자신의 말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브라함을 찾아온 멜기세댁 왕은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봐도 틀림이 없습니다.

멜기세댁을 통해서 하나님을 확실히 알게 된 아브라함은 소돔왕을 향해서 더 이상 사람의 힘을 빌어서 부자가 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전합니다(창14:23). 세상 속에서 사람이 아니라 천지의 주재요 가장 높으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겠다는 선포인 셈입니다. 하나님을 확실히 만나고,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깨닫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기로 결심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담대한 선언입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