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면서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려던 아브라함! 이집트에 내려가면서 보여주었던 아브라함의 행동은 매우 실망스러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순간에도 아브라함과 함께 계셨고 바로 왕으로부터 사래를 구출해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돌아온 아브라함은 벧엘이라는 곳에 정착했습니다. 그곳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곳입니다. 아브라함이 다시금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예배했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집트에서 가져온 재산이 화근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재산이 많아지면서 종들이 서로 영역싸움을 하였습니다. 지난번의 문제가 가뭄 때문에 음식이 부족해서 생겼다면, 이번에는 재산이 너무 많아져서 야기된 문제였습니다. 지난번에는 아내 사래와의 문제였다면, 이번에는 조카 롯과의 문제였습니다. 이처럼 신앙의 여정에는 문제가 찾아옵니다. 따라서 문제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중요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이제 서로 다른 지역에서 각자 생활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많이 변해있습니다. 이전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모습은 온데간데없습니다.“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13:9) –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선택권을 줍니다. 당시의 관습상 가장인 아브라함은 조카에게 선택권을 부여할 이유가 조금도 없었습니다. 이집트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아브라함의 성품이 넉넉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롯은 물이 많고 비옥한 평지를 택합니다.
조카 롯이 떠나고 아브라함이 혼자 남아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오십니다. 아브라함이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의 모든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시면서 그 땅을 한번 밟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다시 한 번 약속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언제나 아브라함과 함께 하셨고 그를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경험하는 축복입니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선택권을 양보했지만 그는 대신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땅에 살고 있든지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다시 그곳에 단을 쌓고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의 신앙은 조금씩 자라갔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으로 빚어가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삶입니다. -河-
Category: 생명샘
아브라함의 실수
세상에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루의 삶을 돌아보면 실수의 연속이었음을 발견합니다. 운전하면서 실수하고, 사람들을 만나서 말로 행동으로 실수하고, 사업장이나 직장에서 실수를 해서 손해를 보기도 합니다. 아무리 완벽한 사람도 실수하게 마련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실수를 했습니다. 그것도 일반인들이 하기 힘든 매우 큰 실수를 범했습니다. 자기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도착하자 그곳에 아주 큰 가뭄이 찾아왔습니다. 가나안 땅은 지중해성 기후로 캘리포니아와 마찬가지로 겨울과 초봄이 우기입니다. 그때 비가 오지 않으면 일 년 내내 비를 볼 수 없는 극심한 가뭄에 시달려야 합니다. 가뭄이 들자 아브라함은 가족을 이끌고 이집트로 피난을 갑니다. 이집트는 나일강이 있어서 좀처럼 가뭄이 들지 않았고, 덕분에 세계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집트 국경 근처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브라함은 정처 없이 떠나야만 하는 나그네(sojourner)인생을 살았습니다. 새로운 곳에 가서 정착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갑자기 사래의 아름다운 외모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너무 예쁜 사래를 취하려고 자신을 죽일까봐 염려가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래에게 이집트에 가면 아내가 아니라 누이로 행동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아내 사래는 바로왕의 눈에 들어서 왕궁에 들어가는 운명에 처합니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이집트로 피난을 갔는데, 아브라함 자신의 실수로 오히려 아내를 잃게 된 것입니다. 사래를 다시 아내로 찾아올 방도가 아브라함에게 없습니다. 막막할 뿐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바로에게 재앙을 내려서 사래를 풀어주게 합니다. 이렇게 창 12:10-20절 말씀은 이렇게 하나님의 간섭으로 해피엔딩으로 끝이 납니다. 아브라함은 큰 실수를 범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와 사래를 구해주셨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우리들도 실수를 범합니다. 아브라함처럼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하나님을 잠시 잊어버릴 때도 있습니다. 그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자신의 백성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실수를 통해서도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깨달을 수 있도록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래서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河-
믿음의 시작
아브라함의 연속 설교를 시작하면서 제가 강조하고 싶은 주제는“신앙의 여정입니다. 아브라함은 평생을 나그네(sojourner)로 살았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갈데아 우를 떠난 것을 시작으로 하란을 거쳐서 가나안 땅에 오기까지의 믿음의 여정, 가나안 땅에서 이집트와 그랄이라는 곳을 오가는 그릇된 여정, 마지막에 외아들 이삭을 바치기 위해서 모리아 산을 오르는 순종의 여정 등등 아브라함은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는 말 그대로 유목민 생활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인생여정만 옮겨 다닌 것이 아닙니다. 그의 신앙여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온 가족을 데리고 하란을 떠났던 아브라함의 믿음은 대단해 보입니다. 이 정도라면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100점을 맞고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은 사정없이 흔들립니다. 가뭄이 찾아오니 먹을거리를 찾아서 이집트로 내려갑니다.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아브라함은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종을 취해서 이스마엘이라는 자식을 낳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가장 커다란 종교 갈등을 일으키게 된 시작점입니다.
이와 같은 아브라함의 허물은 아브라함 역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음을 가르쳐줍니다. 먹을 것을 찾아서 약속의 땅을 떠났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비겁한 행동을 저질렀고,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자기 고집대로 일을 벌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었을까요? 어떻게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는 결심을 할 정도의 큰 믿음을 갖게 되었을까요? 아브라함의 인생/신앙 여정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방 땅에서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를 지켜주시고, 그에게 약속의 자녀 이삭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에서 하나님은 늘 주도권을 잡고 아브라함을 훈련시키셨고,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어가셨습니다.
물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위대함도 있습니다. 고집을 부리고, 실수를 하면서도 그가 결국에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지만 우리와의 차이점은 그에게“행함이 있는 순종”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보시고 아브라함을 열국의 아비로 택하셨고 그를 복의 근원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같은 순종의 인물, 신앙의 여정을 하나님과 더불어 시작할 믿음의 인물을 찾고 계십니다. -河-
신앙의 여정
오늘부터 구약성경 창세기의 대표적인 인물인 아브라함에 대해서 연속설교를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은 신구약성경을 통틀어서 믿음의 조상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또한 창세기에서 노아의 홍수와 바벨탑 이후에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을 통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11장을 태고사라고 부르고 이어지는 12-50장을 족장사라고 부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의 이락 지역인 당시의 메소포타미아 갈대아 우르에서 이방신을 조각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던 아버지 데라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데라는 그곳에서 비교적 성공적으로 비즈니스를 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원래 이름“아브람”의 뜻이 “높으신 아버지”란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던 아브라함의 가족이 아버지 데라의 인도로 서쪽으로 이주를 해서 하란이란 곳에 정착하게 됩니다. 유목민의 생활을 시작한 셈입니다. 아버지 데라가 하란에서 죽고, 아브라함의 나이 75세가 되었을 때 아브라함과 사라는 조카 롯 부부와 함께 다시 서쪽으로 여행을 해서 가나안에 정착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약속이 창세기 12장 2-3절입니다.:“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은 얻을 것이니라.”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12:1)는 하나님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신앙여정은“떠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은 그의 생활터전이요 기득권이 유지되는 안정된 생활 기반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것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을 향해서 떠났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불릴만한 최초의 순종이었습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이 말해주듯이 신앙은 순례길입니다. 어느 한 곳에 안주하지 않는 떠남의 연속이 신앙 여정입니다. 한 곳에 머무르면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사람과 환경을 의지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을 향해서 미련 없이 일어나 떠나는 것이 큰 믿음입니다. 현재 어디에 안주해 계십니까? 혹시 앉은뱅이와 같은 신앙은 아니십니까? 이제 일어나십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을 향해서 과감히 앞으로 나갑시다.-河-
달고 오묘한 그 말씀 2
“그림의 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 본 대로 성경말씀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이라는 것을 알아도 그 말씀을 올바로 대하지 못하면 그림의 떡과 같습니다. 또한“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면서 성경말씀을 읽고, 수없이 설교를 들었지만 말씀이 겉에서만 빙빙 돌 뿐 내면 깊이 자리 잡지 못한 경우도 많습니다.
오늘은 정금보다 귀하고 송이꿀보다 더 단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힘입는 비결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 말씀을 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편 119:18).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성경말씀을 푸는 비결은 바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영혼의 눈을 열어주셔야 성경 말씀이 하나님 말씀으로 마음에 다가옵니다. 따라서 우리들도 시편기자와 똑같이 “내 [영혼의]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진실 되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성경 말씀을 하나님께서“나에게 주시는 생명의 양식”으로 받아야 합니다. 생명의 양식이라는 것은 성경 말씀이 나를 살리게 하는 힘을 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임하셨을 때 사무엘은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3:10)라고 대답했습니다. 성경 말씀을 대할 때 사무엘과 똑같은 마음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고 큐티를 하다보면 특별히 다가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지난 설교에서 예로든 성 어거스틴에게 로마서 13장 13-14절 말씀이 그의 마음을 친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성경을 연애편지 읽듯이 가슴으로 읽으시길 부탁드렸습니다. 적어도 한 구절 또는 한 단어가 자신의 마음에 깊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말씀으로 붙잡는 것입니다. 잠시 멈춰서 그 말씀을 반복해서 읽고 묵상하면서 말씀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해야 합니다. 작은 쪽지에 적어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수시로 그 말씀을 되새기면 말씀이 정말로 생명의 양식인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신 말씀을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아는 것이 깨달음이 되고, 깨달음이 삶으로 이어질 때 말씀의 능력이 실제 삶 속에서 발휘됩니다. 이것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강하고 견고한 신앙을 갖는 최고의 비결입니다.-河-
달고 오묘한 그 말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허락하신 가장 큰 특권은“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핫라인(hot line)입니다. 힘들고 속이 상할 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세상 속에서 기쁨의 파도가 몰려올 때도 골방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더불어 그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지난 연속설교에서 배웠듯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들은 하나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안을 누리고 소망의 빛을 발견합니다. 이처럼 기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주신 가장 강력한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허락하신 가장 귀한 선물(gift)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정말 많은 선물들을 주셨습니다. 제일 큰 선물은“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주신 구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선물로 주신 구원은 선물 목록에 포함시키기 어려울 만큼 크고 절대적입니다. 가정과 자녀들, 직업, 건강, 그리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 등등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들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선물 중에서 가장 귀한 선물(the most precious gift)를 들라면 저는 망설이지 않고“성경”을 듭니다. 성경 속에 구원의 길도 나와 있습니다. 성경 한 구절 한 구절에는 하나님의 숨결이 깃들어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 말씀의 귀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소성케합니다. 이 구절을“하나님 말씀은 우리들 자신을 새롭게 합니다”라고 풀어서 쓸 수 있습니다. 성경을 하나님께서 내 자신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고, 읽고, 그것을 마음에 새길 때 말씀이 우리를 새롭게 합니다.
또한 하나님 말씀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 마음에 기쁨이 임합니다. 성경 속에 아로새겨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들 마음속에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 생깁니다. 분별력, 영안, 총명함을 터득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것을 지켜 살 때, 하나님께서 말씀 대로 사는 사람에게 주시는 특별한 상(賞)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몸소 체험한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두고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하나님 말씀은 금 아니 잘 정련된 금보다 훨씬 귀하고, 꿀 그것도 꿀 송이에서 막 따온 꿀보다 훨씬 달콤합니다.” 아멘! -河-
속사람을 강건하게
모든 사람에게는 강해지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은 이후에 세상은 타락했고, 타락한 세상에서 생존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땅은 끊임없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냅니다. 타락한 세상의 모든 자원과 양식은 제한되어 있고 사용해 버리면 없어집니다. 그러니 계속해서 일을 해야 하고, 자신의 영역을 확보해야합니다. 자연스레 경쟁사회가 된 것입니다. 약육강식이라는 말도 나왔습니다. 그러다보니 너도나도 힘을 키웠습니다. 강해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사람은 크게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육신(body)입니다. 육신은 눈에 보이는 몸입니다. 강한 몸을 갖고 싶어서 운동을 합니다. 아름다운 몸을 갖고 싶어서 치장을 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모두 육신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그렇지만 육신은 죽음과 더불어 썩어질 몸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육신에 투자해도 100년을 넘기기가 어렵습니다.
둘째는 정신(mind)입니다. 정신은 생각입니다. 영혼에서 혼에 해당합니다. 갑자기 황당한 일을 당했을 때, 혼이 나갔다고 말하는 것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동물도 본능에 따라서 움직이는 육신을 갖고 있지만, 자유롭게 생각하고 선택하고 결심하는 정신은 인간만 갖고 있습니다. 정신에서 양심이 나오고, 인륜지사의 도덕이 나옵니다. 정신이 살아있는 사람은 존경을 받고, 정신의 산물인 학문과 지식은 문명을 일으키는 동력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을 구성하는 것이 영(spirit)입니다. 영은 존재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무형의 자리입니다. 구약시대에는 대제사장만이 들어가는 지성소(holy of the holy)가 있었고,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자리였습니다. 영은 바로 지성소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영”이 살아나는 것을 뜻합니다. 육신과 정신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지만, 깊은 교제는 바로 영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사도바울은 이 영을 다른 말로 속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 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속사람이 튼튼한 사람이 진정으로 강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영으로 교제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붙드심을 경험하기 대문입니다. 속사람이 강한 인생은 어떤 어려움이 와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기 때문입니다.-河-
이웃을 위한 기도
기도에 대한 연속설교 마지막 시간입니다. 저는 이번 시리즈 설교를 통해서 기도가 개인의 소원이나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해서는 안 됨을 강조했습니다. 기도응답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변함없는 믿음입니다.
실제로 우리들이 원하는 대부분의 기도응답은 세상과 관련된 것입니다. 기도제목 대부분은 먹고사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물론 일용할 양식도 중요하지만, 성숙한 믿음은 세상의 일들을 뛰어넘어서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우리의 발은 세상을 딛고 있지만 기도를 통해서 세상 저 너머에 펼쳐진 은혜의 세상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살펴보았던, 한나, 야베스, 아사, 다윗 그리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공통점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서머나 식구들께서 기도의 중심을 “나”에서 “하나님”으로 이동하시기를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그때에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기쁨과 평안함과 자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도의 백미가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라면, 기도의 가장 아름다운 열매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군병들을 위해서 드리신 예수님의 기도입니다.:“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얼마나 깊고도 넓은 기도입니까? 범인의 옅은 믿음으로는 따라 하기조차 힘든 기도입니다. 자신을 핍박하고 조롱하면서 급기야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을 웬만해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넓이가 그만큼 넓었던 것입니다.
우리들 기도는 대개 내 삶의 주변에서 맴돕니다.“나”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기도의 종착점은 이웃을 위한 기도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원수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거기까지 나가지 못해도 우리들의 기도 속에는 이웃을 위한 기도가 꼭 포함되어야 합니다. 가족과 교회 식구들을 위한 기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금요심야기도회에서 중보하듯이 나라와 민족의 지도자들, 선교사들, 기도가 필요한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서 중보 기도의 날개를 활짝 펼쳐야 합니다.
내가 남을 위해서 기도할 때 누군가 또 나를 위해서 기도해 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는 기도의 체인으로 서로 서로 엮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표현입니다.-河-
예수님의 기도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기도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이 기도하는 법을 물었을 때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새벽에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먼저 떠나보내고 밤새도록 홀로남아서 기도하셨습니다. 이처럼 복음서 속의 예수님은 기도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기도 가운데 백미는 오늘 우리가 살펴본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시고 하나님 앞에서 처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는 십자가의 죽음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지 미리 보여줍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음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의 길까지 경험하셨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삶과 죽음의 여정을 모두 도우실 수 있음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가셨던 겟세마네 동산은 예루살렘 경내에 있었습니다. 겟세마네는“기름짜는 기계”라는 뜻입니다. 어쩌면 겟세마네는 올리브기름을 짜던 장소를 가리킬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실 때마다 겟세마네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요18:2). 즙을 짜내듯이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교제하시던 예수님의 골방이 바로 겟세마네였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39절)라고 기도를 마치십니다. 이 기도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 손 들고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항복의 기도입니다. 여기까지 이르기를 예수님은 세 번 기도하러 나가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여전히 잠에 곯아떨어집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중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지요.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처절한 영적 싸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괴로움의 기도, 외로움의 기도, 죽음의 기도, 그러나 영광과 능력의 기도라고 정리해드렸습니다. 겟세마네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예수님은 의연하게 십자가를 지시고 모든 인류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할렐루야!-河-
골방에서
연속해서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 연속설교를 통해서 기도에 대한 성경적이고 바른 교훈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기도를 단지 세상에서 복을 받고 인생길을 형통케 만드는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기도를 옛날 우리 조상들이 뒤꼍 장독대위에 냉수를 떠놓고 집안의 안녕과 자녀들의 출세를 비는 주술행위정도로 전락시켜도 안 됩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기도를 왜곡시키는 주범들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의 시간입니다. 기도 응답의 여부와 상관없이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기뻐할 수 있어야합니다.
제가 이번 연속설교를 통해서 강조한 기도의 자세는 한나에게서 배운 간절함입니다. 고난 가운데 태어났지만 기도로 운명을 바꾼 야베스의 영적씨름입니다. 아사왕을 통해서 한결같이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웠습니다. 처음이 좋아도 끝이 나쁘면 실패한 인생입니다. 아사가 기도를 잊어버렸을 때 그의 인생은 추락했습니다.
시편 51편에 나타난 다윗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상한심령의 기도를 기뻐하심을 배웠습니다. 죄로 인해서 우리의 심령이 상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나 외부의 환경 때문에 마음이 산산조각 부서질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서진 마음을 기뻐 받으시고, 새롭고 정한 마음을 창조해 주십니다. 기도는 이처럼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만져주심과 새롭게 하심을 경험하는 축복의 시간입니다.
이 모든 기도들은 하나님과 우리 자신이 단둘이 만나는 골방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외선적인 사람들은 회당이나 거리에서 기도합니다. 자신이 기도하는 사람임을 자랑하기 위함입니다.
그렇지만 진실로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골방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골방기도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만 드리는 은밀한 기도입니다. 골방기도의 매력은 하나님 역시 은밀하게 응답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복잡하고 바쁜 세상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골방기도가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밀하신 손길과 마음을 체험하는 영적 오아시스와 같은 장소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한 주간 여러분들의 삶 속에 하나님과 단둘이 만나는 자신만의 골방을 꼭 준비하시고 하나님과의 은밀한 데이트를 마음껏 즐기시길 바랍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