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작 (New Start)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하나님의 공평하심은 대표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 경우에 나타납니다. 첫째는 적신으로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똑같이 맨 몸입니다. 둘째는 이 세상을 하직할 때 빈손으로 간다는 사실입니다. 태어날 때 미리 많은 것을 갖고 태어나지 않듯이, 죽을 때도 모든 것을 놓고 빈손으로 떠나 갑니다.

세 번째는 살아있는 동안 매 해마다 365일을 부여받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새해가 되면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365일을 허락해 주십니다. 누구도 더 많은 날짜를 갖지 못하고 동시에 더 적은 날로 한 해를 시작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결과는 제각각입니다. 빈손으로 와서 커다란 업적을 이루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똑같이 1년 365일을 살지만 삶의 모습과 결과는 천양지차입니다. 이 세상을 하직할 때도 영생을 소유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늘나라에서의 새로운 삶을 기대하면서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시작은 같지만 과정을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삶의 열매가 다른 것입니다.

이제 우리 앞에 2008년 365일이 놓여있습니다. 2008년은 미리 가본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전인미답(全人未踏)의 길입니다. 망설일 수도 없습니다. 뒤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시작(new start)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3-14절에서 자신이 영적 순례길을 걷고 있음을 담대히 밝힙니다. 그는“도상(道上)의 존재(存在)”였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인생길을 걸어가는 순례자였습니다.

본문 그대로 표현하면, 빌립보서의 바울은 푯대를 향해서 영적 달음박질을 하는 달리기 선수였습니다. 육상 경주에 나선 사람은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추월당하기 때문이고 집중력이 분산되기 때문입니다. 경주를 하는 사람은 푯대, 즉 결승점을 향해서 질주합니다. 그의 눈은 시종일관 푯대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어질 상을 기대하면서 매 순간 있는 힘을 다해서 달릴 뿐입니다.

우리 모두 2008년 첫 달을 살고 있습니다. 새로운 경주를 시작한 것입니다. 뒤를 돌아보지 말고 푯대 되신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달려갑시다. 하나님께서 공평하게 나눠주신 365일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갑시다. 올 한 해 하나님의 은혜가 서머나 식구들 위에 임하기를 다시 한 번 축원합니다.-河-

창세기의 요셉

요셉: 샘 곁의 무성한 가지

오늘까지 3주에 걸쳐서 성경에 등장하는 동명삼인(同名三人) 요셉이라는 인물들을 한 사람씩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창세기의 요셉에 대해서 살펴볼 차례입니다.

요셉은 열두 명의 형제들 가운데서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다른 형제들은 평상복을 입히면서도 요셉에게는 색동옷을 지어 입힐 정도였습니다. 다른 형제들이 들에 나가서 양을 치면서 일을 할 때, 요셉은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의 인생에 먹구름이 몰려옵니다. 형들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서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려서 이집트로 끌려가게 된 것입니다.

요셉은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가서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에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지만, 그 그림자가 그의 마음까지 침투할 수는 없습니다. 요셉은 어디에서나 하나님을 인정했고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요셉의 삶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형통했습니다. 한 가정의 노예로 일할 때도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가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형통한 삶을 살았던 요셉은 무엇보다 매사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있을 때도, 감옥에 갇혀 있을 때도, 나중에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을 때도 요셉은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을 때에 요셉은 그의 이름 뜻 그대로 “더하기 인생”을 살았습니다. 가정의 총무에서 감옥의 총무로 그리고 한 나라의 총무로 그의 삶은 마치 동심원처럼 퍼져나갔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요셉이 매사에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고, 샘 곁의 무성한 가지처럼 그의 삶을 부요케하셨습니다.

요셉처럼 매사에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할 때, 어떤 역경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기도 가운데 하나님 곁에 꼭 붙어 있기로 결심하면서 2008년 새해를 맞는 서머나 식구들 위에 요셉에게 임했던 축복이 그대로 임하기를 기도하겠습니다.-河-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

요셉의 배려

지난 주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 이어서 오늘은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유다지파에 속했고 다윗의 후손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목수일을 하면서 가족을 돌보는 당시의 직업으로 봐서 서민층에 해당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한 사이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풍습에 의하면 약혼을 하고 보통 1년 후에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렇지만 약혼은 결혼에 버금가는 혼례식이어서 구약의 신명기 20장 7절에 의하면 한 여자와 약혼 한 남자를 전쟁터에 내보내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행여나 전쟁에서 죽으면 약혼한 여자가 홀로 되고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는 비극을 막기 위한 율법적 조치였습니다.

요셉은 약혼한 마리아가 아기를 가진 것을 눈치 챕니다.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는데 아기를 가졌으니 요셉이 얼마나 황당하고 실망스러웠겠습니까? 하지만 마리아가 부정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면서도 요셉은 마리아를 배려합니다.

마태복음 1장 19절에 의하면 마리아가 수치를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요셉이 가만히 끊고자 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 앞에서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지요? 성경에서 말하는 의로운 사람은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성숙함을 겸비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약육강식의 논리가 판을 칩니다. 선거에서 네거티브 전략이 난무하듯이 서로의 약점을 파헤칩니다. 남이 잘되면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반면에 남이 수치를 당하는 것을 고소해 하면서 은근히 즐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취해야 할 생활방식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서로를 배려해야 합니다. 자기에게 피해를 입히고, 황당한 일을 겪게 하는 사람까지 배려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마리아를 가만히 끊고자 했던 요셉은 의인이라고 불릴 만큼 성숙한 사람이요 우리들에게 귀감이 되는 인물입니다.

성숙한 신앙은 말이나 행동 뿐 아니라 인격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의인이었던 요셉이 마리아를 배려하는 것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서머나 식구들은 서로를 아껴주고 배려하면서 사랑이 넘치는 신앙공동체를 이뤄갔으면 좋겠습니다. 배려 – 우리 기독교인들이 마음에 품고 실천하기를 애써야 할 신앙의 덕목입니다.-河

아리마대 사람 요셉

요즘 새벽기도회에서 구약성경의 역대상 앞부분을 읽고 있는데 사람들의 이름이 많이 나옵니다. 아담부터 시작된 족보가 무려 첫 9장을 차지하고 있으니 성경에서 가장 긴 인명록일 것 같습니다. 역대상 뿐 아니라 신구약 성경에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성경 자체가 하나님과 사람들 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춰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을 크게 세 부류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 하나님에 대해서 무관심한 사람들. 이 가운데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성경의 주인공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고, 나아가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펼치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앞으로 3주 동안 세 명의 인물을 차례로 살펴볼 것입니다. 이들은 똑 같이 “요셉”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하나님께 속한 인물들입니다. 오늘 살펴볼 첫 번째 인물은 예수님을 자신의 무덤에 장례한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다음 주에는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 2007년 마지막 주에는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에 대해서 차례로 설교할 예정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산헤드린의 의원이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서 요셉의 이름을 대면 알 만큼 명예와 부와 권력을 모두 갖고 있었던 소위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요셉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살아생전에 예수님을 만났었는지, 아니면 전해 듣고 믿었는지 분명치 않지만 요셉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메시야)로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사회적 지위와 유대교의 눈총 때문에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을 숨기고 지냈습니다.

요셉은 선하였지만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로 결정하는 공회 석상에서 요셉은 공회의 결정에 혼자서 반대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신앙양심을 지킨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무력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을 보고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지만, 아리마대 요셉은 “당돌하게”빌라도를 찾아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인수받고 자신의 묘지에 장사지냅니다.

그는 더 이상 숨어서 믿는 신앙인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어려운 순간에 세상으로 나가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담대히 선포하고 신앙양심대로 행동했던 정말로 성공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河-

광야에서

지난주일 설교 제목은 “광야에서”였습니다. 우리들의 인생길이  광야와 같다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광야의 특징으로 세 가지를 말씀드렸지요.

첫째로 광야는 말 그대로 척박한 환경입니다. 광야에서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허둥지둥 정신없이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일을 해야 합니다. 둘째로 광야는 불안한 곳입니다. 광야는 통과해야 할 길목이지 정착할 곳이 못됩니다. 그러다보니 인생의 광야 길을 걸으면서 안정되었다싶으면 또 다시 문제가 터지고 안절부절 못하게 됩니다. 셋째로 광야는 참 외로운 곳입니다. 오아시스를 만나기 전에는 혼자서 외롭게 광야 길을 걸어야 합니다. 때로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인생의 광활한 광야에 혼자 내동댕이쳐진 것처럼 외로울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광야 길은 통과해야 합니다. 중간에 멈추거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지난 주일에 광야 길을 통과하는 마음가짐으로 자신감과 하나님을 찾는 마음을 소개했습니다. 인생의 광야 길에서 자신감을 잃으면 큰 일 납니다. 이것은 마치 자동차가 광활한 사막에서 엔진고장을 일으킨 것과 같습니다.

광야 길을 통과할 때 우리가 바라보고 추구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광야에서 물을 찾듯이 하나님을 갈망하고, 하나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의 눈을 하나님께 고정시키고 믿음 안에서 자신 있게 인생의 광야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본 시편 68편에서는 인생의 광야 길을 걸어갈 때, 우리들을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시편 68편 4절에서 하나님을“하늘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분”으로 소개합니다.

우리들이 인생의 광야 길에서 헤매고 지쳐서 방황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구름을 타시고 하늘에서 내려오신다는 표현입니다. 우리들이 광야 길을 걸어가지만, 하나님께서는 광야 길을 구름을 타고 날아가십니다. 수준이 다르지요!

인생의 광야 길을 혼자서 걸어가는 것은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동행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서 행하시면서 광야와 같은 인생길을 평탄케 하십니다. 생명의 단비를 흡족히 내려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더불어 인생의 광야 길을 걸어가는 주님의 백성들은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할렐루야 -河-

큐티 : 이렇게 하십시오

큐티학교가 성황리에 진행 중입니다. 20여분이 성경공부에 참석하신 것은 우리 교회에서 유래가 없는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저 역시 큐티를 가르치는 것이 신이 납니다.

사실 신앙생활은 신바람 나는 체험입니다. 일주일 동안 세상에서 억눌려 살다가 주일날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도 신명나는 축제입니다. 우리 같은 부족한 피조물이 손을 조아리고 작은 입술을 벌려서 기도했는데, 그 기도제목이 이루어질 때는 기쁨이 샘솟습니다. 어린 아이가 바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가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이루었듯이, 우리의 작은 정성이 세상을 밝힌다고 생각하면 가슴 벅찬 감격과 감사가 있습니다.

저는 서머나 성도님들이 우리 교회에서 신나게 신앙생활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 역시 여러분들과 한 마음이 되어서 신나게 목회의 꿈을 펼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오늘은 큐티 학교에 오지 못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큐티하는 순서를 간단히 소개하려고 합니다. 참고하시고 그대로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1) 큐티는 찬양과 기도로 시작합니다. 가사를 음미하면서 간절히 찬양을 부를 때 하나님과 말씀 앞에서 마음이 활짝 열립니다. 하나님 말씀을 밝히 깨닫기 위해서 눈이 열려야 합니다. 시편 119편 18절의 말씀을 갖고 기도하십시오.:“내 눈을 열어서 주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

2) 주어진 본문을 자세히 읽으십시오. 큐티 속에는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주보에 있는“첫 아침을 주님과 함께”에서 그 날에 해당하는 본문을 자세히 읽으시기 바랍니다.

3) 본문 속에 마음에 와 닿은 구절을 붙잡고 묵상하십시오. 한 단어도 좋고, 한 구절도 좋고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 말씀이 오늘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생명의 양식이라고 믿고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4) 말씀을 삶에 적용하고 결단의 기도로 마치십시오. 오늘 받은 말씀을 하루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를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로 큐티를 마무리합니다.

간단히 소개했지만, 서머나 식구들 모두 매일같이 큐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셨으면 좋겠습니다.-河-

주를 찬양하라

구약 성경의 시편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예배할 때 부르던 찬양과 기도들입니다.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는데 각 글자가 음가(音價)를 갖고 있어서 랍비들은 성경에 운(韻)을 붙여서 노래하듯이 읽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본 시편47편 역시 한님을 찬양하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시편47편을 두고 어떤 학자들은 왕이 보좌에 나가는 즉위식을 연상시킨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학자들은 다윗이 오벳에돔에 있던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온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오늘 다윗의 입장에서 말씀을 준비해서 전했습니다.

시편 47편의 전반부는 승리의 찬양입니다. 만왕의 왕 되신 하나님 앞에 세상의 어떤 나라도 맞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열방을 그 백성들의 발아래에 두셨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에 국가를 세운 후에 주변 국가들을 차례로 물리친 것을 연상시킵니다. 우리들 역시 왕 되신 하나님을 굳게 믿고 앞으로 나갈 때, 세상의 어떤 세력도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환난 날에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47편의 후반부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향한 찬양입니다. 특별히 6절에서는 찬양하라는 말씀이 네 번 반복됩니다. 동서남북 온 땅이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뜻일 겁니다. 우리들 삶의 모든 지경에서 주님을 찬양하라고 특별히 네 번을 반복한 것 같습니다. 이제 여호와의 법궤가 다윗성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동안은 전쟁처럼 필요할 때만 여호와의 능력이 임했다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들어와 계십니다. 우리들 마음이 하나님을 모시는 보좌인 셈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우리들이 할 일은 주님의 이름을 가장 높이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지존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통해서 자신이 높여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가정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온전히 높여드립시다.-河-

피난처되시는 주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성경은 두 가지로 정리해 줍니다. 구약성경 창세기에서는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낸다(창3:18)고 했습니다. 가시덤불은 우리를 얽어맵니다. 엉겅퀴는 생명력이 강해서 아무리 뽑아내도 자꾸만 나옵니다. 그래서 세상을 살면서 어려운 일이 생기고 발을 얽어매는 사건들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신약성경 빌립보서에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어그러지고 뒤틀렸다고 표현합니다. 세상이 구조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바른 것을 찾기는 불가능합니다. 세상에 빠지면 자신도 모르게 어그러지고 뒤틀리게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선한 사람이 세상 속에서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어려움이 닥칩니다. 세상자체가 뒤틀려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타락하고 보기 흉하게 변한 것은“죄”때문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영역인 선악과를 먹음으로 인해서 세상에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죄가 온 세상을 망쳐놓았습니다.

죄는 마치 암세포와 같습니다. 건강한 육체에 암세포가 생기면 건강한 세포를 오염시킵니다. 그리고 급기야 생명을 빼앗아갑니다.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죄가 침투하면 건강한 영혼도 어그러집니다.

이렇듯 죄 많은 세상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늘 힘겹습니다. 시편기자도 의인에게 고난이 많다고 했습니다.(시34:19) 바르게 살면 살수록 어려움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뒤틀린 세상이 그를 억누르고 괴롭혀서 그렇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들이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피난처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시14:6)

세상 속에 사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피난처가 되어주십니다. 피난처라는 말 속에는 1) 우리가 그 품속으로 달려가면 우리를 맞아주시는 하나님, 2) 산성이 되어 주셔서 어떤 세력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지켜주시는 하나님, 3) 안전하게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깃들어있습니다.

다음 한 주간동안 서머나 식구들 모두 하나님을 피난처 삼아서 하늘의 위로를 경험하시고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능히 승리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河-

말씀대로 사는 삶

천국백성들인 우리들이 세상 속에서 살다보면 여러 가지 예상치 못한 일들을 겪습니다. 그래서“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저 하늘에 있네.”라는 가사의 복음성가가 생겼나 봅니다. 그렇다고 세상살이를 푸념과 실의에 가득 찬 채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세상에 보내신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을 두고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은 어두움을 몰아냅니다. 아무리 깜깜절벽이라도 작은 촛불 하나면 어두움은 힘을 쓰지 못하고 사라집니다.

소금은 부패를 방지해 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는 곳마다 어두운 세상이 밝아져야 합니다. 더럽고 썩어져가는 세상이 신선함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들은 빛과 소금으로 살지 못합니다. 남을 돕거나 세상을 밝히는 것 이전에 우리들 자신부터 부족합니다. 정리할 것이 많습니다. 자신이 바로 서있지 못하니 남을 돕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변화무쌍한 세상 풍조 앞에서 우왕좌왕하고, 때로는 유혹에 빠져서 자신도 모르게 세상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도 많습니다. 기독교인들의 무력한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시편 37:31절에서는 세상살이에서 실족하지 않고 꿋꿋하게 걸어가는 비결이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마음속에 하나님의 법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있을 때, 그 말씀이 우리의 삶을 통제합니다. 길을 가르쳐줍니다. 잘못된 것을 지적해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깨우쳐줍니다.

말씀을 마음에 두는 비결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이 큐티(Quite Time:QT경건의 시간)입니다. 하루 가운데 일정한 시간을 정해놓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은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도록 돕습니다. 말씀대로 살면 일상의 삶에서 실족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시작될 큐티학교를 통해서 말씀을 마음에 품고 실족하지 않는 삶을 사는 비결을 배우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은 인생길을 비추는 빛입니다.-河-

여호와께서 붙드심이로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진실로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두고 신명기 33장 29절에서는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Happy are you, Oh Israel!)”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우리들은 행복자들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해 주셨고,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었고,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니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시편 37:23-29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의롭게 된 천국백성들에게 임하는 복을 다섯 가지(五福)로 정리해 놓았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23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정해주시고 그대로 인도하십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정해주셨다면 그 길은 최선의 길임에 틀림없습니다. 무엇보다 그 길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붙드심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주십니다(24절). 마치 엄마가 아기의 손을 붙잡고 길을 가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손을 붙들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넘어지지만 완전히 엎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손을 붙잡고 있는 한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셋째는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믿음과 선행은 후손들에게 그대로 돌아갑니다(26절). 우리들이 뿌린 신앙의 씨앗이 후손들에게 복으로 임한다는 축복선언입니다.

넷째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입니다(28절). 변덕쟁이 우리들이 종종 하나님 곁을 떠날 때가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와 늘 함께 하시고 지켜주십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복은 땅을 기업을 받는 입니다. 물론 여기서 땅은 이 세상의 부동산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들은 천국에 땅을 상속받은 복덩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삽시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이 받은 복은 이처럼 세상의 복과 차원이 다릅니다. 세상의 복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이 복을 누리는 비결은 지난 두 시간에 걸쳐서 배운 천국백성의 삶의 규칙을 그대로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행복에 겨운 그리스도인으로 삽시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