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사람 (2007.6.24)

지난주에는 병상에 계신 한 노권사님을 심방했습니다. 손을 꼭 잡아드리니 마음에 갖고 계시던 이야기보따리를 푸셨습니다. 여덟 살 때에 당시 동네의 대학생 오빠로부터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셨답니다. 원래 총명하신 권사님이셨지만 그 옛날 예수님을 처음 만나던 얘기를 하실 때는 더욱 눈이 반짝이셨습니다. 권사님께서는 예수님을 믿고 지금까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를 늘 생각하셨답니다. 어릴 적에는 하나님께 칭찬받는 어린이가 되고 싶으셨고, 어른이 되어서도“어떻게 살아야 하나님께서 칭찬하실까?”를 늘 자문(自問)하시면서 평생을 지내셨답니다.

“하나님께 칭찬받는 자”- 듣고 입으로 따라 하기만 해도 마음이 밝아지는 말입니다. 동시에 솔직히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칭찬을 받으려면 얼마나 열심히 살아야 할까요? 얼마나 양심적으로 살아야 할까요? 자신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결점 투성이, 오점 투성이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보시지 않으십니다. 우리 안에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칭찬하십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께 서 있으면 그것을 보시고 한없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족함을 이미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51편 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중심을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에녹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늘로 들려 올라갔습니다. 히브리서 11장 5절에서는 에녹을“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라고 부릅니다. 에녹은 평생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를 생각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생각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행동으로 옮겼기에 그는 죽음을 거치지 않고 하나님께로 갔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의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입니다. 에녹은 평생 동안 하나님과 늘 동행한 사람이었습니다. 한시도 한눈팔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칭찬 받는 자,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 서머나 식구들의 신앙의 표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가인의 분노 (2007.6.17)

창세기 4장에는 아담과 이브의 가족에게 닥친 비극이 나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에게 가인과 아벨이라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농부였고,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였습니다. 가인은 땅에서 나는 열매로, 아벨은 자신이 기르던 양 중에서 첫 번째 새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고 가인의 제사는 거절하셨습니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동생의 제사만 열납된 것을 본 가인의 마음이 틀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오셔서 분을 내는 이유를 물으십니다. 죄가 문지방에 웅크리고 있으니 죄를 다스리라는 경고도 잊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가인은 분을 못 이기고 들로 나가서 동생 아벨을 죽이고 맙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라는 오명을 갖게 되는 순간입니다. 가인은 평생을 유리방황하면서 도망자로 살게됩니다.

창세기 본문은 제사가 열납된 아벨보다 동생을 죽인 가인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타락한 인류의 모습을 액면그대로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동생의 제물만 열납된 것을 보고 가인 마음속에서 시기와 질투가 생겼습니다. 그것이 분노로 발전했고 급기야 동생을 죽이는 살인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게리 채프먼이라는 분은 “분노는 특정 문화 속 특정 사람들에게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나이나 사회적 지위와 관계없이 누구나 분노를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가인의 후예가 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큰일이지요?

그렇다면 이제부터 분노를 다스리는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1)그것은 무엇보다 시기와 질투를 우리 마음속에서 몰아내는 것입니다. 넉넉한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2)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주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막대기는 몽둥이로 쓰일 수도 있지만 버팀목으로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버팀목은 서로를 세워주고 안전하게 지켜줍니다.

3) 억울한 일을 당해서 마음속에 분노가 일거든 먼저 하나님 앞에 나와서 분한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으십시오. 사랑의 하나님께서 분한 마음을 만져주실 것입니다.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분노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생수의 강 (2007.6.3)

저는 그동안 오늘까지 7주에 걸쳐서“물”과 관련된 말씀을 전했습니다. 성경에서 물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우선 물은 생명수의 상징입니다. 창세기 2장의 에덴동산에는 강이 네 줄길로 흘렀습니다. 에스겔서 47장에 나오는 성소에서 흘러나와서 온 세상을 살리는 물도 생명수입니다. 지난주에 함께 나눈 요한복음 7장에서는 우리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른다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에서는 천국의 모습을 미리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늘나라에는 수정처럼 맑은 생명수가 강처럼 흐른다고 했습니다. 생명수가 흐르는 강 양 옆에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달마다 새로운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영원히 예수님과 더불어 살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성경에서“물”은 심판과 고난의 상징입니다. 노아의 홍수에서 물은 심판의 수단이었습니다. 신약에서의 폭풍은 고난의 상징입니다. 갈릴리 호수에 임한 폭풍이 제자들을 심히 괴롭혔습니다. 불안하게 만들었고 죽을 것 같은 위기를 느꼈습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은“믿음”으로 이기라고 말씀하십니다.“두려워 말라”고 위로하십니다. 사도바울은 지중해의 폭풍우 속에서도 말씀을 꼭 붙잡았습니다. 어떤 폭풍우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안에서는 생수의 강이 흐릅니다. 밖에서는 생명수가 넘쳐납니다. 삶 속에 폭풍이 일어도 믿음가운데 말씀을 붙잡으면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내려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큰 복을 받은 우리들은 매일 매일 감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작은 일에도 감사가 넘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큰 일 뿐만 아니라 작은 일 속에서도 동일하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들은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안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고, 성소에서 은혜의 강물이 넘쳐나는데 왜 기뻐하지 않습니까?

바스커 빌이란 분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들의 일주일을 다음가 같이 표현했습니다.:“행복한 월요일, 복된 화요일, 즐거운 수요일, 유쾌한 목요일, 좋은 금요일, 영광스런 토요일, 하늘의 기쁨이 넘치는 주일.”

한 주간 힘차게 시작하십시오. -河-

능력의 통로 (2007.5.20)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원이 있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눈에 보일만큼, 마음으로 느낄 만큼 체험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어려운 일이 닥치면 하나님께서 즉각 개입하셔서 기적적으로(?)해결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언제나 신비로운 방법으로 또는 극적인 방법으로 임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실 때는 하나님 편에서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하나님 입장에서 이해해야지 우리들 입장에서 이기적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일상생활 속에 그대로 임합니다. 순간순간 숨을 쉬면서 살 수 있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건강을 주셔서 일터에 나가서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것도 은혜입니다. 하루를 마감하고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서 저녁식사를 하는 것만도 감사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셨기에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은 일상생활에 터를 잡고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때에 현재의 삶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작은 것까지 소중히 여기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면 때때로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을 경험합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커다란 기적이 임할 때도 있습니다.

모세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는 그가 40년간 광야생활을 하면서 양을 칠 때 갖고 다니던 지팡이였습니다. 손때가 묻은 평범한 지팡이입니다. 그는 지팡이를 갖고 양들을 보호했습니다. 때로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해서 계곡을 오르기도 했을 것입니다. 지팡이는 모세의 분신처럼 늘 옆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지팡이를 사용하십니다. 지팡이를 땅에 던지니 뱀으로 변했습니다. 지팡이를 들어서 홍해를 향해서 내뻗으니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별것 아닌 것 같았던 지팡이가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통로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를 사용하십니다. 새로운 것이나 신기한 것만 사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 손에 있는 일상적인 것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작은 것들까지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쓰시는 능력의 통로가 될 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河-

경청 (2007.5.13)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나아만 장군은 나무랄 데 없는 시리아의 장군이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용감했고 전쟁에 나갈 때마다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래서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남부러울 것이 없었던 나아만 장군에게 커다란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는 문둥병자였습니다. 당시에 문둥병을 앓는 환자는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멸시했습니다. 외모가 흉한 것은 물론이고 사회에서 격리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습니다. 아마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은 아주 심한 상태는 아니었나봅니다. 그래도 그가 문둥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는 무척 창피했고 괴로웠을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의 집에는 이스라엘에서 잡아온 어린 계집종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 여종이 나아만 장군의 아내에게 “이스라엘에 가서 선지자를 만나면 문둥병을 고칠 수 있다”는 말을 합니다. 하찮은 여종의 말이니 무시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나아만 장군과 그의 아내는 이스라엘 여종의 말을 귀담아 듣습니다. 나아만 장군의 위대한 점은 이처럼 그가 남의 말을 경청할 줄 아는 “듣는 귀”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이스라엘에 가서 선지자 엘리사를 만나게 됩니다. 엘리사는 나아만 장군에게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말합니다. 나아만 장군에게는 자존심이 무척 상하는 일입니다. 강물이야 어디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가 아주 신비로운 방법으로 문둥병을 고쳐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강물에 몸을 씻으라니 무척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때 그의 부하들이 나아만 장군에게 우리식으로 “밑져야 본전인데 한번 몸을 씻어보라”고 권합니다. 나아만 장군은 그들의 말을 듣고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씻습니다. 그리고 문둥병이 모두 낫게 되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의 위대함은 남의 말을 경청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에게는 듣는 귀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할 줄 아는 듣는 귀를 갖고 계십니까?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은 참 복 받은 사람입니다. -河-

폭풍속에서 (2007.5.6)

사도바울이 탄 배가 지중해를 건너갈 때 크레데 섬 근처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유라굴로라는 태풍이 불어왔습니다. 이 바람은 이다(ida)산맥에서 불어오는 동북풍으로 지중해를 항해하던 배의 방향을 어지럽혔습니다. 유라굴로라는 태풍이 불어오면 배가 아프리카 방면으로 밀리다가 모래톱이나 암초에 부딪히면서 결국 파선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 인생 가운데도 유라굴로와 같은 태풍이 불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어찌할 줄 모르고 방황하게 됩니다. 인생의 방향을 잃고 헤매기도 합니다. 폭풍우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태풍에 흔들리는 배처럼 표류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들이 취할 태도는 인생의 배에 필요 없는 짐들을 바다로 내 던지는 것입니다. 불필요한 인간관계, 마음속에 있던 욕심, 이웃을 향한 시기와 질투를 모두 내려놓고 꼭 필요한 마음가짐으로 재무장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기운을 차려야 합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힘을 내면 아무리 큰 인생의 폭풍이 다가와도 이길 수 있습니다. 기운을 차리다에 해당하는 헬라어“유투메오”는“즐거운 마음을 가지십시오, 용기를 내십시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길에 어떤 폭풍우가 다가와도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기운을 내십시오. 염려와 근심을 벗어버리고 의식적으로라도 즐거운 마음을 가지십시오.

마지막으로 믿음을 간직한 채 말씀을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말씀은 힘입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숨결이 말씀 속에 깃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힘들 때는 말씀을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외우고 자꾸만 되새기면서 말씀이 삶 속에 녹아들도록 해야 합니다. 올해 표어대로 우리 모두 말씀을 꼭 붙잡고 삽시다.

인생의 폭풍우는 언제나 불어옵니다. 예상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유라굴로처럼 갑자기 불어와서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그때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河-

믿음이란2 (2007.4.29)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그것도 여자와 어린아이를 제외하고 오천 명이라면 적어도 만 명 이상을 먹이신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들판에서 한 어린이가 가져온 도시락을 갖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배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엄청난 기적입니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치면서 예수님께로 몰려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을 재촉해서 먼저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가게 하십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본 제자들이 행여나 흥분하고 어깨를 우쭐할까 염려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해도 얼마나 기분이 좋고 능력 있는 분을 선생으로 모신 것이 자랑스러웠겠습니까? 무리들 앞에서 자신들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내세우고 싶으셨겠지요.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을 먼저 떠나보내시고 예수님은 산에 가셔서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단 둘이 밤새도록 조용한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사역과 복음을 전파했던 일들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을 놓고 하나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새 힘을 얻으셨을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름은 십자가 아래 내려놓고 오직 예수님의 이름만이 드높여지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믿음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요란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일이 잘 되었다고 우쭐해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한 자리에 앉아서 인기를 누리려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없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책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때 조용히 무릎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그 시간을 인생 가운데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시간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무리를 모두 떠나보내시고 홀로 산에 올라가셔서 밤새도록 기도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닮으려는 사람이 진정한 믿음을 가진 신앙인입니다. 당신은 진정한 믿음을 갖고 계십니까? -河-

믿음이란1 (2007.4.22)

누구에게나 인생의 폭풍은 밀려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인생의 폭풍우를 비켜나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난 월요일 동부에서 일어난 비극적 참사를 바라보면서 인생의 폭풍이 겉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님도 알았습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폭풍이 더 무섭다는 사실입니다. 병적이라고 하지만 한 젊은이 안에 쌓인 분노와 증오심이 정상적으로 해소되거나 분출되지 못했을 때, 차마 인간이 저지를 수 없는 사건으로 발전되고 말았으니까요. 안타까울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8장에서 폭풍을 다스리는 비결이 “믿음”이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외부에서 폭풍이 몰아치면, 믿음을 꼭 붙잡고 폭풍을 맞닥뜨려야 합니다. 폭풍을 향해서 “잠잠하라”고 명령하셨던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해야 합니다. 우리들 마음속에서 몰아치는 폭풍도 믿음의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서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그 이름의 권세가 우리 안에서 역사할 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폭풍도 잠잠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배 안에 타고 계신데도 제자들은 폭풍이 일자 야단법석을 떨었습니다. 갑자기 거세게 밀려오는 폭풍 앞에서 믿음이 힘을 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들에게는 예수님을 깨울 믿음이 있었음을 기억하십시오. 가장 급박한 순간에 예수님을 찾고 의지하는 믿음이 이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찾는 믿음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면 (설령 주무시고 계시더라도) 어떤 폭풍우가 밀려와도 염려할 것이 없다는 더욱 강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폭풍우가 밀려올 때나 평탄한 인생길을 갈 때나, 우리들 인생의 배안에 예수님께서 항상 함께 타고 계시다는 믿음도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이 시간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너의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당신께 있습니다.”라고 확실히 대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 믿음을 두고, 예수님 안에서 소망을 발견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인생의 어떤 폭풍도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河-

십자가의 은혜 (2007.4.15)

오늘까지 세 번에 걸쳐서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원래 극악무도한 죄인들을 매달아 죽이는 형틀이었습니다. 나무에 죄인들을 매다는 전통은 구약시대까지 올라갑니다. 신명기 21장에 보면 죽을죄를 범한 죄인을 나무에 달아서 사형에 처했습니다. 나무에 매달리는 형벌을 매우 저주받은 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던 로마시대에도 십자가형이 유행이었습니다. 당시는 로마가 세계를 제패하던 때였는데, 로마 황제에게 반역을 저지르거나, 식민지의 치안을 위협하는 중죄인들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구약시대와 달리 로마시대에는 주검을 십자가에 위에 며칠씩 내버려두었습니다. 일반인들에게 십자가형이 얼마나 처참한지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토록 못된 죄인들만 달리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대신 달려야 할 십자가인데 예수님께서 대신 달리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해결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에서 십자가를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부활의 능력을 힘입기 위해서는 꼭 십자가를 거쳐 가야 합니다. 특별히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들은 모든 죄를 용서함 받았습니다. 그리고 의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은혜요 우리들 신앙의 진수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할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먼저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그 몸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잇는 다리가 되셨습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우리 안에 능력을 더해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이렇게 우리 안에 선물로 임합니다. 선물을 받아 누릴 자격이 없는 우리들 안에서 그 은혜가 살아서 역사합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십자가의 은혜 속으로 깊-이 들어가시는 한 주간이 되기를 기도하겠습니다.-河-

벧세메스를 향하여 (2007.3.25)

오늘 설교한 본문은 제가 좋아하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힘겨울 때, 하나님 앞에서 모든 문제를 내려놓고 깊이 묵상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본문을 자세히 읽다보면 저절로 눈물이 흐릅니다. 젖을 떼지 않은 새끼소를 가진 암소 두 마리를 데려왔습니다. 이 암소들은 아직 한 번도 멍에를 메어보지 않았습니다. 이 암소 두 마리에게 멍에를 메게 하고, 새로 짠 수레를 연결시킵니다. 수레위에는 여호와의 궤를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이 암소들이 벧세메스를 향하여 가는지 안 가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두 마리의 암소가 마음을 합쳐서 벧세메스로 올라가야 합니다. 멍에를 처음 메었으니 얼마나 불편했겠습니까? 그래도 끝까지 멍에를 메고 언덕길을 올라야 합니다. 새끼 송아지들의 울음소리를 뒤로 하고 꿋꿋하게 수레를 끌고 벧세메스로 올라가야 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능력이 있으신 분임이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수레에에 싫은 암소들은 새끼 송아지가 보고 싶어 울부짖으면서도 좌로나 우로 치우침 없이 벧세메스로 올라갔습니다. 결국에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자신의 몸을 번제물로 드렸습니다. 비록 동물이지만 이들의 철저한 희생으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벧세메스로 올라가는 두 마리의 암소는 바로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을 연상시킵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면서 당한 고초와 조롱은 말로 할 수 없습니다. 아무런 죄도 없이 단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암소들이 번제물로 드려졌듯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 이득이 되는 일은 하나도 없었는데도…

우리들도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께서 오르신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가야합니다. 수레를 끄는 암소들처럼 우리들 각자의 벧세메스 언덕길을 울부짖으면서도 꿋꿋하게 올라가야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기 때문입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