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근심 걱정 말아라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찬송가 382장)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의 본성에 염려(sorge)가 깃들어 있다고 했습니다. 두려움이 외부에 구체적인 대상을 갖고 있다면, 염려는 우리 존재 안에서 생기는 감정입니다. 존재의 불안함입니다. 죽음이 그 끝에 있으니, 인간이라는 존재는 마지막을 의식하면서 불안해하고 염려한다는 것입니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염려는 우리가 미래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과 연결됩니다. 미래를 알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모든 사람이 염려를 갖고 삽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우리 안에 깃든 염려를 어떻게 관리하고 극복하느냐입니다.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지냅니다. 광야야말로 불안과 두려움, 미래에 대한 염려로 가득한 삶의 현장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셔서 먹거리에 관한 염려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발길을 인도하고 보호하셨습니다.

 

그래도 이스라엘은 불안했습니다. 약속의 땅이 눈앞에 있는데도 염려했습니다. 그때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을 의지할 것을 부탁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보다 앞서 가셔서 길을 만드실 것입니다: “그리하면 여호와 그가 네 앞에서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신31:8).

 

찬송가 382장 <너 근심 걱정 말아라>는 시빌라 마틴(Civilla Martin, 1866-1948)과 그의 남편이자 목사인 월터 마틴(Walter Martin, 1862-1935) 부부가 각각 가사를 쓰고 곡을 붙여서 탄생했습니다. 마틴 목사가 시골의 작은 교회에 설교하러 가는 날, 부인이 갑자기 아파서 설교를 취소할 생각을 합니다. 그때 아홉 살 먹은 아들이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는다면 설교하러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놀라운 말을 합니다. 아들의 말을 듣고 마틴 목사는 설교하러 떠났고, 그사이 부인 시빌라 마틴이 시를 씁니다. 남편이 돌아왔을 때 세 가족이 만든 찬송이 바로 <너 근심 걱정 말아라>입니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의 영어 제목은 <하나님이 당신을 돌보실 것입니다 God will take care of you>입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시는데 왜 근심하고 걱정하느냐는 찬송입니다. 매일 같이 그리고 항상 하나님께서 지키고 돌보실 것이라는 찬송입니다. 아홉 살 먹은 아들의 말을 따라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복음을 전하러 갔던 마틴 목사 부부의 신앙 고백입니다.

 

새달 5월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도 앞길을 알지 못하니 우리를 지키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주어진 인생길을 걸어갈 뿐입니다. 존재 한 가운데서 생기는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걷는 새달이 되기를 원합니다. -河-

이렇게 기도하라 (6)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여섯 번째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하나님의 뜻이 세상에도 이뤄지길 기도했습니다. 완벽한 기도입니다. 그다음에는 일용할 양식을 주시길 기도했습니다. 일용할 양식은 육적인 건강함을 위함이었고, 죄를 용서하고 용서받는 것은 영적인 건강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시험(temptation)에 들지 말고 악에 빠지지 않기를 기도하라고 부탁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나가서 40일 동안 금식하셨을 때, 마귀가 찾아와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성경에서 악한 것들은 악한 영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니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서 건져 주시길 기도하는 것은 악한 세력에 넘어가지 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길에 굳건히 서 있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의 순례길에 시험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내적인 시험은 마음에 의심과 부정적인 회의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실재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 약속에 시비를 겁니다. 교회 생활이나 가정생활에도 그리스도인 답지 않은 언행이 시작되고 자꾸 하나님에게서 멀어집니다. 자기도 모르게 시험에 빠집니다. 악한 세력에 넘어간 결과입니다.

 

외적인 시험은 유혹입니다. 요즘에는 세상의 유혹이 매우 큽니다. 관계가 깨지면서 용서하고 용서받는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시비와 분쟁과 경쟁이 겉으로 드러납니다. 개인은 물론 교회 공동체에 손해를 끼치는 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시험입니다.

 

시험에 대비하고 시험에서 벗어나는 것은 예수님 말씀대로 깨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막14:38).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허락하신다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시험을 견디고 극복해야 합니다(고전10;13).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 있듯이 바위에 뿌려진 씨는 시험이 닥치면 마르고 맙니다. 좋은 밭에 뿌리를 깊이 내린 신앙이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흔들림 없는 견고한 신앙입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에서 앞에 나오는 “다만”이 눈에 띕니다. 헬라어 본문은 “그러나”라는 단어입니다. 지금까지 기도한 모든 것에 더해서 악에서 건져주시길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악한 세력의 지배를 받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통한 자유와 해방입니다. 악에서 선으로 옮겨지는 것이 신앙입니다. 따라서 악에서 구해주시길 기도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요한 웨슬리는 여섯 번째 기도를 다음과 같이 다시 썼습니다: “주님, 우리가 유혹을 받을 때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우리에게 피할 길을 마련하셔서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게 하소서.” -河-

이렇게 기도하라 (5)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에 이어서 등장하는 다섯 번째 기도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2절)입니다.

 

죄를 용서받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전제 조건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주기도문 후에 다섯 번째 기도에 대한 부연 설명이 나옵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14-15절).

 

그런 점에서 주기도문의 다섯 번째 기도는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용서라는 실제적인 행동과 연결됩니다. 기도는 말이 아니라 삶입니다. 삶으로 연결되고 삶이 변화되지 않는 기도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뜻 없는 말을 반복하는 중언부언에 그칠 것입니다.

 

다섯 번째 기도를 헬라어 본문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해 준 것 같이 우리 빚을 탕감해 주시고(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죄를 빚으로 표현했습니다. 죄를 용서하는 것은 빚을 갚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 빚을 모두 갚아 주셨습니다. 우리 힘으로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을 탕감받았습니다.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고 그들의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 정상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천국의 비유가 나옵니다. 주인이 1만 달란트(노동자 한 명의 6천만 일치 임금)의 빚을 진 사람에게 빚을 갚지 못하면, 가족들 모두 종이 되고 남은 재산을 팔아서 갚으라고 독촉합니다. 빚진 자가 모두 갚을 테니 조금만 봐 달라고 간청합니다. 주인이 종을 불쌍히 여겨서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백 데나리온(100일 임금에 해당) 빚진 사람이 있었는데, 만 달란트를 탕감받고 나오면서 그 사람을 고소해서 감옥에 넣어버립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이 원래 주인에게 알리니 주인이 노발대발하면서 만 달란트 탕감받은 사람을 다시 불러들여서 감옥에 가둡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했다면, 이웃을 용서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것이 천국의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형제가 우리에게 빌려 간 백 데나리온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 정상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입고서 작은 것을 용서하지 않는 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용서는 그리스도인이 꼭 해야 할 의무입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 매우 의미심장합니다.-河-

 

이렇게 기도하라 (4)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고, 하나님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길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모시겠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모든 뜻이 세상에 임하길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자연스럽게 우리에 대한 기도로 넘어갑니다. 첫 번째가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입니다. 여기서 “일용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우시오스>가 관심을 끕니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에만 각각 등장합니다. 초대 교회의 신학자 오리겐은 <에피우시오스>가 육신의 양식(떡)이 아니라 우리 존재에 꼭 필요한 영적인 떡을 가리킨다고 주장했습니다. 오리겐의 관점을 계승한 견해가 교회에 많이 있었는데, 헬라어 <에피우시오스>는 시간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개역 성경은 물론 영어 성경에 보면 “일용할 양식”에 “내일 양식”이라는 주(註)를 달아 놓았습니다. 헬라어 <에피우시오스>에 다음 날이라는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기도문의 네 번째 기도를 다음과 같이 읽을 수도 있습니다:“오늘날 우리에게 내일의 양식을 주옵시고.”

 

헬라어 <에피우시오스>를 어떻게 해석하든지 네 번째는 매일 같이 필요한 양식을 공급해 주시길 구하는 간청입니다. 예수님 당시 하루 벌어서 하루를 먹는,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어려운 백성들의 삶이 기도 속에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에서 나온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매일같이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신 것과 연결됩니다. 안식일을 제외한 평일에는 하루분 양식만 가져가야 했습니다. 욕심을 내서 더 가져가면 다음 날 썩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매일의 삶을 책임져 주심을 믿고,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마실지에 대한 내일의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는 훈련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일용할 양식에 세 가지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첫째는 실제로 우리의 일상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대표적인 것이 먹거리였으니 양식으로 표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는 간청의 기도입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부탁하신 성찬의 떡입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으로 오셨음을 믿고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하라는 말씀입니다. 셋째는 신앙에 꼭 필요한 영적인 양식, 즉 생명의 말씀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매일 읽어야 할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고 그것으로 살겠다는 결심이 기도 속에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십니다. 우리 역시 욕심부리지 않고 꼭 필요한 것에 만족하고 감사해야 합니다(잠30:8). 거친 세상을 살면서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기 원합니다. -河-

이렇게 기도하라 (3)

뜻이 이루어지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한 주기도문은 하나님을 향한 세 가지 기도로 이어졌습니다:“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6:9-10).

 

지난주에는 처음 두 가지 기도를 살펴보았습니다. 한 주간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삶이 되길 기도하고 결심했습니다. 가는 곳에 의와 평화와 기쁨의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하나님 백성의 삶이 되길 간절히 바랬습니다. 단순하게 기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한 것을 삶으로 살고 드러내길 원했습니다. 그때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도 마지막은 하늘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진 것같이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길 바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려는 목적 또는 하나님의 열망(desire)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따라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을 창조 세계의 청지기로 임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을 등지고 거꾸로 갔습니다. 그 결과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했지만,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배반한 인류를 다시 부르기 시작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특정 민족을 선택하셨고, 급기야 하나 뿐인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이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알고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딤전2:4).

 

앞에서 기도한 대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이뤄지고,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 곳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완벽히 이뤄진 상태가 곧 하늘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 중에 거하시는 거룩한 나라입니다. 그 나라가 이 세상에도 임하길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주기도문 세 번째입니다:“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돌아봅니다. 인간의 욕망이 판을 칩니다. 시기와 질투, 미움과 분열, 목숨을 빼앗아가는 각종 사고와 전쟁이 그치지 않습니다. 경쟁에서 승리해서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적자생존의 정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철저히 무시되고, 의와 평화와 기쁨의 하나님 나라와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던 2천 년 전의 팔레스타인도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도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길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이뤄드리는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길 바랍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