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

안디옥 교회 (1): 새로운 교회

 

오늘부터 신약성경 사도행전을 본문으로 주일설교를 시작합니다. 오래전 주일예배에서 나눈 적이 있기에, 그때 빠뜨린 본문을 마저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가 기록한 두 번째 책입니다. 누가복음이 예수님의 탄생에서 부활까지 기록했다면, 사도행전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약속하신 대로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면서 예루살렘부터 땅끝까지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을 기록했습니다. 누가복음이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으로 시작해서 예루살렘에서 마무리되었다면,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유다와 사마리아, 세 차례에 걸친 사도 바울의 전도 여행을 통한 땅끝까지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을 기록하였습니다.

 

앞으로 두 시간에 걸쳐서 살펴볼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하면서 땅끝까지 복음이 전해지는 전초기지가 되었습니다. 당시에 안디옥은 로마와 북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로마제국 3대 도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주전 300년경 알렉산더 대제의 후예들인 셀류시드(안티오커스)에 의해서 세워진 이래, 로마 시대까지 동서 무역과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바울 당시에 안디옥은 인구가 30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 대도시였습니다.

 

스데반의 순교와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로 사도들과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아프리카 북부 지방 구레네와 지중해의 섬나라인 구브로 출신 사람들이 안디옥에 도착해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이들은 안디옥에 있는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주님의 손길이 함께 하시니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소식이 300마일 떨어진 예루살렘에 전해졌습니다. 안디옥과 같은 큰 도시에 복음이 전해진 것과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놀라운 소식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지도자로 있던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송했습니다. 바나바는 제사장 지파인 레위 족속이고 자기 밭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내놓을 정도로 헌신 된 사도였습니다. 바나바의 고향인 구브로 출신 성도들이 안디옥 교회 개척 멤버로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로 구성된 안디옥 교회를 인도하기에 매우 적합한 인물이었습니다. 사울까지 데리고 와서 함께 안디옥 교회를 세우니 교회가 든든해졌습니다. 가뭄으로 예루살렘 모 교회에 구제헌금을 거둬서 바나바와 사울 편에 보낼 정도였습니다. 이제부터는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이어받아서 복음 전도의 전초기지가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河-

새롭게 시작합시다 (7)

슬픔에서 희망으로

 

2022년 임인년 새해가 시작된 지 한 달 반이 훌쩍 지났습니다. 오래 가지 않을 것 같았던 팬데믹은 꼬박 2년째 접어 들고 있습니다. 지난 2년여 우리 교회도 예기치 않게 영상 예배를 실시했습니다. 처음에는 카톡으로 시작해서 현재는 유튜브로 실시간 예배를 전송하고 있습니다. 참빛 식구들께서도 부지런히 예배에 참석하셨고 교회를 지켜 주셨습니다. 한 마음으로 견딘 지난 2년의 팬데믹 기간이었습니다.

 
올해는 정상으로 복귀할 것을 기대하면서 <새롭게 시작합시다>라는 교회 표어를 정했습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고, 팬데믹 이후의 일상을 맞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완전히 회복된 것이 아니기에 구약 성경의 예레미야 애가서를 본문으로 택해서 지난 7주 동안 말씀을 나눴습니다. 애가서 한 가운데 있는 소망의 말씀이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서는 독특한 하나님 말씀입니다. 전체가 다섯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처음 네 장은 각 절마다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시작합니다. 영어로 하면 A부터 Z까지 알파벳 순서대로 각 절이 시작하는 방식입니다. 히브리어 알파벳은 모두 스물 두 자입니다. 우리가 살펴보았던 애가서 3장은 히브리어 알파벳 한 글자에 세 구절을 배치해서 전체 66절로 구성된 것도 특징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애가서 5장은 알파벳 순서가 아니지만 알파벳 숫자를 반영해서 22절로 마무리했습니다.

 
이렇게 히브리어 알파벳을 두운으로 삼고 말씀을 기록한 것은 무엇보다 고대 시대에 암송과 교육을 위한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운을 띄어주면 쉽게 풀어나가듯이 모든 사람이 글을 읽고 쓰지 못하는 당시에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운을 띄우면서 말씀을 암기하고 익혔을 것입니다. 애가서 외에도 구약 성경에는 시편 37편과 119편처럼 지혜를 알려주는 말씀에서 아크로스틱(Acrostic) 구조라고 불리는 알파벳 순서로 기록된 본문이 있습니다.

 
이처럼 애가서는 성전이 무너지고 나라까지 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슬픔을 알파벳 순서대로 낱낱이 기록했습니다. 훗날 슬픔을 경험한 하나님 백성들 역시 애가서를 읽으면서 자신들에게 닥친 슬픔을 낱낱이 헤아리고 하나님 앞에서 풀어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본 애가서 3장처럼 슬픔 너머 소망까지 완벽하게 역사에 새기기 위해서 알파벳을 동원해서 말씀을 기록했을 것입니다.

 
애가서를 마무리하면서 우리의 삶과 신앙을 처음과 나중이신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날마다 새로우신 주의 성실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河-

새롭게 시작합시다 (6)

주께서 다 보셨나이다

 

<새롭게 삽시다>라는 올해 교회 표어를 갖고 살펴보는 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예상치 못한 오미크론 바이러스로 팬데믹 상황이 연장되어서 지역 경제도 다시 얼어붙고 사람들의 마음에 어두운 구름이 짙게 드리웠지만, 전문가들이 예상하듯이 이번 변이 바이러스가 코비드 바이러스의 막판 주자이길 기대합니다.

 

팬데믹이 아니어도 1년 365일을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목적지를 향하는 여행으로 생각했을 때, 곧게 뻗은 고속도로를 만나기도 하지만, 중간에는 구불구불한 언덕길, 울퉁불퉁한 자갈길, 때로는 바퀴가 빠져서 애를 먹는 진흙탕 길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녹록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난 시간에 함께 나누었듯이, 하나님을 경험했던 과거의 일들이 차곡차곡 쌓이면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어려움 한가운데서 “하나님”을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확신하고 믿음으로 헤쳐나가는 것입니다. 2022년을 살아가는 믿음의 길도 앞으로 살아갈 인생길에 자산으로 축적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믿음의 자산이 쌓여갈 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우리 신앙과 삶에 구체화되고 힘이 될 것입니다.

 

한 해를 살면서 피할 수 없는 것이 관계의 문제입니다. 가족과 교회 식구들은 물론 직장의 동료들과 이웃과의 관계가 힘들 수 있습니다. 사소한 만남도 힘든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물건을 사고 마음에 들지 않아서 교환하러 갔지만, 상점에 있는 사람이 쉽게 바꿔주지 않을 때도 관계는 힘들어집니다. 요즘처럼 민감한 때는 감정이 쉽게 상하고 사소한 일을 갖고도 시비가 붙을 수 있어서 조심스럽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모든 만남과 관계 속에 예상치 못한 복병이 숨어 있습니다.

 

억울하고 원통한 만남과 관계도 있습니다. 누구에게 말하기도 힘든 미묘한 관계도 있습니다. 혼자서 끙끙 매는 관계도 많습니다. 자신은 내려놓았지만, 상대방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으니 관계의 진전이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으니 힘이 빠집니다. 관계가 깨졌을 때, 찾아오는 아픔이 매우 큽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 애가 기자는 하나님께 나와서 원통함을 풀어주시길 간청합니다. 본문에 “보다(see)”라는 동사가 반복되는데, 하나님께서 억울함을 보셨습니다. 원수들이 보복하려고 달려들고 앞뒤에서 모함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시니 하나님께 나와서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매듭을 풀어주시고 해결해 주시길 간청하고 있습니다.

 

올 한 해를 새롭게 시작하지만, 관계로 인해서 어려운 일이 종종 닥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 나와서 마음을 토해내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원합니다. -河-

새롭게 시작합시다 (5)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어려울 때 기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너무 힘들어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때는 조용히 하나님 앞에 나와서 침묵하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신실하심과 주님의 은혜를 잠잠히 바라는 시간입니다. 조용한 기도에도 힘이 있습니다. 깊은 기도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찾기 때문입니다.

 
<새롭게 시작합시다>라는 올해 표어에 맞춰서 살펴보는 예레미야 애가서에 조용한 기도가 등장했습니다.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리는 기도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십니다”라고 고백하면서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춘 기도라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의 대부분은 부르짖고 외치는 기도입니다. 상황이 어려우니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초저녁부터 눈물로 하나님을 찾습니다.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구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것과 그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심(히11:6)을 확실히 믿고 드리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자기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결국에는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겪게 하시는 것도 선을 이루기 위한 과정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진심(眞心)을 확신하고 간절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깊은 구덩이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해서 벌을 받는 것은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와서 회개하고 다시 주님의 인자와 긍휼을 구하면서 소망을 발견하면 됩니다. 그런데 어려움이 닥치니 조롱하고 업신여기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어려운 틈을 타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제압하려는 무리도 있습니다. 생명을 끊으려고 구덩이에 넣고 그 위에 돌을 던지고 물을 붓는 악한 사람들입니다(3:53).

 
그때 애가서 기자가 “여호와여”라고 하나님을 부릅니다. 깊은 구덩이에 빠진 채로 하나님을 부르는 간청입니다.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외침입니다. 간절한 기도였을 것입니다. 알고 보니 이전에도 어려울 때마다 기도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이 과거 시제를 채택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음성에 귀 기울이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기에 깊은 구덩이에서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쌓아온 믿음의 자산을 갖고 탄식하며 부르짖는 확신의 기도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올 한 해 우리의 삶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 쉬운 삶은 없습니다. 어떤 상황이든지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의 임재와 도움을 체험하기 원합니다. -河-

 

새롭게 시작합시다 (4)

– 인자하심을 따라

 

예레미야 애가서를 읽으면서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대하시는 것이 너무 심하게 느낄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충분히 경고하셨고, 이스라엘의 죄악도 용서받기 힘들었지만,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보면서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멍에를 메우셨다고 말하니, 그 다음에 이어지는 선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고개를 갸웃하게 됩니다. 그 와중에도 하나님을 기업삼고 아침마다 새롭게 찾아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난다는 애가서 말씀이 대단하게 다가옵니다.

 

애가서 속의 하나님은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는 구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신명기서로 대표되는 구약의 정통 신학은 인과응보입니다. 그에 반기를 드는 욥기같은 말씀도 있지만, 대부분 구약성경은 죄와 벌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애가서 역시 이 같은 구약의 큰 흐름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애가서 처음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그리고 오늘 본문(33절)에도 알려 주듯이 백성들에게 벌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본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잠시 벌을 주어서 힘들게 하시지만, 결국에는 구원하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도를 지나칠 정도로 악해서 보통 벌을 갖고는 뉘우칠 가능성이 없으니 하나님께서도 궁여지책으로 큰 재난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역시 “인자와 긍휼”이라는 하나님의 마음에 따른 것입니다. 겉으로는 자기 백성을 심판하지만, 하나님 마음 깊은 곳에는 언제나 변치 않는 인자(헤세드)와 어머니 같은 긍휼(레헴)이 자리잡습니다. 그러니 재난으로 인해서 고난 받는 이스라엘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결국에는 구해 내실 것입니다.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이 여기실 것임이라”(32절)는 말씀이 당시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소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고생하게 하시고 근심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절대 아닙니다. 또한 여기서 “근심”은 힘든 일이 겹치면서 찾아오는 슬픔입니다. 애가서의 슬픔은 죽은 자를 애도할 정도였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영원히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이 우리가 마음에 품어야 할 신앙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믿음이 확고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입술을 땅에 대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혹시라도 소망을 주실 것을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