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왕

2004년에는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남아시아에 쓰나미가 덮쳐서 2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날은 성탄절 다음 날이었습니다. 성탄절 휴가로 태국을 비롯한 휴양지에 모였던 사람들이 대부분 희생되었기에 더욱더 안타까웠습니다.

 
올해도 성탄절을 보름 정도 앞두고 미국 중서부에 토네이도가 밀어닥쳤습니다. 토네이도 경보에 미리 몸을 피했음에도 불구하고 100여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집을 비롯한 재산을 잃은 사람들은 매우 많습니다. 이재민들에게 2021년 성탄절은 기쁜 날이 아니라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슬픈 날이 될 것 같습니다.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실 때도 세상은 혼란스러웠습니다.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고, 예루살렘에는 이두메(에돔) 출신 헤롯 일가가 로마의 섭정 아래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 이권을 챙기는 데 혈안이 되었고,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은 로마 황제에게 인정받는 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소위 암 하렛츠(땅의 백성)라고 불리는 일반 백성들은 굶주리고 지쳐 있었습니다. 희망이 없었습니다.

 
들에서 양을 치고 있던 목자들도 비슷한 처지의 백성들이었습니다. 밤에 양을 칠 정도면 목자들 가운데서도 그들의 순번이 꽤 아래에 속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탄생을 들에 있던 목자들에게 제일 먼저 알리셨습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2:7).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 온 세상을 구할 그리스도께서 나셨다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목자들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서 경배하고 베들레헴 사람들에게 구주가 태어났다고 천사들이 알려준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천군 천사가 하늘에서 찬양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예수님께서 세상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평화가 없는 세상이었기에 예수님께서 오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평화를 찾기 어렵습니다. 자연재해와 전염병 그리고 사람들 마음속에 깃든 시기와 질투 그리고 분쟁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아름다운 세상을 먹물처럼 흐려 놓았습니다. 그래서 평화의 주님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합니다.

 
다시 한번 주님의 평화를 구합니다. 우리 마음에 임한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를 세상에 전하기 원합니다. 천군 천사처럼 하늘에서는 영광, 땅에서는 평화라고 찬양하면서 성탄절을 맞기 원합니다. -河-

사랑받는 형제 빌레몬 (6)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빌레몬서는 한 장 밖에 되지 않고, 바울과 오네시모 그리고 빌레몬 세 사람만 등장하는 단출한 말씀이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하나님을 믿는 진실한 신앙과 사랑이 잔뜩 베어져 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면서 빌레몬에게 잘못하고 도망친 종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종이 아닌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 주길 부탁했습니다. 오네시모가 로마 감옥에 있는 바울을 만났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서 바울의 심복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알리지 않고 오네시모를 데리고 있을 수 있었고, 알리더라도 명령조로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자기에게 보내라고 강요할 수 있었지만, 신사적으로 부드러운 마음과 말씨로 빌레몬에게 부탁했습니다. 빌레몬이 “자의로”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바울의 부탁을 들어주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절차의 중요성과 믿음의 백성들이 서로 배려하는 품격을 느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잘못했거나 행여나 재정적으로 손해를 끼친 것이 있으면 자신이 대신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오네시모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같은 주님을 믿는 형제로 받아주라는 부탁입니다. 바울은 믿음과 사랑의 사람 빌레몬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빌레몬이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것을 확신합니다: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21절).

 
바울의 부탁이 매우 특별한 것이었지만, 바울과 빌레몬 사이에는 흔들림 없는 신뢰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오네시모 역시 옛 주인 빌레몬과 새로 섬기기 시작한 바울의 믿음과 성숙함을 보면서 감동을 받고 더욱더 새로운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훗날 오네시모라는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배출되는데 바울이 아들이라고 말했던 빌레몬서의 오네시모라고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무엇보다, 빌레몬서를 읽으면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하나님을 연결해 주신 예수님과 바울이 겹쳐서 떠오릅니다. 오네시모가 갚아야 할 빚이 있다면 바울이 대신 청산해 주겠다는 말에서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르고, 우리와 주인 되신 하나님을 이어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합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등지고 떠날 때가 많이 있으니 오네시모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빌레몬서는 골로새 교회를 넘어서 그 이후에 예수님을 믿게 된 하나님 백성들에게 큰 은혜를 끼쳤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화평케 하는 자로 살기 원합니다. -河-

 

사랑받는 형제 빌레몬 (5)

사랑받는 형제로

 

빌레몬서의 주인공은 세 사람입니다: 편지를 쓴 사도 바울, 바울의 편지를 갖고 빌레몬을 찾은 오네시모, 바울의 편지를 받는 빌레몬.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편지를 써서 오네시모 편에 빌레몬에게 보냈습니다. 바울의 편지는 도망친 종 오네시모를 주인 빌레몬이 용서하고 받아 주길 부탁하는 내용입니다.

 

세 사람 모두 조심스러운 입장입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동역자 빌레몬에게 어려운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도망친 종을 받아 주는 것이 관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바울은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종이 아니라 자기처럼 “사랑받는 형제”로 받아 주길 부탁합니다. 종을 넘어서 자유인으로 대우해 달라는 것입니다.

 

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나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고, 바울이 그를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내 심복”이라고 불렀지만,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는 큰 상처와 손해를 입힌 도망친 종입니다. 그렇다면 그에 합당한 벌을 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형제로 대우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면 사도 바울의 증언(편지)뿐입니다.

 

오네시모도 도망친 노예들이 당하는 처벌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자신을 다시 살려준 사도 바울을 믿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빌레몬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 태어난 오네시모 역시 옛 주인을 만나서 자기 잘못을 솔직히 고백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인이 자기를 어떻게 대할지 알 수 없으니 큰 모험을 감행한 셈입니다. 두려웠을 것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보내지 않고 로마 감옥에서 바울 자신을 섬기도록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랑하는 빌레몬을 향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빌레몬의 승낙을 받고 오네시모를 곁에 두고 함께  동역하려는 것입니다. 빌레몬이 기쁨으로 바울의 부탁을 받아 주길 기대하고 있습니다:”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14절).

 

바울은 오네시모를 단지 종이 아니라 사랑받는 형제로 자기 곁에 두겠답니다. 그러니 빌레몬도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오네시모를 대해 주길 부탁합니다. 행여나 오네시모가 여전히 잘못한 것이 있으면 바울이 보증을 서고 책임지고 갚겠답니다. 바울은 빌레몬과 오네시모 가운데 서서 두 사람을 용서와 화해의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를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주의 형제가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세 사람의 신뢰가 전제된 파격적인 부탁입니다.

 

우리에게도 빌레몬서의 세 인물과 같은 신뢰가 형성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 안에서 용서와 화해를 경험하는 참빛 식구들 되시기 바랍니다.-河-

사랑받는 형제 빌레몬 (4)

내 심복이라

 

빌레몬서는 주인인 빌레몬에게 손해를 입히고 도망한 종 오네시모를 형제로 맞아주라는 바울의 부탁입니다. 골로새 교회의 지도자, 빌레몬에게는 믿음과 사랑이 있었고, 성도들과 믿음의 교제를 통해서 선한 일은 물론 예수님께 자라가는 힘이 있었습니다. 성도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평안을 주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에게도 큰 기쁨과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빌레몬은 예수님을 닮은 멋진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4-7절).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이었다가 도주한 노예입니다. 구약성경에는 도주한 종을 환대하고 보호하라는 말씀이 있지만(신23:15-16), 초대 교회 당시는 종이 주인을 버리고 도망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도주한 종을 보호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고, 종이 다시 주인을 찾아와도 쉽게 용서해 주지 않았습니다.

 
빌레몬에게서 도망한 오네시모는 로마 감옥에 있는 바울을 만나서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향해서 자신이 낳은 아들, 나의 심복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여기서 “심복”이라는 말은 바울이 오네시모를 온 마음으로 사랑했고, 오네시모 역시 바울의 마음을 헤아리며 최선을 다해서 섬겼다는 뜻입니다. 7절에서 빌레몬이 “성도들의 마음”을 새롭게 하였다고 했는데, 마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플랑크나>가 심복에도 쓰였습니다.

 
오네시모의 이름은 “유익함(benefit)”이라는 뜻입니다. 주인을 버리고 도망한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무익한 종입니다. 그런데 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나면서 그의 이름 뜻대로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1절). 무익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크레스토스>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상태를 가리키는 헬라어 발음에 매우 가깝습니다. 오네시모가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무익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을 만나고 예수님 안에서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전과 현재가 완전히 바뀐 바울의 심복이 된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감옥에 있는 바울을 계속 돕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주인인 빌레몬의 용서와 승낙 없이 오네시모가 자기를 돕는 것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네시모를 주인인 빌레몬에게 보낸 것입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믿음과 사랑의 사람 빌레몬이라면 할 수 있었기에 바울이 부탁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세심하게 일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절차를 무시하지 않고 빌레몬과 오네시모 사이를 중재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관계의 회복입니다. 신앙은 변화입니다. 신앙은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주님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河-

사랑받는 형제 빌레몬 (3)

– 사랑으로

 

오늘은 추수 감사 주일입니다. 우리가 농사를 짓지 않으니 “추수”라는 표현을 앞에 부치는 것이 어색합니다. 그래도 한 해의 삶을 결산한다는 의미에서 추수 감사절입니다. 영어 표현 그대로 “감사 주일 (thanksgiving Sunday)”이라고 불러도 좋겠습니다.

 

우리는 2021년 한 해도 팬데믹을 살았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이렇게 오랫동안 세상을 괴롭힐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래도 백신 접종이 계속되면서 치명적인 환자들이 줄었고 우리 지역은 “위드 코로나”에 가깝게 일상을 회복했습니다. 올겨울만 넘기면 내년 봄부터는 훨씬 자유로운 세상이 찾아올 것을 기대합니다. 우리 교회도 내년 3월에 완전체로 모이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전까지는 조심하면서 각자 신앙의 자리를 지켜야겠습니다.

 

감사절은 한 해를 지켜 주시고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무엇보다 어둠과 죽음의 세력에서 우리를 구해서 빛으로 인도하신 생명의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신앙을 갖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때로는 힘겹지만, 이 길이 진리와 생명의 길임을 믿고 한 해를 산 것도 주님의 은혜입니다.

 

팬데믹이라는 어려운 시간을 함께 견딘 가족들과 참빛 식구들께도 감사드립니다. 가족이 있기에 어려운 시간을 견뎠습니다. 예배로 함께 모이지 못해도 각자의 자리에서 기도하며 마음으로 격려하고 힘을 주는 참빛 식구들이 계셔서 감사했습니다.

 

팬데믹을 지날 수 있도록 백신을 개발하고 환자들을 진료한 과학자들과 의료진들, 전염병 관리에 온 힘을 쏟은 행정당국과 어려운 시간에도 각자 생업의 자리를 지키고 개인 생활까지 희생하면서 정부의 지침을 따른 모든 분께도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온 인류가 이렇게 한마음이 되어서 전염병과 싸운 적도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의 승리입니다.

 

우리가 살펴보는 빌레몬서에서 바울이 골로새 교회의 지도자 빌레몬을 생각하면서 감사했듯이 우리도 한 해를 돌아보니 감사할 가족과 친지 그리고 이웃이 많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만, 구체적인 도움을 주고받은 이웃에게도 꼭 감사해야겠습니다.

 

오늘 빌레몬서 본문처럼 감사 속에는 “사랑”이 숨겨져 있습니다. 매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았을 때 감사가 생깁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놀라운 주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감사절을 맞는 참빛 식구들께 주님의 사랑이 넘치고 그 사랑이 이웃에게 전파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