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대강절 셋째 주일 성서 일과(lectionary) 본문 가운데 이사야서 말씀을 함께 나눕니다.

 

이사야서 35장은 바로 앞에 위치한 34장과 함께 이사야서 전체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이사야서의 전반부인 1-33장을 요약한 것이 34장이라면, 후반부 40-66장을 미리 내다보며 앞길을 제시한 말씀이 35장이기 때문입니다. 36-39장은 열왕기서(왕상 18-20장)에도 등장하는 본문으로 이사야의 예언이라기 보다는 첨가된 말씀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사야서 34장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힘을 과시하는 이방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원래 의도는 모든 민족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떠난 열국은 심판의 대상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을 진멸하고 살육했듯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대신해서 보복하실 것입니다. 비옥했던 땅이 황무지로 변할 것입니다. 인간의 문명이 발달해서 자랑하던 세상이 모두 무너지고, 승냥이와 타조와 같은 들짐승들이 세상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이사야서 35장은 34장의 심판에 이은 회복의 약속입니다. 땅이 회복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고 사막에 백합화가 펴서 즐거워합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세상 제국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모두 진멸하셨으니 약한 손을 강하게 하고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면서 일어서야 합니다. “굳세어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4절)고 확신을 갖고 강력하게 선포할 시간입니다.

 

5-10절은 회복된 하나님 나라의 완벽한 모습입니다. 보지 못하는 사람이 보게 되고 듣지 못하는 귀가 열릴 것입니다. 눈을 뜨게 하시고 보게 하신 예수님의 사역과 맞물립니다. 예수님께서 지체 장애자들을 걷게 하셨고 언어 장애자의 입을 풀어 주셨듯이 그 날이 되면 “저는 자가 사슴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할 것입니다.

 

광야에서 물이 솟고 사막에 시내가 흐를 것입니다. 사막이 초원으로 변하고 그곳에 “거룩한 길”이라는 대로가 생길 것입니다. 거룩한 길에는 사자와 같은 사나운 짐승이 출몰하지 않습니다. 그곳은 구속함을 받은 사람만 걷게 됩니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노래하면서 시온으로 나옵니다. 시온은 역사적으로 예루살렘을 가리키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거기는 슬픔과 탄식이 없고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만 있습니다. 할렐루야.-河-

소망의 하나님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대강절 둘째 주일 성서일과(lectionary) 본문 가운데 로마서 말씀을 함께 나눕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대로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이새[다윗의 아버지]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12절; 사11:1).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은 단지 유대인들을 위함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열방, 모든 민족에게 구원과 새로운 소망을 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었다면, 예수님은 열방을 다스리는 만유의 왕이 되실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소개하면서 구약 성경의 토라(모세오경), 예언서, 성문서를 두루 인용합니다. 구약 성경 전체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실 메시아 예수님을 향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모든 인류에게 미칠 것이며, 모든 열방이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으로 시작되는 조상들과 하나님 간의 언약을 무시하지 않으셨습니다. 할례의 추종자가 되실 정도였습니다(8절).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신다는 믿음의 전통에 서신 것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가장 중요한 신앙의 핵심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머물지 않으시고 믿음의 지평을 이방인을 향한 긍휼하심으로 확장하셨습니다. 믿음과 함께 필요한 것이 사랑임을 배웁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신앙과 생각의 지평을 활짝 열기 원합니다.

 

믿음으로 우리의 신앙을 견고하게 뿌리내립니다. 사랑으로 믿음의 지평을 온 세상으로 확대합니다. 그리고 온 열방이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날을 마음에 그립니다:“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하라”(롬15;11;시117:1).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가장 큰 이유입니다.

 

본문 속에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5절)과 “소망의 하나님”(13절)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모든 열방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도 작은 발걸음으로 시작합니다. 당장 바울이 편지를 보내는 로마 교회는 연약한 자들(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으면 안 되고 채소만 먹어야 한다는 유대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비난하거나 배제하지 말고 받아 주길 부탁합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인내와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믿음이 견고해도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사랑으로 완성되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동참하기 원합니다. 서로를 받아주고, 덕을 세우면서 사랑의 공동체를 세우기 원합니다. 소망의 하나님께서 성령 안에서 능력을 주시고 기쁨과 평안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河-

내 주여 뜻대로

연속 설교 막간에 살펴보는 찬송가 해설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번 찬양대가 찬송가 549장 <내 주여 뜻 대로>을 찬양했는데, 3절의 마지막 가사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살든지 죽든지 뜻 대로 하소서.” 지금까지 수없이 많이 불렀던 찬송인데, 그날은 특별히 다가왔습니다. 가사가 강력했기에 다음 찬송가 해설로 일찍이 정해 놓았습니다.

 

<내 주여 뜻 대로>는 18세기 독일 루터교 목사였던 벤저민 슈몰크(1672-1737)가 가사를 썼습니다. 슈몰크는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현재는 폴란드에 속하는 살리자(Silesia)에서 태어났습니다. 슈몰크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설교한 적이 있는데, 목사로서 재능을 발견한 아버지가 슈몰크를 라이프치히 대학에 보내서 신학을 전공하게 했습니다. 슈몰크의 나이 21세였습니다.

 

슈몰크는 아버지가 섬기던 교회에서 부목사로 일하다가 아버지를 이어서 평생 같은 교회에서 목사로 섬겼습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에 속하는 살리자는 가톨릭이 주류였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30년 전쟁이 끝난 후여서 종교 간의 갈등이 여전했습니다. 개신교에 속하는 루터 교회는 하나 밖에 없었기에 36개의 마을을 관할했습니다. 종탑도 올리지 못하고 심방과 같은 목회활동을 위해서는 가톨릭의 허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슈몰크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힘을 다해서 목회했습니다. 하루는 심방을 하고 집에 왔는데 화재가 나서 집이 불에 탔습니다. 들어가보니 두 아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죽어 있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슬픔이 찾아왔을 것입니다. 슈몰크는 그때의 심정을 <내 주여 뜻대로> 찬송에 담았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 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큰 근심 중에도 낙심케 마소서/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날 주관 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 대로 하소서.”

 

슈몰크 목사는 예수님의 마지막 겟세마네 기도를 떠올렸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고 그 어려운 참사를 받아드렸습니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을 믿고 찬송했습니다. 슈몰크 목사는 목회하는 가운데 뇌졸증으로 두 번이나 쓰러졌고, 녹내장으로 시력도 잃었지만 편하지 않은 다리를 이끌고 6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목회했습니다.

 

549장의 작곡가 홀부르크는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 서곡에서 곡을 갖고 왔습니다. 마법의 화살을 쏘는 사냥꾼이 자기 뜻대로 화살을 조절할 수 없었듯이 화재로 두 아들을 잃은 슈몰크 목사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 것을 연결한 것 같습니다. 우리 삶에도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원합니다.-河-

두려워하지 말라 (11)

평안

 

한 해를 돌아보면서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추수 감사 주일입니다. 팬데믹 이후에 처음으로 함께 모여서 감사예배를 드리고 추수감사절 만찬을 갖습니다. 그동안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을 마음껏 예배하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기 원합니다.

 

팬데믹을 지내면서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염려와 불안이 생겼습니다. 연초에 시작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계속되고, 물가는 치솟고, 경기 침체가 온다는 소식까지 들립니다. 그러니 팬데믹 이후의 삶이 녹록치 않아 보입니다.

 

성경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이 365번 나온다는 말이 있듯이, 두려움은 우리 안에 늘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매일같이 “두려워하지 말라”는 하나님 말씀을 기억하면서 두려움을 마주하고 다스려야 합니다. 세상이 불확실할수록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소망을 잃지 않고, 믿음에 굳게 서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신앙의 기본인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서, 성경에 나오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그동안 나눈 말씀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15;1).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도 기억합니다:“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1:9). 스바냐 선지자는 끝까지 신앙을 지켰던 예루살렘의 남은 자들을 다음과 같이 격려했습니다:“두려워하지 말라.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습3:16). 이사야 선지자는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끝까지 견딜 것을 당부했습니다:“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바빌론과 페르시아 제국에서 살아남은 다니엘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도 기억합니다. 다니엘이 기도하던 첫 날에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셨고 천사를 보내서 세상을 구원하실 테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단10:12).

 

참새 한 마리의 목숨까지 간섭하시고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하나님을 믿으니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예수님 말씀(마10:31), 폭풍 속에서 쩔쩔매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도 기억합니다:“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막6:50).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 지난 석달 가까이 살았습니다.

 

오늘 나눈 말씀도 강력합니다:“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 1:7),“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우리 앞에 어떤 일이 닥치든지, 두려워하지 말라는 하나님 말씀을 기억하고 예수님의 평안을 누리기 원합니다.-河-

두려워하지 말라 (10)

폭풍 속에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주제로 연속해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번 연속 설교를 통해서 우리 안에 깊게 드리운 불안과 두려움을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다스리고 몰아내길 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은 신약성경보다 구약성경에 더 많이 등장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질곡의 역사를 걸어갔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그릇 행해서 자초한 실패의 역사였습니다. 게다가 제국에 둘러 쌓인 이스라엘의 삶은 언제나 불안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이스라엘을 찾아오셔서 깨우치시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힘을 주셨습니다. 구약 성경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지난 주부터 신약 성경에 나오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어려움이 닥쳐도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하찮은 참새 한 마리의 생명까지 주관하시고 머리카락까지 세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세상이 아무리 험해도 두려워할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갈릴리 호수 건너편 벳세다로 서둘러 보내시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한 군중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달려들었기 때문입니다(요6:15). 예수님께서 손수 군중들을 해산시키시고 자신은 산에 가셔서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날이 저물고 밤이 찾아왔는데 갑자기 바다에 폭풍이 일었습니다. 바람이 워낙 강해서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 한 가운데서 쩔쩔매며 노를 젖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신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제자들은 유령이라고 생각해서 폭풍 속에서도 소리를 칩니다. 제자들 곁을 지나가시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50절). 예수님께서는 폭풍속에 있는 제자들을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찾아오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배에 오르시니 폭풍이 잠잠해 졌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것을 눈으로 보고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폭풍이 찾아오자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데도 알아보지 못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아직 마음이 둔해서 그렇습니다. 배가 도착한 게네사렛 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고침을 받는 장면과 대조를 이룹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다위를 걸으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죽음의 세력이 지배하는 바다와 폭풍을 예수님께서 잠잠케 하심으로 예수님 자신이 창조주 하나님과 같은 분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