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손과 발 (4)

우리는 지난 3주 동안 예수님의 손과 발 가운데, 예수님의 손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손길이 자주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말씀으로 하실 수 있었지만, 특별히 만지고 접촉하시면서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으시고 세상의 어두운 세력을 몰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의 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3년 공생애 동안 예수님은 팔레스타인 지역은 물론 갈릴리 호수 건너편과 갈릴리 북쪽 두로와 시돈까지 두루 다니셨습니다. 유대인들이 꺼리던 사마리아 지역도 지나가셨고, 수가성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3년 공생애 가운데 대부분은 갈릴리 지역을 두루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매년 예루살렘에 올라가셨고, 마지막 십자가에 죽으시기 직전에는 예루살렘에서 일주일 정도 머무셨습니다.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시는 것 외에는 모두 걸어서 다니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발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발길 가운데 오늘은 특별히 여리고 세무서장 삭개오에 대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삭개오에 관한 말씀은 누가복음에서 갈릴리를 떠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여정을 기록한 여행 보도(누가복음 9-19장) 마지막에  있습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20마일 정도 떨어진 곳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상인들의 길목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여리고 세무서장이었습니다. 재정적으로 전혀 어려움이 없었을 것입니다. 사회적인 명예도 얻었지만, 사람들은 뒤에서 로마의 앞잡이 역할을 하는 삭개오를 비난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삭개오는 키가 작았습니다. 외모에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마음에 상처를 갖고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오신다는 소식을 들은 삭개오는 예수님이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키가 하도 작아서 군중들 틈으로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삭개오는 길가에 있는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의 일행을 기다렸습니다. 늘 그랬듯이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찾는 삭개오를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삭개오 앞에 멈추신 예수님께서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5절)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셔서 하루를 머무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죄인의 집에 들어가셨다고 수군거렸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자기를 찾는 모든 사람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발길로 경계를 허무시고, 생명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발길이 머무는 곳에는 언제나 평화(샬롬)가 임했습니다. 오늘은 여리고 세무서장 삭개오가 예수님의 샬롬을 경험한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河-

예수님의 손과 발 (3)

올해도 어김없이 대림절(Advent)을 맞았습니다. 대림절(대강절)은 교회력에서 첫 번째 절기입니다. 그러니 교회력에 의하면 오늘부터 새해가 시작된 셈입니다.

 

대림절은 성탄절 전까지 4주 동안입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죽음을 물리치고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주일마다 촛불을 하나씩 켜면서 성육신(incarnation)하신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온 교회와 참빛 식구들께 뜻깊은 대림절이 되길 바랍니다. 한 마음으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립시다.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33년을 사셨습니다. 그중에 마지막 3년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공적인 삶(공생애, public life)을 사셨습니다. 주일학교 아이들과 나눴듯이, 예수님께서는 최고의 선생님이셨고,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기적을 행하셨고, 모든 사람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온 세상의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사시던 모습을, 예수님의 생각(“생명”), 예수님의 마음(“긍휼”), 예수님의 손과 발(“평화”)로 나눠서 연속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변함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시기를 기대하면서 나누는 말씀입니다. 또한, 우리도 예수님을 닮는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을 살아가기로 결심하면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눌 예수님의 손과 발 세 번째 시간은 사복음서에 모두 등장하는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제외하면 모든 복음서에 등장하는 사건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이 유일합니다. 그만큼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니 제자들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 복음을 듣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먹는 것도 잊고 예수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께서 빌립을 비롯한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하십니다. 엄청난 돈이 필요합니다. 그때 한 아이가 갖고 있던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가 드린 음식을 들고 하늘을 향해서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시니, 오 천명이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에는 여러 개의 손이 등장합니다. 도시락을 제자들에게 전해주는 아이의 손, 아이가 드린 오병이어를 들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손, 예수님 말씀대로 백성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는 제자들의 손, 떡을 받아먹는 백성들의 손까지 오병이어의 기적은 손을 통해서 성취되고 전해졌습니다. 그중에 으뜸은 떡과 물고기를 들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손입니다. 예수님의 손에서 놀라운 기적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河-

예수님의 손과 발 (2)

예수님의 생각, 마음, 손과 발에 대한 말씀을 연속해서 나누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예수님을 찾아온 나병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서 만지시고 깨끗하게 고쳐주신 말씀을 나눴습니다(막1:40-42절). 나병 환자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께서 부정한 사람과 접촉하면 안 된다는 구약의 율법을 어기시면서 그를 새롭게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손을 내밀어서 나병 환자를 만지신 예수님의 손길에 주목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충분히 그를 깨끗하게 만들어 주실 수 있었지만, 손을 내밀어서 만지셨습니다. 구약의 율법을 뛰어넘으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동시에, 보기 흉측한 환부를 손을 내밀어 만지심으로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직접 표현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본문도 비슷합니다. 지난주에 나병환자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병이 들었다고 생각했듯이, 오늘 본문에서 맹인으로 태어난 것은 부모나 자신의 죗값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까지 그렇게 말한 것은 예수님 당시의 일반적인 생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 자랑거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반대의 말씀을 하십니다:“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절). 예수님의 말씀은 새로운 사고입니다. 당시 상상도 못 했던 혁신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탈피(脫皮)’ 즉 기존의 틀을 벗어내고 새로운 사고와 시스템을 갖추는 것임을, 예수님을 통해서 배웁니다. 기존의 생각에 얽매이면, 탈피는 불가능합니다. 세상의 생각에 집착해도 새로운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과거로부터 전해지는 전통 역시 새로운 사고를 방해합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주일학교 아이들과 나눴듯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가장 아름답게 만드셨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무한대로 열려있는 시스템입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침을 뱉어서 진흙을 만드시고 그것을 맹인의 눈에 바르십니다. 우리에게는 생소한 모습이지만,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인 의료행위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침을 사용해서 말 못하고 듣지 못하는 사람을 고치신 사건도 나옵니다(막7:32-35).

 

오늘 본문만큼 예수님의 손길을 자세히 설명한 복음서 기록도 없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진흙을 빚어서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도 생각날 정도입니다. 예수님도 자신이 손수 빚은 진흙을 맹인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맹인이 예수님 말씀대로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니 보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河-

예수님의 손과 발 (1)

예수님의 생각에 이어서 예수님의 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닮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고 특권입니다. 예수님의 생각 속에 “생명”이 있었다면, 예수님의 마음에는 “긍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둠으로 대표되는 죽음을 이기고 세상에 생명을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겸손하게 하나님께 나오는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살림(살길)”을 생각합니다. 죽음을 뛰어넘습니다. 세상에는 죽음의 세력들이 많습니다. 결국에는 죽음으로 끝나는 일들도 많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배제하고 생명을 선택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불쌍히 여기는 예수님의 마음을 갖고 삽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게 된 생명을 사랑으로 이웃에게 전합니다. 각박한 세상에서 넉넉한 마음으로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면서 살아갑니다.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 외로운 이웃들, 힘이 없는 이웃들의 친구가 되고 힘닿는 대로 돕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이웃들에게 되갚는 것입니다.

 

이번 주부터 예수님의 생각, 마음에 이어서 예수님의 손과 발에 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마음이 실제로 어떻게 실행되었는지 배우게 될 것입니다. 살리시는 예수님,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생각과 마음이 손과 발로 연결되고 마무리됩니다. 예수님의 생각에 ‘생명’이, 예수님의 마음에 ‘긍휼’이 있었다면, 손과 발에는 “샬롬(평화)”이 깃들어 있습니다.

 

오늘은 나병 환자를 고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나병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죄로 여겼습니다. 접촉을 통해서 전염되기에 세상에서 격리되어 지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구약의 율법에 근거한 조치였습니다(레13-14장). 피부에 의심되는 질환이 생기면 곧바로 제사장에게 갔습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병을 고치는 의사가 아니라, 정함과 부정함을 분별하는 재판관이었습니다.

 

나병처럼 심각한 피부질환으로 의심되는 환자가 제사장에 오면, 7일 동안 격리해서 질병의 진행 상황을 살폈습니다. 7일 후에도 그대로이면 7일을 더 격리했고, 그때도 문제가 없으면 정하다고 판정하고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하지만, 14일의 격리와 진찰에서 나병으로 판정되면 부정함이 확정되고 격리해서 살아야 했습니다. 부정한 나병환자와 접촉하는 사람도 부정하게 취급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나병 환자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사람들은 “부정하다”고 외치면서 나병환자를 외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환부를 손으로 만지시면서 그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부정한 나병 환자, 부정한 그의 질환을 만지시는 예수님의 손은 치료와 회복의 손입니다. 죄와 저주에 살던 나병 환자에게 그리스도의 샬롬이 임했습니다.-河-

예수님의 마음 (4): 긍휼

예수님은 살아생전에 세 번 정도 우셨습니다. 첫 번째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러 가시면서 나사로의 오누이 마르다와 마리아가 슬퍼하는 것을 보고 그들과 함께 우십니다(요11:35). 조금 지나면 나사로를 살리실 예수님께서 나사로 친지들의 슬픔에 동참하신 모습이 의외입니다. 하지만,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고스란히 느낍니다.

 

두 번째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서 성전과 도시를 보고 우셨습니다(눅19:41-44). 하나님께서 선택해서 세운 예루살렘의 망가진 모습이 예수님의 마음을 힘들게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평화의 일”을 언급하십니다. 단지 분열과 갈등, 다툼을 넘어서는 평화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에서 찾아오는 진정한 샬롬입니다.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을 믿고 열심히 종교 행위를 하지만, 진정 종교를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평화를 잃어버린 사람들인데, 이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세 번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입니다(눅22:43-44). 성경 본문에 예수님께서 우셨다는 표현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눅22:42)라고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은 비탄에 젖어 있었습니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다면, 예수님께서 우시면서 기도하셨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우셨다는 구약성경의 표현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전달되는 구절은 창세기 6장 6절입니다:”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한탄하신 것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함>은 후회하셨다는 뜻입니다.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후회하셨다니 하나님께서 얼마나 실망하셨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근심은 애통에 가까운 비통한 마음입니다. 한탄하셨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릇된 길로 가는 자식을 보면서 어머니가 한탄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죄악에 빠져 사는 인류를 보면서 탄식하셨습니다. 소리는 내지 않으셨지만, 속으로 우셨을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악함과 반역을 보면서 예레미야가 눈물을 흘립니다:“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렘9:1). 예레미야의 마르지 않고 흐르는 눈물은 곧 하나님의 눈물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대변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악함 앞에서, 사랑하는 자를 잃는 슬픔 앞에서, 하나님 백성의 그릇됨 앞에서 하나님도 우셨고, 예수님도 우셨습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