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 하박국 (1)

언제까지 입니까?

 

수로보니게 여인에 대한 연속 설교에서 “구도자”라는 표현을 강조했습니다. 구도자는 하나님을 끊임없이 간절하게 찾는 하나님 백성의 마음과 행위를 뜻합니다. 하나님을 진지하게 찾고 하나님의 길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완곡한 거절, 개를 언급하신 거친 말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을 찾고 구한 수로보니게 여인은 진정한 구도자였습니다.

 
앞으로 한 달여 살펴볼 예언자 하박국 역시 하나님 앞에 선 구도자였습니다. 하박국은 예레미야와 동시대 인물로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무너지는 역사의 비극을 눈으로 목도했습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온 몸을 던져서 예언했다면, 하박국은 대중 앞에 나서기보다 자기 자리에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구도자였습니다.

 
하박국이란 이름은 “품어주다(embrace)”라는 뜻입니다.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품어주심을 그리워했던 선지자였습니다. 구약의 소예언서에 속하는 하박국서는 전체가 3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째와 둘째는 하나님 앞에서 고뇌하고 질문하는 하박국과 그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응답을 들은 하박국이 시기오놋이란 음악에 맞춰서 부르는 노래이자 하나님을 향한 신앙 고백입니다.

 
하박국서는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선지자 하박국이 본 예언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하박국은 하나님 앞에서 질문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하박국이 갖고 있던 질문은 세상에 폭력이 넘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 지에 관한 것입니다. 악이 판을 칩니다. 패역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높은 위치에 있습니다. 겁탈과 폭력이 앞서는 불의한 세상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서로 고소하고 분쟁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정의가 전혀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뜻을 따라 살려는 의인들이 악인에게 둘러싸고 있으니 의인의 삶이 힘겹습니다. 하박국은 이렇게 어그러지고 패역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께 나와서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손길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때까지니이까(how long)”라고 하나님 앞에서 탄식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언제나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질지 탄식하며 기다립니다: “주님, 언제까지입니까?” 하나님께서 침묵하셔도 끝까지 주님의 뜻을 묻는 구도자가 되길 원합니다. -河-

수로보니게 여인 (7)

에바다: 열려라

 

수로보니게 여인에 대한 연속 설교 첫 시간에는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꼬투리 잡아서 시비를 거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막 7:1-23).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보다 속에서 나오는 것이 부정하다는 말씀과 동시에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막7:6)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한 다윗의 자손, 메시아임을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대적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훼방과 간섭을 피해서 이방 지역인 두로와 시돈에 올라가셔서 아무도 모르게 쉼을 갖고 싶으셨습니다. 그런데 흉악한 귀신이 들린 딸을 가진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막7:24-30). 마태복음에서는 유대인과 비교되는 가나안 여인이라고 불렀는데, 예루살렘의 지도자들과 달리 이 여인은 예수님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신분이나 겉모습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과 비교가 되지 않는 이방 여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 앞에 자신을 낮췄고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을 구했습니다. 예수님을 비방하고 꼬투리를 잡는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과 달리 개라고 불려도 좋다는 겸손과 믿음을 갖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마가복음 7장 마지막 세 번째 본문에 의하면(막7:31-37), 수로와 시돈을 떠난 예수님께서 역시 이방 땅 데가볼리를 거쳐서 갈릴리 호숫가에 가셨습니다. 그때 귀먹고 말을 더듬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따로 데리고 가셔서 양 귀에 손을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고 하늘을 향해서 탄식하신 후에 “에바다(열려라)”외치시니 그의 귀가 열리고 입술이 풀렸습니다.

 

앞에서 등장한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겉으로는 말도 잘하고 듣기도 잘했지만, 신앙적으로 귀가 막히고 올바로 말할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반면, 예수님을 찾아온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방인이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는 눈과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큰 믿음이라 칭찬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열리고 예수님께 나와서 예수님을 고백하는 입을 갖기 원합니다. 에바다 – 열어 주시는 우리 주님의 손길을 구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닮기 원합니다. -河-

수로보니게 여인 (6)

– 네 믿음이 크도다

 

수로보니게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 여인이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임을 강조하면서 “가나안 여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면서 예수님께 나왔지만, 예수님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자를 쫓아 보내시라고 요청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침묵을 거절로 생각해서 선수를 친 것입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입을 여셨는데, 자신은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을 위해서 보내심을 받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수로보니게 즉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제외된다는 완곡한 거절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이스라엘의 잃은 양에게만 가라고 말씀하신 바 있으니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드렸을 것입니다(마10:5-6).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는 절망적인 말씀입니다.

 
하지만,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갑니다. 절까지 하면서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울부짖습니다. 거절의 순간에 포기하지 않고 더욱더 예수님께 다가가고 예수님의 도움을 구하는 여인의 믿음이 돋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대답하십니다. 자녀(유대인들)의 떡을 개들(이방인)에게 던지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개는 유대교 전통에서 부정한 동물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을 포함한 이방인을 가리키는 거친 표현입니다. 그러자 여인이 분위기를 바꾸는 놀라운 말을 합니다:“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7절). 개 취급받아도 상관없으니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달라는 것입니다. 여인의 말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크도다”고 말씀하시면서 딸을 고치십니다.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을 왜 그토록 차갑게 대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여인의 믿음을 테스트하셨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의 테스트를 멋지게 통과해서 딸도 고쳤고 큰 믿음이라는 칭찬까지 받았습니다.

 
다른 의견은, 예수님은 여인을 수로보니게 출신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시고 처음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으셨다가 여인이 끝까지 예수님을 구하는 것에 마음이 움직여서 딸의 병을 고쳐 주시고 큰 믿음이라고 칭찬하셨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해석이 본문의 흐름에 더욱 적합해 보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예수님의 냉정한 태도와 더불어 여러 가지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 있습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킨 여인의 큰 믿음을 닮고 싶습니다!-河-

수로보니게 여인 (5)

주여, 저를 도우소서

 

예수님께서 갈릴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페니키아 문명의 중심인 두로와 시돈 지방에 올라가신 것이 흥미롭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찾아온 수로보니게 여인(마태복음에서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을 강조하면서 가나안 여인으로 부름)은 나사렛 출신 예수님과 전혀 다른 태생과 신분이었습니다. 그의 딸이 귀신에 사로잡혀서 고생하는 것 외에는 부족함이 없는 대도시 출신 여인입니다.

 

하지만 완벽한 인생은 없고, 부족하고 아픈 곳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법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두로에 오셨다는 소식은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복음이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에 대해서 수소문을 했기에 “주, 다윗의 자손”이라고 예수님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면서 예수님께 오는 모든 사람을 고쳐 주신다는 이야기도 들어서 그대로 실행했습니다. 마지막 기회였기에 울부짖으면서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보아도 예수님의 침묵이 이상할 정도입니다. 제자들이 여인을 돌려보내라고 독촉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제자들과 같은 맥락입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24절).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청을 들어 주실 수 없다는 일종의 거절입니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위해서 오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익숙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이방인이나 사마리아 동네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마1:5-7)고 부탁하신 바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고 대부분 이스라엘 땅에서 사역하셨습니다. 앞으로 제자들과 장차 부르실 사도 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이쯤 해서 포기하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갈 만도 한데, 더욱더 예수님께 달려듭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와서 절을 하면서 간청합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25절). “주여”라는 호칭이 예수님을 향한 여인의 심정을 잘 보여줍니다. 자신을 도와 달라는 것은 자기 딸과 자신을 동일시한 표현입니다. 예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의 침묵과 거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 앞에 나가는 수로보니게 여인이 부러울 정도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에게서 진정한 구도자의 믿음과 태도를 배웁니다. 쉽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어렵고 실망스러울수록 예수님 앞으로 나가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갖기 원합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