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로보니게 여인 (4)

대답하지 아니 하시니 (1)

 

예수님께서 두로 지방에 가셔서 아무도 모르게 시간을 보내실 예정이셨는데, 한 여인이 찾아와서 예수님의 쉼을 방해했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이 여인의 사회적 신분을 강조해서 당시의 공용어인 헬라어를 사용하고 이스라엘보다 부유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수로보니게 태생의 여인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반면, 마태복음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한 가나안 여인이라고 종교적인 관점에서 여인을 바라보았습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을 찾아온 여인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 던질 수 없다는 말씀으로 곧바로 이어지는데, 마태복음은 가나안 여인이 어떤 모습으로 예수님을 찾아왔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행간을 채워줍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한 가나안 여인이지만, 예수님을 향해서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마15:22)라고 외치면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이 여인이 크게 외치면서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5:23).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과 딴판입니다. 두로라는 이방 지역이어서 여인의 외침을 외면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맞은편 데가볼리 지역 거라사에 가셨을 때, 귀신들린 사람을 불러내서 고쳐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시니 예수님의 속마음을 헤아릴 생각도 없이 소리치는 여인을 쫓아 보내자고 섣불리 제안합니다. 제자들의 어리석은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우리도 간절히 외치며 하나님을 쫓았지만, 아무 대답을 얻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끝까지 기다리기도 쉽지 않습니다. 믿음은 오래 참음에서 결판나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침묵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힘이 빠집니다. 그때 곁에서 제자들처럼 함부로 말하고 판단하는 이웃이 있다면, 더 쉽게 자책하게 되고 신앙도 흔들립니다.

 
예수님께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무엇보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속마음을 점검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단순히 귀신들린 딸이 병이 낫기를 원하는 것을 넘어서, 예수님을 향한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고백과 그녀의 진심이 일치하는지 알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또한, 이방 여인이라는 한계를 인정하면서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냉정하게 대하신 것도 주목해야 합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신 예수님의 속마음을 파악하고 끝까지 예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 큰 믿음의 비결임을 배웁니다. -河-

 

수로보니게 여인 (3)

가나안 여인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집요한 추적과 괴롭힘, 백성들의 끊임없는 요구까지 겹치면서 예수님께도 쉼이 필요했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편히 쉴 곳이 없으니 이스라엘과 적대 지역인 두로와 시돈까지 올라 가셔야 했습니다. 그곳은 예수님보다 700여 년 전에 활동했던 선지자 엘리야가 몸을 피했던 곳입니다. 엘리야도 두로와 시돈에 속한 사르밧 지역에 가서 과부와 그의 아들을 보살폈고, 병이 들어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을 만나게 되실 것을 예고한 듯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집에 들어가서 조용히 쉬고 싶으셨지만, 숨으실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적이 있었고 그 사람들이 고향에 돌아가서 예수님에 대해서 소문을 내놓은 터였습니다(막3:8).

 

예수님께서 쉬고 계실 때, 딸이 귀신에 들려서 고생하는 한 여인이 찾아옵니다. 마가는 이 여인을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태생이라고 소개합니다. 헬라인이라면 나사렛 출신 예수님과 신분에서 차이가 납니다. 수로보니게 태생이라면,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남부럽지 않은 넉넉한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마태는 “가나안 여인”이라고 소개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대인이 아닌 다른 민족을 이방 민족이라고 불렀습니다. 가나안 족속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에 거주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가나안 여인이라는 말씀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 민족 그것도 이스라엘이 정복해야 했던 가나안 태생임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여인의 행동을 간단히 기술한 마가복음과 달리 마태복음은 여인이 무슨 말을 했는지까지 자세히 알려줍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크게 울부짖으면서 예수님께 왔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주(主)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 극존칭입니다. 당시는 로마 황제를 또는 노예들이 자기 주인을 주(퀴리오스, Lord)라고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은 다윗의 자손에서 메시아가 태어날 것을 예고한 구약의 예언대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는 말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키리에 엘레이손)”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기도입니다. 마가는 이 여인이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다고 알려줍니다. 겸손과 믿음, 존경의 마음과 행동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기보다 자신의 지위와 가진 것을 자랑하고, 권력과 명예를 좇는 요즘 세상에서 예수님을 찾는 마음과 모습이 어떠해야 함을 수로보니게 여인을 통해서 배웁니다. 주의 긍휼을 구합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河-

 

수로보니게 여인 (2)

두로에 가신 예수님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이 온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세상에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말씀에 갈급한 백성들에게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병자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면 병이 나을 정도였습니다. 많은 백성이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세력도 생겼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잡아서 죽일 계략까지 세웠습니다. 모든 인력과 수단 그리고 방법을 동원해서 예수님의 사역을 훼방했습니다.

 
지난 주에 살펴본 대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내려왔습니다.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은 것을 두고 모세의 율법과 장로의 전통을 지키지 않았다고 예수님을 찾아와서 비난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입술로만 하나님을 찬양하고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다고 도리어 이들의 형식적 신앙을 꾸짖으셨습니다. 진실한 신앙이 아니라 형식적인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파견해서 예수님의 모든 행적을 감시하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의연하게 대처하시지만, 예수님의 마음과 몸은 많이 힘드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두로 지방으로 잠시 몸을 피하십니다.

 
두로는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있는 지역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가시면, 예수님을 쫓아다니는 백성들은 물론 예수님을 감시하는 지도자들도 없을 것입니다. 잠깐이라도 편히 쉴 수 있으실 것 같습니다. 오죽했으면 두로에 가셨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구약의 유명한 선지자 엘리야도 두로와 시돈 중간에 위치한 사르밧(신약에서는 살렙다)이라는 지역에서 몸을 피한 적이 있습니다(왕상17장). 이스라엘에 가뭄이 심해지니 두로와 시돈 지방에 속한 사르밧으로 몸을 피한 것입니다. 그곳에 가면 사르밧에 사는 과부가 엘리야를 먹일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알려주셨는데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에 가신 것을 보면서 사르밧에 갔던 엘리야가 생각날 수밖에 없습니다.

 
사울에게 쫓겼던 다윗도 블레셋 지방 가드로 두 번이나 몸을 피했습니다(삼상 21, 27장). 더 이상 이스라엘에 몸을 숨길 곳이 없었기에 위험을 무릎 쓰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블레셋으로 피한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오죽하셨으면 갈릴리를 떠나서 두로 지방에 올라가셨을까요! -河-

 

수로보니게 여인 (1)

– 두로와 시돈

 

오늘부터 마가복음 7장(마태복음 15장)에 있는 수로보니게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을 살펴보겠습니다. 수로보니게는 시리아-페니키아라는 지명으로 갈릴리 북쪽에 위치한 해안 지역입니다. 성경에 자주 나오는 두로와 시돈이 속한 곳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서로 22마일 떨어진 지중해 연안의 해안 도시로 현재는 레바논에 속해 있습니다. 시돈은 창세기에서 노아의 아들 함의 후손 가운데 가나안의 아들로 등장합니다(창10:15). 마태복음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을 가나안 여인이라고 부른 것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마15:21-28). 예수님 당시에도 두로와 시돈은 가나안 즉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이방 지역이었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구약시대부터 해상 무역에 능한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솔로몬 왕이 성전을 지을 때 두로에서 백향목을 비롯한 목재와 기술자를 수입했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선지자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을 핍박하고 바알 종교를 전파했던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은 시돈왕의 딸이었습니다. 이사야를 비롯한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때가 되면 두로와 시돈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을 예고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 두로와 시돈에서 온 사람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막3:8), 이스라엘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는 것을 보시고 두로와 시돈에서 복음을 전하셨다면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왔을 것이라고 탄식하셨습니다(눅10:13). 수로보니게 여인이 바로 이곳 출신입니다.

 
두로와 시돈이 본문의 지리적 배경이라면, 수로보니게 여인이 등장하는 마가복음의 전후 문맥도 특별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무시하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다고 비난했습니다(막7:5). 그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종교 지도자들이 사람의 전통을 지키다가 하나님의 계명을 버렸다고 정곡을 찌르셨습니다. 사람의 몸, 즉 겉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7:19-20).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않은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께 나온 수로보니게 여인이 대조를 이룹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갈릴리 지역으로 돌아오셨을 때, 귀먹고 말을 더듬는 사람을 “에바다(열려라)” 외치시며 고치십니다(막7:31-37). 아무리 성경을 많이 알고 종교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어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있어야 합니다. 그에 비하면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을 보는 안목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말로 표현하는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수로보니게 여인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고 참된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가기 원합니다. -河-

 

회복 (6)

크고 은밀한 일

 

예레미야서(렘30-33장)를 통한 “위로와 회복의 말씀” 마지막 시간입니다. 처음 연속 설교를 시작할 때는 대부분 백신 접종을 마친 우리 지역에 팬데믹의 끝이 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 지역의 감염자 숫자가 급격히 늘고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는 다시 실내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했습니다.

 

처음에 예레미야 말씀을 준비할 때와 비교하면 상황이 어려워졌지만, 하나님의 위로와 회복은 우리 모두에게 항상 필요합니다. 설령, 팬데믹이 연장되더라도 우리는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세상이 깜깜해질수록 우리가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어야 함도 알고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전한 위로의 말씀은 30-31장에서 약속의 말씀을, 32-33장에서는 왕궁 시위대 뜰에 갇힌 예레미야가 그의 삶을 통해서 회복과 소망의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감옥에 갇힌 것은 바빌론에 포로가 된 예루살렘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감옥에 갇힌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포로 잡혀갈 것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레미야는 모든 삶으로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그의 삶이 곧 하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32장에서 예레미야가 고향 아나돗에 있는 밭을 샀습니다. 친척의 밭을 사야 하는 기업 무를 자(친척의 가장 가까운 후견인)였지만, 나라가 망하는 순간에 밭을 사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예레미야가 고향에 밭을 사서 계약서까지 남긴 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반드시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는 작은 증표였습니다.

 

비록 나라가 망하지만, 하나님께서 여전히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고 결국에는 회복시킬 것이라는 약속이 오늘 본문인 33장까지 이어집니다. 예레미야가 왕궁 시위대의 뜰에 갇혀 있을 때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32장의 작은 증표에 이어서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만이 아시는 그리고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나라가 망하지만, 다시 하나님께서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는 말씀을 믿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믿고 하나님을 끝까지 의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다윗의 가지에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올 것까지 준비하신 하나님이심을 믿고 현재의 어려움을 이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를 끔찍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우리 역시 하나님의 크고 은밀한 일을 기대하기 원합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