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시작합시다 (1)

  • 오히려 소망이 됩니다.

 

올해 우리 교회 표어는 “새롭게 시작합시다”입니다. 지난 2년여 우리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코로나바이러스 침투에 쩔쩔 맺습니다. 1년여는 집에서 갇혀 있다시피 했습니다. 백신 접종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많이 좋아졌지만, 우리 마음은 얼굴을 덮고 있는 마스크만큼 답답했습니다. 델타와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가 나올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그렇게 거의 2년을 보내고 임인년(壬寅年) 새해를 맞았습니다. 올해야말로 세상이 열리길 기대합니다. 새롭게 열리는 세상에서 호랑이처럼 포효하면서 새롭게 시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물론, 우리는 일상이 무너진 지난 2년 동안도 열심히 살아남았습니다. 새로운 일상(new normal)을 사는 삶의 지혜도 터득했고, 새로운 일상이 갖다 준 선물도 누렸습니다. 그래도 훨씬 자유롭고 마음까지 가벼운 새로운 세상을 기대합니다.

 
작년에 예레미야서 한 가운데 있는 소망의 말씀(렘30-33장)을 공부했습니다. 올해 우리 교회 주제절 역시 예레미야 애가 한가운데 있는 말씀입니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3:23). 앞으로 한 달 동안 애가서 3장 19절 이하의 말씀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예레미야 애가서는 예루살렘의 멸망 앞에서 부른 선지자의 슬픈 노래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다윗 왕조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그곳에 바빌론 군대가 몰아닥쳤습니다.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고, 많은 사람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바빌론 제국의 신 마르둑이 통치하는 세상에 던져진 것입니다. 각지로 흩어진 민족과 백성들이 다시 시작하거나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것입니다.

 
절망입니다.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애가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한가운데 소망의 말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고초와 재난”을 쑥과 담즙에 비유합니다. 그만큼 쓰라린 고난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뚝 떨어지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가운데 그 모든 어려움을 마음 속에 기억하고 하나님을 마음에 모셨습니다. 그 순간에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마음 깊은 곳에 임합니다. 그러자 그의 고난이 “오히려” 소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힘입니다.

 
우리의 삶이나 세상이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지난 2년여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분들, 마음에 상함을 경험하신 이웃들이 너무 많습니다. 쑥과 담즙과 같은 시간을 보낸 분들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임하길 기도합니다. 우리 각자의 삶에 어려움이 오히려 소망이 되는 역전이 일어나길 기대합니다. -河-

함께하신 하나님

2021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는 표어로 올해를 시작했습니다. 연초만 해도 소띠해인 2021년에 온 세상이 다시 일어나서 뚜벅뚜벅 주어진 길을 걸어갈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백신 접종이 시작되면서 바이러스 전파도 둔화되고 결국에는 마스크까지 벗고 일상을 회복할 것을 기대했지만, 델타 바이러스와 최근의 오미크론 바이러스까지 변이가 등장하면서 올해 표어가 무색할 정도로 계속되는 팬데믹을 살고 있습니다.

 
2년여의 힘겨운 기간이었지만 참빛 식구들 모두 각자의 자리를 지키시고 꿋꿋하게 견디셨습니다. 우리 교회도 주님의 은혜와 인도하심, 성도님들의 헌신과 섬김에 힘입어 어려운 시기를 잘 지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사망의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다윗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팬데믹이라는 긴 기간을 지나고 있지만, 우리 역시 어떤 어려움과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윗과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으로 올 한 해도 살았습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있는 힘입니다. 믿음 가운데 누리는 확신입니다.

 
올해도 주일 예배에서 신구약 성경을 오가면서 연속해서 말씀을 나눴습니다. 새해 첫 달의 시편 91편 말씀은 전염병을 비롯한 재앙에서 자기 백성을 지키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룻기를 통해서 삶 속에 임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예레미야서를 통해서 우리 마음속에 새겨 주시는 하나님의 새 언약을, 수로보니게 여인의 특별한 믿음을, 하박국 선지자를 통해서 회의하면서도 질문하고 끝까지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구도자의 마음을, 빌레몬서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용서와 회복을 배웠습니다.

 
그동안 나눈 말씀을 모두 기억할 수 없지만, 주일마다 나눈 말씀이 생명의 양식이 되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한 해 동안 참빛 식구들과 하나님 말씀을 나눌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주일 설교가 유튜브에 남아 있기에 언제든지 다시 들을 수 있는 것도 팬데믹이 우리에게 준 선물입니다.

 
2021년 한 해 동안 지나온 발걸음이 결코 쉽지 않았지만, 우리와 함께 하시고 보호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기 원합니다. 룻에게 임했던 깜짝 놀랄 만한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했다면 하나님께 깊이 감사하기 원합니다.

 
주님의 은혜에 다시 감사드립니다. 올 한 해도 변함없이 함께 해 주신 참빛 식구들께도 감사드립니다. 하박국처럼 주님 한 분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주의 백성이 되기 원합니다.-河-

평화의 왕

2004년에는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남아시아에 쓰나미가 덮쳐서 2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날은 성탄절 다음 날이었습니다. 성탄절 휴가로 태국을 비롯한 휴양지에 모였던 사람들이 대부분 희생되었기에 더욱더 안타까웠습니다.

 
올해도 성탄절을 보름 정도 앞두고 미국 중서부에 토네이도가 밀어닥쳤습니다. 토네이도 경보에 미리 몸을 피했음에도 불구하고 100여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집을 비롯한 재산을 잃은 사람들은 매우 많습니다. 이재민들에게 2021년 성탄절은 기쁜 날이 아니라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슬픈 날이 될 것 같습니다.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실 때도 세상은 혼란스러웠습니다.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고, 예루살렘에는 이두메(에돔) 출신 헤롯 일가가 로마의 섭정 아래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 이권을 챙기는 데 혈안이 되었고,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은 로마 황제에게 인정받는 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소위 암 하렛츠(땅의 백성)라고 불리는 일반 백성들은 굶주리고 지쳐 있었습니다. 희망이 없었습니다.

 
들에서 양을 치고 있던 목자들도 비슷한 처지의 백성들이었습니다. 밤에 양을 칠 정도면 목자들 가운데서도 그들의 순번이 꽤 아래에 속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탄생을 들에 있던 목자들에게 제일 먼저 알리셨습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2:7).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 온 세상을 구할 그리스도께서 나셨다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목자들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서 경배하고 베들레헴 사람들에게 구주가 태어났다고 천사들이 알려준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천군 천사가 하늘에서 찬양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예수님께서 세상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평화가 없는 세상이었기에 예수님께서 오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평화를 찾기 어렵습니다. 자연재해와 전염병 그리고 사람들 마음속에 깃든 시기와 질투 그리고 분쟁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아름다운 세상을 먹물처럼 흐려 놓았습니다. 그래서 평화의 주님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합니다.

 
다시 한번 주님의 평화를 구합니다. 우리 마음에 임한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를 세상에 전하기 원합니다. 천군 천사처럼 하늘에서는 영광, 땅에서는 평화라고 찬양하면서 성탄절을 맞기 원합니다. -河-

사랑받는 형제 빌레몬 (6)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빌레몬서는 한 장 밖에 되지 않고, 바울과 오네시모 그리고 빌레몬 세 사람만 등장하는 단출한 말씀이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하나님을 믿는 진실한 신앙과 사랑이 잔뜩 베어져 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면서 빌레몬에게 잘못하고 도망친 종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종이 아닌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 주길 부탁했습니다. 오네시모가 로마 감옥에 있는 바울을 만났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서 바울의 심복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알리지 않고 오네시모를 데리고 있을 수 있었고, 알리더라도 명령조로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자기에게 보내라고 강요할 수 있었지만, 신사적으로 부드러운 마음과 말씨로 빌레몬에게 부탁했습니다. 빌레몬이 “자의로”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바울의 부탁을 들어주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절차의 중요성과 믿음의 백성들이 서로 배려하는 품격을 느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잘못했거나 행여나 재정적으로 손해를 끼친 것이 있으면 자신이 대신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오네시모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같은 주님을 믿는 형제로 받아주라는 부탁입니다. 바울은 믿음과 사랑의 사람 빌레몬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빌레몬이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것을 확신합니다: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21절).

 
바울의 부탁이 매우 특별한 것이었지만, 바울과 빌레몬 사이에는 흔들림 없는 신뢰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오네시모 역시 옛 주인 빌레몬과 새로 섬기기 시작한 바울의 믿음과 성숙함을 보면서 감동을 받고 더욱더 새로운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훗날 오네시모라는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배출되는데 바울이 아들이라고 말했던 빌레몬서의 오네시모라고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무엇보다, 빌레몬서를 읽으면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하나님을 연결해 주신 예수님과 바울이 겹쳐서 떠오릅니다. 오네시모가 갚아야 할 빚이 있다면 바울이 대신 청산해 주겠다는 말에서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르고, 우리와 주인 되신 하나님을 이어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합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등지고 떠날 때가 많이 있으니 오네시모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빌레몬서는 골로새 교회를 넘어서 그 이후에 예수님을 믿게 된 하나님 백성들에게 큰 은혜를 끼쳤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화평케 하는 자로 살기 원합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