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박국 (3)

–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그동안 살펴본 하박국 선지자의 탄식은 하나님 백성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탄식하고 때로는 항의할 수 있음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주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와서 탄식하고 솔직히 자신의 마음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그만큼 신뢰한다는 표시입니다. 물론,“나의 하나님”이라는 선지자의 고백은 아무리 상황이 좋지 않고 하나님의 응답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아도 하나님을 떠나지 말아야 함을 알려주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뿐 아니라 시편에도 하나님 백성이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드리는 탄식 기도가 많이 등장합니다. 개인에게 닥친 어려움 가운데 드린 개인 탄식시,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에 환난이 닥쳤을 때 드리는 공동체 탄식시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시편 13편은 다윗이 드린 개인 탄식시입니다.

 

다윗이 베들레헴에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사울의 시기와 질투로 십여 년 이상 광야에서 도피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왕이 되고 노년이 되었을 때는 아들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밤중에 피신을 가야 했습니다. 다윗은 그때마다 하나님 앞에서 탄식하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시편에 등장하는 다윗의 시는 다윗의 삶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를 대표합니다.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남유다는 바빌론에 무너지면서 포로로 잡혀가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았습니다. 후대에는 알렉산더의 후예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해서 성전을 유린하고 예배를 금지했습니다. 그때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탄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시편 13편에는 “어느 때까지니이까(how long)”라는 질문이 네 번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잊으시는 것 같고, 하나님의 얼굴을 숨기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지 않습니다. 원수들은 하나님 백성을 이겼다고 자랑하고 즐거워하니 견디기 힘듭니다. 그러니 고난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질문하는 것입니다. “어느 때까지입니까”라는 질문은 탄식시의 대표적인 특징입니다.

 

다윗은 탄식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을 구합니다. 대적에게 무너질 수 없다고 항변합니다. 그리고 다윗의 탄식시는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5절)는 고백으로 마무리됩니다. 탄식의 열매는 포기나 절망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확신하는 구원의 소망임을 보여주었습니다.

 

탄식과 애통의 기도는 마음을 하나님께 솔직히 내어놓고 주의 도움을 구하는 깊은 기도입니다. 애통하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할 기회입니다. 우리가 애통하고 탄식할 때 임하는 주님의 위로와 소망을 기대합니다. 할렐루야!-河-

하박국 (2)

– 주께서 어찌하여

 

구약성경 하박국서를 살펴보는 두 번째 시간입니다. 하박국서의 특징은 하나님과 선지자 하박국의 대화와 고백으로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선지자들이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세상에 나가서 선포한 것과 구별됩니다. 그런 점에서 하박국서는 선지자의 내적 고뇌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특징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이 망가지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워했습니다. “죄악, 패역, 겁탈과 강포, 변론과 분쟁”이 세상에 판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무너졌습니다. 의롭게 살려고 해도 악인들이 둘러싸서 의인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그때 하박국은 왜 지켜만 보시는지 하나님께 질문하고 탄식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일종의 항의였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이스라엘을 위해 계셔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불의에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심판하고 벌을 주셔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세상에 보여주시길 하바국 자신의 입장에서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대답하십니다. 하박국 개인이 하나님께 질문했는데, 하나님은 “너희들”이라고 이스라엘 공동체에 답변하십니다. 자기중심에 머물고 있는 하박국의 신앙을 확장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북쪽의 강국 바빌론을 동원해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사납고 성급한 백성”입니다. 표범보다 빠른 강한 군대를 갖고 있습니다. 실제로 바빌론은 당시 최강의 제국이었습니다. 앗시리아를 정복해서 바빌론 제국을 세웠고, 남쪽의 이집트와의 싸움에서도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멸망할 것이랍니다. 그것은 수치입니다. 바빌론이 던지는 그물에 이스라엘이 걸려들고 이방 민족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이 아니라 그물에 경배하는 민족입니다. 자기 힘을 믿고 그것을 신처럼 위하는 민족에게 이스라엘이 무너지면 안 됩니다. 하박국이 두 번째로 질문합니다. 하나님 백성이 어떻게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나라에 멸망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찾는 하박국의 태도가 조금 바뀌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하신 이” “만세 전부터 계신 분” “반석”이라고 고백합니다. 절대로 사망에 이를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답변이지만, 다시 하나님께 질문하는 하박국의 모습이 대단해 보입니다. 그 여정에서 하박국의 신앙이 자라고 있습니다. 끈질기게 하나님을 찾는 구도자가 누리는 은혜입니다. -河-

선지자 하박국 (1)

언제까지 입니까?

 

수로보니게 여인에 대한 연속 설교에서 “구도자”라는 표현을 강조했습니다. 구도자는 하나님을 끊임없이 간절하게 찾는 하나님 백성의 마음과 행위를 뜻합니다. 하나님을 진지하게 찾고 하나님의 길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완곡한 거절, 개를 언급하신 거친 말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을 찾고 구한 수로보니게 여인은 진정한 구도자였습니다.

 
앞으로 한 달여 살펴볼 예언자 하박국 역시 하나님 앞에 선 구도자였습니다. 하박국은 예레미야와 동시대 인물로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무너지는 역사의 비극을 눈으로 목도했습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온 몸을 던져서 예언했다면, 하박국은 대중 앞에 나서기보다 자기 자리에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구도자였습니다.

 
하박국이란 이름은 “품어주다(embrace)”라는 뜻입니다.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품어주심을 그리워했던 선지자였습니다. 구약의 소예언서에 속하는 하박국서는 전체가 3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째와 둘째는 하나님 앞에서 고뇌하고 질문하는 하박국과 그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응답을 들은 하박국이 시기오놋이란 음악에 맞춰서 부르는 노래이자 하나님을 향한 신앙 고백입니다.

 
하박국서는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히브리어 본문은 “선지자 하박국이 본 예언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하박국은 하나님 앞에서 질문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하박국이 갖고 있던 질문은 세상에 폭력이 넘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 지에 관한 것입니다. 악이 판을 칩니다. 패역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높은 위치에 있습니다. 겁탈과 폭력이 앞서는 불의한 세상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서로 고소하고 분쟁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정의가 전혀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뜻을 따라 살려는 의인들이 악인에게 둘러싸고 있으니 의인의 삶이 힘겹습니다. 하박국은 이렇게 어그러지고 패역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께 나와서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손길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어느 때까지니이까(how long)”라고 하나님 앞에서 탄식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언제나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질지 탄식하며 기다립니다: “주님, 언제까지입니까?” 하나님께서 침묵하셔도 끝까지 주님의 뜻을 묻는 구도자가 되길 원합니다. -河-

수로보니게 여인 (7)

에바다: 열려라

 

수로보니게 여인에 대한 연속 설교 첫 시간에는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꼬투리 잡아서 시비를 거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막 7:1-23).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보다 속에서 나오는 것이 부정하다는 말씀과 동시에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막7:6)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한 다윗의 자손, 메시아임을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대적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훼방과 간섭을 피해서 이방 지역인 두로와 시돈에 올라가셔서 아무도 모르게 쉼을 갖고 싶으셨습니다. 그런데 흉악한 귀신이 들린 딸을 가진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막7:24-30). 마태복음에서는 유대인과 비교되는 가나안 여인이라고 불렀는데, 예루살렘의 지도자들과 달리 이 여인은 예수님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신분이나 겉모습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과 비교가 되지 않는 이방 여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 앞에 자신을 낮췄고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을 구했습니다. 예수님을 비방하고 꼬투리를 잡는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과 달리 개라고 불려도 좋다는 겸손과 믿음을 갖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마가복음 7장 마지막 세 번째 본문에 의하면(막7:31-37), 수로와 시돈을 떠난 예수님께서 역시 이방 땅 데가볼리를 거쳐서 갈릴리 호숫가에 가셨습니다. 그때 귀먹고 말을 더듬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따로 데리고 가셔서 양 귀에 손을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고 하늘을 향해서 탄식하신 후에 “에바다(열려라)”외치시니 그의 귀가 열리고 입술이 풀렸습니다.

 

앞에서 등장한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겉으로는 말도 잘하고 듣기도 잘했지만, 신앙적으로 귀가 막히고 올바로 말할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반면, 예수님을 찾아온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방인이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는 눈과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큰 믿음이라 칭찬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열리고 예수님께 나와서 예수님을 고백하는 입을 갖기 원합니다. 에바다 – 열어 주시는 우리 주님의 손길을 구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닮기 원합니다. -河-

수로보니게 여인 (6)

– 네 믿음이 크도다

 

수로보니게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 여인이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임을 강조하면서 “가나안 여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치면서 예수님께 나왔지만, 예수님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자를 쫓아 보내시라고 요청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침묵을 거절로 생각해서 선수를 친 것입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입을 여셨는데, 자신은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을 위해서 보내심을 받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수로보니게 즉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제외된다는 완곡한 거절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이스라엘의 잃은 양에게만 가라고 말씀하신 바 있으니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드렸을 것입니다(마10:5-6).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는 절망적인 말씀입니다.

 
하지만,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갑니다. 절까지 하면서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울부짖습니다. 거절의 순간에 포기하지 않고 더욱더 예수님께 다가가고 예수님의 도움을 구하는 여인의 믿음이 돋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대답하십니다. 자녀(유대인들)의 떡을 개들(이방인)에게 던지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개는 유대교 전통에서 부정한 동물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을 포함한 이방인을 가리키는 거친 표현입니다. 그러자 여인이 분위기를 바꾸는 놀라운 말을 합니다:“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7절). 개 취급받아도 상관없으니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달라는 것입니다. 여인의 말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크도다”고 말씀하시면서 딸을 고치십니다.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을 왜 그토록 차갑게 대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여인의 믿음을 테스트하셨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의 테스트를 멋지게 통과해서 딸도 고쳤고 큰 믿음이라는 칭찬까지 받았습니다.

 
다른 의견은, 예수님은 여인을 수로보니게 출신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시고 처음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으셨다가 여인이 끝까지 예수님을 구하는 것에 마음이 움직여서 딸의 병을 고쳐 주시고 큰 믿음이라고 칭찬하셨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해석이 본문의 흐름에 더욱 적합해 보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예수님의 냉정한 태도와 더불어 여러 가지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 있습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킨 여인의 큰 믿음을 닮고 싶습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