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신 하나님

2021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는 표어로 올해를 시작했습니다. 연초만 해도 소띠해인 2021년에 온 세상이 다시 일어나서 뚜벅뚜벅 주어진 길을 걸어갈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백신 접종이 시작되면서 바이러스 전파도 둔화되고 결국에는 마스크까지 벗고 일상을 회복할 것을 기대했지만, 델타 바이러스와 최근의 오미크론 바이러스까지 변이가 등장하면서 올해 표어가 무색할 정도로 계속되는 팬데믹을 살고 있습니다.

 
2년여의 힘겨운 기간이었지만 참빛 식구들 모두 각자의 자리를 지키시고 꿋꿋하게 견디셨습니다. 우리 교회도 주님의 은혜와 인도하심, 성도님들의 헌신과 섬김에 힘입어 어려운 시기를 잘 지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사망의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다윗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팬데믹이라는 긴 기간을 지나고 있지만, 우리 역시 어떤 어려움과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윗과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으로 올 한 해도 살았습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있는 힘입니다. 믿음 가운데 누리는 확신입니다.

 
올해도 주일 예배에서 신구약 성경을 오가면서 연속해서 말씀을 나눴습니다. 새해 첫 달의 시편 91편 말씀은 전염병을 비롯한 재앙에서 자기 백성을 지키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룻기를 통해서 삶 속에 임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예레미야서를 통해서 우리 마음속에 새겨 주시는 하나님의 새 언약을, 수로보니게 여인의 특별한 믿음을, 하박국 선지자를 통해서 회의하면서도 질문하고 끝까지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구도자의 마음을, 빌레몬서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용서와 회복을 배웠습니다.

 
그동안 나눈 말씀을 모두 기억할 수 없지만, 주일마다 나눈 말씀이 생명의 양식이 되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한 해 동안 참빛 식구들과 하나님 말씀을 나눌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주일 설교가 유튜브에 남아 있기에 언제든지 다시 들을 수 있는 것도 팬데믹이 우리에게 준 선물입니다.

 
2021년 한 해 동안 지나온 발걸음이 결코 쉽지 않았지만, 우리와 함께 하시고 보호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기 원합니다. 룻에게 임했던 깜짝 놀랄 만한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했다면 하나님께 깊이 감사하기 원합니다.

 
주님의 은혜에 다시 감사드립니다. 올 한 해도 변함없이 함께 해 주신 참빛 식구들께도 감사드립니다. 하박국처럼 주님 한 분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주의 백성이 되기 원합니다.-河-

평화의 왕

2004년에는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남아시아에 쓰나미가 덮쳐서 2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날은 성탄절 다음 날이었습니다. 성탄절 휴가로 태국을 비롯한 휴양지에 모였던 사람들이 대부분 희생되었기에 더욱더 안타까웠습니다.

 
올해도 성탄절을 보름 정도 앞두고 미국 중서부에 토네이도가 밀어닥쳤습니다. 토네이도 경보에 미리 몸을 피했음에도 불구하고 100여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집을 비롯한 재산을 잃은 사람들은 매우 많습니다. 이재민들에게 2021년 성탄절은 기쁜 날이 아니라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슬픈 날이 될 것 같습니다.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실 때도 세상은 혼란스러웠습니다.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고, 예루살렘에는 이두메(에돔) 출신 헤롯 일가가 로마의 섭정 아래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 이권을 챙기는 데 혈안이 되었고,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은 로마 황제에게 인정받는 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소위 암 하렛츠(땅의 백성)라고 불리는 일반 백성들은 굶주리고 지쳐 있었습니다. 희망이 없었습니다.

 
들에서 양을 치고 있던 목자들도 비슷한 처지의 백성들이었습니다. 밤에 양을 칠 정도면 목자들 가운데서도 그들의 순번이 꽤 아래에 속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탄생을 들에 있던 목자들에게 제일 먼저 알리셨습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2:7).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 온 세상을 구할 그리스도께서 나셨다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목자들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서 경배하고 베들레헴 사람들에게 구주가 태어났다고 천사들이 알려준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천군 천사가 하늘에서 찬양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예수님께서 세상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평화가 없는 세상이었기에 예수님께서 오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평화를 찾기 어렵습니다. 자연재해와 전염병 그리고 사람들 마음속에 깃든 시기와 질투 그리고 분쟁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아름다운 세상을 먹물처럼 흐려 놓았습니다. 그래서 평화의 주님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합니다.

 
다시 한번 주님의 평화를 구합니다. 우리 마음에 임한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를 세상에 전하기 원합니다. 천군 천사처럼 하늘에서는 영광, 땅에서는 평화라고 찬양하면서 성탄절을 맞기 원합니다. -河-

사랑받는 형제 빌레몬 (6)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빌레몬서는 한 장 밖에 되지 않고, 바울과 오네시모 그리고 빌레몬 세 사람만 등장하는 단출한 말씀이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하나님을 믿는 진실한 신앙과 사랑이 잔뜩 베어져 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면서 빌레몬에게 잘못하고 도망친 종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종이 아닌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 주길 부탁했습니다. 오네시모가 로마 감옥에 있는 바울을 만났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서 바울의 심복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알리지 않고 오네시모를 데리고 있을 수 있었고, 알리더라도 명령조로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자기에게 보내라고 강요할 수 있었지만, 신사적으로 부드러운 마음과 말씨로 빌레몬에게 부탁했습니다. 빌레몬이 “자의로”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바울의 부탁을 들어주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절차의 중요성과 믿음의 백성들이 서로 배려하는 품격을 느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잘못했거나 행여나 재정적으로 손해를 끼친 것이 있으면 자신이 대신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오네시모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같은 주님을 믿는 형제로 받아주라는 부탁입니다. 바울은 믿음과 사랑의 사람 빌레몬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빌레몬이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것을 확신합니다: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21절).

 
바울의 부탁이 매우 특별한 것이었지만, 바울과 빌레몬 사이에는 흔들림 없는 신뢰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오네시모 역시 옛 주인 빌레몬과 새로 섬기기 시작한 바울의 믿음과 성숙함을 보면서 감동을 받고 더욱더 새로운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훗날 오네시모라는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배출되는데 바울이 아들이라고 말했던 빌레몬서의 오네시모라고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무엇보다, 빌레몬서를 읽으면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하나님을 연결해 주신 예수님과 바울이 겹쳐서 떠오릅니다. 오네시모가 갚아야 할 빚이 있다면 바울이 대신 청산해 주겠다는 말에서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르고, 우리와 주인 되신 하나님을 이어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합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등지고 떠날 때가 많이 있으니 오네시모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빌레몬서는 골로새 교회를 넘어서 그 이후에 예수님을 믿게 된 하나님 백성들에게 큰 은혜를 끼쳤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화평케 하는 자로 살기 원합니다. -河-

 

사랑받는 형제 빌레몬 (5)

사랑받는 형제로

 

빌레몬서의 주인공은 세 사람입니다: 편지를 쓴 사도 바울, 바울의 편지를 갖고 빌레몬을 찾은 오네시모, 바울의 편지를 받는 빌레몬.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편지를 써서 오네시모 편에 빌레몬에게 보냈습니다. 바울의 편지는 도망친 종 오네시모를 주인 빌레몬이 용서하고 받아 주길 부탁하는 내용입니다.

 

세 사람 모두 조심스러운 입장입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동역자 빌레몬에게 어려운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도망친 종을 받아 주는 것이 관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바울은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종이 아니라 자기처럼 “사랑받는 형제”로 받아 주길 부탁합니다. 종을 넘어서 자유인으로 대우해 달라는 것입니다.

 

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나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고, 바울이 그를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내 심복”이라고 불렀지만,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는 큰 상처와 손해를 입힌 도망친 종입니다. 그렇다면 그에 합당한 벌을 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형제로 대우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면 사도 바울의 증언(편지)뿐입니다.

 

오네시모도 도망친 노예들이 당하는 처벌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자신을 다시 살려준 사도 바울을 믿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빌레몬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 태어난 오네시모 역시 옛 주인을 만나서 자기 잘못을 솔직히 고백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인이 자기를 어떻게 대할지 알 수 없으니 큰 모험을 감행한 셈입니다. 두려웠을 것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보내지 않고 로마 감옥에서 바울 자신을 섬기도록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랑하는 빌레몬을 향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빌레몬의 승낙을 받고 오네시모를 곁에 두고 함께  동역하려는 것입니다. 빌레몬이 기쁨으로 바울의 부탁을 받아 주길 기대하고 있습니다:”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14절).

 

바울은 오네시모를 단지 종이 아니라 사랑받는 형제로 자기 곁에 두겠답니다. 그러니 빌레몬도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오네시모를 대해 주길 부탁합니다. 행여나 오네시모가 여전히 잘못한 것이 있으면 바울이 보증을 서고 책임지고 갚겠답니다. 바울은 빌레몬과 오네시모 가운데 서서 두 사람을 용서와 화해의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를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주의 형제가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세 사람의 신뢰가 전제된 파격적인 부탁입니다.

 

우리에게도 빌레몬서의 세 인물과 같은 신뢰가 형성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 안에서 용서와 화해를 경험하는 참빛 식구들 되시기 바랍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