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추수감사절에

오늘은 2020년 추수 감사 주일입니다. 예년 같으면 함께 모여서 예배하고 여선 교회가 준비한 추수감사절 만찬을 나눌 텐데, 올 해는 각자 흩어진 자리에서 추수감사절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흩어져서 예배한 지 여덟 달이 넘었으니, 새로운 일상에 적응이 될 만도 한데 주일마다 허전한 마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교회는 함께 모여서 예배하고 친교할 때 더욱 힘이 생기는 것을 실감한 올 한 해였습니다.

 

그래도 각자의 자리에서 뜻 깊게 추수 감사절을 맞이하고 감사의 예배를 드리기 원합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새로운 환경 속에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세어보고 그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로 모이지 못했지만, 지난 8개월여 각자의 자리에서 예배할 수 있었습니다. 유튜브를 통한 예배에 우리 모두 함께 할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아이들이 있는 가정은 아가방에 있어야 하기에 부부가 따로 예배드려야 했는데, 집에서 드리는 예배가 집중이나 참여도에서 도움이 되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또한, 집에 있으니 교회에 나오지 않는 가족들과 함께 예배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을 때는 영상 예배의 이점을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그래도 함께 모여서 예배하지 못하니, 예전의 공동체 예배가 얼마나 귀하고 중요했는지 실감했습니다. 아직은 언제 모여서 함께 예배할 수 있을지 정해진 날짜가 없습니다. 그때까지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하나님을 예배하기 원합니다. 다시 모였을 때 우리의 기쁨이 배가되고 더욱더 뜨겁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개인별로 또한 가정별로 감사할 것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부정적이고 어두운 곳을 바라보면, 불평이 먼저 나오고 감사가 사라집니다. 감사는 찾아서 세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흘려 보내지 않고 마음에 간직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작은 것도 감사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이 신앙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시편 95편은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장면입니다. “오라”로 시작되는 1절은 모든 백성을 하나님께로 초청하는 말씀입니다. 구원의 반석이신 여호와를 노래하고 즐거이 외치는 장면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 부르는 승전가처럼 들립니다.

 

시편 기자가 감사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모든 신보다 뛰어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그 어떤 것도 하나님보다 높으신 것이 없으니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섬기겠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온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추수감사절을 보내면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 무릎 꿇고 베푸신 은혜에 감사하기 원합니다. 감사가 넘치는 추수감사절 주간이길 바랍니다. -河-

요한일서 (8)

담대함이 이것이니

 

요한일서의 결론이 시작됩니다. 사도 요한의 관심은 영원한 생명에 있었습니다. 그가 요한복음을 기록한 것도 생명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오늘 본문도 요한복음과 비슷하게 시작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5:12).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최고의 선물인 생명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죽음과 멸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인은 죽으나 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누립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생동감 있게 살아갑니다.

 

요한일서에는 “담대함(자신감)”이라는 표현이 네 번 등장합니다. 첫째로 예수님 안에 거하길 부탁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끝까지 간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부끄럽지 않고 담대하게 예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2:28)

 

둘째로 오늘 본문과 연결되는데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책망받을 것이 없다면,  담대함을 얻고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습니다. 거룩한 삶이 우리에게 주는 힘입니다(3:21).

 

셋째는 지난번에 살펴본 말씀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을 이웃과 나누는 삶을 살면,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마지막 심판을 맞게 될 것입니다(4:17).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도 기도와 담대함을 연결했습니다. 담대함이라는 표현이 마지막 때와 기도를 가리키면서 번갈아 등장한 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니 담대할 수밖에 없습니다(5:14).

 

단지 우리의 소원만 알리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에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경청해야 할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하나님과의 긴밀한 소통입니다.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구한 것을 주신다는 말씀이 얼마나 강력한지요!

 

담대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 속에는“용감함” “자신감”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자신감을 갖고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도 자신 있게 예수님을 맞을 수 있고,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고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문제도 용감하게 대면할 능력이 있습니다. 얼마나 큰 힘인지요! 믿음 안에서 담대하고, 자신감 넘치는 참빛 식구들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河-

요한일서 (7)

세 가지 증언

 

사도 요한이 전하는 복음은 믿음과 사랑이 함께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진리가 무엇인지 분별하는 믿음입니다. 어려움이 닥쳐서 분열된 공동체가 다시 하나되는 비결은 사랑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로부터 낳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형제 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 안에 임하신 하나님을 볼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갖고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라면 세상을 이길 수 없다고 다시금 선언합니다(요일 5:5). 여기서 세상은 우리가 사는 자연 또는 터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이 활동하는 영역 또는 악한 세력이 지배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사탄의 시험을 이기시고 귀신들을 쫓아내신 예수님의 능력을 힘입지 않으면 절대로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유일한 힘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셋이 있습니다. 첫째는 진리의 영인 성령이 물과 피로 나신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여기서 물은 예수님의 세례를 가리키고,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입니다. 그렇다면 물과 피는 예수님 사역의 시작과 끝을 뜻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전반에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음을 강조했습니다. 교회에 들어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는 악한 세력들이 예수님의 인간적인 요소를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성령은 예수님께서 단지 육체로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즉 영적인 존재요 진리이심을 증거합니다. 물과 피가 증거하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진리의 영인 성령의 증거가 합쳐지니, 두세 증인이 있어야 증언이 사실이라는 구약의 조건과도 일치합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자신의 아들로 증거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변화산에서,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임을 증거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증거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믿음과 사랑을 통해서 예수님을 세상에 증거할 수 있습니다.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감으로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물과 피로 임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의 영인 성령의 증거, 하나님의 증거, 그리고 우리의 증거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 안에 생명이 임하고, 그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河-

요한일서 (6)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마지막 두 장에서 믿음과 사랑을 통합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간다고 믿던 우리에게, 믿음과 더불어 사랑이 필수적임을 알려줍니다. 사도 바울이 말했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5:6)과 같은 맥락입니다.

 
마지막 때에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심판의 날을 맞이 할 수 있는 힘은 바로 사랑입니다. 이것이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는 말씀이 갖는 의미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고백이라면, 사랑은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베푸는 믿음의 실천입니다. 이처럼 믿음과 사랑이 함께 갑니다.

 
오늘 본문(5:1-4)에서 다시 한번 믿음과 사랑의 관계를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메시아)이심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믿을 때 하늘에 속한 자라는 특별한 지위를 얻을 수 있습니다(요일4:2).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다시 태어난(born again) 성도를 가리킵니다(1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낳으셨다니 놀라운 말씀입니다.

 
요한일서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낳았다는 표현이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1) 의를 행하는 것이 하나님에게서 난 자의 특징입니다(2:29), 2)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씨가 성도들 안에 있기에 죄로부터 멀어집니다 (3:9), 3)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서로 나눕니다. 4)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에 있듯이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의 특징은 죄가 아닌 의로운 길을 가고, 사랑을 실천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믿습니다.

 
사도 요한은 다시 한번 형제 사랑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낳은 자라면, 하나님에게서 다시 태어난 다른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외적 표시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무리한 명령도 아닙니다:“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3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우리 가운데 가장 작은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마25:40)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임을 기억합시다.

 
예수님께서 죄와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메시아)로 믿는 것이 첫 단추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웃(형제)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때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사랑과 통합되었을 때 역사하는 믿음의 힘입니다. 할렐루야! -河-

요한일서 (5)

–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사랑장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요한일서 4장은 매우 세심하게 하나님 사랑과 우리의 사랑 그리고 믿음을 연결합니다. 첫 번째 문단(1-6절)에서는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분별하길 부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을 인정하고 믿는 것이 하늘에 속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두 번째 문단(7-10절)은 사도 요한의 교훈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온 듯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서 어떻게 우리에게 임했는지 증명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뿐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그를 화목 제물로 드려지는 실천이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배운 세 번째 문단(11-16절)은 첫째와 둘째 말씀을 합쳐놓은 것 같았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화목 제물로 드려진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하나님 안에 거하게 하시는 성령까지 삼위 하나님이 등장한 것도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믿음이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온전해집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것처럼 느낄 수 있는 길이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도 완성됩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는 믿음이 꼭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일서 4장의 결론에 해당합니다. 분별하는 믿음과 실천하는 사랑은 마지막 때까지 효력이 있습니다. 믿음과 사랑이 온전히 이뤄지면, 마지막 심판을 담대하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담대함의 반대말이 두려움입니다. 누구나 마지막 심판을 생각하면 두렵게 마련입니다. 심판과 형벌이 따를 것이라는 두려움입니다. 사도 요한은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는다고 선언합니다. 사랑이 마지막 심판의 두려움까지 극복할 수 있다면, 삶의 여정에서 마주치는 두려움 정도는 쉽게 이길 것입니다. 사랑의 힘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뿐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그를 화목 제물로 드리시면서 자신의 사랑을 실제로 실천하셨으니, 우리도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이웃과 나눠야 합니다.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입니다.

 

보이는 형제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도 사랑합니다. 하나님 사랑이 형제 사랑 속에서 완성됩니다.

 

우리 믿음에도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헛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으로 서로 연결되고, 세상에서 사랑의 파장을 만들기 원합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