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성탄 주일

평강의 왕

 

오늘이 대강절 마지막 주일이지만, 우리 교회는 성탄 주일로 지킵니다. 지난 한 달여 마음에 촛불을 하나씩 밝히면서 참빛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우리 안에 그리고 세상 곳곳에 깃든 어두움의 세력이 물러가길 기도했습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본 누가복음의 시므온과 안나를 보면서 예수님을 간절히 기다린 하나님 백성에게 임하는 은혜가 특별함도 배웠습니다. 같은 마음으로 한 주간 예수님을 기다렸기에 오늘 예배 가운데 우리와 함께 하실 예수님의 은혜를 더욱 사모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화목제물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죄에서 생명으로 옮기시고 하나님 백성 삼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요일4:10). 사랑의 하나님께서 하나뿐인 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신 이유와 목적입니다. 따라서 성탄절을 맞는 우리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과 더불어 우리 자신의 거듭남(born-again)을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는 새로운 탄생을 경축하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마음에 영접했을 때 임하는 것이 평안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 우리 마음과 삶을 지배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할 때 찾아오는 평안입니다.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에서 임하는 평안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의지해서 하나님께 직접 나갈 수 있다는 은혜 속에서 누리는 평안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의 분리에서 야기된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죽음을 극복한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평안입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강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에 근거합니다. 이사야서 7장 14절에서 “임마누엘(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다)”로 오실 예수님을 예고했습니다. 이 시간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서 9장 역시 메시아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한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앗시리아라는 제국에 의해서 핍박받고 고통받는 이스라엘에 임할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북쪽의 스블론과 납달리 땅은 앗시리아에 의해서 힘없이 무너졌지만, 요단강 건너 남쪽 유다는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들에게 큰 빛이 비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공격한 앗시리아가 탈취물을 나누면서 기뻐하던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했는데, 그것을 능가하는 기쁨이 하나님 백성에게 임할 것입니다. 주께서 압제자의 채찍과 막대기를 꺾어 버리십니다.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모두 불에 타버리고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이 모든 하나님의 역사를 실행하기 위해서 메시아가 오십니다. 한 아기로 태어나셨지만,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평강의 왕이십니다. 그가 통치하는 나라가 영원할 것입니다. 그 아기가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河-

2023년 대강절 (3)

성서 일과(lectionary)에 있는 이사야서를 중심으로 대강절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 살펴볼 이사야서 61장은 여전히 바빌론 포로에 있거나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상황은 좋지 않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왔어도 페르시아라는 제국이 통치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이 그렇듯이 이스라엘의 상황도 미완성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특히, 이사야서 61장 1-2절은 예수님께서 처음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회당에 들어가셔서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오늘 이사야 말씀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6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눅4:16-20)

 

 

이처럼 이사야서 61장은 하나님의 완벽한 회복을 선포합니다. 주님의 영이 선지자에게 임했습니다. “내게 기름을 부으사”(1절)는 메시아(기름 부은 자)를 가리킵니다. 메시아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과 안성맞춤입니다.

 

1-3절이 메시아 사역이라면, 4-9절은 메시아 사역의 결과입니다. 예수님께서 위로와 기쁨을 주십니다. 재를 쓰고 죄를 회개하던 마음에 기쁨이 임합니다. 슬픔 대신에 찬송이 임하니 근심이 사라집니다. 의의 열매를 맺고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이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복 받는 자손”(9절)이라고 불릴 것입니다.

 

10-11절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해서 크게 기뻐합니다. 영혼이 하나님으로 인해서 즐거워합니다. 구원의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공의의 겉옷을 입히셨습니다. 신랑이 제사장의 관을 쓰고 신부가 보석으로 단장하는 것 처럼 우리를 하나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들어갔다는 감사의 찬양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유를 주시고 세상에 은혜의 해를 선포하기 위해서 오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성탄을 기다리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길 원합니다. -河-

2023년 대강절 (2)

대강절 둘째 주일 성서 일과(lectionary)의 구약 본문은 이사야서 40장 1-11절과 시편 85편입니다. 이사야서와 시편 말씀 모두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새로운 세상을 예고합니다.

 

두 본문의 배경은 이스라엘이 멸망해서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상황입니다. 이사야서는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는 말씀이고, 시편 85편은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물론 성전까지 무너졌습니다. 예루살렘의 하나님 백성들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디아스포라(흩어진 백성/민족)가 되었습니다.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 찾아오십니다. 그들의 죄를 조건 없이 용서하십니다. 그들의 모든 죄를 덮어 주십니다.

 

시편 85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회복시켜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다시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섬길 것도 부탁합니다.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시고, 땅을 다시 풍성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회복입니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시편 85:10-11).

 

시편 85편의 약속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의와 진리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인간을 가로막던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평화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몹시 사랑하시기에 그 외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결과요 열매입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이사야 40장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고 하늘의 힘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위로가 필요합니다. 입에 발린 형식적인 위로가 아닙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위로입니다. 위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함>에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임했습니다:“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사 40:2).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들립니다. 사막에 시내가 흐르고 골짜기가 돋아서 평지가 됩니다. 높은 산은 낮아집니다. 여호와께서 임하시니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나사렛 목수의 아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바빌론 포로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듯이 하나님을 믿는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모일 것입니다. 대강절 둘째 주일,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실 주님의 나라를 꿈꾸며 하나님을 예배합시다.  -河-

2023년 대강절 (1)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성탄을 기다리는 대강절(Advent)입니다.

 

대강절에는 촛불을 하나씩 켜면서 4주간을 보냅니다. 어둠을 밝히고 빛으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예식입니다. 우리도 마음에 촛불을 하나씩 밝히면서 우리 마음과 삶에 깃든 어둠을 몰아내고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기 원합니다.

 

대강절에는 성서 일과(lectionary)에서 제시된 본문을 갖고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성서 일과는 성경 통독과 마찬가지로 매일 구약 두 본문과 신약 두 본문을 제시하고 차례로 읽어가는 성경 읽기 방식입니다. 성서 일과가 교회력을 반영하고 있기에 주일 본문이 대강절과 일치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이사야서 64장은 온 세상을 구원하실 하나님의 계획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을 뛰어넘는 온 세상에 임할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크고 완벽한데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오지 않고 각자 자기 길을 갑니다. 세상의 빛이 되라고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만 구원받았다는 선민의식에 빠졌습니다. 온 세상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옳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직접 일어나십니다.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십니다. 주님의 날이 찾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오시니 주 앞에서 산들이 진동합니다. 불이 숲을 태웁니다. 하나님께서 어디 계시냐고 조롱하던 이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랍니다.

 

지난주일 시편 46편에서는 어려움이 닥친 모습을 산이 흔들리고, 산이 바다에 빠지는 것에 비유했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임하시는 것을 산이 흔들리는 것에 비유한 것이 흥미롭습니다. 마치 인간의 어려움을 역전시키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시는 것은 그가 친히 택하신 자들을 위해서 입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공의를 행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부족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않습니다. 완벽하지 않습니다. 더러워진 옷과 같습니다. 시들어 버린 잎사귀와 같습니다. 죄로 인해서 무너진 인간의 모습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대로 내버려 두십니다. 인간의 추악함에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시고 외면하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산이 진동하는 엄청난 위력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위력입니다. -河-

찬송가 해설 (9): 피난처 있으니

찬송가 70장: 피난처 있으니

교회력에 따르면 오늘이 성령 강림 후 마지막 주일입니다. 교회력은 예수님께서 오실 성탄을 기다리는 대강절로 시작해서,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그리고 성령 강림절로 이뤄져 있습니다. 대강절부터 부활절은 예수님의 생애에 초점을 맞춥니다. 마지막 성령 강림절은 오순절 성령강림부터 반년 정도 이어지는데,  십자가의 은혜와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인도와 능력으로 자라가는 기간입니다. 강단 색깔도 초록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 후 마지막 주일입니다.

 

지난주까지 로마서 12장을 공부했습니다. 대강절이 시작되는 다음 주부터는 늘 그랬듯이 <성서일과lectionary>에서 알려주는 본문을 갖고 4주간 말씀을 준비할 예정입니다. 목사인 제가 설교 주제와 본문을 정합니다. 물론, 참빛 식구들을 마음에 두고 꼭 필요한 말씀을 준비하려고 노력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시는 말씀을 기도 가운데 찾습니다. 그래도 제가 정하는 본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서 일과에서 주어진 본문을 갖고 말씀을 준비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연속 설교 중간에 살펴보는 <찬송가 해설>시간입니다. 찬송가 70장 “피난처 있으니”의 배경을 공부하겠습니다. 서양 음악은 중세 이래 기독교 음악이 주도했습니다. 찬송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게다가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우리 찬송가에는 서양 곡들이 많이 들어있습니다. 그래도 2006년에 발행한 <21세기 새 찬송가>에는 총647곡 가운데 한국인이 작사한 찬송 121곡, 작곡한 찬송이 127곡이 수록되었습니다. 그 이전 찬송가에 고작 17곡 수록된 것에 비하면 우리 나라 사람이 만든 찬송이 많이 수록된 셈입니다.

 

우리가 오늘 살펴볼 “피난처 있으니”도 우리나라 사람이 작사한 찬송입니다. 그런데 누가 찬송시를 썼는지 알 수 없습니다. 대신, 시편 46편을 배경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피난처 되심을 고백한 찬송임이 틀림없습니다. 구한말 일제에 나라가 넘어가는 격변기에 하나님만이 피난처되심을 믿고 고백한 것입니다.

 

곡조 역시 누가 지은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1745년경 <음악선집 Thesaurus Musicus)에 처음 실렸습니다. 그 후에 영국에서는 여왕의 영광을 칭송하는 노래에 이 곡을 갖고 왔고, 그로부터 지금까지 영국 국가의 곡조가 되었습니다.  대영제국이 위세를 떨치면서, 같은 곡을 갖고 국가를 부른 경우가 20여개국에 달했답니다. 구한말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애국가가 창작되고 불렸는데, 1898년 독립협회가 독립문에서 부른 애국가에 영국 국가에 쓰인 곡을 가져와서 불렀습니다. <아메리카 America>로 불리는 미국 애국가에도 같은 곡이 사용되었습니다.

 

이처럼 찬송가 70장 <피난처 있으니>의 곡은 영국 국가에서 갖고 왔지만, 찬송시는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함께 고백한 신앙 간증입니다. 나라가 일제에 넘어가는 백척간두의 순간에 하나님을 의지하겠다는 다짐입니다. 우리도 어렵고 힘들 때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의지하기 원합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