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와 함께 (1)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지금 구원해 주소서”)>라고 외쳤습니다. 구약의 예언대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대우한 것입니다. 백성들은 죽은 사람까지 살려내신 예수님께서 로마권력을 물리치고 그들이 간절히 바라던 메시야 왕국을 세워주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각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정치범 또는 강도들이나 달리는 수치의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모두 담당하시고 속죄 제물로 죽으신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구원이 아니라 온 인류를 향한 구원 계획을 갖고 세상에 오셨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언하신대로 사흘 만에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사망권세와 세상을 지배하는 악한 세력들에 대해서 승리하신 것입니다.

이번 주간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기억하며 동참하는 고난주간입니다.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우리의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기 원합니다. 우리들 신앙이 대체로 이기적이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들 자신을 지향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가르쳐주는 온전한 신앙은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번 고난주간에는 하나님을 사모하고 바라보기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마음에 품고 그 십자가 앞에 나가기 원합니다. 예배는 물론 삶의 중심을 예수 그리스도로 삼는 것입니다.

고난 주간을 보내면서 오늘 본문인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한 단어 한 단어, 각 구절과 표현들을 꼼꼼히 읽고 말씀을 곱씹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과 똑같이 고백하면서 부활절을 맞기 원합니다. 바울은 이제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없습니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그의 삶에 드러납니다. 바울의 과거도, 그가 범한 죄들도, 그를 유혹하는 악한 세력들도, 그를 핍박하고 힘겹게 하는 모든 것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바울이 육신의 몸을 입고 살고 있지만 그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영은 온전히 그리스도로 옷 입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과거에 얽매입니다. 죄에 지배를 받습니다. 악한 영이 우리를 시험하고 유혹합니다. 자아가 강해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지만 여전히 자신이 주인으로 살아갑니다. 염려와 근심을 온 몸으로 느낍니다. 두렵습니다. 바울은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십자가에 모두 던졌습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믿었습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십자가의 능력에 동참했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부활절을 맞이합니다. 부활은 죽음의 세력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요 새로운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아남으로 온전히 변화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원합니다.-河-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8)

우리들 인생사가 꽤 복잡합니다. 인간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걸어가는 인생길도 다양하고 때로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습니다. 그때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께 나와서 도우심을 구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생길을 인도해 주신다는 믿음을 갖고 살아갑니다. 이것을 섭리(providence)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참새 한 마리가 얼마에 팔려나가는지 아시듯이 우리의 삶을 꿰뚫고 계시며 결국에는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우리들이 그럴 자격이 있기보다 하나님께서 선하시고 그를 믿는 백성들을 무척 사랑하셔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시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우리들 자신과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하는 것이 신앙의 여정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믿음을 갖고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빛으로 소금으로 세상에 보내셨음을 믿고 세상 속에 녹아들어갑니다. 동시에 세상 속에서 거룩하신 하나님 백성으로 구별된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멋진 모습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창세기의 요셉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세상 속에서 지혜롭게 살아남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서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지만 이름이 바뀌고 이집트 제사장의 딸과 결혼을 하면서도 살아남았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이집트 총리까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고 성경은 그 자체를 두고 그를 형통한 자라고 불렀습니다. 이집트 바로왕 역시 요셉을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자라고 불렀습니다. 이처럼 요셉이 이집트에서 살아남은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요셉을 통해서 그의 아버지 야곱과 가족들이 이집트로 이주하게 됩니다. 갑작스레 형들을 대면한 요셉이 서두르지 않고 절차를 밟으면서 형들과의 용서와 화해를 시도합니다. 마음 깊은 곳에 있었던 응어리를 풀어낸 후에 형들에게 자신이 요셉임을 밝힙니다. 그 과정에서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습니다. 자신을 이집트에 보내신 것은 아버지와 가족을 구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과 온 가족을 고센 땅에 정착시킵니다. 그곳은 이집트 사람들은 가기 싫어하지만 목축을 하기에 적합한 땅입니다. 이집트에 와서 나그네로 살면서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으면 자기 가족들을 따로 한적한 곳에 정착시켰을까요? 아이러니컬하게도 이것이 이스라엘이 400년 동안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게 된 시작입니다. 하지만 그 긴 종살이 동안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모세를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들 각자는 물론 세상 속에도 임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어떤 삶의 모습이든지 결국에는 합력해서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 믿음과 지혜를 요셉을 통해서 그동안 배웠습니다. 우리들 역시 요셉처럼 주도적으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과 긍정적인 태도를 갖고 세상에서 근사하게 살아야합니다. 참빛 교회 식구들께서 좋으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날마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자로 살아가시길 기도하겠습니다. -河-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7)

신앙생활은 마라톤과 같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여러 가지 기적들도 나오고 한 번에 모든 일이 해결되는 듯 하지만 거기까지 이르기에 인고(忍苦)의 시간이 있었고, 때로는 정상에 섰다가도 다시 추락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이러한 예들을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서 발견하면서 인생이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배웁니다. 동시에 창조주되신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인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고 변덕스러운지를 깨닫습니다. 그때마다 언제나 거기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다시금 하나님 품에 안겨서 “주님,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뿐입니다. 이렇게 살아계신 하나님 바라보면서 주어진 인생길을 자기 속도대로 걷기도 하고 때로는 뛰는 것이 신앙의 여정입니다.

형들에 의해서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온 요셉의 인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셔서 가는 곳마다 형통했습니다. 가정의 총무였던 그가 이집트 제국의 총리가 되는 펼쳐지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신앙의 갈등은 심해졌고 히브리 사람 요셉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세력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겼습니다.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간 후 20년의 시간이 지나고 첫째 아들 므낫세를 낳으면서 비로소 고향에 대한 마음을 접고 이집트에 정착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셉 앞에 열 명의 형들이 나타납니다. 아버지와 형들이 살던 가나안 땅에도 극심한 가뭄이 닥쳤고 아버지 야곱의 분부대로 양식을 구하러 형들이 이집트에 온 것입니다. 형들은 자신이 노예로 팔아버린 동생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있으리라고 상상하지 못했기에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금방 형들을 알아보았습니다. 형들의 무감각과 요셉의 알아차림이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요셉은 형들을 거칠게 다룹니다. 형들에 대한 옛 감정이 되살아나서 그것을 조절할 필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관계가 단숨에 회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한 용서와 화해를 위해서 거쳐야 할 과정이 꼭 있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거칠게 다루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시므온을 볼모로 잡고, 동생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명령합니다. 형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20년 전 자신들이 동생 요셉에게 했던 일을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형들의 말을 옆에서 들은 요셉은 울컥합니다. 하지만 아직 형들 앞에 자신을 드러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가뭄이 계속되면서 아버지 야곱은 요셉의 요구대로 사랑하는 아들 베냐민을 다른 아들들과 함께 이집트로 보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베냐민을 지켜주시길 기도합니다. 이집트에 도착한 형들은 세 번씩이나 요셉에게 몸을 굽혀 절합니다. 요셉의 꿈이 이뤄진 것입니다. 친동생 베냐민을 본 요셉은 감정을 조절할 수 없을 정도로 격해 집니다. 하지만 아직도 준비가 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잃고 20년을 상심하면서 살았는데 이제 나머지 아들들을 이집트로 보내고 노심초사 기다릴 뿐입니다. 형들은 영문도 모르고 이집트에서 당하고 있습니다. 요셉 역시 형들과 완전한 화해와 용서가 가능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하면서 아슬아슬하게 형들을 마주합니다. 이 모든 상황을 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요셉의 꿈을 이뤄 가시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본문 속에 깃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요셉과 그의 가족의 삶이 하나님에 의해서 빚어집니다. 마라톤과 같은 삶이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니 소망이 생깁니다.-河-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6)

사순절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습니다. 사순절에 해당하는 영어 <렌트, Lent>는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사순절을 지나치게 금욕하고 절제하는 어두침침한 느낌으로 묘사하곤 했습니다. 물론 사순절 기간 동안 자신을 돌아보고 행여나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부분이 있다면 회개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순절은 예수님의 고난을 넘어서 부활을 준비하고 대망하는 기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근사하게 살기로 결단하고 그것을 실제로 실천하는 절기입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찾아가서 따뜻한 말 한마디 또한 작은 선행을 실천하시면 좋겠습니다.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가정의 총무, 감옥의 총무를 거쳐서 당시의 제국 이집트에 총리가 되는 펼쳐지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형들에 의해서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는데 총리가 되었으니 고진감래(苦盡甘來)의 표본이 될 만합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요셉에 대한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그의 성공에 있지 않습니다. 창세기 본문은 요셉이 총리가 된 것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삶이 형통했다고 말합니다.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가서 보디발 집의 노예로 있을 때도 형통했습니다. 그의 인생 최악의 순간일 수 있는 감옥에서 죄수로 살 때도 형통했습니다. 요셉에게 있어서 성공 또는 형통함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었지, 이집트의 총리가 된 것만이 성공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요셉은 형통한 삶을 살았습니다.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가 된 이후에도 그의 삶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그가 30년 동안 믿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이집트 총리로서의 생활방식이 부딪쳤습니다. 이집트 태양신 또는 왕의 형상이 새겨진 반지를 껴야했습니다. 이집트 귀족들이 입는 옷에도 태양신의 문양이 들어가 있었을 것입니다. 왕이 타는 수례를 내주었지만 거기도 이집트 신들의 형상이 새겨져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요셉이지만 사방에 이방신들의 우상들이 있고 바로는 물론 태양신을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야했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산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지어준 이름 요셉도 “사브낫바네아”라는 이집트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요셉이 이집트의 모든 것을 주관하는 청지기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름이 바뀌는 것은 그가 완전히 이집트 사람이 되었다는 표시입니다. 바로왕은 요셉을 이집트의 제사장 딸과 결혼시킵니다. 이집트에서 가장 유명하고 지위가 높은 제사장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요셉은 바로왕에 의해서 이집트사람으로 변해갑니다.

요셉은 두 명의 아들을 낳습니다. 첫째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모든 고난과 아버지집의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는 뜻의 므낫세로, 둘째는 ‘하나님께서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는 뜻의 에브라임입니다. 요셉이 이름도 바뀌고 이집트 여인과 결혼하면서 세상 속에 완전히 동화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두 아들의 이름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했습니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음을 아들의 이름에 새겨둔 것이 인상 깊습니다. -河-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5)

지난주일 오후에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참빛 가족들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참빛 보이스 두 번째 시간을 가졌습니다. 작년에 있었던 첫 번째 시간에는 뇌에 대해서 배웠고, 이번에는 노화와 면역을 연구하는 형제들께서 훌륭한 정보를 알려주셨습니다.

우리 몸에서는 끊임없이 쓰레기가 만들어지고, 그것을 청소하는 기능은 나이가 들면서 약화된다는 의견에 우리 모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우리 몸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걸작품이니 쓰레기를 잘 소제되고 건강한 몸을 유지해서 더욱 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적당히 먹고, 잠을 푹 자고, 규칙적인 운동과 무엇보다 깊은 기도와 묵상을 통해서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우리 몸안에 어떤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마치 군대조직처럼 일사불란하게 대처하는 면역기능이 있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장에 들어있는 공생균들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장을 모두 펼치면 테니스 코트만큼 넓다는 설명에 창조의 신비를 다시금 느꼈습니다. 이 세상에서 건강하게 사는 것이 큰 복입니다. 아프면 자신은 물론 주위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삶의 질이 뚝 떨어집니다. 마음껏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참빛 교회 식구들 모두 건강하시길 바라고 바쁜 중에도 재밌고 쉽게 설명해주신 발제자들, 또한 기발한 질문으로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켜주신 모든 성도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주인집 아내의 유혹을 거절해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요셉은 감옥에서도 범사에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 자체가 형통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요셉의 생활태도가 간수의 눈에 들어서 요셉은 감옥에서도 총무의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요셉은 감옥에 있는 사람들과 두루 친분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왕에게 술을 공급하는 관리와 떡을 공급하는 관리가 꿈을 꾸었다고 요셉에게 말해줍니다. 요셉은 명쾌하게 두 사람의 꿈을 풀어줍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야곱의 집에서 꿈을 꾸었던 요셉이 이제는 꿈을 해몽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셉이 해석한 대로 한 사람은 죽고 다른 관리는 사흘 후에 복직됩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요셉이 이집트 바로왕의 꿈을 해석하게 됩니다. 요셉의 꿈 풀이대로 복직된 관리가 왕에게 히브리 소년 요셉을 소개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요셉의 인생을 인도하고 계심을 봅니다. 바로왕의 꿈은 7년의 풍년이 있은 후에 7년의 흉년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7년 풍년동안 흉년을 잘 대비해야 한다고 요셉이 조언합니다. 바로왕은 요셉의 말을 그대로 듣습니다. 그뿐 아니라 요셉을 이집트 총리로 세워서 앞으로 닥칠 흉년을 대비하게 만듭니다.

요셉은 보디발 집의 가정총무, 감옥의 총무를 거쳐서 이제 한 나라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의 인생이 동심원처럼 펼쳐집니다. 이러한 요셉을 보고 이집트 관리들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자“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 속에서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입니다. -河-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4)

지난 수요일부터 사순절(Lent)이 시작되었습니다. 앞으로 부활절까지 계속될 사순절 기간 동안 참빛 식구들의 신앙이 주님께 더욱 가까이 가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며,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기간이 되길 바랍니다. 매년 맞는 사순절이지만 하나님께서 올해 부어주실 은혜를 간절히 사모합시다.

사순절 동안 우리들의 마음가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각자의 삶을 단정히 하고 날마다 진정한 회개의 자리로 나갑니다. 2) 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 자신의 신앙과 삶을 돌아봅니다. 3) 금식과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함은 물론 구제와 선행을 실천합니다. 4)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 안에 가지처럼 붙어있어서 열매 맺는 삶을 삽니다. 5) 특별히 올해 사순절에는 모든 교회가 하루에 세 가지씩 감사의 제목을 노트에 기록하면서 보내기로 했습니다. 크고 작은 감사의 제목을 날마다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참빛교회 식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집트 바로왕의 경호 대장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온 요셉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니 그가 하는 일들이 형통했습니다. 주인 보디발은 요셉에게 집안의 모든 사무를 맡겼고, 요셉으로 인해서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요셉이 이방 땅에서 복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습니다. 요셉은 외모가 빼어났고 아름다웠습니다. 노예 중에서 가장 뛰어난 외모를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행동이 눈에 띠었고 매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합니다. 주인집 마님의 유혹이니 뿌리치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냉정하게 거절합니다. 주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큰 죄가 된다고 담대히 밝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붙잡고 유혹하는 보디발의 아내의 손길을 뿌리치기 위해서 겉옷을 두고 도망칩니다. 요셉의 행동에 화가 난 보디발의 아내가 자기 남편에게 요셉이 자기를 희롱하면서 동침하자고 했다는 누명을 씌어서 고소합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서 요셉은 정치범들을 가두는 감옥에 갇힙니다.

형들에 의해서 마른 구덩이에 던져졌던 요셉이 이제는 주인에 의해서 감옥에 던져지는 최악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요셉의 인생은 이렇게 자꾸만 밑으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감옥에 갇힐 때도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고 그에게 변함없는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요셉 역시 감옥에서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감옥을 책임지는 간수가 요셉에게 모든 사무를 맡겼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도 가정의 모든 사무를 도맡아했는데, 감옥에서도 매한가지였습니다.

이처럼 요셉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 그에게 은혜를 베푸심으로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견딜힘을 주셨습니다. 요셉 역시 감옥에 갇히는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고, 감옥에서도 형통함을 누렸습니다.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간 요셉은 그의 인생이 감옥까지 떨어졌지만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받았습니다. -河-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3)

수요일부터 2015년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수요일은 사순절을 앞두고 몸과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정돈하고, 우리의 본질이 흙에서 온 먼지와 같은 존재들임을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는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입니다. 올해 사순절에 모든 성도님들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앞으로 부활절까지 하루에 3가지씩 감사의 제목을 떠올리시면서 기도하시고 별도로 노트를 준비하셔서 매일의 감사제목을 기록해 가시는 겁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위해서 고난 받으시고 급기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시고 그 은혜를 여러 각도에서 감사하는 기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속회나 가정에서 감사의 제목을 서로 나누면 은혜가 갑절이 될 것 같습니다. 온 교회가 <감사일지>를 꼭 쓰시길 부탁드립니다.

요셉에 대한 말씀이 계속됩니다. 형들에 의해서 이집트로 팔려간 요셉은 그곳에서 바로왕의 경호대장인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다시 팔려갑니다. 요셉이 이집트 고위관리의 집에 가정 일을 돕는 노예로 팔린 것입니다. 어찌 보면 불행 중 다행입니다. 고대시대에 노예는 주인의 소유물입니다. 노예에게 결정권이나 인간으로서 존중받을 권리가 전혀 없습니다. 철저하게 주인에게 예속된 존재입니다. 만약에 이스라엘에서 온 요셉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면 이집트에서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의 처지는 채색 옷을 입고 있던 야곱의 아들 요셉이 아니라 팔려온 노예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형으로부터 은 20에 요셉을 산 이스마엘 상인들이 그를 이집트의 고위관리인 보디발에게 넘겼다면 요셉의 몸값이 꽤 나갔을 것입니다. 아니 노예를 사러 시장에 나왔던 보디발에게 요셉이 눈에 띠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생기발랄한 소년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 해맑은 모습을 하고 있었을 겁니다. 먼 거리를 오느라 지쳤고, 자신의 앞길을 알지 못하니 절망했겠지만 여전히 다른 노예들과 달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보디발이 선뜻 그를 사갑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음을 강조합니다. 비록 노예로 살았지만 하나님께서 요셉의 삶을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형통하게 하였다는 말씀은 요셉의 삶에 하나님의 손길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열심히 살았을 것입니다. 비록 낯선 땅에 팔려온 노예였지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요셉으로 인해서 그의 주인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습니다. 이를 통해서 이집트의 고위관리 보디발이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을 봅니다: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았더라”(3절).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간 요셉의 상황은 절망적입니다. 그의 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래도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간직했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요셉의 진가를 확인한 보디발이 그의 집의 모든 사무를 요셉에게 맡길 정도입니다. 요셉의 진실성과 성실함 그리고 남다른 정직함의 열매였습니다. 당시의 제국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온 요셉은 이렇게 삶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 힘으로 노예의 삶을 견뎌냈습니다. -河-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2)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며 지내던 요셉에게 인생 최대의 위기가 닥칩니다. 하루는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들에서 양을 치는 형들에게 보냅니다. 요셉은 선뜻 형들을 찾아 나섭니다. 형들이 도단이라는 곳에서 양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 고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멀리서 걸어오는 요셉을 알아본 형들은 요셉을 죽일 생각을 합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말씀에서 야곱은 요셉을 특별히 사랑했지만, 형들은 동생 요셉을 미워했다고 했습니다. 요셉을 향한 형들의 미움은 시기와 질투로 발전했습니다. 요셉 혼자 채색 옷을 입고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질투가 생겼습니다. 자신들은 들에서 양을 치느라 고생을 하는데 요셉은 아버지 곁에서 편하게 지내는 것도 못마땅했습니다. 게다가 자신들이 요셉에게 절할 날이 올 것이라는 꿈 이야기를 듣고는 시기심이 불일 듯 일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자신들만 있는 들판에 요셉이 나타났으니 그를 죽일 생각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형들은 요셉을 보고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라고 비아냥거립니다. 요셉을 잡아서 구덩이에 던져서 죽이려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웁니다. 시기와 질투 의 끝이 참으로 무섭습니다. 그래도 맏이 르우벤과 유다의 중재로 요셉을 죽이지는 않고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당시 노예 한명 값인 은 이십을 받고 팔아버립니다. 이렇게 해서 요셉은 이집트로 팔려갑니다. 형들은 요셉의 옷에 짐승의 피를 묻혀서 그가 짐승에 물려서 죽은 것처럼 아버지 야곱을 속입니다. 그동안 속고 속이는 인생을 살았던 야곱이 급기야 아들들에게 속임을 당하는 안타까운 일이 생겼습니다.

요셉을 죽일 생각을 하고 결국 먼 나라 이집트에 노예로 팔아버리는 형들을 보면서 시기와 질투가 얼마나 무서운지 배웁니다. 아마 형 혼자서는 그런 못된 짓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열 명의 형들이 의기투합하니 동생을 죽일 생각까지 합니다. 이처럼 죄는 작은 것에서 시작해서 큰 것으로 발전합니다. 혼자 하면 죄책감을 느끼지만 함께 하면 도리어 죄를 즐기게 됩니다. 사악하다는 말이 맞습니다. 그런 점에서 죄를 짓게 하는 것은 악한 영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죄에 민감해야 합니다. 죄를 자각하면 곧바로 회개해야 합니다.

형들이 요셉을 사랑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요셉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꿈얘기를 하면서 자랑할 때도 친엄마 없이 자란 그를 이해해주고 도리어 격려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밀려오는 것은 야곱의 형제들에게 사랑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준다고 했는데 말입니다.

지난주에 속회가 새로 발표되었습니다. 온 교회가 서로 사랑해야 하지만, 올 한해 속회를 통해서 주님의 사랑을 나누기 원합니다. 시기하고 질투하거나 허물을 들추어내기보다 서로 품어주면서 사랑으로 행하는 속회가 되기 원합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시기와 질투 그리고 경쟁이 판치는 세상 속에서 사랑으로 행하시는 참빛
식구들 되시기 바랍니다.-河-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1)

오늘은 새로 세워진 임원들을 임명하고 축하하는 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핏값을 주고 사신 교회를 섬기는 것은 매우 감격스런 일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임원을 세우는데 까다로운 기준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직분이 어떤 지위가 아니라 섬김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정해진 기준을 충족하고 자원하는 마음이 있을 때 교회의 임원으로 세웁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작년부터는 젊은 집사님들께서 주일예배 기도를 인도하십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사람을 세우는 사명을 갖고 있는데, 젊은 집사님들을 교회의 일꾼으로 준비시켜드리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권사님들께서 배려해 주시고, 은퇴하신 권사님들께서 식사기도로 섬겨주시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젊은 집사님들에게 기도의 기회를 주신 권사님들과 기도로 섬겨주시는 집사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섬겨주신 원로집사님을 명예 권사님으로 모시고, 여섯 분의 젊은 집사님을 세웁니다. 직분을 받으신다고 갑자기 바뀌는 것은 없습니다. 교회 사역이 늘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대신에 몇 가지 부탁을 드립니다. 명예 권사님께서는 직분 그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고, 교회의 어른으로 본을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주는 명예직이기에 더욱 뜻 깊은 직분입니다. 집사님들은 성심껏 교회를 섬겨주시기 바랍니다. 궂은일을 먼저 하시고, 교회를 위해서 기여할 수 있는 사역을 찾아서 자원하시면 됩니다. 저희 교회는 일에 사람을 맞추지 않고, 일하실 일꾼이 있으면 그 사역을 시작합니다. 여러분이 하고 싶으신 사역을 마음껏 하시기 바랍니다. 힘닿는 대로 지원하겠습니다.

사역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새로 임명된 임원들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의 모든 임원들께 드리는 부탁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경건의 시간을 규칙적으로 가지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사도가 부탁했듯이 교회를 섬길 때는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힘으로 하면 금방 지치고 불평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교회와 성도님들을 섬기시고, 주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창세기 요셉에 대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지난 한달 동안 하나님께서 쓰시는 교회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는 것입니다. 요셉에 대한 말씀을 통해서 오늘 세워주신 임원들은 물론 참빛 교회 모든 성도님들께서 하나님께 쓰임 받으시길 기대합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신앙과 성품을 갖추시길 바랍니다.

요셉에 대한 말씀은 그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꾸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지만 요셉이 너무 일찍 발설하는 바람에 형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요셉과 그의 아버지 야곱은 하나님의 꿈을 마음속에 간직했습니다. 요셉이 이집트에 팔려가고 어려운 일들을 연거푸 겪었지만 하나님의 꿈을 마음에 품었기에 힘든 과정을 이겨나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마음에 품고 있으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河-

하나님이 쓰시는 교회 (4)

올 해 우리 교회 표어대로 <하나님이 쓰시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교회도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또한 성령 하나님께서 마음속에 거하시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전이라고 말하고 있으니(고전3:16) 우리들이 쓰임 받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쓰시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두 가지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께서 쓰심으로 일어나는 외적인 변화 또는 열매들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쓰셨다는 것이 겉으로 드러나니 당사자는 물론 주변 사람들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이것이 요한 계시록의 일곱 교회들에 있었던 “행위”일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내적인 성품의 변화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있었던 사랑, 믿음, 섬김과 인내의 네 가지 덕목이 성품 속에 배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행위와 성품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쓰시는 것이 드러나 보일 때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아보게 되고 그들도 하나님께로 올 것입니다.

저는 위의 두 가지 표시들 가운데 특별히 성품의 변화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행위는 좋을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어서 하나님께서 쓰심을 한결같이 드러내 보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반면에 우리의 성품은 상황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합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들을 보고‘예수 믿는 사람답다’라고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신다는 증거가 됩니다. 신앙과 삶의 통합이 이루어진 행위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을 닮은 성품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쓰임받기 원합니다.

오늘 살펴볼 서머나 교회는 빌라델비아 교회와 마찬가지로 책망 없이 칭찬만 받았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고난의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겪고 있는“환난과 궁핍”을 알고 계셨습니다. 여기서 환난이라고 하면 밖에서 오는 핍박을 가리킬 것입니다. 궁핍은 물질적인 빈곤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라오디게아 교회와 반대로 서머나 교회는 가난했습니다. 자랑할 것이 없는 초라한 교회였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의 실상이 제각각인데 그 가운데 서머나 교회의 상황이 가장 열악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서머나 교회를 두고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고 칭찬하십니다. 라오디게아의 책망과 정반대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믿음이 부요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목숨 걸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앞으로도 고난이 계속 닥칠 것이라니 이들의 상황이 얼마나 어려운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시는 당부의 말씀이 “죽도록 충성하라”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믿음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환난의 기간이 열흘로 정해져 있음을 알려 주십니다. 이들 앞에 생명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늘 좋을 수 없습니다. 환난과 핍박이 수시로 밀려옵니다. 그때도 죽도록 충성하면서 신앙을 지켜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고난의 끝에 생명의 면류관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