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인물 – 썬다싱

우리가 믿고 있는 기독교 신앙은 2천년 교회사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물론이고 교회사 속에 등장하는 신앙의 선배들 역시 우리에게 커다란 귀감이 됩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와 그의 동역자 필립 멜랑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일으키셔서 타락한 중세 가톨릭에 대항하는 프로테스탄트 개신교를 탄생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성취하심을 보여준 좋은 예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인물은 인도의 성자라고 불리는 썬다싱입니다. 썬다싱은 1889년 인도의 핀잡 람플이라는 작은 동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종교심이 매우 깊어서 아들이 자신들이 믿는 시크교의 수도사가 되길 원했습니다. 특별히 마음이 곱고 지혜로웠던 그의 어머니는 썬다싱이 열네 살 때 돌아가셨지만 썬다씽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썬다싱은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종교심이 깊은 사람으로 자랐습니다.

썬다싱은 마을에 있는 선교사들을 대적했습니다. 선교사가 전해준 성경을 불사르고 그들의 전도를 애써 뿌리치면서 자신이 믿던 종교의 수도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신이 강림하지 않으면 새벽기차에 몸을 던져 죽겠다는 결심을 하고 신의 임재를 구합니다. 그때 이상한 빛이 방을 비췄습니다. 불이 난 것처럼 환한 빛이었는데 썬다싱은 그 빛 속에서 자신이 믿던 신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 예수님을 만났던 사도바울을 연상시킬 정도입니다.

썬다싱은 세례 받고 30일 만에 성경 하나 들고 전도자의 길을 떠났습니다. 수많은 고난과 핍박을 무릅쓰고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목숨 걸고 전했습니다.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다니면서 손과 발에 동상이 걸리고 추위와 배고픔이 밀려왔지만 영혼을 향한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습니다. 목숨의 위협을 당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번번이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주셨습니다.

한번은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출신의 스토크라는 수도사를 만났습니다. 그때는 썬다싱이 계곡을 다니다가 쓰러져서 간신히 목숨을 구했던 때였는데 스토크 선교사가 편하게 예수를 믿지 왜 고생을 사서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선다씽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답니다:“나는 참 행복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생하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우리들의 신앙을 돌아봅니다. 썬다싱에 비하면 우리는 너무 편하게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신앙은 태만해져있고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삽니다. 영혼구원에 대한 열심도 많이 식었습니다. 기독교인은 목숨을 내놓고 예수를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신앙은 매우 이기적입니다. 내 욕심을 먼저 챙깁니다. 썬다싱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받은 은혜를 이웃 사랑으로 실천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길을 꿋꿋하게 걸어가기 원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꼭 붙들고 나가는 근사한 참빛 식구들 되시기 바랍니다.-河-

종교개혁 주일에

개신교에서는 10월 마지막 주일을 종교개혁주일로 지킵니다. 1517년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그 성당에 당시 로마 가톨릭의 타락과 비리를 고발하는 95개조의 반박문을 게시하면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날이 바로 10월 31일이었습니다. 개신교회가 시작된 날입니다.

마틴 루터는 당시의 가톨릭교회가 면죄부를 팔면서 교인들의 돈을 착취하고, 교황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이 정치 세력화되는 것을 보면서 분개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물론 교회의 사명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던 마틴 루터는 타락한 교회를 반박하는 95개 조항을 조목조목 기록해서 비텐베르그 성당에 게시했고 이 사건이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마틴 루터로부터 시작된 개혁의 불꽃은 독일은 물론 온 유럽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교회가 하나님보다 위에 올라가있고, 백성들 위에 군림하던 종교지도자들의 타락에 환멸을 느낀 백성들이 종교개혁에 동참했습니다.“오직 신앙으로”“오직 성경으로”“오직 은혜로”라는 캐치 프레이즈 그대로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고, 타락한 가톨릭 교회에 저항하는 종교개혁이 펼쳐진 것입니다.

개신교라는 것은 신앙의 개혁을 추구하는 교회라는 뜻입니다.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 부패하게 마련입니다. 부와 권력을 갖게 되면 하나님을 뒷전으로 옮겨놓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려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회개하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니어서 날마다 교회의 모습을 돌아보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교회가 되길 기도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개신교를 프로테스탄트라고 합니다. 당시에 철옹성 같았던 로마 가톨릭에 저항해서 종교개혁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잘못 된 것, 하나님의 뜻에 위반되는 교회와 세상의 모습에 개신교는 저항합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조용하게 도운 인물이 오늘 우리가 살펴볼 필립 멜랑톤입니다. 그는 루터보다 14세나 아래여서 마틴 루터를 스승으로 존경하고 따랐습니다. 멜랑톤은 학자였습니다. 루터가 과격하게 몸으로 종교개혁을 주도했다면 멜랑톤은 학문적으로 또한 그의 삶을 통해서 루터를 돕고 종교개혁에 동참했습니다. 루터가 당시 가톨릭 교회와 싸우면서 종교개혁을 주도했다면 멜랑톤은 타협과 평화를 주장하면서 종교개혁의 속도를 조절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누군가 먼저 시작할 때 불꽃이 타오를 수 있음을 루터를 통해서 배웁니다. 하지만 한 사람이 개혁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앞에서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고, 뒤에서 은밀하게 돕는 손길도 있어야 하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함께 참여하는 발걸음도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진정한 혁이 성취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주일을 맞아서 우리들 개인의 신앙과 삶이 새로워지길 원합니다. 개신교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이 임하길 기도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주님의 나라가 되길 소원하면서 그 길로 나가기 원합니다. 우리 참빛 교회도 날마다 새로워지고 주님의 나라를 이루는데 귀하게 쓰임받길 원합니다.-河

시편 119편 읽기 : 내 길의 빛

시편은 감정을 실어서 읽어야 하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말 그대로 시(詩)들을 모아놓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시 속에는 여러 가지 상징들이 들어있습니다. 시인들만이 사용하는 표현들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시는 읽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야 합니다. 성경 말씀 가운데 시편이 바로 그렇습니다.

시편은 곱씹으면서 읽어야 합니다. 한 장이 짧다고 해서 서둘러 읽거나 대충 넘어가면 하나님 말씀의 깊은 맛을 느낄 수 없습니다. 한 말씀 한 말씀이 귀중합니다. 한번 읽고 두 번 읽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시편 말씀의 단맛을 경험합니다. 그때 우리도 하나님 말씀이 송이꿀보다 달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시편은 소리 내서 읽어도 좋습니다. 시를 낭송하듯이 하나님 말씀인 시편을 소리 내서 읽을 때 입으로 나온 소리가 다시 우리들 귀를 통해서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경험합니다. 소리 내서 읽으면 눈으로 읽는 것보다 훨씬 더 하나님 말씀이 우리 안에 울려 퍼집니다. 물론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소리 내서 시편말씀을 차근차근 읽으면 은혜가 더욱 풍성해 집니다.

시편은 우리들의 삶과 직접적으로 맞닿아있습니다. 시편말씀을 읽다보면 우리의 마음을 잘 대변해 주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아서 답답해합니다. 사람들이 자꾸만 괴롭혀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더 잘됩니다. 그때마다 스스로 주눅이 들고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섭섭함과 죄송함이 교차합니다. 나라를 잃고 하나님을 예배할 성전을 잃은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탄식합니다.

늘 힘든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삶 속에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시고, 경험하게 하시는 하늘의 기쁨입니다. 그때 우리도 시편 말씀처럼 하나님을 향해서 손을 높이 들고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 만물을 보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이뤄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 백성이 된 것이 가장 큰 감사입니다. 이처럼 시편에는 감사와 기쁨, 찬양과 고백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오늘 살펴보는 시편 119편 105절 말씀에서는 하나님 말씀이 우리들 발의 등이요 길의 빛이라고 가르쳐줍니다. 발의 등은 가까운 거리를 비춥니다. 길의 빛은 먼 인생길을 비춰주는 전조등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우리들 인생길의 안내자요 지침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말씀이 가르쳐준다고 시편기자가 고백합니다.

시편 119편 속에 나타난 시편 기자의 상황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비방합니다. 기도의 응답이 지체됩니다. 순간순간 생기는 탐욕과 헛된 것을 향한 욕망이 자신을 괴롭힙니다. 때로는 사망의 골짜기를 걷는 느낌이 듭니다. 그 순간에 시인은 하나님 말씀을 붙잡습니다. 자신의 마음과 삶에 말씀을 세웁니다. 말씀으로 살아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으로 주의 말씀이 발의 등이요 길의 빛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은혜와 능력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10월이 시작되었습니다. 올 가을에는 온 교회가 주의 말씀에 깊이 빠져봅시다. 할렐루야! -河-

시편 119편 읽기 : 내가 사랑하는 계명들

시편 119편이 무려 176절에 달하는 성경에서 가장 긴 장이지만 한 구절 한 구절 마음을 열고 읽다보면 말씀의 은혜가 곳곳에 배어있음을 발견합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33-40절에서는 주의 말씀을 세워주시길 간구했습니다. 탐욕이 밀려오고 헛된 세상 것들에 곁눈질을 하면서 살아가지만 주님의 말씀가운데 새로운 생명을 주시길 간청했습니다. 사람들의 비방으로 두려움이 밀려오지만 하나님 말씀에 삶을 붙들어 매고 그 안에서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길 기도했습니다.”나를 살아나게 하소서“라는 시편 기자의 기도소리가 애절하게 들려왔습니다.

오늘은 이어지는 41-48절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42절에서 시편기자를 비방하는 사람들과 이유를 발견합니다. 시편기자의 상황이 쉽지 않은 것을 두고 세상 사람들이 그를 비방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세상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왜 그런 일이 닥치느냐?”고 비아냥거립니다. 자신의 처지가 좋지 않기에 떳떳하게 답변할 수 없으니 마음이 편치 않고 심하면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시편기자의 상황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이 사람은 왕들 앞에서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직무를 갖고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직책을 갖고 있는데 어려움이 생기니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기가 더욱 쉽습니다.

이런 상황은 우리 모두 세상 속에서 종종 경험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세상의 기준에 딱 맞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세상의 부귀영화가 따라오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고 그 힘과 지혜로 세상에서 근사하게 사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하나님을 열심히 믿어도 세상에서는 힘겨운 고난의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때 주눅이 듭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지 않은 말을 하면 마음이 상합니다. 이런 어려움이 계속되면 혹시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까 두려운 마음도 생깁니다. 세상을 사는 주님의 백성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어려움입니다.

이런 어려운 순간에 시편기자는 주님의 말씀을 꼭 붙들고 있습니다.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과 구원을 베풀어주시길 기도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구원이 임하면 자신이 겪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주님의 말씀 즉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자신을 비방하는 사람들에게 대답하길 원합니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입에서 하나님 말씀이 떠나지 않길 기도합니다.

시편 기자는 주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특징입니다. 그때 자유함이 임합니다. 말씀을 세우고 말씀에 붙어서 행하면 삶의 기준과 가치관이 확실해 집니다. 반면에 말씀을 뒤로 한 채 세상 것들을 둘러보면 도리어 세상에 종이 되고 맙니다. 시편기자는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도리어 자유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유함 속에는 “넓은 곳”을 다닌다는 뜻도 들어있습니다. 말씀으로 신앙과 삶의 지경을 자유롭게 넓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주님의 말씀을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이라고 부릅니다. 말씀을 사모할 뿐만 아니라 말씀을 사랑합니다. 말씀 안에서 기쁨을 누립니다. 주의 말씀을 향해서 손을 듭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립니다. 시편기자가 하나님 말씀을 얼마나 사모하고 사랑하는 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우리도 이 가을에 주님의 말씀 앞에서 손을 들고 읊조리면서 말씀의 은혜를 깊이 누리기 원합니다.-河-

시편 119편 읽기 : 말씀을 세우소서

<신앙 터잡기>에 대한 네 번의 말씀을 마쳤습니다. 참빛 식구들과 우리 교회의 신앙의 터가 깊고 넓게 자리 잡아서 결코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신앙으로 자라가길 원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끊임없이 사모하고 주님께 날마다 가까이 가려는 말씀읽기와 기도가 있을 때 가능합니다.

지난 수요예배때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말씀인 씨가 좋은 밭에 뿌려져야 열매를 맺습니다. 길가에 뿌려진 말씀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가 와서 빼앗아 갑니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받을 때는 기쁘지만 어려움이 닥치면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시들어 버립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인생의 가시덤불인 염려, 욕심, 쾌락, 재물에 대한 유혹으로 인해서 크게 자라지 못하고 중간에 질식해 버립니다. 여기서 씨는 하나님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러고 보니 말씀이 우리 안에 어떻게 자리잡느냐에 따라서 신앙은 물론 삶이 결정됨을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 서너 주는 시편 119편을 통해서 하나님 말씀의 소중함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시편 119편은 176절로 구성된 성경에서 가장 긴 장(障)입니다. 또한 히브리어 본문을 보면 알파벳 순서로 각 문단이 시작되는 운율이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시편 1편과 더불어 대표적인 지혜시에 속하는데 특별히 시편 119편은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강조합니다. 176절에 달하는 각 구절마다 하나님 말씀을 가리키는 표현들이 매번 등장합니다. 여호와의 율법, 여호와의 증거, 주의 법도, 주의 판단, 주의 계명등입니다. 기회가 되시면 시편119편을 펼쳐놓고 각 구절마다 말씀과 관련된 표현들에 동그라미를 치면서 살펴보십시오. 하나님 말씀의 중요성을 다양한 표현을 가지고 설명하고 강조하고 있음을 발견하실 겁니다.

176절에 달하는 시편 119편을 모두 살펴볼 수 없기에 듬성듬성 <배우며 자라가는 교회>라는 우리 교회 표어에 맞는 말씀들을 택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시편 119편이 기록되던 시대는 이스라엘 민족이 나라도 잃고 신앙도 무너진 위기의 시대였습니다. 나라가 어려우니 개인의 삶도 어렵습니다. 고초의 삶이 지속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꼭 붙들고 견뎌야 하는데 그것마저 힘겹습니다. 그때 시편 기자는 하나님 말씀이 생명줄임을 깨우쳐줍니다.

오늘 본문(33-40절)에서는 시편 기자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대개 기도는 우리들 개인의 문제나 세상의 문제를 하나님께 아뢰고 해결책을 간구하게 마련인데, 본문 속의 시편기자는 하나님 말씀을 가르쳐주시고, 깨닫게 해주시고, 행하게 해 주시길 간구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켜 행하기 원하는 소원을 기도로 표현합니다.

시편기자는 자신의 본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즐거워하고 말씀을 따라 살고 싶지만 그의 마음은 자꾸만 탐욕을 향하고 있습니다. 아침안개처럼 헛된 것에 마음과 힘을 쏟고 있습니다. 거기서 돌이키고 싶은데 자신의 의지로서는 역부족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사모합니다. 말씀의 능력으로 주님의 길을 걷고 싶어서 도움을 구합니다. 생명의 길로 나가고 싶은 것입니다. 시편 기자 마음에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환경도 그리 좋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비방합니다. 사람들의 이목이 두렵습니다. 세상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고역입니다. 그때도 시편기자는 말씀을 사모합니다. 말씀으로 세워지고 의롭게 되는 인생이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말씀 속에 은혜와 능력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河-

신앙 터잡기 (4) : 주님의 교회

신앙 터잡기 마지막 시간인 오늘은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요즘처럼 교회의 신뢰도가 많이 떨어진 때일수록 교회에 대한 바른 생각을 갖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는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구약시대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각 지역마다 회당이 있어서 유대인들은 그곳에 모여서 성경을 배우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을 지속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시고 기적을 행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구약시대의 성전이나 회당을 교회의 직접적인 뿌리로 보는 것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그것은 구약의 제사법에 따른 예배였고, 회당의 경우 바리새인들이나 랍비가 유대교 중심의 신앙생활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고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설교를 하니 삼천명이 예수님을 믿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대부분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기독교로 개종한 것입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가정에 모여서 기쁘고 순전한 마음으로 떡을 떼면서 사도들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교제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처음으로 모인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기독교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예루살렘외에 안디옥에 처음으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행11장). 당시 팔레스타인의 거점 도시였던 안디옥에 세워진 교회는 다양한 민족과 계층의 사람들이 모였지만 매우 건강하게 자랐습니다. 이방인 선교에 나섰던 바울과 바나바도 안디옥 교회가 파송했습니다. 바울은 로마 식민지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지역 교회를 세웠고 이들에게 서신을 보내서 신앙과 교회가 바로 세워지길 권면했는데 이것이 신약성경에 있는 바울서신들입니다. 이처럼 초대교회는 가정을 넘어서 지역을 중심으로 세워졌고, 이들은 신앙훈련과 친교는 물론 선교의 전초기지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의미를 다음의 두 가지 표현들이 잘 가르쳐줍니다. 먼저 헬라어 에클레시아(ecclesia)입니다.‘부름 받은 사람들의 모임, 성도들의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또 다른 헬라어“키리아코스(kyriakos)입니다.‘주님께 속한 공동체’라는 뜻으로 교회의 주인이 그리스도이심을 가르쳐줍니다. 이처럼 교회는 단순히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라‘부름 받은 성도들의 공동체’‘주님께 속한 공동체’입니다.

교회를 드러내는 네 가지 표지(marks)가 있습니다. 첫째로 단일성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사도성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보내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았습니다. 둘째는 보편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세워진 그리스도인의 모든 모임이 교회입니다. 셋째로 거룩성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였다는 것이 드러날 정도로 구별된 모임이어야 합니다.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은 예배, 훈련, 구제와 선교 그리고 성도의 교제입니다. 교회에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이웃을 구제합니다. 함께 교제하면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갑니다. 교회는 이렇게 세가지 표지들과 네 가지 사명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교회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2천 년 전 초대교회에 뿌리를 내린 교회가 지금 우리에게 임했으니 지금 여기서 주님의 교회를 섬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영광이요 은혜임에 틀림없습니다. 할렐루야! -河-

신앙 터잡기 (3) : 예배와 삶

신앙 터잡기 세 번째 시간인 오늘은 예배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눕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예배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예배자로 서는 것이 가장 큰 축복이요 특권입니다. 예배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우리를 이어주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배에 대한 성경적 의미는‘하나님께 몸을 숙여서 경배한다’는 뜻입니다. 단지 몸을 숙이는 것을 넘어서 땅에 엎드려서 경의를 표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옛날 사람들이 왕이나 황제를 맞이하듯이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땅에 엎드려 주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배는 매우 엄숙하고 하늘의 신비를 맛보는 거룩한 행위(시간)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와서 예배하길 원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 앞에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을 믿는 주님의 백성들만이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물을 갖고 성전에 와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언약가운데 주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이 예배합니다. 바로 우리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참된 예배자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필요한 마음가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신령은‘영(spirit)’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영으로 예배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영으로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성령의 임재 속에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죄를 고백하면서 정결한 마음으로 예배하는 것을 뜻합니다. 거짓, 교만, 불의를 버리고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둘째는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감사의 예배를 기뻐 받으십니다. 우리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나와야 합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올 때 참된 예배자가 되기 힘듭니다.

셋째는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시51:17).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근사한 것 완전한 것을 바라기보다 부서지고 통회하는 마음을 원하십니다. 우리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하나님께 드리며 예배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회복과 치유 그리고 넘치는 은혜가 있습니다.

넷째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해야 합니다(신6:4-5).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해야 하고, 그 신앙과 마음을 갖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모든 것을 드리고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할 때 주님의 은혜가 넘칩니다. 사랑은 우리 마음과 삶의 방향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음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삶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주일에 함께 모여서 예배하는 공동체 예배는 늘 중요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힘을 얻고 세상으로 나가서 삶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삶의 예배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예배로 드려져야 하고 우리의 모든 삶이 예배가 될 때 참된 예배자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합시다. -河-

신앙 터잡기 (2) : 말씀과 기도

사도바울은 디모데전서 4장 4-5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신앙이 깊이 뿌리 내리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말씀과 기도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모든 것을 조율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선해서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지만 말씀과 기도가 빠지면 헛것이 됩니다. 그 만큼 신앙에서 말씀과 기도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것을 두고 영감(inspiration)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 속에 하나님의 숨결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성경 속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어서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적합합니다(딤후 3:16). 하나님 말씀으로 우리의 생각과 삶을 다스릴 때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온전하다는 것은 하나님께 충분히 인정받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손색이 없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생명의 양식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을 읽지 않고 먹지 않으면 우리들 신앙은 영양실조에 걸릴 것입니다.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주보에 있는 <첫 아침을 주님과 함께>에 있는 본문을 따라서 매일같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을 습관으로 삼아야 합니다. 마음에 와 닿는 하나님 말씀을 적어놓고 틈틈이 묵상해야 합니다. 말씀에 힘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 말씀은 신앙은 물론 인생길을 걸어가는 지도(map)와 같습니다.

말씀이 생명의 양식이라면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숨을 쉬지 않으면 금방 질식하듯이 우리도 기도하지 않으면 신앙에 커다란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순간순간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좋은 일이 생겼을 때는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고, 힘들 때는 도움을 청하고, 슬플 때는 애통하면서 하나님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기도에는 특별한 형식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면서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올려드릴 뿐입니다. 물론 우리 생각만 속사포처럼 하나님께 쏘아 올리기보다 중간에 또는 기도 끝에 주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때 깊은 기도까지 들어갈 수 있습니다. 처음 믿으셔서 기도할 줄 모르신다면 그저 “하나님,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면 됩니다. 이것이 최고의 기도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을 갖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에 형식은 없지만 대표기도하시는 분들이나 절차를 갖춘 기도를 위해서 기도의 네 가지 요소를 기억해 두시면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을 경배함 – 죄의 고백 – 간구 – 이웃을 위한 기도. 이 가운데 이웃을 위한 기도는 우리들 기도의 지경을 한없이 넓혀줍니다. 나를 위한 기도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기도와 이웃을 위한 기도로 나간다면 우리의 기도가 온전해 진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고 우리의 신앙과 삶이 풍성해 지길 원합니다.-河-

신앙 터잡기 (1) : 복음

올해 우리 교회 표어가“배우며 자라가는 교회”입니다. 표어에 맞춰서 지난 3월부터 7월까지 속회별로 전교인 신앙 터잡기 교육을 했습니다. <복음-말씀과 기도-예배와 삶-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이어진 이번 성경공부에서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라면 누구나 배우고 함께 공유해야 할 주제를 다뤘습니다. 개인은 물론 교회가 자리 잡아야 할 신앙의 터전입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하신 분들과 온 교회가 다시 한 번 신앙의 기초를 다지는 목적으로 주일 설교시간에 연속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신앙의 기초를 다지는 귀한 시간이 되고, 온 교회가 같은 믿음을 갖고 한 길로 나가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복음(福音)은 말 그대로‘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앙겔리온은 전쟁에서 들려오는 승전보 또는 왕이 태어났거나 등극했다는 기쁜 소식을 가리킵니다. 세상에 울려 퍼지는 기쁜 소식이 복음입니다. 기독교에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베들레헴에 태어난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과 동격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이 인간의 몸을 입고 33년 동안 세상에 계셨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어려움과 시험을 당하셨기에 우리를 이해하시고 공감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에게 길과 생명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삶,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장차 오실 재림이 복음의 내용들입니다.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억누르는 죄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자격을 얻었습니다. 죄에서 구출되었으니 구원의 복음입니다. 죽음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갔으니 영생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 은혜 가운데 들어갈 때 옛 모습을 벗고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됩니다. 사도바울이 선포한 것처럼 이전 것은 지나고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었으니 회복의 복음입니다.

복음의 지경은 넓습니다. 개인적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온 세계에 울려 퍼집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서부터 시작되었기에 복음의 역사는 매우 깁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특권이 주어졌으니 복음은 높습니다. 복음 안에서 우리는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높이 오릅니다. 복음은 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들 삶 깊은 곳까지 만져줍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까지 깨닫게 하시고, 우리가 미처 기도하지 못하는 것을 탄식하면서 대신 기도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복음은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임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고 악과 고통과 슬픔이 없는 새하늘과 새땅이 임할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다각도로 그리고 역동적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합니다. 복음은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모두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거듭 태어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답게 온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뿌리를 내리고 세상에서 구원의 방주가 되기 원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살아있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세상 속에서 복음을 들고 빛과 소금을 사시는 근사한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河-

시몬 베드로 (8) : 샛별이 떠오르기 까지

베드로에 대한 연속 설교 마지막 시간입니다.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으면서 살아가던 요한의 아들 시몬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처음 만났을 때, “네가 장차 게바라 하리라”(요1:42)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베드로의 만남이 시작되었고, 지난 일곱 번에 걸쳐서 살펴본 것처럼 요한의 아들 시몬은 주님의 교회를 세울 반석, 베드로로 빚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그의 성품대로 사용하시면서 천국열쇠를 맡기셨습니다. 무엇보다 베드로는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을 의지해서 지친 몸을 이끌고 갈릴리 호수 깊은 곳으로 배를 몰고 갔습니다. 베테랑 어부가 나사렛 목수의 아들인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배가 가라앉을 정도의 고기가 잡히는 기적을 체험했고, 결국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한 밤중에 유령처럼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자신도 걷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바다로 뛰어내렸습니다. 비록 바람을 바라보다가 물에 빠지기는 했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처럼 바다 위를 걷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처럼 베드로에게는 말씀대로 행하는 우직함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실수를 연발했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화되신 예수님을 위해서 초막을 짓겠다고 설레발을 치다가 야단을 맞습니다.“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16;16)이라고 고백했지만, 예수님께서 죽으실 것이라는 말씀에 빨끈 화를 냈다가 사탄의 조종을 받고 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했지만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세 번 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베드로는 회개했습니다. 실수하고 실패했지만 결국에는 다시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아니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오셨고 베드로는 자신을 찾은 예수님께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고백하면서 다시금 예수님 품에 안겼습니다. 회개를 통한 변화와 고백이 베드로에게 있었기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교회를 맡기셨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는 이제 요한의 아들 시몬의 모습을 벗고 온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오순절날 약속하신 성령을 체험하면서 베드로는 능력 있는 사도로 놀랍게 변화됩니다. 그가 설교하니 삼천 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건이 예루살렘 한 가운데서 일어납니다. 성전 앞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고, 죽은 자를 살리고,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답게 예루살렘과 이방 땅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반석(게바)이 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자신의 실수를 만회라도 하려는 듯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주님께서 가신 길을 그대로 걸어가면서 제자의 삶을 산 것입니다. 고기를 잡는 갈릴리 어부가 죽은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자신이 보고 듣고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를 온 세상에 전하는 멋진 인생을 살았습니다. 할렐루야!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