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베드로 (7)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가장 힘드실 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습니다.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큰소리치고 난 후 불과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범한 잘못입니다. 베드로가 세 번째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할 때 예수님께서 고개를 돌려서 베드로를 바라보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눈길을 느끼는 순간 닭이 웁니다. 베드로는 그제야 예수님 말씀을 깨닫고 밖으로 나가서 통곡합니다.

3년을 따라다니던 스승을 배신한 죄책감이 무척 컸는지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고향 갈릴리로 내려가서 다시 어부의 삶을 이어갑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에 가장 먼저 무덤에 달려와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예수님에 대한 죄송함과 자신의 믿음에 대한 자책이 심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서 동료 제자들과 함께 고기를 잡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오십니다. 그 날도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는데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허탈한 베드로, 여러 가지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했을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또 다시 찾아오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인간으로 계실 때의 몸과 다른 신비한 부활체(復活體)를 입으셨습니다. 벽을 뚫고 오실 만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십니다. 함께 식사를 하다가 사라지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숫가에 서 계셨지만 제자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고기를 잡는 제자들에게 배의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대로 하니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말씀에 순종함으로 또다시 기적을 체험한 순간 요한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주님이시다”라고 소리칩니다. 주님이라는 말을 들은 베드로는 서둘러 겉옷을 입고 바다로 뛰어들어서 예수님께 헤엄쳐서 옵니다. 베드로의 마음에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깊이 드리워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죄책감과 자책하는 마음이 깊어서 갈릴리 어부로 돌아왔지만 그의 마음은 늘 예수님을 향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준비해 주신 아침을 먹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건이라고 요한이 전하고 있습니다(요21:14). 예수님께서 모닥불을 짚여 놓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두 번째 부인할 때도 차가운 새벽바람을 피하기 위해서 모닥불을 쬐고 있을 때였는데,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모닥불을 피우시고 제자들에게 친히 아침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베드로에게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아침식사를 마쳤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연거푸 물으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던 것과 대조되는 장면입니다. “내 양을 먹이라”고 베드로에게 목양의 사명을 위임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상한 마음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간 베드로에게 사랑을 안고 찾아가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은 베드로 마음 깊은 곳에 임했습니다. 예수님의 찾아오심과 내 양을 먹이라는 사명의 확인은 베드로의 상처와 죄책감을 치료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이 게바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합니다.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임할 줄 믿습니다. 날마다 우리들 삶의 현장에 찾아오시는 사랑의 주님과 다음 한 주간 동행하기 원합니다. -河-

시몬 베드로 (6) :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

예수님께서 3년간의 공생애를 마무리하십니다. 이제 십자가에 달려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돌아가실 때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 일을 위해서 세상에 오셨다고 해도 모든 인류의 죄를 한 몸에 지고 돌아가시는 것이 쉬울 수 없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꿋꿋하게 그 길을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룟유다의 배반으로 인해서 로마 군병들에게 잡히시던 날 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따라 나섰던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하시고, 웃옷을 벗으시고 대야에 물을 떠와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섬김의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될 것이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알려주십니다. 베드로에게는 그날 밤 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베드로는 펄쩍 뜁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다고 맹세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무 말이 없으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3년을 함께 지내면서 많은 것을 경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했고, 예수님의 능력에 몸소 참여했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여전히 예수님의 실체를 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능력이 크신 예수님께서 로마를 무너뜨리고 그곳에 새로운 메시야 왕국을 세우실 것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품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예수님을 세 번 씩이나 부인할 것이라는 말씀을 쉽게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인정하지 않으심에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입니다.

그날 밤 예수님께서 무력하게 로마 군병에게 잡히셔서 밤새도록 끌려 다니시면서 심문을 받으십니다. 베드로나 제자들이 기대하던 예수님이 아니십니다. 사흘 만에 살아나실 것이라고 하셨지만 현재의 초라한 모습을 보면 예수님의 부활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하면 자신도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될까봐 겁이 났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는 장면을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도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하길 원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세 번 부인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조심하길 기대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베드로가 마지막 세 번째로 부인할 때는 예수님께서 돌이켜서 베드로를 보셨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 마음에 예수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합니다.

여기까지 보면 베드로의 믿음과 그동안의 행보가 모두 무너져 내린 것 같습니다. 그것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던 밤에 믿음을 모두 털어 버린 듯 합니다. 가장 훌륭한 고백을 했던 베드로,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변화되신 모습을 보았던 베드로가 어떻게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는지 의아할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베드로의 실체입니다. 아무리 베드로가 위대해도 스스로의 힘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는 늘 넘어지고 무너집니다.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 속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발견합니다. 우리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물론 우리들에게는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와 사랑이 필요합니다. -河-

시몬 베드로 (5) : 여기가 좋사오니

베드로가 걸어간 신앙 여정이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말씀에 순종하면서 고기를 많이 잡고 심지어 바다 위를 걷는 기적까지 체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면서 그의 이름 뜻에 걸맞게 천국의 열쇠까지 예수님으로부터 약속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사탄아”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를 차근차근 훈련시키십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와 그의 갈릴리 친구들이자 동업자였던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명의 제자들 가운데 특별히 세 사람에게 주목하셨습니다. 훗날 베드로는 수제자로 교회의 터전을 세우는 반석이 되고, 요한은 90넘게 살면서 요한복음은 물론 요한 계시록까지 기록하는 영광을 누립니다. 야고보는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고 예루살렘에 박해가 닥쳤을 때 일찍 순교하면서 한 알의 밀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세 명이 담당해야 할 사역을 미리 아시고 특별히 훈련을 시키신 것입니다.

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십니다. 얼굴에 광채가 나고 옷까지 희게 빛이 납니다. 예수님께서 그동안 말씀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다면, 이번에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시면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세 명의 제자들에게 확실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영광스럽게 변화되신 예수님의 양 옆에는 엘리야와 모세가 있었습니다. 모세는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인도한 인물입니다. 고통가운데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 모세는 죄의 지배를 받던 우리를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유케하시고 하나님 나라로 인도해 주신 예수님을 미리 보여주신 구약의 인물입니다. 엘리야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께 간 선지자입니다.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해서 승리했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렸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큰 능력을 행사했던 특별한 인물입니다. 예수님께서 좌우에 모세와 엘리야를 두고 계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지위가 어느 정도인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실체를 본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또 나섭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17:4) 성급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 머무실 의도가 없으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로 하여금 예수님이 누구신지 확실히 보여주시고 싶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베드로를 신비로운 체험으로 부르십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확실히 경험하게 하십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본 것과 같은 영광스러운 장면을 베드로가 목격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체험이 중요합니다. 신앙이 머리에 머물러 있으면 힘이 없고 딱딱합니다. 가슴에 머문 신앙은 감정의 기복에 따라서 변화무쌍합니다. 체험은 신앙을 하나님께로 연결시킵니다. 우리의 신앙 고백에 확신을 더해 줍니다. 우리 모두 겸손하게 마음을 열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맞는 방식으로 찾아오십니다. 하지만 체험만 추구하는 것도 부족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세상으로 내려가셨듯이 우리도 빛으로 소금으로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온전한 신앙입니다.-河-

시몬 베드로 (4) : 주는 그리스도시요

요한의 아들 시몬 베드로가 차근차근 예수님을 경험하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갑니다. 솔직히 베드로는 천방지축처럼 행동하는데 그를 게바로 부르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 가십니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예수님의 능력을 두 번에 걸쳐서 경험했던 베드로입니다.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을 믿고 깊은 데로 가니 배가 잠길 만큼 고기를 잡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경험하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했습니다. 그 다음에, 칠흑같이 어둡고 폭풍이 치던 날 갈릴리 호수 한 가운데서 헤매고 있던 제자들과 베드로는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처럼 물위를 걷고 싶었던 베드로는 “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배에서 뛰어내려서 물 위를 걷습니다. 물위를 걷던 베드로가 예수님이 아닌 바람을 보는 순간 물에 빠집니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해서 구해달라고 외칩니다.

 

첫 번째 갈릴리에서의 만남을 철저하게 예수님께서 주도하셨다면, 두 번째 물 위를 걷는 사건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 위를 걷게 해달라고 먼저 요청했습니다. 그만큼 베드로가 자랐습니다. 바람을 보고 두려워 물에 빠지게 되자 예수님을 불렀고 예수님은 그를 구해주셨습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실패와 실수 가운데 예수님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시고 오천 명을 먹이시고 폭풍을 잔잔케하시는 등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시자 사람들은 예수님이 과연 누구신지 궁금해 합니다. 어떤 이들은 얼마 전에 죽었던 세례요한, 예레미야와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라고 말합니다. 그때 베드로가 나서서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예수님이 누구신지 베드로는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정답으로 대답했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대답이 없습니다. 어떻게 베드로가 여기까지 자랐을까요? 예수님과 더불어 있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능력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처음으로 예고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극악무도한 강도들이 벌을 받는 십자가에 죽으신다는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22절)라고 만류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지만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급한 성격에 또 한 번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은 셈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야단을 맞습니다. 베드로가 머쓱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십자가에 죽으신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이라는 예언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오르십니다. 그곳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십니다. 예수님 옆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있고, 예수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이 납니다.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세 명의 제자들에게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또 나서서 그곳에 있는 것이 좋겠다고 말합니다. 여전히 헛다리를 짚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뜻과 달리 다시 산 아래로 내려오십니다. 남은 사역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성급한 성격대로 말이나 행동에 실수 투성이였던 베드로이지만 차근차근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체험해갑니다. 예수님을 따라 나서면서 그의 삶이 변하고 있습니다. 게바로 자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빚어 가신 덕분입니다.-河-

시몬 베드로 (3) : 믿음이 작은 자여

동생 안드레를 통해서 예수님을 소개받은 베드로는 시몬에서 게바로 이름이 바뀔 것이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모른 채 여전히 어부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베드로를 다시 찾아오십니다. 그 날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이상한 날이었습니다. 실의에 빠져서 그물을 씻고 있던 베드로는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깊은 곳으로 배를 몰고 갔고 배가 물에 잠길 만큼 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깊은 곳 –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실패의 현장에 들어가길 원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마음 깊은 곳에 있던 실망과 실패를 고쳐주시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깊은 곳으로 배를 몰고 갈 때, 예수님도 베드로의 마음과 삶 깊은 곳으로 들어가셨을 것입니다. 게바로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체험한 베드로는 배와 그물을 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시몬이 아니라 게바의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명의 제자를 부르셔서 그들과 동고동락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을 고치시고,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시는 모든 현장에 제자들이 동행했습니다. 베드로는 열두 명의 제자 가운데 첫 번째 제자로 여겨졌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는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이 나옵니다. 엄청난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 싶어 했습니다. 배고픈 시대에 먹을거리를 해결해 주었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먼저 배를 태워서 호수 건너편으로 보내시고 자신은 산으로 가서 기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에만 충실하시려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새벽 네 시쯤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제자들은 유령이 나타난 줄 알고 기겁을 하며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안심시키십니다. 그때 성격이 급한 베드로가 나섭니다. 자신도 물 위를 걷고 싶다는 것입니다. 오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물 위로 뛰어내립니다. 대단한 용기요 믿음입니다. 놀랍게도 베드로가 물 위를 걷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물 위를 걷던 베드로에게 바람이 불어 닥칩니다. 베드로 안에서도 두려움의 바람이 불어옵니다. 그 순간 아래를 내려다봅니다. 베드로가 물에 빠져듭니다. 예수님께서 물에 빠진 베드로를 붙잡아 올리시면서 그를 향해서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을 보고 자신도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베드로의 믿음은 꽤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바람이 불자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믿음이 작아졌고 대신에 의심이 생겼습니다.

배와 고기를 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지만 베드로의 믿음은 아직 온전하지 않습니다.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을 보고 말씀에 의지해서 배에서 뛰어내렸지만 바람이 불어오자 의심과 두려움이 밀려오면서 물속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열두 명의 제자들 가운데 믿음으로 뛰어내려서 물 위를 걸은 사람은 베드로뿐입니다. 물속에 빠져들면서도 그는 예수님께 살려달라고 외쳤습니다. 폭풍우가 치는 밤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깊은 곳에서 다시금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로 자라갑니다. 예수님께서도 베드로를 주목하시고 그를 게바로 빚어 가십니다. 물 위를 걷는 베드로의 믿음을 배우기 원합니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의심이 아니라 끝까지 예수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한 주간 힘차게 살아갑시다 -河-

시몬 베드로 (2) :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베드로는 처음부터 예수님의 수제자가 될 성품이나 자격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성급하고 때로는 혈기가 앞섰고 세심하게 준비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었고, 무엇보다 초대교회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부족은 부족한 대로, 그의 장점은 장점대로 살려주시면서 복음을 전하는 증인으로 빚어 가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완벽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어찌 보면 교만입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하나같이 똑같은 모습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독재자들이 백성들을 조종하려는 일종의 계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완벽을 요구하시지 않고 각자 갖고 있는 은사와 재능대로 사용하십니다. 성격이 급하면 급한 대로 적합하게 쓰시고, 침착한 사람은 성품 그대로 주님의 일에 쓰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가 급한 성격으로 쓰임 받았다면, 요한은 침착한 성품으로 90넘게 살면서 요한 계시록까지 기록하는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의 성품대로 빚어 가시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누가복음 5장에 다시 등장합니다. 베드로가 동료 어부들과 함께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그날따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해변가에서 그물을 씻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많은 무리들이 모여 있었고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에 올라가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베드로도 그물을 씻으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말씀을 모두 전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잔뼈가 굵은 베드로에게 나사렛 목수 출신인 예수님께서 훈수를 두신 격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깊은 곳으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하신 것은 밤새도록 그물을 드리웠다가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실패의 현장으로 들어가서 다시 시작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깊은 곳으로 배를 몰고 가서 그물을 던집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물이 찢어지고 배가 가라앉을 만큼 고기가 많이 잡힌 것입니다. 베드로는 동료들의 도움으로 만선이 된 배를 뭍으로 끌고 옵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좋았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따랐더니 고기를 아주 많이 잡은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다음 베드로의 행동이 이상합니다. 그는 예수님 무릎 아래 엎드려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8절)라고 고백합니다. 좋아하고 감사해야 할 베드로인데 난데없이 자신은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장점이자 매력입니다.

베드로는 말씀을 듣고 그물을 내려서 고기가 많이 잡히는 순간 자신에게 말씀하신 분이 메시야 예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 자신이 작아집니다. 자신은 예수님 앞에서 낮고 낮은 죄인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람낚는 어부로 부르십니다. 베드로는 모든 것을 남겨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예수님의 수제자가될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근사한 모습이 베드로에게 그대로 나타납니다. 시몬이 아니라 게바의 모습입니다.-河-

시몬 베드로 (1) : 장차 게바라 하리라

앞으로 신약성경에서 사도바울과 더불어 매우 중요한 인물인 베드로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면, 사도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아서 예루살렘 이외의 소아시아와 로마 도시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3년을 함께 지냈고,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는 초대교회의 핵심 인물이 되었습니다. 사도로서 베드로의 권위를 따를 자가 없을 정도였기에 사도 바울도 예루살렘에 와서 그에게 선교보고를 했습니다.

하지만 복음서에 나타난 베드로는 완벽하거나 높은 지위를 가진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갈릴리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였습니다. 결혼을 해서 아내가 있었고 몸이 허약해서 병상에 있는 장모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동생 안드레와 어부 일을 했고 같은 마을의 요한과 야고보 형제와 동업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큰 부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난에 시달릴 정도로 힘겨운 삶을 살지도 않았던 보통사람입니다.

대부분의 뱃사람들이 그렇듯이 베드로 역시 다혈질에 가까운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30여년 고기를 잡으면서 생긴 팔의 단단한 근육만큼이나 그의 성품도 꽤나 단단해서 자신의 의견을 거침없이 얘기하고,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겠다고 말하고는 몇 시간도 채 안되어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부인하는 실수를 저지릅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마음 깊은 곳에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기에 결국에는 초대교회의 지도자로 우뚝 섰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죄송함과 감사의 마음을 갚기 위해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베드로의 원래 이름은“시몬”입니다. 시몬은 당시에 매우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처음 베드로를 만난 자리에서 장차 “게바”로 불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게바는 예수님 당시에 사용되던 아람어이고, 베드로는 헬라어로서 모두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는 예수님과 비슷한 연배의 갈릴리 어부였습니다. 그의 이름만큼이나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한 눈에 보아도 그에게 반석과 같은 믿음이나 견고함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동생 안드레 때문에 예수님께 나왔건만 예수님께서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온 베드로의 모습에서 세심함이나 침착함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반석(rock)이라기보다는 갈릴리 지방에 흔한 자갈(stones)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가 장차 게바(반석)이라고 불릴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베드로는 그 뜻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을 것입니다. 단순히 자신의 별명을 지어주셨다고 생각했을 뿐 베드로라는 새로운 이름이 무슨 의미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베드로 속에서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선뜻 따라나섭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열심이고 헌신입니다.

베드로는 그의 이름대로 교회를 세우는 반석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처음 보셨을 때 그가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알고 계셨기에 반석이라는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새로운 인물,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천국의 열쇠를 갖고 이 땅에 교회를 세우는 귀한 사역을 감당할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구원자되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베드로에게 임한 축복입니다. 평범한 갈릴리 어부 시몬이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 게바가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河-

성령의 임재와 역사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함께 모여 기도하면서 성령이 오시길 기다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각자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전혀 새로운 사람들이 되어 있어서 예수님 말씀대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성령이 임하길 기다렸습니다.

생각같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성령이 임할지는 알려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단지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을 뿐이니 그 약속을 붙잡고 마냥 성령을 기다린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제자들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렇게 열흘이 지났고 그 때는 유대인들의 3대 명절중의 하나인 오순절이었습니다. 오순절에는 많은 유대인들과 하나님을 믿는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을 찾았습니다. 예루살렘에는 각기 다른 나라 말을 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제자들은 여전히 성령을 기다리며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임했습니다. 처음 성령이 임했던 놀랍고 신비로운 사건을 사도행전 2장 1절 이하에서는 다음과 같이 알려줍니다.:“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서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여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1-4)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성령이 권능으로 임했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제자들은 예루살렘 시내로 나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히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복음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알아들을 수 있게 각 사람의 언어로 복음을 전합니다. 창세기의 바벨탑 사건 이후에 민족마다 각기 다른 언어를 쓰게 되었는데, 오순절 성령 강림에서 각기 다른 언어가 복음 안에서 통일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제자들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셨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생명의 복음입니다. 그동안 자기 마음대로 살았고 하나님을 무시했던 죄를 모두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심지어 유대인들을 향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한 것을 회개하라고 강력하게 경고했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삼천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베드로가 전한 말씀의 핵심은 회개하고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베드로의 권면을 받은 사람들은 성령을 체험했습니다. 가정에서부터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처음 그리스도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떡을 떼며 교제하면서 기도에 힘썼습니다.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이들은 날마다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했고 주님께서 구원받는 자들의 숫자를 날마다 더해 주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성령강림 주간에 부흥회를 갖습니다. 부흥회를 통해서 온 교회가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기를 사모하고 기도로 준비합시다. 성령을 기다리면서 한 마음으로 기도했던 제자들의 모습이 우리 안에도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河-

그리스도인의 능력 (6) : 예수님의 생명

우리는 지난 5주 동안 <그리스도인의 능력>이란 주제로 연속해서 말씀을 나눴습니다. 기독교가 세상 속에서 신용을 잃어가는 요즘 시대에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의 능력을 인식하고 그 능력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하루아침에 슈퍼맨이 되어서 온 세상을 정복하거나 아무도 따를 수 없는 초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셨지만 어쩌면 무력하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아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무너지셨습니다. 부활을 예측하기 힘들 정도로 무력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십자가위에서 죽으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폭풍을 잠잠하게 하실 정도의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어려움이 닥칩니다. 그동안 배운 대로 사방에서 우겨쌈을 당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답답한 일이 닥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로 박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인생길을 가다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경험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사방에서 우겨쌈을 당해도 그대로 싸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답답하고 황당한 일을 겪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핍박을 받아서 목숨을 잃을지언정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지 않으시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꼭 붙잡고 계심을 믿기에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섭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임한 능력은 죽음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이기고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것임을 배웁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어려움을 당하지만 결국에는 그 속에서 소망을 발견하고, 주님의 임재와 도우심 그리고 구원해 주심을 경험합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두 가지 측면이 공존합니다. 세상의 어려움과 신앙의 여정 속에서 체험하는 어려움 즉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죽으심이 부활로 이어졌듯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의 생명이 있습니다.

질그릇에 보화가 담김으로 심히 큰 능력이 우리 안에 들어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입니다. 사망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힘입었기에 십자가의 고통을 이길 수 있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도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툭-치면 깨지는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 들어오셔서 심히 큰 능력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심히 큰 능력으로 힘차게 그리고 멋지게 살아갑시다. 할렐루야! -河-

시편의 기도 : 말씀

시편을 통해서 기도에 대한 교훈을 배우고 나누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시편의 네 가지 유형을 따라서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는 감사시였습니다. 시편의 감사시는 하나님께서 시편기자 개인과 이스라엘 민족에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구원의 은혜,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에 대한 주님의 손길에 감사했습니다.

둘째는 탄식시였습니다. 역시 개인의 탄식과 민족의 탄식 즉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자신을 토해내는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금방 임하지 않을 때 탄식이 나왔습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막막하니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 더욱 잘되고 하나님을 믿는 자신의 삶이 힘겨울 때 하나님 앞에서 탄식했습니다. 하지만 시편에 나오는 탄식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하는 고백으로 끝이 납니다. 아직 상황이 좋아지지 않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솔직히 기도하면서 평안을 느꼈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셋째는 지난 시간에 배운 찬양시였습니다. 탄식이 우리들 안에서 생기는 기도라면 찬양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 세계와 하나님의 커다란 섭리를 발견하고 밖에서부터 주님께 드리는 경배입니다. 기도 속에 찬양이 있어야 하고, 또한 찬양 자체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기도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 때 찬양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찬양을 듣는 것도 은혜가 됩니다. 무엇보다 우리들 안에 있는 감사와 기쁨을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으로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찬양은 염려와 불안 그리고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높이 올려드립니다.

이제 오늘 마지막으로 살펴볼 시편의 기도는 말씀을 통한 기도입니다. 시편에는 지혜시라는 유형이 있습니다. 시편 1편, 37편, 119편이 대표적입니다. 시편의 지혜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실제적인 교훈입니다. 시편이 말하는 지혜 한 가운데 말씀이 있습니다. 주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 주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지혜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시편 119편은 성경에서 가장 긴 장(障)입니다. 히브리어 알파벳순으로 말씀이 기록되었고, 176절에 이르는 각 절마다 주님의 말씀을 뜻하는 표현이 들어 있습니다. 주의 말씀이 하나님 백성의 생명줄이요, 등불이요, 능력이라는 고백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할 때 말씀을 붙잡고 기도합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 속에서 주의 뜻을 분별해 내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기도에 있어서 하나님 말씀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기 위해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 말씀이 거하면 그 말씀을 통해서 주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참빛 식구들의 기도에 하나님 말씀에서 시작되고, 말씀 가운데 응답되는 놀라운 은혜가 임하길 간절히 바랍니다. 말씀으로 우리의 기도가 풍성해 지고 깊어지길 원합니다. 올 한해 남은 날들도 무릎 꿇고 기도 살아갑시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