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의 기도 : 찬양

시편의 기도 세 번째는 ‘찬양’입니다. 탄식과 감사와 함께 찬양은 시편의 커다란 주제입니다. 150편에 이르는 시편을 두고 요약해서 찬양과 기도라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시편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 모여서 다함께 찬양하고 기도하던 고백이자 선포였습니다.

시편의 마지막 다섯 장은 “할렐루야(주님을 찬양하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 되심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주셨고 인도해주심을 찬양합니다. 땅에서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찬양합니다. 시편의 찬양은 목소리뿐만 아니라 다양한 악기를 사용합니다. 이처럼 시편 속에서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송축합니다.

시편을 읽다보면 앞에 표제어(타이틀)들을 만납니다. 다윗의 시라는 표제어는 시편의 주제가 어떤 인물인지 알려주는 표시입니다. 시편의 성격을 가리켜주는 표제어도 있습니다. 이때 많이 등장하는 표제어가 “노래(예: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입니다. 여기서 노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미즈모르’인데 여기서 시편(psalms)이 나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시편은 노래 즉 찬송이라는 뜻입니다.

특히 히브리어에서 찬양과 기도는 한끝차이입니다. 찬양을 다른 말로 “테힐라”라고 하고 기도를 “테필라”라고 합니다. 두 단어 모두 열린 소리입니다. 찬양도 입을 열어서 주님께 드리는 것이고, 기도도 마음을 열고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편의 찬양을 갖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시편 말씀에 곡을 붙여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온 세상을 지으시고,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찬양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04편도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송축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송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니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영혼’은 우리들의 목숨 또는 우리의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모든 것을 드려서 하나님을 송축하라고 시편기자가 우리를 초청합니다. 말 그대로 온 몸을 다해서 드리는 찬양과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송축하는 이유도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심을 조목조목 소개합니다. 하늘과 땅을 만드셨고, 바닷물을 주관해서 땅에 이르지 못하도록 경계를 만드시고, 세상 만물을 입히시고 먹이셨습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세상만물의 주인이십니다. 세상 만물을 입히시는 아버지요 공급자가 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쁨으로 세상을 주관하시고 자연만물을 다스리십니다. 시편 기자는 이것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며 찬양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처럼 크고 위대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시편기자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을 주목하셨음을 고백합니다. 주님의 백성들이 드리는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대적하는 악인들을 소멸하시고 선을 이루어주신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언제나 자신들과 함께 하시니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저절로 찬송이 나옵니다.

온 세상을 향한 시편기자의 고백이 우리의 것이 되기 원합니다:”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33절).아멘! -河-

시편의 기도 : 탄식

지난주에는 시편을 통해서 배우는 감사기도를 살펴보았습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일을 두고 감사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심을 감사했고, 근심 중에 기도했을 때 응답해 주시고 바른 자리로 인도해 주심을 감사했습니다. 매일같이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적으로 알고 만족케 하심에 감사했습니다. 시편기자의 감사는 개인의 감사를 넘어서 모든 성도들이 함께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시편의 유형 가운데 두 번째가 탄식(lament)입니다. 시편의 탄식 역시 개인이 겪는 어려움을 놓고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하는 개인의 탄식과 나라와 민족이 겪는 어려움을 하나님께 드리는 공동체의 탄식이 있습니다. 시편의 탄식은 “언제까지 니이까?(how long)”라는 기도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언제까지 근심과 고통가운데 두실 것인지 답답함을 토로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하나님을 찾았지만 하나님의 응답이 지연되고 있음에 주님의 도우심을 간청하는 호소입니다. 또한 “주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기도로 시작되기도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문제를 풀어나갈 수 없습니다. 자신 있게 인생길을 걸어갔지만 넘지 못할 벽을 만났습니다. 그때 시편기자는 주님 앞에 나와서 탄식하면서 “주님, 보시옵소서. 나를/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처럼 시편의 탄식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닥친 문제를 주님께 갖고 나와서 탄식하면서 기도합니다. 여러 해 동안 기도했지만 여전히 오리무중인 기도 제목일 수도 있습니다. 침묵하시는 하나님께 항의하듯이 드리는 탄식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계시다면 분명히 선과 악, 옳고 그름이 판가름나야하는데 악한 사람들이 판을 치고 선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현실에 시편기자는 하나님께 나와서 탄식합니다. 주님의 긍휼과 구원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편의 탄식은 분풀이가 아닙니다. 탄식에 머무르지도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상한 마음을 전부 토해낸 후에는 지난 시간에 배운 한나처럼 잠잠히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립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셨음을 확신할 때까지입니다. 그때 비로소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낍니다. 감사가 나옵니다. 하늘의 평안과 주님의 구원하심을 확신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눈물의 기도를 기뻐 받으십니다. 탄식하며 드리는 솔직한 기도를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을 낱낱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셨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길게/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주시는 응답과 평강이 있습니다. 눈물이 기쁨으로 변합니다. 눈물을 닦아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탄식의 끝에 있습니다. 다음 한 주간 솔직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고 결국에는 확신으로 나가시길 바랍니다. 위로의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만져주시고, 하늘의 힘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河-

시편의 기도 : 감사

저는 매년 기도에 대한 말씀을 준비해서 전합니다. 교회는 물론 우리의 인생도 기도로 세워짐을 믿고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말하듯이 그리스도인이 기도하지 않으면 신앙을 올바로 유지하기 힘이 듭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만약에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잘 살고 있다면 그것은 누군가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탄식하면서 기도하셨기에 우리가 숨을 쉴 수 있고 하나님의 자녀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두고 하나님과의 사귐이라고 부릅니다. 기도는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우리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아바(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마음의 소원을 하나님께 말씀드립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을 느낍니다.

기도의 방법과 유형은 다양합니다. 소리 내서 기도할 수 있고 묵상으로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고 글로 써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골방에서 하나님과 단둘이 교제하며 기도할 수 있고, 속회나 소그룹에서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고, 온 교회가 통성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입술로 기도할 수 있지만 우리의 삶이 기도가 될 수도 있습니다. 회중기도 하듯이 격식을 차려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삶 속에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대화하듯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이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만나는데 방법에 제한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앞으로 4주 동안 구약의 시편 말씀을 중심으로 기도에 대해서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시편은 구약 성경의 처음 다섯 두루마리인 모세오경을 본떠서 다섯 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함께 불렀던 찬양이자 기도가 시편입니다. 시편 안에는 다윗으로 대표되는 개인의 삶과 신앙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부르짖는 기도이자 찬양입니다.

특별히 구약의 시편에는 몇 가지 특별한 유형들이 들어있습니다. 첫째는 오늘 살펴볼 감사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하는 시편들입니다. 둘째는 탄식입니다. 개인이나 민족의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께 나와 탄식하면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셋째는 찬양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송축하며 찬양하는 시편입니다. 넷째로 시편에는 하나님 백성이 갖춰야 할 지혜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시편의 네 가지 유형을 중심으로 기도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시편이야말로 하나님 백성들에게 살아있는 신앙의 교과서이자 기도문들입니다. 이번 기회에 시편이 주는 기도의 가르침을 충실히 익혀서 참빛 교회 식구들의 기도가 깊어지고 높아지기 원합니다. 우리 교회와 모든 성도님들께 기도의 불꽃이 타오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河-

그리스도인의 능력 (5) :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의 시작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기독교는 세상에 없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이 오순절에 성령을 체험하면서 목숨걸고 복음을 전하는 담대한 그리스도의 사도들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교회력에 따라 부활절을 지나서 오순절 성령강림을 향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도하면서 성령을 기다리고 부탁하셨고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우리들도 성령강림절을 향해 나가면서 예배로 모이면 한 마음으로, 세상으로 흩어지면 각자의 자리에서 성령충만을 사모하길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무력하게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제자들은 심히 낙심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쫓아다녔는데 극악무도한 죄수들이나 달리는 십자가에 죽으셨으니 허탈함에 쌓이는 것도 당연합니다. 모든 것이 끝이 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진 고문과 조롱을 받으시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렸으니 더 이상 희망은 사라졌습니다. 이처럼 낙심과 절망가운데 쌓여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평안으로 인사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절망가운데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어두움에 빛이 비췄습니다. 절망에 소망이 생겼습니다. 질그릇에 보화가 들어오니 심히 큰 능력이 제자들에게 임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본 말씀대로 십자가의 예수님은 거꾸러뜨림을 당하셨습니다. 채찍에 맞아서 넘어지셨습니다. 해골이라고 불리는 골고다 언덕에서 아무런 저항도 없이 숨을 거두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은 부활로 이어지는 길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완전히 죽지 않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속에 오늘 본문의 뜻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에서 거꾸러뜨림은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던져버린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것입니다. 처량합니다. 화가 납니다. 힘이 없으니 뭐라고 한 마디 대꾸도 못합니다. 그렇지만 질그릇을 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망하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납니다. 힘이 들수록 심히 큰 능력이 발동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능력입니다.

늘 말씀드리듯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에게도 인생의 폭풍우가 밀려옵니다. 심한 경우 오늘 본문처럼 거꾸러뜨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가 끝이 아닙니다. 그 아무도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심히 큰 능력은 어떤 어려움도 뚫고 나가는 힘입니다. 할렐루야! -河-

부활의 주님

올해도 어김없이 부활절을 맞았습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1년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고 사순절 끝에 부활절을 맞은 것입니다. 이처럼 매년 부활절을 맞으면서 새로운 생명과 힘을 얻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부활절은 실제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예배하는 날입니다. 기독교회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 즉 일요일을 주일(the Lord day)이라고 부르면서 매주 모여서 예배합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하고 사망권세를 이기신 생명의 주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무덤을 찾아갔던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스승을 잃고 실의에 빠진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평안(be peace with you)”으로 인사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없었던 의심 많은 도마가 선생님의 손에 있는 못자국와 옆구리의 창자국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친히 그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때 도마는 예수님을 향해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와 갈릴리 어부 출신의 제자들에게는 여전히 다시 시작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고향 갈릴리로 내려가서 고기 잡는 어부의 일을 합니다. 그렇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지냈습니다.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을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으로 제자들 마음에 깊이 자리 잡았습니다. 이처럼 복음을 맛보고 다시 어부가 되려니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들을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물으시고 베드로에게 양을 먹일(교회를 세울) 권세를 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부활의 소식을 들었지만 설마하면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 곁에서 동행하십니다. 그들의 궁금증을 성경을 인용해서 풀어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신비로운 형상을 했기에 두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숨기시고 친절하게 메시야에 대해서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마을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십니다. 그때 비로소 제자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해주실 때에 마음이 뜨거워졌던 것도 기억이 났습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들에게 하늘의 평화를 전하셨고, 다시금 제자의 길을 가도록 새 힘을 주셨습니다. 친절하게 말씀을 풀어주시면서 마음에 뜨거움을 경험케 하셨습니다. 부활절을 맞아서 우리 각자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이하기 원합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은혜와 생명의 능력이 부활절 예배에 오신 모든 성도님들 마음과 삶에 충만히 임하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살아나셨습니다(He is risen)! -河-

그리스도인의 능력 (4) : 박해를 받아도

히브리서 11장을’믿음장’이라고 부릅니다. 믿음장이라는 별칭에 맞게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는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정의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믿음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불확실해 보이는 것을 실현된 것과 보이는 것으로 인정하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믿음은 미래를 향합니다.

특별히 성경에서의 믿음은 하나님을 향합니다. 이어지는 히브리서 11장 6절에서 믿음이 무엇인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려줍니다.:”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보십시오. 믿음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헛되지 않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구약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믿음의 인물들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렸던 아담의 아들 아벨로 시작해서 아브라함과 모세 그리고 삼손과 다윗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주목하고 쓰신 인물들이 믿음의 사람이었음을 입증해 보입니다. 믿음의 인물들이 살았던 삶도 다양합니다. 믿음으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고 믿음 가운데 이루었습니다. 다니엘과 같은 사람은 믿음으로 사자들의 입을 막았습니다. 믿음으로 불과 칼을 피하기도 했습니다. 믿음으로 전쟁에 나가서 적군을 물리치고 승리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믿음의 행적들 가운데 주목할 것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겪는 박해입니다. 조롱을 받고 채찍에 맞고 결박되어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돌에 맞고 톱으로 켜서 목숨을 잃은 경우도 소개합니다. 박해를 피해서 양이나 염소의 가죽을 쓰고 광야를 유리하면서 믿음을 지킨 경우도 있었습니다. 가난과 어려움과 학대를 받는 것은 예사였고,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 순교자의 피에 교회를 세우셨고,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영혼들을 마지막 때에 위로하시고 이들의 아픔을 그대로 갚아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박해(persecution)는 그리스도인 그리고 교회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일입니다. 초대교회는 물론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오던 구한말에도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면서 하나님을 믿다가 감옥에 갇혔고 목숨을 잃은 신앙의 선배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도 휴전선 너머 북녘 땅에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거나 외딴 수용소에 갇혀서 힘겨운 삶을 사는 신앙의 동지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박해를 받을수록 복음은 온 세상으로 퍼져나갔고, 박해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영혼은 더욱더 맑아지고 주님만을 향하는 믿음으로 충만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악한 세력의 박해가 그리스도인들 안에 깃든 보화, 예수 그리스도를 몰아낼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온실 속에서 자란 신앙이나 편하게 예수님을 믿을 때가 신앙의 위기였지, 박해를 받을 때는 신앙이 살아서 역사하는 은혜의 기간이었습니다.

우리들도 편하게 예수님을 믿는 것 같지만 하나님을 멀리하게 만드는 유혹과 고난을 순간순간 경험합니다. 그때 우리가 기억할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박해를 받아도 버림바 되지 아니하며.” 믿음을 빼앗아가려는 그 어떤 세력도 우리를 이기지 못합니다. 박해를 받는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박해는 주님의 능력을 실제로 경험할 기회입니다.-河-

그리스도인의 능력 (3) :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질그릇과 같은 우리들 안에 보배가 담김으로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납니다. 무엇보다 가치상승입니다. 질그릇에 보배가 담기면서 보배를 품은 그릇이 되었습니다. 질그릇과 같은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깨지고 쉽게 사라질 질그릇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보장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가치가 급상승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힘으로 하나님께 나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죄인이요, 불의한 종으로 의로우신 하나님께 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심으로 의롭게 되었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권속(family)이 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보배를 품은 질그릇에 임하는 하나님의 능력 네 가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가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사방에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는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살 길을 열어주시고, 종종 하나님께서 직접 구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몇 가지 번역을 통해서 싸이지 않는다는 말씀 속에는 1) 부서지지 않는다, 2) 찌부러들지 않는다,3) 움츠러들지 않는다, 그리고 4) 꺾이지 않는다는 의미가 두루 들어있다고 했습니다. 보배를 품은 그리스도인의 능력입니다.

오늘은 두 번째 능력을 살펴봅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는 능력입니다. 답답한 일은 어떤 일이 갑자기 닥쳐서 당황스러운 경우입니다. 세상만사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습니다. 예측불허의 돌발 상황이 종종 일어납니다. 그때는 마음이 내려앉고 심히 당황됩니다. 밀 그대로 낙심(落心)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은 사람들은 어떤 일이 갑작스레 닥쳐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당황하지 않고 차근차근 일을 풀어나갑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혜와 용기를 주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매우 황당한 일을 겪으셨습니다. 3년 동안 동거동락하던 제자인 가룟유다가 자신을 팔아먹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죽음으로 모든 사람들의 죄를 사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팔아서 십자가에 달게 할 사람이 자신이 사랑하던 제자라는 사실 앞에서 예수님도 적지 않게 당황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에게 마지막까지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동요하지 않으시고 차분하게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세상에 영원한 생명이 임하고, 무엇보다 죽음 너머에 부활의 영광이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에게도 답답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때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당황스러운 일 한복판에서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원합니다. -河-

그리스도인의 능력 (2) : 우겨쌈을 당하여도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7) – 지난주에 함께 나눈 말씀입니다. 저는 한 주간 살면서 이 말씀을 마음에 두려고 애썼습니다. 설교시간에 제안한대로 말씀을 외웠습니다.“보배”“질그릇”“심히 큰 능력”“하나님께 있고”“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과 같은 주요 표현들을 곱씹으면서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질그릇과 같은 우리들이지만 보배가 담김으로 가치가 급상승했습니다. 보배가 담기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주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까지는 될 수 없어도, 하나님께서 우리들 능력의 근원이 되심에 감사했습니다.

지난 주 초반에는 날씨가 참 좋았습니다. 집안에 있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하늘은 맑고 공기는 신선하고 여기저기 봄꽃이 만발했습니다. 화창한 날씨를 보면서 그 속에도 하나님의 손길이 임했음을 느꼈습니다. 주 중반부터는 구름이 끼고 수요일에는 장대비가 내렸습니다. 작년 말에는 비가 오지 않아서 그렇게 애를 태웠는데 하나님께서는 느지막이 단비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새벽기도회를 마친 직후 폭포수와 같은 빗소리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성도님들과 교회위에 폭포수처럼 임하길 기도했습니다. 그러니 비가 오는 것도 감사할 뿐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품은 사람(예품사)으로 살다보니 모든 것이 좋아 보이고 저절로 감사가 넘칩니다.

보배를 담고 있는 질그릇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합니다. 심히 큰 능력입니다. 그 능력이 임했을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 고후4:8-9절이 알려줍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첫 번째 능력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는 능력입니다. 사방에서 우겨쌈을 당하는 진퇴양난의 순간을 종종 경험합니다.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지 어떤 세력인지 알지 못하지만 포위망을 좁혀오는 것을 직감합니다. 불안합니다. 두렵습니다. 당황이 되니 판단력이 상실하고 나중에는 허둥지둥 거리게 마련입니다. 우겨쌈을 당하는 것을 알지만 달리 피할 길이 없고 힘이 없기에 발만 동동 구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보배를 품은 질그릇은 사방에서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 않는다고 알려줍니다. 벗어날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해서 옥죄어오는 것들을 물리치거나, 위기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방에서 우리를 향해 공격해 와서 독안에 든 쥐처럼 포로가 될 것 같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우겨쌈을 당하지 않습니다. 질그릇처럼 연약한 우리 안에 보화가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해주신 복음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겨쌈을 당하는 순간에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꼭 붙잡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분명히 보호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할렐루야! -河-

그리스도인의 능력 (1) : 질그릇 속에 담긴 보화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능력(power)’을 제시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이고,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함께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특징도 능력입니다:“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우리 자체는 말 그대로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능력이시기에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그리스도인의 능력’이라는 주제로 주일 말씀을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 과연 그리스도인들에게 임하는 능력이 어떤 것인지, 언제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할 수 있는지,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모습인지 고린도후서 4장 7-10절 말씀을 갖고 살펴보게 됩니다. 이번 연속 설교를 통해서 참빛 교회 식구들께서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그리스도인의 능력에 대해서 올바로 이해하고, 그 능력을 마음에 품고 말 그대로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비결을 배우시길 원합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능력 있고 멋진 그리스도인들로 세워지길 기도하면서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고린도후서는 사도바울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여러 사람들이 섞여 살아서 교회 안에 파당과 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고린도 교회를 세운 사도 바울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속이 상한 바울은 고린도에 편지를 써서 바른 신앙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사도로 살아가는 자신에게 임한 그리스도의 능력을 간증하듯이 소개합니다. 이번에 우리가 살펴 볼 고린도후서 4장 본문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바울은 자신은 물론 모든 사람들이 질그릇과 같다고 전제합니다. 질그릇은 지금이나 예전이나 가장 흔하고 값싼 물건입니다. 자칫 잘못 건드리면 쉽게 깨지는 매우 연약한 그릇입니다. 그렇기에 질그릇에는 귀한 물건을 담지 않고 하찮은 것들을 담아 둡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속에서는 질그릇에 보화가 담겼다고 가르쳐줍니다. 질그릇과 보화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입니다. 보화는 금과 은과 같은 값진 그릇에 담겨야 제격인데 질그릇에 담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릇의 진가는 그 안에 담긴 물건으로 결정됩니다. 아무리 질그릇이라도 보화를 담고 있으면 귀한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속의 보화는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심으로 보화를 품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것 자체가 능력입니다. 질그릇에 보화를 담고 있는 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신앙은 우리 안에 보화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셨음을 믿고 그 보화를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심히 큰 능력을 주셨음을 믿고 그 능력을 누리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할렐루야! -河-

예수님의 손길 (5) : 못박힌 손

예수님의 손에 대한 연속설교 마지막 시간입니다. 첫째 시간에는 예수님의 손길이 닿으면 병이 고쳐지고, 눈이 뜨이고, 귀와 입이 열리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친히 손으로 만져주심으로 고쳐주셨습니다. 둘째 시간에는 예수님께서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도 깨끗함을 받아야 함을 또한 서로의 손길로 섬겨야 함을 배웠습니다. 셋째 시간에는 색다른 예수님의 손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장판이 된 성전을 둘러엎으시는 분노의 손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분노는 성전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회복의 손길이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어린아이가 드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축사하시는 예수님의 손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들도 주님의 손에 인생길을 맡기고 주님의 손에 얹어 있는 삶을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예수님의 손을 생각할 때 잊을 수 없는 장면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발과 양 손에 못이 박히시고 옆구리에 창이 찔리시면서 33년간의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이것을 두고 이사야 선지자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사53:5)고 했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 때문에 예수님의 손에 못이 박힌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신 손이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의 죄도 깨끗이 사함 받고 보혈의 공로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못 박힌 손은 우리를 살려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손입니다.

엊그제 수요일부터 2014년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력에서는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부터 고난주간 전까지 주일을 뺀 40일간의 기간을 사순절이라고 합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에는 기도와 금식을 행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을 교회의 전통으로 삼았습니다. 기도와 금식이 하나님 사랑의 실천이라면 선행과 섬김은 이웃사랑의 실천입니다. 사순절을 맞아서 손수 실천할 수 있는 경건의 훈련을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1) 사순절 전통 가운데 가장 큰 것이 금식입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일정 기간을 정해놓고 금식해 보십시오. 하루에 한 끼, 또는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금식을 실천하시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시길 바랍니다.

2) 기도와 말씀 훈련입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복음서를 통독하는 것도 좋습니다.

3) 영적 절제의 실천입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육체의 즐거움이나 쾌락을 위한 일들을 삼가는 것입니다. 좋은 말만 하기로 결심하는 것도 훌륭한 신앙훈련입니다. 경건한 몸과 마음으로 사순절을 보내면 우리의 영이 맑아질 것입니다.

4) 이웃사랑의 실천입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아무도 모르게 한 가지 이상씩 선행을 실천해 보십시오. 마음속에서 기쁨이 샘솟고 삶에 활력소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위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손에 못이 박히면서 우리의 허물과 죄가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못 박힌 손이 우리의 몸과 마음 그리고 영을 만져주시길 바랍니다. 사순절을 맞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못 박힌 손을 깊이 묵상하고 신앙은 물론 삶이 주님께 드려지기 원합니다. 40일은 대략 일 년의 10분의 1에 해당합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삶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려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은혜를 듬뿍 내려주실 것입니다. -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