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손길 (4) :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성경에서 손은 힘과 능력의 상징입니다. 구약성경에도 하나님의 오른손은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원천입니다. 오른손으로 구원해 주신다고 시편기자가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른손으로 붙들어 주시면 안전합니다. 주님의 오른손이 높이 올라가면 그것은 승리의 표시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오른손으로 하늘을 펼치고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고백합니다(사48:13).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 그림을 그리듯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펼치시고 그곳에 달과 별을 그려 놓으셨다고 표현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손은 하늘의 능력이 세상에 임하는 통로입니다.

예수님의 손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인간들과 똑같이 말을 하셨고, 손으로 만지셨고, 발로 걸어서 여행하셨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목수는 손재주가 좋아야 할 수 있는 직업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손길은 실제로 어렸을 때부터 예민하게 발달되었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도 예수님의 손길이 닿으면 무엇인가 만들어졌고 고쳐졌을 것을 상상하니 더욱 흥미롭습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능력의 손길로 병자들을 고치셨고 어린아이들을 안아주셨고, 부활하신 후에는 손수 음식을 만들어서 갈릴리 호숫가의 제자들을 먹이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손길이 닿는 곳에 치유와 회복 그리고 깨끗해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의 손길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들에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로마의 지배와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그릇된 통치에 지친 백성들은 예수님께 나와서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생명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선포할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불쌍하게 여겨주셨고,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시면서 사랑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날이 저물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해산시키자고 제안합니다. 각자 먹거리를 해결하도록 집으로 돌려보내자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가진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십니다. 제자들에게는 어린아이가 가져온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백성들을 풀밭에 앉게 하십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축복 기도를 하십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예수님의 손에 들려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제자들에게 주었을 것이고, 제자들은 그것을 예수님께 건네 드렸을 것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즉 오병이어(오병이어)를 손에 든 예수님은 축사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다시 건네주십니다. 그리고 무리들에게 나눠주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위엄과 능력에 눌려서 예수님께 받은 오병이어를 말씀대로 무리들에게 나눠주었을 것입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나눠줄수록 떡과 생선이 자꾸 생깁니다. 나중에 세어보니 남자만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어린아이가 가져온 오병이어가 예수님의 손에 들리니 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손길은 작은 것을 갖고도 모든 사람을 만족케 하는 능력입니다. 어린아이가 내어놓음으로 기적이 가능했습니다. 제자들이 중간에서 말씀대로 순종함으로 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손길은 모든 사람을 만족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작은 삶도 주님께 드리고 주님의 손길을 통해서 임하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하기 원합니다.-河-

예수님의 손길 (3) : 둘러 엎으시며

예수님의 손길이라고 생각하면 늘 따스하고 좋은 것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손길은 위로와 능력의 손길입니다. 3년 동안 세상에 계시면서 예수님은 힘들고 지친 자들의 손을 잡아 주셨고, 병든 자들을 만져주셨습니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손길은 분노의 손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온 세상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위함입니다. 예루살렘에 계시는 동안 성전에 들어가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 성전이 말할 수 없이 타락해 있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성전이“강도의 소굴”이 되었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사람들이 성전에서 장사를 합니다. 성전세를 바칠 사람들과 헌금을 바칠 사람들에게 돈을 바꿔주는 환전상들도 있었습니다. 제사드릴 제물을 파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성전이 장사꾼들 즉 이권이 판을 치는 곳으로 변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신 예수님께서 책상과 의자를 둘러엎으십니다. 예수님의 손길이 분노로 임한 것입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셨습니다. 그리고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성전의 본질을 회복하셨습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손길은 그릇된 것에 대해서 분노하시고 바로 잡으시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전이 잘못된 길로 빠졌다면 이것은 큰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에 임재하시고 성전을 통해서 일하기 원하실텐데 하나님의 사역지에 세상 물결이 들어온 셈입니다. 이것을 보신 예수님께서 책상과 의자를 둘러엎으시면서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님 뿐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를 함께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십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실 정도로 사랑하십니다. 우리들이 어떤 잘못을 하고 죄를 지어도 끝없이 용서하십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구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세상에 오셨다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랑과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갖고 계십니다. 공의는 바른 것을 추구하고 옳지 않은 것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고 우상을 숭배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심판으로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에서 공평하게 행하지 않거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착취하고 괴롭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어그러지고 망가진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세상 마지막에 하나님의 공의가 완전히 임해서 부정하고 악한 세력을 최종적으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을 쫓아내시고 의자와 상을 들러 엎으신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행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합니다. 성전 안에 하나님 보시기에 그릇행하는 것들이 있다면 얼른 바로잡고 고쳐야 합니다. 무엇보다 세상의 물결이 성전에 흘러들어오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우리의 몸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합니다(고전3:16). 성전을 더럽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안에 하나님 보시기에 그릇된 것들이 있다면 철저하게 회개하고 바로 잡아야 합니다. 둘러엎으시는 예수님의 손길이 임하기 전에 우리들이 해야 할 일들입니다. 우리 참빛 교회가 하나님 보시게 바른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책망 받는 것이 아니라 칭찬받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河-

예수님의 손길 (2) :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작년 말에는 디즈니사의 “겨울왕국(Frozen)”이라는 영화가 인기를 얻었습니다. 영화 속의 한 등장인물에게는 신기한 마법이 있어서 모든 것을 얼음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훗날 그녀가 여왕이 되면서 모든 나라가 겨울왕국으로 변했습니다. 공주의 동생이 언니도 살리고 잃어버린 여름을 되찾기 위해서 모험을 떠나는 것이 영화의 주제입니다.

마이더스라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주인공도 있습니다. 마이더스라는 사람은 재물에 대한 욕심이 무척 많았습니다. 디오니소스라는 신이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자 그는 만지는 것마다 황금으로 변활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만지는 것마다 황금으로 변하면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든지 만지는 순간 황금으로 변하고 마니까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음식을 먹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손길이 닿으면 과일이며 빵이며 전부 황금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 초래한 비극이지요.

이에 비하면 우리가 지난주부터 살펴보는 예수님의 손길은 겨울왕국이나 마이더스의 손과 정반대입니다. 우선, 예수님의 손길이 닿는 곳에는 얼음으로 변하거나 황금으로 변하는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손길은 따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만지시면 생명의 기운이 회복되었습니다. 나병이 깨끗이 사라졌고,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던 소경이 눈을 뜨고, 듣지 못하고 말을 못하던 사람의 귀와 입이 열렸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손길은 치유와 회복의 손길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신의 욕심이나 명예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셨습니다. 죄인들을 위해서 오셨고, 약한 자들에게 건강을 회복시켜 주셨고, 심지어 죽은 자도 살리셨지만 예수님 자신에게 이익이 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철저한 내어주심, 희생의 삶을 사셨습니다. 급기야 십자가위에서 자신의 생명을 주심으로 우리들과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악한 세력을 이기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손길은 희생과 사랑 그리고 승리의 손길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날마다 우리를 만져주시길 사모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난 예수님의 손길 역시 매우 이례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하루 전날의 상황입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하던 자리에서 갑자기 웃옷을 벗으시고 대야에 물을 떠가지고 오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십니다. 스승이자 주님(Lord)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지난 3년 동안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의 발을 정성껏 씻겨 주시는 예수님의 손길이 감동적입니다.

땅을 밟고 다니고 어쩌면 가장 더러운 발을 씻겨주신 예수님의 손길을 생각하니 은혜가 밀려옵니다. 예수님 앞에 우리의 더러운 발을 내어드리고 싶어집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의 손길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우리들도 날마다 깨끗해져야 할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발까지 깨끗하게 씻겨주시는 예수님의 손길을 경험하고 우리들도 예수님 말씀대로 이웃을 섬길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河-

예수님의 손길 (1) :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배우며 자라가는 교회”라는 표어대로 우리 모두 올 한 해 동안 많이 배우고 신앙이 자라가길 바랍니다. 기독교인들의 배움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에게서 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세상에 오신 목적을 다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으신 대속(代贖)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구원은 우리들이 흉내조차 낼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3년 동안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계셨고 마지막 3년은 메시야로서 공생애(public life)를 사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몸을 입고 지내신 예수님의 사역과 삶은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배움의 본(本)입니다. 배우며 자라가는 교회라는 표어에서 배우는 것은 곧 예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앞으로 몇 주간 동안 예수님에 대한 배움 특히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의 손길이 주는 교훈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쳐주시는 장면입니다. 산상수훈을 마치고 내려오셨을 때 이미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전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때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와서 자신을 깨끗하게 고쳐주시길 간청합니다. 나병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전염성이 강합니다. 접촉을 통해서 전염되는 질병입니다. 나병환자는 격리 수용되었고 일단 저주를 받아서 병이 걸렸다고 생각해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서 그를 만지시면서,“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3절)며 고쳐주셨습니다. 말씀만 해도 고치실 수 있었을 텐데 나병환자의 병든 몸을 만져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손길이 외롭고 힘겨운 인생을 살았던 그 사람에게 닿았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의 경우처럼 몸에 손을 대신 사건들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소경을 고치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침을 뱉어서 진흙을 이기신 다음에 그것을 눈에 발라주시면서 실로암 못가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손길이 소경의 눈에 닿은 것입니다. 마가복음 7장에는 더 극적인 사건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와서 손을 얹어 안수해 주기를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가서 손가락을 귀에 넣고, 침을 뱉어서 혀를 만지면서 하늘을 보고 탄식하면서“에바다(열려라)”하고 외치셨습니다. 그때 그 사람의 귀가 열리고 입이 열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을 앓고 세상에서 인간취급을 받지 못하던 사람들의 몸에 손을 대면서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손길이 닿으면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치유와 회복을 넘어서 새 생명이 임했습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손길을 사모하기 원합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어렵고 힘겨운 이웃들의 손을 꼭 잡아 줄 수 있는 작은 예수의 삶을 살기 원합니다.-河-

배우며 자라가는 교회 (3) : 말씀먹기

성경을 생명의 양식이라고 부릅니다. 생명의 양식이라는 말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첫째는 생명입니다. 실제로 요한복음 20장 30-31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또한 그를 믿음으로 그의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제가 성경공부 시간에 생명에 괄호를 치고 그 안에 들어갈 단어를 맞춰보길 부탁드리면 대개‘구원’또는‘영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의미로 보면 틀린 답이 아니지만 요한복음에서는“생명(life)”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생명의 양식에서“양식”은 말 그대로 먹을거리입니다. 목숨을 부지하는데 필요한 음식입니다. 성경을 생명의 양식이라고 했을 때 성경이 영적인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음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먹는다는 표현을 자주 씁니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은 자세히 읽어야 합니다. 연애편지 읽는 것처럼 읽고 또 읽어야 합니다. 상상력을 동원하고 행간에 깃든 의미까지 찾아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메시지를 포착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성경을 먹어야 합니다. 성경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고 신앙과 삶 속에 내면화 시키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도 하나님 말씀을“맛”에 비유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그것을 사모하는 자에게 송이꿀보다 더 달다고 고백합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1) 영혼을 새롭게 살려내고, 2) 우둔함에 지혜를 더하고, 3) 마음을 기쁘게 하고, 4) 눈을 밝게 하고, 5)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시 19:7-10). 이것은 단순히 이론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한 하나님의 사람이 체험을 토대로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맛보고 그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는데 꼭 필요한 것이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오래전부터 렉치오 디비나(거룩한 독서)라는 성경읽기와 묵상방법을 만들어서 실천했습니다. 렉치오 디비나는 네 가지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먼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하나님 말씀을 차근차근 꼼꼼히 읽는“읽기(렉치오)”입니다. 두 번째로 읽은 말씀을 마음으로 곱씹는 묵상 (메디타티오)입니다. 묵상은 말씀을 마음속 깊이 새기는 작업입니다. 세 번째는 읽고 묵상한 말씀을 붙들고 입술로 기도하는 것입니다(오라티오).말씀이 살아서 역사하길 기도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갖고 자신은 물론 이웃과 세상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말씀을 받았으니 이제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말씀 안에서 쉼을 얻는 안식입니다 (콘템플라티오). 안식은 말씀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 동안 자신이 말씀을 읽었다면 이제부터는 말씀이 자신을 읽도록 말씀 앞에 자신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집착이나 이기심을 내려놓고 말씀 앞에서 온전히 평온함을 경험하는 시간입니다.

매일같이 위의 네 가지 단계를 모두 실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말씀을 자세히 읽고, 마음에 깊이 다가온 말씀을 꼭 붙잡고 기도하고, 마음에 새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일입니다. 그때 살았고 힘이 있는 하나님 말씀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은혜와 능력이 우리 교회와 모든 성도들 위에 임하길 간절히 바랍니다.-河-

배우며 자라가는 교회 (2) : 말씀읽기

“배우고 자라가는 교회”라는 올해 우리 교회 표어를 실천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통한 배움과 자라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의 양식인 성경을 읽고 먹어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고, 나누고, 경험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인 히브리서 4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말씀이 살아서 움직이는 힘이 있고, 말씀이 우리를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좌우에 날이 선 검보다 더 예리하다고 했습니다. 옛날 로마시대에 양날이 선 검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보장할 정도로 대단한 무기였습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 말씀을 ‘검’에 비유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강력한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의 상한 골수와 영과 관절을 찔러서 폐부를 드러내고 새롭게 해줍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은 단순히 글자(letter)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영(spirit)입니다(고후3:6).

성경을 어떻게 읽으면 이 말씀이 글자가 아닌 영이되고 살아서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을까요? 다음의 몇 가지 방법을 배우고 익히시면 성경 말씀이 마음에 더 깊이 다가오고, 살았고 운동력있는 하나님 말씀을 체험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성경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연애편지임을 깨닫고 젊은 시절에 받았던 연애편지를 읽듯이 읽는 것입니다. 연애편지 속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 들어있어서 연애편지를 읽을 때는 그 마음을 헤아리려고 애를 씁니다.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반복해서 자세히 읽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을 읽을 때에도 말씀 속에 깃든 하나님의 마음을 포착하려고 애를 쓰면서 읽어야 합니다.

둘째, 성경을 읽을 때는 마음에 다가오는 구절이나 표현들에 줄을 긋거나 따로 메모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어서 금세 잊어버립니다. 줄을 그어놓으면 나중에 다시 찾아보기 쉽고, 읽은 말씀을 따로 기록하다보면 그 순간 말씀이 마음에 새겨집니다. 말씀을 눈으로 읽지만 그 말씀을 마음에 새겨놓아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을 읽는 것과 동시에 성경을 쓰시는 것도 적극 권장합니다. 어떻게든지 읽은 말씀을 마음속에 소중히 담아놓아야 합니다.

셋째, 말씀을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반복해서 읽으셔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은 읽을 때마다 새롭습니다. 개역성경으로 읽는 것과 새번역으로 읽는 맛이 다르고, 한글 성경으로 읽을 때와 영어 성경으로 읽을 때가 다릅니다. 같은 말씀을 읽어도 연초에 읽는 말씀과 연말에 읽는 말씀의 맛이 다릅니다. 말씀은 우리의 상황과 마음가짐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에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한번 읽고 마는 것은 식사를 한번 만 하고 그만두는 것과 똑같습니다.

넷째, 매일같이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성경읽기에서도 폭식을 조심해야 합니다. 한꺼번에 많이 읽는 것보다 매일같이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경건의 시간(큐티)을 가지시면 제일 좋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는 시간을 따로 떼어놓고,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습관화되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읽을 때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내 눈을 열어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119:18)라고 기도하면서 말씀을 읽을 때 성경이 생명의 양식임을 경험하게 됩니다. 2014년 한 해 동안 하나님 말씀을 자세히/깊이 읽으면서 주님의 사랑을 느껴봅시다. -河-

배우며 자라가는 교회 (1) : 배움

올해 우리 교회의 키워드는 “배움”입니다. 만물 가운데 사람은 가장 미숙한 상태에서 태어나서 완전히 성장하고 성숙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 가운데 배우고 익히는데 상당 부분의 시간을 할애합니다. 초중고등학교를 마치는데 20년이 소요되고 요즘은 대학교육까지 의무처럼 되었으니 학습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특징임에 틀림없습니다. 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을 살면서 배워야 합니다.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배워야 하고, 성숙의 길로 나가기 위해서 배움이 꼭 필요합니다. 오죽하면 평생교육이라는 말이 나왔겠습니까?

배움에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저절로 배워지는 것은 거의 없고 에너지를 들이고 때로는 물질을 투자해서 배워야 합니다. 노력하는 것만큼 많이 배울 수 있습니다. 배움에는 열매가 있습니다. 배우는 것이 힘들고 때로는 지겨운 마음이 들지만 배움의 끝에는 보상이 있습니다. 또한 배움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알지 못하던 것을 깨우치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기쁨입니다. 무엇보다 배움이 깊어지면 인격이 성숙해지고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을 배우는 학생으로 살아야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기독교는 책의 종교라고 말할 정도로 성경의 권위를 강조합니다. 기독교의 모든 교리들은 성경에 들어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열심히 읽고 공부해야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 호세아는 하나님을 힘써 알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배움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의 손길과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체험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쌓여갑니다.

올 한해 우리의 배움이 깊어지고 넓어지길 원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을 배우는데 열심을 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성경 일독(一讀)을 권합니다. 일정한 시간을 떼어놓기로 마음먹으면 어렵지 않게 하실 수 있습니다. 앞으로 교회에서 제공하는 성경공부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공부는 함께 할 때 효과가 배가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는 습관을 들이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꼭꼭 씹어서 자신의 것으로 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대로 행함으로 말씀의 능력과 은혜를 깊이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배웠다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을 보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자연 속에 하나님의 마음과 손길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섭리에 따라 움직이는 자연이야말로 성경 다음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스승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족, 성도들, 그리고 이웃에 대해서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족과 이웃을 우리의 스승으로 보내주셨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살아있는 책인 셈입니다. 겸손하게 그리고 마음을 열면 최고의 스승들이 가정에 교회에 그리고 우리들 주변에 있음을 발견합니다. 무엇보다 참빛 교회 식구들 간에 풍성한 교제와 깊은 배움이 있길 원합니다. 서로에게 배우고, 서로를 북돋아주면서 예수님을 닮기 위해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올 한 해 배우고 자라가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풍성함을 누리는 참빛교회 식구들 되시길 바랍니다. -河-

잠언이 주는 교훈 4 : 인도하심

올해의 마지막 달에 잠언을 한 장씩 읽으면서 지내기로 했는데 한 달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한 달 뿐만 아니라 2013년도 이틀 남았으니 이제 새해를 준비할 시간입니다. 잠언 말씀의 핵심은‘여호와를 경외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실제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경외함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섬기고 갈망하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잠언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길을 인도하시고, 그의 인생을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새해를 맞으면서 더욱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기로 결심하고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갈망하기 원합니다.

잠언 말씀에서 강조하는 것이 언어생활이라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이번 주에 읽은 말씀에도 말에 대한 교훈이 계속 등장했습니다. 미련한 사람에게 조언을 해봐야 지혜로운 자의 말을 무시할 것이니 조심해야 한답니다(잠23:9). 정직한 말을 하면 마음이 기쁘고 가벼울 것이라고 했습니다(잠23:16). 적당한 말로 대답하는 것은 입맞춤처럼 하나 됨을 이루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잠24:26). 이웃과 분쟁이 생기면 자기변명을 그치고 남의 비밀은 누설하지 말아야 합니다(잠25:9). 경우에 맞는 말은 금으로 아로새겨진 쟁반에 들어있는 사과와 같다고 했습니다(잠25:17).

잠언 후반부로 오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신을 자랑하지 말라는 하나님 경외가 다시금 강조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해서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구체적인 지침을 얻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 말씀은 순전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방패가 됩니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외부로부터 공격을 당할 때 하나님 말씀이 우리를 지켜줍니다.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 말씀을 읽고 그대로 따르면 어려운 일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와 힘을 얻습니다. 결국 잠언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생길을 인도해주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겸손하게 구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길이 여호와 앞에 있다고 했습니다(잠5:21). 사람이 보기에 좋아 보이지만 그것이 사망의 길이 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잠14:12). 사람이 마음으로 길을 계획할 찌라도 그 길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잠16:9). 사람이 가는 길을 하나님만 아신다고 가르쳐줍니다(잠20:24). 사람이 자신의 앞길을 모두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그것을 입술로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 백성들의 입의 말입니다.

우리는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습니다. 자신의 과거를 자랑하고 앞길을 두고 자신만만할 수 있지만 처음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새옹지마(塞翁之馬)와 같은 인생길입니다. 인생의 부귀영화를 모두 경험한 솔로몬의 가르침이니 진리일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앞길을 훤히 내다보시고 약속 가운데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인생 여정의 운전대를 맡기는 것입니다:“하나님, 주님 뜻대로 인도해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이 최선의 길임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면서 또 한 해를 맞이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시139:17-18).아멘! -河-

잠언이 주는 교훈 3 : 입술의 말

생명나무가 잠언에 등장하는 것이 뜻 깊습니다. 잠언을 두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의 생활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잠언에 나오는 말씀들을 지킬 때 이 세상에서도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음을 생명나무에 대한 말씀을 통해서 깨닫습니다. 한걸음 더 나가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주님의 백성들이 지속적으로 생명의 삶을 사는 방법을 잠언을 통해서 배웁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지혜를 추구하고, 하나님을 소망하면서 마음에 소원을 이루어갈 때 잠언의 생명나무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잠언에 나오는 마지막 네 번째 생명나무는 온순한 혀였습니다.:”온순한 혀는 곧 생명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잠15:4). 여기서는 온순한 말과 패역한 말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온순한 말의 의미 속에는 부드러운 말이라는 뜻과 동시에 치유의 말이라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힐링”이 언어를 통해서 가능하고 그때 우리의 말이 생명나무가 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패역한 말은 속이는 말입니다. 한 군데로 치우친 고집스러운 말입니다. 이런 말이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상황을 구부러뜨려서 오해를 사고 혼란을 야기합니다. 온순한 혀 즉 부드러운 말이 생명나무라는 말씀을 통해서 언어생활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웁니다. 말이 생명나무가 되기도 하고,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치명적인 공격무기가 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합시다.

잠언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고스란히 받고 지켜 행할 것을 부탁합니다. 지혜의 말입니다. 하나님 백성이 마땅히 따라야 할 지침입니다.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주는 구원의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어리석은 말을 삼가라고 교훈합니다. 어리석은 말은 분별력이 없는 말입니다. 경우에 맞지 않아서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고, 관계를 끊어놓습니다. 무엇보다 어리석은 말은 진실 되지 않고 행함이 뒷받침되지 않은 헛된 말입니다.

잠언뿐만 아니라 세상에서도 “말”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하이데거라는 철학자는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의 삶이 언어를 통해서 형성되고 말을 통해서 우리들의 존재와 삶이 설명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언어에는 창조력이 있고, 구속력이 있고 일을 이루게 하는 에너지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어떤 말을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인생길이 갈립니다. 언어사용이 삶을 새롭게 합니다. 새로운 세상을 열어줍니다. 언어에는 구속력이 있어서 일단 밖으로 나온 말을 뒤돌릴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개인의 경우 인생을 이루는 힘이 말을 통해서 생겨나고, 사회의 경우도 말을 통해서 힘이 응집되고 공동체의 대의(大義)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처럼 언어생활은 신앙은 물론 사회생활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잠언 18장 12절에서는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다고 말합니다.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죽고 사는 문제가 판가름 난다니 언어생활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습니다. 언어는 훈련이고 습관입니다. 하나님의 말을 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살리는 말을 하기 원합니다. 매일 쓰는 일상적인 말을 통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이웃을 살리는 놀라운 경험을 하기 원합니다.-河-

잠언이 주는 교훈 2 : 생명나무

성경에서 눈에 띠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생명”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누리는 최상의 축복은 죽음을 극복하고 영원히 사는 영생(eternal life)을 얻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과 생명을 동일시합니다:“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유명한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도 하나님께서 세상을 무척 사랑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다고 선포합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하신 목적도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이처럼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을 얻었고, 생명을 누릴 특권이 있습니다.

생명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표현이 오늘 우리가 살펴볼“생명나무”입니다. 성경에서 생명나무라는 표현은 창세기와 요한 계시록, 그리고 우리가 읽고 있는 잠언에만 나옵니다. 창세기에서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가운데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심어놓으셨습니다.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선과 악을 판단하실 분도 하나님이심을 피조물인 인간에게 가르쳐주시고,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는 표시였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이브가 뱀의 꼬임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이들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먹고 하나님처럼 영생을 얻을까해서 불꽃이 나오는 검으로 생명나무를 지키게 하셨습니다(창3:22).

창세기 이후로 생명나무에 대한 말씀이 나오지 않다가 잠언에 와서 네 번 등장합니다. 첫째는 지혜가 그것을 얻는 사람에게 생명나무가 됩니다. 지혜가 곧 생명이라는 것입니다(잠3:18). 신약성경에서 지혜는 예수님과 동일시되곤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고 확대해석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의인이 맺는 열매가 생명나무라고 말합니다(잠11:30). 구약 성경에서 의인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을 믿을 때 의롭게 된다고 가르쳐줍니다. 그렇다면 의인의 열매가 생명나무라는 말씀도 성경 전체의 주제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셋째로 오늘 본문입니다. 소원을 이루는 것이 생명나무라고 했고 마지막 네 번째는 온순한 혀가 생명나무라고 했습니다. 입술의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우쳐줍니다(잠15:4). 이처럼 잠언에 나오는 생명나무는 신약성경의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확장되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창세기에서 시작되었던 생명나무에 대한 말씀은 성경의 마지막인 요한계시록에 네 번 나옵니다. 그것도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고, 새롭게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설명할 때 등장합니다. 구원받는 자들, 믿음을 끝까지 지킨 자들에게는 생명나무 열매를 먹게 하십니다(계2:7). 하늘나라에는 생명나무가 심겨져 있고 그 잎사귀들은 치료의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계22:2). 하나님께서 악을 심판하시고 의인을 구원하시는 목적이 생명나무의 회복입니다. 창세기에서 잃어버린 낙원을 다시 찾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생명나무를 소망하고, 잠언에서 배운 생명나무의 법칙을 일상생활 속에서 적용하면서 이 땅에서도 하늘나라를 경험하기 원합니다. -河-